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네카의 말
 
지은이 :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출판사 : 메이트북스
출판일 : 2022년 07월




  • 우리의 짧은 인생을 윤택하게 만드는 방법에 대해 알려줍니다. 세네카는 고대 스토아 철학의 대가로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는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고,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 이 순간’을 충만하게 사는 것이 중요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네카의 말


    세네카의 인생론

    사용법만 잘 익히면 인생은 충분히 길다

    그간 스스로를 위해 쓴 시간을 계산해보자

    삶의 마지막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노인이 있다면 그를 붙잡고 이렇게 묻고 싶다.


    “당신은 이제 삶의 끝자락에 와 계시군요. 백 세 혹은 그 이상의 나이가 당신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생을 돌이켜 생각해보시면 어떨까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채권자에게 빼앗겼는지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애인에게 또 후원자에게, 그리고 부부싸움을 하느라 빼앗겼습니까? 얼마나 많은 시간을 도시를 활보하는 것에 보냈나요? 거기에 본인의 잘못으로 생긴 질병을 더하고 하릴없이 낭비한 시간까지 더해보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적은 시간만 남을 겁니다.


    당신이 확고한 계획을 세웠던 시간을 헤아려보고, 자신이 의도한 대로 흘러간 날이 얼마나 적은지, 스스로를 위해 할애한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해보십시오. 언제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언제 두려움에 떨지 않았고, 또 지금까지 오랜 세월을 살면서 어떤 것을 성취했는지, 당신이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인생을 빼앗았고, 아무 근거 없는 고통과 어리석은 쾌락, 탐욕스러운 욕망과 사회 활동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는지, 이제 당신에게 남은 것이 얼마나 적은지를 헤아려보세요. 그러면 아직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인생을 마감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겁니다.”



    지금 이 순간을 충만하게 살아라

    다시 되돌아갈 수도, 멈출 수도 없다

    그 누구도 지나간 세월을 돌려주지 않으며 당신을 과거로 되돌려놓지 못한다. 우리 인생은 처음 시작점에서 그대로 흘러갈 것이며 다시 되돌아가거나 멈추어 서지도 않을 것이다. 인생이란 정확히 어느 정도 속도로 가는지도 알리지 않은 채 고요하게 흘러간다. 왕의 지시를 받는다고 해서 국민들이 간청한다고 해서 인생이 더해지지도 않는다. 맨 처음 세상에 태어나서 인생을 시작한 대로 시간은 계속 달려가고, 방향을 바꾸거나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


    그 결과는 어떠할 것인가? 우리는 정신없이 분주하고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다. 그러다 어느 지점에 이르면 원하든 원치 않든 마지막 순간을 맞이해야만 한다.



    방해를 받지도, 빼앗기지도 않는 시간

    야망에 휩쓸려 무엇인가 소유하려고 애쓰고, 오만하게 남을 경멸하고 절제하지 못하고 남을 이기려 들며, 음흉한 마음으로 타인을 기만하고 탐욕스럽게 약탈을 일삼고 도에 넘는 낭비를 한 적이 있다면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 두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과거는 이미 봉해진 신성한 시간이며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는 온갖 우연을 넘어서 있고, 운명의 여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


    지나간 과거는 빈곤과 두려움, 그리고 느닷없이 찾아오는 질병으로부터 안전하다. 누구의 방해를 받을 수도 없고, 빼앗길 수도 없는 시간인 동시에 위험할 것 하나 없이 온전히 지속되는 시간이다.


    현재 우리 앞에 주어진 시간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으며 찰나의 순간들이 이어진다. 하지만 과거의 시간은 본인이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붙잡아 얼마든지 감상할 수 있다. 물론 분주하게 살아가는 이들은 그럴 시간조차 없을 테지만.



    내 인생에서 오롯이 내 것인 것을 살펴보자

    헛된 희망에 목숨을 거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남이 가진 것을 빼앗고 빼앗기면서 서로의 여가를 망치고 불행하게 만드는 사이에 우리들의 인생은 아무런 소득도, 즐거움도, 정서적인 발전도 없이 지나가버리고 만다. 그 누구도 저만치 앞에 다가온 죽음에 대해 개의치 않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헛된 희망에 목숨을 건다. 그리고 죽음 후의 일들, 으리으리한 묘 자리, 공적인 업적을 기증하는 것, 화장터 옆에서 벌어지게 될 화려한 검투 경기, 그럴듯한 장례식에 대비하고 있다. 하지만 너무나 짧은 인생을 살아갔던 자들에게 어울릴 법한 장례식은 뜨거운 횃불과 촛불만 밝히고 치러져야 마땅할 것이다.


    주어진 환경에서 장점을 찾아라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고, 가능한 불평불만을 자제하며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장점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제아무리 힘들고 괴로운 일이라고 해도 마음을 다스리면 평온을 얻을 수 있다.


    손바닥만 한 땅도 제대로 활용할 방법만 찾는다면 다양한 용도로 쓸 수 있고, 좁은 공간도 솜씨 좋게 배분하면 살 만한 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 고난이 닥치면 이성을 발휘해야 한다. 이성을 통해 어려운 일을 유연하게 해결해야 한다. 좁은 문도 결국 넓어지고, 무거운 짐도 머리를 쓰면 가벼워지기 마련이다.


    한계점에 이르면 스스로 멈춰라

    언제 멈추어야 하는지 우연에 맡길 것이 아니라 그전에 스스로 멈추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온갖 욕망으로 마음에 갈등이 일더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한계점을 인지하고 불확실한 것들로 가득한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



    운명과 말다툼하지 말고 내려놓자

    제대로 죽는 법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뭐 그리 힘든가? 제대로 죽는 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제대로 살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죽고 사는 문제에 큰 가치를 두기보다는 생사를 덧없는 것이라 여겨야 한다.


    키케로는 이렇게 말했다. “전투에 나선 검투사들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고자 할 때 우리는 적의를 느낀다. 반대로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면 무한한 호의를 보인다. 우리도 그와 똑같은 입장에 처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에 대한 공포가 때로는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불행을 조심하라

    그렇기 때문에 지금 상황이 언제라도 바뀔 수 있다는 점을 깨닫고 항상 조심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일어날 수 있는 불행은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과거 폼페이우스보다 더욱 부유한 사람이 있을까? 오랜 친척이자 폼페이우스가 살던 집의 새 주인, 가이우스가 그의 집을 부수고 카이사르의 집을 내주었을 때, 폼페이우스는 당장 마실 물도 빵도 없는 상태였다. 자신이 가진 영토 위로 흘러서 바다와 맞닿는 강물이 있었지만, 마실 물을 구걸해야 했다. 그렇게 폼페이우스는 친척이 내어준 궁전 같은 집에서 갈증과 배고픔에 지쳐 죽어갔다. 그가 배고픔으로 고통받는 사이, 폼페이우스의 재산을 상속받게 될 장본인은 공식적으로 장례를 치르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불운에 내맡기지 마라

    한 나라의 왕으로 군림했다고? 생전에 자신의 몸을 불태울 화장용 장작더미가 활활 타올랐다가 꺼지는 것을 보았고 자신의 왕국과 본인의 죽음보다 더욱 오랜 세월을 살았던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를 찾아가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자신의 왕국을 두려움에 떨게 한 지 일 년 만에 주검으로 전시되었던 누미디아 왕 유구르타를 찾아가보라고도 하지 않겠다.


    이렇듯 운명의 여신이 언제 울고 웃을지 모르는 인생을 살아간다면, 우리에게 닥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헤아려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를 불운에 내맡기는 꼴이다. 그 강력한 불운의 힘을 꺾으려면 미래를 내다볼 수 있어야 한다.



    세네카의 행복론

    무작정 남이 하는 대로 따라 살지 말라

    원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모두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정작 무엇이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저 빛을 찾아 더듬거리며 나아갈 뿐이다. 행복한 삶을 성취하기 힘든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행복을 찾기 위한 의지가 강할수록 오히려 잘못된 길로 들어서기 쉽다. 일단 반대쪽 길로 들어서면 목표에서 점점 멀어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먼저 원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다음에는 목표를 향해 최대한 빨리 갈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일단 올바른 길에 들어선다면 하루하루 어느 정도 왔는지 가늠할 수 있으며, 자연스러운 욕구를 따라서 그 목표까지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군중과 멀찌감치 떨어져 건강한 삶을 회복하자

    사람들이 서로 밀치고 넘어지다 보면 군중 사이에서는 일대 혼란이 벌어진다. 누구든 자기가 쓰러질 것 같으면 주변 사람을 끌어당기기 마련이라 결국 뒷사람까지 함께 넘어져서 파멸하게 된다. 이런 모습은 인생을 살면서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그 누구도 혼자서만 길을 잃고 헤매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 길을 헤매도록 만드는 원인을 제공하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맹목적으로 다른 사람의 선례를 따르는 것은 해롭기 짝이 없는 일이다.


    자기 판단을 따르기보다 앞선 사람을 따라 걷다 보면 제대로 판단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남의 말만 믿고 싶어진다. 이 같은 선례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이어지다 보면 결국 모두가 파멸에 이르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작정 남이 하는 대로 따라 살기보다는 군중과 떨어져 건강한 삶을 회복하려고 애써야 한다.


    인생의 길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우리는 겉만 그럴싸한 것이 아니라 견고하고 균형 있는 것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것은 어디로 손을 뻗어야 하는지만 안다면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바로 눈앞에 갈망하는 목표가 있는지도 모른 채 어둠 속을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있다.


    괜히 다른 사람의 의견을 하나하나 나열해서 여러분이 오히려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다. 물론 그 의견은 전적으로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의 의견에 부합한다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독자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는바, 올바른 길을 제시하기 위해서 그때그때 필요한 견해들을 더하도록 하겠다.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함부로 폄하하거나 비난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부분에 대해 더 좋은 의견을 생각해보도록 하겠다.”라고 말하도록 하겠다.



    세네카의 화 다스리기

    화라는 감정의 실체를 알자

    화는 관대함이 아닌 자만심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화라는 감정이 인간의 관대함에 어떤 식으로든 기여하고 있다는 착각은 금물이다. 화는 관대함이 아닌 지나친 자만심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치명적인 병에 걸려 해로운 물질이 몸뚱이를 탱탱 붓게 만드는 것은 바람직한 성장이 아니라 그저 거대한 비만이 될 뿐이다. 광기로 인해 인간의 사고를 넘어서게 된 사람은 자신이 고귀하고 숭고한 생각을 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하지만 그런 착각은 견고한 기반이 없어서 모래 위에 성을 쌓은 것처럼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화에는 든든한 밑바탕이 없다. 이 때문에 견고한 성장을 할 수도 오래 지탱할 수도 없어 속이 텅 빈 바람과 같다. 어리석음 이 용기와 동떨어져 있고 자만심이 자신감과, 우울함이 검소함과, 잔혹함이 엄격함과 동떨어진 것처럼 화는 진정한 관대함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강조하건대 숭고함과 우매한 군중심리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화는 아름다움이나 위대함과는 거리가 멀다. 항상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화라는 나약한 감정을 비집고 그 내면으로 침체되어 불행한 일부를 그대로 드러낼 수밖에 없다. 병에 찌들어 상처로 온몸이 덮인 사람들이 어디에 살짝 부딪히기만 해도 비명을 지르는 것과 같다.


    슬픔은 화의 벗이며, 모든 분노는 슬픔으로 끝맺는다

    누군가 미덕은 비굴하나 한편으로는 훌륭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건 미덕이라는 자질을 우위로 두면서 일부러 깎아내리려는 의도에 불과하다. 호의를 베푸는 행동을 통해 느끼는 기쁨은 원대하고 영광스러운 것이지만 타인의 과오로 쉽게 화를 느낀다면 그건 옹졸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덕은 절대로 악을 무작정 답습하는 과오를 범하지 않는다. 미덕은 화라는 감정 자체를 처벌의 대상으로 여긴다. 화는 잘못된 행동을 저지르는 것보다 하나 나을 것이 없고 대부분 그보다 나쁘다. 즐거움을 느끼고 기뻐하는 것이야말로 미덕의 본능이다.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은 미덕의 고결함과 어울리지 않는다. 슬픔은 화의 벗이며 모든 분노는 슬픔으로 끝을 맺어 후회나 실패의 마지막에는 슬픔만이 남는다.


    만약 현명한 자가 죄를 지은 자를 보고 화를 내야 한다면 죄질이 클수록 더 화가 날 것이고 화를 내는 빈도도 잦아질 것이다. 그러다 보면 현자는 그저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라 화를 잘 내는 성격이 되어버린다. 현자가 지나치게 자주 화를 내고 크게 분노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격정들로부터 자유롭게 놓아주는 편이 옳지 않을까?


    사람들마다 각기 다른 정도의 죄를 짓는데 그에 따라서 정해진 만큼 화를 내기란 불가능하다. 각기 정도가 다른 악행을 저질렀는데도 똑같이 화를 낸다면 불공평한 일이다. 그렇다고 화를 자극하는 일이 생길 때마다 머리끝까지 화를 낸다면 그저 화를 잘 내는 성마른 사람이 되고 만다.


    현자조차 타인의 사악함을 보고 스스로 격정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그보다 더 가치 없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도 똑같은 얼굴로 집에서 나오고 돌아갈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악한 행위를 보며 항상 울분을 토하고 죄악을 목격할 때마다 슬퍼해야 한다면 그보다 불행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평생을 화와 슬픔에 잠겨 보내야 할 테니까.


    화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법

    절대 화라는 감정에 곁을 내어줘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절대 화라는 감정에게 곁을 내어줘서는 안 된다. 물론 게으름 피우는 말에 박차를 가하고 횃불을 들어 자극하듯이 마음가짐이 흐트러진 사람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 화난 것처럼 꾸밀 수는 있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대해도 전혀 변화가 없을 때는 살짝 겁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화를 내는 것은 비탄에 잠기거나 두려움에 떠는 것보다 무의미한 짓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화를 부르는 상황들이 자주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렇다. 바로 그런 경우에 어떤 때보다 분노를 억누르려고 애써야 한다. 우리의 정신을 다스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운동선수들은 상대 선수의 체력을 고갈시키기 위해서 그들이 날리는 강한 주먹과 그 고통을 참아내지 않는가? 그리고 화가 났을 때가 아니라 완벽한 기회가 왔을 때 상대를 향해 주먹을 날린다.


    최고의 훈련가로 알려진 피로스는 절대 감정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고 제자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화는 숙달된 기술을 망치고 오직 상대를 해칠 생각만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화는 복수를 부추기지만 이성은 인내심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화에 휩쓸리면 처음 닥친 불운을 이기지 못하고 더욱 큰 불운에 빠지고 만다.


    모욕적인 한마디를 참지 못해 멀리 추방당하는 자들도 있다. 아무것도 아닌 말을 묵묵히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결국 화라는 감정에 지나치게 휩쓸려 몸과 마음의 자유를 포기하고 자기 손으로 목에 칼을 들이민 꼴이 되어버린다.


    최고의 복수는 복수할 가치조차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화라는 감정 자체에는 짜릿한 쾌감이 있습니다. 당한 만큼 되갚아주면 후련한 기분이 들거든요.”


    그렇지 않다. 은혜를 갚는 것이라면 몰라도 내가 당한 만큼 되갚아준다는 것은 전혀 명예로운 행동이 아니다. 선의에 굴복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만 악의에 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복수하고 앙갚음을 하는 것은 아무리 정당한 상황이라도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 결국 고통받은 만큼 고통을 주었다는 구차한 변명거리만 늘어놓을 뿐이다.


    언젠가 공중목욕탕에서 로마의 정치가 마르쿠스 카토를 알아보지 못한 사람이 그를 실수로 쳤다. 마르쿠스를 알고도 그런 실수를 저지를 사람은 없을 테니까. 나중에 그 사람이 사과를 하자 마르쿠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맞은 기억이 없소.” 마르쿠스는 복수를 하는 것보다는 그냥 모르는 척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엄청난 무례를 저지르고도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다는 건가요?”


    그렇다. 처벌보다 오히려 더 좋은 것을 얻었다. 그 후로 두 사람은 사적으로 알고 지내게 되었으니 말이다. 악행은 미워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좋다.


    최고의 복수는 상대를 복수할 가치조차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남에게 복수를 하려다가 오히려 자기 마음에 상처를 얻기 마련이다. 정말 위대하고 고귀한 사람들은 거대한 맹수와 같아서 작은 강아지들이 짖어대는 소리에 미동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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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