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 니블렛의 신냉전
 
지은이 : 로빈 니블렛 (지은이), 조민호 (옮긴이)
출판사 : 매일경제신문사
출판일 : 2024년 08월




  •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신냉전 속에서 세계 각국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생존 전략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 복잡한 국제 질서를 분석하며, 앞으로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이 어떤 자세로 이 변화를 대처해야 할지에 대한 명확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로빈 니블렛의 신냉전


    패권을 위협하는 중국의 부상

    현재까지는 글로벌 경제의 정점인 미국

    미국 경제는 글로벌 경제 패권국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구조적 이점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과 달리 대체로 비옥하고 인구가 적은 드넓은 땅을 갖고 있으며, 또 중국과 달리 인접국도 캐나다와 멕시코 두 곳뿐인 데다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천연자원도 엄청나게 많다. 미국은 세계 최대 석유 및 천연가스 생산국이다. 1980년대에 수압 파쇄법과 수평 시추법 같은 신기술을 개발해 2000년대 이후 풍부한 자원을 머금은 새로운 지층을 대량으로 확보했다. 식량도 얼마든지 자급자족할 수 있을 뿐더러 농산물 수출도 세계 최대 수준이다.


    미국은 주요 경제 지표와 지정학적 지위를 유지하도록 해주는 활력을 아직도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다. 여전히 높은 기술력으로 혁신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하고, 최근에는 오픈AI(OpenAI)와 구글에서 대형 언어 모델(LLM)을 통해 학습된 챗GPT(ChatGPT)와 바드 (Bard) 같은 생성형 AI 서비스도 선보였다. 고등 교육과 R&D(연구 개발) 분야의 세계적 우위도 여전하다. 3억 3,000만 명에 이르는 거대 단일 시장과 스타트업에 얼마든지 자금 지원을 할 수 있는 역량으로 입지를 굳건히 하고 있다. 미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크고 유동성도 가장 높은 자본 시장을 갖고 있으며, 세계 기축 통화인 달러화의 역할 덕분에 막대하고 고유한 혜택을 누리고 있다. 현재도 대부분 국가 정부와 기관들이 미국 달러에 투자하는 것을 자신들이 보유한 자산 가치를 보호할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고 믿는다는 사실 자체가 미국이 지난 수십 년 동안 거침없이 자국 통화로 돈을 빌릴 수 있었던 유일한 국가임을 의미한다.


    중앙 무대로 움직이는 중국

    중국은 WTO에 가입한 2001년 이후부터 괄목할 만한 경제 성장을 체험했다. 아직도 WTO 규정상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되는 중국은 경제를 다른 국가와 똑같이 개방하지 않고도 세계 시장에 수출할 때 저관세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국내에서는 개방과 경쟁을 유도하고 외국인 직접 투자와 신기술 및 전문 지식 유입 그리고 부동산과 교통 개발 등 국내 인프라에 정부 지출을 대규모로 투입해 어마어마한 경기 호황을 불러일으켰다. 2001년 중국의 GDP는 1조 2,000억 달러 & 미국은 10조 2,500억 달러였지만, 2022년에는 중국 18조 달러 & 미국은 25조 9,000억 달러를 기록했다.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구매력 평가(PPP) 지수, 즉 다른 국가 통화 대비 위안화의 구매력 수준만 놓고 본다면 중국의 실제 GDP는 전 세계의 16.6%를 차지해 미국의 15.8%보다도 높다.


    중국이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놀라울 만큼 커졌고 앞으로도 계속 커질 것이다. 2009년에 중국은 세계 최대 수출국으로 등극했으며, 현재는 가장 가까운 경쟁국인 미국과 독일보다도 한참 앞선 상황이다. 수출 품목은 처음에는 섬유, 장난감, 가구 같은 기초 제조품이었다. 그러다가 제조업 가치 사슬을 고속철도 시스템과 의약품까지 확대했고, 이제는 공작기계와 전자제품, 가장 최근에는 자동차 분야까지도 독일과 이탈리아 및 다른 서구 기업들과 경쟁하고 있다. 중국 기업들은 이미 전 세계 제조 기업들의 필수 부품 공급업체로 자리매김해 글로벌 공급망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됐다.


    우리의 오해와 미국의 걱정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대부분 미국인은 중국이 글로벌 경제에 통합되면 정치적 개방도 덩달아 이뤄지거나, 아니면 적어도 미국이 1950년대 이후 글로벌 경제 리더십 목표로 삼아온 시장 기반 접근 방식을 수용하리라고 기대했다. 밥 졸릭(Bob Zoellick) 전 미국 국무부 차관이 중국에 “책임 있는 이해당사자가 돼야 한다”고 압박한 것은 중국이 암묵적으로라도 미국의 원칙으로 규정된 세계 경제 질서의 일원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양국의 서로 다른 경제 모델과 통치 체제 및 지정학적 경쟁과 상관없이 미국이 실리 차원에서 그냥 중국의 경제적 부상을 그대로 수용하기를 바랐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양국 경제는 서로 얽히고설켰다. 미국은 단일 규모로 중국의 최대 수출 시장이다. 2022년 기준 중국 전체 수출량의 16%인 5,830억 달러를 미국이 커버했다. 물론 회원국 전체에 대한 수출량으로 치면 20%로 EU가 더 높긴 하다.


    그러나 양국 관계의 지정학적 경합 성격이 더욱 명확해지면서 미국과 중국은 이런 양자 무역을 ‘윈-윈(win-win) 전략으로 인식하기보다 단순히 경제적 상호의존성을 일부 해소하기 위한 경쟁으로 해석하고 있다. 중국이 경제 현대화 여정을 시작하던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미국은 중국이 지식재산을 도용하는 산업 규모를 대수롭지 않게 넘기곤 했다. 그러다가 통신 및 금융 기술 같은 첨단 기술 분야에서 중국 기업이 미국 기업을 앞지르자 비로소 반격을 개시했다.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대통령은 2015년 9월 시진핑 주석이 워싱턴 DC를 방문했을 때 직접 나서서 해킹 등 산업 스파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해킹은 곧 재개됐고, 뒤이어 들어선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와 조 바이든 행정부 모두 가해자를 특정한 표적 제재로 대응했다.


    중국 또한 마찬가지로, 이미 경제적 선진국에 진입하고도 남을 만큼 부유해졌으나 여전히 WTO 규정에 따른 ‘개발도상국으로 취급받기를 고집하면서 성장 이익을 무역 상대국과 나누려고 하지 않고 있다. 이에 2018년~2019년 트럼프 행정부 무역대표부 대표 밥 라이트하이저(Bob Lighthizer)는 미국의 대중 수입액과 중국의 대미 수입액 사이의 증가하고 고착되는 차이가 미국 내 일자리와 세계 시장 점유율을 크게 떨어뜨리는 무역 왜곡의 증거라고 주장하면서 3,600억 달러 규모의 중국 수출 품목에 7.5%~25%의 관세를 부과하는 과정을 주도했다. 당시 무역 적자 규모가 미국 소비자들의 소비 행태를 반영한 것이더라도 중국에서 활동 중인 미국 기업들에 높은 많은 장벽이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지경학적 냉전 또는 화폐전쟁의 시작

    트럼프 행정부를 비롯해 바이든 행정부는 무엇보다도 중국이 첨단 기술 산업과 국방 역량에 필수적인 최첨단 반도체를 생산할 능력이 아직 없다는 사실, 특히 AI 도구를 접목하려고 시도할 때 더욱 어려우리라는 점에 집중했다. 이 같은 전략을 토대로 미국은 유럽과 태평양 동맹국, 그중에서도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에 초점을 맞췄다. 트럼프 행정부 때는 미국 기업들의 반도체 첨단 기술이 중국에 유출되는 사태를 방지하고자 입법 차원에서 일련의 조치를 진행했다. 산업 스파이 활동이 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중국 통신 기술도 수입을 금지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초기에 미국 기술의 가장 민감한 영역을 중국에서 분리한다는 기조 아래 전임 정부의 제한 조치를 유지했다. 나아가 미국 기업들의 자체 첨단 반도체 제조 기술을 중국에 판매하지 못하도록 규제함으로써 제한을 더욱 확대했다. 2023년 8월에는 미국 기업이 중국의 AI, 반도체, 양자 컴퓨팅 등에 투자할 수 없도록 행정 명령을 통과시켰다.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이에 대해 서방 세계가 중국을 봉쇄하고 억압하려는 적대적 행위라고 비난했다. 말로만 그치지 않고 중국 국가 기관들에 정보통신 시스템 구축에서 미국 기업 마이크론(Micron)의 칩을 사용하지 말라고 명령했으며, 공무원들에게는 애플(Apple) 아이폰 사용을 금지했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이 생산과 가공을 주도하는 반도체와 더불어 미국의 첨단 국방 시스템에서 사용하는 필수 희토류 광물인 갈륨과 게르마늄 수출을 제한하는 등 즉각적인 보복 조치를 시행했다.


    지난 냉전이 끝난 뒤 미국과 중국 사이에 새롭게 형성된 경제적 관계는 이제 양국 간 전략적 경쟁의식을 심화하고 있다. 미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이라는 진정한 의미의 글로벌 경쟁자, 달리 표현해 미국의 글로벌 영향력을 약화하고 약점을 파고들 강력한 경쟁자를 마주한 상황이다. 서로가 이 복잡한 관계에 대처하려면 양측 모두에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 중국공산당은 내부 체제를 견고히 유지하고 글로벌 영향력 확대에 방해를 받지 않는 한 미국과 경쟁적 공존 관계를 수용할 듯 보인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미국 입장이 중요한데, 미국이 과연 중국을 상대로 어떻게 변화할지, 신냉전을 바람직하게 관리하기 위한 정책을 미국이 제대로 설계하고 일관되게 접근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 될 것이다.



    다자주의의 종말

    ‘다자 간 협력이라는 개념의 중심에는 유엔을 비롯해 IMF(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World Bank), WHO(세계보건기구)처럼 유엔의 지원 아래 운영되는 국제기구들이 있다. 이들 기관은 크고 작은 우여곡절에도 지난 냉전 동안 국제 정세를 관리해왔지만, 이제는 각자 코앞에 산적한 과제를 해결하는 데도 힘겨워하고 있다.


    구냉전 때와 다른 양상으로 신냉전은 합의를 이루기 위해서 더 다양해지고 더 커지고 더 분열된 목소리를 상대적으로 느리고 정체된 유엔 체제에 의지하기보다는, 주요 선진국과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이 협력해 대안적인 길을 추구하도록 몰아간다. 신냉전의 주요 당사국인 미국과 중국은 자국의 이익을 조금이라도 더 높이고자 비슷한 이해관계에 놓인 국가들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이에 따라 과거보다 권한이 커진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도 열심히 득실을 저울질하며 갖가지 국제회의에 참여하거나 불참하는 등 협력관계를 쌓아나가고 있다. 과거의 뼈아픈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면서 세계 번영과 안보에 반영할 힘을 스스로 조절하고자 애쓴다. 기후 변화 대응, 범유행 전염병 대비, 식량 안보 등의 과제가 자국의 미래에 미칠 영향을 알기에 더는 방관하지 않으려고 한다.


    침식: 국제 질서의 두 가지 변화

    1990년대에 이르자 일본계 미국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가 ‘역사의 종말(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 1992)에서 주장한 것처럼 국내든 국제든 서방 세계의 통치 체제가 확실히 우위를 점한 듯 보였다. 소련 해체 직후 수많은 공산주의 정권이 무너져내렸고, 중남미에서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독재 정권이 붕괴한 자리에 민주주의가 들어섰다. 아주 짧긴 했지만, 드디어 유엔 체제가 창설국들이 의도한 그대로 작동하던 시기였다. 1990년 이라크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의 쿠웨이트 침공을 응징할 군사 개입이 만장일치로 승인됐고, 각국 자유민주주의 정부는 세계인권선언 원칙이 실현되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렇지만 ‘국제 공동체 전체의 관심사인 가장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국가 지도자나 개인을 처벌하기 위해 2002년 7월 발족한 ‘국제형사재판소(ICC)에는 미국, 중국, 일본 등 주요 7개국이 아직도 참여하지 않고 있다. 2005년에는 특정 국가가 반인도적 대량 학살, 인종 청소, 전쟁 범죄 등으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경우 해당 국가의 주권을 일시적으로 무시하고 국제 사회가 개입할 수 있도록 하는 이른바 ‘보호책임(R2P) 원칙에 유엔의 모든 회원국이 찬성했다.


    이때부터 전 세계를 아우르는 자유로운 국제 질서라는 개념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특히 두 가지 변화가 세계를 새로운 국면으로 유도했는데, 이는 새로운 냉전이 이전과 다른 글로벌 맥락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의미했다.


    첫 번째 변화는 이제 미국에 이렇다 할 전략적 경쟁자가 없는 상황이니 지배력은 여전하더라도 상대적으로 온건한 패권국 지위를 유지하리라는 세계 각국의 기대감에 균열이 생겼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역대 미국 정부는 국제적으로 늘 자국의 이익을 챙기면서도 글로벌 패권국답게 동맹을 강화하고 다른 나라를 우방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선에서만 그렇게 해왔었다. 그러나 2001년 9월 11일을 기점으로 미국의 태도가 바뀌었다. 2003년 3월 미국의 이라크 공격은 엄밀히 말해 방어가 아닌 예방 조치였지만, 유엔의 온전한 승인 없이 진행됐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세계인권선언의 핵심 원칙 몇 가지를 쉽게 위반했다. 고문을 자행하는 국가로 난민들을 강제 송환했고, 이라크 아부그라이브(Abu Ghraib) 교도소 수감자들을 학대했다. 테러 용의자들을 미국 해군 기지가 있는 쿠바 관타나모(Guantanamo)로 이송한 까닭도 미국 사법 체계가 미치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이후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되자 동맹국들 사이에서 안도의 분위기가 형성되는 듯했으나, 오바마 행정부의 들쑥날쑥한 외교 정책은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에 더 흠집을 냈다. 2011년 리비아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Muammar Gaddafi)가 자신의 정적들을 학살하지 못하도록 무력 개입해 ‘보호책임을 실행하자는 영국과 프랑스의 요구를 마지못해 수용했던 오바마 행정부는 2013년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이 민간인들에게 화학무기를 사용하는데도 시리아 내전에는 끝까지 개입하지 않았다. 그리고 미국 유권자들이 다음 대통령으로 선출한 도널드 트럼프는 일찍이 유엔 총회에서 예루살렘 전체를 이스라엘 수도로 규정한 예루살렘법을 무효로 결의했는데도 2017년 이스라엘과 파리 협정 동반 탈퇴를 선언한 뒤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동예루살렘으로 이전했으며, 이에 다시 예루살렘 수도 무효화를 표결하려던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을 거부권 행사로 부결시켰다. 트럼프는 그해 9월 유엔 총회 첫 연설에서 “강하고 자주적인 국가들은 각기 다른 가치와 문화와 꿈을 가진 국가들을 공존하게 해줄 뿐 아니라 상호 존중의 기반 위에서 함께 일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말했는데, 이는 중국 지도부의 관점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맥락에서 두 번째 변화가 나타났다. 다름 아닌 중국이 글로벌 경제 강국을 넘어 글로벌 정치 강국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중국은 시진핑과 지도부가 공개적으로는 다른 국가의 내정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난하지 않은 데서 볼 수 있듯이 여느 강대국 못지않게 예외주의적 외교 정책을 지향한다. 중국은 일단 자유주의적 가치는 우선순위에서 제쳐두고, 국제법과 유엔 체제가 국제 질서를 말할 때 국가 주권에 초점을 맞추는 부분만 수용하겠다는 아주 단순한 비전을 갖고 있다. 메시지를 내는 타이밍도 잘 맞춘다. 시진핑은 미국의 중동 개입으로 촉발된 혼란을 꼬집으면서, ‘글로벌 개발 이니셔티브(GDI)를 통한 성장, ‘글로벌 안보 이니셔티브(GSI)를 통한 안정, ‘글로벌 문명 이니셔티브(GCI)를 통한 상호 존중이라는 다자 간 협력 방안을 세계 각국에 적극적으로 제안했다.


    미국 예외주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이 중국에 반격하기 어렵게 만든다. 미국은 국제형사재판소 가입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의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을 판결하는 데 주효한 역할을 하는 ‘유엔 해양법 협약(UNCLOS)과 핵 비확산 체제의 한 축인 ‘포괄적 핵실험 금지 조약(CTBT) 비준도 거부하고 있다. 동맹국들이 미국 예외주의를 눈감아주는 이유는 미국의 지속적인 보호로 혜택을 얻고 있어서다. 하지만 미국과 동맹국들이 IMF와 세계은행에서 특권적 지위를 계속 차지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본, 조금씩 자신감을 회복해나가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좌절감을 느껴온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도 그렇게 해줄까? 이들 대부분은 80년 동안 바뀐 적 없는 상임이사국 5개국이 거부권을 휘두르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시대착오적인 체제라고 여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경쟁이 더 복잡하고 치열해진 지정학적 맥락에서 다자주의 체제가 현대화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수를 늘리자는 의견은 있다. 미국과 유럽은 물론 중국과 러시아도 딱히 반대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안 될 걸 알기에 그러겠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기존 5개국이 어떤 나라들의 조합을 만장일치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더욱이 어떻게 하면 다른 국가들의 반발을 잠재우면서 일부 국가를 선택할 수 있을까? 상임이사국들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일은 예전에도 어려웠지만, 현재는 아예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제2의 해결책

    유엔 체제의 구조 개혁 가능성 전망이 불투명해지자 각국은 글로벌 거버넌스를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짜 맞춰서 협력하는 형태로 대응해나가고 있다. 어떤 국가 그룹은 ‘같은 생각을 하는 국가들끼리 미국이나 중국의 우선순위를 중심으로 뭉치고, 어떤 그룹은 자신들끼리 따로 세력을 형성해 지정학적 격차를 극복하려고 한다.


    민주주의 진영의 주요 기구로는 G7, EU, 나토, 쿼드, OECD 등이 있다. 규모 면에서 ‘EU가 가장 크고 ‘쿼드가 가장 작다. 미국과 대서양 및 태평양 동맹국들의 글로벌 이해관계를 아우르는 ‘G7은 신냉전 시대 자유민주주의 세력의 주요 조정 기구로 자리 잡은 상태다. 모두 비슷한 민주주의 통치 체제를 공유하므로 다른 국가들에서는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집단 경제 안보를 강화할 규칙에 합의할 수 있다. ‘OECD는 명목상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민주주의 국가 38개국을 회원국으로 부정부패 방지에서부터 공정한 관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현안을 협의하고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지침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권위주의 독재 진영 기구로는 우선 ‘EEU(유라시아경제연합)를 들 수 있다. EU에 대항하기 위해 러시아가 자국과 여전히 경제적/정치적 관계를 끊지 않은 구소련 국가들을 모아 결성한 연합체다. 회원국은 많지 않다. 러시아 말고는 카자흐스탄, 아르메니아, 벨라루스, 키르기스스탄이 전부다. 어쨌든 EEU도 EU를 모방해 회원국 간 무역 장벽을 없애고 공통된 표준에 합의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렇지만 러시아의 진짜 속셈은 이들 이웃 국가를 자국의 영향권 아래 둬서 EU 국가들과 경제적 동반자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중국도 지난 10년 동안 자국을 편들어줄 새로운 기구를 세우고자 적극적으로 활동해왔다. 일단 2001년 미국의 힘과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SCO(상하이협력기구)를 설립했다. 표면적으로는 테러리즘, 분리주의, 극단주의를 3대 악으로 규정해 이를 공동 대응하고 중앙아시아와 유라시아의 안보를 확립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다. 중국 외에 러시아, 인도, 파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이 회원국이다. G7이 민주주의 가치의 틀 안에서 경제 안보를 강화하고자 한국과 호주를 정기적으로 초청하면서 G7+로 변모해가는 것처럼, SCO도 자신들의 가치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안보를 강화하는 데 관심이 있는 독재 국가들을 포함하는 방향으로 확대하고 있다. 이를 반영해 SCO는 2021년 이란의 정회원 가입 절차를 시작했고, 아프가니스탄, 벨라루스, 몽골도 정회원을 희망하는 옵서버 국가로 참여했다. 이집트,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캄보디아, 네팔, 스리랑카, 튀르키예도 대화 파트너로서 합류했다.


    중국은 나아가 또 다른 지정학적 분열을 가로지를 3개 기구를 설립했다. 첫 번째는 2016년 중국을 대주주로 베이징에 본점을 두고 출범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이다. 양자 간 불투명한 협정으로 이뤄지는 ‘일대일로 계획과 달리 글로벌 표준인 금융 투명성과 환경적 지속성을 준수하는 아시아 기반 글로벌 금융 기구를 표방한다. 현재 106개 회원국을 보유하고 12개국이 가입 승인을 기다리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개발은행으로 성장했다. G7 국가들도 미국과 일본을 제외하고 모두 가입했다.


    두 번째는 앞서 잠깐 언급한 ‘RCEP(역내 포괄적 경제 동반자 협정)이다. RCEP의 기본 성격은 자유무역협정(FTA)이다. 중국의 지정학적 경쟁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와 아세안 10개국이 이 자유무역협정에 참여했다. 경제적/정치적 다양성을 고려할 때 RCEP는 아직 WTO보다 조금 더 낮은 관세 혜택과 일부 추가적인 규제 완화 정도만 제공하고 있지만, RCEP 가입국에 속한 기업들이 20억 명 이상의 잠재 소비자와 전 세계 GDP의 30%를 차지하는 시장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엄청난 이익이라고 할 수 있다.


    신냉전 맥락에서 가장 관련성이 높은 기구는 세 번째일 텐데, 바로 ‘브릭스(BRICS)다. 엄밀히 말하자면 원래부터 기구는 아니었고 4개 나라를 일컫는 용어였다. 2001년 골드만삭스(Goldman Sachs) 짐 오닐(Jim ONeill) 연구팀이 소비 계층 성장으로 글로벌 경제의 새로운 주역이 될 국가들을 쉽게 부르려고 브라질(B), 러시아(R), 인도(I), 중국(C)에 복수형 ‘s를 붙여 ‘BRICs라고 지칭했는데, 이후 실제 국제기구로 발전했다. 그리고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S)이 추가되면서 그야말로 ‘BRICS가 됐다. 첫 정상회의는 2009년에 열렸다. 이제는 중국과 러시아가 글로벌 노스의 G7에 대응하는 글로벌 사우스 세력을 형성하기 위한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미 탄력도 받은 상황이다. 일찌감치 브릭스 가입을 신청한 23개국 가운데 18개국이 2022년~2023년 가입을 마쳤고, 2023년 8월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개최된 제15차 브릭스 정상회의 때 나머지 국가 아르헨티나, 이집트, 에티오피아,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의 가입도 정식 승인됐다. 아르헨티나는 2023년 12월 정권이 바뀌면서 가입을 철회했다. 브릭스 회원국들의 공통된 관심사는 무엇보다 브레턴우즈 체제 이후 압도적 특권을 누리고 있는 미국의 글로벌 경제 지배력을 약화하는 데 있다.


    그러나 브릭스의 확대를 힘의 신호로 보기보다는 신냉전 상황에서 중국이 주요 약점을 드러내고 있다는 신호로 보는 게 더 정확하다. 시진핑은 중국이 남부 국가들을 이끌지 않으면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에 중국을 글로벌 사우스의 선도국으로 올려놓아야 한다. 하지만 요하네스버그 회의에서 다룬 기다란 정책 의제 목록 중 브릭스 회원국들의 공통된 비전은 미국의 경제 패권에 반대해야 한다는 것 말고는 없다. 오히려 내부적으로는 중국과 인도, 확대 이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사이의 전략적 경쟁 같은 분열만 부각했다. 게다가 아무리 정체해 있다고는 하나 유엔이 서구 주도의 G7과 중국 주도의 브릭스로 양분해 구조적 경쟁의 장으로 바뀌기를 바라는 글로벌 사우스 국가는 거의 없다.



    * *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