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을 철학하다
 
지은이 : 사미르 초프라 (지은이), 조민호 (옮긴이)
출판사 : 안타레스
출판일 : 2024년 10월




  • 우리가 피할 수 없는 불안이라는 감정을 철학적으로 탐구하며, 불안을 이해하고 삶 속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활용할 수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독자는 불안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며, 그것을 삶의 동반자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불안을 철학하다


    언제나 불안한 시대

    불안을 철학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나 자신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세상과 나의 관계를 헤아린다는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우리가 불안을 다룰 줄 알면 우리 자신과 우리 삶도 제대로 다룰 수 있다.


    일반적으로 근심과 걱정은 구체적인 대상이나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런데 불안은 형태가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 즉 ‘실체가 없는 두려움이다. 왜 우리는 실체 없는 불안을 느껴야 하고, 그것 때문에 고통을 받아야 할까? 이와 관련해 각각의 시대마다 불안은 ‘신앙, 믿음, 의미의 정식적 위기, ‘신체적/사회적 환경에 대한 조건부 반응에서 비롯되는 인지적/행동적 양상, ‘스스로 죽음을 예측할 수 있는 시간적 감각을 가진 인간종에 국한된 본능, ‘물리적/정신적 스트레스나 사회의 성적 억압에 대한 반응, ‘인간종의 신경생리학적 문제에 따른 의학적 고통 등 다양하게 해석됐다. 특히 무의식과 분열하는 정신을 이론화한 프로이트식의 정신분석학적 이해는 인간 내면의 심리적 갈등을 들여다봄으로써 불안을 치유하려고 시도했다. 현대 정신의학과 신경 과학도 불안을 인간의 생물학적 메커니즘의 한 부분으로 분리하고 수정한다.


    반면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전통은 불안의 메커니즘이 아닌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 불안으로 고통받는 사람 대부분은 시간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끝이 있는 미래라는 ‘유한한 개념으로 인식하며, ‘불확실한 미래의 고통에 대해 두려워한다. 확실히 불안은 감정이기에 인간 뇌의 생물학적 기능 일부라고 할 수 있지만, 생물학과 불안 사이의 인과관계는 여전히 불분명하고 불투명하다. 더욱이 불안은 부분적으로 우리의 자연적 환경과 인위적 환경, 즉 타고난 ‘본성과 학습된 ‘양육의 영향을 받는다. 아울러 불안은 뭔가를 믿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심각한 정신적 위기이거나, 믿음에 부응하지 못하고 현존에 부합하지 못한 결과일 수도 있다. 불안은 과거로 인해 괴로워하는 거칠게 부서진 마음의 지표일 수도 있고, 소외하고 억압하는 사회와 문화의 산물일 수도 있다. 아니면 애초에 인간 의식의 본질이 불안일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 시대가 특히 불안한 까닭은 기술적/물질적 성취와 낙관주의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침울한 사실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힘 있고 부유한 사람들, 엄청난 명성과 재산을 쌓은 사람들도 자동차나 비행기에서 쓰러진다. 그들은 얼마든지 최고 수준의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그래서 평균 기대 수명도 길다. 얼마든지 개인 전용기를 타고 기후 변화가 초래한 허리케인이나 홍수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인간이다. 그들 자신이나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잔혹한 불행, 유전적 한계로 인한 생물학적 시한폭탄, 갖가지 끔찍한 사건들에 굴복당한다. 그들 또한 우리와 똑같이 고통과 죽음을 끊임없이 목격한다. 높은 경제적 이동성과 사회적 성공이 그들의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옷과 최고의 아이비리그 교육과 값비싼 피아노 개인 교습을 제공해줄 수는 있겠지만, 도로의 음주 운전자와 비행기 추락과 소아암 같은 치명적 질병을 막아주지는 못한다. 지구 전체를 잠식하는 기후 변화에서도 영원히 도망칠 수 없고, 최악의 급성 정신 질환이나 신경증과 우울증으로부터도 자신들의 가장 소중한 가족을 보호해줄 수 없다. 자연을 향한 우리의 기술적 지배력, 경제력, 과학적 능력은 인간의 근본적이고 실존적인 곤경을 털끝만큼도 건들지 못한다. 이 변함없는 진실을 반복해서 확인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출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지속적인 깨달음이 불안과 두려움의 궁극적 원인이다.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당혹감은 더 크다. 신체적/정신적 영역을 막론하고 과학의 거침없는 전진과 기술의 끊임없는 진보가 우리에게 상상 속 유토피아를 현실로 만들 수 있다는 낙관주의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더 오래 살 수 있다는, 죽음의 시점을 늦출 수 있다는 희망은 병들어 고통받으며 만년을 보내야 한다는 자각과 함께 또 다른 두려움을 낳았고, 죽음을 더 무서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불안을 가중하고 있다. 그리고 아마도 이전 세대에는 없던 불안, 대표적으로 기후 변화의 재앙이 암시하듯 물리적 진보와 자연에 대한 지배력이 달콤한 꿈이 아닌 끔찍한 악몽임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동안 너무나 당연해 소중한지도 몰랐던 깨끗한 공기와 물이 우리 아이들의 미래에는 역사로만 기록될 수 있다. 우리가 마냥 즐기기만 하는 현대의 디지털 플랫폼과 소셜 네트워크 도구가 소통과 관계를 진화시키기는커녕 되레 지적 기능 장애를 일으키는 데다 또 다른 권력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음을 눈치챘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우리가 지금 갖고 누리는 것들을 포기할 수 없다는 사실, 그 폐단을 알아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 불안하게 한다. 아무리 물리적 외부 기술을 연마하고 강화하더라도, 아무리 새로운 인류의 또 새로운 인류가 되더라도, 우리는 내부의 오래된 두려움과 불확실함과 불안을 그대로 유지한 채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다. 달리 말해 뭔가를 계속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우리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한 우리는 불안하다.



    무아의 불안

    고대 불교의 수행법은 실천적/도덕적/치유적 차원에서 철학이 무엇인지 보여줬고, 인간이 느끼는 “통렬한 고통의 경험”을 “자기변화의 수단”이자 “실질적인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불교를 바탕으로 한 철학적 치유의 명시적 과제는 “내면에 깊게 자리 잡은 불만을 치료”하는 데 있다. 이는 생각보다 야심 찬 과제이며, 여러 불교 교의의 복잡성과 요구 사항은 자기변화와 실질적 해결책이 모두 불교 이론과 수행에서 그대로 드러나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기서 ‘치료라는 개념은 당시 제자들이 붓다를 “번뇌로 가득한 세상의 정신적 병폐를 치유”하기 위한 진단과 처방을 제공하는 “위대한 치료자”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상기해준다.


    “내면에 깊게 자리 잡은 불만”과 “정신적 병폐”를 살필 때 가장 중요한 요인은 불교 철학의 ‘두카(dukkha)라는 개념이다. 흔히 ‘괴로움이나 ‘고통으로 번역되지만, 본래 뜻은 ‘불만족 또는 ‘불충분에 가깝다. ‘두카가 ‘고통이라고 경솔히 번역된 탓에 불교 철학은 지나치게 비관적이라는 오해를 받곤 하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인간 존재의 한계를 강조할 뿐이다. ‘두카, 즉 ‘불만족의 근본적 원인은 다름 아닌 우리의 ‘극심한 불안에 있다. 이 불안은 다른 영향과 감정 외에도 우리가 ‘맨몸의 존재 즉 인간 정체성의 본질임을 잘 직시하지 못하는 지적/정서적 실패에서 비롯된 ‘실존적 불쾌함이다. 일찍이 붓다는 살아있음은 현혹될 수 있음을, 불안하고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분노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우리가 그와 같은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한 첫 걸음은 세상의 참모습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위치를 명확히 인식하는 데 있다. 세상과 우리 자신을 잘못 이해하면, 밧줄을 뱀으로 착각하거나 그 반대로 오해하면,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더 불안해지고 더한 고통을 겪게 된다.


    붓다는 세상의 본질과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수용하라고 가르쳤다. 세상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인지를 이해하면, 두카란 현실에 대한 근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오해 때문에 발생하는 불필요한 고통의 한 부분임을 알 수 있다. 잘못 이해한 세상에 우리 자신을 잘못 두면 고통을 받게 된다. 반대로 이를 바로잡으면 극심한 실존적 불쾌감에서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 불교 철학은 분노처럼 불안도 치유해야 할 정신적 병폐로 간주한다. 그래서 불교의 수행법은 우리 삶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완화하고 최소화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붓다는 “감정적 격변의 원인이 되는 믿음을 바꿈으로써” 매우 특별한 종류의 “평온함”을 얻을 수 있다고 설파했고, 제자들과의 활발한 토론을 통해 이에 대한 철학적 논리 체계를 구축한 것은 물론 그와 같은 정신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다양한 명상 기술도 제시했는데, 여기에는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노력, 정신 상태에 대한 면밀한 관찰, 습관 수정, 감정 기대, 감정 지연, 주의 환기, 조언과 위로, 역할 모델 설정, 자기성찰, 자기고백” 등이 포함된다. 이런 수행 방법과 지침은 ‘마음 챙김 또는 ‘마음 관찰과 같은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전파되고 있다. 불안에 관한 대중적인 자기계발서 대부분은 이에 근거하거나 이를 응용한 정신적 실천을 다루고 있다. 만약 이 수행에 성공해 붓다가 말한 매우 특별한 종류의 평온함에 이른다면 “분노, 두려움, 슬픔 같은 감정이 아예 없거나 거의 사라진 상태”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상태는 그야말로 ‘무아(non-self)의 경지라서, 적당한 분노나 두려움이 종종 바람직한 정치적/도덕적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우리가 그런 무감각한 삶까지는 바라지 않을 수 있다. 실제로 수도승처럼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지 않기에 이런 부분이 불교 교의를 수용하는 데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하지만, 이 약속된 평온함으로 가는 과정에서 평소 우리를 괴롭히던 갖가지 고통으로부터 확실히 벗어날 수 있으니 충분히 여행할 만한 가치는 있을 것이다.



    불안할 자유

    우리의 ‘실존은 가장 중요한 철학적 문제다. 우리는 길을 알지 못한 채, 지도 한 장 얻지 못한 채 태어났다. 사는 동안 종교, 신, 계시가 지도를 제공해준 적이 있지만, 세월이 흘러 철학과 과학의 지성적/개념적 혁명이 일어나자 그 지도 또한 그저 우리와 똑같은 인간, 즉 혼란스럽고 헤매고 불안한 인간 존재들이 만들어낸 것일 뿐, 전지전능하고 초자연적인 권위의 산물은 아님을 알게 됐다. 이를 간파한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우리 삶의 불확실하고 당혹스러운 결과와 그것이 수반하는 불안과 고뇌, 그리고 그에 따라 필연적으로 박차를 가할 수밖에 없는 ‘자신과 세상에 관한 탐구를 긍정하고, 환영하고, 찬미했다. 실존주의자들은 불안을 치료나 제거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함께 더불어 살

    아갈 인간 존재의 필수 구성 요소로 여겼다. 우리 존재의 진정성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적극적인 삶의 ‘신호라고 생각했다. 실존주의 철학은 이 근원적 두려움을 ‘불안, ‘공포, ‘고뇌, ‘근심, ‘번민, ‘강박, ‘예단 등 다양한 용어로 공식화했고, 그 속에서 자기발견과 진정한 삶 그리고 우리 행동과 책임에 대한 도덕적/형이상학적 통찰의 기회를 제공해줄 해방적 측면을 발견했다.


    실존주의 철학에서 불안은 철학과 심리학을 잇는 다리다. 그래서 실존주의는 우리의 추론과 결정이 자연스레 동반하는 기분과 감정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요구한다. 철학을 하는 주체는 우리 인간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감정을 표출한다. 감정이 우리가 이성으로 세운 철학을 뒷받침해 자기고백과 자기기록과 자기심판으로 바꾼다. 감정과 이성은 이렇듯 떼어놓을 수 없기에, 우리의 총체적 경험을 좌우하는 감정은 아무리 일시적이고 불확실하더라도 냉철하고 추상적인 이성만큼이나 중요하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이 서로 결별하면 우리는 소외당해 표류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실존주의 철학은 심리학적 관찰과 철학적 사유를 거의 구분하지 않았고, 마침내 감정인 ‘불안을 ‘철학적 문제로 간주하도록 허용했다. 그 결과 실존주의자들의 저술은 이전 철학책들과 달리 철학자는 물론 신학자, 소설가, 시인들이 오랫동안 고민해왔던 인간의 감정을 공식화함으로써 새로운 철학 형식을 제공했다. 나아가 전통적인 철학적 분석에 심리학적 세심함과 솔직함을 융합했다.


    아울러 불안과 개념적으로 한 꾸러미를 이루는 자유, 죽음, 무, 책임, 진정성 등 이른바 인간 존재의 ‘궁극적 관심도 함께 다뤘다. 이 가운데 무엇이든 하나에 관한 생각은 다른 것으로 이어진 길을 찾는 과정이고, 각각의 종착점으로 향하는 모든 과정에서 불안이 드러난다. 일테면 우리 삶을 선택할 형이상학적 자유는 도덕적/경험적 오류가 능성에 관한 불안, 행동에 대한 책임, 존재의 진정성을 향한 추구를 요구하고, 우리 삶에 언제나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진실은 모든 가 성의 중단과 그 너머의 알 수 없는 무를 상기시키면서, 삶의 열망과 희망에 극복하기 어려운 장벽을 쌓아 올린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저마다 개성 있는 글쓰기 스타일과 다양한 관심사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정의가 무엇이든 간에 만들어지거나, 결정되거나, 발견되거나, 발명되지 않은 존재이며, 인간의 삶에도 미리 정해진 본질이나 계획 따위는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하나가 됐다. 창조나 탄생 이전의 상태라면 우리는 정의, 식별, 분류를 기다려야 하겠지만, 이미 실존하는 존재로서의 우리는 항상 본질에 앞선다. 그리고 현재 실존하는 존재는 노력해도 완성할 수 없고, 결코 멈출 수 없으며, 언제나 ‘낯선 땅의 낯선 이방인으로서 죽음의 확실성과 실현의 불가능성을 인식해가는, 삶을 지속하는 동안 존재할 뿐인 ‘무임을 깨달아가는 상태다. 이 상태가 바로 ‘불안이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이 같은 인간 조건의 근본적 진실을 예리하게 인식해 겸허히 받아들였다. 우리는, 심지어 가장 현명하고 지식이 많고 권력이 큰 사람조차도, 미래가 무엇을 가져올지 확신할 수 없다. 실존주의 철학은 이 늘 배불러 있는 불확실성을 아직 다 만들어지지 않은 세상과 우리 자신을 ‘즐길 선택과 행동의 ‘자유라고 여긴다. 이 자유는 우리의 상이자 메달이자 기름 부음인 동시에 우리가 처한 양상이며 우리가 마주하는 혼란이다. 이 자유는 소중한 우리의 도덕적/정치적 재화인 동시에 결과가 정해져 있을지 모를 미래로부터 우리를 안심시키는 실존적 재화다. 사실 우리는 미리 정해진 운명의 자동기계와 같은 삶이 싫어 무의식적으로는 이 자유를 갈망한다. 하지만 이 자유는 불확실성이기에 불안이라는 대가가 뒤따른다.


    실존주의 철학은 미리 결정되거나 확립된 그 어떤 본질도 없는 자유로운 존재인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데 ‘불안을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선언하고 우리에게 자기창조의 책임을 부여한다. 자유로운 우리는 스스로 삶과 운명의 윤곽을 결정할 책임이 있기에 필연적으로 불안을 경험한다. 자유롭게 행동하고 선택하는 존재의 불확실성과 불안이 우리 의식을 구성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자유가 여간해서는 축복이나 구원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공포, 두려움, 고통인 것만 같다. 실제로 우리는 삶의 많은 부분을 이 자유를 회피하거나 거부하는 데 소모한다. 애써 이 자유를 외면하고자 감성적이거나 지적인 치유법을 찾고, 심지어 약리적인 도움까지 받아가면서 저주 같은 축복을 덜 느끼려고 하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고 살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자유에서 도피하는 데 한없이 창의적이다.


    인간이 ‘맨몸의 존재라는 우주적 공포와 실존적 두려움은 한때 잘 조직된 종교의 교리와 의식이 요구하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듯했다. 종교는 인간 삶의 모든 측면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행동 및 도덕 규범을 제공했고, 이는 모두 전지전능한 신에 의해 뒷받침됐다. 그러나 과학의 불편한 연구와 철학의 집요한 추론으로 그와 같은 안도감을 더는 보장받지 못하게 됐을 때, 신과 종교 그리고 그 신성한 계시를 해석한 사제들의 도덕적/형이상학적 지침은 어떻게 됐을까?


    이 문제는 니체를 통해 가장 날카롭고 아프게 제기됐다. 그가 반복해서 경고한 다가오는 ‘폭풍은 유럽과 유럽 문화가 초래한 극심한 불안, 음침한 허무주의, 신 없는 세상을 향한 신경증적인 저항이자, 지성적/도덕적 묵인을 요구하는 국가와 시장과 그 밖의 잡다한 이데올로기 같은 ‘새로운 우상으로의 필사적인 도피 열망이었다. 니체의 글 곳곳에는 불안이 도사린다. 그 가운데 가장 중심은 종교적이든 비종교적이든 ‘신의 죽음에 직면한 불안이다. 여기서 ‘신은 신성한 창조자이자 도덕의 보증자로서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도덕적/인식적/정신적 영역에서 절대적으로 안전한 ‘확실성을 보장하는 존재를 뜻하는 개념이다. 세속화한 세상에서 이제 이 신은 실재하지 않는다.


    니체는 불안이 내가 나 아닌 다른 존재가 되려고 갈망할 때, 끊임없이 남을 의식하고 세상의 통제에 순응할 때, 세상은 무한히 되풀이될 뿐 오래된 종교적 전통이나 믿음이 보장한 안정 따위는 없음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생긴다고 여겼다. 흥미롭게도 그의 이런 관점은 불교 철학의 중심 주장과 일치한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수용하지 못하고 낙관적인 비관론으로 세상을 냉철하게 바라보지 못해서 우리는 불안하다. 이 불안이 우리를 삶의 주인이 아닌 겁 많은 노예로 만든다. 이런 태도가 고착하면 생각과 행동의 변화가 요구될 때도 지금 상태에 계속 머물면서 사사건건 세상과 타인의 눈치만 보게 된다. 더 최악은 추후 이 사실을 알고 나서도 그 의미를 완전히 잘못 읽어 세상을 바꾸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극단적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 처참한 패배를 막고자 니체는 우리에게 “운명을 사랑하라(Amor Fati/아모르 파티)”고 외쳤고, 운명에 뒤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 자신의 삶, 자신의 불안을 자신의 일부로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고대 그리스 비극을 교훈 삼아 이성, 질서, 절제, 절대적 영역인 ‘아폴론적인 것과 감성, 혼돈, 충동, 상대적 영역인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조화를 이루면 우리는 무자비한 세상에 직면해 두려움과 불안을 용기 있게 인정하고 실존의 도전에 자신 있게 응할 수단을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실존적 위기를 극복한 ‘위버멘쉬(Overman/초월인/극복인)로 우뚝 서게 되는 것이다.


    니체는 주옥같은 용어와 문장과 개념을 많이 남겼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은 ‘힘에의 의지 ‘힘을 향한 의지일 것이다. 이것이 니체 철학의 중심 개념이자 실존의 도전에 자신 있게 응할 수단인 까닭이다. 힘에의 의지는 자신에게 집중하고 자신의 가치를 높여 그 높아진 가치로 자신의 삶을 열어나가려는 의지를 말한다. 니체에게 힘에의 의지가 없는 인간, 즉 스스로 극복하려고 하지 않는 인간은 추하다. 힘을 향한 의지를 불태우는 인간, 즉 자신을 극복하는 인간만이 아름답다. 여기에서 ‘힘은 세간의 ‘권력이 아니다. 그런 힘이야말로 무시하고 저 멀리 내팽개쳐야 할, 우리의 실존을 위협하는 적이다. 니체에 따르면 우리의 불안은 세상에 해로운 믿음을 양산하고 잇속에만 사로잡힌 인간들을 마치 ‘힘에의 의지에서 승리한 자들로 착각해 그들이 설정한 도덕적/정신적/감정적 요구에 맹목적으로 순종할 때 발생한다.



    불안과 더불어 산다는 것

    불안은 우리 인생이 두려운 상황의 연속임을 보여준다. 우리는 격렬한 폭풍우에 휩싸여 바다에서 표류한다. 간신히 버텨내고 파도에 이끌려 외딴 섬에 도착하는데, 그곳에는 사나운 맹수들이 어슬렁거린다. 용기를 내서 제압해보려고 하지만, 피에 굶주린 해적들로 가득 찬 거대한 배가 다가온다.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다가 안도하고, 또 두려움을 느끼다가 다시 안도한다. 이 거듭되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두려우리라는 사실을 확신한다.


    이것이 우리 삶의 기본적인 양상이다. 불안은 언제나 변함없고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인생의 동반자다. 이 진실을 깨달은 우리는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려 한다. 우리는 불안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실제로 현대 심리치료법인 ‘인지행동치료(CBT)와 ‘수용전념치료(ACT) 모두 여기에서 출발한다. 수용전념치료는 인지행동치료의 한 갈래다. 앞서 언급한 인지행동치료가 인식을 바꿔 감정을 조절하고 올바른 행동을 유도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수용전념치료는 감정을 그대로 수용하고 가치 있는 행동에 전념하도록 이끈다.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 순간에 집중해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를 찾는다.


    불안과 더불어 살아가려면 두려움에 자신을 능동적으로 노출해 몸과 마음에 자연스레 배어들도록 하는 훈습 과정이 필요하다. 일단 불안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오롯이 받아들인다. 그러면 이기지 못할 불안과 싸우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다른 중요한 가치에 관심을 돌릴 수 있다. 파도가 덮쳐오면 그냥 맞는 것이다. 계속 맞다 보면 무뎌진다. 친숙해진다. 친숙함은 그 자체로 좋은 해독제다. 실존적 불안을 ‘첫 번째 화살로, 불안에 대한 불안을 ‘두 번째 화살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만, 굳이 분류할 필요 없이 전부 그냥 불안이라고 여겨도 무방하다.


    우리가 항상 불안하리라는 진실을 온전히 이해하면 동료 인간에 대한 연민과 공감도 허용하게 된다. 연민과 공감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감정이기에 굉장히 중요하다. 특히 특정 삶에 영향을 받지 않는 불안은 연민과 공감이 더 필요하다. 실존적 영역에서는 아무리 부자이고 힘 있는 사람이라도 우리와 똑같이 고통을 겪는다. 삶의 물리적 세부 사항이야 그들의 부와 권력으로 충분히 조정할 수 있겠으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직면해야 할 죽음과 무, 즉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고통, 자신과 자녀의 운명에 대한 두려움, 그릇된 선택과 결정에 대한 우려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우리보다 더 운이 좋았던 이들은 그 운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불안에도 시달린다. 우리보다 삶의 상황이 훨씬 나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연민과 공감이 필요한 이유는 그럼 마음가짐이 우리가 불안과 더불어 살아가는 데도 커다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 타심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이익이 된다.


    불안을 공기처럼 받아들이고 인정하면서 살면 우리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이 될 수 있는지 이해하는 데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다. 불안을 기꺼이 품기로 한다면 우리는 불안이 인생의 중요한 결정과 내게 꼭 필요한 가치를 구할 때 어떤 부분에서 두려운 변곡점으로 작용하는지 알 수 있다. 정신분석학에서 알려주듯이 불안은 나 자신을 하나로 묶어야 하는 많은 부분에서 내게 보내는 메시지다. 때때로 우리는 갈등하는 우리 자아가 하는 말을 잘 들어서 해결해야 한다. 불안이 따라오는데도 어떤 일을 확신 있게 고집한다면 자신의 정신적 위계에서 그 일의 가치와 중요성 우위에 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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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