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
 
지은이 : 한병철 (지은이), 전대호 (옮긴이)
출판사 : 김영사
출판일 : 2024년 01월




  • 매번 예리한 통찰로 우리 시대에 뜨거운 화두를 던져온 철학자 한병철이 맹목적인 축적을 강제하는 자본주의를 고찰하고, 긍정성의 과잉에 갇힌 우리 사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15편의 에세이와 3편의 인터뷰를 전합니다.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

    신자유주의 지배 체제는 왜 이토록 안정적일까? 그 체제에 맞선 저항은 왜 이토록 적을까? 왜 저항들은 모두 이토록 빠르게 물거품으로 돌아갈까? 부자와 빈자의 격차가 점점 더 커짐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혁명은 어찌하여 더는 불가능할까? 설명을 위해서는 오늘날 권력과 지배가 작동하는 방식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새로운 지배체제를 정착시키려는 자는 저항을 제거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지배 체제를 도입하려면 설정 권력(setzende Macht) 즉, 새로운 제도 등을 창시하는 권력이 필수적이며, 그 권력은 흔히 폭력과 짝을 이룬다. 그러나 이 설정 권력은 체제를 내적으로 안정화하는 권력과 동일하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마거릿 대처는 신 자유주주의 선봉으로서 노동조합을 “내부의 적”으로 간주하고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의제를 관철하기 위한 폭력적 개입은 방금 언급한 체제 유지 권력의 일이 아니다.


    규율 및 산업 사회의 체제 유지 권력은 억압적이었다. 공장 노동자는 공장 소유자에게 야만적으로 착취당했다. 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폭력적인 타자 착취는 저항과 반발을 일으켰다. 이 경우에는 지배적 생산관계를 뒤엎을 혁명이 가능했다. 이런 억압 체제에서는 억압도 억압자도 눈에 띈다. 구체적인 상대가 있고, 저항해야 할 가시적인 적이 있다.


    신자유주의 지배 체제는 구조가 전혀 다르다. 이 체제에서 체제 유지 권력은 더는 억압적이지 않고 유혹적이다. 그 권력은 규율 체제에서처럼 확연히 눈에 띄지 않는다. 구체적인 상대도 자유를 억압하는 적도, 맞서 저항하는 것이 가능한 적도 더는 없다.


    신자유주의는 억압당하는 노동자를 자유로운 경영자로, 자기 자신을 부리는 경영자로 만든다. 지금은 누구나 경영자인 자신에게 고용되어 자신을 착취하는 노동자다. 누구나 주인인 동시에 노예다. 계급투쟁도 자신과의 내적 투쟁으로 바뀐다. 오늘날 실패하는 사람은 자책하고 부끄러워한다. 사람들은 사회를 문제시하는 대신에 자신을 문제시한다.


    연결망을 이뤄 협동하는 다중, 지구적인 저항 및 혁명 군중으로 봉기할 만한 다중은 오늘날 없다. 오히려 현재 생산방식의 핵심 특징은 제각각 고립되어 개별화된 자기 경영자의 외로움이다. 과거에는 기업들이 서로 경쟁했다. 반면에 기업 내부에서는 연대가 가능했다. 지금은 모든 각자가 모든 각자를 상대로 경쟁한다. 기업 내부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절대적 경쟁은 생산성을 엄청나게 높이지만 연대와 공동체 정신을 파괴한다. 소진되고 우울하고 개별화된 개인들은 혁명 군중을 이루지 못한다.


    오늘날 공산주의는 어떤 처지일까? 도처에서 공유와 공동체를 들먹인다. 공유 경제가 소유와 점유의 경제를 대체한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 공유 경제가 자본주의의 종말과 지구적인 공동체 지향 사회의 등장을 알리는 종소리라고 믿는 것은 오류다. 그 새로운 사회에서는 소유보다는 공유가 더 가치가 크다고 제러미 리프킨은 주장하지만, 오히려 정반대가 옳다. 공유 경제는 결국 삶의 총체적 상업화로 이어질 것이다. 공동체 혹은 협력하는 평민의 이데올로기는 공동체의 총체적 자본화를 가져온다. 목적 없는 친절은 더는 가능하지 않다. 상호 평가 사회에서는 친절도 상업화된다. 사람들은 더 나은 평가를 받기 위해 친절해진다. 협력 경제의 한복판에서도 엄격한 자본주의 논리가 작동한다. 역설적이게도 이 아름다운 “공유”의 질서 안에서 무언가를 자발적으로 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를 상품으로 판매하는 순간, 자본주의는 완성에 이른다. 상품으로서의 공산주의야말로 혁명의 종말이다.



    자본주의와 죽음 충동

    오늘날 우리가 이야기하는 성장은 실로 암 덩어리들의 목표 없는 번성이다. 지금 우리는 죽음 도취를 방불케 하는 생산 및 성장 도취를 체험하고 있다. 그 도취는 생기인 척하면서 다가오는 치명적 파국을 은폐한다. 생산은 점점 더 파괴를 닮아간다. 인류의 자기소위는 어쩌면 인류가 자기 파괴를 미적 향유로 체험하게 되는 수준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발터 베냐민이 당대에 파시즘을 두고 한 말은 오늘날 자본주의에 적용된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공격성을 죽음 충동의 탓으로 돌린다. ‘문명 속의 불만이 완성되고 겨우 몇 달 뒤에 대공황이 터진다. 그때 프로이트는 이렇게 주장할 만했다. 자본주의는 인간이 야수로서 자신의 공격성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경제 형태라고 말이다.


    프로이트의 죽음 충동은 실제로 자본주의의 파괴적 과정을 설명하는 데 적합할까? 혹시 자본주의를 지배하는 것은 프로이트의 충동 이론을 벗어난 전혀 다른 유형의 죽음 충동이 아닐까? 프로이트가 제시하는 죽음 충동의 토대는 순전히 생물학적이다. 그의 사변에 따르면 과거 언젠가 커다란 힘의 영향으로 생명 없는 물질 안에서 생명이 깨어났다. 그 전까지만 해도 생명이 없던 물질 안에서 그때 발생한 긴장은 이후 완화되려 애썼다. 그리하여 생물 안에서 생명 없는 상태로 회귀하려는 충동이 형성되었다. 죽음 충동이 태어난 것이다.


    인간 특유의 공격성 곧 폭력(Gewalt)는 죽음 의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오로지 인간만 죽음 의식을 가지고 있다. 축적 논리가 폭력의 경제를 지배한다. 더 많은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더 강한 권력을 지녔다고 느낀다. 축적된 살해 폭력은 성장, 힘, 권력, 상처 입지 않음, 불멸의 느낌을 산출한다. 사디즘적 폭력과 짝을 이루는 나르시시즘적 향유는 바로 이 권력 성장에서 유래한다. 살해는 죽음을 막는다. 인간은 살해함으로써 죽음을 장악한다. 더 많은 살해 폭력은 더 적은 죽음을 의미한다. 핵 군비경쟁도 이 같은 자본주의적 폭력 경제의 원리를 따른다. 축적된 살해 능력은 상상 속에서 생존 능력으로 취급된다.


    자본의 축적 논리는 원시적 폭력 경제에 딱 들어맞는다. 자본은 현대의 마나(Mana)처럼 군다. 마나는 상대를 죽일 때 획득하는 신비로운 권력 물질(Machtsubstanz)이다. 사람들은 권력을 지녔다는 느낌과 상처 입지 않는다는 느낌을 산출하기 위하여 마나를 축적한다. 자본의 축적은 마나의 축적과 같은 효과를 낸다. 성장하는 자본은 성장하는 권력을 의미한다. 더 많은 자본은 더 적은 죽음을 뜻한다. 죽음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자본이 축적된다. 자본은 흘러간 시간으로도 해석된다. 무한한 자본은 무한한 시간의 환상을 산출한다. 시간은 돈이다. 한정된 수명 앞에서 사람들은 자본 시간을 축적한다.


    무당이 신에 씌듯이, 자본주의는 죽음에 씌어 있다. 죽음에 대한 무의식적 두려움이 자본주의를 추진한다. 자본주의의 축적 및 성장 강박은 임박한 죽음 앞에서 깨어난다. 그 강박은 생태적 재앙뿐 아니라 여러 정신적 재앙도 불러온다. 파괴적 성취 강박은 자기 주장과 자기파괴를 하나로 합친다. 사람들은 자신을 죽도록 최적화한다. 무자비한 자기 착취는 정신적 붕괴를 불러온다. 잔인한 경쟁 전투는 파괴적인 효과를 낸다. 그 전투는 타인에 대한 냉정함과 무관심을 낳고 자신에 대한 타인의 냉정함과 무관심을 유발한다.


    삶을 죽음으로부터 떼어놓기는 자본주의 경제의 본질적인 요소인데, 이 떼어놓기가 설죽은 삶을, 산 죽음을 낳는다. 자본주의는 역설적인 죽음 충동을 산출한다. 자본주의는 삶을 죽인다. 치명적인 것은 죽음 없는 삶을 향한 자본주의의 노력이다. 성과 좀비나 피트니스 좀비, 보톡스 좀비는 설죽은 삶의 모습이다. 설죽은 자는 어떤 생기도 없다. 오로지 죽음을 받아들여 품는 삶만이 진정으로 생기 있다.


    프로이트는 비록 죽음에 대하여 양면적 태도를 보였지만 삶과 죽음의 화해가 필수적임을 확실히 의식했다. 죽음을 무의식적으로 몰아내기는 죽음을 의식적으로 허용하기에게 자리를 내주고 물러나야 한다. “실재와 우리의 생각 안에서 죽음이 차지해야 마땅한 자리를 죽음에게 허용하고, 이제껏 우리가 아주 세심하게 억압해온, 죽음에 대한 우리의 무의식적 태도를 조금 더 드러내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삶을 긍정한다는 것은 또한 죽음을 긍정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부정하는 삶은 삶 자신을 부정한다. 오로지 삶에게 죽음을 되돌려주는 삶꼴만이 우리를 설죽은 삶의 역설로부터 해방한다. 우리는 죽기에는 너무 생기가 넘치고 살기에는 너무 죽어 있다.



    괴로운 공허

    자해자들은 흔히 우울증과 불안장애에 시달린다. 죄책감과 부끄러움, 손상된 자존감이 자해자들을 괴롭힌다. 내면의 지속적인 공허감은 그들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로 몰아간다. 상처를 낼 때 비로소 그들은 아무튼 무엇이라도 느낀다.


    우울증이나 경계선 성격장애(BPD)를 겪는 사람들은 흔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라고 한탄한다. 자해자의 다수는 우울증이나 경계선 성격장애를 지녔다. 상처 내기는 철저한 절망의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다시 느끼려는 시도, 자기 자신을 느끼는 감각을 재건하려는 시도인 것으로 보인다. 몸이 붉은 눈물을 흘린다. 나는 피를 흘린다. 고로 존재한다.


    진정성은 신자유주의적 생산 전략이다. 나는 나 자신의 경영자로서 끊임없이 나 자신을 생산해야 한다는 강제에 예속된다. 자신을 생산해내지 못하는 사람은 면도날을 움켜쥔다.


    괴로운 공허감은 어디에서 유래할까? 우서 나르시시즘과 자기애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애의 주체는 자기와 타인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다. 이 경우에는 선명한 나-경계(Ich-Grenze)가 있다. 그 경계가 나와 타인을 구별한다. 반면에 나르시시스적 자기 관련에서는 자아가 타인에게서 자기를 알아볼 정도로 타인이 왜곡된다. 나르시시스적 주체는 자신의 그림자가 드리운 세계를 지각한다.


    오늘날의 많은 사회적 명령은 나-리비도의 나르시시스적 정체를 유발하고, 그 정체는 병을 일으킨다. 예컨대 진정성 명령이 그러하다. 이 명령은 끊임없이 자기에게 질문하고 자기를 엿보고 엿듣고 포위하고 또한 끊임없이 비난하게 만드는 나르시시스적 강제력을 발휘한다.


    우리는 누구나 사랑이 필요하다. 타인의 사랑이 비로소 나를 안정화한다. 반대로 나르시시스적 자기 관련은 나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안정적인 자존감을 위해서는 내가 나 자신의 중요성을 발견해야 한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나 자신이 타인들에게 중요하다는 견해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 견해는 막연할 수도 있겠지만, 자신이 중요하다는 느낌을 위해 필수적이다. 존재감의 결여는 자해의 원인이다. 상처 내기는 어쩌면 한마디로 사랑을 갈구하는 외침이다.


    나는 자존감을 스스로 생산할 수 없다. 나는 나를 사랑하고 칭찬하고 인정하고 소중히 여기는 타인들의 보상에 의존하여 자존감을 얻는다. 인간의 나르시시스적 개별화, 타인의 도구화, 그리고 총체적인 상호경쟁은 보상 풍토를 파괴한다. 타인은 안정적인 자아의 형성에 필수적이다. 타인이 사라지면, 나는 공허에 빠진다.


    오늘날 사람들은 모든 형태의 부상을 기피한다. 사랑도 기피된다. 사랑에 빠지는 것 자체가 너무 심각한 부상일 터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위험을 감수하며 큰 판돈을 걸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아픔과 부상을 주는 상실이 두렵기 때문이다. 소통은 오늘날 매끄럽게 다듬어져, 마음에 드는 것들의 교환, 긍정적인 것들의 교환이 된다. 슬픔을 비롯한 부정적 감정은 어떤 말도, 어떤 표현도 허락받지 못한다.


    현대 사회의 주요 특징은 모든 부정성의 제거다. 모든 것이 매끄럽게 연마된다. 셀피 중독도 자기애와 별로 상관이 없다. 셀피 중독은 나르시시스적인 나의 영영 멈추지 않는 공회전일 따름이다. 내적인 공허 앞에서 사람들은 부질없이 자기를 생산하려 애쓴다. 당연히 성공하지 못하는 애씀이다. 오로지 공허만 재생산된다. 셀피와 공허한 자아. 이것들은 공허감을 심화한다.


    자기애가 아니라 나르시시스적 자기 관련이 셀피 중독을 낳는다. 셀피는 공허해진, 몹시 불안해진 자아의 아름답고 매끄러운 표면이다. 괴로운 공허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사람들은 오늘날 면도날을 움켜쥐거나 아니면 스마트폰을 움켜쥔다. 셀피는 공허한 자아를 잠시 아름답게 빛나게 해주는 매끄러운 표면이다. 그러나 그 표면을 뒤집으면 상처투성이 뒷면이 나온다. 뒷면은 피를 흘린다. 셀피의 뒷면은 상처다.



    다들 서두른다

    모든 시간 형태가 가속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리추얼 행위를 가속하려 한다면, 그것은 신성모독일 터이다. 리추얼과 예식은 고유시간을 지녔다. 그것들 고유의 리듬과 박자를 지녔다. 마찬가지로 계절과 결합된 모든 행위도 가속을 거부한다. 친밀한 쓰다듬, 기도, 축제 행렬도 가속되지 않는다. 리추얼과 예식을 포함한 모든 서사적 과정은 제각각 고유한 시간을 지녔다. 계산하기와 달리 이야기하기는 가속을 허용하지 않는다. 가속은 이야기의 서사적 시간구조, 리듬, 박자를 파괴한다.


    가속은 현재의 시간 위기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모든 것이 더 빨라진다. 어디에서나 감속 비결이 제공되고 찬양된다. 그러나 진정한 시간 위기는 방금 언급한 시간 형태들, 가속을 허용하지 않는 시간 형태들, 지속의 경험을 가능케 하는 시간 형태들이 우리 주변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오늘날 노동시간은 시간 전체를 장악하여 단적인 시간으로 되었다. 노동시간은 가속되고 착취될 수 있는 시간이다. 이런 상황에서 감속 비결들은 다른 시간을 창출하지 못한다. 그 비결들은 노동시간을 전혀 다른 시간으로 바꾸지 못하고 단지 감속할 따름이다.


    오늘날의 성과사회는 시간 자체를 인질로 구속한다. 시간 자체를 노동에 매어놓는다. 그러면 성과 압력이 가속 압력을 낳는다. 노동 자체가 반드시 파괴적인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노동은 “팍팍하지만 건강한 피로”를 유발할 수 있다. 반면에 성과 압력은, 설령 우리가 실제로는 많이 노동하지 않더라도, 영혼을 태워 없앨 수 있는 심리적 압력을 낳는다. 소진은 노동과 관련된 질병이 아니라 성과와 관련된 질병이다. 영혼을 병들게 하는 것은 노동 자체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원리로서의 성과다.


    오늘날 우리는 휴가 속으로뿐 아니라 잠 속으로도 노동시간을 가지고 들어간다. 따라서 우리는 몹시 불안하게 수면을 취한다. 휴식도 노동력의 재생산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노동의 한 양태일 따름이다. 이렇게 보면, 휴식은 노동의 타자가 아니라 노동의 현상이다. 또한 감속이나 느림만으로는 다른 시간을 창출할 수 없다. 감속 혹은 느림도 가속된 노동시간의 귀결이다. 널리 퍼진 통념과 달리 감속은 오늘날의 시간 위기를 없애지 못한다. 감속은 치유를 일으키지 못한다. 오히려 감속은 단지 증상이다. 증상으로 병을 없앨 수는 없다. 감속만으로는 노동을 축제로 만들 수 없다.


    오늘날 반드시 필요한 것은 감속이 아니라 시간 혁명, 전혀 다른 시간이 시작되게 하는 혁명이다. 가속 가능한 시간은 나-시간(Ich-Zeit)이다. 이것은 내가 나를 위해 내는 시간이다. 하지만 다른 시간이 있다. 무슨 말이냐면,내가 동료 인간에게 주는 동료 인간 즉, 타인의 시간이 있다. 타인의 시간은 선물이며 가속되지 않는다. 타인의 시간은 성과와 효율성도 거부한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시간 정치는 타인의 시간을, 선물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이제 다른 시간 정치가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를 고립시키고 개별화하는 나-시간과 달리 타인의 시간은 공동체를 조성한다. 바꿔 말해 공동의 시간을 창출한다. 공동의 시간은 좋은 시간이다.



    “유감스럽지만, 그게 사실입니다”

    “닐스 뵈잉, 안드레아스 레베르트와 나눈 대화

    차이트 비센 : 어떻게 하면 개인이 이 사회 안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이상들을 성취하기 위해 더 많이 노력해야 할까요?


    한병철 : 신자유주의 시스템은 그런 노력을 어렵게 만듭니다. 심지어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몰라요. 내가 느끼는 나의 욕구는 나의 욕구가 아닙니다. 의류 할인 매장 “프라이마크(Primark)”를 생각해보세요. 그 매장이 도시마다 다 있는 건 아니어서, 사람들은 함께 자동차를 탈 사람들을 모아서 거기로 달려갑니다. 도착하면, 매장을 약탈하다시피 하죠. 최근에 본 신문 기사에 어느 소녀의 발언이 실렸더군요. 베를린 알렉산더플라츠 C&A 옆에 프라이마크가 들어온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소녀는 기쁨에 겨워 환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여기에 프라이마크가 생기면, 내 삶은 완벽해질 거야.”


    이 삶이 정말로 그 소녀에게 완벽한 삶일까요? 그 소녀의 생각은 소비문화가 낳은 환상이 아닐까요? 한번 정확히 살펴봅시다. 소녀들이 옷 백 벌을 삽니다. 한 벌의 가격은 5유로라고 칩시다. 벌써 이 구매 자체가 미친 짓이에요. 왜냐하면 방글라데시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그런 싸구려 옷을 만드는 공장들이 폐업하면 사람들이 죽어나가거든요. 소녀들은 옷 백 벌을 사놓고 거의 입지 않아요. 그들이 그 옷을 가지고 뭘 하는지 아세요?


    소녀들은 그 옷을 가지고 광고를 해요. 그들은 수많은 동영상을 제작합니다. 소비자들은 옷이나 그밖에 물품을 구매하지만 사용하지 않아요. 대신에 상품을 광고하고, 이 광고가 새로운 소비를 유발하죠. 요컨테 절대적 소비, 물품 사용과 연계되지 않는 소비가 등장했습니다. 기업이 광고를 소비자들에게 떠넘기는 거예요. 정작 기업은 광고를 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완벽한 시스템이죠.


    차이트 비센 : 선생님은 학문이 하는 일을 어떻게 평가하실까요? 학문은 앎을 창출하지 못할까요?


    한병철 : 오늘날 학자들은 지식의 사회적 맥락을 숙고하지 않습니다. 학자들은 실증적인 연구를 하죠. 하지만 모든 지식 각각은 특정한 지배 관계 안에서 발생합니다. 새로운 지배 관계가, 새로운 장치(Dispositiv)가 새로운 지식을, 새로운 담론을 낳습니다. 지식은 늘 지배 구조 안에 내장되어 있어요. 학자 자신이 지배 구조의 권능에 예속되어 있음을 깨닫지 못해도, 지식의 맥락성을 숙고하지 않아도 실증적 연구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오늘날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바로 이 숙고예요. 철학도 실증적 학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철학이 사회와 관계 맺지 않고 철학 자신과 관계 맺는 상황이에요. 그렇게 철학은 사회맹(盲)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차이트 비센 : 그래서 선생님은 어떤 제안을 하시겠습니까?


    한병철 : 정신과학들은 어떤 사회적 의미를 가질까, 라는 질문이 관건입니다. 학자 자신이 하는 연구의 사회적 배경을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지식은 시스템이 지배 구조와 얽혀 있기 때문이죠. 왜 지금 감정 연구가 이토록 왕성하게 이루어질까요? 어쩌면 오늘날 감정들은 곧 생산성을 의미하기 때문일 겁니다. 감정들이 조종 수단으로 동원되고 있어요. 감정을 움직이며, 인간의 행동이 무의식 수준에서 조종되고 조작됩니다.


    차이트 비센 : 지금 하시는 말을 들으면 선생님이 음모론자처럼 느껴져요. 지능이 더 많아지면, 더 나은 시스템을 이룩할 수 있을까요?


    한병철 : 지능(Intelligenz)이란 intel-leger, 곧 사이를 읽기, 바꿔 말해 구별하기를 뜻해요. 지능은 시스템 내부에서의 구별하기 활동이죠. 지능은 새로운 시스템을, 새로운 말을 개발할 수 없습니다. 정신은 지능과 전혀 달라요. 저는 지응이 아주 높은 컴퓨터가 인간 정신을 똑같이 복제할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습니다. 물론 어느 모로 보나 지능을 갖춘 기계를 설계할 수는 있겠죠. 하지만 그 기계가 새로운 언어나 전혀 다른 무언가를 발명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저는 그렇게 믿어요. 기계는 정신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어떤 기계도 자신이 수용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산출할 수 없어요.


    반면에 생명은 수용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산출할 수 있죠. 바로 이것이 생명의 경이로움이에요. 생명은 그래요. 생명은 정신입니다. 그래서 생명이 기계와 다른 것이고요. 그런데 모든 것이 기계화될 때, 모든 것이 알고리즘에 의해 지배될 때, 생명은 위험에 처하죠. 레이 커즈와일을 비롯한 탈인본주의자(Posthumanisten)이 어렴풋이 꿈꾸는 기계화된 불멸의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닐 거예요. 어쩌면 우리는 언젠가 기술의 도움으로 불멸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 대가로 생명을 잃겠죠. 우리는 생명을 대가로 치르고 불멸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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