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아름다운 쇼펜하우어의 철학수업
 
지은이 : 지연리 (지은이)
출판사 : 열림원어린이
출판일 : 2024년 10월




  • "눈 내리는 어느 겨울 아침"을 배경으로, "쇼펜하우어와 함께 떠나는 100명의 아이들의 100가지 질문여행"이라는 독특하고 신비로운 이야기로 독자를 이끕니다. 인생의 의미와 행복에 대한 질문, 그리고 그것이 우리 각자 안에 이미 존재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작고 아름다운 쇼펜하우어의 철학수업


    서문

    메로제에리제

    때로 어떤 여행은 아무런 계획 없이 시작돼. 어디로 갈지 정하지 않았는데도 길은 가야 할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문을 열지 않았는데도 우린 벌써 타고 갈 기차 안에 앉은 자신을 발견하지.


    그런 여행에는 가방을 쌀 필요가 없어. 숙소를 예약하거나 방문할 곳을 미리 고를 필요도 없어. 왜냐하면 그런 여행은 우리의 계획 너머에 있거든. 우리가 우연히 지구라는 이 행성으로 여행을 온 것처럼.


    그런 여행이 있다니, 신기하지? 쉽게 상상이 안 갈지도 몰라.


    하지만 그거 알아? 다만 기억하지 못할 뿐, 넌 이미 그 여행을 시작했어. 왜냐하면 그런 여행은 산책길 지나치는 나무들 사이로도, 잠든 머리맡 전등 위로도, 걷다가 지쳐 다리를 쉬는 벤치 아래에서도 시작되거든.


    어떤 여행인지 궁금하다면, 두려워하지 말고 잠시 눈을 감아 봐.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 뜨면 너는 이미 그곳에 가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곳은 아마도 굉장히 놀라운 곳일 거야. 눈 내리는 어느 겨울 아침, 아이들이 쇼펜하우어와 함께 떠난 100가지 질문여행처럼.


    그 여행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펼쳐 봐도 좋아. 세상에는 아직 우리가 발견하기를 기다리는 마법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세상에! 벌써 준비되었다고? 좋아, 그럼 시작해 볼까?


    하나, 둘, 셋! 메로제에리제!


    이제 시작이야.


    프롤로그

    ‘마법은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어. 아무렴. 벌써 모든 곳에서 일어나고 있잖아?’


    쇼펜하우어가 생각했어.


    21세기에 마법이라니! 그것도 이렇게 갑자기? 이상하게 들릴지도 몰라. 하지만 쇼펜하우어의 생각처럼 마법은 우리의 일상 곳곳에 숨어 있어. 옷장 안에도, 창문 너머에도, 문밖에도, 싱크대 안에도, 미끄럼틀 위에도, 벽 사이에도 숨어서 우리가 마법의 문을 열고 그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지.


    쇼펜하우어는 그것을 알았어. 왜냐하면 자기도 이미 그런 문을 수없이 열어 왔으니까. 그래서 마법으로의 여행을 조금 더 많은 아이가 누리길 바랐고, 그래서 또 곰곰이 생각해 보았어. 어떻게 하면 지금까지보다 더 많은 아이가 그 여행을 즐길 수 있는지 말이야. 그러곤 하나의 방법을 찾아냈어. 그것은 바로 인간의 운명을 바꿀 여행을 아이들과 함께 떠나는 것이었어. 마법은 동화 속에만 있다고 믿는 아이들이 일상에서 마법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기에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지.


    그런데 인간의 운명을 바꾸다니? 그런 일이 가능해?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운명에 차이가 있는 이유를 삶을 조건 짓는 세 가지 규정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인간을 이루는 것, 인간이 지닌 것, 인간이 남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 이 세 가지가 그것에 해당했지.


    첫째, 인간을 이루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인격을 의미했어. 건강, 힘, 기질, 도덕성, 예지 등이 여기에 속했어. 두 번째로 인간이 지닌 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재산과 소유물을 의미했어. 그리고 마지막, 인간이 남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은 다른 사람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관한 것이었어. 나에 대한 타인의 의견을 의미하는 이것은 명예, 지위, 명성으로 나뉘었어.


    쇼펜하우어가 생각하기에 이중에서 행복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첫 번째 인격이었어. 신분과 지위가 높고 가진 것이 아무리 많아도 참된 인격적 장점에 비할 수는 없었으니까. 실제의 왕과 무대 위 왕의 관계라고 할까? 우리 내부에 있는 행복의 원인이 사물에서 유래하는 행복의 원인보다 더 큰 이유였지. 외부의 사정이 같더라도 사람마다 전혀 다른 반응을 하고, 같은 환경에 있더라도 저마다 다른 세상을 사는 까닭도 이와 같았어.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무엇보다 각자의 세계관에 의해 좌우되므로 생각의 차이에 따라 달라졌거든. 이런 차이에 따라 세계는 진부하거나 하찮은 것이 되기도 하고, 풍요롭고 흥미진진하며 의미심장한 것이 되기도 했어.


    우린 누구나 자신의 의식 속에 갇혀 살아가고 있어. 아쉽지만 이때 외부에서 우리를 도와줄 방법은 별로 없어. 하지만 자기 자신을 가두는 의식에 변화가 이루어진다면 어떨까? 쇼펜하우어는 진정한 삶의 연금술이 여기에 있다고 믿었어. 그에게 마법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지.


    아이들과 여행을 떠날 결심이 서자 쇼펜하우어는 곧바로 주문을 외웠어.


    “아브라카다브라! 아이스쿨라피우스! 백 명의 아이들과 세 돛 범선, 그리고 바다!”


    쇼펜하우어가 주문을 외우자마자 푸른 바다와 배, 그리고 백 명의 아이들이 나타났어.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진 아이, 울다 잠든 아이, 담장 너머로 축구공을 넘긴 아이, 나비를 찾는 아이, 침대 밑에 숨은 아이······,


    모두 다 다른 순간의 벽에 등을 기댄 아이들이었지. 일상을 마법으로 이끌 주문을 간절히 찾던 아이들, 쇼펜하우어와 아이들의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어.


    첫 번째 여행_ 비비디 바비디 부

    쇼펜하우어는 돛을 펼쳤어. 그리고 곧 시작될 항해에 가슴 두근거리는 아이들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어.


    “삶은 살아 내려는 수많은 의지의 충동적인 힘으로 꾸려져 있어. 소유하지 않은 것을 원하는 이 의지는 한계도, 분명한 목표도 없이 영원히 이어지지.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할까? 바로 원하는 것과 주어지는 것 사이의 거리야. 이 둘 사이의 거리가 멀수록 우린 불행을 느끼고, 가까울수록 행복감을 느끼거든. 그래서 우리는 삶이라는 항해를 시작하기 전에 자기가 무엇을, 왜 원하는지 알아야만 해. 그 가치 또한 알아야 하지.”


    부에 대하여

    “할아버지, 저는 돈이 많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원하는 것을 다 살 수 있으니까요.”


    양쪽 호주머니가 볼록한 아이가 말했어.


    쇼펜하우어가 대답했어.


    “물론 돈이 많으면 좋겠지. 네 말대로 사고 싶은 것을 모두 살 수 있으니까. 하지만 부란 넘치는 사치일 뿐 행복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아. 오히려 넘치는 부로 인해 행복을 잃을 수도 있어. 부는 바닷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마르거든.”


    쇼펜하우어의 말에 아이가 반문했어.


    “목이 마르면 물을 더 마시면 되잖아요, 안 그래요?”


    “끝없는 갈증에 시달리며 인간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우리가 부를 쌓는 이유는 일어날 수 있는 재난이나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서이지 행복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란다. 그런데도 돈에 집착하는 사람은 진짜 행복을 모르는 사람이야.”


    맞는 말이었어. 구두쇠 스크루지 영감님도 돈에 집착했는데 행복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았거든.


    명예에 대하여

    “할아버지, 저는 명예를 얻고 싶어요. 번쩍번쩍 훈장을 달면 어깨가 으쓱해지거든요.”


    장난감 훈장을 가슴에 단 아이가 말했어.


    아이의 말에 쇼펜하우어가 물었어.


    “훈장을 달면 왜 어깨가 으쓱해질까?”


    “어 ...... 사람들이 우러러보니까요?”


    쇼펜하우어는 빙긋 미소 지었어. 그러곤 이렇게 말했지.


    “우린 모두 다른 사람의 호의를 바라고 인정받길 원한단다. 아무도 비판받길 원하지 않아. 좋은 평판은 삶에 의욕을 주고, 나쁜 평판은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안겨 주거든.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어. 그것은 바로 좋은 펑판과 나쁜 평판 모두 실체가 없다는 사실이야. 그런 건 다 인간의 가치에 대한 다른 사람의 생각일 뿐이니까. 명예도 그래. 명예란 ‘실체 없는’ 타인의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이자, ‘실체 없는’ 타인의 비판에 대한 두려움일 뿐 그 자체로는 아무 힘이 없어.”


    명성에 대하여

    “이름을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은요? 저는 유명해지고 싶어요.”


    유명한 연예인이 되고 싶은 아이가 물었어.


    쇼펜하우어가 대답했어.


    “명성이란 인간의 자존심과 허영을 채우는 희귀한 그림자란다.”


    “어, 그럼 명성도 나쁜 거예요?”


    “좋고 나쁨은 명성 자체가 아닌, 명성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취하는가에 따라 달라져. 명성이 행복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진짜 이유는 명성이 아닌, 명성을 얻게 한 이유, 즉 공로에 있거든. 그래서 실제로 명성을 얻지 못했어도 칭송받아 마땅할 가치 있는 일을 한 사람은 이미 행복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가졌다고 할 수 있어. 자신의 가치는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니까. 게다가 진정한 명성은 신경 쓰지 않아도 알아서 주어진단다.”


    타인의 평가에 대하여

    “우린 왜 타인의 안 좋은 평가에 상처받는 걸까요? 저는 그게 궁금해요.”


    아이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물었어.


    쇼펜하우어가 대답했어.


    “나약하기 때문이야. 그래서 대다수가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치는 자신을 과도하게 의식하고 남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생각하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해. 인생이란 자기 생각과 의지로 살아가는 것이지 타인의 평판으로 사는 게 아닌데도 말이지.”


    “그러면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내가 아닌 무엇을 의식하며 살아야 하죠?”


    “나 자신의 눈으로 본 내가 아닐까? 왜냐하면 네가 본 그대로가 곧 너의 세상이니까. 지금도 너는 네가 보고, 느끼고, 아는 대로 너의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어. 그 세상이 곧 너이고 말이야. 그래서 자신의 행복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사람은 언제나 나 자신일 수밖에 없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른 사람의 평가에 기뻐하거나 불쾌해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냉정히 평가하는 일일 테고 말이지.”


    두 번째 여행_ 디에세오스타


    아침을 먹고 난 다음이었어. 멀리, 이제 막 생겨난 콩알 구름을 보며 쇼펜하우어가 말했어.


    “누군가 자기 자신을 위해 붙인 촛불만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빛난단다.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을 위해 생각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인간은 자기 안에 최종적이고 근본적인 비밀을 지니고, 이 내부에 가장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사람도 오직 자기 자신뿐이거든. 우린 거기에서 만 세계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를 발견하고 만물의 본질을 한 가닥의 실로 파악할 수 있어.”


    실수에 대하여

    ”할아버지, 실수를 통해서도 배울 게 있나요? 저는 그게 궁금해요.“


    아이가 물었어.


    쇼펜하우어가 대답했어.


    “물론이야. 하지만 그건 실수 자체라기보다는 잘못을 인정하고 앞으로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다짐하는 과정에서 얻어져. 인간은 자기 징계가 없으면 성장하지 못하거든. 그런데 실수가 분명한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변명하거나 그런 자신을 미화하면 어떨까? 자기 징계의 기회를, 그래서 성장할 기회를 놓치게 되겠지?”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어. 평소 실수가 잦았지만, 잘못을 저지른 뒤 반성을 통해 배움을 얻는다면 실수한 사실 하나만으로 괴로워할 이유는 없었어.


    스스로 사고하기에 대하여

    “할아버지, 저는 생각하는 게 싫어요. 괜히 머릿속만 복잡해지거든요. 그런데도 엄마는 사고력을 키워야 한다며 책을 왕창 사다 주세요. 읽고 생각해 보라고요. 엄마는 생각하기 싫어하는 저의 개성을 무시하시는 걸까요?”


    아이가 물었어.


    쇼펜하우어가 대답했어.


    “오, 개성은 그럴 때 쓰는 말이 아니야. 생각이 많지 않은 것과 스스로 생각하길 싫어하는 건 다르거든.”


    “어떻게요?”


    “개성은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란다. 우리의 선택 너머에 있으니까. 다시 사고의 문제로 돌아가면, 나는 너의 어머니가 현명하다고 생각해. 독자적 사고를 하고, 자발적으로 생각하고, 올바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안에 길을 잃지 않게 도와주는 나침반을 갖게 되거든. 게다가 뭐든 사고를 거쳐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든 사람의 앎은 어떤 지식보다 백배는 더 가치 있어.”


    전체를 보는 눈에 대하여

    “할아버지, 시간이 지나 알게 된 것과 그전에 알던 게 다른 건 왜 그래요? 어떤 일이 있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게 보였어요.”


    아이가 물었어.


    쇼펜하우어가 대답했지.


    “시야가 넓어졌기 때문이야. 말하자면 전체를 보는 눈이 생겼달까?”


    “전체를 보는 눈이요?”


    “그래. 예를 들면 이런 거야. 건물을 세우기 위해 벽돌을 나르며 우린 벽돌만 나를 뿐 건물의 전체 설계도와 평면도를 항시 염두에 두지는 않는단다. 그러다가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 벽돌 쌓기가 끝나면, 그제야 지어지는 건물의 설계가 눈에 보이기 시작해. 인생도 마찬가지야. 생을 관통하는 이력과 그 특성을 알게 되는 건 나중에 뒤돌아본 다음이니까.”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그러니까 전체를 보는 눈은 지금이 아닌 늙어서만 얻을 수 있는 거네요?”


    “꼭 그렇지는 않아. 전체를 보는 시야는 예측 훈련을 통해 키울 수 있거든. 집과 관련해서 다시 예를 들자면, 벽에 못을 박다가 잠시 멈춰 서서 자기가 지금 못을 박는 벽이 건물의 어디쯤 있는지, 그 벽 위와 아래에는 무엇이 있는지 상상해 보는 것이지. 그러면 건물 전체를 보는 눈을 얻게 돼.”


    쇼펜하우어의 말에 아이가 고개를 위아래로 천천히 움직였어. 언젠가, 어디서, 큰 그림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이제 알 것 같았거든.



    세 번째 여행_ 하쿠나마타타

    정오 무렵이었어. 아이들은 슬슬 지루함을 느끼고 삼삼오오 모여서 대화를 나누거나 놀이에 열중했어. 다투는 아이들도 있었어. 쇼펜하우어는 그런 아이들을 한자리에 불러 앉혔어.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어.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의지로 가득하고, 우린 이 의지를 세상 모든 존재와 공유하고 있어. 그런 점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와도 다르지 않아. 우리가 인간에 대해 배우는 것도 바로 그래서야. 인간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세계를 통해 인간을 가르치는 것보다 옳거든. 왜냐하면 우린 언제나 직접적인 자의식으로부터 간접적으로 주어진 것, 즉 외부 인식을 설명해야 하니까. 이것과 반대로는 되지 않아.”


    예의에 대하여

    “할아버지, 저는 화석 인류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살던 때에도 지켜야 할 예의가 있었는지 궁금해요.”


    아이가 물었어.


    쇼펜하우어는 아이의 발상이 신선하게 느껴졌어. 그래서 재미있는 이야기로 예의에 관해 설명하기로 했지. 그가 말했어.


    “어느 추운 겨울날의 일이야. 고슴도치들은 얼어 죽지 않기 위해 서로 바짝 달라붙어 있었어. 하지만 곧 서로의 가시에 서로가 찔린다는 사실을 알고는 한 걸음씩 떨어졌단다. 그러다가 다시 추위를 견딜 수 없게 되었고, 또다시 모여 한 덩어리가 되었어. 이렇게 수없이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한 끝에 고슴도치들은 마침내 가시에 찔리지 않고 추위를 이길 적당한 거리를 발견했어. 그게 바로 예의야. 인간이 도덕적, 지적으로 빈약한 상태를 서로 무시하거나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암묵적으로 합의한 결과이기도 하지. 그런 의미에서 보면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게도 지켜야 할 예의는 있었을 거야. 지금과는 내용이 달랐겠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에 대하여

    “할아버지, 제가 좋아하는 친구가 있어요. 더 가까워지고 싶은 친구요. 하지만 그 친구는 저와 생각이 다른 것 같아요. 선을 긋고 그 안으로는 못 들어오게 하는 기분이 들거든요. 친구가 저를 싫어하는 것일까요?”


    애착 인형을 꼭 껴안고서 아이가 물었어.


    아이의 질문에 쇼펜하우어가 대답했어.


    “친구가 너를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는 나도 모른단다. 그건 그 친구의 마음이니까.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그건 바로 현명한 사람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고독이 잊힐 정도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소통한다는 사실이야. 온기가 필요하다고 난로 안으로 뛰어들면 화상을 입게 되니까. 교우 관계도 그래. 지나치게 가까워지려다가, 혹은 가깝다는 이유로 자칫하다가는 상대를 불편하게 할 수 있고, 상처를 주거나 의도와 달리 관심이 간섭으로 비칠 수도 있거든. 높이 나는 새들을 봐. 부부 새도 날 때는 서로의 손을 잡지 않아.”


    여섯 번째 여행_ 카스트로폴로스

    밤이 깊어지고 비가 잦아들었어. 구름이 사라진 자리에는 첫 별이 떠서 다가올 새벽을 암시했지. 쇼펜하우어는 아이들을 데리고 갑판 위로 올라갔어. 그리고 이렇게 말했어.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무엇으로 자신의 마음을 채우는가에 따라 달라져. 행복은 추구하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거든. 그래서 행복은 꿈이 될 수 없어. 인생의 어느 시점에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목적도 될 수 없지. 그런 꿈과 목적은 얼마 안 가 불만이 되고 대부분 환멸로 끝나고 마니까.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고 그 안에서 즐거움을 발견하는 일이 많아진다면 문제가 달라진단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가장 훌륭한 존재여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행복의 기준에 대하여

    “할아버지, 우린 어떤 기준으로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하는 걸까요? 저는 그게 궁금해요. 나중에 늙어서 행복한 삶이었다고 말하고 싶거든요.”


    쇼펜하우어가 대답했어.


    “어떤 사람의 생애가 행복했는지는 그가 얼마나 많은 쾌락과 향락을 누렸는지로 평가할 게 아니라 고통이 얼마나 없었는가로 평가해야 해. 고통이 적극적 성질을 띠는 것과 달리 쾌락과 향락은 소극적 성질을 띠고 있거든. 고통 없는 상태에서는 지루함도 없기에 그것으로 행복해지기 위한 중요한 요소는 모두 달성했다고 볼 수 있으니까. 그 이외의 것은 모두 허상에 불과해. 이에 대해 괴테는 자신의 소설에서 재앙을 피하려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바를 아는 인물이다. 반면 자기가 소유한 것보다 더 나은 것을 바라는 사람은 완전히 눈먼 인간이다.라고 말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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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