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철학자의 사랑수업
 
지은이 : 김형석 (지은이)
출판사 : 열림원
출판일 : 2024년 09월




  • 105세의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괴테의 사상을 바탕으로, 인간다움과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자신의 경험을 통해 풍부한 사랑의 가치를 이야기합니다. 사랑을 나누는 방법과 이별에 대한 대처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독자들에게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지침을 제공합니다.


    100세 철학자의 사랑수업


    사랑, 나 자신을 담백하게 꺼내놓는 일

    괴테와 아리스토텔레스가 전한 사랑

    세계적인 철학자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윤리학을 논한 철학자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윤리학을 설명하면서 "다른 모든 것은 원하는 사람도 있고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으나, 행복만큼은 다르다.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라고 설명했다. 인간의 윤리학은 그렇게 시작된다. 그래서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우리의 긴 인생과 행복은 과연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내가 지난 백 년간 살아온 단계를 쭉 살펴보면, 젊었을 때는 역시 즐겁게 사는 것이 행복이다. 젊은 사람들은 서른 정도까지는 인생을 즐겁게 바라봄으로써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나는 조언한다. 즐기면서 사는 그 자체가 행복이다.


    서른에서 예순 살쯤까지 직업을 가지고 생활하다 보면 행복은 선의의 경쟁을 통한 성공으로부터 찾아온다.


    인생의 장년기가 되면 동전의 이쪽은 성공이고 저쪽은 행복이 된다.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의 중간 단계인 것이다. 그러고 나서 나같이 정년퇴직하고도 사회생활을 쭉 이어가는 사람은 무엇을 행복이라고 느끼겠는가. 바로 나 때문에 행복해지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에 있다. 나 때문에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행복을 내가 주고 있는지를 질문하게 된다. 늙으면 욕심이 없어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행복을 어디에서 느끼겠는가? 보람에서 느끼는 것이다. 즐거움에서 시작되는 인생은 성공의 단계를 지나 보람으로 마무리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행복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의 마지막 결론은 인격이 최고의 행복이다.라는 것이다. 그렇다. 인격이 최고의 행복이다.


    미국의 캐서린 콕스라는 심리학자가 연구실 제자들과 탐구하여 인류 역사상 가장 머리가 좋은 사람들 즉, 아이큐가 가장 높은 천재들이 누구인지 분석해 발표한 일이 있었다. 첫째로 뽑힌 천재가 독일의 시인 괴테였다.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우리는 그를 그냥 시인, 대문호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는 문학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괴테의 제자이자 비서였던 요한 페터 에커만이 훗날 〈괴테와의 대화>라는 책을 남겼는데, 그 책을 보면 괴테와 대화를 나누다가 시간이 늦어져 비서가 집에 돌아가려고 하자 괴테가 이렇게 말을 한다.


    "오늘 나와 좀 더 같이 있으면 어떨까?"

    "왜 그러시나요?"

    "오늘 지진이 날 것 같아. 혹시 지진이 날 기미가 있을지 기다리고 있는데 같이 있어보자."


    그날 지진이 나지 않았다. 다음 날 비서가 괴테에게 갔더니 괴테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착각을 했어. 지진이 다른 지역에서 났더라고."


    시인인데 그만큼 영적이면서도 과학적인 매우 독특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독창적인 영혼의 세계를 통해 과학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던 대문호 괴테가 자기 인생을 쭉 살아보고서 이렇게 말했다.


    "인격이 최고의 행복이다. 사람은 자기 인격만큼 사랑을 누린다. 인격 이상을 누릴 수는 없다. 누구나 자신의 인격만큼 누린다."


    그런데 인격은 혼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관계를 통해서 생기는 것이다. 인간관계의 사랑을 통해서 인격이 완성된다. 선하고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가지는 사람의 사랑의 인격을 높일 수 있다. 그런 인격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보통의 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렴풋이 살아보았지만, 결국은 그렇게 사는 것이 가장 높은 위치의 인간 사랑을 완성시킨다. 그러니까 나에게 행복에 대해 물어보면 나는 이렇게 답한다.


    "내 인격만큼 사랑의 행복이 있다."


    인격이 낮은 사람은 그것밖에는 없다. 돈 버는 것이 행복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만큼밖에 없는 것이다. 권력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은 그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밖에는 행복이 없다. 그러므로 인간관계를 선하고 아름답게 가지는 사람만이 행복을 함께 나누어 가지고 사는 것이다.


    살다 보니 아리스토텔레스와 괴테와 같은 철학자들의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간단하게 깨닫게 된다. 나는 거기에 완전히 미치지는 못했지만, 내 선함이 아름다움으로 변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진실은 알게 되었다.


    시인과 소설가의 사과나무

    105세까지 살아보니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모든 인생은 하나도 가지지 못한 채로 떠난다. 그런데도 왜 굳이 그 인생을 열심히 살아야 할까. 수준 높은 우정을 갖지 못한 학생들을 만나보면 감정이 이기적인 상태라는 것을 금세 느끼게 된다. 그런 학생들은 "우리끼리 즐겁게 살아야 하는데 왜 고통이 오나요?"라고 묻는다. 왜 어려움이 오느냐고 질문하면서 생의 고통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어렵게 살고 싶지 않으니 결혼하지 않으려고 하고, 결혼하면 부부가 편히 살아야 하니 출산하지 않으려고 하고, 자녀를 낳아서 고생하고 키우는 부모들을 보며, 특히 건강이 좋지 못한 아이를 키우며 극심히 고생하는 부모들을 보면서 왜 저렇게 고생을 사서 하나? 나는 저런 고생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부터 한다. 나이 들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온갖 어려운 과제를 주는 난제 앞에서, 나만 편안하면 그만이지 타인의 고통스러움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다. 감정적인 이기심으로 내 즐거움과 편안함만 가지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을 크게 바라보면 우리 인간은 사과나무를 키우는 것이다. 사과나무는 자라난다. 사과나무가 자라는 목적은 무엇인가? 뿌리를 튼튼히 해서 나무가 자라고 열매를 맺어서 죽어가게 돼 있는 것이 완성이다. 그걸 안하겠다고 마음먹고 그냥 그 자리에만 머무른 채 아무 열매도 없게 된다면, 사회적으로 보면 그 사람은 존재의 이유를 갖지 못한다. 스스로를 공동체로부터 버리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애국심을 상실한 사람은 국가에서 버림받고, 애교심을 상실한 사람은 학교에서 버림받고, 친구를 상실한 사람은 외톨이가 되어 고독하게 되고, 결국 자기 자신을 잃게 된다. 자기를 상실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게 된다.


    다시 묻는다. 왜 열심히 살아야 하는가. 그것이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자기완성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완성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물은 클 때까지 커야 하고, 식물도 자라나야 하듯, 인간은 인간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당연한 진실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인간으로서 더 좋은 장르를 개척하는 길

    공동체의 사랑

    사회에 봉사하는 사람으로 살겠다고 청소년기에 결심하고 난 뒤 나는 평생 그 마음가짐으로 살아왔다. 대가없이 주는 마음을 어떻게 지금까지 잘 유지해올 수 있었을까. 공동체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던 것 같다. 베푸는 마음이었다. 부자가 되고 명예를 얻어도 정신적 이기주의로는 사랑을 일구기 어렵다. 정신적 이기주의자는 모든 것을 자기 것이라고만 알기 때문에 사랑을 모른다.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열고 난 그다음에야 사랑을 주고받는 단계에 이를 수 있다.


    인격이 훨씬 높은 위치까지 성장한 사람들 중에 예전에 내가 만난 도산 안창호 선생 같은 분에게는 가정보다 민족과 국가가 우선이었기 때문에 사랑을 베푸는 일도 공동체를 위한 일이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공산주의 사회에서 살아본 경험도 있는 나는 불행한 사회일수록 선구자의 존재가 왜 중요한지 생각하게 된다.


    지도자는 공동체의 안정을 위해 베푸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 후진국이나 자유가 없는 사회에 이기주의자가 더 많다는 불행함을 나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큰 범주에서 보자면, 자유가 허락되지 않은 사회일수록 이기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회라고 볼 수 있고, 그런 사회일수록 베푸는 사람이 존재하기 어렵다. 반면 공존의 가치관을 가진 자유로운 사회에는 베푸는 사람이 많다.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사람이 많은 사회일수록 희생이 가능해진다. 희생은 곧 사랑이다. 이것이 공동체의 사랑이다.


    그런 공동체의 사랑이 넘치게 되면 개인의 자리에도 사랑이 흐르게 된다. 이런 사회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문화, 종교, 경제 등을 다루는 가치관에 있어 지도자가 올바른 방향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이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다. 공동체의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베푸는 것의 의미를 안다. 이기적인 지도자는 베풀 수 없다. 사랑을 알고 베푸는 지도자는 반드시 사랑이라는 대가를 받게 된다.


    사람들이 내게 인사를 할 때, 가끔 쑥스러우면 120세까지 살라고 덕담을 해준다. 그러면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인간이 120세까지 사는 과정에서 병든 몸을 다루는 일이 얼마나 힘든데 그리 살라 하는가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간혹 "저희들과 함께 오래 있어주세요. "라든지 "저희들을 위해서 좀 더 오래 수고해주세요.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인사를 들을 때 나는 정말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남의 사랑을 빼앗지 않고, 남의 물질을 빼앗지 않고 함께해주는 수고를 통해 공동체적 사랑을 이룩하는 것만큼 삶의 커다란 원동력은 없는 것이다.


    내 아내는 오랜 시간 병중에 있었다. 대체로 환자들은 배우자에게 옆에 머물러달라거나 도와달라는 부탁을 많이 하게 되고, 이것이 충족되지 않을 때 불만을 갖기도 한다. 그런데 병중의 아내가 먼저 떠났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평생 동안 사랑을 받았다는 기억밖에 없다. 아내가 나를 정말 사랑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강연이 있어서 멀리 다녀오느라 늦게 돌아올 것이니 미안하다고 말을 하면 아내는 항상 말했다.


    "내 걱정 하지 말아요." 아내가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남편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면 좋겠다는 신념을 그렇게 실현한 것이었다. 결혼할 때부터 이어진 아내의 사랑이었다. 아내가 내게 준 사랑은 그렇게 평생의 사랑이 되었다.


    아내와 나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과 전쟁의 시간을 모두 거치면서 아이 여섯을 낳았다. 아이들은 내게 뭐하러 그렇게 여섯씩이나 자식을 낳아가지고 고생을 했느냐고 핀잔을 주곤 한다. 자기들 같으면 그런 고생은 안 할 것이라면서 말이다. 우리 사는 동안에 언제가 제일 행복했느냐고 물으면 아내가 뭐라고 대답할지 나는 알고 있다. 아내는 분명히 나와 아이들과 고생했던 그때가 제일 행복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로 또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그렇게 사랑할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아내는 우리 가족을 위해서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다. 함께 자식을 키워보며 그 고생을 나는 함께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공감이었다. 우리 인생은 언제 제일 행복한 것인지 사람들은 나에게 자주 물어본다. 그러면 나는 대답한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은 함께 사는 동안 함께 고생하는 것을 공감하는 순간입니다."


    아내와의 사랑, 동료 교수와의 사랑이 내 개인의 사랑에서 멈추지 않고 공동체의 사랑이 된 것은 그들이 나를 사랑해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공동체의 사랑으로 실현되었다. 아내가 나를 사랑하는 방식은 나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옆집에 살던 동료 교수가 감옥에 다녀와 나와 포옹을 했던 것은 내가 짊어져야 할 시대의 짐을 그가 대신 짊어져주는 방식으로 실현된 공동체의 사랑이었다. 이것은 모두 감사의 의미로 기억되는 나의 이야기이다.



    찬란한 새벽을 향하여

    니체와 같은 실존주의적 사랑

    살다 보면 삶에 대한 소극적인 생각이 회의로 변하고, 회의가 깊어지면 허무한 정서가 싹트게 된다. 인간은 원래 옛날부터 회의나 허무함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상실한 적이 없었다. 개인과 사회에 따라 그 가벼움과 무거움의 정도가 달랐을 뿐이다. 허무주의 시대라든가, 회의학파라는 말이 쓰였던 것도 그 당시의 시대적 풍조가 삶의 적극성과 건설적인 의욕을 잃고 있을 때였다. 비극의 시대라는 말이 통용된 적도 있었다. 시대가 바뀐 뒤로도 우리 주변에서 비슷한 정서적 풍조를 여전히 엿볼 수 있다.


    어려움이 많으면 포기하게 되고, 무기력해지는 것이다. 때때로 젊은이들의 질문을 받는다. 20대 전후의 청소년들이 특히 많은 질문을 한다. 가끔 어떤 젊은이들은 인생은 무의미하며 허무한 것인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애쓰고 노력할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다. 이런 감상의 깊이가 심화되면 남녀를 불문하고 마치 죽음을 눈앞에 놓고 있는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누구나 그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러나 해답을 얻긴 매우 어렵다. 많이 살아온 사람들도 그런 과거를 경험했었기 때문에 대답할 자신을 잃는 경우가 많고, 이야기를 해봐도 젊은이들에게 먹히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인생이라는 것은 고정된 이론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며,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문제를 제각기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허무함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 내 나름대로의 몇 가지 해답을 주기도 한다. 그때마다 꼭 짚어주는 중요한 내용이 있다.


    대체로 인생은 허무한 것이다. 이것을 두고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삶에 대한 성실성을 잃을 위험이 높다. 쉽게 말하면 게으른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마라톤 경기를 열심히 뛰고 있는 사람에게 우리는 "힘든데 도대체 왜 뛰는가?" 또는 "뛰어봤자 주어지는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라고 질문하지 않는다. 뛰지 않는 사람, 또는 뛰기 싫은 사람들이 주로 그런 생각을 한다.


    인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의외로 성실성이 없거나 게으른 사람들이 부정적이며 회의적인 질문을 함으로써 자신의 무성의와 게으름을 감싸보려는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결국은 허무와 회의로 기울어지게 된다. 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젊은이들에게는 그런 자세가 거의 없다. 따라서 삶의 성공을 믿거나 성공의 가능성을 신뢰하고 사는 사람은 회의감이나 허무함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인생의 경기에서 뒤처졌거나 낙오자가 된 사람들이 자기변명의 수단으로 삼는 허무주의를 특히 경계해야 하는 이유이다.


    인생의 과정 속에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 인생은 순간이 과정이면서 동시에 목적이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면 안 된다. 마찬가지로 먼 훗날에는 아무것도 없지 않느냐는 생각 때문에 현재를 무(無)로 돌리게 되면 우리는 인생을 살 자격을 잃는 것이다. 오늘은 오늘의 의미가 있고, 내일은 또 내일의 의미가 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는 삶 자체가 목적이며 인생의 내용인 것이다.


    공자도 오십 세가 넘어서야 천명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어떤 젊은이들은 20년밖에 살아보지 않고 마치 공자보다도 더 높은 위치에서 인생을 말하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20대를 진실하게 산 사람이 30대의 가치를 알게 되며, 30대에 최선을 다한 사람이 40대를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다.


    현재를 헛되이 살기 때문에 그 속에 움트고 있는 허무감을 일생에 걸친 것으로 여긴다든가, 나의 무성의에서 온 생의 허무감을 인간 전부의 것으로 보는 태도는 옳지 못하다.


    그다음 문제가 남아 있다. 그것은 인간의 삶 자체가 사회적 유기성 및 인간의 관계성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연탄가스를 피워놓은 방 안에 문을 잠그고 앉아 있으면서 질식할 것 같은 죽음을 느끼며 삶의 의욕을 상실해간다면 누가 보아도 옳은 선택이 아니다.


    먼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들과 대화하며 인간적 교류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권유가 아니라 그렇게 해야만 하는 삶의 원칙이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했거나 무엇인가를 사랑한 사람은 회의와 허무를 말한 바가 없다. 안중근 의사가 허무주의자일 수 없었고, 간디가 회의주의자일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누구의 참사랑도 받을 수 없도록 마음의 문을 닫고 살면서, 또는 아무도 진심으로 사랑한 적도 없으면서 인생은 허무하다든가 삶의 의미는 찾을 곳이 없다는 생각을 갖는다면 그 책임은 다른 누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있을 뿐이다.


    만약 위의 세 가지 원칙을 다 갖추고 있는 사람들이 회의감이나 허무함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그들은 죽음을 말하지도 않으며 감상적인 태도에 젖어들지도 않는다. 그들은 탐구자가 되며, 피상적으로 인생을 긍정하는 사람들보다도 더 깊은 사랑으로 생을 개척하는 개척자가 된다. 예전에 철학적 실존주의자들이 그러한 책임을 지고 있었다. 그래서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신에 대한 믿음을 찾아갔고, 니체는 초인과 영구 회귀의 신념을 얻었던 것이다. 참다운 종교도 인간의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다. 우리 모두 깊이 자성해봤으면 하는 내용이다.

    철학자의 사랑 이야기

    영원한 사랑, 소크라테스의 죽음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러나 죽음을 체험해본 사람은 없다. 죽음은 순간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후에는 삶이 이미 끝나 있기 때문에 죽음도 사라진 뒤일 것이다. 나도 나이가 들면서는 죽음에 대한 관심을 갖는다. 아는 사람이나 신문에 발표되는 사람들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면 몇 살인지를 살피기도 한다. 다가올 나의 죽음과 견주어보는 잠재의식도 깔려 있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죽음은 관념적으로 삶과 더불어 존재한다. 죽음이 있는 곳에는 삶이 없으나 삶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특히 죽음에 대한 상념은 건강과 직결되어 있다. 건강할 때는 죽음을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건강이 악화되면 죽음에 대한 생각도 절박하게 느껴진다. 의사로부터 "당신은 암 말기입니다."라는 진단을 받았다고 상상해보면 누구나 죽음이 가까이 왔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어려워진다.


    많은 사람들은 젊고 건강한 동안에는 죽음과 상관이 없는 것같이 살아간다. 죽음은 마음의 시야 안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중년이 지나면 신체적 노화 현상이 나타나면서 성인병이 발견되기 시작한다. 그때부터는 죽음이 길손의 동반자처럼 가까이 다가온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아직 죽음의 거리는 살펴보아야 할 정도로 멀게 느껴진다.


    그러다가 예순쯤 된다. 그러면 가까운 친지나 친구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기 시작한다. 보이지 않던 죽음의 그림자가 내 옆에 가까이 다가와 동행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몇 차례 정도 선배나 동료는 물론 후배의 조문에도 참여하게 되다.


    일흔 살 후반이나 여든 초반이 되면 우리나라의 평균 수명을 다 채우게 되는데 그때까지도 별일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나는 건강한 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체내에 병의 요소를 안고 사는 것같이 내가 걸어가는 뒷그림자가 곧 삶의 종말로서의 죽음을 예고해준다.


    죽음은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닌 나 자신의 운명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과 더불어 모든 사람의 문제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 보이면서 함께 반성한다. 노령 인구가 많은 사회에서는 오래전부터 그러했다. 우리도 이제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피해 아테네를 탈출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진해서 죽음의 독배를 기울였다. 죽음보다 더 귀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위해서였다. 예수는 사형의 십자가를 예견하고 있었다. 그런데 죽음을 향해 가는 발걸음은 다른 때보다 더 빨랐다. 제자들이 놀랄 정도였다고 기록돼 있다. 빨리 가서 삶의 완결을 성취해야 한다는 절박감 같은 것을 안고 있었을 것이다. 마치 죽음이 목표와 목적인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 죽음 자체가 목표는 아니다. 죽음을 통해 완성해야 하는 사랑의 의미와 가치였던 것이다. 목적이 있어 죽음을 택했다고 봐야 한다. 죽음은 더 높은 사랑의 목적을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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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