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인생 수업
 
지은이 : 프리드리히 니체 (지은이), 강현규 (엮은이), 김현희 (옮긴이)
출판사 : 메이트북스
출판일 : 2024년 07월




  • 니체의 철학은 특히 현대 사회에서 느끼는 혼란과 고단함을 겪는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그의 사상은 복잡한 철학적 이론을 넘어,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지혜를 제공합니다. 니체의 중기 이후 글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 철학적 배경이 없는 독자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니체의 인생 수업


    내 삶의 방향을 제대로 찾기 위한 인생 수업

    경험의 원천이 되는 자기 자신에게 헌신하라

    당당한 발걸음과 경건한 믿음으로 지혜의 길로 전진하라!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경험의 원천이 되는 자기 자신에게 헌신하라! 당신의 본질에 대해 불평불만을 늘어놓지 말라. 자신을 책망하지 말라. 당신에게는 인식으로 향하는 100개의 디딤판이 있는 사다리가 있다. 당신이 체험한 모든 걸 손에 넣어라. 이를테면 혼선, 오류, 착각, 정열, 사랑과 희망 등 당신이 추구하는 목표에 나타나는 것들 말이다. 이 목표들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이라는 문화의 고리를 이루는 하나의 사슬이 되어 그 과정이 진행되도록 한다. 만약 당신의 눈이 자신의 본질과 인식 안에 숨겨진 어두운 샘의 바닥을 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밝아졌다면 아마 그곳에 비친 멀리 있는 별들, 즉 미래의 문화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목표를 추구하는 삶은 매우 힘들고 잠시도 편안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는가? 그것은 당신이 ‘인식의 꿀보다 더 달콤한 꿀은 없다는 사실을 아직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직은 모르겠지만 드리워진 비애의 구름마저도 당신의 원기를 회복시킬 우유를 짜내는 젖가슴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나이가 들어서야 그동안 온 세상을 즐거움으로 지배하는 자연의 소리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지 깨닫게 된다. 이러한 인생에서는 나이가 들수록 지혜도 쌓여서 늘그막에는 변함없는 정신적 기쁨을 느끼며 온화한 햇빛처럼 빛나게 된다. 결국 당신은 자연이 바라는 대로 인생의 한 산등성이에서 나이와 지혜의 정점에 오르게 될 것이다. 그리되면 죽음에 안개가 다가올 시간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아도 화를 낼 이유가 없어진다. 당신은 마지막으로 빛을 향해 나아갈 테고 인식의 환호성을 지를 것이다.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좋은 것은 깊은 고요다

    무엇이든 항상 자기 자신에게 초점을 두고, 자기가 지닌 능력을 모두 서로 조화롭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목표를 정하는 활동은 무엇이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한다. 이들은 마치 음악의 마디를 이루는 동적인 선율이 시작되는 부분도 없이 그냥 길게만 늘어진 조화로운 화음으로 이루어진 음악과 같다. 따라서 조화로운 화음으로만 이루어진 호수 위의 조각배가 다시 새로운 평형을 유지하게 하려면 외부에서 오는 움직임이 필요하다.


    이러한 천성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 현대인들은 대부분 매우 불안해진다. 왜냐하면 이들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또 실제로 이들에게서 나올 게 없어도 그냥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모습을 보면 각자 개인의 기분에 따라 이런 이상한 의문을 품게 된다. 도대체 왜 선율이 필요한가? 삶이 깊은 호수에 고요히 비치고 있는데 우리는 왜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는가?


    중세에는 이런 천성을 가진 사람들이 지금보다 많았다. 괴테는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은 깊은 고요다. 그 속에서 나는 세상에 역행하며 살고 성장하며, 불과 칼로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을 얻게 된다”라고 말했다. 이렇듯 군중 속에서도 여전히 자신과 더불어 평화롭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드문 일인가.


    자신의 무지를 숨기고자 거만하게 행세하지 마라

    어떤 분야에서건 뭔가를 잘 알고 이해하면, 우리는 겸손해지고 행복하며, 독창성을 발휘한다. 또 충분히 배웠고 눈과 귀를 열고 있으면, 어디서건 우리의 영혼은 더욱 유연해지고 우아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하고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면, 어떤 사안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을 사랑스럽고 가치가 있는 존재로 만들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는 뻣뻣한 자세로 아무런 감흥도 없이 도시, 자연, 역사를 그냥 지나치게 된다. 그러고는 심지어 자신이 뛰어나서 이러한 태도를 보이고 냉정하게 구는 것처럼 행세한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의 무지와 지식에 대한 빈약한 갈증을 위엄과 성격으로 가장하면서 거만하게 행세하는 법을 터득하기도 한다.


    자기 행동을 숙고하는 법을 단련해야 한다

    자기 행동을 심사숙고하는 법을 연습하고 단련해 이에 익숙해지면, 다음에 같은 행동을 할 때는 그것이 편지를 쓰거나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처럼 간단한 일에 불과하더라도 내면의 눈을 감아야만 한다. 정말로 평범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도, 이들이 생각하는 것을 제대로 알아내고 또 이해하려면 사상가는 눈을 감고 생각하는 법을 알아야만 한다.



    내가 원하는 나로 살기 위한 인생 수업

    내 한계선 안의 기준으로 세상을 평가하지 마라

    눈이 좋든 나쁘든 결국에는 내가 활동하는 범위까지만 보이기 마련이다. 이 한계선으로 단절된 나만의 세계는 크고 작은 숙명이자 가장 친밀한 공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결국 이 숙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렇듯 모든 존재는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독특한 원에 둘러싸여 있다. 우리의 모든 감각은 마치 감옥의 벽처럼 하나의 작은 공간 안에 우리를 고립시킨다. 그렇게 에워싸인 우리는 한계선 안의 기준으로 바깥세상을 평가한다. ‘이것은 가깝고 저것은 멀다 ‘이것은 크고 저것은 작다 ‘이것은 거칠고 저것은 부드럽다라는 식이다. 이러한 평가를 우리는 느낌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오류 그 자체이다!


    우리는 삶의 한 시점에서 평균적으로 할 수 있는 경험과 흥분 정도에 따라 자신의 삶이 짧은지 긴지, 가난한지 부유한지, 충만한지 공허한지를 평가한다. 더 나아가 평균적인 인간의 삶을 기준으로 다른 피조물의 삶까지 평가한다. 이것 역시 오류이다.


    만약 우리가 평균보다 100배쯤 확대된 시력으로 가까이서 인간을 관찰한다면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커 보일 것이다. 즉 우리의 감각기관은 감지하는 대상을 실제보다 크게 인식한다. 우리는 감각기관이 지닌 이러한 특성 때문에 감각의 거짓과 기만에 넘어가며, 이것이 다시 우리의 판단과 ‘인식을 이루는 토대가 된다. 우리가 여기서 벗어날 방법은 없으며, 실제의 세계로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이나 샛길도 없다! 마치 자신이 친 그물에 걸린 거미처럼 우리의 감각 안에 스스로 갇힌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오직 그물에 걸린 것만 잡을 수 있을 뿐, 그물 밖에서는 아무것도 잡을 수가 없다.


    나의 본질이야말로 내 생각과 판단의 원인이다

    우리는 원칙과 학설이 우리의 성격을 형성하고, 흔들리지 않도록 안정성을 주리라 생각해서 무의식중에 자신의 기질에 맞는 원칙과 학설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다. 생각과 판단이 우리의 본질을 형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본질이 이렇게 생각하고 판단하게 하는 원인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이런 코미디를 하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태만하고 안이하며, 본질과 사고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일관성 있게 허영심에 휘둘리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사람들의 존경을 얻게 해서 신뢰와 권력을 제공하기 때문에 쉽사리 뿌리치기가 어렵다.


    높은 수준의 교양을 쌓을수록 모든 것이 흥미롭게 보인다

    인간은 더 높은 수준의 교양을 쌓아갈수록 모든 것이 흥미롭게 보인다. 어떤 사안의 교훈적인 면을 재빨리 파악하고, 사고의 틈새가 교양으로 채워질 수 있다는 점과 교양으로 사상을 뒷받침할 수 있다는 점을 제시할 줄 알게 된다. 그리고 점점 지루함은 사라지고, 지나치게 흥분하는 감정도 사그라진다. 마침내 식물들 사이로 다가가 연구하는 자연과학자처럼 스스로 사람들 틈에 들어가 자신의 인식 충동을 강하게 자극하는 어떤 것을 하나의 현상으로 인정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스스로 주인이 되는 것이다

    미래에 어떤 것이 현재의 도덕적인 감정과 판단을 대체하게 될지 그 누가 설명할 수 있겠는가! 설령 지금 우리가 쌓고 있는 건축물이 기초부터 완전히 잘못되었고, 수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확신했다고 하자. 그렇더라도 이성의 구속력이 저하되지 않는 한,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이성의 구속력은 날이 갈수록 점차 감소할 수밖에 없다. 삶과 행위의 법칙을 새로 세우는 과제를 수행하기에는 생리학, 의학, 사회학 그리고 고독학이라 불리는 우리의 학문이 아직 충분한 확신을 얻지 못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러한 학문에서 새로운 이상 그 자체까지는 아니더라도 새로운 이상을 취하는 초석들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우리는 각자의 취향과 재능에 따라 선구적인 존재로 살거나, 아니면 뒤쫓아가는 존재로 살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과도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스스로 주인이 되거나, 혹은 그런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면서 작은 실험 국가들을 건설하고 거듭해서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이다.



    삶의 짐을 가볍게 하기 위한 인생 수업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도덕을 나는 사랑한다

    나는 근본적으로 “이것을 하지 마라! 포기해라! 자기 자신을 극복해라!”와 같이 말하는 모든 도덕을 싫어한다. 이와 반대로 나는 어떤 일이든 행하도록 촉구하는 도덕,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떤 일을 다시 반복해서 행하도록 촉구하는 도덕, 그리고 밤에는 그것을 꿈꾸라고 촉구하고, 오로지 이것을 잘하도록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도덕, 나는 그러한 도덕을 사랑한다. 그렇게 살다 보면 그러한 삶에 속하지 않는 것들은 차례대로 하나씩 사라지게 된다.


    스치는 바람에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누런 잎들처럼 증오나 반감도 없이 오늘은 이것이, 내일은 저것이 자신에게 이별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눈은 옆도 뒤도 아래도 아닌 오직 목표를 향해 앞만 보느라 이것들이 떠나는 것조차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사물을 아름답게 하는 또 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

    난 여전히 살아 있으며 또한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 난 아직은 살아야 한다. 아직은 생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데카르트로부터 인용한 글귀임-옮긴이)


    오늘날에는 누구나 자기의 희망과 가장 소중한 생각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 그래서 나도 오늘 나 자신에게 바라는 것, 올해 처음으로 떠오른 생각, 즉 앞으로 내 인생의 초석이고 보증이며 달콤함이 될 생각들을 말하려고 한다. 나는 항상 더 배우려고 하고, 사물의 필연적인 것을 아름다움으로 보려고 한다. 그래서 사물을 아름답게 하는 또 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


    아모르파티(Amor fati, 운명애)! 이제부터는 이것이 내가 추구하는 나의 사랑일 것이다. 나는 추한 것과 싸우고 싶지 않다. 나는 비난하고 싶지 않다. 비난하는 자를 비난하고 싶지도 않다. 차라리 그들을 외면하는 것이 내 유일한 부정의 표현일 것이다. 그러니까 언젠가 나는 무엇이든 긍정을 표하는 자가 되고 싶다.



    삶과 인간의 본질을 들려주는 인생 수업

    자기 영혼의 칠판이 빼곡하게 채워지면

    인간은 애증이 서로 교차한다. 이는 끊임없이 ‘인생에 대한 자신의 판단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인간의 내적인 특징이다. 인간은 좋고 나쁜 모든 경험을 마음에 담아두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자기 영혼의 칠판이 빼곡하게 채워지면 더는 현존재(존재가 무엇인지 물을 수 있는 존재자를 인간이라는 용어 대신 현존재라고 부름-옮긴이)를 미워하거나 경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하지도 않는다. 때로는 현존재를 품고 때로는 기쁨의 눈으로, 때로는 슬픔의 눈으로 바라보며, 자연처럼 여름인가 싶으면 곧 가을인 것 같은 기분이 들 것이다.


    남의 불행을 보고 기뻐하는 마음은 왜 생기나

    남의 불행을 보고 기뻐하는 마음은 대부분 의식적인 면에서 볼 때 자신이 처한 상황이 안 좋고, 걱정이나 질투 그리고 고통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즉 사람들은 남에게 닥쳐온 불행을 자기의 상황과 견주어보고 질투를 가라앉히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지금은 자기가 행복하다고 느낄 때도 이웃의 불행을 자기의식 속에 자본으로 쌓아두었다가, 자기에게 불행이 닥쳤을 때 쌓아둔 남의 불행을 같은 일에 적용해보려 한다. 이렇게 해서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행운을 얼마나 얻었느냐를 평등의 기준으로 삼는다. 따라서 남의 불행을 보고 기뻐하는 마음은 평등의 승리와 회복에 대한 가장 저속한 표현이다.


    사람들은 너무 가까이에서 자신을 바라본다

    사람들은 언제나 몇 발짝도 안 될 만큼 너무 가까이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이웃은 항상 너무 멀리 떨어져서 바라본다. 따라서 이웃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대략 통틀어서 판단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개별적이고 우연하며 중요하지도 않은 특징과 사건까지도 아주 자세히 다루어 판단하게 된다.


    인생의 첫 20년과 마지막 20년에 대한 고찰

    사계절을 인생의 네 가지 연령대에 비유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인생의 첫 20년과 마지막 20년은 어느 계절에도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하얘진 머리카락과 눈 또는 이와 비슷한 색채의 변화에만 국한해서 비유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인생의 첫 20년과 마지막 20년은 계절보다는 명절에 비유하는 편이 타당하다. 첫 20년은 전체 연령대, 즉 인생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긴 설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20년은 앞서 체험한 모든 걸 살펴보고, 내면화하고 정당화해 조화롭게 하는 기간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에 비유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해의 마지막 날에 지난 1년 전체를 되돌아보니까. 다만 이 중간에는 실제로 사계절과 유사한 기간이 있는데, 20세부터 50세까지의 기간이 바로 그러하다.


    여기서는 통틀어 10년 단위로 계산했지만, 대략적인 계산법으로 각자 자기 경험에 맞춰서 순화시켜야 한다. 20세에서 50세까지, 이 세 번의 10년은 세 계절인 여름, 봄과 가을에 상응한다. 다만 사람의 인생 중 겨울에 해당하는 연령대는 없다. 혹독한 시련을 겪거나 차갑고, 외롭고, 희망이라고는 거의 없는 상황에서 병을 앓느라 아무 성과 없이 보내는 기간을 인생의 겨울이라고 부른다면 모를까. 유감스럽게도 이런 일이 드물지 않게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다.


    20대는 뜨겁고, 귀찮고, 천둥 번개가 치는 거친 날씨와 같으며, 활동력이 왕성해 지치게 만드는 시기이다. 또한 날이 저물어 밤이 오면 그 날을 찬양하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는 시기이기도 하다. 일하는 것이 힘들기는 하지만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런 20대의 시기는 인생의 여름이다.


    이에 비하면 30대는 인생의 봄이다. 이 시기에는 공기가 너무 따뜻하다가도 어느새 금방 너무 추워지고, 언제나 날씨가 불안정해 자극적이다. 또한 기력이 왕성하고, 잎이 무성해지며, 어디서나 꽃향기가 풍겨오는, 아침과 밤이 더욱 매혹적인 시기이기도 하다. 30대에는 진정으로 마음이 끌리는 일을 하고 있기 마련이므로 새소리에 깨어나 일터로 가면서도 아직 한창때의 즐거움에 젖어 앞으로 더 좋아질 거라는 기대에 부풀고는 한다.


    마지막으로 40대는 모든 것이 정지한 듯한 신비로운 시기이다. 상쾌한 바람이 부는 높고 넓은 산악지대의 고원과 같은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아래, 낮과 밤을 똑같이 온화하게 보내는 시기이다. 40대는 수확의 시기이고 가장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쾌활함을 느낄 수 있는 시기로, 인생의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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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