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교육은 사회를 이끌고 갈 지배층의 양성을 목적으로 한다. 공자는 바탕을 중시했고, 인간이 갖춰야 할 바탕을 ‘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지배층다운 덕목의 하나인 ‘인’을 어떻게 봐야 할까. 공자는 ‘인’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정의한다. ‘인’은 인간에 대한 사랑, 즉 ‘인간 사랑’, 혹은 ‘사람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인’을 ‘인간 사랑’이라고만 정의하지는 않는다.
저자는 이러한 군자의 모습에서 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민주주의의 일면을 발견한다. 다양한 입장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의 주인으로서 역할을 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양성에 대한 인정과 사회 운영을 위한 협의는 필수적인 것이다. 물론 어떤 이는 이런 방식의 협의를, 하나의 강력한 독재자에 의해 작위적으로 하나가 되어 나아가는 방식에 비해, 비효율적인 것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모든 사람이 사회의 주인으로서 역할을 하게 되고, 그러한 협의 과정을 거친 결론은 그에 들인 노력과 시간만큼 강력한 것이 된다.
2,500여 년 전의 공자가 말한 ‘군자’의 모습에서 현대의 민주주의적 태도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 저자 구태환
저자 구태환은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조선 후기 기철학자 최한기 관련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대학원 시기부터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잠시나마 인권 관련 단체에서 인권에 대해 배우기도 했다.
숭실대, 상지대, 호서대 등에서 강의했고, 현재는 한양대학교 에리카캠퍼스에서 강의하고 있다. ‘최한기 기학’, ‘철학, 삶을 묻다’(공저), ‘처음 읽는 한국 현대철학’(공저), ‘길 위의 우리 철학’(공저) 등을 썼다.
현재는 동학 사상, 인권에 관심을 두고 있다
■ 차례
서문
1장 유가의 창시자, 공자
도덕적 지배층이 이끄는 도덕적인 사회
춘추시대와 공자
공자의 제자들과 ‘논어’
역사 속의 공자
주인으로서 ‘논어’ 보기
2장 ‘논어’ 읽기
‘논어’ 첫 장의 중요성
학습의 기쁨
교우의 즐거움
대범한 군자
3장 철학의 이정표
공자의 비판자, 묵적의 ‘묵자’
공자의 계승자, 맹가의 ‘맹자’
공자의 계승자, 순황의 ‘순자’
유가의 강력한 적, 법가 사상가 한비의 ‘한비자’
‘논어’에 대한 정통적 해석, ‘논어집주’
생애 연보
참고 문헌
‘논어’는 나와 사회를 돌이켜, 성찰하는 계기를 제공하는 거울입니다. 내가 인간답게 살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 사회가 모든 구성원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운영되고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논어
유가의 창시자, 공자
도덕적 지배층이 이끄는 도덕적인 사회
누가 세상을 이끌어야 하는가?
유학은 2500여 년 전 공자(기원전 551~479)에 의해 창시되어 동양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한반도에는 삼국시대에 전해진 이후에 오랫동안 지배 이념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특히 한반도의 마지막 왕조인 조선 500년은 유학의 분파인 성리학의 나라였다고 할 정도로 그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따라서 유학과 그것을 창시한 공자, 그리고 그의 언행이 기록된 ‘논어에 대한 이해는 과거의 동양 사회와 한반도에 대한 이해를 위한 필요조건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유학은 과연 무엇을 지향했을까? 그것은 도덕적인 사회이다. 이 글의 독자가 ‘유학, ‘유가, ‘유교라는 단어를 듣고 ‘도덕성을 떠올린다면, 그것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자부해도 좋다. 모든 인간이 도덕으로 무장된 도덕적 사회. 이것이 공자와 그의 후예인 유학자들이 지향하는 바이다.
그렇다면 도덕적인 사회를 어떻게 이룩할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 도덕적인 사회 운영, 즉 도덕 정치를 통해서 가능하다. 그러면 이러한 정치는 누가 할 것인가? 바로 지배층인 ‘군자이다. 동아시아에서 신분제는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공자 당시의 중국만이 아니라 한반도의 조선에서도 신분제는 바뀌지 않는 공고한 체제로서 기능했다. 조선의 경우 신분은 크게 사대부 양반과 상민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전자와 후자의 역할 역시 구분되어 있었다. 사대부 양반은 사회를 책임지고 이끌어 가는 지배층을 형성했고, 상민은 그러한 지배층에 이끌려 살아가는 피지배층을 형성했다. 신분의 변동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는데, 이러한 신분의 구분과 그에 따르는 역할의 불변성에 대한 유학에서의 시선을 잘 보여주는 것이 맹자의 언급이다. “어떤 이는 정신노동을 하고 어떤 이는 육체노동을 한다. 정신노동을 하는 이는 다른 사람을 다스리고 육체노동을 하는 이는 다른 사람에게 다스려지며, 다른 사람에게 다스려지는 이는 다른 사람을 먹이고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이는 다른 사람이 먹여준다. 이것이 천하에 두루 통하는 정의이다(‘맹자, ‘등문공 상).” 맹자의 말처럼 정신노동을 하는 지배층과 육체노동을 하는 피지배층의 역할 구분은 ‘천하에 두루 통하는 정의로 취급될 정도로 확고한 것이었다.
따라서 한 사회의 도덕성 여부는 그 사회를 다스리는 지배층의 도덕성 여부에 달려 있었다. “지배층은 바람과 같고 피지배층은 풀과 같아서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그 바람의 방향에 따라 눕는다(‘안연)”라는 공자의 말처럼, 지배층과 지배층이 시행하는 정책이 도덕적인가 아닌가는 피지배층의 도덕적 교화 여부를 결정한다. 하지만 공자가 직면한 당시 현실에서 지배층은 도덕적이지 못했다. 즉 지배층답지 못했다. 지배층은 옳음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자신이나 가족의 이익을 따지는 것은 피지배층이나 보이는 행태인데(‘이인), 당시 지배층은 피지배층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따라서 공자는 당시 지배층의 지배층답지 못함을 질타하며, 진정한 지배층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강조한다. 도덕적 사회를 추구하는 공자에게 지배층의 도덕성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요컨대, 공자가 창시한 유학에서는 도덕적 사회를 지향하고, 그러한 도덕적 사회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지배층의 도덕적 각성과 무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지배층의 도덕적 무장을 추구하는 것이 공자의 교육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유학은 지배층을 위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사회를 이끄는 지배층의 도덕성 제고를 위한 학문이라고 할 것이다.
주인으로서 ‘논어 보기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의 군자는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의 군자와는 다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신분제 사회에서의 군자는 피지배층인 소인이 생산한 노동 산물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생계를 위한 노동에서 면제되었다. 하지만 신분제가 철폐된 현대 사회에서 군자를 먹여줄 소인은 더 이상 없다. 이제 모든 사람이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서 직접 노동에 참여해야 하는 소인이다. “군자는 옳음에 관심을 갖고 소인은 이익에 관심을 갖는다”(‘이인)는 공자의 언급을 활용하여 표현한다면, 현대인들은 군자로서 이 사회가 어떻게 운영돼야 옳은지를 고민하는 한편, 소인으로서 어떻게 해야만 나와 내 가족에게 이익이 될지를 고민하는 존재이다.
이처럼 우리는 모두가 군자이며 동시에 소인이다. 돈을 지상의 가치로 여기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소인으로서의 삶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소인으로서의 삶에만 갇힌다면, 자신들만이 군자라고 우기면서 우리를 소인의 영역에 계속 가둬두고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세력이 절호의 기회를 잡을 것이다. 옳고 그름이 명확히 구분되는 상황에서조차 자신에게 이로운가 불리한가만을 따진다면, 누군가는 그것을 활용하여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그 결과 우리의 삶은 더욱 병들어간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논어 읽기
학습의 기쁨
배움과 가르침은 하나이다
공자에서의 배움이 성인이라는 인격적 완전체를 지향한다면, 가르침도 당연히 같은 목적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배움과 가르침은 상반된 것 같지만, 이 둘은 함께 진행된다. 배움이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것이고, 가르침이 누군가의 배우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해주는 것이라면, 배움과 가르침은 서로 떼어놓고 이야기될 수 없다. 그리고 배우고 가르치는 내용과 배우고 가르침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목적 역시 같을 수밖에 없다. 공자는 자신의 학습 성과를 제자들에게 교육하여 지배층다운 덕목을 지닌 이들로 기르고자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제자들과의 대화 속에서 자극을 받아서 스스로를 성장시켰다. ‘논어를 공자의 제자 교육을 기록한 책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이유이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묵묵히 이해하고, 배움에 싫증을 내지 않고, 다른 사람을 가르침에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 것이 어찌 나에게 있겠는가!”(‘술이)”
여기에서 공자는 배우고 교육할 때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그는 배움과 가르침에 싫증을 내거나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 태도가 자신에게는 갖춰지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주희는 이 말이 공자의 겸손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물론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태도가 자신에게 갖춰지지 않았으니 이런 태도를 갖추기 위해서 더욱 노력하겠다는, 즉 배우고 가르침에 더욱 노력하겠다는 공자의 다짐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그리고 이 문장에서는 ‘배움과 ‘싫증내지 않음, ‘가르침과 ‘게으름을 피우지 않음을 연결시켜서 논급했지만, “배움과 가르침에 싫증을 내거나 게으름을 피우지 않음”이라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다. 배움의 자세와 가르침의 자세는 결코 분리되지 않는 것이다.
고민하지 않는 자에게는 가르치지 않는다
특히 그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고민하지 않는 이에게는 가르침을 베풀지 않았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깨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깨우쳐 주지 않고, 말로 표현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말문을 틔워주지 않는다. 한 귀퉁이를 거론했는데 나머지 세 귀퉁이를 추론해내지 못하면 다시 말해주지 않는다.”(‘술이)”
여기에서의 ‘분은 무언가를 깨치고자 노력하는데 미처 깨치지 못한 상태, 그리고 ‘비는 마음으로는 이해했지만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무엇인가에 대해서 탐구하여 거의 이해했는데 미진한 부분이 있어서 답답한 상태가 ‘분이며, 이해해서 말로 표현하고 싶은데 적절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답답한 상태가 ‘비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도 이와 유사한 상태를 경험해봤을 것이다. 문제를 거의 해결한 것 같은데 하나에서 막혀서 시원하게 풀리지 않을 때, 내 기분이나 상태를 말하고 싶은데 적절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을 때 느끼는 답답함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분과 ‘비는 그보다 더한 답답함이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해온 사람의 답답함이다. 그리고 이러한 치열한 고민을 한 사람에게 스승이 던져주는 간단한 실마리는 그의 머릿속을 환하게 밝혀줄 것이며, 그의 말문을 시원하게 틔워줄 것이다. 스승이 사각형 탁자의 한 귀퉁이를 가리키면 나머지 세 귀퉁이를 스스로 생각해내기 위한 고민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어떡하지? 어떡하지?라고 말하지 않는 자에게는 내가 어떻게 해줄 방도가 없다.”고 했다.(‘위령공) 어떤 문제에 대한 스스로의 고민과 그 고민을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선행되고 나서야 가르침이 시행될 수 있다.
그래서인지 같은 문제에 대한 공자의 답변은 제자에 따라 달라진다. 그만큼 제자들이 처한 상황과 고민이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효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공자는 ‘예를 어기지 않음으로써 부모님이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시지 않도록 하는 것, ‘부모님이 자식의 건강 때문에 걱정하시지 않도록 하는 것,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 ‘부모님을 대할 때 낯빛을 온화하게 하는 것 등으로 대답한다. 각 제자들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내용으로 답변한 것이다. 이처럼 공자는 제자의 고민 수준과 장단점을 고려하여 가르침을 베풀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후대에 ‘만세사표로서 추앙되는 공자의 연모를 볼 수 있다. 만세사표를, ‘논어에 담긴 공자의 말씀이 영원토록 우리에게 귀감이 된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보다는, 공자의 스승으로서의 태도가 우리에게 귀감이 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사실 시공간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공자의 말을 모두 금과옥조로 여기는 것도 매우 어리석은 자세이다.
교우의 즐거움
벗은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다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에서의 ‘붕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친구와는 약간 다른 의미를 갖는다. 친구의 사전적 의미는, 글자 그대로 오랫동안 친하게 지낸 사람이다. 즉 친구 여부를 가리는 요소 가운데 중요한 것이 기간의 장단이다. 물론 서로 전혀 뜻이 맞지 않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기는 쉽지 않겠지만, 친구인지 여부는 뜻이 맞는가가 아니라 기간의 장단에 달려 있다. 그에 비해서 ‘벗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이 서로 통하여 가깝게 사귀는 사람으로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다. 여기에서의 ‘붕은 친구보다는 벗으로 번역해야 한다.
주희는, 그가 살았던 송대에도 ‘붕에 대한 오해가 있어서 그랬는지는, 이 구절의 ‘붕에 대해서 ‘동류라는 주석을 붙여두었다. 같은 무리라는 의미이다. 어떤 일에 대해서 같은 생각을 가지고서 무리를 이룬 이들이 ‘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생각이 같은 것을 도가 같다고도 표현할 수 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도가 같지 않으면 서로 일을 도모할 수가 없다.”(‘위령공)”
우리는 흔히 도를 일상과는 멀리 떨어진 심오한 무엇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길에서 사람들을 붙잡고 이상한 믿음을 강요하는 사람들도 “도에 관심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대단한 것을 알려줄 것처럼 우리를 현혹하지만, ‘도는 글자 그대로 길일 뿐이다. 평소에 우리가 다니는 길이 대표적인 것이다. 물론 길에는 인간이 다니는 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동물이 다니는 산길이나 물이 흐르는 물길처럼 애초에 인간과는 무관한 길도 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의도에 맞춰 산길을 넓히기도 하고 물길을 바꿔놓기도 한다. 동양의 전통 사상에서 말하는 길은, 그것이 인간의 작위가 개입된 것이건 그렇지 않은 것이건, 모두 인간이 가야 할 길을 가리킨다. 학파의 이름에 이미 ‘도가 들어간 노자, 장자의 도가에서는 자연의 길을 제시하여,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자연의 길을 가야 함을 주장한다. 공자는 “사람이 길을 넓힐 수 있지 길이 사람을 넓혀주는 것이 아니다.”(‘위령공)라고 했는데, 이때의 길은 사람이 넓힐 수 있는, 인간의 작위가 개입된 길을 의미한다. 공자는 인간이 동물이 다니는 산길이나 자연스럽게 형성된 물길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길을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매일 이러한 인간이 만든 길을 나선다. 근무를 위해서 회사에 가는 길, 강의를 듣기 위해서 학교에 가는 길, 물건을 사기 위해 시장에 가는 길을 나선다. 이처럼 우리가 나선 길에는 회사, 학교, 시장이라는 목표 지점이 있다. 물론 뚜렷한 목표 지점을 두지 않고 산책을 하기도 하지만, 종착점 없이 방황하지는 않는다. 즉 길은 어떤 목적이나 결과로 나아가는 수단이나 방도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 제시하는 길, 즉 도는 그 사람이나 집단의 목적을, 그리고 그 목적으로 나아가는 방도를 드러낸다.
따라서 길이 같다는 것은 추구하는 목적과 그 목적에 도달하는 방도가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평등한 삶을 누리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그 실현 방법을 고민한다고 하자. 이러한 내 목적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나와 같은 길을 가는 것이고 따라서 나와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소수의 사람만이 특권을 누리는 사회를 지향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와는 길이 다르기 때문에 함께 일을 도모하기 힘들 것이다.
이처럼 공자가 말하는 벗은 뜻을 같이하고 같은 길을 가는 자이며, 함께 일을 도모할 만한 자이다.
대범한 군자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면 또한 군자답지 않은가?”
공자는 이 말을 누구에게 한 것일까? 제자들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 한 것이라면 자신을 알아주지 않은 세태를 탓하지 말고 자신의 능력을 더 키우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알아줄 만하게 되도록 힘쓰라”(‘이인)라는 등 유사한 언급이 ‘논어 곳곳에 보이기 때문에 적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공자의 고뇌를 읽을 수도 있다. 춘추시대의 혼란을 끝낼 방도를 가졌다고 자부하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현실에 대한 공자의 고뇌 말이다. 그가 자신의 “방도가 실행되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를 떠다닐까 보다”(‘공야장)라고 할 정도로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사회에 대한 노여움은 공자를 괴롭혔던 것 같다. 그러한 심정이 들 때마다 공자는 스스로를 다독이지 않았을까? “그래.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노여워하면 군자가 아니지.”라고 말이다.
공자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남들이 내 진가를 알아주지 않으면 불쾌해한다. 그런데 위 구절에서의 군자는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과연 군자란 어떤 존재인가?
이 책을 쓰기 위해 ‘논어에 ‘군자라는 용어가 몇 번이나 등장하는지 세어보니, 총 107회였다. 일일이 세어보지 않고 파일로 입력된 것을 검색했기 때문에 놓친 것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논어에는 ‘군자라는 용어가 최소한 107회 등장하며, 이처럼 많이 등장했다는 것은 그것이 갖는 공자 사상에서의 중요성을 방증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논어에서 사용되는 ‘군자는 크게 두 가지, 즉 신분과 도덕성의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이 두 가지 측면을 모두 함유하는 언급도 있다.
바탕과 꾸밈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사람: 군자
군자가 지배층다운 덕목을 가진 이를 지칭한다면, 그러한 덕목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그 ‘무엇을 직접 언급하기 전에 우선 공자가 어떤 사람이 군자인지 말하는 구절을 하나 살펴보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바탕이 꾸밈을 넘어서면 ‘야이고, 꾸밈이 바탕을 넘어서면 ‘사이다. 바탕과 꾸밈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다음에야 ‘군자이다.”(‘옹야)
이 장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등장하는 용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바탕으로 번역한 ‘질은 우리가 일상에서 “저 사람은 질이 좋지 않으니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좋겠다”라고 할 때의 ‘질로서, 가공을 하지 않고 꾸미지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 그에 비해서 ‘꾸밈으로 번역한 ‘문은, 흔히 ‘글월 문이라 하여 문자를 가리키지만, 여기에서는 무늬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문이 이처럼 무늬로 해석되는 대표적인 경우로는, 하늘의 아름다운 별들이 만들어낸 무늬를 연구하는 학문을 뜻하는, ‘천문학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들로 해석되는 ‘야를 타고난 바탕 그대로 꾸밈없이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했다. 그렇다면 타고난 바탕 그대로의 꾸밈없는 상태는 어떤 모습으로 표현될까? 아무것도 몸에 걸치지 않은 모습일 것이다.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이니까 말이다. 만약 우리가 그처럼 발가벗은 사람을 본다면 뭐라고 말할까? 아마 “야하다”라고 할 것이다. ‘야한 동영상이라고 할 때의 ‘야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아무것도 입지 않거나 신체의 중요 부위만 가리고서 생활하는 이들을 ‘야만인이라고 얕잡아보기도 한다. 반대로 바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꾸밈이 월등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을 이 문장에서는 ‘사라고 했다. 여기에서의 ‘사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주희의 설명에 의하면 문서를 관장하는 관료이다. 아마도 문서를 처리하는 관료로서 문서의 내용보다는 형식에만 관심을 쏟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 같다. 요컨대 꾸밈없이 바탕 그대로를 드러내는 사람이 ‘야이고, 꾸밈만 드러나서 바탕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사이다.
공자가 보기에, 이러한 ‘야와 ‘사는 바람직한 인간상이 아니다. 그래서 제시한 것이 바탕과 꾸밈이 적절히 어우러진 상태의 인간이다. 여기에서의 ‘빈빈이란 무늬가 또렷하여 아름다운 모습이다. 무늬가 또렷하다고 하니 무늬만을 강조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무늬가 또렷하게 드러나기 위해서는 바탕이 그 무늬를 잘 받쳐줘야 한다. 마치 표범의 검은 꽃무늬 점이 또렷하게 드러나기 위해서는 그의 누런 바탕색이 받쳐줘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누런 바탕색과 검은 꽃무늬 점이 잘 어우러져 아름다운 것처럼, 인간 역시 바탕과 꾸밈이 잘 어우러져야 하며, 이런 이가 바로 ‘군자이다.
그렇다면 공자는 ‘바탕과 ‘꾸밈으로 무엇을 표현한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인과 ‘예라고 할 수 있다. 공자는 내면의 ‘인과 외면의 ‘예가 서로 배치되거나 어느 하나가 과도하지 않고 적절히 균형을 이룬 사람을 이상적으로 보았고, 그를 군자라고 했다. 지배층이 지배층답게 되기를 바랐던 공자에게 ‘인과 ‘예는 그러한 군자가 되기 위한 필수적인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지배층다운 덕목 하나: 인
이처럼 공자는 바탕을 중시했고, 인간이 갖춰야 할 바탕을 ‘인이라고 했다. 그는 “인을 마주해서는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위령공)고 할 정도로 ‘인을 중시했다. 그렇다면 ‘인은 무엇일까? 사전상으로 ‘인은 ‘어질 인으로 풀이된다. 그런데 ‘어질다는 풀이는 ‘인만이 아니라 ‘현에도 적용된다. 즉 ‘인과 ‘현 모두 ‘어질다는 의미로 풀어내는데, 이 둘은 혼용해도 되는 글자가 아니다. 물론 둘 다 도덕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인과는 달리 ‘현에는 재능의 뛰어남이라는 의미도 있다. 요컨대 ‘어질다는 풀이로는 ‘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가 말하는 ‘인은 무엇인가?
‘논어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인은 대부분 어떤 사람이 인한가 여부, 어떤 행위나 덕목이 인에 부합하는가 여부를 평가할 때 사용된다. “선생님께서는 이익과 운명과 인에 대해서는 드물게 말씀하셨다.(‘자한)”는 제자의 말처럼 ‘인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은 매우 드물며, 그에 관한 공자의 직접적인 정의는 한 차례 나올 뿐이다.
공자는 여기에서 ‘인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정의한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이라고 하면 ‘인보다 ‘애를 떠올린다. 사랑하는 사람을 ‘애인이라 하고, 사랑하는 개를 ‘애견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인과 ‘애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우선 ‘애는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할 수 있다. 사람, 동물만이 아니라 물건도 ‘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애는 사랑한다는 의미 외에도 ‘아낀다 등의 의미도 갖는데, 연인들 사이에 서로 ‘아껴준다라고 할 때의 의미이다. 그리고 사람 이외의 것이 대상이 될 경우에, 예컨대 누군가가 선물해준 의복을 아껴 입는다면, 그때의 ‘아낀다는 ‘애라는 한자로 표현될 수 있다. ‘애가 이처럼 ‘아낀다로 해석될 때에는 ‘인색하다는 의미로까지 나아가기도 하는데, 어떤 물건을 너무 아끼면 인색한 모습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애는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하며, ‘인색하다는 부정적인 의미로까지 해석될 수 있다.
이에 비해서 ‘인이 ‘사랑한다는 동사로 사용될 때, 대상은 오로지 인간만 될 수 있다. 즉 ‘인은 인간에 대한 사랑, 즉 ‘인간 사랑, 혹은 ‘사람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사랑은 대상에 따라 다른 단어로 표현되는데, 후대의 맹자의 ‘친친인민애물이 대표적 사례이다. 여기에서의 ‘친, ‘인, ‘애는 모두 사랑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친친에서 앞의 ‘친은 동사로서 친애한다는 뜻으로서, 사랑의 대상은 가족 등 친지이다. ‘인민에서의 ‘인 역시 사랑한다는 의미이고, 사랑의 대상은 중국 왕의 통치권하의 백성이다. 그리고 ‘애물에 서의 ‘애도 사랑한다는 의미이고, 사랑의 대상은 사물과 동물, 중국 왕의 통치권에서 벗어난 이민족을 뜻하는 ‘물이다. 이처럼 사랑은 대상에 따라 다른 양상을 띠며, 그 가운데 ‘인은 그 대상을 인간으로 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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