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자신이 되어라
 
지은이 :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지은이), 박종대 (옮긴이)
출판사 : 열린책들
출판일 : 2024년 10월




  • 19세기는 과학 철학과 실존 철학, 심리학과 논리학의 격렬한 대결장이었습니다.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 속에서도 삶의 방향을 찾아가기 위해 철학가들은 철학적 물음들을 끊임없이 던지며 고군분투합니다. 당대 최고의 철학가들이 제기한 철학적 물음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현대 사회의 복잡성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통찰을 제공합니다.


    너 자신이 되어라


    헤겔 이후의 철학

    자의식이 넘치는 청년이었다. 그는 베를린 대학에서 자신의 강의를 예고하면서 전체 철학, 그러니까 세계 본질과 인간 정신의 학설을 가르치겠다는 거창한 포부를 밝혔다.


    당시 서른한 살의 쇼펜하우어는 철학의 전문가 집단 내에서는 완전한 무명이었다. 그럼에도 대담한 건지, 아니면 무모한 건지 1819년 가을 강의 경쟁을 통해 당대 최고의 독일 철학자를 무릎 꿇리려 했다. 그는 복수자를 자처하며 허풍선이 헤겔과 담판을 지을 생각이었다.


    그 전에 베를린 대학에서 강의 기회를 준 것은 쇼펜하우어로선 참으로 반가운 일이었다. 그의 임용에는 베를린 대학의 동물학자 마르틴 힌리히 리히텐슈타인(1780~1857)의 덕이 컸고, 그건 그 자체로 큰 행운이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강사 임용은 자신에게 영광이 아니라 오히려 베를린 대학 전체에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과도한 사명감과 우월감, 다혈질성 분노는 쇼펜하우어에게 나타난 성정이었다. 그는 단치히의 유복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젊은 나이에 벌써 유럽의 절반을 여행했다. 그는 런던 거리에서 거지와 상이용사들의 비참한 삶을 보았고, 공개 처형 장면을 공포와 전율 속에서 목격했으며, 프랑스 툴롱에서는 갤리선 죄수들의 끔찍한 운명에 경악했다. 이 장면들은 그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고, 거기서 느낀 멜랑콜리는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아버지가 함부르크에서 우울증으로 창문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쇼펜하우어는 열일곱 살이었다. 청년은 한동안 방향을 잃고 소설과 철학서에서 위안을 구했다.


    쇼펜하우어의 논리는 명확했다. 만일 절대적인 것, 직접적인 것, 완전히 옳은 것이 존재한다면 그에 대해 무언가를 아는 것은 이성이 아니다. 이성은 그저 우리 의식의 부산물로서 표상 세계에 갇혀 있다. 여기서 표상이라는 개념은 피히테에게서 차용한 것인데, 요즘 말로 하자면 적대적 인수 합병에 가깝다.


    연민과 체념

    플라톤과 칸트처럼 쇼펜하우어의 윤리학도 형이상학에서 나왔다. 만일 모든 삶이 어둡고 비합리적인 의지의 표현이라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의지라는 것이 개별 인간이 아닌 인간 종에만 관심이 있고, 그래서 우리가 개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저 가상이고 허상일 뿐이라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쇼펜하우어는 제 3의 길을 택한다. 내 의지를 인식하고 최대한 극복하는 법을 익혀 나가는 길이다. 행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만족스러운 삶을 위해서 말이다. 이 길을 선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논리학이 아니라 그의 멜랑콜리한 기질이다. 세상으로부터 극심한 고통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세상을 체념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쇼펜하우어의 윤리학은 자의적으로 보이고, 근거가 충분치 않다. 이런 견해를 19세기 초부터 사람들은 세계관이라고 불렀다.


    최대 다수의 행복

    지독하게 급진적인 바보

    콩트처럼 제러미 벤담(1748~1832)도 기념비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대신 그는 생전의 모습 그대로를 후대에 남기고 싶었던 모양이다. 자신이 죽으면 미라를 만들라고 하면서 우리 눈을 늘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고 하니 말이다. 그런데 19세기 영국의 미라 제작술은 고대 이집트에 비해 거의 진보하지 않았고, 수요도 무척 적었다. 그래서 그들은 메마른 침팬지의 몸에다 하듯이 그의 시신에 짚을 채워 넣었다.


    얼굴은 기괴하게 일그러졌고, 결국 철학자의 두상은 곧 지하실의 밀폐된 공간으로 옮겨졌다. 다만 프록코트와 블라우스를 입고 밀짚모자를 쓴 몸통만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벽장에 전시되었다. 머리는 나중에 모형을 떠서 왁스로 만들었다. 생물학적으로는 머리가 없는 상태이지만 그럼에도 이 대학의 설립자는 사후에도 모든 큰 행사에 참석했다. 이것도 그러라고 생전에 기록으로 남겨 둔 것이다. 이로써 그는 늘 투표를 하지 않고 묵묵히 자리만 지키고 있지만 자신에게 영원히 투표권이 있음을 죽어서도 과시하고 싶었다.


    벤담은 스물한 살에 변호사 자격증을 땄지만 개업을 하지는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워낙 재산이 많아 생의 에너지를 인류의 개선에 쏟아부을 작정이었다. 출발점은 흄의 인간 본성론에서 찾았다. 18세기의 이 선임자는 도덕을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토대 위에 세웠다. 행위와 법은 무엇보다 인간과 사회의 행복에 유익한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상인이 고결한 동기를 갖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의 성공이 국가적 부를 증진했느냐이다.


    벤담은 연구에 몰두했다. 법체계에 대한 새로운 토대를 만들고, 통치술에 대해 쓰고, 유익성의 기준에 따라 처벌 조항을 고민했다. 이 공리주의자의 세계에 자연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 사회에서 옳고 그른 것은 인간이 결정하는 것이지 신이나 자연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로써 그는 법실증주의의 기초를 세운다. 법에서는 더 이상 도덕적인 문제를 들이대서는 안 된다. 관건은 사회가 장애물 없이 돌아가기 위한 합리적인 규칙이지, 나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벤담은 이전의 많은 계몽주의자와는 달리 인간을 도덕적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도덕 및 입법의 원리 서설」에서 강조한 것도 비용과 이익 계산이었다. 나를 이끄는 것은 미덕도 아니고, 칸트가 말한 내 안의 도덕 법칙도 아니다. 그것들은 영리한 자기 관리와 현명한 결과 예상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벤담이 볼 때 정확한 계산에 바탕을 둔 개인의 이기심은 선에 대한 의지보다 훨씬 믿을 만하고 중요했다. 공동선을 보장하는 것은 행복 공식에 따라 제정된 지혜로운 법적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의 이익 추구다.


    이로써 그는 결과주의, 즉 중요한 건 동기가 아니라 오직 결과뿐이라는 이념의 가장 중요한 선구자가 되었다. 벤담은 이어 심층 단계를 위한 교안 작성에 들어간다. 전적으로 과학과 기술에 초점을 맞춘 교안이다. 국가도 급진적인 이념에 따라 새롭게 탈바꿈해야 했다.


    1823년부터 영국 정계에 뛰어든 신생 정당 급진당인 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적 대변 기구 역할을 했고, 벤담이 선봉에 섰다. 그들은 여성까지 포함해서 만인의 보통 선거권을 요구했다. 사형 제도를 없애야 했고, 국가 통제에서 민주주의적 투명성을 높여야 했으며, 언론의 자유를 더 많이 보장해야 했다. 벤담이 1830년 출간한 「헌법전」은 오늘날 자유 민주주의 헌법론의 고전이 되었다. 2년 뒤 그는 실제 현실에서 정치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 책이 1832년의 선거권 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다.



    철학을 어디에 쓸까?

    유물론에 대한 의심

    우람한 체구의 뒤부아 레몽은 핵심을 찌를 줄 아는 유능하고 노련한 연사였다. 독일 대학계에서는 학문적으로 그를 따라올 사람이 거의 없었다. 2년 전에는 베를린 대학의 총장을 지냈고, 지금은 베를린 인간학 협회 회원이자 프로이센 과학원 원장을 맡고 있었다.


    그날 뒤부아 레몽은 철학적 주체에 해당하는 자연 인식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강당에 모인 사람들을 향한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우리 자연 연구자들이 결코 알아내지 못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첫째, 물질의 본질은 무엇이고, 물질이 운동과 어떤 관계인지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다. 둘째, 뇌 속에서 전기 생리학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다시 말해 주관적 체험이나 표상, 생각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알지 못한다. 그는 이그노라비무스!(우리는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라는 뜻의 라틴어)라는 말로 연설을 끝냈다.


    강당 안이 술렁거렸다. 이미 여러 차례 박수갈채와 격한 야유가 쏟아졌다. 과학자들은 그의 말을 들으면서 한편에선 맞장구를 치거나 환호했고, 다른 한편에선 도발을 느끼거나 격분했다. 얼마 뒤 그의 견해에 동의하거나 날카롭게 비판하는 책들이 봇물처럼 쏟아졌고, 그 물결은 끝을 모를 정도로 이어졌다. 그의 연설은 반세기가 지나도 화제가 되었다. 많은 과학자와 작가가 그의 주장을 인용했고, 학자들은 양 진영으로 나뉘어 싸웠다. 19세기 후반에 이 연설만큼 그렇게 열띤 토론을 부른 철학적 연설은 없었다.


    자연 과학은 결코 철학을 대체할 수 없고, 종교의 정당성도 박탈할 수 없었다. 뒤부아 레몽의 선언은 오해의 여지가 없을 만큼 명확했다. 엄격한 자연 과학적 세계관은 존재하지 않고, 그런 세계관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유물론자들에게 이만한 도발이 있을까! 


    철학에 대한 철학

    모든 경험은 관점주의점이다. 철학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논리학의 보호자도 아니고 자연 과학만큼 객관적이지도 않다. 정밀과학에도 선험적 전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철학이 보기에 그 선험성은 시시했다. 자연 과학이 설명을 한다면 인간의 정신적 삶을 다루는 정신과학은 이해를 한다. 이해는 철학에서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이해는 고유의 규칙으로 무장한 아주 특별한 기술이다. 인간의 정신적 삶은 결코 완벽하게 설명될 수 없다. 자연 과학적으로 훈련받은 심리학자는 내 생각과 행동을 인과율의 법칙에 따라 억지로 설명하려 하겠지만, 나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할 뿐 인과율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감정과 기억, 소망, 동기, 불안, 기대, 의무, 습관 같은 것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다원적 맥락 속에서 살아간다. 이것들은 물리학에서처럼 단순히 원인과 결과의 고리로 이을 수 없다. 설명하는 심리학자는 이 거대한 관련성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그는 단지 개별 행동들을 따로 떼어 내어 그에 대한 원인을 찾을 뿐이다.


    딜타이는 이해와 함께 정신과학에 독자적 방법론을 제공했고, 자연 과학과 면밀하게 선을 그었다. 자연 과학은 대상을 무언가로 환원하고, 정신과학은 다양한 삶의 관련성을 해석학적으로 이해한다. 이로써 철학에도 존재 이유가 담보된다. 공리와 약속으로 이루어진 자연 과학과 달리 정신과학은 특유의 경험 학문이다. 왜냐하면 정신과학은 사물을 우리의 의식 속에서 사실로 나타나는 그대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철학은 고유의 내용이 없고, 논리학의 세계도 아니다. 다만 세계가 우리 의식 속에서 어떻게 다양한 방식으로 생성되는지를 정밀하게 묘사하고 분석하는 학문이다.



    세기 전환기 철학

    삶의 의미

    간호병 니체

    1870년 8월 29일 알자스 지방의 뵈르트로 향하는 기차에 한 간호병이 타고 있었다. 그전에 스물다섯 살의 이 청년은 에를랑겐에서 2주간의 단기 간호 학교 과정을 마친 뒤 손에 총상을 입은 프랑스인과 머리를 크게 다친 소년을 클로로포름으로 마취했고, 열한 살짜리 소녀의 다리를 절단했다. 하지만 팔뼈가 으스러진 프로이센인을 돕지 못했고, 폐에 총알이 박힌 병사가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프로이센 국가에 의구심을 갖고 있었음에도 이 학자 병사는 독일의 승리를 원했고, 영웅적인 일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작센 출신의 이 남자는 스위스 교수로서 중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전장에 도착한 지 일주일 만에 전쟁의 잔인함은 그에게 생생하게 다가왔다. 2만 명이 넘게 죽은 치열한 전투에서 끔찍한 도살 현장을 목격했고, 역한 시체 냄새를 맡았으며, 부상자들로 가득 찬 야전 병원을 비척거리며 돌아다녔다. 니체는 간호병들에게 봉급을 나눠 주라는 임무를 받고 소대원들과 함께 아그노, 뤼네빌, 낭시, 메츠, 아르쉬르모젤로 기나긴 행군을 했다. 모젤에서는 그의 친구이자 풍경화가인 아돌프 모젠겔(1837~1885)과 함께 열한 명의 중상자를 맡았다. 얼마 뒤 간호병 니체는 콜레라와 인후염에 감염되었다. 일주일 뒤 니체는 고향 같은 나움부르크로 옮겨졌다. 몸은 쇠약할 대로 쇠약해졌고, 정신은 그칠 줄 모르는 고통의 소리로 트라우마를 겪고 있었다.


    몹시 예민한 데다 삶의 무게에 시달린 만큼이나 성찰에 있어서는 더욱 격정적이고 비장했던 니체는 전쟁에서 미적인 사건의 오라를 보았다. 그는 전쟁터의 살육을 군대의 정령에 열광한 디오니소스적 도취로 여겼고, 부드러운 평화의 저녁노을을 대체할 새로운 영웅 문화를 꿈꾸었다.


    나는 인간이 아니라 다이너마이트였다. 니체가 훗날 자신에 대해 한 말이다. 1870년 여름 그는 무엇보다 삶의 무게에 시달리는 정신과 피폐한 몸을 가진 인간이었다. 전쟁의 폭발 물질과는 거리가 먼 겁에 질린 한 마리 짐승이었다. 화물 열차 안에서 그를 살아 있게 하고 그의 정신을 키워 준 것은 바로 활짝 나래를 편 판타지였다. 그는 인류에게 위대한 미래의 길을 제시하기 위해 인류의 현 모습을 비춰 줄 거울 같은 저작을 비장한 심정으로 꿈꾸었다. 니체가 되고 싶었던 건 간호병이 아니라 교육자, 사도, 구원자였으니…….


    철학의 심리병리학

    철학자도 동물이다. 그들의 인식은 동물적 의식의 좁은 한계에 갇혀 있고, 감각과 육신에 묶여 있고, 언어에 의해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근대 철학의 어떤 비판가가 철학의 인식적 요구에 대한 거부를 그렇게 명확한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게다가 또다시 키르케고르나 제임스는 빼야 할지 모르지만, 어떤 철학자가 그렇게 문학적으로 아름답게, 그렇게 스스럼없이 비타협적으로 쓸 수 있을까?


    이건 위대한 문학으로서의 철학 비평이다! 그것도 딜타이가 정신과학에 대한 구상을 자연 과학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 대안으로 설계했고, 로체가 「철학의 체계」에서 모든 것을 화해시키고자 했고, 마이어가 칸트의 심리학을 의식으로 들어가는 열쇠로 추천하던 시절에 말이다. 철학은 이제 막 발밑에서 다시 단단한 지반을 느꼈고, 니체는 바젤의 서재에서 철학의 수조에 물이 흘러넘치게 했다.


    니체는 바로 이런 혜안, 그러니까 의식의 좁은 방에서 일어나는 인간적 오류와 방황을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는 밝은 시선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반복한다. 쾌락으로 가득 찬 광기의 세계, 바그너의 음악, 예술, 종교라는 새로운 신화에 대한 꿈은 이미 끝났다. 니체는 이 책으로 인류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치료하고 있다.


    심대한, 너무나 심대한 결과들

    188년 우울증이 니체를 엄습했다. 그는 이렇게 쓴다. 나 자신이 그렇게 완벽하게 굴욕당하는 것을 더는 견딜 수 없는 밤들이 찾아왔다. 그는 니스에서 토리노로 옮겨졌다. 정신적으로 말짱했던 마지막 해였다.


    니체가 본격적으로 유명해지게 된 것은 작품 개정판이 출시된 1890년부터였다. 그 뒤로 많은 방문객이 우두커니 허공만 바라보는 그 사상가를 보기 위해 바이마르의 질버블리크 빌라를 찾았다. 1890년대 후반기에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이 철학자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저작들은 예술가와 자유분방한 보헤미안들에게 충격과 공감을 안겼다. 자기 자신에게 요구가 많은 사람, 열정적으로 자신을 극복하려는 사람, 깊이와 비극을 찾는 사람이 니체를 읽었다.


    작곡가 리하르트 슈투라유스(1862~1949)는 1896년에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교향곡으로 만들었다. 만은 니체의 영향으로 디오니소스적 예술가를 작품에서 수차례 형상화했다. 그에게 예술은 현기증이 일 정도로 높은 산인 동시에 심연이었고, 예술 속엔 진리와 천재성, 광기가 통합되어 있었다. 만이 20세기 깊숙한 시점까지 끌고 간 예술적 낭만주의 역시 니체의 바그너 숭배에 그 뿌리가 있었고, 냉철한 현대적 진보나 두 번의 세계 대전으로도 흔들이지 않았다.


    니체가 죽은 시점인 세기 전환기에 그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인이 되었다. 그는 철학의 전환점이자, 현대의 선구자였다. 신칸트학파가 니체의 저술을 꼼꼼히 뒤져 철학적인 것과 비철학적인 것을 가려내는 동안 생철학은 엄청난 동력을 얻었다. 쇼펜하우어와 키르케로르로부터 시작된 것, 즉 이 모든 것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질문이 이제 학파를 이룬 생철학 사상가들의 중심 문제로 떠올랐다. 생철학과 실존 철학은 앙리 베르그송(159~1941), 카를 뢰비트(1897~1973), 하이데거, 사르트르와 함께 20세기 전반기에 독일과 프랑스 철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조가 되었다.


    개인과 사회

    사회적인 것의 기하학

    지멜은 베를린 상인 가문의 후손이었다. 아버지는 초콜릿 판매로 돈을 벌었다. 한창 주가를 날리던 펠릭스 앤드 자로티에 투자해서 벌어들인 돈도 상당했다. 지멜이 열여섯 살에 아버지가 죽었다. 그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사람은 출판업을 하던 율리우스 프리틀렌더(1813~1884)였다. 그는 지멜뿐 아니라 그의 여섯 형제자매까지 돌보아 주었다. 나중에는 지멜을 양자로 받아들였고, 1882년에는 막대한 재산까지 남겼다. 그 덕분에 지멜은 평생 돈 걱정 없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었다.


    지멜은 발군의 실력을 보인 뛰어난 학생이었다. 1876년에는 고향 도시에서 역사와 민족 심리학을 공부했다. 그는 철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첼러와 프리드리히 하름스(1819~1880)의 강의를 들었다. 그러나 베를린 철학계의 상황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 트렌델렌부르크는 얼마 전에 죽었고, 딜타이는 1882년에야 베를린에 왔다. 신칸트주의 대부 중 한 명으로 언급한 바 있는 첼러는 체계적 사상가로서가 아니라 주로 그리스 고전에 대한 지식으로 인기를 끌었다.


    1881년 지멜이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하자 교수들은 난감해했다. 「음악의 시작에 관한 심리학적-민족학적 연구」는 다윈의 진화론 및 민족 심리학의 도움으로 음악의 기원을 밝히려는 시도였다. 이게 뭘까? 이게 철학일까? 논문은 통과되지 못했다.


    지멜은 좀 더 관습에 맞는 논문을 제출했고, 그제야 심사 위원들의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그는 결국 「칸트의 물리적 단자론에 따른 물질의 본질」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최고 점수가 아닌 중간 점수로 통과했다.


    교수 자격 심사 과정은 훨씬 더 순탄치 않았다. 문제는 시범 강의에서 터졌다. 심사 위원 첼러가 인간의 영혼이 뇌의 특정 부위에 있다고 말하자 지멜은 불같이 화를 내며 그의 잘못을 꾸짖었고, 첼러는 즉석에서 그를 떨어뜨려 버렸다. 이후 지멜은 윤리적 이상과 논리적, 미적 이상과의 관계라는 주제로 재차 강의를 한 뒤에야 간신히 시간 강사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정규 교수직은 베를린에서도 다른 대학에서도 얻지 못했다.


    지멜은 동료들에게 미움을 샀다. 공명심이 너무 강하고, 관심이 너무 다방면으로 흩어져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지멜은 강의에서 심리학과 사회학, 철학의 문제를 분야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논했다. 학생들은 환호했다. 자주 열린 그의 공개 강의실은 늘 학생들로 북적거렸다. 느리기는 하지만 다방면으로 지식이 많고 정곡을 찌르는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서였다.


    지멜의 결론은 이렇다. 사회적 세분화는 좋다. 하지만 자연법칙적 발전은 아니다. 만일 사회가 끊임없이 세분화되는 규칙과 법칙성에 대해 쓰고자 한다면 최소 입자와 자연력을 기웃거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전형, 즉 지멜의 표현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기하학을 묘사해야 한다. 그는 자연 과학자처럼 설명하지 않고, 딜타이와 마찬가지로 이해한다. 그 때문에 모든 사회학은 형식 사회학이어야 한다. 형식 사회학은 묘사하지만, 스펜서처럼 방향의 의미와 내용적 목표를 숨기고 있지 않다. 이 사회학은 의미와 목표를 정하는 대신 상호 작용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에 전념한다. 이 구조에서 모든 현대 사회가 조합되기 때문이다.


    돈의 철학

    기나긴 작업 끝에 1900년 「돈의 철학」이 출간되었을 때 야심만만한 저자는 이전의 어떤 경제학자나 심리학자, 철학자보다 더 강도 높고 포괄적이고 정교하게 돈의 문제를 다루었다. 이 책은 사회학 분야뿐 아니라 철학 분야의 걸작이었다. 왜냐하면 지멜은 돈을 통해 가장 강렬한 상호 작용으로서의 교역이 어떻게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지를 보여 주었을 뿐 아니라 돈이 이전 사회들의 모든 실체적인 것을 어떻게 서서히 관계로 해체시켰는지를 실증하기 때문이다.


    지멜은 베를린에서 경제적 투기가 절정에 이른 시점에 이 글을 썼다. 부동산 기업은 시골 땅을 사들이고, 노동자 숙소를 짓고, 화려한 건물을 올리고, 주식회사를 만든다. 도시들이 그렇게 급속하게 성장한 배경에는 어떤 제약이나 통제도 없는 돈의 유통이 있다. 한편에서는 경탄의 대상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타도의 대상이다. 이제 사업의 세계는 제휴와 술수가 판치는 위험한 도박판이 되었다. 사람들은 수백 년 동안 서 있던 것을 순식간에 허물어뜨렸고, 마찬가지로 빠른 속도로 새것을 지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돈은 인간을 바꾸었다. 인간은 돈으로 인해 더 한층 경박하고 천박하고 향락적이고 모험적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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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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