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철학은 어렵다. 서양 철학 중에서도 독일 철학은 더욱 어렵고, 특히 니체는 더더욱 어렵다. 니체 특유의 관념적 서술과 비유에 생소한 사람들은 니체가 집필한 원서를 읽어나가면서도 그 내용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해 숱한 미로를 해매기 십상이다. 게다가 ‘니체붐’이 일어나면서 지금까지 수많은 니체의 해설서가 나왔지만, 니체에 대한 다양한 견해와 해석으로 인해 독자들에게 ‘읽기 어려운 책’으로 각인된 것도 사실이다. 그런 현대의 독자들을 위해 독일의 대학교에서 니체 학장으로 있는 스승 밑에서 수학해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이동용 박사가 니체 철학 해설서를 펴냈다. 국내의 독보적 니체 연구자인 이동용 박사는 니체의 핵심 메시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개념과 비유를 해설해주며, 원문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적합한 예시와 적용까지 서술해준다.
■ 저자 이동용
수필가이며 철학자이다. 건국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바이로이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니체 학장인 스승 발터 겝하르트(Walter Gebhard) 밑에서 니체, 쇼펜하우어, 괴테, 포이어바흐, 키르케고르, 바그너, 릴케, 카프카, 헤세 등 실존철학의 계보에 선 이들의 생각을 전수받았다.
현재 철학아카데미에서 니체 사상을 가르치며, 출판교육문화뉴스에서 철학과 문학 등의 분야를 넘나들며 다채로운 주제로 칼럼을 쓰고 있다. 강연과 연구, 집필 활동을 비롯해 철학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간다. 저서로는 『초인 사상으로 보는 인문학』 『니체와 초인의 언어』 『니체, 문학과 철학의 두물머리』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아침놀』 『이 사람을 보라』 『불안의 개념』 『우리에겐 절망조차 금지되어 있다』 『고통과 권태 사이에서』 등이 있다.
■ 차례
지은의의 말. 좋은 어른 되기, 니체를 안내자로 삼자!
1부. 낙타의 단계: 느려도 좋아, 서두르지만 않으면 돼
1장. 사막과 현실: 사막 같은 현실에서도 살 수 있다
학문의 사막에서 하는 정신의 여행
길을 바라보고, 길 위에 머물며, 길에서 길을 묻다
바다를 항해하는 정신의 비행사들
길이 있어도 길이 아닌 미궁 속에서 길을 찾기
나는 불꽃이다, 나는 불꽃임에 틀림없다
선악의 저편으로 불리는 높고 높은 알프스 산골 마을
2장. 인생과 무게: 짊어질 수 없는 짐은 없다
정신이 짊어져야 할 짐
힘으로 합쳐지는 근력과 정신력의 공통점
내 안의 난쟁이들과 천민이라는 짐
방랑자가 그의 그림자와 나누는 대화
내가 오래도록 의지해야 할 나의 다리
극복을 지향하는 경멸자의 경멸
3장. 희망과 동경: 어떤 절망도 나를 쓰러뜨릴 수 없다
쓰러진 게 아니야, 쉬고 있잖아!
내 안으로의 자기 극복
바벨탑을 쌓고 신에게 도전한 영웅 니므롯
도달하기와 넘어서기
삶의 중심을 잡아야 하는 이유
내 집에 머물면 절망하지 않으리라
2부. 사자의 단계: 쇠사슬도 끊을 수 있어, 힘만 있으면
4장. 자유와 책임: 거인은 거친 바위와 함께 탄생한다
자기 의지로 굳게 선 사자의 정신
웃는 사자가 탄생하기를 기다리는 정신
도덕을 분쇄하고 넘어서는 의지의 탄생
자기 자신을 넘어 저편으로 넘어가는 자
인간이 주인이 되는 위대한 정오
우상에 갇힌 정신은 정신이 깨야 한다
5장. 맹수와 자연: 금발의 야수는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다
숲과 원시림 속에서 혼자가 된 나
살아 있고 번성하는 사나운 동물
쉽게 오해될 수 있는 금발의 야수
신을 죽인 후 등장하는 초인
차라투스트라에 맞서 너희 자신을 지키는 것이 도리
신은 부정되지 않았다고 니체가 말한 이유
6장. 욕망과 의지: 시간을 의지로 채우면 인생이 즐겁다
한계가 아니라면 넘어서야 한다
깊음 위의 흑암 같은 바그너를 향한 니체의 진심
죽음 이후에 태어나는 것에 대한 개념적 이해
가장 어려웠던 순간과 가장 고마웠던 순간
높이 오르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
희망은 인간의 것, 나의 것!
3부. 어린아이의 단계: 돌아가라, 차라투스트라의 동굴로
7장. 긍정과 사랑: 모든 긍정은 사랑에서 시작한다
미쳐야 사랑도 할 수 있다
거울 앞에 서야 보이는 신의 얼굴
올라오라, 내가 내려가야 할 조짐이 없으니
별들이 발아래 놓일 때까지 올라가라
날개를 가진 정신
사람을 바로 잡아줄 대장장이는 이 세상에 없다
8장. 바퀴와 인연: 삶의 수레바퀴는 자기 힘으로 돌아간다
망상을 망상으로 바라보는 시선
비극을 떠안으며 대지로 돌아가는 삶에의 의지
굴을 뚫으며 천국으로 향하는 트로포니오스
백발이 되었지만 결코 흉한 노인이 되지 않다
차라투스트라의 동굴이라는 진정한 쉼터
신을 죽인 자가 나서는 길
9장. 영원과 순간: 순간은 과거와 미래를 모두 품는다
거울과 어린아이의 관계
신과 악마는 하나다
순간에 대한 고민과 인식
차라투스트라의 입에 담긴 마지막 대사
끝도 없이 반복하는 질문, “나를 이해했는가?”
행복을 맛본 후에는 스스로 찔러서 터뜨려야 할 심장
맺는말. 저스트 두 잇! 자, 지금부터다!
미주
이동용 박사의 니체 철학 해설서는 니체의 어려운 철학을 쉽게 풀어내, 독자들이 니체의 핵심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원문 해석과 비유를 통해 니체의 철학을 설명하며,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예시도 제공합니다. 니체 철학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자기 실현과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독자에게 유익한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꽤 괜찮은 어른이 되고 싶다면 니체를 만나라
낙타의 단계: 느려도 좋아, 서두르지만 않으면 돼
사막과 현실: 사막 같은 현실에서도 살 수 있다
학문의 사막에서 하는 정신의 여행
학문의 사막에서. 때로는 사막을 여행하는 것과 다름없는 겸허하고 힘든 여정을 가는 학문적인 인간들에게 우리가 철학적 체계라고 부르는 저 찬란한 신기루가 나타난다. (인간)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에 〈환상통〉이 있다. 원제는 판톰슈메르츠(Avantomschmerz)라는 독일어로 가상, 허구의 통증을 말한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자전거를 타고 세계여행을 꿈꾸던 주인공이 어느 날 사고로 한 쪽 다리를 잘라냈다. 그때부터 그는 환상통에 시달린다. 꿈을 잃고 세상을 원망하며 인생의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던 그는,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일어나 피레네산맥으로 향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난다. 한쪽 다리로도 산을 오를 수 있다. 정상인들보다 힘은 들겠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니체에게 사막 이야기는 한도 끝도 없다. 사막에서 시작하고, 사막에 있다가, 사막에서 마감하는 이야기가 니체가 들려주는 돌림노래이다.
혼자, 홀로 걸어야 한다
사람의 삶, 인간의 인생, 존재자의 존재는 모두 같은 말이다. 순우리말에서 한자어로, 그리고 다시 철학적 개념으로 옮겨갔을 뿐이다. 말을 다르게 하면서도 같은 패턴으로 생각할 수 있으면 된다. 헤쳐 모여!를 반복하는 이런 훈련부터 거듭해야 철학이 재밌어진다.
재밌으면 아무 문제 없다. 놀 수만 있다면 인생은 아무 문제 없다. 악마야 놀자! 악마야 함께 여행가자!라고 할 때 악마 같은 그 누군가도 친구가 되는 것이다. 독일 속담에 마지막에 웃는 자가 가장 잘 웃는 자다라는 말이 있다. 그 마지막은 자기만 안다. 누가 옆에서 넌 여기까지!라고 말하면 기분부터 나빠진다. 좋은 말로 인식의 그물을 짜야 한다. 그렇게 짠 그물로 누구는 인생이라는 고래도 낚을 수 있다.
학문이 사막이라면, 행운을 빌고 사막으로 가야 한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사막을 건너는 것과 같다. 사막에는 마실 물도 없고, 길도 없으며, 살아 있는 생명조차 찾기 힘들다. 사막의 부드러운 모래가 발걸음을 무겁게 할 것이다. 이토록 힘들고 삭막한 곳에서 혼자, 홀로 걸어야 한다. 혼자, 홀로! 이것이 니체가 들려주는 끝도 없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인간의 인생은 아무도 도와줄 수 없다.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만이 자기 삶을 통해 자기 자신을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다. 목숨이 두 개라면 하나쯤 희생시키는 것은 쉬울 것이다. 하지만 목숨은 단 한 개뿐이라서 소중하기 짝이 없다. 모든 인생은 단 한 번의 기회뿐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모든 시작은 어렵다. 시작이라는 현실감각을 쟁취하기가 쉽지 않다. 학문이 사막 이라는 이 공식부터 손에 거머쥐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다. 하지만 수학에서도 공식이 이해되면 아무리 숫자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도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것처럼, 철학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 차분하게 공식부터 이해하려는 요량으로 시간을 충분히 보내보자.
경계하고 또 경계하자
1865년, 대학생이 된 청년 니체는 우연히 어느 고서점에 들렀다. 거기서 운명처럼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눈길이 갔으며, 그것을 선반에서 꺼내 손에 들고서 첫 번째 페이지를 펼쳤을 때 그의 귀에는 어떤 정령의 소리가 들렸다. 이 책을 집으로 가져가라. 니체는 이런 귀신의 소리를 들으며 철학의 길을 개척했다.
새로운 소리가 있다. 낯선 목소리가 있다. 햄릿도 귀신의 소리를 들으며 근대의 영웅이 되었다. 다만 그가 비극의 주인공이라는 사실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춰야 한다. 귀신의 소리도 귀신의 소리 나름이다. 햄릿이 들은 소리는 현실을 현실로 보지 못하게 하는 소리였던 반면, 청년 니체가 고서점에서 들은 소리는 그를 불멸이 되게 했다. 별이 되게 한 소리였다.
사막에서 조심해야 하는 것은 찬란한 신기루이다. 햄릿을 맹목적으로 만든 것은 망상이었다. 신기루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사람을 속이는 현상이다. 현상에 휘둘리면 안 된다.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그것이 전부인 양 착각하면 안 된다. 듣고 싶은 것을 들으면서 그것이 사실인 양 떠벌리면 안 된다.
도대체 우리의 눈과 귀는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인생은 죽을 때까지 우리를 속이려 할 것이다. 특히 철학적 체계라는 것에 희롱당하는 일이 많을 것이다. 세상에는 말도 안 되는 말들이 너무도 많다. 스토리텔링에 의해 사실처럼 만들어진 사실이 너무도 많다. 눈을 속이는 일들이 너무도 많다. 그런 일들에 속아서 살다가 인생의 막바지에 이른 정신은 한결같이 차가운 바닥에 쓰러지고 말 것이다.
경계하고, 또 경계하자. 우리의 영웅 이순신 장군처럼 큰 칼 옆에 차고 경계의 끈을 늦추지 말자. 어디선가 들려오는 바람 소리에 놀라서 남의 애를 끊나니. 하는 말이 입에 담길 정도로 긴장감을 지속해보자. 예민해야 한다. 어떤 것도 놓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사자의 단계: 쇠사슬도 끊을 수 있어, 힘만 있으면
자유와 책임: 거인은 거친 바위와 함께 탄생한다
웃는 사자가 탄생하기를 기다리는 정신
보다 지체가 높은 자, 보다 강한 자, 보다 당당한 자, 보다 쾌활한 자, 신체와 영혼에서 올곧은 자를 나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웃는 사자들이 반드시 나타나야 하니! (차라)
기다림을 주제로 한 최고의 작품은 사무엘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일 것이다. 베케트는 이 작품에서 소위 잘못된 기다림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나의 청춘을 관통한다. 유학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연극도, 유학을 마치고 와서 처음 본 연극도 이것이었다. 순진했던 약관의 청년은 럭키를 향해 그 끈을 목에 걸지 마!라고 속으로 외치기도 했다.
무대 위에는 두 사람이 무료한 시간을 보낸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그들이다. 블라디미르는 블라블라 하는 무의미한 말을 연상케 하고, 에스트라공은 고고하는 가라는 말을 연상케 한다. 블라디미르는 모자가 말썽이고, 에스트라공은 신발이 말썽이다.
에스트라공이 말한다. 그만 가자. 블라디미르가 만류한다. 가선 안 되지. 왜? 고도를 기다려야지. 참 그렇지. 잊을 만하면 반복된다.
연극이 끝나갈 무렵 어린아이가 등장해서 고도는 내일 온다고 말하곤 사라진다. 두 사람은 보이지 않는 끈에 묶여버린다.
모든 것을 압도하는 존재의 등장
무대에 등장하지 않으면서도 연극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는 고도라는 이름의 발음은 왠지 모르게 고트 이스트 토트(Gott ist tot)라는 독일어를 떠올리게 한다. 신은 죽었다가 그 뜻이다. 주인공이면서 주인공이 아니다. 신이면서 신이 아니다. 이런 공식이 인식되면, 연극은 재밌어진다. 고도가 신은 죽었다는 뜻일까? 확인할 길은 없지만 무시할 수도 없다.
인간의 실존이라는 상황은 오지도 않는 고도를 기다릴 때 부조리하게 드러나고 만다. 어린아이가 등장해 또다시 내일 온다라는 말을 남기면서 떠날 수 없는 지경을 만들고 만다. 수수께끼 같은 장면이다. 보이지 않는 끈에 얽매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경이 되고 만 것이다. 이런 부조리의 상황은 과연 누구 책임일까?
니체가 설명하고 있는 철학적 기다림은 베케트가 무대 위에서 보여준 기다림과 정반대의 원리로 펼쳐진다. 고도를 기다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니체의 철학적 기다림은 올바른 기다림이다. 그래서 권할 만한 기다림이다.
니체의 철학적 기다림은 웃는 사자를 향한 동경이다. 그는 모든 것을 압도하는 존재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다. 갈퀴로 주변을 장식한 거대한 사자의 얼굴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 채운 태양의 얼굴을 닮기도 했다. 아직도 밝아 오지 않은 수많은 아침놀을 기다리듯이, 그렇게 니체는 사막에서 웃는 사자의 등장을 염원하고 있다. 웃는 태양의 등장이라고 말해도 된다.
웃는 사자는 보다 지체가 높은 자이고, 보다 강한 자이고, 보다 당당한 자이고, 보다 쾌활한 자이고, 신체와 영혼에서 올곧은 자이다. 이런 존재를 니체는 기다리고 있다. 그 존재가 웃는 사자 라는 개념으로 불리고 있을 뿐이다. 개념은 하나이지만, 그 하나의 개념이 의미하는 바는 다양하다. 그것을 깨달으면 되는 것이다.
내가 나를 버리는 과감한 선택
다양한 것은 내용이고, 그 다양한 내용을 아우르는 것이 단일한 형식이며, 그런 형식이 하나의 개념을 형성하게 해준다. 다양성과 단일성은 이 세상 모든 존재에게 적용되는 공식이다. 예를 들어 내가 알고 있는 강(江)도 정말 많다. 고향의 정서와 연결되어 있는 동심 속의 낙동강도 있고, 요즈음 문학과 철학을 아우르려는 의도에서 자주 찾아가는 두물머리도 있다. 그곳에서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진다. 머리가 두 개인 강의 이름이 두물머리이다.
니체는 웃는 사자들이 반드시 나타나야 한다고 말한다. 사자들이라고, 즉 복수형으로 말했다. 단 하나의 사자를 말하고 있지 않다. 나의 나다움은 단 하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지만, 그것은 또다시 수많은 얼굴로 드러나야 한다.
우리 모두는 자기와 자신과 자아를 동시에 지닌다. 자기는 가장 본질적인 개념이어서 깊음 위의 흑암과 같은 심연을 동반하고, 자신은 가장 현상적인 개념이지만 늘 자기를 전제할 때만 안정을 취한다. 우리는 언제나 자기 자신이라고 말하지, 자신 자기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자아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거울을 바라보면서 자아를 확인한다. 우리의 시인 윤동주는 자화상에서 우물 속을 들여다보다가 돌아설 수밖에 없는 미운 사나이를 발견한다. 우물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 사나이는 과연 누구일까? 또한 시인 이상은 『오감도』의 시제 15호에서 거울 속을 들여다보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거울없는실내에있다. 거울속의나는역시외출중이다. 늘 묵상하며 되새김질하자.
어린아이의 단계: 돌아가라, 차라투스트라의 동굴로
바퀴와 인연: 삶의 수레바퀴는 자기 힘으로 돌아간다
차라투스트라의 동굴이라는 진정한 쉼터
이 저녁 휴식을 취하고 잠을 잘 곳이 있었으면 하는가? 그렇다면 저기 내 동굴로 올라가라! (차라)
차라투스트라의 동굴은 늘 신비롭다. 항상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가 차라투스트라의 동굴이다. 언제나 차라투스트라의 동굴은 나의 영원한 숙제로 주어질 뿐이다. 언젠가는 차라투스트라의 동굴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한 권 남겨놓고 싶다. 그 후속편으로 춤추는 별도 남겨놓고 싶다. 일단 이렇게 말을 꺼내 놓아야 앞만 바라보며 나아갈 것 같아서 말부터 꺼내놓는다.
대학생 때부터 좋아했던 철학자들 중에 하이데거도 있다. 그의 명언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는 아직도 나의 영혼을 밝히는 별빛으로 존재하고 있다. 언어는 내가 사는 집을 지어줄 것이다. 내가 사는 곳의 현상은 내가 하는 말에 의해 결정된다. 나는 과연 무슨 말을 하고 사는가? 이런 인식이 주어지면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비로소 깨닫게 된다.
본질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
말로 집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은 말을 하면서도 쉴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하는 말이 결국에는 쉴 수 있는 집을 지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온갖 바람을 맞고서도 바람에 휘둘리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것도 결국에는 말이다. 그래서 니체는 각운이 될 만한 훌륭한 문구들을 백 개 정도 외워둘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렇게 외워둔 문장이 백 개 정도에 도달한 정신이라면 삶에서 어떤 풍파가 닥쳐도 살아남을 것이라고 장담했던 것이다.
저녁은 비유이다. 니체는 끊임없이 하루의 시간을 가지고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새벽, 아침, 오전, 정오, 오후, 저녁, 밤, 한밤중, 그리고 또 다시 새벽, 이런 개념들이 니체의 글을 형성하는 징검다리를 형성해준다. 단 하루에 불과하지만, 그 하루가 인생을 대변한다. 저녁에 이른 정신은 백발에 도달한 사람의 것이다. 저녁이 되면 피곤하다. 이제 대지 위에 누워야 할 시간이다.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눕는 것이다. 우는 것이 아니라 웃는 것이다. 비틀대는 것이 아니라 춤추는 것이다. 눈을 감는 것이 아니라 눈을 뜨는 것이다. 허무의 늪에 빠져 허무해진 것이 아니라 허무로 출구를 찾는 허무주의인 것이다. 신을 죽인 것이 아니라 신을 살린다. 이런 모습을 인식하려면 현상에 휘둘리지 않고 본질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요구된다.
우리는 모두 결국에는 죽어야 한다
하나에 얽매인 정신은 쉴 수가 없다. 그 하나 때문에 먼 곳을 바라볼 수 가 없어서 그런 것이다. 한계를 곁에 둔 정신은 옴짝달싹하지 못한다. 그 한계가 감옥의 벽을 연출해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이 곁에 있다는 말인 임마누엘을 생각하면 자유가 허락되지 않는다. 반대로 한계를 수평선이나 지평선처럼 멀리 둔 정신만이 신선한 바람을 들이마시며 정신의 회복을 만끽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저녁을 맞이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생로병사의 경로를 지나가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마지막에는 죽음이라는 관문을 넘어서야 한다. 아무리 울고불고 난리법석을 떨어도 결국에는 죽어야 한다. 그것이 사람의 목숨이다. 그것이 사람의 한계이다. 그것이 지천명이라 불린다. 쉴 수 있는 곳이 차라투스트라의 동굴이라는 말에는 이런 인식이 담겨 있다. 쉬고 싶으면 차라투스트라의 동굴로 돌아가라! 그곳에서 진정한 쉼터가 마련될 것이다.
* *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