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뜬구름 잡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니체에게 배우는 ‘자존감 키우는 기술’은 가치 있는 인생을 사는 데 필요한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 40년 동안 니체를 읽어온 ‘니체 애독자’ 사이토 다카시는 자존감이 낮아지기 쉬운 지금이야말로 니체를 꼭 읽어야 한다며 이 책을 집필했다. ‘신의 죽음’, ‘초인’, ‘아모르 파티’, ‘힘에의 의지’, ‘영원 회귀’ 등 니체 철학의 주요 개념들을 소개하면서, 타인과 나를 비교하거나 타인의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진정 나다운 모습으로 살아가는 방법들을 제시한다.
■ 저자 사이토 다카시
니체를 40년 넘게 읽어온 니체 애독자. 저자는 자신이 가르치는 대학생들에게 매년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감동과 도전을 불러일으키는 글을 골라 자신의 경험과 연결해 이야기하는 과제를 내고 있다. 니체의 글은 150년 전에 등장했지만, 어느 때보다 지금 이 시기에 니체를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 이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
1960년 일본 시즈오카에서 태어나 도쿄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했다. 졸업 후 동 대학원에서 교육학 박사 과정을 마치고 현재 메이지대학교 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교육학, 신체론, 커뮤니케이션론 등을 바탕으로 통찰력 있는 글과 강연을 선보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어려운 지식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탁월한 능력으로 수천만 독자를 사로잡은 일본 최고의 교육 전문가이자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다. 특히 다수의 저서가 한국에 소개되어 국내 독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일류의 조건』, 『지적인 어른을 위한 최소한의 교양 수업』, 『요약이 힘이다』, 『50부터는 인생관을 바꿔야 산다』, 『혼자 있는 시간의 힘』,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내가 공부하는 이유』, 『단독자』, 『어른의 말공부』, 『잡담이 능력이다』, 『독서는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등이 있으며, 총 누적 판매 부수가 1,000만 부를 돌파했다.
■ 역자 황미숙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들이 계기가 되어 시작한 일본어로 먹고사는 통번역사. 늘 새롭고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즐거움과 깨달음을 얻고, 항상 설레는 인생을 꿈꾼다. 경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 일본어과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번역 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 출판기획 및 일본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역서로는 사이토 다카시의 『단독자』, 『어른의 말공부』, 『책 읽는 사람만이 닿을 수 있는 곳』, 『인생을 바꾸는 듣는 법 말하는 법』, 『타임 콜렉터』 등이 있고, 이 밖에도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진작 이렇게 말할걸』, 『돈을 부르는 말버릇』, 『횡설수설하지 않고 정확하게 설명하는 법』, 『백만장자 아웃풋』 등 다수가 있다.
■ 차례
추천의 글
들어가는 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니체’라는 극약 처방
제1장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라
1. 나를 사랑하는 기술
자신의 단점을 일부러 찾아내는 ‘무한 루프’에 빠진 사람들
‘나를 사랑하는 기술’을 어떻게 배울 것인가?
지금이야말로 자화자찬력을 갈고닦을 때
2. 가장 먼저 나를 사랑할 것
3. 또 하나의 나
프로이트와 니체는 하나로 통했다
나는 언제나 내 편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도 각오하면 용기가 샘솟는 법
4. 인생은 축제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축복하라
제2장 스스로 고독을 선택하라
1. 고독으로의 도피
고독이란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최고의 환경
현대인이여, ‘단독자’가 되어라!
2. 멀리 있는 별
서로를 격려하고 높이는 ‘별들의 우정’
슈퍼스타를 동경하고 사랑하라
3. 소수파의 고뇌
새로운 가치를 무너뜨리려는 ‘동조 압력’에 굴복하지 말라
4.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다
‘몸의 감각’으로 세계를 파악하라
짧은 시 지어보기
5. 친구
자기 생각이 없는 사람은 친구로서 매력이 없다
노예적 정신, 전제자적 정신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6. 최선의 적
우정이란 ‘필사적인 싸움’이다
“선비는 사흘 만에 만나면 눈을 비비고 볼 만큼 달라져야 해”
‘진실한 말’로 이어지는 친구만큼 훌륭한 친구도 없다
7. 동정과 우쭐함
동정이라는 이름으로 업신여기고 있지 않은가
동정이 상대방의 힘을 빼놓을 수도 있다
제3장 말인이 아닌 초인이 되어라
1. 신의 죽음
과학이 ‘신이 없는 세계’를 창조하기 시작했다
신의 존재가 인간의 성장을 방해했다
2. 낙타, 사자, 어린아이
3. 자기를 열다
셀카만 찍는 사람이 잃어버린 것들
자신을 도외시하면 멋진 세계가 눈에 들어온다
4. 질투심의 극복
질투의 끝은 비극
비교하려면 과거의 나 자신과 비교하라
불타오른 질투의 불길을 끄는 방법
5. 내장 최강
내장에는 ‘삶에의 의지’가 가득하다
중요한 것은 모두 육체에 물어보라
6. 초인
초인을 목표로 하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
무언가를 한 뒤에 얻는 것이 있으면 된다
제4장 높은 곳을 지향하라
1. 행복
고민과 고통이 없다면 행복한 인생일까?
“내 자식들은 가까워”이 말의 의미는?
2. 발견과 발굴
가까이에 있는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라
역풍이 불어도 순풍으로 바꾸면 그만!
3. 인생에 감사하라
자신의 인생에 감사하며 죽음을 받아들이다
니체의 말투는 전염된다?
4. 재능의 싹
스스로에게 희망을 물어라
꿈을 실현하는 도구로 인터넷을 활용하라
5. 진정한 자유
자유로부터 도망치고 있지 않은가?
6. 파괴와 창조
파괴가 없으면 창조도 없다
제5장 지금 이 순간을 살라
1. 과거를 전부 긍정하라
모든 것은 반복된다. 그러니 모든 것을 긍정하라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영원이므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여라
2. 존재의 수레바퀴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겨라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를 사랑하라
3. 최고의 죽음
죽음의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각오
4. 힘에의 의지
‘힘에의 의지’를 실감해보는 방법
욕심을 갖는 것이 좋다
5. 공격적인 용기
부조리의 영웅 시시포스
운명에 맞서라!
한순간을 영원으로 여기는 감성
나오는 글: ‘북극성’과 같은 니체의 말
현대 사회에서 가짜 자존감이 판치는 상황 속에서, 니체의 철학을 통해 진정한 자존감을 찾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사이토 다카시는 니체의 주요 개념을 소개하며, 타인과 비교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긍정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니체의 자존감 수업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라
나를 사랑하는 기술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는 기술을 부단히 배우고 익혀야 한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은 니체 사상의 핵심입니다. 니체의 시대에는 신의 존재가 압도적으로 컸습니다. 인간은 신을 가장 뛰어난 존재로 설정하고 자신들은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존재로 비하하기 십상이었지요.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을까요? 세상에는 신은 사랑할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은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니체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지요.
오늘날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신은 아니지만 능력, 외모, 경제력 등 뛰어난 존재를 자기 자신의 수준을 인식하기 위한 비교 대상으로 설정해놓고 굳이 스스로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의 단점을 일부러 찾아내는 무한 루프에 빠진 사람들
예컨대, 외모 콤플렉스가 그렇습니다. 자기 얼굴이나 몸에 자신감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남녀 상관없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얼굴 하나만 하더라도 얼굴 살이 처져서 싫다. 얼굴이 너무 크다. 피부가 어두워서 마음에 안 든다. 눈이 작아서 별로다. 코가 낮아서 마음에 안 든다. 턱이 길어서 별로다 등등. 얼굴 전체에서부터 눈, 코. 입 하나하나까지 마음에 안 드는 곳을 꼽자면 의기소침해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이들에게는 이상적인 얼굴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그것과 비교하면서 내 얼굴은 별로다. 이것도 저것도 마음에 안 든다는 식으로 자기 혐오감이 강화되는 듯 보입니다. 아마 성형을 통해 신경이 쓰이는 부분을 고친다고 하더라도 만족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또 거기서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찾는 게임처럼 무한 루프에 빠져버립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요?
역사를 거슬러 생각해보면 원흉은 바로 거울입니다. 거울이 등장한 시점부터 인간은 자존감을 떨어뜨릴 위험에 노출된 것입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내가 이렇게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나? 하고 깨닫게 된 것이지요. 그러면서 남들 앞에 맨얼굴을 보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 들이 역사상 적지 않았을 듯합니다.
시대가 흘러 카메라나 비디오가 등장하고 자신의 얼굴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는 점점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SNS 시대인 오늘날은 그것이 더욱더 심해져 하루에 몇 번이라도 스마트폰으로 셀카를 찍는 것이 당연해졌습니다. 이렇게 온종일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다 보면 아무래도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눈에 띕니다. 그러다가 셀카로 찍은 얼굴을 바꾸는 사진 보정 애플리케이션도 등장했습니다. 한번 보정해보니 멈출 수 없다는 젊은이들이 급증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더러는 자신조차 보정하지 않은 자신의 얼굴은 못 알아보겠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식이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단순히 자존감이 낮아지는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 자체는 향상심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너무 지나쳐 자기 혐오감과 한 세트가 되면 문제입니다. 자신을 지나치게 부정한 나머지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기술을 어떻게 배울 것인가?
요한 페터 에커만의 괴테와의 대화에서 괴테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문학가를 지망하는 청년 에커만이 괴테와 이야기하며 인생에서 중요한 것을 기록한 이 책을 니체는 무척이나 좋아했고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책을 통해 자신을 사랑하는 기술이 중요하다라는 니체 사상의 핵심이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인간은 유소년기에는 전능감으로 넘칩니다. 근거 없는 자신감, 즉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죠. 슈퍼맨이 된 기분으로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다가 다리가 부러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아, 나는 슈퍼맨은 될 수 없구나 하며 현실을 깨닫곤 합니다.
어른이 되면서 이러한 자신감 상실 체험이 늘어나는 한편,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대로 두면 스스로 자신감을 느끼지 못하게 되니 의식적으로 그 흐름을 끊어주어야 하는데요. 즉, 자신을 사랑하는 기술을 배워야만 합니다. 그것이 니체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나 자신을 사랑하는 기술을 어떻게 익힐 수 있을까요?
지금이야말로 자화자찬력을 갈고닦을 때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매일매일 몇 번이고 자기 자신을 칭찬해주면 됩니다. 칭찬의 포인트는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일단 다른 사람들의 평가는 제쳐둡시다.
예를 들면 사진 잘 찍었네. 나 참 센스 있다. 노력은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다고 했어. 이 노래를 열심히 연습해서 나의 십팔번으로 만들 거야, 이번 프레젠테이션 자료는 완성도도 높고 특히 이 부분은 정말 잘했어. 난 글 좀 잘 쓰는 것 같아, 이번 달에는 책 다섯 권 읽기 달성! 교양인의 자리에 한 걸음 가까워졌네라는 식으로 매사에 자신의 말과 행동을 칭찬하면 됩니다.
저는 자화자찬을 적극 권장하지만 여기서도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갖지 못한 것에 매달리는 일입니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추구해봐야 허무할 뿐이니까요. 니체도 『즐거운 학문』 이라는 책에 이렇게 썼습니다.
네가 서 있는 곳을 깊이 파내라!
그 밑에는 샘이 있다!
어리석은 인간들이 외치도록 내버려두라.
“아래로 가면 지옥뿐이다!”라고 외치더라도 말이다.
-니체, 『즐거운 학문』
"남들을 부러워하기보다는 나만이 따로 할 일이 있지 않을까? 발밑을 깊이 파보면 거기에는 보물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니체의 이런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나에겐 아무것도 없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발밑을 파서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발굴해야 합니다. 지금의 인간관계가 시시해 불만 인 사람은 그래도 이런 인간관계라도 없어지면 외로울지 몰라라며 마음을 고쳐먹어야 합니다. 자신이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 이미 하고 있는 일에 빛나는 무언가가 숨어 있을지 모릅니다. 깊이 파볼 가치가 충분합니다.
마지막으로 니체의 말 한마디를 더 소개하겠습니다.
일부러라도 그대들 자신을 믿는 것이 좋다!
그러지 않으면 어떻게 남들이 그대들을 믿겠는가!
자신을 믿지 못하는 자는 언제나 거짓을 꾸민다!
-니체, 『니체 전집』
자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나 남에게 거짓된 자신을 연기할 수밖에 없으므로 누구에게도 신뢰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스스로를 믿을 수 있게 됩니다.
말인이 아닌 초인이 되어라
신의 죽음
도대체 이럴 수가 있는가?
저 늙은 성자는 숲속에서만 살아서
신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아직 듣지 못했구나.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서설에 나옵니다. 서른 살에 고향을 버리고 산에 들어간 차라투스트라가 질릴 틈 없이 고독을 만끽한 10년이 지나고 갑자기 산에서 내려갈 결심을 합니다. 그는 과도한 빛을 자신에게 쬐어준 태양을 향해 이렇게 선언합니다.
보라. 나는 지금 너무나 많은 지혜를 갖고 있다.
꿀벌이 너무 많은 꿀을 모은 것처럼.
나는 나를 향해 뻗는 여러 손이 필요하다.
나는 내가 소유한 것을 주고 서로 나누리라.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산속에서 얻은 지혜를 아낌없이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겠다고 생각하며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도중에 숲속에서 만난 노인에게서 "인간들이 있는 곳에 가지 말라. 숲에 머물라"라는 말을 들었지만 개의치 않았습니다. 노인과 헤어진 후 마음속으로 중얼거린 것이 앞에 나온 말입니다. "당신은 숲속에서만 살아서 아직 듣지 못했단 말인가? 신은 죽었다."
"그렇다면 차라투스트라는 누구에게 들었단 말인가?" 하고 되묻고 싶지만, 일단 그 부분은 제쳐두기로 합시다. 어쨌든 "신은 죽었다"라는 한마디를 덤덤히 말했지만, 당시에는 전 세계적으로 충격이 상당했습니다. 인간과 세계를 창조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기독교가 지배하는 세계는 근본부터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과학이 신이 없는 세계를 창조하기 시작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말한 배경에는 과학의 발전이 있습니다. 당시 기독교에서는 신의 존재를 위협하는 과학적인 사실이 존재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 전형적인 예가 바로 지동설이지요. 니체가 태어나기 약 300년 전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제기했고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그것을 이어받아 발전시켰습니다. 갈릴레오는 1564년에 태어났으니 1844년에 태어난 니체보다 280년 전에 등장한 셈입니다.
지금은 지동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주 어린 아이조차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중세 유럽에서는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있고 그 주위를 태양과 행성들이 돈다는 천동설을 믿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이 세계를 만들었다는 신화적 사실에 반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탓에 갈릴레오는 종교재판에 회부되었고 이단으로 단죄되었습니다.
니체보다 서른다섯 살 많은 다윈도 기독교에 충격을 안긴 과학자 중 한 사람입니다. 기독교적으로 보면 인간은 신이 창조했는데, 진화론을 주장한 다원은 공통의 선조로부터 변이와 자연선택을 통해 생물이 진화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단순화시켜 말하면, 생물은 아주 단순한 원시 생물에서 진화했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신에 의해 하나하나 창조된 것이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1925년 미국의 테네시주에서는 진화론 금지법이 제정될 정도로 저항이 강했지만,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세계관은 결국 붕괴되었습니다. 과학자들이 새로운 세계관을 제기함으로써 기독교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붕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신의 존재가 인간의 성장을 방해했다
물론 기독교는 지금도 많은 사람의 신앙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현 시대에도 사람들 마음의 안식처로서, 또 마음의 혼란을 받아주는 곳으로서 존재감과 매력이 여전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과 인간을 신이 창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었습니다. 이때 니체가 나타나 기독교가 인간을 억압하고 있다. 거기서 해방되어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을 되찾아야 한다. 신은 이미 죽었다고 선언해버린 것입니다.
신이라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차피 인간 따위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위축됩니다. 무언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려는 의욕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결과적으로 인간의 성장을 방해받는다고 주장한 것이지요. 세계관을 다시 쓰는 일대의 사건을 니체는 너무나 도 간단히 해낸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목사의 가정에서 태어난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공언한 일은 목숨을 건 도전이었습니다.
현실에서 보면 신적인 존재를 믿음으로써 힘이 생기기도 합니다. 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창의적이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것은 이 세상에 절대적인 존재는 없다. 그런 존재가 없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주눅 들지 말고 자신의 생각 그대로 자유롭게 살라는 메시지입니다. 고개를 떨군 채 하루하루를 보내기보다는 당당하게 등을 쭉 펴고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길 바랍니다.
높은 곳을 지향하라
진정한 자유
자유로부터 도망치고 있지 않은가?
인류는 예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 투쟁해왔습니다. 자유로운 말과 행동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역사를 움직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자유를 손에 쥐면 무엇을 하면 좋을지 몰라 당혹스러워하는 경우가 자주 생깁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무엇을 위한 자유인지 생각해보지 않은 데 있습니다. 게다가 무언가에 속박당하거나 제한되는 것이 더 편한 부분이 있기도 한 탓입니다.
자유란 자신이 생각하고 욕망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매우 좋습니다. 다만 행동에는 반드시 책임이 뒤따르는 법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누군가 또는 무언가의 탓으로 돌릴 수 없습니다. 권위주의라는 것이 존재하듯이, 특히 약한 인간은 권위에 몸을 맡기는 편이 더 편합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저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대심문관」이라는 장에도 이와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카라마조프가의 차남 이반이 삼남 알료샤에게 무신론에 관한 이야기를 펼치는 장면이 압권입니다. 이반은 혁명을 계획하는 무신론자이고, 알료샤는 제2의 그리스도가 될 가능성을 품은 청년입니다.
이반은 예수가 다시 태어나 이 세상에 재림했다는 설정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갑니다. 이야기 속에서 예수를 상대로 나이 든 대심문관이 "네가 인간에게 자유를 부여한 결과 어떻게 되었느냐?"라며 다음과 같이 일방적으로 떠들어댑니다.
"마지막에는 그들이 우리 발밑에 자유를 내맡기고 차라리 노예로 만들어달라, 그리고 먹을 것을 달라고 말하게 되겠지."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라고 말한 예수에 대한 안티테제입니다. 즉 사람은 자유보다도 빵을 원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나아가 대심문관은 말합니다.
"자유의 몸으로 살게 된 인간에게 한시라도 빨리 복종해야 할 대상을 찾아내는 일만큼 끊임없고 번거로운 수고는 없을 테니까. ··· (예수는) 인간의 마음의 왕국에 자유의 고통이라는 짐을 영원히 지워주고 만 것이다."
듣고 보니 자유에는 고통스러운 일면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권위 앞에 복종하고 때로는 독재자에게 몸을 맡겨버리는 것도 자유를 내던지고 편안해지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정말로 자유를 원하는가라는 기독교의 근간을 묻는 이 장면은 니체의 사고방식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어쨌든 자유는 도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유를 생각할 때는 니체의 말을 떠올리고 이렇게 자문해보세요.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
지금 이 순간을 살라
존재의 수레바퀴
일체는 가고 일체는 되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돌아간다.
일체는 죽고 일체는 다시 꽃 피운다.
존재의 해는 영원히 되풀이된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벚나무는 매년 봄이 되면 벚꽃을 피웁니다. 하지만 활짝 피자마자 지기 때문에 일주일만 지나도 꽃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다음 해도, 그 다음 해도. 10년, 20년. 100년 뒤에도 동일한 일을 반복합니다. 꽃은 져도 벚나무의 존재 자체는 생명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활기차게 살아가는 것은 모두 이 벚꽃과 같습니다. 인간 역시 개개인은 죽지만 인류의 존재는 침팬지 등의 유인원에서 분기된 순간부터 헤아려보아도 600만~700만 년 동안 존재의 수레바퀴가 돌아가고 있습니다.
지구가, 또는 우주가 가루가 되어버린다면 존재의 수레바퀴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시간은 매우 깁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영겁의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를 사랑하라
존재의 수레바퀴를 의식하면 사소한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조금 힘든 일이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것이라고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일에도 커다란 확장이 일어납니다. 긴 시간의 흐름에 흔들리는 일체의 존재와 그들의 생명을 위한 활동이 사랑스러워지며 거기에 자기 자신도 함께 포함된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신약성경』에 나오는 한 알의 밀알처럼 자신을 포함한 존재의 수레바퀴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요한복음」에 이렇게 나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신약성경」 「요한복음」 12장 24~26절
이것은 예루살렘의 수도에 들어선 예수가 자신을 적대시하는 바리새과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알고 제자들에게 한 말입니다. 예수가 말한 한 알의 밀은 바로 자기 자신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인류를 구원하고, 예수를 섬기는 자는 자신이 죽은 뒤에도 늘 자신과 함께하며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유한한 생명을 바치는 것이 후세와 인류에 풍요로운 결실을 가져온다고 본 것입니다. 이처럼 넓은 시야를 갖고 자신의 생명을 바라보면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를 축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은 이렇듯 폭넓은 시야 속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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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