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마음 공부
 
지은이 : 배영대
출판사 : 클라우드나인
출판일 : 2023년 07월




  • 숨쉬고 먹고 말하고 산책하고 생각하는 모든 순간에 마음챙김이 필요합니다. ‘현생’에 지친 헝클어진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마음공부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노자의 가르침을 통해 마음챙김 명상을 시작해보세요.


    어른의 마음공부


    도경道經: 어른의 도는 유연하고 담담하다

    이름과 모양에 얽매이지 말고 관조하라

    인간은 생각의 감옥에 갇혀 사는 동물이다. ‘도덕경의 첫 구절인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는 자신을 옭아맨 생각의 감옥에서 벗어나게 하는 ‘해방의 만트라다. 마음을 깨끗이 하고 깨달음의 지혜를 얻기 위해 외우는 진언(眞言)을 산스크리트어로 만트라(mantra)라고 한다.


    생각은 마음에서 일어나 말로 표출된다. 마음에서는 복수의 생각이 동시에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 생각을 입으로 내뱉을 때는 한 가지 생각밖에 표출하지 못한다. 인간의 한계다. 그 한계 속에서 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부분적으로 한 가지 생각밖에 말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으면서 마치 자신의 말이 전체를 표현한 것처럼 과장해선 안 된다. 과장된 말이 재앙의 씨앗이다. 노자는 세상에 대한 최고의 진리인 도()조차도 말로 표현하면 ‘참된 도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도가 그러한데 그 밖의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무와 유가 무엇인지 알아차려야 한다

    이 구절에서 ‘도의 자리에 그 무엇이라도 가져다 놓아보자. ‘나를 대입해보면 어떨까? ‘나를 나라고 말하면 참된 나가 아니다.가 된다. 나는 나 홀로 존재할 수 없다. 나는 나 아닌 것들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다. ‘진리를 진리라고 말하면 참된 진리가 아니다.라는 표현도 가능하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옭아매는 구속의 밧줄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말로 표현된 것은 그 무엇이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선언이다. 절대적 우상을 만들지 말라! 영원한 자유의 길이 여기서 시작된다.


    노자의 메시지는 마음 자세에 관한 것이다. 자신의 눈과 귀에 포착된 것이 무엇이든지 그 이름과 모양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절대적으로 고정된 것은 없다는 마음 자세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감각기관에 포착된 대상의 이름과 모양에 자동적으로 끌려가지 않을 것이다.


    도는 우리가 발로 걸어 다니는 길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생각이 작용하는 원리와 방법을 상징한다. ‘도덕경에서 궁극적으로 다루는 주제는 생각의 원리와 방법이다. 두 발을 조화롭게 사용해야 잘 걸어갈 수 있듯이 생각도 두 가지를 조화해야 잘 살아갈 수 있다.


    두 가지 생각이란 무엇일까?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느낌이나 판단이 두 가지로 나타남을 가리킨다. 우리의 생각은 대개 좋음과 싫음, 잘함과 잘 못함, 아름다움과 추함, 귀함과 천함, 큼과 작음 등으로 표현된다. 대립적으로 보이는 두 생각이 서로 연관되어 있는 모습이다. 필자는 이를 ‘대칭적 상관관계라고 부른다. ‘도덕경에는 수많은 대칭적 상생관계의 사례가 소개된다. 대표적인 표현이 유(有)와 무(無)다. 무와 유로 순서를 바꿔 표기해도 된다. 어는 것을 앞에 놓아도 좋다. 중요한 것은 유와 무가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것이 ‘도덕경 명상의 핵심이다.


    유와 무는 노자 철학의 골조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려는 ‘도덕경 명상의 뼈대이기도 하다. 유와 무는 각기 서로의 근거가 되며 공존하는 상생관계다. 이를 2장에서 유무상생(有無相生)으로 표현했다. 유무상생은 세상 만물이 존재하고 운행하는 원리다. 유무상생이 곧 도의 내용이다. 노자는 1장부터 81장까지 계속 다양한 방식으로 유무상생의 도를 변주한다. 각종 비유나 상징으로 표현된 유무상생의 의미를 각 장에서 마치 숨은그림찾기처럼 알아차리는 것이 ‘도덕경명상이다.


    1장에서 한자 원문을 무(無)와 유(有)에서 끊어 읽지 않고 무명(無名)과 유명(有名), 무욕(無欲)과 유욕(有欲)에서 끊어 읽어도 된다. 무명과 유명, 무욕과 유욕도 대칭적 상관관계이다. 따라서 이렇게 읽는 것이 처음에는 더 이해하기 쉽다. 무명과 유명, 무욕과 유욕에서 명(), 욕()을 빼면 결국 무, 유만 남는다. ‘명과 ‘욕의 사이에 그 어떤 명사, 형용사, 동사라도 가져다 놓아보자. 그 말들은 다 자신이 부르고 싶은 이름, 느낌, 혹은 하고 싶은 일이나 판단인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수많은 느낌과 판단의 공통적인 속성을 ‘이름()과 ‘바람()으로 추상해서 나타낸 것이고 더욱 추상하면 결국 유와 무만 남게 된다. 유와 무의 대칭적 상관관계가 도의 내용이다.


    욕심이 없어야 사물의 실상(實相)을 볼 수 있다. 실상이란 대칭적 상생관계가 공존하는 모습이다. 욕심이 작동하면 사물의 겉모습만 보게 된다. 무는 못 보고 유만 보는 것이다. 한쪽만 바라보면서 전체인 양 큰소리를 내면 어떻게 될까? 다툼이 끝이 없게 된다. 다툼은 결국 가공할 살상 무기로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으로 이어진다. 전쟁을 줄이려는 마음이 ‘도덕경을 관통하는 핵심 사상이다.


    무의 세계를 알아차림이 마음챙김이다

    수레가 제대로 굴러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그릇이 제 기능을 발휘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집이 주거 공간으로 잘 쓰이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노자는 텅 빈 공간이라고 말한다. 텅 빈 공간을 가리키는 기호는 무()다. 텅 빈 공간이 있기에 만물의 쓰임이 있게 된다. 무와 유의 대칭적 상관관계가 공존하는 모습을 노자는 수레, 그릇, 집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유와 무는 서로 의지하는 상생관계인데 당기무(當其無)라는 표현에서 마치 무를 더 강조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는 ‘방편적 강조로 보아야 한다. 사람들이 모두 유의 세계만을 바라보면서 무의 가치를 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놓여 있는 주변을 한번 잠시 돌아보자. 편안한 마음으로 자신의 호흡에 주의를 기울여보자. 마음의 눈과 마음의 귀로 무의 세계를 알아차리는 것이 마음챙김이다. 무의 세계를 알게 되면 대칭적 상관관계의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게 된다.


    바퀴통 속이 비어있기에 수레의 쓰임이 있다

    수레에는 두 개의 빈 공간이 있다. 수레의 짐을 싣는 공간이 있고 바퀴통 속 공간이다. 빈 공간을 상징하는 기호가 무다. 수레에는 두 개의 무가 있는 셈이다. 이 장에서 노자가 말하는 무는 바퀴통 속 공간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 쓰임을 이야기할 때 바퀴통의 쓰임이 아니라 수레의 쓰임을 언급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독자들은 혼동을 느끼기도 한다. ‘바퀴통 속이 비어 있기에 바퀴통의 쓰임이 있다고 했으면 혼동이 줄었을 것이다.


    노자는 왜 ‘바퀴통의 쓰임이 있다고 하지 않고 ‘수레의 쓰임이 있다고 했을까? 바퀴가 없으면 수레가 아니다. 굴러가는 바퀴가 있어야 수레는 수레로서의 작용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바퀴가 굴러가려면 바퀴통의 가운데 빈 공간이 있어야 한다. 바퀴통 속 빈 공간의 작용은 궁극적으로 수레를 굴러가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퀴통의 쓰임이 있다고 하지 않고 ‘수레의 쓰임이 있다고 한 것이다.


    수레와 달리 그릇과 집의 경우엔 빈 공간의 의미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텅 빈 공간을 상징하는 기호가 무라는 점을 알아차리는 것이 핵심이다. 무는 유처럼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지 않지만 그 유가 제대로 작용을 하여 이롭게 쓰이는 데 무가 없어서는 안된다. 이것이 유무상생(有無相生)이다.


    말은 적게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희언(希言)은 무언(無言)과 같은 의미다. 1장의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2자의 불언지교(不言之敎), 5장의 다언삭궁 불여수중(多言數窮 不如守中), 등이 모두 언어의 한계를 가리키는 경구다. 말을 많이 하면 자주 곤궁한 처지에 이르게 되니까 그 중()을 간직하는 것이 좋다. ‘중이란 자신의 마음속 감정이나 판단이 밖으로 표출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5장의 수중(守中) 역시 희언, 무언, 불언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모두 무위(無爲)의 다른 표현들이다. 자연스러움이 곧 무위다.


    자연스러움의 사례로 강풍과 소나기를 제시했다. 아무리 거센 바람도 아침 내내 불지 못하고 아무리 세찬 소나기도 종일 퍼붓지 못한다.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 사이의 텅 빈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전개되는 현상이다. 인간의 언어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만물의 실상을 자신의 생각과 욕심대로 재단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언어는 마치 강풍이나 소나기 같은 모양이다. 그런 강풍이나 소나기 같은 말을 계속 내뱉으며 다른 사람과 함께 평화롭게 잘 살아갈 수는 없다. 함께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말을 조심하는 것이 마음챙김이다.


    마음챙김 명상은 좋은 습관을 들이는 훈련이다

    말을 조심하기 위해선 사물의 실상을 관조해야 한다. 사물의 실상을 관조하면 자연의 도()를 따르게 된다. 도는 오직 자연을 본받고 있기에 인간이 도를 따르면 그 마음과 행동이 자연스러워진다. 자연의 도를 따라 자연스러워지는 것, 그것이 바로 도에 종사(從事)하는 마음이다. 종사는 따르고 섬긴다는 뜻이다. 도에 종사한다는 것은 행동거지(行動擧止)를 도에 맞춘다는 의미다.


    도를 따르고 섬기다 보면 도와 같아진다. 도를 체득해 그 도가 나의 마음에 쌓인 것이 덕()이다. 덕을 많이 쌓은 사람은 덕과 같아진다. ‘잃은 사람이란 도와 덕을 잃은 사람을 가리킨다. 도와 덕을 잃은 사람은 잃음과 같아진다. 인간의 몸과 마음은 습관의 지배를 받는다. 습관의 지배를 여기선 같아진다고 표현했다. 마음챙김 명상은 좋은 습관을 들이는 훈련이다.


    종사어도자(從事於道者) 이후의 구절에 대한 감산의 해석을 참고할 만하다. 도를 체득한 사람이 도 있는 자와는 그 도를 함께하고 덕 있는 자와는 덕을 함께하며 도와 덕을 잃은 사람과는 속됨을 함께한다는 뜻으로 풀이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도와 덕을 잃은 사람에 대한 태도다. 감산은 “세속의 평범한 사람을 만나도 성인은 속됨을 함께 나누어 가진다. 나를 소라고 부르면 소가 되고 말이라고 부르면 말이 된다. 옮음도 옳지 않음도 없다는 것이다.”라고 해석했다.


    인간관계의 열쇠는 마음 씀씀이에 달렸다

    도를 따르는 사람이 자신과 비슷한 도반(道伴)만 만나며 살 순 없을 것이다. 도와 덕을 잃은 사람과도 만나 관계를 잘 유지하며 살아야 한다. 감산의 해석은 그 점을 일깨운다. 도와 덕을 잃은 사람과도 함께하려면 자신만 잘난 척하고 뽐내는 행위를 삼가야 한다. 자신의 빛을 부드럽게 하여 티끌과 함께 어울리는 화광동진(和光同塵)의 마음과 같은 이야기다.


    사람과의 관계를 잘 풀어가는 열쇠는 마음 씀씀이에 달렸다. 관계를 풀어가는 첫 단계는 나의 마음이다. 먼저 상대를 믿으면 상대도 믿음으로 화답한다. 자신의 믿음이 부족하면 상대의 불신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신부족언 유불신언(信不足焉 有不信焉)은 17장에서도 나왔다. 그만큼 중요한 표현이기에 반복되는 것이다.



    덕경德經: 어른의 덕은 치우침 없이 자연스럽다

    눈과 입을 닫으면 삶의 수고로움이 없다

    도()와 덕(德)의 관계를 어미와 자식으로 표현했다. 도는 유무상생(有無相生)의 원리이고 그 도의 원리가 만물에 체득된 것이 덕이다. 덕은 오직 도를 따른다. 도의 원리는 하나이지만 도를 따르는 덕은 세상 만물에 다 적용된다. 하나의 달이 1,000개의 강에 비추면 마치 1,000개의 달처럼 보이는 이치와 같다.


    도의 원리를 체득하여 만물에 적용된 덕의 쓰임을 알아차리고, 또 만물에 나타나는 덕의 쓰임을 보면서 도의 원리를 계속 지켜나갈 수 있으면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을 것이다. 죽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언젠간 죽는다. 하지만 오래도록 위험에 빠지지 않고 장생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런 섭생의 원리를 사회와 국가에 적용하면 오래도록 평화롭게 잘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크고 화려한 것 대신 작은 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유무상생의 도와 덕은 감각기관에 대한 의존도가 낮다. 눈과 입에만 의존해선 대칭적 상관관계의 양면을 다 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눈과 입이 재앙의 출입구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함부로 보고 함부로 말해선 안 된다. 대칭적 상관관계의 공존을 통관하는 마음의 눈으로 보고 마음의 입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크고 화려한 것을 따라가는데 노자는 오히려 작은 것을 보라고 권한다. 큰 것이 유()의 세계라면 작은 것은 무(無)의 세계다. 보이지 않는 미세한 세계를 보는 마음을 명(明)이라고 부른다. ‘해 일()과 ‘달 월(月)을 합쳐놓은 ‘명은 대칭적 상관관계를 상징한다. 낮과 밤을 모두 통관하는 마음이 ‘명이다. 이를 ‘밝음이라고 번역하면 ‘어둠과 같이 있는 밝음이란 의미가 살아나기 어렵다. ‘참된 밝음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으나 그냥 ‘명이라고 해도 좋다. 이름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의미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도덕경에서 강()은 대개 안 좋은 의미로 쓰이는데 여기선 그렇지 않다. 어떤 의미와 생각에 고착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강함과 부드러움은 대칭적 상관관계다. 강함이 강함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 이면에 부드러움이 있기 때문이다. 부드러움을 품고 있는 강함이 ‘참된 강함이다. 이 또한 그냥 강()으로 표기해도 좋다. 이름에 걸려 넘어지지 말고 그 의미를 알아차려야 한다.


    다른 사람의 작은 티끌과도 함께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에게나 빛나는 장점이 있다. 작은 것을 보라는 말이 빛나는 장점을 버리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의 빛나는 장점을 활용하면서 다른 사람의 작은 티끌과도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습상(習常)이라고 한다. 상(常)에는 대칭적 상관관계를 분리하지 않는 의미가 담겨있다. ‘습상을 ‘항상 같이 있음을 익힘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도덕경의 전문 용어로 보아 그냥 ‘습상이라고 해도 좋다. 이름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의미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유무상생과 화광동진(和光同塵)의 도를 체득하는 것이 ‘습상이다.


    다투지 않는 덕이 천하를 끌어안는다

    지옥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싸움이 일어나는 곳이 지옥이다. 싸움은 화를 내면서 시작된다. 한번 화를 내면 세상은 곧 지옥으로 바뀐다. 한번 화를 거둘 때 지옥은 천당으로 바뀐다. 지옥과 천당이 본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성냄과 분노가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고 따뜻한 한마디가 세상을 천당으로 바꾼다.


    덕이 있는 사람은 적과 싸우지 않는다

    가장 잘 싸우는 사람은 밖에 있는 적과 싸우지 않는다. 밖으로 향한 관심의 방향을 안으로 전환하여 내면의 변화를 관조하는 사람이 정말 잘 싸우는 사람이다. 속에서 화가 일어나는 기미를 알아차리면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게 된다. 성냄을 알아차리는 시간이 처음 시도할 때는 길었다가 내면을 관조하는 연습을 계속 할수록 짧아진다. 점점 짧아지다 보면 아예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다투지 않는 덕이다. 힘을 뽐내지 않고 화내지 않고 맞서지 않고 자신을 낮추는 경지다. 이런 덕을 쌓을 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생긴다. 그 힘은 거센 무력이 아니라 부드러운 마음의 힘이다. 하늘과 땅이 만물을 살리고 키우는 자연스러움을 본받는 길이다.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완력이 아니라 포용력이다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자신의 마음과 다른 사람의 마음이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믿음이 부족하면 다른 사람도 나를 신뢰하지 않는다. 강과 바다가 계곡의 왕이 되는 이유는 낮은 곳에 처하면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완력이 아니라 바다처럼 낮고 넓고 깊은 포용력이다. 이것이 태고부터 지금까지 전해지는 도()와 덕()의 항상 그러한 법칙이다.


    세상의 모든 죽음은 마음챙김의 계기다

    권력이 귀하고 높을수록 천하고 낮은 것이 자신의 뿌리임을 잊어선 안 된다. 백성은 권력의 뿌리다. 백성이 배를 주릴 정도로 빈곤한데 권력이 세금을 너무 많이 걷는다면 자신의 뿌리를 갉아먹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정치는 백성을 잘 다스리는 일이지만 그 출발은 권력자의 마음을 다스리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마음부터 돌아보는 정치가 무위(無爲)다. 마음을 먼저 돌아보지 않고 정치하려는 것이 유위(有爲)다.


    백성을 다스리기 어렵게 된 이유는 권력의 유위에 있다. 권력의 유위는 백성을 함부로 대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가혹한 세금으로 백성을 굶주리게 하고 무리한 공사나 살육의 전쟁에 백성을 함부로 동원하는 것이 유위의 폭정이라 할 수 있다. 유위의 폭정이 계속되면 백성이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사태까지 이를 수 있다.


    ‘죽음 명상은 마음챙김의 마지막 관문이다

    상황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제 권력의 폭정을 뒤엎기 위해 백성이 들고 일어나라고 노자가 혁명을 선동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럼 권력의 폭정에 가만히 숨죽이며 노예처럼 죽은 듯 살라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다. 여기서 노자는 경제와 정치의 사회적 문제를 삶과 죽음의 철학적 문제로 전환한다.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눈이 바뀌지 않으면 경제와 정치의 문제가 근원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을 별개의 사태로 보는 것이 유위다. 삶과 죽음을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로 같이 있다고 보는 것이 무위다. 삶과 죽음을 따로 보면 삶만을 위하며 함부로 오만한 언행을 일삼게 된다. 삶과 죽음을 같이 보면 죽음이 있기에 삶이 의미가 있음을 알고 겸손하게 처신한다.


    세상의 모든 죽음은 마음챙김의 계기가 된다

    참된 정치는 참된 세계관에서 출발한다. 유위의 권력을 무위의 권력으로 전환해야 한다. 무위의 정치는 권력의 자리 교체나 제도의 개혁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혁명을 꿈꾸고 제도를 뜯어고치려는 이들의 마음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 마음의 혁명이 우선이다. 그래야 세계가 바뀐다.


    위와 아래, 권력과 백성은 함께 어울려 하나처럼 움직이는 대칭적 상관관계다. 권력이 자연스러운 유무상생(有無相生)의 원리를 망각하고 함부로 하는 유위를 멈추어야 한다. 권력의 무위는 권력의 잘못된 생각을 내려놓는 것이다. 무의 세계를 알아차리면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게 된다.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무위의 다른 이름이다. 함께 어울려 잘 살아가는 비결이 여기에 있다.


    ‘도덕경의 후반부는 삶과 죽음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전개된다. 생사(生死)를 유무(有無)처럼 공존하는 관계로 보는 것은 마음챙김의 마지막 관문이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의미가 있다. ‘죽음 명상을 통해 매일 매순간 새롭게 다시 부활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죽음은 마음챙김의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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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