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문화, 정치, 역사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긴 명사들에게 생명력을 제공해 온 자연의 힘! 환경설계의 거장 서울대 성종상 교수가 퇴계 이황, 정조, 다산, 처칠, 헤르만 헤세까지 세계적 명사 12명이 집의 형태 속에 함께 공존해 온 자연의 힘을 어떻게 얻었는지 통찰합니다.
인생 정원
사랑도 기쁨도 영원한 것은 없었다. 평생 쉴 곳을 찾아 헤맨_ 헤르만 헤세
그의 영혼의 안식처였던 정원들
독일 지성인의 양심이자 정신적 스승, 헤세
독일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소설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는 흔히 구도자로, 혹은 양심의 수호자로도 불린다. 자전적 소설이라고 평가되는 그의 작품들에는 자연에의 무한한 동경이 들어 있다. 더불어 청춘에 대한 그리움, 사랑, 평화, 자유 같은 인간적 가치의 회복이 기저에 깔려 있다. 당시 히틀러와 나치주의자들의 편협된 민족 이데올로기와 전쟁의 광풍 속에서도 헤세는 인간성의 가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자연에 대해 경건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헤세의 삶과 정원
평생 방황과 좌절, 방랑과 정착, 현실과 이상 사이를 오가며 살았던 헤세에게 정원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 곳이었다. 정원을 ‘영혼의 안식처라고 했던 헤세는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겪을 때마다 정원일에 몰두하면서 견뎌 냈다. 어릴 적에는 신경쇠약, 학교 무단이탈, 퇴학, 자살기도 등으로 정신요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장년이 된 후에도 정신적 고통을 심하게 겪어서 심리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힘든 삶을 살았다.
그러나 전쟁의 광기가 삶의 평온과 인간성을 파괴하는 와중에도 꽃을 심고 나무를 가꾸고 주위 풍경을 그렸다. 그렇게 헤세는 마음의 평화를 찾고 순수 인간성 회복에 대한 강한 의지를 지켜 나갔다. 평생 인간의 두 본능(사회적 존재로서의 정착본능과 원초적인 방랑본능) 사이를 오가며 고뇌와 갈등을 겪었던 헤세에게 정원은 정착과 뿌리내림이라는 삶의 안정을 주는 매개였던 것으로 보인다.
디자인 관점에서 보면 그의 정원은 특별한 것이 없다. 사실 남다른 디자인 감각이나 두드러진 정원요소는 물론 화려하거나 장식적인 요소도 찾아보기 어렵다. 특정 양식이나 형식 미학적 단면을 발견하기도 어렵다. 흥미롭게도 헤세의 정원을 공부하다 보면 한국 전통정원과 유사점이 적지 않다는 걸 보게 된다. 그의 정원이 한결같이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나, 인위적인 정원요소들이 별로 없다는 점, 정원 영역뿐 아니라 정원 밖의 주변 경물을 수시로 산책하며 감상하곤 했다는 점은 조선시대 사대부의 원림과도 일맥상통하는 지점들이다.
그것은 지극히 동양적인 가치를 추구했던 그의 정신세계와 연결해 해석할 여지도 있다. 무엇보다 정원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면서 자연과 조화로운 만남을 꾀했다는 점에서 헤세와 조선 사대부의 공유지점이 있다. 그에게 정원을 가꾸는 일은 자연 속에서 자신의 내면세계를 발견하는 일이었다. 글쓰기란 그렇게 발견한 진리로, 전쟁과 이데올로기와 물질로 피폐해지는 인간 세계를 다시 회복시키려는 시도였다.
헤세가 잃어버린 정원 일의 즐거움을 다시 회복한 것은 그의 생애의 마지막 보금자리였던 스위스의 몬타뇰라에서 온전히 자신만의 정원을 가꾸기 시작하면서부터로 보인다. 나이 쉰이 넘어 다시 모종삽을 들면서 그는 ‘열심히 일하기보다는, 한가로이 즐길 것이며 덤불을 개간하고 농사짓기에 매진하기보다는, 가을날 모닥불 연기 곁에서 꿈꾸기를 즐길 것이다.라고 다짐한다. 헤세는 마음에 맞는 집과 정원을 갖게 되면서부터 비로소 삶이 아름다워졌다고 했다. “쉽고 편안하게 사는 법은 알지 못하지만 창문 앞에 정원과 풍경을 두고 즐기는 아름다운 삶은 애써 누리려 했노라”라고 헤세는 고백한다.
태어난 지 오십 년 만에 이제야 겨우 반 쪽 집을 지었네
외진 곳에 있으니 찾아오는 이 드물고 산 깊어 해 빨리 져서
쉬이 저녁 된다네_ 퇴계 이황
맑고 선한 품성을 기르는 장으로서 정원
퇴계의 삶에서 정원은 단순한 완상이나 휴식처 이상의 의미를 가진 것이 확실해 보인다. 연못은 보고 즐기기 위해서만 아니라 자신을 비춰 보는 마음의 거울이기도 했다. 소나무, 대나무, 매화, 국화나 연꽃은 절개를 지켜 나가는데 필요한 정신적 동지 같은 존재였다. 고향에서 조용히 살면서 착한 사람을 많이 길러내어 세상의 기강을 바로잡는 것에 삶의 목표를 정한 퇴계는 건축뿐아니라 정원과 주변 자연환경 조건까지 포함해 학문 연구와 교육을 위한 공간으로 서당을 조성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서당 건물은 방과 마루가 각 한 칸밖에 안 될 정도로 작게 지은 대신에 연못과 샘, 정원은 필수 요소로 갖췄다는 점이다. 그는 소나무, 대, 매화, 국화, 연을 기르며 그 의미를 취하고 일상적으로 즐기게 했다. 이는 마치 토머스 제퍼슨이 고등교육기관으로서 대학 캠퍼스 설계에 정원을 각별히 중요한 요소로 도입하고는 정원일을 강조했던 것과 유사하다. 퇴계가 즐긴 정원 요소는 많은 부분 주자의 전례를 따른 결과로 성리학적 의미에 더 방점 둔 것은 맞다. 그러나 식물을 심고 땅을 가꾸는 행위를 통해 사람의 선한 품성을 기를 수 있다는 정원 효용론은 동서고금 역사 속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실로 정원은 미적 경험과 도덕적 심성을 기르기에 제격인 곳이다.
활시위를 매어 당겼다가 한번 풀어 쉬는 방식으로서 정원감상
봄날의 살얼음 위에 놓인 삶처럼 흐트러짐 없이 학문과 도덕적 삶을 산 퇴계에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찾고 교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평생을 진지한 성리학자로서, 근엄한 도덕군자로서 살고자 한 퇴계에게 심미의식(아름다움을 살펴 찾음)은 삶의 자유로움과 기쁨, 그리고 즐거움을 얻게 해주는 일이었다. 진정한 수양을 이루는 데 필요한 힘을 얻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퇴계의 삶에서 자연과 시는 책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였다고 말할 수 있다. 퇴계는 “경관을 만나서 흥이 나면 시가 필요하다”라며 자연과 교감하기를 중시했다. 그가 이사할 때마다 터와 주변 자연 요건, 특히 산과 물과 바위, 경관을 따지곤 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심미의식은 진정한 자유와 즐거움의 세계를 보여준다. 번뇌 가득한 인간세에 얽매이지 않고 보다 기쁘고 여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심미적 의식과 미적 감수성을 기르고 향유해야 하는 것이다.
퇴계에게 정원은 삶에서 취한 상징적 의미의 표상이며 그것을 몸소 체현해 내기 위한 실천의 장이였다. 다시 말해 정원은 배움과 휴식 그리고 즐거움의 장이었으며 학문과 심성을 동시에 완성해 나가기 위한 삶의 필수품으로 간주한 셈이다.
“동산(자연)은 매우 아름다우나 사람의 뜻이 거칠다”고 한 주자의 한탄이 실감하는 시대다. 지금이야말로 퇴계의 정원에 담긴 깊고 풍부한 뜻을 우리가 새삼 되새겨 볼만하지 않은가?
신생국 미국의 국가이념을 마련한 건국의 아버지_ 토머스 제퍼슨
그의 꿈과 이상의 공간적 표상으로서 정원
미국 조경의 아버지, 토머스 제퍼슨
미국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국가 이상과 민주주의 이념의 기초를 다진 정치가로 평가된다.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로도 불리는 그는 정치뿐 아니라 예술, 과학, 교육, 원예, 건축, 조경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하지만 생전에 그는 화려한 정치가의 길보다는 농부나 정원사로서의 삶을 더 선호한 듯하다. 부친과 장인으로부터 막대한 규모의 농장을 물려받은 그는 자신의 평소 신념이었던 ‘자영농 중심의 민주주의 국가(agararian ideal) 실현을 꿈꾸며 농부이자 정원사로 살기를 바랐다.
스스로 조경가라고 한 적은 없지만 제퍼슨은 조경(landscape architecture)이란 용어가 생기기 전부터 조경가로 활동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당시 신생국 미국에서는 이탈리아나 프랑스식의 기하학적 정원이 유행하고 있었을 뿐 조경에 대한 별다른 인식이나 시도를 찾기 어려웠다. 제퍼슨은 고전적인 미와 낭만주의를 뛰어 넘어 팔라디아식(16세기 이탈리아 건축가 팔라디오의 디자인에 영향을 받은 건축 양식으로 대칭, 원근감 등에 의한 질서와 합리성이 강조됨) 건축물과 영국의 자연풍경식 정원 양식에 특별히 심취했다.
제퍼슨의 자연관과 정원관
-자연관과 정원에 대한 생각
자연에 대한 제퍼슨의 생각은 크게 기독교, 정치철학, 과학이라는 세 가지 다른 출발점을 갖고 있다. ‘자연은 가치를 탐구하고 인간 사회와 삶을 향상할 수 있는 자원이라는 것이 제퍼슨을 비롯한 당시 엘리트들의 가치관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자연은 신생 국가인 미국의 사회구성과 국민의 정신을 기르기 위한 정치적 도구이기도 했다. 질서와 조화라는 자연의 가치야말로 독립 직후 정치와 사회적인 혼란을 잠재우고 다양한 인종과 계급으로 구성된 미국 사회를 서둘러 안정시킬 도구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모두를 성숙하게 발전 시켜 나가기 위한 덕목으로 삼고 모델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미 대륙의 광활한 야생과 자연은 신생국 미국의 국민성을 개조하고 국가적 정체성을 세워줄 정치적 자산이자 도구였다.
버지니아 자생종으로 매우 크게 자라는 미국 측백나무와 튤립나무를 각별히 좋아하며 즐겨 심었던 것이나, 메인 주에서 잡은 큰 사슴 무스를 프랑스까지 실어와 왕립공원에 기증하고 전시하려 한 것에도 국토 자연을 국가 정체성과 연관시켰던 그의 자연관이 잘 드러나 있다.
그에게 있어서 자연은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자 자신의 타고난 자질과 탐구심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대상이기도 했다. 정치적 업적 중 하나로 간주되는 루이지애나주 매입 후에 그가 루이스(메리 우더 루이스 대장. 서양 지식이 많은 육군 장교 출신)와 클락(윌리엄 클락. 육군 장교)을 보내 영토와 자연에 대한 광범위한 자료를 수집할 것을 지시한 것도 그의 과학적 탐구심이 작용된 까닭이다.
제퍼슨에게 정원은 무엇보다 과학적 탐구의 장으로서의 의미가 컸다. 고등 교육기관 모델로 그가 직접 설계한 아카데미컬 빌리지(버지니아 주립대 초창기 캠퍼스)에 열 개의 정원이 핵심 요소로 들어 있다는 사실은 그의 이런 사상을 뒷받침해 준다. 미지의 자연을 탐구하는 과정을 통해 지적인 체계를 파악해내고 실천하는 현장이면서 수준 높은 교육을 위한 핵심으로 정원을 생각한 것이다.
그는 정원을 가꾸는 기술을 “환상으로 땅을 장식하는” 행위라며 “제7의 예술(그림, 조각, 건축, 음악, 시, 웅변에 추가해)”이라고 주장했다. 원예보다는 풍경화에 더 가까운 예술 행위라는 말에서 보듯이 그는 정원을 만드는 행위가 풍경을 넘어 형이상학적인 차원에까지 연관된 것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정원은 경제적 효용과 문화적 가치의 장이기도 했다.
제퍼슨의 정원들
타고난 취향과 재능으로 제퍼슨은 수많은 건물과 정원을 직접 설계하거나 관여했다. 그가 설계하거나 도와준 지인들의 주택만 대략 열다섯 개나 되고 버지니아대학 캠퍼스, 리치몬드 의사당, 수도 워싱턴 도시계획과 국회의사당 신축에도 깊이 관여했다. 주택과 정원, 캠퍼스와 도시계획에까지 그의 영향은 광범위했다. 자신을 이어 4대 대통령이 된 제임스 매디슨의 사저 몽펠리에를 짓는 데에는 수차례에 걸친 조언과 함께 자신이 숙련시켜 기른 기술자들을 보낼 정도였다. 정원가로서 그의 대표작은 생애 마지막 역작이라고 할 수 있는 아카데미컬 빌리지와 자신의 집 몬티첼로, 그리고 은거지 포플라 포레스트를 들 수 있다.
빛과 바람, 시간에 따라 변하는 꽃과 나무에서 최고의 화가로 탄생한 사람_클로드 모네
꽃과 나무와 빛으로 땅에 그림을 그리다
클로드 모네, 빛과 인상의 화가
오스카 끌로드 모네(Oscar Claud Monet 1840-1926)는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화가로 평가된다. 그가 인상주의의 창시자로 불리게 된 데에는 세느강 하류 항구도시 르아브르에서 바닷가 풍경과 자연을 온몸으로 접한 어린 시절의 경험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특히 굴곡이 많은 해안과 바닷가 풍경, 거기에 변화무쌍한 날씨와 기상 현상은 자연을 중시하는 그의 예술세계에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실제로 자연에 관한 남다른 관심과 애착을 가졌던 모네는 어릴 때도 종종 학교를 빼먹고 해변 절벽이나 모래사장을 걷곤 했다. 주변 자연과 사물(풀과 나무, 파도와 바다, 바위, 구름, 햇살, 항구, 배 등)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기곤 했다. 그런 취향은 고스란히 그림에 반영돼 모네는 평생 ‘빛은 곧 색채라는 인상주의 원칙을 고수했다. 같은 사물이 빛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 탐색하는 화가로 만들어 준 것이다.
아틀리에를 벗어나 프랑스 북부 해안과 세느강변 등 풍광이 아름다운 곳을 찾아 여러 곳을 다녔다. 그러다가 중년 이후 자신이 찾는 빛과 풍경이 정원에 있음을 깨닫고는 정원을 가꾸며 그 속에서의 다른 순간을 그림에 담으려 애썼다. 당시로는 긴 86세라는 삶을 살았던 그는 그림 그리기와 정원 가꾸기에 열중해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일련번호가 매겨진 것만 해도 총 2,050점에 달한다.
정원가 모네
역사상 저명한 인물 중에는 정원을 즐긴 이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화가들의 정원 사랑은 각별한 편이다. 모네 말고도 다빈치, 세잔, 르누아르, 고호, 놀데, 칸딘스키, 클레, 달리, 문징명, 송휘종, 강세황, 김홍도에 이르기까지 예를 들면 끝이 없을 정도다. 아무래도 정원이 가진 예술적 속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색채, 질감, 형태, 선과 그것들의 배합이나 구성 등 그림과 정원이 공유하는 부분은 의외로 많다.
하지만 서양 예술사에서 정원의 위상과 의미를 부각한 사람으로 모네만한 인물은 드물다. 비록 화가로 더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내가 화가가 된 건 아마도 꽃 덕분일 것”이라고 말했을 만큼 정원에도 큰 열정을 쏟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화단의 기존 통념을 거부하면서 새로운 화풍을 찾아 고심한 그는 화실을 벗어나 파리 근교 세느강 주변으로 그림 여행을 자주 다녔다. 경제적 사정도 있었지만, 마음에 드는 풍경을 찾느라 이사도 여러 번 다닌 그는 사는 곳마다 정원을 가꾸며 즐겼다.
도시의 세련된 환경이나 군중들을 피해 혼자 조용히 그림에 몰두하기를 원했던 그가 택한 거주지는 대체로 파리를 벗어난 세느강변 조용한 곳들이었다. 과수원, 포도밭, 야생화 초지로 둘러싸인 주택에는 이쁜 정원까지 갖춰져 있어서 굳이 세느강이 아니라도 평화로운 일상 풍경을 어렵지 않게 그려낼 수 있었다.
자신의 그림 모델이었던 까미유와의 신혼생활을 시작한 아르장퇴유(Argenteuil), 예쁜 정원과 풍경을 갖고 있었지만, 까미유를 잃는 슬픔을 겪었던 뵈테유(Vethetuil), 이후 푸아시(Poissy)를 거쳐 숨을 거둘 때까지 살았던 지베르니(Giverny)는 정원가로서 그의 이력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들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장소는 단연 지베르니다.
지베르니는 그가 정원일과 그림 그리기 모두에 엄청난 정성을 쏟은 곳이다. “가진 돈 전부를 정원에다 쏟아부었지만 그래도 황홀하기만 하다”라며 정원 가에 온실을 만들어 좋아하는 꽃과 희귀종을 사 모았다. 미학책보다 원예 서적이나 카달로그를 더 많이 본다고 했을 정도로 정원 공부에 열중했다. 그런가 하면 정원을 사랑하는 화가, 비평가, 소설가와 교류하며 원예종, 씨앗, 구에 관한 지식도 넓혔다. 이렇게 보면 모네는 정원사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원예나 가드닝 지식과 기술을 풍부하게 갖춘 사람이었다.
꽃으로 그린 그림이자 또 다른 예술 표현으로서 정원
흔히 모네의 정원은 ‘꽃으로 그린 그림으로 평가된다. “내 그림을 이해하려면 그 어떤 설명보다 내 정원을 보면 된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주저 없이 “정원이야말로 자신의 최고 걸작품”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에게 있어서 정원은 한번 완성하고 나면 계절에 따라 변화하고 날씨에 따라 달라지는, 살아있는 그림이었다. 말하자면 정원 가꾸기와 그림 그리기는 밀접한 관계를 갖는 상호연관적 예술 행위였다. 정원을 캔버스에 묘사하면 그림이 되고, 다시 땅에다 옮기면 정원이 되었다. 색의 배색 원리를 정원에 적용함으로써 색상의 조화를 달성했고 공간감을 부여했다.
그에게 있어 정원은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었다. 캔버스에 붓으로 그리기 전에 색, 빛, 형태로 실험해 보는 땅 위의 캔버스였다. 그는 자신이 보고 이해하는 인상을 정원의 물, 식물, 빛과 시설물을 통해 표현하고 소통하고자 했다. 빛과 대기에 따른 사물의 색과 형체 변화에 대한 그의 연구는 1880년경부터 시작해 죽을 때까지 생애 절반 이상에 걸쳐 지속되었다. 같은 대상이 시간과 계절을 거치며 빛과 분위기에 따라 매 순간 달라지는 변화를 포착하기에는 정원만 한 곳이 없었다.
정원 내 여러 장소에 화판을 설치해 두고는 빛의 방향과 분위기를 쫓아다니며 같은 대상의 다양한 인상을 섬세하게 묘사해 냈다. 이로써 모네는 인상주의 선두주자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자연과의 조화로운 만남을 통한 긍정적인 성정 함양의 장
모네는 정원을 가꾸면서부터 엄격하고 무뚝뚝했던 성격이 온화하고 열정적으로 바꿨다고 고백했다. 지베르니에서 정원을 돌보는 모습을 지켜본 어느 비평가는 차갑고 말 없던 이전의 모네와는 달리 “자애롭게 빛나 보인다”라며 놀란 적도 있다. 이런 점은 마치 원림 생활로 심신을 정화하려고 했던 조선 사대부의 면모와도 비견된다.
모네는 자주 자기 예술의 원천이 자연이라고 고백했다. “자연에 더욱 가까워지는 것”, 그리고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며 일하고 살아가는 것”만이 소원이라고 했다. 이 점 역시 조선 사대부들이 원림에서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비록 그 지향하는 것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정원에서 자연의 변화와 속성을 깨닫고 내밀한 섭리를 파악하며 어우러지기를 바랬다는 면에서 유사하다. 몸과 마음 모두를 기르고 정화해 주는 정원의 효용이 동서양이라고 어찌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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