2024년 10월 1주차 |
BOOK SUMMARY | ||
삶은 공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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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빌 해맥 (지은이), 권루시안 (옮긴이) 출판 윌북 출간 2024.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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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한 세상에서 최선의 답을 찾는 생각법 | ||
도서요약 보기삶은 공학 수학도 과학도 자도 없이 대성당을 짓는 법 중세 도시의 무질서 속에서 대성당 건축 현장은 놀랍도록 질서 있는 곳이었다. 교회 건물의 규칙적인 비례와 깨끗한 석재는 더러운 주위 환경과 대비되었다. 건축 현장의 바깥 주변은 진흙과 쓰레기, 부서진 도자기, 썩어가는 고기, 인간의 배설물로 뒤범벅이었는데, 인간의 끊임없는 활동이 남긴 찌꺼기였다. 도시에는 수천 명의 사람이 복닥복닥 모여 살았다. 농부들은 곡물이나 달걀, 우유, 치즈를 넘치도록 실은 마차를 매단 짐말을 부렸고, 양치기들은 양떼와 소떼를 몰고 시장으로 향했다. 종종 아이들은 이런 난장판을 피해 건축 중인 대성당 건물 벽을 타고 올랐다. 관청에서 근처에 빙 둘러 가시덤불을 설치해 두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러한 도시 풍경 속에서 작업 현장도 온갖 활동으로 북적거렸지만, 여기서는 도편수의 지시에 따라 질서가 유지되었다. 도편수는 다섯 가지 역할을 맡았는데, 오늘날로 치면 공학자, 건축가, 자재 조달업자, 건설업자, 건설 감독자였다. 도편수가 관리하는 100명 넘는 인원은 현장 여기저기에 흩어진 채 온갖 소음을 만들어냈다. 대장장이가 숫돌에다 정을 뾰족하게 쓱쓱 가는 소리, 도구를 때려 만드는 동안 화로에서 나는 쉭쉭 소리, 배관공이 망치로 납을 땅땅 두들겨 처마와 홈통 모양으로 다듬는 소리, 돌 블록용 거대한 기중기를 움직이는 황소를 인부가 찰싹 채찍질하는 소리, 돌 블록을 쌓아 올리는 동안 필요한 비계를 세우기 위해 목수가 서걱서걱 널빤지를 톱질하는 소리까지. 참고로 대성당 한 채를 완공하기까지 사용되는 목재는 무려 약 4000그루였다. 대성당 건축을 맡은 석수는 그처럼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건축물을 안전하고 경제적으로 건설하기 위해 아치를 떠받치는 벽 두께를 정확하게 설정해야 했다. 너무 얇으면 아치 무게 때문에 벽이 휠 것이고, 너무 두꺼우면 석재가 낭비되고 대성당 내의 탁 트인 공간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벽 두께를 정하기 위해 도편수는 고대 후기 때부터 전해내려온, 로마의 판테온과 이스탄불의 아야소피아를 세운 법칙을 사용할 필요가 있었다. 벽 두께가 아치 폭의 5분의 1을 약간 초과할 때 안정적인 아치가 만들어진다는 법칙이다. 그렇지만 도편수는 치수 비례 계산은 고사하고 문자도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숫자가 표시된 자 없이, 유클리드 기하학도 없이 가장 기본적인 수학만을 가지고 이 법칙을 적용했다. 도편수는 끈을 마치 아치 자체에다 걸친 것처럼 아치 본을 따라 늘어뜨렸다. 그런 다음 한쪽 벽에서 아치의 곡선을 따라 올라갔다가 꼭짓점을 지나 반대쪽 벽까지 아치 전체의 길이와 같도록 끈을 잘라냈다. 그리고 이렇게 자른 끈을 직선으로 놓고 세 등분이 되게끔 접은 뒤 그곳을 색분필로 표시했다. 이제 3등분으로 표시된 끈을 다시 원래의 아치 본에 놓고 아치를 따라 늘어뜨렸다. 그다음 끈의 분필 표시대로 아치 자체에다 핵심 지점이 될 곳 두 군데를 표시했다. 각기 아치 꼭짓점으로부터 양쪽으로 약간 내려온 지점이었다. 끈의 분필 표시가 된 지점을 핀으로 고정한 다음, 끈 양쪽으로 나머지 3분의 1부분을 직선이 되도록 팽팽하게 당겨 아치와 지지벽이 만나는 지점에 오게 했다. 이 선분의 길이와 선분의 경사각이 법칙의 핵심이었다. 석수는 이 선분과 똑같은 길이의 끈을 따로 잘라 원래 선분과 일직선이 되도록 그 끝에 이어놓았다. 이렇게 이어진 두 선분이 석수의 머릿속에 있는 직각삼각형의 빗변이 되었고, 그 삼각형의 가장 짧은 밑변이 그가 찾는 최종 수치인 아치를 떠받치는 벽의 두께가 될 것이었다. 아마도 그는 빗변과 밑변이란 단어는 평생 들어본 적이 없었겠지만, 이후 몇 세기 내내 안정성이 보장되는 수치를 간단하기 그지없는 수학 계산조차도 동원하지 않고 알아낸 것이다. 이러한 법칙은 석수 한 명이 평생토록 건물을 지으면서 쌓은 직관에서 생겨난 것들이었다. “너 자신의 좋은 생각을 활용하라.” 어느 도편수는 아들을 가르치며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전형적으로 쓰인 한 가지 판단 방법은 블록으로 쓸 석재의 품질 평가 방식이었다. 약한 암석층이 끼여 있는가? 망치로 톡톡 두들길 때 부서지거나 금이 가는가? 몇 주 동안 물에 노출시켰을 때 블록이 약해지는가? 품질이 뛰어난 석재를 사용할 때는 위에서 계산한 두께에서 7.6센티미터 정도를 뺐고, 약한 석재라면 7.6센티미터를 더했다. 도편수는 시공 도중에 수정을 가할 수도 있었다. 만일 움직이거나 흔들리는 돌이 눈에 띄면 다른 모양의 돌로 교체했다. 또는 마른 모르타르를 점검하여 응력 때문에 균열이 생긴 곳이 있는지를 살핀 다음 구조를 보강하기도 했다. 바로 이것이 공학적 방법이다. 이 방법은 체계적이고 실행 가능한 문제 해결 과정이자, 인류 세계를 창조한 힘이다. 13세기 프랑스 석수가 이 힘을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다음과 같이 가장 기본적인 형태로 공학적 방법을 정의할 수 있다. 불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경험칙을 활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것. 실제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경험의 힘 경험칙의 공식적인 용어는 ‘발견법(heuristic)으로,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내기 위한 지름길로서 사용되는 부정확한 방법을 뜻한다. 이는 너무나 오래전부터 널리 퍼져 있는 발상이어서, 사실상 모든 언어권에 이에 해당하는 단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신기하게도 신체 부위와 관련된다. 프랑스어로는 코(‘르 피프), 독일어로는 주먹(‘파우스트레겔), 일본어로는 ‘눈대중, 러시아에서는 ‘손가락으로이다. 이런 용어는 모두 간단한 상식을 길잡이 삼아 추정하는 부정확한 방법을 나타낸다. 정의에 따르면 경험칙은 “비교적 구조화되지 않은 방법”을 동원하여 결과를 이끌어낸다. 이는 문제 해결에 그럴 법하게 도움이 될 수 있으나, 과학이나 철학 관점에서는 결과 말고는 무엇으로도 뒷받침될 수 없는 까닭에 정당화되지 않는 모든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사전적 정의는 재미도 없고 딱히 명료하지도 않다. 경험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가진 다음 네 가지 특징을 알아두는 쪽이 더 낫다. 체스를 잘 두는 방법으로 알려진 “체스판의 중앙을 지배하라”라는 경험칙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겠다. 첫째, 경험칙은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 데 필요한 시간과 노력을 줄여준다. 체스 기사는 최대한 많은 갈래의 구체적 시나리오에 맞춰 계획을 세울 수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체스판 중앙 공간을 차지하도록 말을 움직인다면 그 대부분의 경우 세세한 부분 때문에 고민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둘째, 경험칙은 주어진 변수 안에서 성공 확률을 확보해 주지만,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체스판의 중앙을 지배하는 선수가 게임마다 이기는 것은 아니지만, 취미로 체스를 두는 사람이 이 법칙에 신경을 쓴다면 이 법칙을 무시하는 상대를 이길 가능성이 더 클 것이다. 셋째, 경험칙은 같은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되는 다른 경험칙에 위배되는 동시에 유효성을 유지할 수 있다. 즉 체스 선수가 체스판 중앙에 대한 지배력을 포기하게 된다 해도 “나이트를 위한 전초 기지를 확보하라”나 “비숍을 대각선 위치에 유지하라” 같은 경험칙을 기억해 이길 수도 있다. 넷째, 경험칙은 절대적 기준을 거부한다. 경험칙은 문제가 갖는 맥락에 따라 적용하고 판단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런 만큼 추상적으로나 객관적으로 따질 때는 덜 유용하거나 심지어 의미가 없어질 수도 있다. 체스 이론가는 “체스판 중앙을 지배하라”가 “게임 후반을 위해 킹의 수를 아껴라”보다 더 나은 경험칙이라고 말할 확실한 근거를 찾지 못한다. 체스 선수는 이제까지 지키던 모든 법칙이 스피드 체스를 두려고 하자 갑자기 쓸모가 없어지는 상황을 맞이하기도 한다. 경험칙은 여럿이 공존할 수도 있고 쉽사리 내다 버릴 수도 있다는 점에서 과학적 방법과 차이가 드러난다. 경험칙의 가치는 과학 이론과는 달리 다른 경험칙과의 대립을 통해 확립되지 않는다. 뉴턴의 이론을 대체한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생각해보자. 뉴턴은 공간과 물질은 절대적이며 불변하다고 상상했다.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단단한 물체의 길이는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 그렇지만 아인슈타인은 물체가 움직일 때 길이가 줄어든다는 것을 증명했다. 기회가 주어져 우리가 빛에 가까운 속도로 움직인다면 이 현상을 정확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만으로도 아인슈타인의 복잡한 방정식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원리가 발견되면서 뉴턴의 이론은 틀렸음이 입증되었고, 그는 역사적으로는 존경받지만 이론물리학자로는 인정받지 못했다. 반면에 중세기 석수의 비례 법칙은 한 번도 틀렸음이 입증되지 않았다. 대성당 아치는 오늘날에도 그 증거로 남아 있다. 그 법칙을 과거에 남겨둔 계기는 그저 물질 세계였다. 시대가 바뀌어 철과 강철이 발달한 결과였다. 달리 말해 과학적 방법과 공학적 방법은 목표가 다르다. 과학적 방법은 우주에 관한 진리를 드러내고자 한다. 반면 공학적 방법은 실제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과학적 방법에는 정해진 과정이 있다. 질문을 내놓고, 관찰하고, 가설을 세우고, 시험하고, 분석하고, 해석하는 순서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무엇이 발견될지, 어떤 진리가 드러날지는 모른다. 그와 달리 공학적 방법에는 ‘대성당을 세운다는 구체적 목표가 있지만 정해진 과정은 없다. 공학적 방법은 반드시 따라야 하는 정해진 절차로 압축할 수 없다. 공학적 방법의 힘은 바로 이 ‘반드시라는 것이 없다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목표에 다다르기 위한 올바른 전략을 찾아내고, 많은 경험칙 중에서 고르고 결합하여 해결책으로 이어질 새로운 경험칙을 만들어내는 것이 공학자의 기술이다. 경험칙의 결과물은 대부분 어떤 양을 추정하는 수치이지만, 문제 해결을 위한 접근 방법으로 안내하기도 한다. 후자가 어떤 부류의 법칙인지 잘 보여주는 좋은 말이 있다. “복잡한 문제는 다룰 수 있는 크기의 작은 조각으로 나누어라.” 공학적 방법은 문제를 대하는 태도 또는 접근법, 또는 나아가 그 해법을 만들어내는 철학이라고 묘사하면 가장 쉽다. 한 번의 발명이 세상을 바꾼다는 착각 에디슨이 최초로 제대로 작동하는 시작품을 내놓기 전 40년 동안 적어도 20명의 사람이 전기로 필라멘트를 가열하여 빛을 내는 백열등을 발표하고 특허를 내고 시연했다. 최초의 기록은 에디슨이 태어나기 거의 10년 전인 1838년 어느 벨기에인 발명가의 시도다. 그의 전구에는 탄소 조각이 필라멘트로 사용됐다. 공정하게 평가한다면 그와 그 이후 발명가들 또한 에디슨 못지않은 전구 발명자라 할 것이다. 소위 백열전구 발명자라는 에디슨이 그보다 40년 늦게 백열등이라는 발상을 접한 세계에서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에디슨 경우와는 달리 우리는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다. 이들의 전구는 대부분 몇 초밖에 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이 맡은 역할은 누군가는 해야 하지만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것이다. 어둠을 밝히려면 오직 불을 쓰는 방법뿐, 재사용 가능한 실용적인 방법이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조금씩 발전하며 나아가는, 사슬의 중간 고리가 되는 역할이었다. 그러다가 에디슨이 완전히 어둠을 몰아내는 사슬고리를 만들면서 방법을 서사로 탈바꿈시켰다. 에디슨과 그의 전구는 혁신자들이 이어온 기다란 사슬의 마지막 고리이다. 그의 고리는 그 이전에 실행되거나 선보인 공학적 방법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저 상황에 따라 쓸모라는 문턱을 넘었을 뿐이었다. 대체 누가 전구를 밝혔나 에쿼터블라이프 빌딩에 설치된 맥심의 전구는 에디슨의 전구를 훨씬 능가했다. 어느 기자는 그의 전구를 두고 “양초 심지 불빛과 비슷한 풍부한 황금빛 색조를 띤다”고 보도했다. 또 다른 사람은 “맥심이 에디슨은 꿈도 꾸지 못할 정도의 전등을 발명했다”고 말했다. 기자들은 전등을 비교하며 에디슨의 전구는 맥심 것보다 밝기가 떨어진다거나, 맥심 것과 밝기가 같을 때는 겨우 몇 시간 만에 타버렸다고 지적했다. 맥심이 추정한 바에 따르면, 그의 전구에 사용된 필라멘트는 40일 동안 사용할 수 있었다. 에디슨의 전구가 어둡고 수명이 짧다는 것은 한 가지 의미뿐이었다. 에디슨의 전구는 맥심 것만큼의 전류를 감당할 수 없었고, 그래서 같은 크기의 전류를 가하면 에디슨의 전구는 빠르게 타버릴 것이었다. 더 오래 사용하기 위해 에디슨은 전구에 더 낮은 전류를 가했다. 그래서 더 어두웠던 것이다. 맥심이 전구에 기여한 부분은 필라멘트 제조 방법 개선이다. 대나무로 만든 것이든 맥심의 전구처럼 판지로 만든 것이든, 필라멘트는 산소가 없는 상태에서 고온으로 가열한다. 이때 재료 속의 셀룰로스가 탄화하여 단단한 탄소 뼈대만 남는다. 그러나 고르지 못한 탄화 때문에, 전류로 불을 밝히면 상대적으로 얇은 부분이 훨씬 더 뜨거워지고 더 빨리 타버렸다. 맥심의 묘안은 탄화한 필라멘트를 탄화수소 대기 안에 두고 전류를 가해 필라멘트가 빨갛게 달궈지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필라멘트에서 더 얇은 부분이 더 뜨거워지면 그 주변의 탄화수소 증기가 분해되어 순수 탄소가 필라멘트에 정착된다. 이처럼 얇은 부분에 탄소층이 덧입혀지면서 두께가 고르고 수명이 더 긴 필라멘트가 만들어진다. 흡족해진 맥심은 특허를 낸 자신의 이 방법 없이는 “저항이 고른 탄소 필라멘트를 기계적으로 만들기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하면서, “에디슨으로서는 나의 공정을 이용하지 않으려면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맥심의 태도는 전기 조명이라는 마법을 갈망하는 세계에서 경쟁하는 수많은 공학자 사이에서 타오르는 경쟁의식의 발로였다. 그러나 이는 또한 어떤 기술이든 그것을 완전히 ‘발명한 공로를 한 개인에게 돌리는 데는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시작과 전개와 결말이 있는 이야기의 절정에서 독보적인 지성과 추진력으로 남이 따를 수 없는 뛰어난 경이를 만들어내는 발명자 한 사람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는 경향이 있다. 종종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방식이기도 한데, 이는 개인이 다른 개인 이야기를 접할 때 느끼는 공감욕구를 존중한다는 뜻에서이다. 그러나 공학적 방법은 이 ‘위인이라는 역사적 틀에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누적된 지식, 발견법, 경험칙, 직관, 그리고 무엇이든 문제를 될 수 있는 대로 빠르게 해법 쪽으로 몰아가는 원동력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설사 단 한 개의 해법을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들을 모두 홀로 직접 만들어낸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관련된 정보의 그물은 너무나 광대하고 방대하여 파악이 불가능할 정도다. 그래서 우리는 한 사람의 발명자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그 과정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또 감동하게 만든다. 그 때문에 저 알 수 없는 발명의 진정한 관계망이 왜곡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한다. 맥심은 오늘날 발명자로서 크게 인정받지는 못한다. 그에게는 에디슨 같은 민첩한 자기 홍보 능력이 없었고, 또 어떤 면에서 에디슨이 ‘승리하여 자신의 전구 발명 이야기를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에디슨이 자기 회사에서 찬란하게 빛을 내지만 수명이 짧은 전구를 만들었을 때 그것을 ‘발명이라 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럴 수 있다. 발명된 기술에 대해 생각할 때 일반적으로 우리는 존재하는 기술을 의미할 뿐 아니라 그것으로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하는 방식으로 재현할 수 있는 기술을 의미한다. 제조 또는 대량 생산될 수 있다는 뜻이다. 1800년대 말 제대로 동작한 전구 몇 개는 경이로웠지만, 사람들이 필요로 한 것처럼 세계를 밝혀주지는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전구 발명은 10년 동안 이어진 과정에서 에디슨과 맥심을 넘어 안정적으로 제조되고 확장될 수 있는 필라멘트를 만들기 위한 점진적 변화였다. ‘위인 한 사람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기술 개발에 필요했던 사람들의 기여가 드러나지 않는다. 변화는 한 단계씩 이루어진다 단독 발명자라는 통념의 어떤 점이 나쁠까? 제품이나 기술이 진화한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이런 통념은 공학적 방법을 가려버리고 모든 공학적 경이에는 그 뿌리에 과학적 혁신이 있었다는 관점을 부추긴다. 그럼으로써 공학자가 제품을 빠르고 안정적으로 대량 생산해야 할 필요와 대량 제조에 따른 제약 조건에 대응하여 더없이 우아하고 명석하며 나아가 숭고하기까지 한 창의력을 발휘하는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둘째, 방법 자체만 가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까지도 가려버린다. 한 제품의 발전을 연구한다는 것은 그 개발 과정에 관여하였으나 공로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 주로 여성이나 유색인종 등을 무대 위로 끌어올려 공학적 창의력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조명하는 것과 같다. 우리 중 루이스 래티머라는 사람에 대해 들어본 사람은 거의 없지만, 그의 업적은 상품화 이후 10년 동안이라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기간에 전구의 신뢰성을 높였다. 천재 발명자 한 사람만을, 주로 백인 남성을 공학의 얼굴로 바라보는 것은 다음 세대에게 공학은 창의적 노력이자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직업임을 보여주지 않으며, 이는 우리 세계가 직면한 긴급한 문제 해결을 위해 일하는 사람 수를 줄이는 결과로 이어진다. 발명을 단독 발명자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생각하면 모든 문제를 획기적인 약진 하나로 정복한다는 오류로 이어진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발명은 셀 수 없이 긴 세월 동안 놀라운 혁신과 끈질긴 노력 모두를 통해 이루어낸 발전이 수없이 쌓인 결과 하나의 절정에 다다랐을 뿐이다. 이 장에서 초점을 제조에 맞춘 것은 성공적 발명과 그렇지 못한 발명 사이의 차이는 제조 가능성에 있다는 사실을 부각하기 위해서다. 소수 인물이 명성과 역사적 악명을 휩쓸 수 있는 병목 구간은 대량 제조가 가능한 설계에 성공하는가에 달려 있는 때가 많다. 현재도 이 병목을 통과하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는 혁신은 무수히 많다. 에너지 분야의 수많은 혁신이 적절하지 않은 생산 방법 때문에 멈춰 서 있다. 대형 실리콘 패널을 대체하여 두 배의 효율로 태양으로부터 전력을 모으는 새로운 재료가 연구소에서 개발되었지만, 이 신소재 패널은 아직 대량으로 제조할 수 없다. 어느 기사에 따르면 이 패널은 “상품화와 엉터리의 기로에 서 있다.” 수소로 구동되는 세계의 고뇌가 커지는 것 역시 제조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수소가 반응하여 무해한 물과 산소로 바뀐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지만, 그럼에도 공학자는 수소를 뽑아내기 위해 에너지가 풍부한 메탄을 폭발적으로 분해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수소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시급한 에너지 생산 문제를 풀어낼 수 있는 이런 해법은 지금으로서는 에디슨의 필라멘트와 같은 교착 상태에 빠져 있다. 그중 많은 수가 다음 단계로 나아갈 기회를 얻지 못하겠지만, 우리는 이제 뭔가가 발명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이해함으로써, 공학적 방법을 지금 적용하는 수많은 사람에 의해 미래가 지닐 수 있는 모습이 상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놀라운 창의력으로 거의 모든 세밀한 부분까지 아우르며 미래를 그리고 있다. 운이 좋은 사람은 병목을 통과하여 그것을 마침내 병 밖으로 꺼낼 것이다. * *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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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 니블렛의 신냉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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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로빈 니블렛 (지은이), 조민호 (옮긴이) 출판 매일경제신문사 출간 2024.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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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의 대이동, 미국이 전부는 아니다 | ||
우울해서 빵을 샀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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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안드레아 카스프르작 (지은이), 이현숙 (옮긴이) 출판 이든서재 출간 2024.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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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팍한 일상에 로맨스를 더하는 52가지 실용적 아이디어 | ||
대학 중용(학문의 시작과 끝을 여닫는)(옛글의 향기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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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주희 출판 일상이상 출간 2018.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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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필독서 『대학·중용』 완역본을 소설처럼 쉽게 읽는다! | ||
TRENDS & BRIEFINGS | ||
제1차 세계 경제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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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유례없는 30년간의 경제 세계화와 지정학적 안정이 종말을 맞았다. 오늘날 세계는 다시 한 번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 | ||
[GT] 양자 네트워크 구축을 가능하게 하는 획기적인 발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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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스브루크 대학의 차세대 양자 물리학자들은 통신 네트워크의 표준 주파수에서 광자와 얽힘 생성 및 얽힘 교환 작업을 가능하게 하는 두 개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