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은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행복은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까? 이 책은 행복은 무엇이며,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정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재편역한 것으로, 오늘날의 독자가 좀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내용을 담았다. 난해하고 관념적이거나 지금의 시대 상황과는 맞지 않은 내용들은 덜어내고 정리했다.
어떤 삶이 좋은 삶, 행복한 삶인가? 이 물음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묻고 성찰해야 할 주제일 것이다. 인간 행위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결국 행복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행복은 인간이 타고난 기능을 목적에 맞게 탁월하게 수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 고유의 기능이 바로 ‘덕(탁월성)’을 드러내 보이는 이성적 영혼의 활동이며, 이것이 바로 인간에게 가장 좋은 최고의 선이자 행복이라는 것이다. 재물이나 타고난 재능, 외모, 행운 같은 우연성도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있다고 보았지만 행복의 핵심은 ‘덕’ 또는 ‘탁월성’에 있다고 보았다.
모두가 행복하길 원하지만 왜 스스로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에 꼽을까?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눈에 보이는 것들에 끊임없이 집착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늘 고난과 역경에 처해 있으며,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
■ 저자 아리스토텔레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다. 기원전 384년 북부 그리스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태어났다. 마케도니아 왕의 친구이자 주치의였던 아버지를 어릴 때 여의고, 17세 때 어머니마저 돌아가신다. 그 뒤 후견인인 프록세노스에 의해 아테나이에 있는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로 보내졌고, 거기에서 20년간 머물렀다. 기원전 347년 플라톤이 죽자, 그는 후원자였던 소아시아 아소스의 왕 헤르메이아스를 찾아간다. 그 이유는 그리스 북동쪽에 있는 오린토스가 마케도니아의 수중에 떨어지자 아테네에 반마케도니아 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기원전 345년 헤르메이아스가 페르시아인들에게 살해되자 그는 레스보스섬의 미틸레네로 건너갔고, 기원전 342년에는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의 초청으로 왕자 시절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교육을 담당했다. 기원전 335년에 다시 아테나이로 돌아와 자신의 독자적인 교육기관인 리케이온을 세웠는데 이것이 소요학파의 기원이 된다. 이 시기에 주로 쓰인 그의 글은 도덕과 미학, 논리와 과학, 정치와 형이상학을 포함하는 서양 철학의 포괄적인 체계를 처음으로 창조했다. 그의 지성과 폭과 깊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고, 학문 전반에 걸친 백과전서적 학자로서 『니코마코스 윤리학』 『형이상학』 『자연학』 『정치학』 『범주론』 『명제론』 『수사학』 『시학』 등의 저서를 남겼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자 아테나이에서는 다시 반마케도니아 운동이 재연되었는데 마케도니아와 관계가 깊었던 그는 불경죄로 문책을 받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사전에 모친의 고향인 칼키스로 건너갔다. 이듬해 위장병을 앓다가 63세로 생을 마감한다.
■ 역자 정영훈
대학에서 국문학을, 대학원에서 경영학과 상담심리학을 공부했다. 대학 졸업 후 줄곧 출판기획자의 길을 걸어왔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기획하고 만들고 있으며, 한 권의 책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으로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엮은 책으로는 『위대한 심리학자 아들러의 열등감, 어떻게 할 것인가』 『위대한 심리학자 아들러의 가족이란 무엇인가』 『몽테뉴의 수상록』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인생 수업』 『세네카의 행복론』 『세네카의 인생론』 등이 있다.
■ 차례
엮은이의 말 _ 삶의 목적의식과 방향성을 찾게 되다!
1장 ‘가장 좋음’인 행복에 대해
좋음이나 행복에 관한 여러 가지 관념들
최상의 좋음인 행복은 분명 최종적이다
인간은 행복을 어떻게 얻게 되는 걸까
죽은 뒤에야 행복할 수 있는 것인가
행복은 칭송받고 완전한 것들 중에 속한다
덕의 두 가지 종류: 도덕적인 덕과 지적인 덕
2장 도덕적인 덕이란 무엇인가
도덕적인 덕은 습관의 결과물이다
절제와 용기는 ‘중용’으로 지켜진다
도덕적인 덕은 즐거움이나 고통과 관련이 있다
덕은 정념이나 능력이 아닌 성품이다
중도를 겨냥한다는 점에서 덕은 일종의 중용이다
개별적인 덕들에 적용한 중용과 과함과 부족함
과함과 모자람과 중용은 모두 서로에 대해 대립한다
과함과 부족함의 양극단에서 멀리 떨어져야 한다
자발적인 행위들과 비자발적인 행위들
이성적 선택의 개념과 대상에 대해
이성적 선택과 숙고는 어떤 관계인가
덕과 악덕은 우리 손에 달려 있다
3장 도덕적인 덕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용기: 두려움이 없는 것
용기, 비겁, 무모는 어떻게 다른가
용기라 불리지만 용기가 아닌 것들
절제: 신체적인 즐거움과 관련이 있다
욕망을 좇아 즐거움이 과하면 무절제이다
무절제는 비겁함보다 더 자발적이다
4장 용기와 절제 외의 다른 도덕적인 덕들
후함: 적은 재물과 관련된 덕
통이 큰 것: 큰 재물과 관련된 덕
자부심: 큰 명예와 관련된 덕
작은 명예와 관련된 덕
온화함: 분노와 관련된 덕
사회적 교제와 관련된 덕
진실함: 자기 말·삶과 관련된 덕
재치: 즐거움과 관련된 덕
5장 덕 가운데 최고의 덕인 정의에 대해
정의와 반대되는 불의는 악덕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다
덕의 전체인 정의, 덕의 일부인 정의
모든 사항을 법으로 정하지 않는 이유는 정의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에게 불의를 행할 수 있는가
6장 지적인 덕이란 무엇인가
바른 이성: 중간은 올바른 이성이 정한다
욕망은 이성이 긍정하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
학문적 인식: 증명할 수 있는 능력의 상태
기술: 행위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실천적 지혜: 학문적 인식도, 기술도 아니다
직관적 지성: 제1원리를 파악할 수 있다
철학적 지혜: 학문적 인식 중 가장 정확한 것
실천적 지혜: 학문적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심사숙고: 숙고에 나타난 일종의 올바름
이해력: 실천적 지혜와는 다르다
통찰력: 무엇이 참인지를 통찰하다
실천적 지혜는 왜 필요한가
엄밀한 의미의 덕은 실천적 지혜 없이는 불가능하다
7장 자제력이 있는 것과 자제력이 없는 것
절제와 자제력과 인내심에 대해
자제력이 없다는 것, 자제력이 없는 사람
여러 종류의 자제력 없음에 대해
자제력 없는 것, 무절제, 인내심 없는 것
자제력 없는 것과 무절제의 차이
자제력이 없다고 해서 나쁘거나 불의한 사람은 아니다
8장 사랑과 우정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다
사랑은 꼭 필요하기도 하지만 고귀한 것이기도 하다
사랑의 대상과 세 종류의 사랑
가장 참된 사랑은 좋은 사람 사이의 사랑이다
즐거움을 얻기 위한 사랑은 참된 의미의 사랑이 아니다
동등하지 않은 사람 사이의 사랑이 가진 한계
사랑은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는 데 있다
공동체가 있어야 사랑도 있다
사랑의 난제: 서로가 얻는 것이 바라는 것과 다를 때
사랑의 난제: 상대가 변해서 예전 같지 않을 때
자신을 사랑해야 다른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다
최고로 사랑해야 할 대상이 나인가, 다른 사람인가
호의는 사랑의 특징이지만 사랑은 아니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사람에게도 친구가 필요할까
친구는 많을수록 좋은 걸까, 소수의 진정한 친구가 필요한 걸까
평온할 때와 힘들 때, 친구는 언제 더 필요할까
친구끼리 삶을 함께하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9장 최고의 행복은 관조적 활동에 있다
즐거움에 대한 세간의 견해
즐거움은 고통과 달리 필연적으로 좋은 것이다
신체적인 즐거움은 어느 정도까지만 좋을 뿐이다
행복은 성품이 아니라 어떤 활동으로 구분해야 한다
관조적 활동이야말로 가장 완전한 행복이다
자기 지성에 따라 행동한다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 그것은 어디에서 비롯될까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현대적인 시각으로 재해석하여, 덕과 탁월성을 통해 행복을 정의하고 그 길을 제시해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생 수업
‘가장 좋음인 행복에 대해
좋음이나 행복에 관한 여러 가지 관념들
‘가장 좋음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동의할 듯싶다. 대중이든 학식을 갖춘 사람이든 하나같이 그것을 행복이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잘 사는 것과 ‘잘 행하는 것이 행복한 것과 다름없다고 주장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행복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저마다 생각이 다르고, 대중은 지혜로운 사람과 똑같이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대중은 행복을 즐거움이나 재물이나 명성 같은 것처럼 손에 잡힐 듯 뚜렷하고 분명한 것으로 여긴다. 어떤 사람은 이게 행복이라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은 저게 행복이라고 주장한다. 때로는 같은 사람이라도 현재 처한 상황에 따라서 행복을 달리 생각한다. 병에 걸렸을 때는 건강이 행복이고, 가난할 때는 부가 행복이라고 여기듯 말이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무지를 알기에, 자신의 무지를 뛰어넘는 어떤 위대한 것을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경탄하기도 한다. 반면에 지혜로운 사람 가운데에는 이런 몇 가지 좋음을 넘어서 그 자체로 좋음이 있고, 이런 좋음이야말로 다른 좋음을 좋음이게끔 하는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좋음이나 행복에 관한 사람의 관념에 대해서는, 가장 통속적이라 할 대중의 삶에 비추어 판단해보면 이들은 좋음이나 행복을 즐거움으로 받아들이는 듯싶은데, 이런 생각에도 일리는 있다. 그런 까닭에 향락적인 삶을 자기네 삶에서 추구할 이상으로 받아들인다.
가장 두드러진 삶의 유형으로는 세 가지가 있다. 향락적인 삶과 정치적인 삶, 관조적인 삶이다.
사람은 대부분 거친 동물의 삶을 선택해 스스로가 노예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이기도 하지만, 이런 선택에 이유가 아예 없지는 않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가운데 많은 이들 역시 사르다나팔로스(Sardanapallos, 아시리아 제국 전성기 시절의 마지막 왕으로 쾌락주의자로서 호사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전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쾌락주의자로서의 사르다나팔로스에 대한 이야기는 완전히 전설이거나 아니면 다른 왕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큼–옮긴이) 같은 성향을 지녔으니까 말이다.
반면 교양을 갖추고 실천에 힘을 기울이는 사람은 명예를 선택한다. 왜냐하면 대개 이러한 명예가 정치적인 삶의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명예는 우리가 추구하는 좋음이라기에는 너무 깊이가 없는 듯하다. 명예는 그것을 받는 사람보다는 주는 사람에게 더 좌우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우리는 ‘좋음이란 어떤 사람에 고유한 것이어서 그 사람에게서 떼어내기 힘들다고 직감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사람이 명예를 추구하는 이유는 자신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확신을 얻기 위해서다. 적어도 이들은 자신의 덕에 따라 사리가 분명한 이들에게서, 또 자신을 아는 이들에게서 명예를 얻으려 한다. 따라서 이들의 관점에서 보면 어쨌든 명예보다 덕이 더 낫다는 점은 분명하다. 어쩌면 우리는 명예보다는 이런 덕을 정치적 삶의 목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덕 또한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되기에는 불완전해 보인다. 덕을 가지고 있어도 한평생 잠만 자거나 아무 활동도 하지 않을 수 있고, 나아가 가장 큰 재난이나 불행을 겪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막무가내식으로 주장한다면야 모르겠지만, 이런 사람을 행복하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 번째 삶의 유형은 관조적인 삶인데,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살펴보도록 하자.
돈을 버는 삶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 삶은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삶이고, 부라는 것은 다른 어떤 것을 얻는 수단으로 유익할 따름이기에 부가 우리가 찾는 좋음이 아님은 분명하다. 따라서 부보다는 차라리 즐거움이든 덕이든 이를 목적으로 생각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것들은 그 자체로 선택되는 것들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것들조차 목적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렇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수많은 논변이 제기되어왔지만, 이 주제는 그만 접어두기로 하자.
도덕적인 덕이란 무엇인가
도덕적인 덕은 습관의 결과물이다
덕에는 지적인 덕과 도덕적인 덕, 두 종류가 있다. 지적인 덕은 주로 가르침을 통해 태어나고 성장하기에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지만, 도덕적인 덕은 습관의 결과물로서 도덕이나 성품을 뜻하는 ‘에토스를 살짝 변형해서 만든 말이다.
이로부터 도덕적인 덕 가운데 그 어떠한 것도 그 본성상 우리 안에서 생겨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본성으로 존재하는 것을 그 본성에 거슬러 습관을 들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가령 돌은 그 본성상 아래로 움직이게 마련이므로 설령 만 번을 위로 던져 훈련하려고 애써본들 위로 움직이도록 습관을 들일 수 없다. 마찬가지로 불은 아래로 움직이도록 습관을 들일 수도 없을뿐더러 본성상 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마련인 것을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길들일 수도 없다.
따라서 도덕적인 덕은 우리 안에서 그 본성에 따라 생기지도 않고, 그 본성에 거슬러 생기지도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본성상 그런 도덕적인 덕을 받아들일 능력을 갖추고 있으므로 습관을 통해 그런 능력을 완성해야 한다.
또한 우리에게 본성적으로 주어지는 모든 것 중에서 먼저 능력을 얻고, 그러고 난 다음에야 활동이 나타난다. 이는 감각의 경우를 살펴보면 분명하다. 우리가 자주 보거나, 자주 듣거나 한 결과로 그러한 감각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용하기 전에 이미 그러한 감각이 우리에게 있었고, 감각을 사용하면서 갖게 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덕은 우리가 그러한 덕을 먼저 실행해보고 나서야 얻게 된다. 기술도 덕과 마찬가지다. 어떤 일을 할 수 있으려면 그전에 그 일을 연습해야 하고, 그 일을 직접 실행하면서 배운다. 예컨대 집을 직접 지어본 사람이 건축가가 되고, 키타라를 직접 연주해본 사람이 키타라 연주자가 된다. 이렇듯 우리는 정의로운 행위를 하면서 정의로워지고, 절제력 있는 행위를 하면서 절제력을 발휘하며, 용기 있는 행위를 하면서 용감해진다.
또한 똑같은 원인과 똑같은 수단이 각각의 덕을 만들기도 하고, 망치기도 한다. 각각의 기술도 다르지 않다. 키타라 연주자의 솜씨가 뛰어나든 형편없든 이는 모두 키타라 연주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말은 건축가를 비롯한 나머지 기술자 모두에게 해당한다. 집을 잘 지으면 뛰어난 건축가요, 잘 짓지 못하면 형편없는 건축가가 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모든 사람은 타고나길 뛰어난 기술자이거나 형편없는 기술자일 테니 가르치는 사람은 전혀 필요치 않을 것이다.
이는 덕도 매한가지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사귀면서 어떤 행위를 했는가에 따라서 정의로운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이 되고, 위험을 눈앞에 두고서 어떤 행위를 했는가에 따라서, 그리고 습관적으로 두려움을 느끼는지 아니면 대담한지에 따라서 용감한 사람도 되고 비겁한 사람도 된다.
이는 욕구나 분노의 정념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사람은 자기가 놓인 여건에 따라 이렇게 행동하고 혹은 저렇게 행동하기에 어떤 이는 절제력을 보이고 매사에 온화한 사람이 되기도 하지만, 다른 이는 절제하지 못하고 걸핏하면 화를 내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한마디로 어떤 성품을 가졌는지는 그런 성품을 닮은 행위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행위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확실히 해야 한다. 그러한 행위가 달라지는 만큼 거기에서 비롯된 성품 또한 달라질 테니 말이다. 따라서 아주 어릴 적부터 어떤 습관을 들이는지에 따라 적지 않게 차이가 생기는데 그것은 아주 큰 차이, 아니 전부라 해도 좋을 차이를 낳는다.
덕 가운데 최고의 덕인 정의에 대해
덕의 전체인 정의, 덕의 일부인 정의
우리가 살피고 있는 것은 도덕적인 덕의 한 부분을 이루는 정의다. 우리가 긍정하듯 그런 정의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관심을 두고 있는 불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런 정의나 불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징표가 있다. 다른 악덕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 예컨대 겁에 질려 자기 방패를 던져버린다거나 고약한 성격으로 험하게 말하거나 인색한 탓에 친구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 사람은 불의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 몫보다 더 많이 가지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자기 몫보다 더 많이 가지겠다고 하면, 그 사람은 악덕 중에서 어떤 악덕이나 악덕 전부에 따라 행동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그런 사람을 비난하기에 어떤 나쁨, 즉 불의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또한 넓은 의미에서 본 불의가 있고, 그런 불의의 한 부분을 이루는 또 다른 불의가 있다. 이때 ‘불의하다는 말은 법을 어긴다는 넓은 의미에서 불의한 것의 일부에 해당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어떤 사람은 이득을 얻으려고 간통을 저지르고, 실제로 그런 행동으로 금전적 이득을 얻기도 한다. 반면 다른 사람은 돈을 잃고 난처한 지경에 이르더라도 자기 욕망 때문에 간통을 저지른다. 후자는 자기 몫보다 많이 가지려 했다기보다는 무절제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전자는 무절제하기보다는 불의한 사람이다. 따라서 전자는 이득을 얻으려고 간통을 저질렀기에 불의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다른 모든 불의는 언제나 어떤 특별한 종류의 나쁨에 따른 결과다. 간통은 무절제에 따른 결과이고, 전쟁터에서 전우를 버리는 행위는 비겁함에 따른 결과이며, 남을 물리적으로 폭행하는 행위는 분노에 따른 결과다. 반면 어떤 사람이 이득을 얻는다면 그 사람의 행위는 어떤 나쁨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불의한 것이다.
따라서 악덕과 그 외연이 같은 불의 말고도 특별한 종류의 두 번째 불의가 있음은 분명하다. 이러한 불의가 첫 번째 불의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데는 그 정의가 같은 부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둘 다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에서 행해진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후자가 명예나 재물이나 안위 또는 이를 모두 포괄하는 하나의 이름이 있기에 그러한 것 모두에 관심을 두고 그 동기가 어떤 이득을 얻는 데서 비롯한 즐거움이라면, 전자는 좋은 사람이 관심을 두는 모든 일에 관심을 둔다.
따라서 정의는 한 종류가 아니라 모든 덕과 구별되는 정의가 있음이 분명하고, 우리는 그러한 정의가 무엇이고 어떤 종류에 속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불의한 것은 ‘법을 지키지 않는 것과 ‘불공평한 것으로, 정의로운 것은 ‘법을 잘 지키는 것과 ‘공평한 것으로 각각 구분된다.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앞서 말한 불의의 의미에 해당한다. 하지만 불공평한 것과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서로 다르지만 부분이 전체와 다른 것처럼 그렇게 다르다(불공평한 것은 모두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지만, 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모두 불공평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불공평하다는 의미에서 불공평이나 불의는 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불공평이나 불의와 다르고, 이는 부분이 전체와 다른 것처럼 다르다. 불공평인 불의는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인 불의의 일부이고, 마찬가지로 공평함인 정의는 법을 지키는 것인 정의의 일부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특별한 정의와 불의에 대해서, 그리고 공평과 불공평에 대해서도 살펴보아야 한다.
덕 전체에 해당하는 정의는 남에게 온갖 덕을 행하는 것이고, 악덕 전체에 해당하는 불의는 남에게 온갖 악덕을 행하는 것이기에 그런 정의와 불의의 문제는 잠시 보류할 수 있겠다. 또한 그런 정의와 불의에 대응하는 공평과 불공평의 의미를 어떻게 구별해야 할지도 분명하다. 실제로 법이 명한 행위의 대다수는 전체로서의 덕이라는 관점에서 규정된 행위다. 법은 우리에게 덕에 따라 살라고 명하며, 악덕에 따라 사는 것을 금하기 때문이다.
덕의 일부인 정의와 그에 상응하는 의미에서 공평한 것 중 한 가지는 명예와 재물, 그리고 같은 정치 공동체를 이루는 사람 사이에서 나눌 만한 그 밖의 것을 나누어주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이러한 상황에서는 어떤 사람의 몫이 다른 사람의 몫과 비교해서 불공평하거나 공평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또 다른 하나는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거래를 바로잡는 구실을 하는 것이다. 후자는 그런 거래가 ‘자발적이냐 비자발적이냐에 따라서 다시 둘로 나뉜다. 자발적인 거래로는 판매, 구매, 대부, 보증, 대여, 공탁, 임대 등이 있다(이런 거래가 자발적인 이유는 그 거래가 자발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비자발적인 거래로는 절도, 간통, 독살, 성매매 알선, 노예 사기, 암살, 위증처럼 은밀한 것이 있고, 폭행, 감금, 살인, 강도, 신체 훼손, 명예 훼손, 모욕처럼 강제력이 동반되는 것도 있다.
최고의 행복은 관조적 활동에 있다
자기 지성에 따라 행동한다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지성에 따른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고, 다른 덕을 따른 삶은 그다음으로 행복한 삶이다. 그런 다른 덕에 따른 활동은 인간의 처지에 딱 들어맞는 것이다. 우리는 계약이나 봉사를 비롯한 온갖 행위와 정념에 적절한 것을 지키면서 서로 정의나 용기를 비롯해 덕에 따른 행위를 하는데, 이 모든 활동은 전형적으로 인간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 활동 중 일부는 신체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이지만 성품이 지닌 덕은 여러 가지 형태로 정념에 깊이 결부된 듯하다.
실천적 지혜 역시 성품이 지닌 덕과 연관되어 있고 이런 덕도 실천적 지혜와 연관되어 있다. 이는 도덕적인 덕이 실천적 지혜의 원리를 정하고, 반대로 실천적 지혜가 도덕적인 덕에서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를 정하기 때문이다. 도덕적인 덕은 정념과도 연관되어 있어서 이런 도덕적인 덕은 영혼과 신체로 이루어진 우리 본성에 속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영혼과 신체로 이루어진 우리 본성의 덕은 인간적이다. 따라서 이런 덕에 상응하는 삶과 행복도 마찬가지로 인간적이다. 반면 지성의 덕은 그것과 다르다. 이에 관해서는 이 정도로 이야기하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이 문제를 상세히 다루는 건 우리의 원래 목적보다 훨씬 더 큰 일이니까 말이다.
지성의 덕에는 외적인 좋음이 크게 필요치 않고, 적어도 도덕적인 덕에 필요한 것보다는 적다. 지성의 덕이든 도덕적인 덕이든 모두 삶에 꼭 필요한 것이 같은 정도로 있어야 한다. 설령 정치가가 하는 일이 신체나 그 밖에 그런 종류의 것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는 해도 말이다. 이런 점에서는 둘 사이에 별다른 차이가 없다. 후한 사람이 남에게 자신의 후함을 베풀려면 돈이 필요하고, 정의로운 사람도 자신이 진 신세를 갚으려면 돈이 필요하다(바람만으로는 가려내기가 어렵다. 심지어 정의롭지 않으면서도 정의롭게 행동하는 척할 수 있으니 말이다).
용기 있는 사람이 자기가 가진 덕에 딱 들어맞는 행동을 해내려면 힘이 필요하고, 절제력 있는 사람에게는 절제력을 발휘할 기회가 필요하다. 이런 사람이나 그 밖의 누구든지 이런 것이 없다면 그 사람이 그런 덕을 지니고 있음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덕은 목적과 행위 모두와 관련이 있기에, 덕에 더욱 본질적인 것이 목적인지, 아니면 행위인지를 놓고서도 논쟁이 있다. 덕이 완전해지려면 둘 다 필요하다는 사실은 아주 분명하다. 어떤 행위를 하려면 많은 것이 필요하고, 더 훌륭하고 더 고귀한 행동일수록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진리를 관조하는 사람에게는, 적어도 자기가 활동하는 데는 그런 것이 전혀 필요치 않다. 오히려 그런 것이 관조를 방해한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관조하는 사람도 많은 사람과 더불어 사는 존재이기에 덕에 따른 행위를 하려고 한다. 따라서 인간으로서 삶을 살아가려면 그에게도 그런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완전한 행복이 관조적 활동이라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생각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는 신들이 다른 어떤 존재보다도 복되고 행복한 존재라고 가정한다. 그런데 신들에게 어떤 종류의 행위를 돌려야 할까? 정의로운 행위? 신들이 계약을 맺고 맡겨둔 돈을 돌려주는 따위의 일을 한다면 터무니없는 일이 아닐까? 아니면 용기 있는 행위? 용기 있는 사람이 위험에 맞서 모험을 감행하는 일을 벌이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고귀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후한 행위? 신들이 대체 누구에게 준다는 것일까? 신들이 정말로 돈이나 그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다면, 그야말로 황당한 일이 아닐까? 신들에게 절제력 있는 행위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신들에게는 나쁜 욕망이 없으니, 신들에게 절제력 있다고 칭송하는 일은 천박하지 않을까? 이 모든 것을 따져보더라도 신들에게 이러한 행위는 모두 하찮고 시시한 것일 따름이다.
그런데도 세간에서는 여전히 신들이 살아 있고 활동한다고 생각한다. 신들이 엔디미온(Endymion,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엘리스의 왕으로, 달의 여신 셀레네가 그의 아름다운 용모에 반한 나머지 더 이상 늙지 않도록 영원히 잠재운 후에 라트모스 산의 동굴에 데려다놓고서 달이 뜨지 않는 날에 그를 찾아간다고 전해짐–옮긴이)처럼 잠들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살아 있는 존재에서 행위를 떼어내고, 나아가 제작하는 능력을 떼어내고 나면 관조 외에 무엇이 남을까? 그런 점에서 복된 것 가운데 가장 복된 것인 신들의 활동은 관조적 활동일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활동 중에서 신들의 활동과 가장 많이 닮은 활동은 행복의 속성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것임이 분명하다. 다른 동물에게는 이런 활동을 할 능력이 전혀 없기에 행복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신들의 삶은 전체가 복되고, 인간의 삶은 신들의 활동을 얼마간 닮은 활동이 그 삶에 속하는 만큼 복되지만, 다른 동물은 결코 관조에 참여하지 않기에 어떤 동물도 행복하지 않다. 따라서 관조가 미치는 범위만큼 행복도 미치고, 더 많이 관조하는 사람일수록 더 행복하다. 이런 행복은 그저 관조에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관조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관조는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행복이 관조의 어떤 형태라는 점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이기에 외적으로 좋은 조건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의 본성은 관조라는 목적을 위해서는 자족적이지 못할뿐더러 우리의 몸 또한 건강해야 하고, 음식도 먹어야 하며, 다른 보살핌도 받아야 한다. 그렇지만 그저 외적인 좋음이 없이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수 없다고 해서 사람이 행복해지려면 많은 것 혹은 대단한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족함이나 행위는 좋은 것이 넘치도록 많아야 하는 것이 아니며, 온 땅과 바다를 통치하지 않아도 고귀한 행동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심지어 우리는 적당 수준의 외적 조건만 갖춰져 있으면 덕에 따른 행위를 할 수 있다(이는 너무도 분명하다. 평범한 사람이라도 권력을 제 맘대로 휘두르는 왕 못지않게 훌륭한 일을 할 수 있고, 심지어 더 많이 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외적인 조건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 덕이 있고 그 덕을 실천하는 사람의 삶은 행복할 테니까 말이다.
솔론(아테네의 정치가로서 이른바 ‘솔론의 개혁을 통해 아테네 민주정의 초석을 놓은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고대 그리스의 일곱 현인 중 한 사람임–옮긴이) 또한 자신을, ‘외적 조건이 고귀한 행위를 할 수 있을 만큼 적당히 주어졌으며 절제력을 발휘하며 살아온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는 행복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설명해준다. 사람은 재물이 그리 많지 않아도 마땅히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낙사고라스(고대 그리스의 자연 철학자–옮긴이)도 행복한 사람은 부자도 아니요, 왕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렇기에 그는 행복한 사람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자기는 조금도 놀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외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이것이 그들이 판단할 수 있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지혜로운 사람의 의견도 우리의 논증과 일치한다.
하지만 그런 논증이 어느 정도 확신을 주기는 하지만 우리는 실천적인 문제에서 진리를 현실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에 비추어 판단해야 한다. 이렇게 현실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이야말로 진리를 판가름하는 데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앞에서 개진했던 이론은 현실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에 비추어 검증되어야 한다. 만약 그런 이론이 현실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과 일치한다면 우리는 그 이론을 받아들여야 하고, 만약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런 이론은 한낱 이론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
자기 지성에 따라 행동하고 그런 지성을 갈고 닦는 사람은 그 정신이 최고의 상태에 있는 사람이자 동시에 신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사람이다. 세간에서 그러리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신들이 조금이라도 인간사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신들은 당연히 가장 좋은 것과 자신을 가장 닮은 것(즉 지성)에 기뻐할 것이다. 또한 신들은 당연히 이렇게 지성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에게 신들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살피고, 올바르고 고귀하게 행하는 사람으로서 상을 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속성을 누구보다 많이 지닌 사람이 철학적 지혜를 지닌 사람이다. 따라서 철학적 지혜를 지닌 사람이 신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사람이자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 하겠다. 이런 점에서 철학적 지혜를 지닌 사람은 다른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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