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무기력하게 느껴진다면 철학
 
지은이 : 양현길 (지은이)
출판사 : 초록북스
출판일 : 2024년 11월




  • 삶의 무의미함과 무기력감을 철학적 관점에서 다루며, 이를 자기 성찰과 성장의 기회로 삼으라고 권합니다. 철학자들의 통찰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고, 부정적인 감정을 어떻게 다룰지에 대해 깊이 있는 답을 제시해줍니다.


    사는 게 무기력하게 느껴진다면 철학


    카뮈의 처방전- 부조리 속 반항하는 인간이 되어라

    무의미에 빠지기 쉬운 현대의 환경

    현대의 삶은 무의미함에 빠지기 쉬운 환경이다. 과거에 비하면 과학의 발전으로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만 왜 살아야 하는가? 삶은 어떤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우리는 세상에 보편타당한 진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거와 달리 현대인들은 서로가 서로를 평가하고, 잘하는지 못하는지 지켜보며 견제하게 되었다. 자연의 대재앙으로 재산과 인명 피해가 발생해도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만 한다. 신을 대신한 개인주의, 능력주의는 인간이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야 하는 환경이 되었다.


    게다가 현대사회에서의 죽음이란 삶의 무의미함을 부추기는 도구가 되었다. 우리가 삶을 열심히 살았다고 해도 죽으면 모든 것에 대한 의미가 사라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후 세계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들만 있을 뿐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은 없다. 카뮈는 세상이 인간에게, 삶은 어떤 가치가 있고 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그 어떤 답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삶의 부조리 속 반항하는 인간이 되기

    삶에서 어떤 가치도 느끼지 못하고, 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카뮈는 “반항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인생이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삶이 무의미하고 부조리하더라도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삶에 의미가 없고,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다만 허무하다고 여길 수 있다는 사실에 타협하지는 않는다.


    삶이 의미가 없더라도 삶을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바로 반항하는 인간이 되는 방법이다. 반항적인 인간은 매 순간마다 삶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왜 살아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죽음을 의식하며 살아내는 사람이다. 반항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항상 의식이 깨어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삶의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는 현실을 그대로 바라보면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아니라 삶 그 자체다. 그저 나에게 주어진 모든 순간과 숨 쉬고 있는 모든 것이 내가 집중하고 의식해야 하는 대상이 된다. 카뮈는 “반항은 인간이 자신에게 끊임없이 현존함을 뜻한다”라고 말했다.


    카뮈는 소설 『페스트』의 주인공을 통해서 반항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전염병인 페스트에 맞서 끊임없이 대항하는 의사 리유는, 페스트로부터 구원될 것이라는 기약은 없지만 체념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환자를 치료한다. 인간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페스트라는 전염병에 맞서고, 세상과의 부조리 속에서 리유는 반항하는 것이다. 리유는 페스트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온전히 자신만의 삶을 살아간다.


    카뮈는 “만약 우리가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면, 만약 어떤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만약 우리가 어떤 가치도 긍정할 수 없다면 무엇이든 다 가능하게 되고, 그 어떤 중요한 것은 없게 된다”라고 강조했다. 역설적으로 무의미한 세상에서 인간은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들의 가치가 큰 차이가 없다는 의미다.


    뫼르소를 보면 돈이나 결혼, 승진, 자신이 사형을 당할지도 모르는 재판에서까지 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사회에서 추구하는 개념들에서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그 이유는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 놓인다는 것은 특정 신념이나 물질적인 것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돈이나 명예에 집착하지 않는 이유는 그런 것들에게서 큰 의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를 괴롭힌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에서 나에 대한 우선순위가 매우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한마디 말이 그 사람에게는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개념이나 내가 부여한 의미에서 자유로워지면 이 세계의 무의미함은 나에게 자유를 가져다준다. 따라서 지금 나를 괴롭히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나는 자유로워진다. 자유로워진 상태에서 그저 내 삶을 꿋꿋하게 살아내면 된다.



    윌리엄 제임스의 처방전 - 삶이 살 가치가 있다고 믿어라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은 살아갈 가치가 있을까?

    도대체 무엇이 사람들이 삶을 무의미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일까? 이에 대해 제임스는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에서 말했다.


    “사람들의 주인인 신이 언제, 어디서든 우리와 함께 있다고 믿으며 그분과 소통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세계에서 나타나는 신의 속성은 우리의 기대와 충돌한다. 이 모순으로 인해 우리는 삶 속에서 죽음을 느끼고, 혼란에 빠지게 된다.”


    제임스는 우상, 즉 사람들이 신적인 존재로 추앙하는 것들이 삶을 무의미하다고 느끼게 만든다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신은, 현대사회에서 생각해보면 종교적인 신뿐만 아니라 신의 역할을 하는 다양한 것들이 모두 포함한다.


    사람들은 자기만의 신을 향해 어떤 기대와 바람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에서 신의 역할을 하는 돈이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돈을 많이 벌고 싶다 노동을 하지 않아도 내가 투자한 주식이나 부동산으로부터 매달 내 통장에 돈이 입금되었으면 좋겠다 등 기대감을 갖고 살아가게 한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냉정하다.


    재산을 축적해서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전체의 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출과 이자를 갚으면서 살아가고 있고, 많은 사람이 자신의 재산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돈을 마치 신처럼 숭배시하고 돈이 없다면 당장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돈을 향한 기대가 좌절되는 것은 죽는 것과도 같은 고통을 준다. 심지어 통장 잔고가 마이너스를 향했을 때 더 이상 이 삶을 살아도 괜찮을까?라는 생각까지 갖는다.


    우리의 삶에 대한 미련이 무너지고 무의미함을 느끼는 이유는 우상에 대한 기대와 좌절 때문이다. 여기서 핵심은 믿음의 좌절이다. 믿음의 좌절은 삶의 방향성을 상실하게 하고, 나를 지탱하던 인생의 가치들이 모두 무너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상을 버려야 하는 이유

    우리가 삶의 가치를 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제임스는 “우상을 버려야 한다”라고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에서 말했다.


    나의 삶에서 내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로 내가 집착하고 숭배하는 대상은 무엇인가? 아마 대부분의 경우가 돈, 명예, 사회적 지위 등일 것이다. 이런 대상에 대한 숭배를 그만두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돈을 벌지 말고 지위를 높이기 위해서 노력하지 말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나의 삶을 우상이 지배하게 두지 말라는 게 제임스가 말하는 우상을 파괴하라는 말의 의미다.


    나의 삶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집착하고 숭배하는 대상이 존재하는 한 삶의 의미에는 조건이 필요하다. 돈이 있어야만 삶은 가치가 있는 것이고, 외모가 훌륭해야 삶의 의미가 더 생긴다. 명예나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삶의 가치는 더 높아진다. 반대로 가난하면 삶을 살아갈 의미가 없고, 외모가 부족하면 살아갈 가치가 없는 것이며, 비루한 신분이라면 삶은 반드시 처참해야만 한다.


    이게 바로 우상이 지배하는 삶의 모습이다. 하지만 물질적인 조건들에 대한 숭배를 중단하는 순간 인생의 의미는 인생 그 자체가 된다.


    내 삶을 움직이는 것은 오직 믿음뿐

    제임스는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에서 말했다.


    “삶이 살 가치가 있다고 믿어라. 그러면 그 믿음이 그 사실을 만들어낼 것이다.”


    나의 삶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나의 믿음이다. 물질적인 조건이 나의 삶을 지배하게 두는 이유는 결국 내가 그렇게 믿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라는 것은 내가 무엇을 가졌고 객관적으로 어떤 사람인가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믿느냐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다.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맛보는 것, 이 모든 것들에 삶의 가치들은 구석구석 숨어 있다. 다만 내가 그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나의 평범한 일상에 삶에 대한 믿음이 더해지면, 우리는 삶의 가치를 느끼는 경험들을 하나씩 하게 될 것이다. 아, 이렇게 내가 나 자신을 믿고 삶에 대한 가치를 믿었는데, 이런 경험을 하게 되는구나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삶에 대한 믿음이 강해지고, 불확실한 상황이 와도 다시 용기 있는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긍정적인 인생의 선순환이 만들어져서 결국 나의 삶에 대한 믿음, 가치는 더욱 굳건해질 것이다.



    하이데거의 처방전 - 고유한 나, 본래의 나로 살아라

    삶의 경이로움을 망치는 비교

    우리는 삶의 경이로움을 잘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하이데거는 “인간은 일상적으로 격차에 대한 우려에 사로잡혀 있다”라고 말했다.


    남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내가 어느 정도에 위치해 있는지, 내 위와 아래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는지를 궁금해한다. 팔로워는 몇 명이고 받은 하트 수는 얼마나 되는지도 비교해본다. 돈이나 사회적 지위 등의 가치를 중심으로 타인과 나 사이에 누가 더 나은지 알고 싶어 한다. 그러다가 나보다 비교 우위에 사람들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열등감을 느끼게 된다. 분명 스스로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닐 것이라고 짐작하며 나를 위로해보기도 하지만 또 다른 비교항목을 찾아서 다시 열등감을 느끼기도 한다.


    열등감은 직장 동료, 동네 주민, 각종 모임에서 만난 사람과 같이 나의 주변 사람들을 향하기도 한다. 내가 주변 사람들보다 뒤떨어진다고 느끼면 어떻게든 격차를 줄이고 싶어 한다. 그들이 좋은 아파트에 살고 있으면 무리해서라도 그 정도 수준의 집을 갖고 싶어 하고, 그들의 외제차를 보면 나도 따라서 사고 싶어진다. 반대로 평소에 나보다 잘 살지 못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나의 위치로 쫓아오면 그 격차를 벌리고 싶어 한다. 그렇게 나를 비롯한 우리는 비교의식에 휩싸여서 살아가고 있다.


    하이데거는 세상 사람으로서의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고유하게 자체로 빛날 수 있는 나의 존재가 다른 사람들이 평가하는 대상으로 몰락해버리면 안 되기 때문이다. 평가의 대상이 되면 누군가 나를 인정해야만 훌륭해질 수 있다. 누군가 나를 별로인 사람이라고 평가하면 그 순간 나는 보잘것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사람들은 재산이 늘고 승진을 하는 등 삶에 행운이 찾아온 것 같은 특정 사건이 있을 때만 기쁨을 느낀다. 이 바탕에는 비교의식이 강하게 작용한다. 남들은 가난해지는데 나는 부자가 되는 것 같은 비교 섞인 우월감이 기쁨의 감정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나는 존재 자체로 기쁨을 느낄 수 있는데, 승진이나 돈이 많아야 하는 것처럼 어떤 조건이 발동해야만 삶이 충만해진다고 생각한다. 남들이 원하는 것에 몰입해 자신에 대해서 소홀해지고 결국에는 내 존재를 자꾸 놓치게 된다.


    죽음을 떠올려라

    내 본래의 존재를 온전하게 느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이데거는 죽음이 그 열쇠라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나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나 홀로 감당해야 한다. 죽음은 하나의 탁월한 존재 가능성을 의미하며, 그 가능성 안에서 나의 본래적인 존재가 드러난다”라고 말했다.


    죽음은 오직 나 혼자서 겪어야 하는 경험이다.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죽을 수는 없다. 나 혼자서 짊어져야 하고 죽는다는 것을 나 홀로 받아들여야 한다. 나의 죽음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죽음은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나의 삶에서 반드시 일어나게 될 일이다. 그런 죽음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온전히 나에게 달려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것은 매우 낯선 생각들이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지만 그것이 언제 찾아올지 알 수 없고, 지금 당장 죽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죽음은 그 누구도 겪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죽음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마치 평생을 죽지 않고 살아갈 것처럼 죽음에 대해 잊어버린 채 살아간다. 그러다 갑자기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순간이 찾아온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거나 나의 건강이 악화되는 등 어떤 사건들이 생겨서 내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하이데거는 이런 생각을 죽음을 향해 앞질러 달려가봄이라고 표현했다. 죽음을 향해 앞질러 달려가보면서 나의 본래적인 존재가 드러난다고 말했다.


    내가 영원히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크게 달라지는 것은 시간에 대한 의미일 것이다. 1년 뒤에 죽는다고 생각했을 때 나에게 남은 1년은 지금까지의 시간과는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그동안 나에게 1년이라는 시간은 아무런 의미 없이 지낸 그저 그런 12개월이었을 수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식사를 하고, 아무 생각 없이 출근하고 퇴근하고, 사람들과 무의미한 대화를 나누고, 다시 집에 들어와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든다. 그렇게 흘러가듯이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에 관심을 보이며 따라 하기 급급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1년 뒤에 죽는다면 정말 하고 싶은 것들을 찾고, 남은 시간을 가득 채우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세상에 널려 있는 가치들 때문에 얼룩져서 전혀 보이지 않았던 본래 나의 모습들을 찾게 될 것이다.


    나라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욕망과 생각들로 뒤섞여 있다. 이를 피할 수는 없다. 소셜 미디어나 인터넷, 유튜브에 노출된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욕망을 따라 하기 쉽다. 그래서 본래의 나를 찾아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살아가던 결국 나의 인생에는 완전한 고독에 이르는 죽음이라는 끝이 정해져 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돌이켜보고 기억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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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