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장자수업 1
 
지은이 : 강신주 (지은이)
출판사 : EBS BOOKS
출판일 : 2023년 10월




  • 삶에 대한 지독한 물음이 들 때, 장자를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요? 쓸모 과잉 시대, 경쟁에 지친 한국 사회에 던지는 2,500년 전 장자의 가르침, 우리 모두에게 삶의 긍정성과 자존성을 되찾게 하는 가장 강렬한 텍스트입니다.


    강신주의 장자수업 1


    대지를 뛰어올라

    철학을 위한 찬가 - 황천 이야기

    장자, 무용의 철학자

    ‘장자를 읽다 보면 우리는 장자가 항상 ‘쓸모 있음보다는 ‘쓸모없음을, 달리 말해 ‘소용보다는 ‘무용을 중시한다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장자를 ‘무용의 철학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맞는 말이지만 조심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장자의 무용 개념은 이를 강조하는 다양한 일화들마다 그 의미와 강조점을 달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무용 개념을 획일적으로 정의하려 하기보다는 무용을 강조하는 다양한 일화들의 문맥에 집중하는 편이 좋습니다. 처음으로 살펴볼 것은 ‘황천 이야기에 등장하는 무용 개념입니다. 황천 이야기는 장자가 자신의 사유와 자신의 이야기가 무용해 보이지만 사실 엄청나게 쓸모 있음을 역설하는 대목에서 등장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쓸모를 기준으로 무언가를 평가하곤 합니다. 저만 해도 어린 시절에 가장 많이 듣던 소리가 “그거 하면 쌀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라는 말이었습니다. 개발독재 시절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라고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도 “바보야! 중요한 것은 경제야”라는 슬로건이 여전히 통용되고 있으니까요. 2,500여 년 전 중국 전국시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개인이든 사회든 아니면 국가든 생존과 경쟁이 최고의 화두이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부국강병이라는 슬로건은 상징적입니다. 어떻게 하면 국가를 부유하게 만들고 군대를 강하게 만들까? 이 논리는 개개인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죠. 어떻게 하면 개인은 부유하고 강해질 수 있는가?


    제자백가라고 불리던 사상가들은, 기본적으로 자기 들의 말을 따르면 국가나 개인이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바로 여기서 ‘길, 즉 ‘도라는 말이 등장한 겁니다. 자신들이 주창한 길을 따르면 성공한다는 발상입니다. 유가의 도, 법가의 도, 묵가의 도, 도가의 도, 혹은 공자의 도, 맹자의 도, 묵자의 도, 노자의 도, 한비자의 도 등등은 이런 맥락에서 탄생했습니다. 결국 제자백가의 사상 대부분은 ‘소용, 즉 ‘쓸모 있음을 지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들의 도를 따르면 ‘쌀도 나오고 밥도 나온다는 논리였죠. 이런 와중에 부국강병의 논리 자체를 문제 삼고 이를 극복하려 한 소수의 사상가들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 주자가 바로 장자였습니다. 쓸모가 사실은 우리 삶을 파괴할 수 있고, 쓸모없음이 오히려 우리 삶을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고 그는 역설했으니까요. 그래서인지 장자의 사유는 두 부류에게 환영받았습니다. 바로 생존과 경쟁의 논리에 의구심을 품었던 지적인 사람들, 그리고 패배했다는 자괴감에 사로잡힌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승자와 소용의 논리를 지향하던 대부분의 제자백가들은 당연히 장자를 비난했고 심지어 조롱하기까지 했습니다. 한마디로 ‘경제적인 것을 부정하니 비현실적이고, 패자를 승자가 되도록 격려하지 않으니 무책임하다는 겁니다.


    사실 생존과 경쟁의 논리는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동물 세계의 논리이자 승자독식을 인정하는 냉혹한 논리입니다. 그러나 동물 세계에서도 생존과 경쟁의 논리는 주로 다른 종들 사이에서 적용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생존과 경쟁의 논리를 인간이 같은 인간 종에게 적용하면서 비극은 발생합니다. 부국강병을 꿈꾸던 당시 국가를 생각해보세요. 개인의 쓸모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국가입니다. 쓸모를 갖추기 위해 오랜 시간 준비하고 마침내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쓸모 있음을 입증하면 국가는 우리를 고용하고 돈을 줍니다. 쓸모가 더 클수록 우리는 직급이 높아지고 더 많은 돈을 얻습니다. 그렇지만 이 과정을 통해 지배와 착취를 공고히 하는 것은 국가라는 사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국가가 원하는 인간으로 개조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우리는 상명하복 체제에 포섭되어 길들여집니다. 언젠가 지배체제의 최고 정점에 이르기를, 즉 재상이나 군주가 되기를 꿈꾸면서 말이죠. 같은 종에는 지배와 복종 관계를 강요하지 않는 다른 동물 종과 같은 품격을 인간은 회복해야 합니다. 당연히 경쟁이 양산하는 대부분의 패자들은 자신을 비하할 필요가 없습니다. 패배는 이미 구조적으로 예정된 것이니까요. 오히려 패자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한 좋은 출발점에 서 있게 되죠. 상명하복, 경쟁과 승자, 그리고 쓸모의 논리에서 가장 멀리 있으니까요. 패자라는 절망을 딛고 꿋꿋하게 살아가다 보면, 생존과 경쟁의 가치 외에 삶의 다른 가치가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험에 떨어져도 따뜻한 밥을 먹이는 어머니, 혹은 실직을 해도 내 곁을 떠나지 않는 배우자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명문대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어머니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내가 돈을 벌기에 배우자가 나를 사랑한 것도 아니었던 겁니다. 나의 쓸모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발견, 그것은 생존과 경쟁과는 무관한 다른 가치가 있음을 증명합니다.


    쌀도 밥도 안 나오는 일들의 위대함

    장자는 자신의 사유가 무용하다는 조롱에 맞서 당당하기만 합니다. 그는 무용함이야말로 자신의 철학이 체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억압받는 인간을 위한 것임을 입증하는 지표라고 기염을 토하죠. 수많은 ‘철학을 위한 변명 중에서 장자의 변명은 압권입니다. 철학을 위한 장자의 변명은 장자 본인의 철학을 넘어 인문적 사유 일반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시나 소설, 나아가 철학 저작마저 상품의 논리에, 다시 말해 소용의 논리에 포획되고 있는 시대입니다. 물론 그 핵심에는 판매량과 인지도 증대를 도모하는 자본주의적 욕망이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철학과나 사학과 등 인문계열 학과들이 인문콘텐츠학부나 문화교양학부 등으로 흡수, 소멸되는 시대이니 말해 무엇합니까. 인문학이 자본의 논리에 포섭되는 현상을 저지하기는커녕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전공을 팔아버린 선생들도 많죠. 심지어 인문학을 지탱하는 양대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시인이나 철학자마저 자신들 저작의 쓸모를 고민합니다. 바로 이때, 장자의 당당함은 우리 시대를 향한 죽비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국가나 자본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원하는 것을 해야 합니다. ‘밥도 나오지 않고 쌀도 나오지 않는 쓸모없는 일들을 많이 할수록 우리 삶은 행복하니까요. 시도 글도 그리고 사유도 그리해야만 합니다.


    시인이나 철학자는 농산물을 생산해 판매하는 농부라기보다 텃밭을 가꾸는 사람과 같습니다. 물론 텃밭에서 나는 상추나 고추를 먹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생계를 유지해야 하니까요. 그러나 상추나 고추를 팔지는 않습니다. 남들은 농사를 제대로 지으라고, 생산성을 높이려면 농약을 쓰라고 유혹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텃밭을 지키려는 사람은 이런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텃밭을 일구는 행위는 쓸모에 전적으로 종속된 행위가 아니니까요. 그저 땀 흘리는 것이, 땅 냄새와 풀 냄새, 혹은 짧은 시간 동안 풍기는 꽃 냄새가 좋을 뿐입니다. 이마의 땀을 근사하게 만드는 싱그러운 바람도 좋고요. 텃밭을 가꾸는 사람에게 밭에서 자라는 것들은 소용이 적고 무용이 많습니다. 시들어버리는 것도 많고 벌레의 공격을 받은 것들도 많습니다. 간혹 다른 사람과 나누기는 하지요.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시들고 말 테니까요. 누군가 맛나게 먹고 행복해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상추나 고추를 받고 그 대신 우유를 갖다주는 사람도, 혹은 돈을 주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사양하다 안 되면 우유나 돈을 받으면 그만입니다. 시인의 시와 철학자의 글은 텃밭을 일군 사람이 이웃에게 건네는 상추나 고추 같은 겁니다. 좋아서 한 일의 결과이고, 그 결과물을 이웃들에게 건넨 것이니까요.


    시인이나 철학자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철학을 위한 장자의 변명을 ‘삶을 위한 변명으로 읽을 수 있으니까요. 우리는 성적이 좋은 아이여서, 품이 덜 드는 아이여서 우리 아이를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쓸모가 있는 아이, 동년배보다 쓸모가 더 큰 아이라는 것이 사랑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입시에 실패할 때, 취업에 실패할 때, 혹은 정리해고라도 당했을 때 여러분의 아이가 여러분을 떠나거나 자살하는 비극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요. 그냥 무용으로 아이를 사랑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쓸모가 없어지더라도 여러분의 소중한 아이는 죽지 않고 여러분을 찾아올 테니까요. 아무런 쓸모가 없어도 존재하는 것만으로 사랑받는다는 확신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지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남편도 아내도 무용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바람도 물도 그리고 새도 물고기도 무용으로 좋아해야 합니다. 생각해보면, 언젠가 병들고 나이 들어 쓸모는커녕 주변에 짐이 되는 때가 반드시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 주변에 여러분을 쓸모로 평가하지 않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해하는 사람이 있기를 바라는 것, 바로 이것이 무용을 강조했던 장자의 진정한 속내였을 것입니다.



    물결을 거스르며

    선과 악을 넘어서 - 위악 이야기

    바로 이곳, 이 순간, 이 삶

    장자의 사유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는 ‘타자와 ‘문맥일 겁니다. 물론 장자가 이 키워드를 개념화해서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이 두 키워드가 개념으로 주제화된 것은 20세 후반기 이후부터입니다. 이것이 ‘장자라는 이야기책이 아직도 낡아 보이지 않는 이유일 겁니다. 이미 2,500여 년 전에 장자는 현대 서양철학자들에 밀리지 않을 정도로 타자와 문맥을 숙고하니까요. 구체적으로 말해 개나 새, 물고기뿐만 아니라 같은 종에 속한 동료 인간도 장자에게는 모두 타자입니다. 나와는 다른 생각이나 감정 혹은 욕망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또한 장자는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다양하고 복잡한 문맥들로 구성된다고, 한마디로 세계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타자의 타자성과 문맥의 복수성! 이 두 가지는 ‘장자의 수많은 이야기들을 읽을 때 나침반이 됩니다. 당연히 장자는 모든 사람, 모든 곳, 모든 시간에 적용되는 삶을 부정합니다. 신조어를 만들어본다면 장자는 ‘모든주의(all-ism)에 날을 곤두세웠던 철학자라고 할 수 있죠. 앎이 함축하는 모든주의의 핵심은 일반명사로 상징되는 언어의 추상성과 개체의 질적 차이를 사장하는 숫자의 양화 가능성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은 합리적이다” “여자에게는 모성이 존재한다” “유목민은 야만적이다” “장미 열 송이를 꺾어 와!” “소 열 마리를 동원하라” “회비는 만 원씩 내세요” 등등. 여기서 개체의 질적 고유성, 즉 단독성은 사장되고 맙니다. 각각의 인간, 각각의 여자, 각각의 유목민, 각각의 장미, 각각의 소들이 자기만의 특성이 있고, 자기만의 상황이 있다는 것이 무시되니까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추상적 사유나 양화된 사유가 지배자의 사유 혹은 지배에 도움을 주는 사유라는 사실입니다. 상명하복의 지배체제가 유지되고 성장하려면, 이 체제의 혈관에는 문자와 숫자라는 피가 돌아야만 합니다. 인류가 자랑하는 문명, 정확히 말해 국가라는 지배와 복종의 체제가 문자와 숫자의 발명과 함께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문자와 숫자가 없는 법률, 세금, 예산, 군사, 행정 등등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일반명사가 없다면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사물이든 분류할 수 없고, 숫자가 없다면 일반명사에 속하는 것들을 양적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죠. 문자와 숫자로 작동하는 삶은 타자의 고유성이나 문맥의 복수성을 무시하고, 그래서 본질적으로 지배 지향적이고 제국주의적입니다. 문자와 숫자를 다루는 노동, 즉 정신노동은 상명하복 체제에서는 육체노동에 비해 우월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생계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또는 사회적 인정을 얻기 위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노동, 즉 앎을 지향하게 됩니다. 여기서 묘한 아이러니가 생깁니다. 타인이나 사물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데 유용한 앎이 앎의 주체마저도 지배하고 통제하기 때문이죠. 다시 말해 앎의 주체는 자신의 단독성을 망각하거나 부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없어도 된다는 극단적인 생각도 여기서 나옵니다. 내가 없어도 다른 것이 나를 대신할 수 있다고 믿으니까요.


    앎이 우리 삶을 위태롭게 한다고 경고하면서 장자가 ‘위악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지배와 억압의 칼날을 타자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휘두르는 인간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납니다. 장자는 말합니다. “우리 삶에는 한계가 있지만, 앎에는 한계가 없다”고. 여기서 한계로 풀이한 한자 ‘애가 중요합니다. 땅과 물 사이의 경계, 즉 물가라는 뜻입니다. 땅과 물의 차이 혹은 물의 타자성이나 외부성을 부정하면, 우리는 물에 빠져 죽을 수 있습니다. 땅을 걷듯 물 위를 걸으려 할 테니까요. 그러니까 여기서 삶에 한계가 있다는 장자의 이야기를 부정적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장자는 인간 삶이 한계가 있다고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유한성을 긍정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장자는 한계가 없는 삶, 영원한 삶, 신과 같은 삶을 꿈 꾸는 것이 아닙니다. 쉬운 비유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장자는 영원히 시들지 않는 플라스틱 조화가 아니라 피었다 지는 생화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 조화가 되려는 생화가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예를 들어 밀봉해서 유리 안에 넣거나 냉동해서 진공 속에 두는 겁니다. 그러면 불행히도 이것은 살아 있는 생명체가 사라지고 미라나 박제로 남는 셈입니다. 그래서 장자에게 있어 무한한 삶을 지향한다는 것은 자살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바로 이곳, 바로 이 순간, 바로 이 삶을 긍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꽃이 필 수 있고 질 수도 있고, 행복도 있을 수 있고 불행도 있을 수 있습니다. 풍요로운 색채들의 삶과 세계는 이런 긍정에서 가능해집니다. 인간, 개, 꽃 등등 일반명사가 무한한 앎을 상징한다면, 바로 나, 다른 누구도 아닌 너, 내가 사랑하는 바로 그 반려견,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받은 화분의 바로 그 꽃은 유한한 삶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세요. 바로 나, 바로 너, 내 반려견, 당신이 준 꽃 등은 죽을 수 있지만, 인간 일반, 개 일반, 꽃 일반은 죽을 수도 없다는 사실을요. 영원, 그건 저주받은 박제의 상태, 조화처럼 세상에 반응하지 못하는 무감각의 상태, 단조로운 무채색의 상태와 다름없습니다.


    ‘독맥적인 것을 따르기

    체제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자기 삶을 사는 것, 타자의 욕망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는 것, 동료들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만의 시선으로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어른의 길입니다. 문제는 어른이 되기에 우리는 너무 나약하다는, 아니 정확히 말해 나약하도록 훈육되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어른이면서도 어른이기를 포기한 자신의 비겁함을 숨기려면, 우리는 상명하복의 사회나 경쟁을 강요하는 사회를 바꿀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아니라 타인이 원하는 것을 하면 우리 삶은 무거워지고 우울해집니다. 이것은 분명합니다. 무거움과 우울함이 반복되면 우리 삶은 죽음보다 더 불행해질 겁니다. 그래서 당장 억압사회를 떠나거나 극복할 수 없어도 잠시 숨이라도 쉬려면, 우리는 삶의 경쾌함과 시원함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럴 때 미약하나마 자기 삶과 자기 욕망이 조금씩 자라나게 될 겁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장자는 완전한 어른이 되는 길에 하나의 디딤돌을 놓습니다. 한달음에 어른이 되기 힘들다면 잠시 쉬면서 도약을 준비할 수 있는 중간 단계가 필요할 테니까요. 그것이 바로 억압사회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실천 강령입니다. “선을 행해도 명성에 가까워서는 안 되고 악을 행하더라도 형벌에 가까워서는 안 된다. 독맥적인 것 따르기를 기준으로 삼아라!”


    실천 강령에 등장한 선과 악은 억압체제가 규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개체들이 하기를 체제가 원하는 것이 선이라면, 반대로 개체들이 하지 않기를 체제가 원하는 것이 악이라는 겁니다. 아이가 말을 잘 들으면 안아주고 말을 잘 듣지 않으면 화를 내는 부모처럼, 체제는 개체가 말을 잘 들으면 명성을 높여 주고 반대로 말을 안 들으면 형벌을 가합니다. 억압체제에 완전히 포획된 사람은 명성을 얻고 형벌을 피하기 위해 체제가 정한 선을 시행하고 악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사이에 그는 자신만의 욕망과 삶을 망각하고 말지요. 그렇지만 자신만의 왕국을 꿈꾸는 사람은 가급적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는 체제가 선이라고 한 것을 실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체제가 선이라고 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선이라고 느껴서 행한 겁니다. 그렇기에 그는 체제의 칭찬을 멀리하려고 하죠.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칭찬은 치명적인 데가 있습니다. 아이가 무언가를 하도록 유도할 때 부모도 칭찬을 앞세우니까요. 칭찬에 노출되면 자신도 모르게 체제가 원하는 선을 행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어른이 되려는 사람은 체제가 싫어하는 악을 행하려고 합니다. 체제가 싫어한다 해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면 하겠다는 의지입니다. 물론 악을 행할 때는 은밀하게 해야 합니다. 체제는 악을 저지른 개체에게 형벌을 가하기 때문이죠. 형벌로 풀이한 형은 성기를 자르는 궁형, 아킬레스건을 자르는 월형, 목을 자르는 참형 등 신체에 가해지는 형벌을 의미합니다. 그만큼 형벌에 처해지면 개체의 삶은 회복 불가능하게 훼손되고 말죠.


    체제가 원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원하면 은밀히 행하라는 장자의 충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이코패스나 살인마들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이코패스나 살인마들에게는 체제가 원하는 것과 자신이 원하는 것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라고는 없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상명하복과 경쟁을 강요하는 체제를 그대로 수용하는 사람들로, 동료 인간들보다 우위에 서서 체제의 인정을 받으려고만 합니다. 불행히도 그들은 공정한 경쟁으로는 타인들 위에 설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낮은 위치에 있는 자신을 너무나 증오합니다. 그들이 약자를 찾아 감금하거나 죽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 순간만큼은 피해자가 낮은 위치에 있고 자신은 높은 위치에 있을 수 있으니까요. 정말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억압체제의 논리를 그대로 따르다 그 논리를 어긴 셈이니까요. 반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은밀하게라도 관철하려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는 자신만의 욕망, 자신만의 삶을 긍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자는 “독맥적인 것 따르기를 기준으로 삼아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황제내경 등 동양의학 전통에 따르면, 독맥은 생식기에서 등 뒤로 척추를 거쳐 뇌까지 흐르는 맥으로 양기를 관장합니다. 그래서 “독맥적인 것을 따른다”는 것은 척추로 상징되는 당당함과 양기로 상징되는 경쾌함을 기준으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당당하고 경쾌한 삶! 억압체제를 떠나거나 극복하지 못해도, 아니 억압체제를 떠나거나 극복할 때까지 한순간이라도 잊어서는 안 되는 가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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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