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정세가 한눈에 읽히는 부의 지정학
 
지은이 : 이재준 (지은이)
출판사 : 비즈니스북스
출판일 : 2024년 11월




  • 세계 경제와 정치의 교차점에서 나타나는 지정학적 리스크를 분석하며, 글로벌 경제 질서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미중 갈등, 해양 패권 경쟁 등 주요 사건들을 통해 각국의 경제와 외교 전략이 우리의 삶과 투자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려줍니다.


    세계 정세가 한눈에 읽히는 부의 지정학


    세계는 정치에서 시작해 경제로 끝난다

    경제 안보, 정치와 경제의 상호 침투에서 살아남기

    최근 정치적 변수는 경제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2020년을 전후로 경제안보(Economic Security)의 가치가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경제안보는 무엇을 의미할까? 국가 경제에 대한 다른 국가의 위협에서 국가안보를 수호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유로운 국제무역질서가 국가 간 갈등이나 정치적 의도에 의해 교란되는 일련의 흐름 속에서 자국의 경제와 산업을 보호하는 것이 바로 경제 안보다.


    한국의 메모리 반도체를 예로 들어 설명해보자. 반도체 시장은 1980년대 초반 개인용 컴퓨터(Personal Computer, PC)가 대중화되면서 급속하게 성장했다. 반도체 산업이 활성화되면서 미국 내 인건비가 상승하고, 디자인 및 공정비용 등이 증가하는 문제가 생겼다. 그러다 국제적인 분업 구조를 형성하는 쪽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반도체의 생산 단가를 낮추기 위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이에 따라 반도체 산업은 미국, 유럽, 일본, 한국 등에 분산된 국제적 가치사슬(Value Chain)로 발전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반도체 산업이 취한 국제적 분업 구조로 생산비용을 낮추는 것은 가능해졌지만, 그만큼 국가 간 정치적 갈등에 취약해졌다. 미중 전략 경쟁에 따라 미국은 반도체 공급망을 통제하고, 전기자동차 배터리에 쓰이는 중국산 소재의 수입을 제한했다. 또 한국 대법원이 과거 일제시대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일본 기업의 배상 판결을 내리자 일본 정부는 한국을 대상으로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인 소재와 부품에 대한 수출 통제에 나섰다. 우크라이나와의 전쟁 때문에 러시아는 미국과 서방으로부터 첨단기술 제조업에 사용되는 희귀 광물 수출에 제재를 받기도 했다.


    이런 정치적 문제는 산업에 큰 영향을 미친다. 새로운 국가가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기 위해서는 국가 간의 우호적 관계가 필수다. 만일 국제적으로 분업화된 반도체 공급망을 안정적으로 유지하지 못한다면, 반도체 생산이 큰 난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이런 국제적 이해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다른 국가의 위협으로 타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안보적 문제가 될 수 있다. 바로 이를 경제안보라고 한다.


    경제적 수단으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다

    경제안보 개념과 유사한 용어인 경제통치술(Economic Statecraft)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제통치술은 어떤 국가가 경제적인 영향력을 이용해 다른 국가에 정치적 목적을 관철하고자 하는 방식을 말한다. 국가들이 오랫동안 무역을 지속하는 경우 경제적인 상호의존이 생겨난다. 이러한 상호의존성이 때로는 정치적 무기가 될 수 있다. 매번 그 국가에서 구해오던 부품이나 자원이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정치적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 부품이나 자원을 팔지 않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갑자기 공급처를 바꿀 수도 없고, 자국에서 해당 부품, 자원을 만들어내기도 어려워 국가 경제가 큰 곤란을 겪게 된다. 결국 상대의 정치적 요구를 수용하면서 해당 부품과 자원을 사올 수밖에 없다. 즉 경제통치술은 국가가 다른 국가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경제적 자원을 활용하는 것이다. 이처럼 상호의존성은 때로는 다른 국가에 압력을 행사하는 수단이 된다.


    경제통치술에 활용되는 경제 제재에는 부정적인 방식과 긍정적인 방식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먼저 부정적인 경제 제재의 경우 무역 부문에서는 봉쇄, 보이콧, 관세, 최혜국대우 폐지가 있고 자본 부문에서는 자산동결, 수출입 통제, 원조 중지, 국유화, 세금부과 등이 있다. 이러한 경제 제재에는 실제로 집행하는 것뿐만 아니라 위협(threat)도 포함된다. 긍정적인 경제 제재에는 원조, 투자 등의 조치 등을 들 수 있다. 경제적 유인을 제공하는 것이기에 제재라는 말이 다소 어울리지 않지만 말이다.


    경제통치술은 경제적인 수단을 이용해 국가의 비경제적인 목적, 대체로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려는 행위 자체만을 의미한다. 경제가 경제안보에서는 목적이 되는 것과 달리, 경제통치술에서는 수단으로 작용할 뿐이다.


    소비 시장도 경제통치술에서 자주 사용되는 수단 중 하나다. 2010년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중국 반체제 인사이자 인권 운동가인 류샤오보를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이는 중국의 심기를 건드렸고, 중국은 노르웨이와의 자유무역협정(Free Trade Agreement, FTA) 협상을 무기한 연기한 채 노르웨이산 연어를 집중 타깃으로 삼았다. 중국의 수입 제재로 2010년 1만 1,000톤을 수출하며 중국 시장의 90퍼센트 이상을 차지했던 노르웨이산 연어는 이듬해인 2011년에는 수출량이 70퍼센트 수준으로 급감했다. 냉각되던 양국의 관계가 개선되기 시작한 것은 2015년 노르웨이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창립회원국에 가입하면서부터로, 중국은 2016년 12월 노르웨이와 관계 정상화를 선언했다.


    정치적 리스크와 진화하는 위기

    전쟁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기업의 수익성을 악화시킬 수 있다.


    첫째, 전쟁은 잠재적으로 수익성이 높은 지역에 대한 투자, 영업 활동을 차단한다. 기업이 특정 지역에서 영업을 하거나 특정 지역으로 진출하는 것 자체가 위험할 수 있다. 1974년, 많은 외국 기업의 지역 본사가 있던 레바논은 글로벌 경제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1년 후인 1975년 말, 레바논 베이루트나 다른 주요 도시에 남아 있던 모든 기업이 심각한 전쟁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레바논의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 사이에 자리하고 있던 종교적 갈등이 내전으로 번졌기 때문이다. 이 내전은 레바논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들이 철수하는 사태를 불러왔다.


    둘째, 전쟁으로 특정 지역을 위험에 빠뜨리면서 공급망을 방해할 수 있다. 상품 운송, 해외 기업과의 협력이 전쟁으로 무너지면서 공급망에 장애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란은 이라크의 석유 수출을 가로막기 위해 걸프 해역을 공격했다. 이 공격은 핵심 해상교통로인 걸프 해역의 해운 물류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최근 지정학적 상황 변화는 비대칭 전쟁 능력의 발전을 가져왔다. 비대칭 전쟁은 주로 국가와 비국가 무장단체 사이에 벌어지는 전쟁을 의미하며 테러와의 전쟁이나 게릴라 전쟁 등이 포함된다. 우려되는 것은 과격 무장 정파가 손쉽게 구하고 사용할 수 있는, 값싸고 효과적인 무기들이 대거 개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기존 정치체제에 반대하는 무장단체의 능력이 국가에 피해를 입힐 수 있을 만큼 비정상적으로 높아졌음을 의미한다. 서방 강대국이 다른 국가의 주요 경제 중심지를 파괴하려면 수백 명의 기획자, 분석가, 기술자를 투입해야 한다. 수천만 달러에 달하는 고가의 항공기와 군수품도 동원된다. 그런데 이슬람 급진주의 테러 조직인 알카에다 요원들은 9.11 테러에서 약 100만 달러의 예산으로 동일한 결과를 달성했다.



    세계 제일 패권국이 사라진다는 두려움_ 미국 대선 리스크

    트럼프, 공짜 희생은 없다

    “왜 미국이 해외 원조에 수십억 달러를 써야 하는가?”

    “왜 수많은 미군이 해외에 주둔해야 하는가?”


    트럼프의 신고립주의인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는 이러한 질문들에서 비롯되었다. 미국이 세계 각 지역에서 벌어지는 분쟁에 개입하느라 과도하게 재정을 소진한다고 문제 삼은 것이다. 신고립주의는 미국이 국제 문제에 개입해 해외에서 전쟁을 치르고 경제적 손해를 보고 있음을 비판한다. 나아가 미국이 해외 원조나 대외적 개입에서 물러나 자국의 안보와 경제적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트럼프는 미국의 국익이나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늘리는 데 정책의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관련 정책을 확대했다.


    트럼프는 세계화가 미국 백인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갔다는 것을 이유로 세계화에도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2016년 대통령 선거에서 러스트 벨트의 지지를 얻어 승리했다. 미 중부와 북동부의 러스트 벨트에 해당하는 위스콘신, 미시간,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주 등 제조업 중심지 모두에서 트럼프가 승리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미국 저학력 노동자들의 실업 문제는 미국 래퍼 에미넴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영화 8마일에도 잘 드러난다. 영화의 제목은 러스트 벨트인 미시간주의 최대 도시, 디트로이트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도로 8마일 로드를 뜻한다. 이 도로는 흑인과 백인 거주 구역의 경계선 역할을 하는데, 영화에서는 미국 자동차 산업의 몰락으로 폐허가 된 디트로이트 지역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산업은 한때 미국 제조업의 상징과도 같았으나 독일, 일본 자동차 기업과 경쟁에 도태하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


    트럼프 2.0 시대, 인플레이션이 온다

    트럼프나 해리스 모두 미국 기술 기업들이 필요로 하는 공급망을 미국 내에 두겠다는 입장이었다. 해외 기업들에게도 반도체 공장이나 전기자동차에 들어가는 이차전지 제조 시설 등을 미국에 이전하도록 압력을 가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는 국가 간 분쟁에 따른 지정학적 위험으로부터 미국의 제조업 공급망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인 동시에 러스트 벨트 지역에서 일자리를 창출해낼 수 있는 방식이다. 미국의 제조업 일자리 성적표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넘어서야 하는 고비였다.


    문제는 미국 내에서 공급망을 구축하는 방안이 미국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이유는 어쩌면 단순하다. 미국 기술 기업이 공급망을 해외에 둔 이유는 생산 단가를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애플이 아이폰의 기획, 설계, 디자인 등은 미국에서 해도 제품에 들어가는 부품 대부분을 해외에서 조달하고 완제품도 중국 공장에서 생산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유는 비용을 낮추는 데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부품, 소재 조달부터 완제품 생산까지 미국 내에서 이뤄질 경우 불가피하게 생산 단가가 비싸질 수밖에 없다. 생산비용 상승은 결국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는 요인 중 하나다.


    게다가 미국이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 수입품에 관세를 부과할 경우 이는 그대로 물가 상승의 결과로 나타난다. 수입품을 비싼 가격에 구입해야 한다는 얘기다. 해외에서 부품, 소재를 사와야 하는 미국 기업 역시 관세로 인해 이를 비싸게 수입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이는 다시 생산비용 상승으로 이어지게 된다. 제품 가격이 올라갈 수록 이를 사려는 사람들은 줄어든다. 독일 최대 은행 도이체방크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매튜 루제티는 “보호무역주의 강화와 관세 인상은 미국 경제 성장을 저해하고 인플레이션을 높이는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했으며 미국 대형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관세율이 1퍼센트포인트 오를 때마다 인플레이션이 0.1퍼센트포인트씩 상승할 것”으로 예상하기도 했다.


    더 강력해질 미국 우선주의, 위기와 기회는?

    그동안 미국 부의 원천은 실리콘밸리의 IT 기업, 뉴욕 월스트리트 금융가였다. 애플, 메타 등 급성장을 거듭해온 미국 기술 기업에 투자해 돈을 벌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들 분야에서 고액의 연봉을 받고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은 좋은 대학을 나온 엘리트들로 제한되었다는 점이었다. 미국 기술 기업이 급속한 성장을 거듭하는 사이, 미국 제조업은 아시아 지역의 제조업체와의 경쟁에 밀려 몰락했다. 미국 저학력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사라진 것이다. 고학력 엘리트와 저학력 노동자 사이의 극단적인 양극화가 미국을 아프게 만들었다. 트럼프는 이러한 정서를 파고들었고, 다시 미국의 대통령에 오를 수 있었다.


    따라서 트럼프 2.0 시대 미국의 주식 시장은 제조업을 중심으로 상승세를 이어갈 것이다. 여기에 연준의 금리 인하, 재정 확대 등 거시경제적 요인이 맞물려 미국 증시는 매력적인 투자처가 될 전망이다. 미국 주가지수와 연동된 상장지수펀드(ETF)도 투자 기회다. 트럼프 1기 집권기 거시경제 정책의 특징은 양적 완화였다. 당시 양적 완화로 풀린 달러화는 주식 시장에 유입되었다. 반면, 한국 등 아시아 제조업 국가들에게 트럼프는 기회보다는 위험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 시장에 대한 의존도 높은 제조업 기업들은 미국 내에 제조 시설을 확보하는 등 대응 전략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미국 제조업과 함께 주목해야 할 분야가 있다. 바로 한국의 방위산업이다. 한국의 제조업이 트럼프 리스크를 안고 있는 반면, 한국 방위산업에는 트럼프 2.0 시대가 기회로 다가올 수 있다. 세계 각 국가들은 이제 스스로 자국의 안보를 지켜야 하는 부담을 짊어지게 되었다. 미국이 없는 세계에 대한 공포는 대규모 군비 증강을 불러올 가능성이 크다. 각 국가들은 탱크, 대포, 미사일, 군함 등을 사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한국 방위산업이 세계 무기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는 요인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로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해 미국, 독일을 비롯한 군사기술 선진국으로부터 무기를 도입해왔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기술이전을 받았고 그렇게 축적한 재래식 무기 기술이 오랜 기간 축적되어 지금의 명품 무기를 만들어냈다. 미국으로부터 첨단 무기를 직접 사기 어려운 다른 국가들 입장에서는 한국의 무기들이 매력적인 대안이 될 수밖에 없다. 둘째, 가격 경쟁력이다. 미국, 독일의 방위사업체에 비해 한국의 무기들은 가성비가 높다. 첨단 군사기술이 들어가 있으면서도 비교적 싸게 살 수 있다는 뜻이다. 셋째, 기술이전과 수입국 현지 생산 등의 판매 옵션 역시 장점이다. 수입국은 한국의 무기를 대규모로 구매하면 추후 이를 자체 생산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된다.



    부의 원천, 바다를 둘러싼 첨예한 대립_인도/태평양 리스크

    해양 패권, 도전하는 자와 지키려는 자

    미국은 해상교통로의 안전이라는 공공재를 제공해왔다. 항행의 자유라는 국제 규범은 미국의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지켜진 셈이다. 그러나 최근 미국과 중국의 전략 경쟁이 첨예해지면서 해상교통로에 대한 경쟁도 치열해졌고, 그 결과 안전이 잠재적 위협을 받을 수 있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부상하는 중국이 기존 해양 질서를 흔들어 변경하려는 시도를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중국의 학자들 역시 해양에서 중국과 미국의 충돌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했다. 중국의 해양력 발전은 역사적 흐름이며, 해양력을 둘러싼 중국과 미국의 경쟁은 지속될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중국은 2015년 5월 26일 제10차 국방백서를 발간하고, 해양 안보 전략을 제시했다. 백서를 통해 전략적 수요에 따라 근해 방어에서 근해와 원해(open sea) 방위를 결합한 형태로 전략 범위를 확대해야 함을 밝혔다. 지속적인 경제 발전을 위해 필수적으로 해양 안보에 전념해야 한다는 중국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해양 안보 전략에 따라 중국은 국가 주권, 해상교통로의 보호, 해외 이익 등을 위해 해군의 작전 범위를 확대하기로 했다. 특히 원해 방어를 강조했는데 이는 미국을 잠재적 위협으로 설정했다는 증표로 봐야 한다. 해상교통로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충돌을 이미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해군이 원해로 작전 범위를 확대한 것은 인도/태평양 지역의 해상교통로에 대한 통제권을 갖겠다는 의미로 파악할 수 있다. 근해 방어는 중국의 주권과 해양에서의 권리와 이익을 보장하는 지역적 방어 전략에 초점을 둔다. 그렇다면 근해는 어느 범위까지를 가리키는 걸까? 중국 황해, 동중국해, 남중국해 등 제1도련선 안쪽의 중국 주변 세 바다가 여기에 포함된다. 이들 해역에 대해 중국은 주권적 문제임을 강조한다.


    반면 원해 방위는 근해를 넘어선 해역으로 그 범위를 명확하게 제한하고 있지 않다. 글로벌 수준에서 중국이 경제적 이익을 지키기 위한 해상 공간 정도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다만, 중국 해군의 확대된 작전 반경이 주로 서태평양과 인도양임을 감안할 때 이 두 대양을 가리켜 원해라고 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인도양에 쏟아지는 막대한 투자

    중국의 해양 전략 범위 확대에서 특히 주목할 지역은 인도양이다. 공식적으로 설정한 것은 아니지만, 중국은 해양 전략 차원에서 섬들을 이은 방어선 개념으로 도련선을 채택해왔다. 그리고 기존 중국의 도련선은 서태평양에서 인도양으로 확대되었다. 제1도련선은 일본 본토, 오키나와,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를 잇는 선이며 이어 제2도련선은 일본에서 마리아나제도, 미크로네시아를 잇는 선이다. 제3도련선은 하와이를 중심에 둔 선이다. 제1도련선에서 중국의 적대국 전력의 접근을 차단하고, 제2도련선에서 통제력을 행사하며, 제3도련선에서 대양 해군을 운영한다는 게 중국의 계획이다.


    그런데 최근 인도양에서 중국의 도련선들이 나타났다. 제4도련선은 파키스탄의 과다르항, 스리랑카의 함반토타를 연결하는 선으로 이는 인도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된다. 제5도련선은 지부티의 도라레 항에서 시작한다. 인도양에서 중국이 해양력을 확대하는 지역은 기존에 미국의 군사적 영향력이 미치던 곳과 중첩된다. 중국이 운영권을 갖고 있는 파키스탄 과다르항과 스리랑카에서 99년 동안 운영권을 양도받은 함반토타항을 잇는 도련선은 미국의 군사기지인 디에고 가르시아를 관통한다. 중국이 2017년 지부티에 건설한 도라레항과 스리랑카 함반토타항은 모두 미국의 해군 기지와 인접해 있다. 결과적으로 인도양에서 미국의 해양력은 중국의 해양 전략 범위 확대에 따라 제한을 받게 된다. 인도양은 아프리카/중동/남아시아 지역이 접해 있는 곳으로 지정학적인 중요도가 매우 높은데, 이곳에서 미국과 중국이 패권을 두고 경쟁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인도/태평양 지역에서는 미국의 해군력이 반드시 중국을 압도한다고 장담할 수 없다는 점이다. 중국은 대륙 국가인 동시에 해상 국가라는 이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가까운 바다에서뿐만 아니라 육지에서도 동시에 미국의 해군 전력을 공격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즉 중국은 강력한 해군 함대를 보유하지 않고도 육상에서 발진하는 전투기, 드론, 대함 순항미사일, 탄도미사일 등의 무기로 미국과 경쟁할 수 있다. 또한 유사 시 동중국해에 진입하는 미국 항공모함을 중국 본토에서 요격할 수 있는 둥펑 21DF-21, ASBM 등의 시스템 파괴 전력도 이미 갖춘 상태다. 반면 미국의 해군 전력은 주로 바다에서 싸워야 한다는 지리적 약점을 갖는다. 중국은 해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대륙에 순항미사일과 탄도미사일을 다수 배치했고 이에 미 해군 전력은 중국 연안에 근접한 600킬로미터 이내로 접근하는 데 큰 장애를 갖는다. 중국의 국방 전문가들은 미국과 미국의 동맹국이 배치한 요격 미사일이 중국의 탄도미사일을 격추하는 데 성공할 가능성이 낮을 뿐만 아니라, 비용이 너무 비싸다는 점을 지적했다.


    군함 경쟁이 한국에 가져다줄 기회는?

    미 해군 지휘부는 중국과 러시아가 유라시아 대륙의 중요한 주변 지역(Rimland)과 그 인접 해역을 통제하지 못하도록 막는 합동 전력의 핵심 역량이 바로 해군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미국과 동맹국 및 파트너 간의 해상교통로 보호를 미 해군의 주요 임무로 설정했다. 만일 미국이라는 단일 국가의 군사력으로 충분한 억지력을 갖지 못할 경우, 아시아 지역 국가들은 독자적으로 해군력을 강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잠수함과 같은 비대칭 전력 수요는 지속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이 경우 한국의 조선 산업이 떠오를 수 있다.


    한국은 해양에서의 현상 유지를 목표로 설정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해군력을 바탕으로 인도해, 서태평양 해상교통로의 안전을 공공재로 제공해왔다. 한국은 미국이 제공하는 공공재를 향유해온 국가 중 하나다. 그러므로 지배국 미국이 형성한 해양 질서를 현상 유지하는 것이 한국의 국익과 부합한다고 봐야 한다. 결과적으로 한국 입장에서 합리적인 선택은 미국의 해양력 우세를 지원하는 안보 정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즉 해양에서 도전국의 현상 변경 시도를 차단하는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도전국에게 기회의 창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미국의 상대적인 해양력 쇠퇴 위협을 보완하기 위해 미국의 해군력을 지원할 수 있는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의미다.


    현재 미국의 조선 역량은 현저하게 뒤떨어진 상태다. 미국이 중국에 맞서기 위해서는 동맹국인 한국의 조선 역량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었다. 한국의 해군 함정 건조는 세계 최고 수준이므로, 미국의 군함 건조 역량을 지원하는 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 전 세계를 기준으로 미국의 선박 생산량 비율은 0.1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는 반면, 한국의 선박 생산량 비율은 2020년 기준 31.5퍼센트를 차지한다. 중국의 선박 생산 비율이 40.3퍼센트인 것을 고려하면, 미국으로서는 해양력 우세를 유지하기 위해 동맹국 한국의 조선 산업 지원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다만 군함에 탑재하는 레이더나 미사일 기술 등의 고도화를 위해선 미국의 기술 지원도 필요하다. 한국은 이 과정에서 미국 첨단 군함 장비 기술을 습득하는 기회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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