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기다운 모습 그대로 살 때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눈치를 보느라 나다움을 포기하고, 가짜 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타인이 생각하는 ‘잘난 모습’을 기준으로 살고자 하고, 현재의 자기 모습을 부정하려고 하기도 한다. 이런 삶이 행복할 리 없다. 이 책의 저자는 나답게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고 말한다. 나다운 모습은 어떤 것일까? 나도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게 나다운 것인지 모를 수 있다. 진정한 자기 모습을 알고 인정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만나야 하고 마음이 들려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진짜 나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
나답게 살기 위해서는 ‘내가 모르는 나’를 만나 점점 친해져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만 나에게는 낯선 내 모습을 나의 일부분으로 수용할 줄 알게 되는 것이 나를 알아가고 만나는 과정이다. 이 책은 조금은 허무하게 느껴지는 인생에서 나다움을 찾아가는 방법을 알려준다.
■ 저자 박은미
철학커뮤니케이터이자 철학박사이다. 이화여자대학교 졸업 후 동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건국대학교 강의교수와 세종대학교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는 일반인을 위한 철학 저서 집필과 강의에 전념하고 있다. 일반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과 글로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삶의 문제에 철학의 도움을 받도록 안내하는 것, 삶에 닿아 있는 철학으로 일반인과 철학 사이에 다리를 놓는 철학커뮤니케이터가 되는 것이 삶의 목표이다. 네이버 프리미엄 채널 〈일상을 위한 철학〉 운영자로 1만 2,000명이 넘는 구독자와 소통하고 있으며, 국민일보 주말판 기명 칼럼 〈철학쪽지〉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아주 일상적인 철학』 『삶이 불쾌한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를 단독으로 썼고, 『철학, 삶을 묻다』 『미래 인문학 트렌드』 『왜 철학 상담인가』 등의 공저가 있다. 『철학Ⅱ:실존조명』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철학의 역사』 『50인의 철학자』 등을 번역했다.
■ 차례
PROLOGUE - ‘진짜 나’로 살 수 있습니다!
CHAPTER 1 내가 나를 만나다
내가 나를 만나려면 혼자일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은 세상에 던져졌기에 공허감과 고독감을 느낀다
내가 혼자라는 것을 너무 두려워하면
공허감과 고독감을 회피하려고만 하면
인생이 담배 연기보다도 더 허무하지만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분명히 하면
CHAPTER 2 내 마음을 들여다보다
나를 느껴가면서, 나를 알아가면서
마음의 소리를 들으라고는 하는데…
논리와 심리 사이에서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는 것
나 자신을 생각해보게 만드는 물음
내가 어디에서 마음이 상하는지를 알아야
타인의 이중성만 보지 말고 나의 이중성을 볼 줄 알아야
‘날것의 나’를 대면해야 한다
집착과 중독은 인생에 대한 두려움이 원인이다
나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돈이 되는 일 vs. 하고 싶은 일
인간을 본질적으로 충족하는 것
나로 살기에 의미를 추구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성공했을 때가 아니라 자기다울 때 행복하다
본질적인 선택으로 인생을 채워야
과정에서 행복한 일을 찾아야
CHAPTER 3 내가 모르는 나를 만나다
가족이 나에게 미친 영향을 파악해야
나답게 사는 첫걸음, 부모가 내게 미친 영향을 아는 것
복잡한 마음을 들여다볼 줄 알아야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법
나만 모르는 나의 진실을 보려면
자신 안의 소망을 들여다봐야
나 자신의 암묵적인 전제를 파악해야
‘나만 찌질한 건 아니야’라고 믿고 싶은 마음
무의식은 매우 정확하다
내가 어떤 방어기제에 의존하는지 알아차려야
CHAPTER 4 나다움은 찾아 나가면서 만들어가는 것
나를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드는 내적 힘에 따라서
원래의 나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나
내가 원하는 나로 만들어가는
어떤 일을 하며 사는 것이 나답게 사는 것인가
나를 나답게 하는 일
세상의 능력주의에 입각한 판단에 나를 내맡기지 않고
진짜 나와 가짜 나 사이에서
스스로가 스스로를 결정하는 자유로움
자기다움과 인간다움의 관계
EPILOGUE - 모두 나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참고문헌
많은 사람들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사회적 기준에 맞추려 하느라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숨기고 가짜 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다운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고 이야기하며, 진정한 자아를 찾는 방법을 안내합니다.
나답게 산다는 것
내가 나를 만나다
내가 나를 만나려면 혼자일 줄 알아야 한다
10여 년 동안 철학과 심리학 모두를 동원해서 마음의 주인이 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그 수업에서 제가 첫마디로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안 되죠?"라고 물으면 많은 학생이 허탈한 듯 웃음을 지으며 한순간 다 같이 조용해졌습니다. 학생들이 모두 조용해지는 것은 그만큼 그 문제에 관심이 있다는 뜻입니다.
분명 내 마음인데 왜 내 마음대로 안 될까요? 저는 마음의 가닥을 잡지 못해서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의 가닥은 왜 잡지 못하나요? 두려워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두려워하나요? 인간은 혼자인 것을 두려워합니다.
혼자인 것을 두려워하는 인간은 혼자가 아니려고 노력합니다. 혼자임을 잘 누리는 사람이 있는 반면, 혼자임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혼자일 때는 혼자임을 잘 누리고, 누군가 옆에 있을 때는 그 사람과 함께임을 잘 누리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혼자임을 잘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꼭 옆에 누군가를 두려고 하다 보니 눈치 보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자신을 떠날까봐 두려워서이지요. 그러면 관계에 지나치게 매몰되고 관계 자체에 집착하게 됩니다.
혼자일 수밖에 없어서 또는 관계가 불편해서 혼자 있는 것은 혼자임을 잘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경우는 언제든 혼자가 아니기를 바라면서 어쩔 수 없이 혼자 있는 것입니다.
같이 있을 사람이 없어서 또는 관계가 불편하거나 관계에서 자기 기대를 충분히 채울 수 없어서 관계를 포기하는 방식으로 혼자인 경우는 강제로 혼자 있는 것이지 혼자임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임을 누린다는 것은 고독을 즐긴다는 것이고, 한적하고 호젓하게 있을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적하고 호젓해지면 어떤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 느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무존재에 대한 두려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언젠가는 존재하지 않고야 말 것이라는 두려움, 즉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죠.
정적 속에 혼자 있을 때 이 두려움을 강하게 느낍니다. 그래서 보통 텔레비전을 켜놓거나 음악을 틀어놓습니다. 백색 소음이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사용될 정도로 우리는 적적함을 힘들어합니다.
가만히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려면 혼자라는 두려움, 언젠가는 이 삶이 중단될 것이라는 (자기 자신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는) 두려움부터 제대로 느껴야 합니다. 이 두려움을 제대로 의식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는 자신의 책 『불안의 개념」에서 "불안해지는 방법을 올바로 배운 사람은 최고의 것을 배운 셈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불안해질 용기가 없어서 자꾸만 불안으로부터 도망가고 불안을 직면하지 않으려 하는데, 키르케고르는 불안이야말로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는 결정적 징조라고 봅니다. 내가 나이기 때문에 나와 관련한 불안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언젠가는 죽고 만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당혹스러운 진실입니다. 언젠가는 죽고 말 텐데 왜들 이리 악착같이 사는지 의아스럽고 모두 마치 죽지 않을 듯이, 죽음은 자신과 상관도 없다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살고 있다는 사실에 당황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다 보면 나답게 사는 것이 답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모두 나답게 산다는 것이라는 말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런데 나답게 산다는 말은 매우 매력적으로 들리지만 내가 나를 모르니 나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감을 잡지 못해 답답해집니다. 자기 자신을 만나려면 한적하고 호젓하게 자신과 함께 있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혼자 있는 것이 익숙하지 않기에, 혼자라는 것이 두렵기에 누군가와 끊임없이 대화하려 듭니다. 요즘은 카톡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으로 이런 증상이 더 심각해졌습니다. 혼자일 줄 모른다는 것은 곧 나일 줄 모른다는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혼자일 줄 모르면 나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혼자라서 느끼는 적적함 속에서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을 바라는지 느껴보면 그때부터 내 마음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나를 느끼기 시작해야 나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감지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다
나를 느껴가면서, 나를 알아가면서
자신의 잘못된 믿음을 봐내는 눈
인간은 자기 자신은 물론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잘못된 믿음을 놓지 못해 인생을 망치기도 하는 존재입니다. 자신의 잘못된 믿음을 봐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무시한다고 믿는 경우를 생각해보죠. 사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모두 각자 살아가기가 바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굳이 나를 무시할 만큼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도 사실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굳이 누군가가 나를 무시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나를 무시하고픈 마음이 있는 것일 터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나를 무시하고픈 마음이 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대부분 두려움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나보다 못난 사람일까봐 지레 겁내는 두려움입니다. 그런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누군가를 무시하는 데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열등감으로 그러는 것이지 내가 무시당할 만한 사람이어서 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무시하지도 않았는데 무시당했다고 느끼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무시하지도 않았는데 무시당했다고 느끼는 사람은 그만큼 무시당할까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마다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예민하게 반응하는 부분이 다 다릅니다. 대체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자신만의 상처에 있습니다. 문학치료 관련 책으로 전미정 작가가 지은 『상처가 꽃이 되는 순서』에 있는 문장을 읽어볼까요.
사람들은 자신만의 특별한 경험을 가지고 산다. 그리고 특별한 경험은 대개 상처가 남긴 훈장이다. 그래서 학대받고 자란 사람은 버림받느냐 아니냐는 것에만, 콤플렉스를 갖고 성장한 사람은 열등이냐 우등이냐는 것에만,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사랑이냐 아니냐는 것에만 전전긍긍하면서 살아간다. 집착할수록 마음 상하는 일이 적잖이 벌어지는데도 모든 에너지를 거기에 쏟아버리고 만다. 단 한 번도 반성해볼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로.
학대받은 사람은 누군가가 자신을 학대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휘말려 살아가고, 콤플렉스를 갖고 성장한 사람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열등하게 여겨질까봐 두려워하며 살아갑니다.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을 끊임없이 찾습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마다 각각 자기 인생 경험에 따라 맺힌 마음이 다릅니다. 그래서 내가 어디에 어느 정도로 맺힌 사람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맺힌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인생의 과제는 어쩌면 이 맺힌 마음을 풀어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각자의 해석 방식이 경험을 구성한다
우리가 인생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을 구성합니다. 그런데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각자 다르기에 같은 일을 겪는다고 해서 같은 경험을 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각자 해석하는 방식이 경험을 다르게 형성하기 때문이지요.
위 인용문의 마지막 부분 "단 한 번도 반성해볼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로"를 다시 볼까요. 반성은 돌이켜 생각하는 것입니다. 단 한 번도 반성해볼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자기 마음에 딸려 가기 바쁘지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빠져 있어서는 안 된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위 인용문의 나머지 부분을 볼까요?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확인하려 들면 상대방은 가지고 있던 사랑마저 사라지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자신에게 그렇게 집착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상대방에게 집착할수록 상대방이 달아나는 경험을 자주 하게 됩니다. "집착할수록 마음 상하는 일이 적잖이 벌어지는데도"라는 표현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자기 마음을 정확히 모를 때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가져올 행동을 하지 못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경향성에 따라 행동하지만 그 경향성에 따른 행동이 원하는 결과를 가져다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경향성을 파악하고 자기 행동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파악하면서 어떤 행동이 내가 원하는 결과를 가져올지 냉정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하던 대로 하면서 다른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정신병 초기 증세이다"라고 했습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원하는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소망적 사고입니다. 근거 없이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소망적 사고는 문제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경향성에 따라 행동하며 원하지 않는 결과가 나옴으로써 만족스럽지 못한 삶을 살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도록 행동을 조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을 고쳐보려 노력하지만 어느새 옛날로 돌아가 있는 자신을 보면서 실망하는 때가 많은 것이 우리 경험입니다.
자신의 경향성을 거스르기는 어렵습니다. 자신의 경향성 중 어느 경향성을 따라야 하고 어느 경향성을 따르지 말아야 하는지도 판단하기 어렵 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자기가 되기 위해 따라야 할 경향성과 거슬러야 할 경향성을 잘 파악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거슬러야 할 경향성 중에는 그 사람이 가지게 되는 잘못된 믿음의 패턴이 있습니다. 사실 어떤 잘못된 믿음을 가지는 경향성이 있는지가 그 사람을 특징짓습니다. 이 잘못된 믿음을 가지는 경향성이 그 사람의 심리적 특징, 무의식적 특징입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면 자신의 심리적 특징과 무의식적 특징을 느끼고 알아가게 됩니다.
내가 모르는 나를 만나다
나만 모르는 나의 진실을 보려면
내 잘못은 내 눈에 안 뜨이고, 내 약점은 내 눈에 안 보인다
세 사람이 같은 말을 하면 들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하는 말이면 그 사람이 특이해서 내지는 나를 누르려는 왜곡된 욕구 때문에 하는 말일 수 있지만 세 사람이나 똑같이 말한다면 거기에는 진실이 있을 것이라는 경험에서 우러난 말인 듯합니다.
타인의 말에는 나에 관한 진실이 들어 있습니다. 열등감이 많은 사람은 나를 깎아내리는 방식으로 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적절하지 않은 방식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저런 말이 가능한 이유는 뭘까? 나의 어떠한 측면이 저런 식으로 트집 잡는 것을 가능하게 할까?를 생각해보면 내가 보기 힘든 나에 관한 진실을 보게 됩니다. 이상한 사람을 만나서 기분이 나빠졌는데 이 일로 내가 얻는 게 없다면 그게 더 속상한 일입니다.
중요한 점은 내 잘못은 내 눈에 안 뜨이고, 내 약점은 내 눈에 안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진실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이든, 나를 깎아내리려고 하는 말이든 거기에는 나에 관한 어떤 진실이 들어 있습니다. 그걸 봐내고 귀기울여 들어내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나를 내세우는 마음을 조금 잠재우면 이걸 봐내고 들어낼 수 있습니다.
마음을 들여다보려면 나는 지금 왜 이렇게 생각하지?" 지금 나는 어떤 마음이지? 내 마음이 이런 이유는 뭘까? 하는 질문을 습관적으로 해 보면 됩니다. 우리의 뇌는 물음을 제기하면 그 물음에 답을 찾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내가 기분이 나빠지는 이유를 살피면 나 자신을 더 알게 됩니다. 누군가가 무시해서 기분 나쁘다는 의식을 한다면 나는 그만큼 존중받고 싶은 것입니다. 누군가가 그야말로 준 것 없이 꼴 보기 싫다면 그 사람은 나의 무의식적 열등감을 자극하는 사람입니다. 이 경우 나는 그 사람의 무엇이 부러운지 생각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나의 무의식적 소망을 더 들여다보게 되니까요.
타인과 대화하면서 내 부족한 생각을 살펴보게 된다
생각하지 않으면 문제가 반복되기에 철학하는 저로서는 생각을 조금 더 하자고 주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이나마 더 좋은 생각을 해서 문제를 조금이나마 더 해결해갈 수 있다면 좋을 테니 말입니다. 생각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지만 좋은 생각이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해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냥 두면 심사숙고하기 어렵더라도 적절한 자극을 주면 생각을 더 하게 됩니다. 적절한 자극은 타인과 대화하거나 책 등에서 정보를 입력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옆 사람이 뭐라고 하는 것만 싫다고 느낍니다. 누구나 자신이 한 일을 두고 뭐라고 하면 싫지요. 그래서 직장 상사가 힘든 것 아니겠습니까? 늘 내가 한 것을 두고 평가하고 비판하니까요. 이 경우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은 반대로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다르게 생각하기는 내가 일처리가 완벽했으면 그 상사는 나에게 지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것과 같은 생각입니다.
우리는 옆 사람이 잔소리한다고 생각하지만 옆 사람으로서는 내가 잔소리하게 만드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옆 사람으로서는 알아서 잘해서 입 아프지 않게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싶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진실일까요? 아무도 진실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나에게는 잔소리하는 그 사람이 야속할 뿐이고, 상대방으로서는 잔소리하게 만드는 내가 야속할 테지요.
직장 상사의 지적을 두고 꼰대질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편리해지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인지, 미래의 나를 위해 좋은 해석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설사 상사가 너무 세밀해서 피곤하게 느껴질지라도 그 상사조차 잔소리를 못 하게 일 처리를 해보겠다는 생각은 내 발전을 위해 좋을 수 있습니다. 상사는 내가 모르는 가능성이나 위험을 생각할 테니까 말입니다.
타인의 말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나만 모르는 나에 관한 진실에 닿을 수 있습니다.
나다움은 찾아 나가면서 만들어가는 것
나를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드는 내적 힘에 따라서
나다움이라는 말은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내가 나인데도 내가 나를 파악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나다움이 고정된 것이 아니기에 더욱더 그러합니다. 인간은 호박씨에서 호박이 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성장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미리 어떤 존재가 될 것이라고 결정된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영국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인간의 본성이란 어떤 틀에 따라 만들어져 미리 정해진 일을 정확하게 하게 되어 있는 기계가 아니다. 자신을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드는 내적 힘에 따라서 모든 면에서 성장하고 발전하려고 하는 나무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인간은 의식적으로 자기 존재 방식을 결정하고 그리로 나아가도록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밀이 말하는 자신을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드는 내적 힘은 나를 나이게 하는 힘에 해당합니다. 나에게는 나를 나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인간, 정향력을 가진 소용돌이
인간은 정향력을 가진 소용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야스퍼스 철학에서 힌트를 얻어 제가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정향력은 방향을 정해 나갈 수 있는 힘입니다. 나 자신은 나 자신에게조차 분명하고 투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지요. 나는 어떤 소용돌이처럼 계속 움직이며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소용돌이는 내가 나답게 행동하면 확신의 신호를 보내고, 내가 나답게 행동하지 않으면 거부의 신호를 보냅니다. 그래서 그 신호를 통해 우리는 점점 자신을 배우게 됩니다. 나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어떠한 경향성을 지닌 존재인지를 배우게 되는 것이죠.
그렇기에 일이든 인간관계든 경험을 해나가면서 자기 자신에게 지속적으로 묻고 자기 자신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이 일은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지? 나는 이렇게 해석되는데 남들도 그렇게 해석하나? 가능한 다른 해석 방식으로는 뭐가 있지?" 등의 질문으로 자신의 경향성을 의식해 나가는 것입니다.
나답다는 것이 미리 결정되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어떤 때는 편안함을 느끼고 어떤 때는 불편함을 느낄 뿐입니다. 내가 경험하는 것이 나라는 소용돌이의 결에 맞으면 바로 이거야 하는 확신이 들고 결에 맞지 않으면 이건 무언가 아닌데... 하면서 불편해집니다. 내가 어떤 때 편안하고 어떤 때 편안하지 않은지를 경험해가면서 자신의 경향성을 파악해나가야 합니다. 소용돌이의 결에 맞는 행동을 할 때 나는 생기발랄해집니다. 스스로 살아 있다고 느끼지요. 이것이 바로 이거야 라는 확신의 신호입니다. 지금 내가 나답다고 느끼게 되는 그런 신호이지요. 살다 보면 자기 자신이 마음에 드는 그런 순간이 있습니다. 그런 순간을 많이 경험하면서 살 때 행복합니다.
야스퍼스가 인간을 알 수 없는 심연이라 했습니다. 알 수 없는 심연의 그 근원을 실존적 핵심이라고 합니다. 실존적 핵심은 나라고 할 때 내가 느끼는 저 근원의 나를 말합니다. 야스퍼스는 이 실 존적 핵심을 두고 밝혀지지 않은 어두운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이지만 자기 자신을 가장 잘 모르는 상황을 잘 말해주는 표현이지요.
밝혀지지 않아 어둡기에 근원적인 나 자신을 직면하기는 어렵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타자처럼 인식하는 것(다른 사람이 나를 보듯 내가 나를 보는 것)은 근원적으로 불가능하니까요. 그렇지만 우리는 아주 중요한 순간, 저 깊은 곳의 내가 말하는 소리를 마음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거야라는 확신의 신호는 나를 그 방향으로 더 나아가게 해주고 이건 무언가 아닌데의 미제의 신호는 나를 그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이 소리를 잘 들어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그 소리를 거역하면서 자신의 생각으로 자신을 밀어붙이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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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