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4월 3주차 |
BOOK 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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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을 주는 역사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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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강혜영 (지은이) 출판 초록북스 출간 2025.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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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요약 보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을 주는 역사이야기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의인들 꼭 기억해야 할 여성 독립운동가인 윤희순과 정정화</P>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있습니다. 부끄럽게도 여성 독립운동가라고 하면 유관순 외에 영화 암살의 모델로 알려진 남자현 정도가 전부입니다. 최초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 당시 여성이 붓을 들고 사회적인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금기시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윤희순은 떳떳하게 이름까지 밝히며 자기 생각을 당당하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1907년 고종 황제가 강제 퇴위당하고, 군대마저 강제 해산되었습니다. 해산된 군인들이 합세하면서 전국적인 의병이 일어났습니다. 이를 정미의병이라 합니다. 윤희순의 집안사람들도 다시 의병으로 나섰습니다. 그녀는 안사람 의병단을 조직했고, 아녀자 30여 명이 이에 합세했습니다. 안사람 의병단은 의병들에게 밥을 지어주는 일은 물론이고 밤마다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무기를 만들어 놋그릇, 쇠뭉치 등을 걷어왔습니다. 화학을 만들 유황이 부족해 오줌을 모으고 그걸 달여 화학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의병들을 지원해주고, 군자금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1909년 일본은 대대적인 의병 토벌에 나섰고, 많은 의병이 죽거나 쫓겨서 국경을 넘어갔습니다. 1910년에는 결국 국권이 피탈되었습니다. 일본의 눈을 피해 옮겨 다니는 생활이 계속되었고, 환인현이라는 곳으로 옮겨가 의병을 꾸렸습니다. 여성 의병대를 조직했고, 윤희순도 총을 들고 일본에 맞서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그녀의 나이가 쉰이 넘었습니다. 윤희순은 환인현에 노학당이라는 학교를 세우고 교장이 되었습니다. 문화 지식이 있고 애국정신으로 국권 회복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울 수 있는 항일 인재를 양성한다는 취지 아래 역사, 국어, 한문, 수학 등을 가르쳤습니다. 윤희순은 아들과 무순으로 이주해 새로이 터전을 잡고 조선독립단을 조직했습니다. 조선독립단은 한중 연합 조직이었습니다. 한중연합군을 꾸리고자 윤희순은 직접 나서서 함께 싸우자고 중국인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녀의 설득에 많은 중국인이 뜻을 같이했습니다. 그녀의 이런 활동은 당시 여성에 대한 시대의 벽을 뛰어넘은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만든 한중 연합 조선독립단은 일본을 상대로 큰 활약을 펼쳤고, 조선혁명군을 이끌었던 양세봉 장군과 연합 작전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한중 연합군이 일본에 큰 타격을 입히자 일본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윤희순과 조선독립단은 일본의 눈을 피해 또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아들 유돈상이 일본군에 체포되었습니다. 아들은 무순 감옥에서 한 달 동안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결국 초주검이 되어서야 감옥을 나올 수 있었지만 그 길에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유돈상은 윤희순이 결혼하고 20년 만에 얻은 귀한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마주한 윤희순은 다시 붓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곡기를 끊고 자신의 일생 마지막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이 죽고 11만에 그녀 역시 일흔여섯의 나이로 눈을 감았습니다. 이때가 1935년 8월 1일이었습니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기록이 「윤씨 일생록」입니다. 유학자 집안에서 나고 자라 유학자 집안으로 시집왔지만, 윤씨 일생록이라고 자신을 당당히 드러내는 주체적인 삶을 살았음을 보여줍니다. 1994년, 돌아가신 지 60년 만에 그녀의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윤희순은 중국인들에게 함께 싸우자고 독려했고, 우리는 받아준 그들에게 벼농사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중국인들이 대를 이어 윤희순의 무덤을 지켜주고 있었습니다. 윤희순이 조선 최초의 여성 의병장으로 40년 동안 독립군을 이끌며 그 중심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조선 여성의 힘이었고, 어머니의 힘이었습니다. 조선 여성들은 여자였지만 강했고, 어머니이기 때문에 더 강했습니다. 윤희순 지사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씀입니다. “매사를 시대에 따라 옳은 도리가 무엇인지 생각하며 살아가길 바란다.” 임시정부의 안주인 정정화 정정화는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인 김가진의 며느리였습니다. 김가진은 국권피탈 후 일본으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행적은 달랐습니다. 그는 대동단이라는 비밀 조직을 이끄는 총재였습니다. 1919년 3·1 만세운동 이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김가진은 아들 김의한과 함께 상하이로 망명했습니다. 상하이에 도착해보니 임시정부의 상황이 너무 열악했습니다. 집세와 식비가 밀려 있었고, 중국인 집주인에게 퇴거를 요구받은 상황이었습니다. 정정화는 가지고 간 돈을 모두 내어놓곤, 임시정부를 운영할 독립자금을 구하러 다시 국내로 들어왔습니다. 국내로 들어오는 길은 기차를 타고 오지만, 국내에서 독립자금을 모아 다시 상하이로 들어가려면 목숨을 걸고 압록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들키지 않고 국경을 넘으려면 30리를 맨발로 압록강 기슭까지 걸어와야 했습니다. 정정화는 이렇게 9년 동안 압록강을 여섯 번이나 건너며 독립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했습니다. 이는 사실 남자들도 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남자들은 감시가 너무 심해 정정화가 나서서 이 일을 맡은 것입니다. 정정화는 임시정부의 안주인 역할을 도맡아 하며 임시정부의 사람들을 살뜰히 챙겼습니다. 26년간 임시정부를 지키며 김구의 부인 최준례의 임종을 지켰고,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를 모시고 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총상을 입은 김구를 간호하기도 했습니다. 1940년에는 임시정부의 든든한 버팀목이던 이동녕의 마지막을 곁에서 지켰습니다. 나라를 잃고 오랜 기간 타국에서 힘들게 독립운동을 하다가 죽음을 맞는 그들의 외로운 마지막 길을 정정화가 곁에서 지켰습니다. 1932년 윤봉길의 홍커우 의거 이후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야 했고, 일본을 피해 계속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상하이를 떠나 충칭에 다다르기까지 무려 4천 킬로미터나 되는 피난길이었습니다. 그때마다 100명이 넘는 임시정부 식솔들을 챙긴 것도 정정화였습니다. 그녀는 26년간 임시정부를 이끈 조력자였습니다. 하지만 정정화는 덤덤하게 말합니다. “다만 임시정부가 내게 할 일을 주었고, 나는 맡은 일을 했을 뿐이다.” 1945년 마침내 그토록 염원하던 광복을 맞았습니다. 정정화는 임시정부 요인들의 귀국을 돕고 1946년 26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습니다. 그녀의 나이 마흔일곱 살이었습니다. 이제 행복만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정정화의 남편 김의환이 납북되었습니다. 북한은 한국전쟁 중 남쪽에 있던 많은 독립운동가를 북으로 끌고 갔습니다. 정정화는 남편 소식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남편과 함께 납북된 독립운동가 조소앙의 비서를 만났습니다. 남편 소식을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체포되어 종로경찰서로 끌려가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런데 종로경찰서에서 그녀를 심문한 이가 친일 경찰 출신인 김태식이었습니다. 과거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전달하려다 잡혔을 때 자신을 심문한 친일 경찰이 김태식이었습니다. 광복 후에도 여전히 경찰로 있는 김태식을 보며 얼마나 배신감이 들었을까요.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이 임시정부에서 함께 활동했던 정정화에게 정부의 고위직을 제안했지만 거절했습니다. 조용히 남은 삶을 살던 정정화는 아흔한 살이던 1991년 11월 2일 눈을 감았습니다. 세상을 이롭게 한 나눔의 아이콘들 거부에서 독립운동가가 된 이승훈과 최재형 독립운동가 조만식은 이승훈을 가리켜 “그는 조선에 태어나 조선을 위하여 울고 웃고, 조선을 위하여 죽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조만식이 칭송하는 이승훈의 삶에는 거부와 독립운동가라는 두 단어가 따라다닙니다. 연해주 한인들에게 최재형은 최페치카라 불렸습니다. 페치카는 러시아어로 난로라는 뜻입니다. 한인들의 집집마다 최재형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나라를 주무르는 거부, 이승훈 이승훈이 나라를 주무르는 거부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머물러 있지 않고 계속 도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열 살 무렵 고아가 되어 먹고살기 위해 김일권의 유기상회에 사환으로 들어갔습니다. 성실한 청년으로 소문난 덕에 열다섯에 결혼했고, 보부상을 시작했습니다. 평안북도에서 황해도까지 유기를 팔러 다니고, 황해도에서 유기를 판 돈 대신에 목화를 받아 많은 이익을 남겼습니다. 직접 유기공장을 차리고 싶었던 이승훈은 갑부 오희순에게 돈을 빌리러 갔습니다. 그 돈으로 이승훈은 유기공장을 차렸고, 좋은 작업 환경에 높은 임금을 주고 신분에 상관없이 노동자들을 우대하자 생산성이 향상되었고 품질 좋은 유기로 인정받아 사업이 번창했습니다. 그가 나라를 주무르는 거부가 될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는 이익보다 의로움을 따른 덕분입니다. 이익만을 좇았더라면 그는 절대로 거부가 되지 못했을 겁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오희순에게 빌린 돈도 다 갚지 못했는데 공장이 망해버린 것입니다. 고민하던 이승훈은 오희순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자신의 재정 상황을 설명한 뒤 돈을 갚을 계획을 적은 장부를 보여주었습니다. 오희순에게 돈을 빌린 다른 사람들은 전쟁 후 모두 잠적했는데 이승훈은 돈을 갚겠다고 찾아온 것입니다. 이에 오희순은 장부를 덮으며 "돈은 갚지 않아도 된다. 재기하는 데 필요한 돈도 지원해주겠다"라고 제안했습니다. 사람들은 전쟁 통에 세간살이를 잃어버렸기에 유기를 새로 사야했고, 경쟁자였던 유기공장들이 망했기에 이승훈이 차린 유기공장은 나날이 번창했습니다. 이승훈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했습니다. 개항으로 들어온 외국 상품인 석유, 양약, 종이, 면포, 건축 자재 등을 수입했고, 무역업으로 관서 지방의 물류와 유통을 장악했습니다. 소 한 마리에 1냥 하던 때에 그는 자본금 70만 냥의 거부가 되었는데, 그의 나이 서른여덟이었습니다. 이승훈이 나라를 주무르는 거부로 성장할 수 있었던 세 번째 이유는 나라의 부(富)가 먼저라는 생각 덕분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이승훈은 나만 잘살아서 될 게 아니라 나라가 잘살도록 해야겠다고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개항으로 일본제 사기그릇이 들어와 날개 돋친 듯 팔렸습니다. 일본제 사기그릇은 싸고 가볍고 예쁜데, 조선의 유기그릇은 비싸고 무겁고 관리하기 힘드니 팔리지 않았습니다. 이승훈은 유기공장, 유기상회 그리고 유기제조업자들과 손을 잡았습니다. 사실 그들은 경쟁업체들이었지만, 그들과 손잡고 일본제 사기그릇에 맞서 우리도 사기그릇을 만들었습니다. 기술자와 전문가를 데려오고, 일본의 경제침탈에 위기의식을 느끼던 사람들을 불러 손을 잡았습니다. 평양에 자기 제조회사를 만들었고, 주식을 발행해 더 많은 사람과 손잡고 힘을 키웠습니다. 근대적인 주식회사에 상인들이 연합해 생산과 유통에 힘을 합쳤기에 조금씩 빼앗긴 상권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가 1908년, 그의 나이 마흔넷이었습니다. 1910년 일본의 강제 병합과 총독부의 탄압으로 인해 2년 만에 자기회사는 문을 닫아야 했지만 조선의 자기회사가 일본에 맞서 경쟁력이 있음을 증명해 보인 일이었습니다. 항일운동의 대부, 최재형 연해주 한인들은 최재형을 최페치카라 불렀습니다. 그는 한인들의 난로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똑같이 대했고, 누구든 어려움을 토로하면 도와주었습니다. 최재형은 한인들의 난로가 되었지만, 그의 마음은 따뜻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평소 나라 잃은 심정을 자주 토로했습니다. “러시아 추위보다 나라 잃은 내 심장이 더 차갑다.” 1907년 최재형은 헤이그 특사로 서울에서 온 이준과 블라디보스토크의 이상설이 만나 안전하게 떠나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최재형은 의병들에게 군복과 신식 무기를 지급하고 그들이 훈련할 곳을 마련해준 뒤 함께할 한인 의병들을 모았습니다. 그렇게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 즉 동의회를 조직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공세와 일본의 압력을 받은 러시아의 방해로 의병활동은 위축되었습니다. 최재형은 대동공보를 발행했습니다. 대동공보는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를 신속하게 국내외에 알렸고, 안중근의 재판에 대비해 변호인단도 꾸렸습니다. 하지만 일본에 의해 뤼순에서 진행된 재판에서 안중근은 사형선고를 받았고, 최재형은 안중근을 살리지 못했다는 사실에 자책하며 매우 힘들어했습니다. 연해주 한인들은 그들의 정착지를 개척리(開拓里)라고 불렀는데, 1911년 러시아에 의해 개척리는 강제 철거되었고, 한인들은 다시 이주해야 했습니다. 한인들은 다시 피땀으로 신한촌(新韓村)을 일구었고, 신한촌은 독립운동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연해주 한인들에 대한 러시아의 감시가 강화되었습니다. 최재형은 1911년 12월 권업회(勸業會)를 창설해 새로운 항일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권업회는 한인들의 상공업과 교육을 장려할 목적으로 러시아의 허가를 받아 만들었습니다. 상공업을 장려하는 듯 보였으나 실제는 무장 독립투쟁 조직이었습니다. 1919년 3·1 만세운동 이후 임시정부가 세워졌습니다. 가장 먼저 연해주에 대한국민의회가, 국내에는 한성정부가, 상해에는 상해 임시정부가 생겼습니다. 최재형은 대한국민의회의 외교부장이었습니다. 연해주에서는 1919년 2월 1일, 가장 먼저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습니다. 이처럼 연해주는 독립운동의 전진기지였으며, 그 중심에 최재형이 있었습니다. 일본은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한인들을 체포하고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이를 4월 참변이라 합니다. 최재형도 재판 없이 처형되었고, 그의 유해와 매장 장소조차 찾지 못했습니다. 그는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나 굶주림을 피해 연해주로 건너갔고, 큰 자산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연해주 한인들을 위한 삶을 살았고, 빼앗긴 조국을 되찾고자 자신의 모든 것을 항일 독립운동에 쏟아부었습니다. 그가 죽은 뒤 그의 가족은 스탈린 치하에서 혹독한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의 자녀들은 총살당하기도 했고, 수감되기도 했으며, 1937년에는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했습니다. 연해주 한인들의 난로이자 항일운동의 대부(代父)였던 최재형의 리더십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는 연해주의 거부로 한인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그들이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었습니다. 그는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었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의 리더십은 늑대의 리더십을 닮았습니다. 야생 늑대 무리에서 리더는 무리의 제일 뒤에서 따라가며 무리를 챙깁니다. 늑대는 힘이 아니라 모두의 신뢰를 받는 늑대가 우두머리가 됩니다. 우두머리 늑대는 위기마다 앞장서지만, 불가피한 상황이 생겼을 때는 능력 있는 늑대에게 잠시 리더 자리를 내주기도 합니다. 무리의 안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최재형은 연해주 한인들의 곁에서 끝까지 그들의 따뜻한 난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조국을 위해 항일독립운동의 든든한 후견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해봤으면 합니다. 나는 누구의 따뜻한 난로가 될 것인가? 1인자를 만든 성공한 2인자들 조선의 킹메이커인 정도전, 하륜, 한명회 이성계의 킹메이커인 정도전 정도전과 정몽주는 권문세족의 눈 밖에 나서 유배 보내졌지만, 정도전은 유배가 끝나고도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외조모가 노비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배지에서 백성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 정도전은 나라도 임금도 백성을 위해 존재한다는『맹자』의 사상에 깊은 감흥을 받았습니다.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정도전은 함흥까지 이성계를 찾아갔습니다. 황산대첩의 영웅으로 사람들이 칭송하는 이성계가 어떤 인물인지 직접 확인하려고 한 것입니다. 내세울 것 없던 두 사람의 역사적 만남이 이루어진 순간이었습니다. 조선 건국에서 정도전의 역할이 어느 정도였는지는『태조실록』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조선은 정도전이 직접 설계했습니다. 그가 유교 이념으로 사대문의 이름을 정했고, 유교 경전에서 궁권과 전각의 이름을 가져왔습니다. 조선을 통치할 법인 「조선경국전」과 경제 제도인「경제문감」도 직접 지었습니다. 정도전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정도전은 조선을 재상이 중심이 되어 이끌어가는 나라로 만들고자 했고, 이를 위해 이성계에게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추천했습니다. 그리고 이방원은 조선 건국에 혁혁한 공이 있음에도 정치에서 배제했습니다. 이 때문에 결국 정도전은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방원의 킹메이커인 하륜 하륜은 관상과 풍수지리에 능했습니다. 하륜은 경복궁의 위치를 놓고 정도전과 의견이 달랐고, 정도전은 그런 하륜을 경계했습니다. 하륜은 자신을 알아줄 사람을 만나길 기다리기보다 직접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던 중 권문세가 민제의 사위 이방원을 보고 한눈에 귀한 관상임을 알아봤습니다. 이방원과 하륜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두 사람은 뜻이 잘 통했고, 정도전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점도 같았습니다. 하륜에 대한 태종의 신뢰는 매우 깊었습니다. 태종은 하륜을 일컬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사람의 귀에 들어간 것은 쉬이 입으로 나오지 않는다." 「태종실록」은 하륜에 대해 이렇게 긍정적으로 적고 있습니다. "하륜은 천성적인 자질이 중후하고 온화했다. 결단하고 계책을 정하면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인재를 제대로 천거하지 못할까봐 늘 두려워했고, 집에 머물 때는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글 읽기를 좋아해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은 채 시를 읊으며 자고 먹는 것도 잊었다." 사실 하륜은 욕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고, 뇌물도 받았습니다. 역사에서 개국공신이 토사구팽당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지만 그는 부귀영화와 천수를 누렸습니다. 결코 태종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는 2인자의 처세술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륜의 부고를 들은 태종은 눈물을 흘리며 3일 동안 조회를 폐했고, 7일 동안 고기 든 음식을 먹지 않으며 깊이 상심했습니다. 태종보다 스무 살 연상이던 하륜이 은퇴하겠다고 청했지만, 왕릉을 참배하고 바람이나 쐬고 오라며 보낸 터였습니다. 그런데 그 길에 하륜이 객사하고 만 것입니다. 누구보다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고, 자신을 이끌어준 하륜을 잃은 태종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수양대군의 킹메이커인 한명회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은 세종의 아들들입니다. 3남인 안평대군은 시·서·화에 능하고 성품이 좋아 늘 주위에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에 반해 2남인 수양대군은 무인 기질이 다분했습니다. 문종이 재위 2년여 만에 세상을 떠나고 열두 살의 단종이 즉위했습니다. 황보인과 김종서가 문종의 유지를 받들어 단종의 정치를 곁에서 도와주었습니다. 안평대군도 김종서, 황보인과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하지만 수양대군은 이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이러한 때 수양대군을 찾아온 이가 한명회였습니다. 한명회는 과거에 낙방해 출사하지 못하고 경덕궁 궁지기로 있던 인물입니다. 수양대군은 한명회를 마음에 들어 했고, 한명회는 수양대군에게 이렇게 조언했습니다. “한 고조 유방이 비록 장량의 계책을 써서 천하를 얻었으나, 그 또한 한신의 군세에 힘입지 않았다면 어려웠을 것입니다. 마땅히 무장들을 사귀십시오.” 한명회의 말에 수양대군은 사냥하러 다니며 무장들과 어울렸습니다. 그런데 1453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켰습니다. 김종서를 죽이고 궁궐로 들어오는 신하들을 차례로 죽였습니다. 그때 죽인 반대 세력의 명부를 만든 이가 바로 한명회입니다. 권력을 잡은 수양대군은 이후 단종의 양위를 받아 세조를 즉위했습니다. 하지만 세조의 정치에 반대한 사육신이 단종 복위를 모의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한명회가 “날이 덥고 장소가 좁으니 운검(호위무사)을 빼도록 하라”라고 명해 수양대군이 화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한명회가 세조의 목숨을 구한 것입니다. 과거에 몇 차례나 낙방하고 겨우 경덕궁 궁지기로 있던 한명회가 불과 14년 만에 영의정에 올랐습니다. 종9품 가장 낮은 품계에서 정1품 가장 높은 품계로 올라선 것입니다. 세조의 신임을 받던 한명회는 예종의 장인이 되어 권세가 갈수록 커졌습니다. 한명회는 부귀영화를 누리며 명을 다하고 죽었지만, 끝까지 평온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죽고 난 이후 폐비 윤씨의 일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연산군에게 부관참시(무덤에서 관을 꺼내 시신의 목을 베는 극형) 되었습니다. * *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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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이 열광할 시니어 트렌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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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고려대학교 고령사회연구원, 이동우, 송완범, 신근영, 하방용 (지은이) 출판 비즈니스북스 출간 2025.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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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일 1씽킹 아이디어 수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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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다카하시 신페이 (지은이), 김경원 (옮긴이) 출판 윌북 출간 2025.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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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이 의미를 잃기 전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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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윤영호 (지은이) 출판 안타레스 출간 2025.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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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NDS & BRIEF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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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설 산업의 환골탈태, 21세기 신기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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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 산업의 생산성 저하는 사회 구성원들의 삶의 질을 저하시키고, 경제 성장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미국은 오늘날 건설 부문 노동자 부족으로 어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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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T] 단백질 디자인에 인공지능이 사용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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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처 컴퓨테이셔널 사이언스(Nature Computational Science)’ 저널은 최근 토론토 대학에서 인공지능 시스템을 사용하여 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