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읽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철학 교과서
 
지은이 : 네오고등유민 (지은이), 김정환 (옮긴이)
출판사 : 시그마북스
출판일 : 2024년 11월




  • 고대부터 현대까지 각 시기를 대표하는 총 60인의 철학자를 소개하면서 그들이 품었던 의문의 역사를 하나의 스토리로 엮어 철학사 전체의 흐름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돕습니다.


    한 번 읽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철학교과서


    [고대] 자연철학 vs 형이상학

    탈레스: ‘만물의 근원은 물’이 철학인 이유는?

    탈레스를 최초의 철학자라고 부르는 일반적인 이유

    탈레스는 서양 철학의 역사에서 최초의 철학자로 유명하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이라는 책에서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일반적인데, 이 책에서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간 이야기를 소개하겠다.


    탈레스 본인이 한 말은 현재 단 한마디도 남아 있지 않다. 후세의 보고를 통해서 “만물의 근원은 물 = 세계의 근본은 물이다.” 라는 주장이 탈레스의 학설로서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 밖에 “무생물에도 혼이 있다.”, “우주는 살아 있으며, 신들로 가득하다.” 등도 그의 학설로서 전해지고 있다.


    탈레스를 기점으로 인간의 새로운 삶의 방식이 시작되다

    탈레스를 기점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지가 시작되었다. 그것이 바로 ‘이오니아 철학’으로 불리는, 자연의 근원 또는 원리를 탐구하는 사색이다. 현재 초기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일화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데, 어떤 철학자에 관해서든 경의와 비아냥거림, 이해와 몰이해가 뒤섞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탈레스의 제자인 아낙시만드로스는 ‘원리’라는 말을 역사상 처음으로 사용했고, 그것을 ‘무한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의 제자인 아낙시메네스는 ‘세계를 감싸고 있는 공기’가 자연의 근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다 이윽고 이 자연철학의 흐름과는 별개의 철학, 다른 인간의 존재 방식이 등장한다. 그것이 바로 피타고라스에서 시작된, 초월적인 원리를 이야기하는 형이상학이다.


    헤라클레이토스: ‘철학’에 대한 최대· 최강의 비판자

    철학을 가짜라며 부정하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역사상 최초로 철학을 비판한 인물이다. 앞에서 ‘철학’이라는 말을 만들어 낸 사람은 피타고라스라고 말했는데, 헤라클레이토스는 그런 피타고라스를 눈엣가시로 여겼다.


    당시 피타고라스는 매우 박학다식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헤라클레이토스는 그를 “박학다식이 지혜를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 “가짜 박학다식”이라며 부정했다. 피타고라스가 말하는 ‘철학(지를 사랑함)’은 여러 가지 사항에 관해 지식을 얻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것은 진정으로 인간을 현명하게 만들어 주지 못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주장하며 피타고라스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철학이라는 말이나 행위가 갓 탄생했던 이 시대에 이미 철학을 철저히 비판하는 견해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철학을 강하게 비판했던 헤라클레이토스가 지금은 철학자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존재가 되었으니, 철학이란 참으로 넒은 의미를 지닌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로고스’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라

    헤라클레이토스는 자연을 ‘로고스’와 결부시켰다. 로고는 자연 또는 만물의 원리, 말, 이성, 이유, 비 같은 다양한 의미를 지닌 말로, 그리스 사상의 핵심을 나타낸다. 그런 로고스에 관해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는 그대로 있는데 인간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라고 말했다. 이것은 “본래 로고스는 인간의 지성을 초월한 것인데, 인간은 로고스를 자신의 지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로 한정시켜서 생각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의미다.


    그리고 박학다식에 맞서서 ‘지는 단 하나뿐’이며 그것은 ‘신려(신의 생각)를 인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요컨대 ‘진정한 지혜는 인간의 지성을 초월한 섭리를 인식하는 것이다.’라는 주장이다.


    다만 인간은 당연히 지성을 초월한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헤라클레이토스는 우리의 가치관을 뒤흔드는 말을 했다. “자연은 숨는 것을 좋아한다.”라든가, “쓰레기더미처럼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세계 질서다.”같은 말들이다. 이 말들은 인간 지성의 한계를 이야기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로고스에 귀를 기울이고, 만물이 하나임을 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인간 지성의 오만함과 자만심을 경계하는 사상가이기도 했다. 그는 자연(로고스)에 귀를 기울이라고 역설했으며, 만물은 ‘하나’이고 그것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지성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 그것이 로고스이고, 자연이며, 모든 질서의 원천이다. 그것과 함께 살라는 것이 헤라클레이토스의 윤리였다.


    인간 지성으로 절대 파악할 수 없는 로고스는 불에도 비유된다. 불은 만물의 생성변화의 원인으로 이야기되며, 결코 멈추는 일이 없다(만물유전). 계속 불타오르면서 자신을 소멸시키고도 있는, 그런 존재다.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이 꺼진 곳에 물이나 공기, 흙이 생긴다고 설명했다.


    피론: 눈앞의 낭떠러지도 무시하는 진짜 회의주의자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여겨진다.”

    회의주의 철학은 매우 알기 쉬워서,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여겨진다.’라는 생각이다. ‘하나도 없다.’라는 것도 절대적은 아니기 때문에 ‘내게는 그렇게 여겨진다.’라고 조심스럽게 덧붙이는 것이 중요하다.


    회의주의의 철학적 관심은 인간의 인식 능력의 고찰에 있다. ‘인간은 사물을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가?’가 주제다. 이 문제에 관해 회의주의는 ‘확실히는 인식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며, 그 근거의 고찰을 ‘회의주의의 열 가지 논증 방식’으로 정리했다.


    자명해 보이는 사항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회의주의의 본질은 ‘판단 중지’, 그 무엇에도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기 돌멩이가 있다.” 등 언뜻 자명한 사실로 생각되는 것에 대해서도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 내게는 그렇게 보인다는 인상에 불과해.” 라며 완전한 동의는 삼간다.


    빙빙 돌려서 말하는 것 같지만, 피론의 의도는 악에 빠지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악은 잘못된 생각이나 사항에 동의하는 것이다. 인간은 최대한 올바르게 생각하며 올바른 사항에 동의해야 한다. 다만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 잘못된 사항에 동의할 바에는 판단을 보류하고 무엇에도 동의하지 않는 편이 차라리 낫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피론은 누구도 자신의 생각이 옳은지 틀렸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늘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피론은 이 판단 중지가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준다고 말했다. 자신의 생각이 옳은지 알 수 없어 틀린 생각을 하고 있을 위험성에 항상 노출되어 있는 상태보다는 판단 중지의 상태가 더 안정적이라는 논리다.


    ‘올바르게 의심하는’ 자세</P> 회의주의는 현대의 모든 학문이 받아들이고 있는 사상이다. 언뜻 사리로 보이는 것을 의심하고 검증하는 것이 학문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회의주의는 자신이 인식의 확실성을 문제로 삼는 근대 철학에서 또다시 각광을 받게 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프랑스의 철학자인 데카르트와 영국의 철학자인 흄이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테제는 ‘아주 조금이라도 정당한 이유로 의심할 수 있는 것은 전부 허위로 간주한다,’라는 ‘방법적 회의’를 거쳐서 도출된 주장이다.


    한편 흄은 회의주의적인 철학을 전개해, 인과관계나 수의 계산 같은 보편적으로 옳다고 생각되는 사항의 보편성을 부정했다.



    [근대] 자연 세계 vs 인간 이성

    데카르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어떤 점이 그렇게 대단한 것일까?

    방랑하는 재야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도 불리는 프랑스 철학자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은 철학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말일 것이다. 저서인 ‘방법서설’에서 그는 자신의 반평생을 되돌아봤는데, 젊은 시절에 종군 경험을 하는 등 여러 나라를 방랑하며 살았다. 참고로, 데카르트를 비롯한 근대 초기(근세) 철학자들의 특징은 대학교에 몸담지 않고 공직(공무원)이나 사설 강사(가정교사) 등의 일을 했다는 것이다. 근대는 재야 철학에서 시작되었고, 게다가 그 내용은 ‘나’에 관해서였다.


    ‘방법적 회의’라는 철학을 시작하는 방식

    우등생으로서 중세 철학을 매우 열심히 공부한 데카르트는 그때까지의 철학이 불확실한 전제 위에서 논의를 시작했으며 애초에 출발점부터 합의가 되지 않은 무질서한 상황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확실한 출발점과 확실한 방법을 바탕으로 새로운 철학을 이야기하자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 확실성을 담보하는 것이 ‘방법적 회의’다.


    그렇다면 대체 왜 회의가 철학의 확실한 출발점을 보증할 수 있을까? 그 이유는 힘이 닿는 한 의심했지만 그럼에도 의심할 수 없는 주장이 있다면 그것은 진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힘이 닿는 한 의심한다.’는 것이 방법적 회의의 중요한 포인트다.


    데카르트는 회의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논리적으로는 쉽게 의심할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렇게까지 의심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라는 말을 종종 했다. 가령 ‘감각은 틀릴 때가 있다.’는 누구나 수긍할 수 있지만, ‘나는 지금 앉아 있다.’, ‘눈앞에 종이가 있다.’를 의심하기는 어렵다. 데카르트는 이런 괴리를 반드시 종이에 기록했다. 즉 의심하고 싶어도 자신의 ‘정상적인 이성’이 그 의심을 허락해 주지 않는 상황에 직면했다는 말이다.


    단순히 논리만으로 의심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데카르트는 “그건 바보 같은 의심이야!”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수준까지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이것이 ‘힘이 닿는 한 의심한다.’는 것, 나아가서는 ‘자신의 머리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방법적 회의는 이성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실제 사례

    데카르트의 회의는 ‘이성을 효과적으로 활용한다.’의 실제 사례를 제시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꿈의 회의는 언뜻 바보 같고 무의미하게 생각되는 의심이 실제로는 정당한 의심임을 가르쳐 준다. 데카르트의 회의의 단계는 꿈∙계산∙악령이다. 계산처럼 옮음이 자명하다고 생각되는 지식도 그것을 옳다고 판단하는 근거부터 의심한다. 그리고 그런 지식이 확실하지 않다고 의심할 충분한 이유를 추출하는 과정으로 나아간다. 이와 같은 예에서 데카르트의 회의의 진수를 발견할 수 있다. ‘사실은 근거가 없음에도 그것을 진리라고 믿는 상태’가 바로 우리 이성의 평소 모습임을 보여준 것이다.


    헤겔: 단순한 잡학을 뛰어넘은, 역사를 공부하는 법을 가르쳐 주다

    자칭 ‘철학의 완성’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독일 관념론의 마지막에 위치하는, 근대 철학의 정점∙완성으로 평가받는 철학자다. 놀랍게도 이 정점∙완성은 단순히 후세의 평가가 아니라 자기 평가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자타공인이다.


    그의 자기 평가에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헤겔 철학의 흥미로운 점은 역사에 대한 의식이다. 그는 철학을 항상 역사와 관련지었다. 철학사 외에도 세계사를 논한 『역사 철학 강의』가 있으며, 『정신현상학』에서도 철학사와 세계사에서 일어난 사건의 관계를 명시했다.


    헤겔의 역사의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유명한 ‘변증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변증법은 역사를 비롯한 온갖 학문 체계에 공통되는 구조이기도 하며, 또한 체계를 논하는 방법으로도 이용되었다.


    모순의 해결책을 찾아내는 ‘변증법’

    의식은 현 시점에서 자신이 지니고 있는 옮음의 기준으로 사물을 관찰하고 진리를 탐구한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반드시 모순에 직면하며, 그래서 사실은 자신도 자각하지 못했던 어떤 기준을 찾아내게 된다.


    “지금은 낮이야.”라고 말했을 때 ‘지금’이 사실 보편적인 판단이라는 사실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모순에 직면함으로써 ‘지금’ 정체가 의식에 자각되었다. 모순에 직면함으로써 자각 없이 전제로 삼고 있었던 인식을 자각시키는 과정이 이른바 ‘변증법’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변증법은 모든 전체를 근거가 없다고 비판하는 경험론 철학에 대한 재비판이 되었다.


    변증법은 세 가지 계기로 구별되며, 그것은 ‘정립∙반정립∙종합’등으로 불린다. 앞의 예에 대입하면 ‘지금은 낮이다.’가 정립, ‘지금은 밤이다.’가 반정립, ‘지금이란 사실 어느 때든 사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말이다.’라는 자각이 종합이다.


    변증법은 말하자면 체조다. 체조를 통해서 자기 몸의 구조에 관해 조금씩 이해해 나가는 이미지다. 구조를 몰랐어도 몸을 움직일 수는 있었지만, 몸은 그 구조를 전제로 움직이다. 또한 구조를 알면 가동역도 넓어지며 더욱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다. 이를 위해 이미 전제가 되고 있었던 것을 발견해 자각하는 것이 바로 변증법이라는 사고의 체조다.



    [현대] 구철학 vs 신철학

    비트겐슈타인: 선악을 논하는 것이 철학이라고 착각하지 마라

    철학병을 치료하는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말로 유명하다. 그의 철학의 관심사는 언어로, 언어의 형식이나 의미를 분석했다. 철학의 역사에서는 ‘분석철학’이나 ‘언어철학’으로 분류되는데, 이들 철학은 현대 철학의 일대 조류다. 비트겐슈타인은 그 원류에 위치한 철학자인 것이다.


    필연적인 명제와 우연적인 명제

    필연적인 명제란 참 혹은 거짓일 수밖에 없는 명제이고, 우연적인 명제란 참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는 명제다. 필연적인 명제는 논리의 형식만으로 진위를 판정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것은 A이거나 A가 아니거나 둘 중 하나다.’는 A에 무엇을 대입하든 필연적으로 참이다. 눈앞에 있는 것을 가리키며 “이것은 말(馬)이거나 말이 아니거나 둘 중 하나다.” 라고 말한다면 반드시 참이다. 이런 명제를 ‘동어 반복(토톨로지)’이라고 한다. 또한 ‘A는 A가 아니다.’는 필연적으로 거짓이다. 이것을 ‘모순’이라고 한다.


    우연적인 명제는 새로운 지식을 가져다주는 명제로, 자연과학의 지라고 말할 수 있다. 형식적으로는 참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는 명제는 A의 내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런 명제는 우리의 지식을 넓혀 준다.


    또한 비트겐슈타인은 과학적인 지식도 우연적인 명제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만유인력(보편중력)등의 자연 법칙은 실제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 법칙이란 근본적으로는 인과관계로 규정된 것이다. 그리고 인과관계는 세계를 설명하는 방법이지 세계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자연 법칙은 우리가 사물을 생각하는 방식을 나타내는 것이지 세계 속에 존재하는 ‘사실’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자연과학의 지식을 통해서 세계를 이해한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참인 명제들의 총체가 자연과학 전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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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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