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무상함에 지친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구원할 수 있을까? 허무와 염세로 가득 찬 삶에서 우리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니체가 살아가던 시기,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신앙, 과학에 대한 믿음, 인간의 지성과 이성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고자 했으나, 니체가 생각하기에 진정한 삶의 주인이 되는 방법은 인간이 지닌 힘으로 스스로 고통과 고난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잠재력은 어디에서 끌어낼 수 있는가? 니체는 바로 ‘예술’을 통해 인간을 염세와 허무로부터 구원하고자 했다. 예술을 통한 도취는 인간의 내면에 움트고 있는 생명력을 해방하고, 나아가 이 세계를 긍정하는 데까지 이어진다. 니체가 『비극의 탄생』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바로 삶을 즐기듯이 살면서 긍정하라는 것이었으며, 아직도 니체의 철학이 현대인에게 필요한 이유다.
“고통을 긍정하고 삶을 유희하라”
누구보다 삶을 사랑했던 철학자의 인생 조언
아모르 파티, 즉 ‘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니체의 전언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울림을 남겼다. 인생이라는 비극 위에서 파멸과 탄생을 거듭하며 운명을 긍정할 것, 이것이 바로 니체 철학의 대표적인 메시지다. 운명애, 초인의 철학, 영원회귀 등 니체를 위대한 철학자로 만들어준 핵심 사상의 단초를 우리는 『비극의 탄생』에서 엿볼 수 있다. 그리스 비극의 기원과 본질을 탐구하면서 진정한 예술의 의미를 찾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생명력을 자극할 철학적 사유를 나누고자 한 것이다. 니체의 예술철학은 예술에 대한 탐구뿐만 아니라 내 삶을 단단하게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니체는 인간이 누군가를 통한 구원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의지를 통해 삶의 고난까지 즐기면서 인생을 춤추듯 살아간다면 강한 존재로 거듭날 것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니체의 예술철학을 통해 삶을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법, 더 나아가 내 인생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 저자 박찬국
모든 것이 변하는 시대에 변하지 않을 삶의 의미를 찾는 철학자이다.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니체와 하이데거의 철학을 비롯한 실존철학이 주요 연구 분야로 원효학술상, 운제철학상, 반야학술상 등을 받았다. 최근에는 불교와 서양철학 비교를 중요한 연구 과제 중의 하나로 삼고 있다. 동서양의 사상을 편견 없이 넘나들며 인간과 세계를 탐구한다. 삶을 한 차원 더 끌어올리는 철학적 사유를 대중과 함께 나누는 강연과 글쓰기에도 힘쓰고 있다. 이 책에서는 주어진 운명과 무력감의 고통에 빠진 현대인에게 마음의 생명력을 키우고 삶의 주도권을 되찾을 수 있게 하는 니체의 통찰을 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 『참을 수 없이 불안할 때, 에리히 프롬』, 『이런 철학은 처음이야』, 『사는 게 힘드냐고 니체가 물었다』,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원효와 하이데거의 비교연구』, 『니체와 불교』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헤겔 철학과 현대의 위기』, 『마르크스주의와 헤겔』, 『실존철학과 형이상학의 위기』, 『니체 I, II』, 『근본개념들』 외 다수가 있다.
■ 차례
이 책을 읽기 전에 학문의 분류
주요 키워드
들어가는 글 인생을 춤추고 노래하듯이 살 수 있을까
1부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가장 불행한 존재인 인간과 『비극의 탄생』
왜 삶은 고통과 갈등으로 가득 차 있는가
음악은 우주적 생명력을 상징하는 디오니소스의 표현이다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라
내 안의 비극적 영웅을 깨우다
예술을 통해 삶은 정당화된다
Q/A 묻고 답하기
2부 예술은 위대한 삶의 자극제다
비극을 통해 생명력의 고양을 경험한다
우리에게는 고통을 감당하는 힘이 있다
소크라테스냐, 디오니소스냐
음악에서 새로운 신화가 탄생한다
참된 예술은 삶을 구원한다
Q/A 묻고 답하기
나가는 글 고대 그리스 비극 정신에서 찾은 새로운 신화
주석
현직 서울대 교수진의 강의를 엄선한 ‘서가명강(서울대 가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명강의)’ 시리즈의 서른두 번째 책입니다. 실존철학을 쉬운 언어로 풀어낸 서울대학교 철학과 박찬국 교수가 우리의 인생을 바꾸는 삶의 태도에 관한 니체의 가르침을 전달합니다.
내 삶에 예술을 들일 때, 니체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가장 불행한 존재인 인간과 ‘비극의 탄생
예술을 실마리 삼아 인간과 세계를 탐구하다
칸트가 말했듯 철학의 모든 물음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귀착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인간이기에 인간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것이 가장 멀리 있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가장 가까이 있기에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게 뭔지 파악하기란 너무나도 어렵다는 말이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말해보라고 한다면 누구든 답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철학을 공부하지 않는 보통 사람뿐 아니라 철학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철학에서도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다양한 학설이 존재한다. 이런 학설들은 심지어 서로 모순될 정도로 대립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인간은 다른 동물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학설도 있는 반면, 동물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학설도 존재한다. 인간은 육체로 환원될 수 없는 정신을 갖는다는 학설도 있지만, 정신은 존재하지 않고 사실은 육체만 있을 뿐이라는 학설도 있다.
‘비극의 탄생을 썼을 당시의 니체는 고전문헌학 교수였다. 고전문헌학은 호메로스의 작품들이나 그리스 비극같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적인 문헌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비극의 탄생은 제목만 봐서는 그리스 비극의 기원을 탐구하는 고전문헌학적인 저서처럼 보인다. 그러나 니체는 이 책에서 고전문헌학적인 탐구를 넘어서 예술과 인간 그리고 세계에 대한 독자적인 철학을 보여준다.
‘비극의 탄생은 그리스 비극을 비롯한 모든 예술의 기원과 본질을 탐구하면서 인간이라는 존재를 탐구한다. 물론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탐구하기 위해 반드시 예술을 실마리로 삼을 필요는 없다. 종교를 실마리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신을 믿고 섬기는 예식을 행하는 것은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체는 종교를 실마리로 삼지 않았다. 그리스도교처럼 인격신을 믿는 종교가 근대 과학의 발달과 함께 설득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니체는 종교가 더 이상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와 방향을 제시해줄 수 없다고 느끼고, 예술에서 구원을 찾고자 했다.
‘비극의 탄생은 예술을 실마리로 인간과 삶의 방향과 의미를 탐구하려는 시도인 동시에 세계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하이데거가 말했듯 인간은 ‘세계-내-존재다. 이것은 어떤 사물이 어떤 공간에 존재하는 것처럼 인간이 세계 안에 존재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인간은 세계에 던져진 채로 세계에 순응하거나 그것과 투장하거나 그것을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살아간다. 인간의 삶은 세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분석은 필연적으로 인간이 사는 세계에 대한 분석이 된다. 세계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전체다. 이러한 전체의 기원과 구조를 탐구하는 철학 분야가 ‘형이상학이다.
요컨대 니체의 ‘비극의 탄생은 예술의 본질을 탐구하는 예술철학이면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철학적 인간학이며, 세계 전체의 기원과 구조에 대해 탐구하는 형이상학이기도 하다.
음악은 우주적 생명력을 상징하는 디오니소스의 표현이다
아폴론적 예술과 디오니소스적 예술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는 예술을 아폴론적 예술과 디오니소스적 예술로 나눈다. 아폴론적 예술은 건축, 미술, 조각, 서사시처럼 창작자와 감상자에게 사물을 조용히 관조하는 태도를 요구하는 조형예술이다. 디오니소스적 예술은 서정시, 음악, 춤과 같이 감정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면서 우리를 뒤흔드는 예술이다. 아폴론적인 것은 조형예술의 아름다움이 비롯되는 근본 원리이며,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비조형예술이 불러일으키는 도취가 비롯되는 근본 원리다. 아폴론적인 것이나 디오니소스적인 것 혹은 그리스 비극처럼 양자를 완전하게 구현할수록 훌륭한 예술이다.
아폴론적인 것이라는 개념의 기원은 그리스 신화의 아폴론 신에 있고,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디오니소스 신에 기원을 두고 있다.
아폴론은 태양과 지혜의 신으로서 도덕이나 법률을 주관한다. 아폴론은 또한 예언의 신이다. 따라서 델포이를 중심으로 한 그의 신전에서는 사람들이 무녀를 통해 신탁을 받는 일이 성행했다. 니체는 아폴론적인 것이라는 용어를 태양과 같은 밝음, 이러한 밝음 아래에서 모든 사물이 드러내는 균형, 절도, 아름다운 가상, 이러한 아름다운 가상을 형성하는 예술적 능력을 상징하는 용어로 사용했다.
디오니소스 신은 아폴론 신과 반대되는 성격을 갖는다. 아폴론이 지혜와 절도의 신이라면, 인간에게 포도를 재배하고 포도주 만드는 법을 가르쳐준 디오니소스는 술과 도취의 신이다. 디오니소스적인 도취의 상태에서 사람들은 아폴론적인 절도와 질서에 수반되는 모든 금기에서 벗어나 서로가 하나가 되는 합일을 맛보았다. 아폴론이 모든 것을 적절하게 나누면서 질서를 형성하는 신이라면, 디오니소스는 그러한 질서를 무너뜨리고 모든 것을 융합하는 신이다. 아폴론이 밝음과 절도 그리고 평정을 상징한다면, 디오니소스는 밤의 어둠과 혼돈의 심연 그리고 끊임없이 유동하고 변화하는 생명력을 상징한다.
니체는 고대 그리스에서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대립과 화해를 통해 새로운 예술 형식이 탄생해왔다고 본다. 니체는 이러한 현상을 남녀 간에 지속적인 투쟁과 주기적인 화해를 통해 자식이 탄생하는 것에 비유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각각 남성적인 원리와 여성적인 원리를 가리킨다고도 할 수 있다. 아폴론적인 것은 남성적인 절도와 균형 그리고 엄격함을,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여성적인 조화와 일치 그리고 부드러움을 의미하는 것이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여성적인 원리를 상징한다는 개념은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여성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던 사실과도 상통한다. 디오니소스 신화를 보면 디오니소스가 ‘마이나데스라고 불렸던 여성들을 거느리고 리디아, 프리기아를 비롯한 동방 여러 나라에서 포교를 한 것으로 그려진다. 마이나데스는 ‘광란하는 여자들이라는 뜻이다. 표범 등 짐승의 가죽을 걸친 그녀들은 나뭇가지로 만든 관을 쓰고 한 손에는 뱀이나 포도송이를, 다른 한 손에는 디오니소스 숭배의 표지인 지팡이를 든 채 노래하고 춤추면서 산과 들을 뛰어다녔다.
디오니소스 신과 ‘접신이 되었을 때 이 여자들은 시끄럽게 떠들면서 산기슭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추었고, 괴력을 발휘하여 나무를 뿌리째 뽑는가 하면, 야수를 갈갈이 찢어 피가 뚝뚝 흐르는 날고기를 먹었다고 한다. 그녀들은 디오니소스 숭배의 본고장인 트라키아나 프리기아에서 디오니소스 축제가 있을 때 열광적으로 난무하던 여신도들을 신화적으로 반영한 것으로 여겨진다.
‘비극의 탄생에서뿐 아니라, 니체의 사유 전체에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디오니소스는 봄에는 만물이 소생하고 여름에는 무성해지며 가을에는 시들고 겨울에는 모든 활동이 중단되지만, 다시 봄이 오면 만물이 소생하는 식으로 끊임없이 유희하는 세계의 생명력을 상징한다. 그리고 니체는 우리에게도 이런 생명력을 가지고 유희하듯 살 것을 권한다.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라
이 세계는 결핍의 세계인가, 풍요의 세계인가
‘비극의 탄생은 쇼펜하우어의 예술철학과 형이상학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렇다고 해서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예술철학과 형이상학이 전적으로 동일한 것은 아니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와 유사하게 아폴론적 예술 작품을 볼 때 우리가 관조적 태도에 빠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니체는 아폴론적 예술의 기원을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것처럼 이데아에 대한 순수한 인식에서 찾지 않고, 우리 내면의 자연스러운 충동, 꿈을 꾸려는 충동에서 찾는다. 니체는 아폴론적 예술의 기원을 쇼펜하우어처럼 의지에서 독립해 있는 순수한 관조적 이성에서 찾기보다는, 우리 내면의 자연스러운 충동에서 찾는 것이다. 또한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사물들의 객관적인 본질로서의 이데아는 니체의 철학에서는 꿈을 꾸려는 충동이 만들어내는 아폴론적인 가상이 된다.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차이는 근원적 일자의 본질을 어떻게 파악하느냐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쇼펜하우어는 근원적 일자로서의 세계의지는 끊임없는 욕망으로 인해 결핍감과 불만에 사로잡혀 내적으로 갈등하며 고통스러워한다고 본다. 따라서 세계의지의 표현인 개체들도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 인해 고통받고 갈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처럼 니체도 개체들의 이면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일자로서의 세계의지는 내적인 갈등과 고통에 사로잡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세계의지가 겪는 내적인 갈등과 고통의 원인을 쇼펜하우어와 전혀 다르게 파악한다. 쇼펜하우어는 그 원인이 충족되지 않는 무한한 욕망과 그로 인한 결핍감에 있다고 보는 반면, 니체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나는 자신의 창조적인 생명력을 세계의지가 발산하지 못하는 게 원인이라고 본다.
니체에 따르면 근원적인 일자의 내적인 모순과 불만은 근원적인 일자가 갖는 ‘풍요로움과 충만에서 비롯된다. 이는 헤라클레스처럼 힘이 터질 듯 충만하지만 발산할 곳이 없어서 괴로워하는 자가 겪는 고통과 유사하다. 바로 이것이 쇼펜하우어와 니체 사이의 결정적 차이이며 둘 사이의 모든 차이는 여기에서 비롯한다.
쇼펜하우어에게 이상적인 인간은 자신의 무한하고 맹목적인 욕망을 이성을 통해서 부정하는 금욕주의적인 인간이다. 이에 반해 니체에게 이상적인 인간은 자신의 넘치는 힘을 절도 있게 발산하는 인간이다. 쇼펜하우어에게서 이상적인 인간은 욕망에서 벗어난 부처와 예수와 같은 성자다. 이에 반해 니체에서 이상적인 인간은 넘치는 힘을 절도 있게 발산한 카이사르나 나폴레옹과 같은 자들이다. 니체는 카이사르나 나폴레옹 같은 자들은 넘치는 힘으로 많은 나라를 정복했지만 패자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다고 본다. 성자들 앞에서 우리는 평온함을 얻지만, 카이사르나 나폴레옹 같은 자들 앞에서는 두려움과 압도되는 느낌을 갖게 된다.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차이는 비극의 본질에 대한 견해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서 비극의 주인공은 우리에게 세상의 허망함을 깨닫고 자신의 욕망을 부정할 것을 가르친다. 이에 반해 니체의 철학에서 비극의 주인공은 넘치는 힘 때문에 고통과 고난을 찾으면서 자신의 힘을 시험해보는 자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서 비극의 주인공은 우리에게 세상과 욕망에서 등을 돌릴 것을 가르치는 반면, 니체의 철학에서는 비극의 주인공처럼 생명력으로 충만한 존재가 될 것을 가르친다.
말년의 니체는 ‘비극의 탄생을 돌이켜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 삶에 대한 이렇게 궁극적이면서도 가장 기쁨에 차 있고 가장 충일하면서도 가장 의기양양한 긍정은 최고의 통찰일 뿐 아니라 진리와 학문에 의해서 가장 엄격하게 입증되고 보존되는 가장 심오한 진리다. 존재하는 것에서 빼 버릴 것은 하나도 없으며, 없어도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니체는 그리스 비극은 바로 이렇게 “존재하는 것에서 빼 버릴 것은 하나도 없으며, 없어도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라는 세계의 완전성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쇼펜하우어가 삶을 부정하는 염세주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반면, 니체는 이미 ‘비극의 탄생에서도 삶을 긍정하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예술은 고난에 찬 삶에 일시적인 휴식을 제공한다고 본다. 이에 반해 니체는 예술이 고난과 고통으로 점철된 삶을 정당화하고 승화시키면서 사람들에게 살아갈 힘을 불어넣어준다고 본다.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문제적 최후의 독일인이라고 불렀다. 쇼펜하우어는 괴테, 헤겔, 하인리히 하이네처럼 하나의 유럽적 사건이며 단순히 지역적, 국가적 사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은 단순히 개인적 사상이 아니라 유럽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떨치는 사상적 경향을 대표하고 있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쇼펜하우어에게만 존재하는 염세주의가 아니라 당시의 유럽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으며 장차 유럽 전역을 지배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에 대한 니체의 대결은 단순히 쇼펜하우어 개인과의 대결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정신적 흐름과의 대결이었다.
예술은 삶의 위대한 자극제다
우리에게는 고통을 감당하는 힘이 있다
그리스 비극은 강함의 염세주의에서 비롯되었다
니체는 ‘자기비판의 서문에서 염세주의를 ‘약함의 염세주의와 ‘강함의 염세주의로 나눈다. 약함의 염세주의는 허약한 인간들이 고통과 고난으로 점철된 현실 세계를 부정하면서 그리스도교나 불교에서 보는 것처럼 피안을 희구하거나 내면의 평안으로 도피하는 것이다. 반면 강함의 염세주의는 현실세계를 있는 그대로 긍정한다. 니체는 그리스인들은 약함의 염세주의를 예술을 통해 극복하고 강함의 염세주의를 체현했다고 본다. 그리스인들에게 예술은 단순히 삶과 유리된 오락이 아니라 그리스인들의 삶에 새로운 세계이해를 가져다주고 그리스인들을 변화시키는 힘을 갖는 것이었다.
약함의 염세주의는 몸과 마음의 평안을 위해 위험을 피하고 적을 만들려고 하지 않는 반면, 강함의 염세주의는 자신의 힘을 시험하기 위해서 위험과 적을 찾아다닌다. 니체는 이러한 염세주의를 행복에서 비롯되는 염세주의, 즉 넘쳐나는 건강과 생명력으로부터 비롯되는 염세주의라고 말한다. 이에 반해 약함의 염세주의는 피로하고 병든 생명력으로 인해 인생은 고통이라고 한탄하는 쇼펜하우어식 염세주의다.
강함의 염세주의에 대한 니체의 사상에서 우리는 이미 니체가 후기에 전개한 영원 회귀 사상의 단초를 볼 수 있다. 니체는 삶을 가장 긍정하는 형식으로 영원 회귀 사상을 창안했다고 말한다. 영원 회귀 사상은 그리스도교나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목적론적인 세계관과 가장 대립하는 세계관이다.
그리스도교나 마르크스주의는 자연과 인간의 역사는 최후의 심판이나 공산주의와 같은 미래의 궁극적인 목적을 향해서 나아간다고 말한다. 이와 달리 니체의 영원 회귀 사상은 모든 것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끊임없이 회귀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 보는 모래알도, 거미도 그리고 역겨운 인간들도 모두.
이렇게 모든 것이 회귀한다는 사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고통이나 악도 끊임없이 되돌아온다는 사실은 힘이 약한 자를 절망에 빠뜨린다. 힘이 약한 자는 이러한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러한 고통과 고난이 존재하지 않는 피안이나 유토피아를 희구한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의 궁극적인 목적을 상정하는 모든 목적론이란, 니체가 보기에는 이 세상의 고통과 고난을 스스로 짊어질 힘을 갖지 못한 연약한 자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강한 자는 모든 것이 아무런 목표도 없이 회귀한다는 사실을 흔쾌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영원 회귀를 흔쾌하게 긍정할 때 그에게는 모든 것이, 즉 약한 자에게는 악이나 고통으로 여겨지는 것조차도 신성한 것으로 나타난다.
앞서 보았듯 니체는 그리스인들의 아폴론적인 문화와 그것을 대표하는 올림포스 신화가 인간의 삶을 정당화하려는 의지에서 비롯한 것으로 본다. 이러한 사실은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부터 이미 영원 회귀 사상과 같이 삶에 대한 긍정의 사상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니체 자신도 ‘이 사람을 보라에서 자신이 이미 ‘비극의 탄생에서 영원 회귀 사상과 동일한 사상을 개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비극의 탄생에서 말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소멸과 파괴, 대립과 전쟁, 영원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생성에 대한 긍정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니체는 자신과 동일한 사상을 펼친 유일한 사상가는 헤라클레이토스라고 말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흐른다”라는 말로 생성하는 세계를 긍정하고, “투쟁은 만물의 아버지”라는 말로 투쟁을 긍정했던 사상가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그리스인들이 현실세계를 긍정하면서 염세주의를 극복한 방식으로 세 가지를 들었다. 그 첫 번째는 아폴론적인 예술이고, 두 번째는 디오니소스적 예술이며, 세 번째는 아폴론적 예술과 디오니소스적 예술의 결합으로서의 비극 예술이다. 나중에 자세히 보겠지만, 니체는 소크라테스가 개척한 학문의 길도 염세주의를 극복하려는 하나의 방법으로 본다. 그러나 이러한 학문의 길은 염세주의의 진정한 극복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병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참된 예술은 삶을 구원한다
삶에 대한 체념을 배울 것인가, 긍정을 배울 것인가
‘비극의 탄생은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렇다고 해서 니체가 쇼펜하우어나 바그너의 생각을 단순히 답습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비극의 탄생에서부터 니체는 어떤 점에서는 이미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넘어서고 있다.
‘자기비판의 서문에서 니체는 ‘비극의 탄생을 “청년의 용기와 우수로 가득 차 있는 책이며, 어떤 권위와 숭배의 대상에 굴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대목에서도 독자성을 잃지 않는 반항적이고 자립적인 책이다”라고 자평했다. 여기서 언급된 ‘어떤 권위와 숭배의 대상이 쇼펜하우어와 바그너를 말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니체는 자신이 ‘비극의 탄생에서도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의 사상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나름의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비극의 탄생이 지나치게 감상적이며 여성적으로 보일 정도로 감미롭다고 말한다. 나는 니체가 이렇게 말할 때 염두에 둔 부분은 “디오니소스적인 도취 속에서 만물이 통일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라고 말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후기 니체는 모든 갈등과 대립 그리고 경쟁이 사라진 사회를 바람직하다고 보지 않는다. 그는 ‘거리의 파토스(Pathos der Distanz)에 대해 말하면서 보다 고귀한 인간이 되기 위해 사람들이 서로 경쟁하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라고 말한다. 거리의 파토스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넓히면서 탁월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의지다. 이와 함께 후기 니체는 인간들 사이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경쟁이 사라진 사회를 꿈꾸는 사회주의자들이나 무정부주의자들을 감상적이며 여성적이라고 비판한다.
의지의 진정제에서 삶의 자극제로
쇼펜하우어의 철학적 도식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초기와 달리, 후기의 니체는 이러한 철학적 도식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니체는 더 이상 개별적인 현상세계의 근저에 통일적인 세계의지가 있다는 형이상학적인 가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니체는 오직 존재하는 것은 개별적인 무수한 힘을 향한 의지뿐이라고 본다.
아울러 초기 니체가 쇼펜하우어와의 일정한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쇼펜하우어에 대해 기본적으로 존경과 흠모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반면, 후기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그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니체에 따르면 쇼펜하우어는 예술, 영웅주의, 천재, 아름다움, 인식, 비극이 ‘의지를 부정하면서 삶의 체념을 가르치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특히 예술이 사람들을 관조적인 인식의 상태에 빠지게 하면서, 맹목적인 생존 욕망에 따라 내몰리는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위로 수단이라고 본다. 쇼펜하우어의 이러한 예술관을 니체는 “그리스도교를 제외하고는 역사상 가장 엄청난 심리학적 날조”라고 평한다.
더 나아가 니체는 쇼펜하우어가 그리스도교적 해석의 상속자에 불과하다고 본다. 쇼펜하우어는 그리스도교가 속된 것으로 거부했던 영웅주의, 천재, 아름다움, 인식, 비극을 받아들이면서도, 그리스도교적 의미로, 다시 말해 대지와 삶을 부정하는 염세주의의 관점에서 그것들을 해석한다. 그는 예술을 현실과 고통 그리고 생에서 벗어나 죽음과 같은 평안에 이르게 하는 구원의 길로 여겼다.
쇼펜하우어는 예술이 일시적인 구원을 가져다줄 뿐이라고 본다. 우리가 예술을 통해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그 순간에만 맹목적인 욕망에서 구원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욕망으로부터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금욕적인 행위를 통해 욕망을 완전히 근절하고 부정해야만 한다고 했다.
또한 쇼펜하우어는 아름다움이 인간의 가장 강력한 욕망 중 하나인 성욕에서 구원해준다고 찬미한다. 아름다움에서는 생식 충동이 부정되고 있다고 본 것이다. 이에 반해 니체는 자연의 모든 아름다운 소리나 색깔, 향기, 율동적인 움직임은 모두 성욕 내지 생식 충동과 연관된다고 본다. 성욕, 생식 충동은 자연의 사물들이 자신을 아름답게 만들고 표현하도록 몰아댄다. 아름다움은 생식 충동에서 비롯되는 것일 뿐 아니라 생식 충동을 자극한다.
이러한 사실은 감각적인 아름다움뿐 아니라 정신적인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타당하다. 정신적인 아름다움도 우리가 정신적으로 무엇인가 아름다운 것을 산출하도록 자극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니체는 누리가 신체의 아름다움, 성격의 아름다움, 학문의 아름다움 등에 이끌려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고 보았던 플라톤의 사상을 긍정적으로 언급한다.
더 나아가 니체는 플라톤의 변증법은 아테네의 아름다움 청년들을 매료하기 위한 플라톤의 성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또한 고전적 프랑스의 모든 고급문화와 문학 역시 성적 관심의 토양 위에서 성장했다고 본다. 다시 말해 많은 예술이 쇼펜하우어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욕망에서 벗어난 관조의 상태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적인 욕망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니체는 예술을 성욕의 승화라고 보는 프로이트의 견해를 선취했다고 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에 대한 니체의 입장이 이렇게 비판적이고 부정적으로 변하면서, 니체는 ‘비극의 탄생도 원래는 쇼펜하우어의 정신과 취향에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쇼펜하우어는 비극이 설파하는 지혜를 인생에 대한 체념으로 보는 반면, 니체 자신은 비극이 인생에 대한 긍정을 설파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비극의 탄생에서는 쇼펜하우어의 철학과 언어를 사용함으로 인해 자신의 이러한 통찰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니체는 비극에서 영웅이 겪는 고통과 운명은 비극의 영웅조차도 무자비하게 희생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힘으로 넘치는 세계의지를 표현한다고 본다. 이러한 세계의지를 니체는 디오니소스 신이라고 부른다. 비극은 유희하듯이 세계를 지었다가 파괴하는 디오니소스 신처럼 세계 내의 그 모든 고통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생을 유희하듯이 살라고 말한다. 강한 생명력의 소유자, 다시 말해 디오니소스적인 생명력의 소유자는 현상세계에서의 삶을 유희하듯이 즐길 뿐이다. 그는 이렇게 그 모든 고통과 고난도 흔쾌하게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강력한 힘에 대해서 강한 자부심과 긍지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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