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이 좋아서” 약 30여 년을 야생과 벗하며 살아온 저자는 방송사 PD로서 자연 다큐멘터리를 찍으며 자연 친화적 삶에 젖어들었다. 처음으로 목격하는 동물들의 몸짓 하나하나가 관심을 끌었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야생으로 달려갔다. 야생을 만나는 일은 힘들었지만 언제나 두근거림과 설렘으로 가득했고, 그 마음으로 오랜 시간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 있었다. 수많은 야생동식물을 기록하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덕목으로 배워야 할 것이 바로 ‘기다림’이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면서 준비하고 있으면 반드시 경이로운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
제대로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빠르게 열매가 맺히기를 바란다면 그 성급함에 못 이겨 발이 꼬이고 헛발을 딛기 마련이다. 이럴 때 자연은 훌륭한 스승으로서 어떤 삶의 태도와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나직이 이야기해준다. 서두르지 않고 끈기 있게 노력하다보면 때가 되어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힌다. 작은 풀꽃의 개화, 매미의 날개펴기에서도 그 위대한 법칙을 배울 수 있다. 작은 생명일지라도 그 속에는 무리해서 욕심내지 않으면서도 최선을 다해 꿈꾸고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커다란 지혜가 스며들어 있다.
■ 저자 신동만
1965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자연과 함께 보냈다.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독일문학을 전공했고 7년간의 수리부엉이 연구로 동물생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총 4편의 SCI(E) 논문을 발표했다. 1991년부터 KBS에서 자연·환경 다큐멘터리 전문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세계 3대 자연 다큐 페스티벌 중 하나인 프랑스 ‘새와 야생동물 페스티벌’에서 최우수작품상(〈쇠제비갈매기의 비밀〉)을 비롯해, 방송통신위원회 방송대상(〈코리언지오그래픽〉), 보리방송문화상(〈봉암사의 숲〉), 대한민국과학문화상(〈환경스페셜-공존실험 까치〉), 한국가톨릭매스컴대상(〈환경스페셜-공존실험 까치〉), 한국방송프로듀서상, 이달의 PD상 등을 받았다. 최근에는 다큐멘터리 〈자연의 철학자들〉을 통해 도시를 벗어나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전하며 화제를 모았다. 지은 책으로 《밤의 제왕 수리부엉이》, 《뿔논병아리의 선물》, 《쇠제비갈매기의 꿈》 등이 있다. 그밖에 유튜브 채널 〈야생의 신〉을 운영 중이다.
■ 차례
프롤로그 | 언제나, 내 곁의 야생에서
01 준비 | 동물은 여름부터 겨울을 준비한다
한여름 밤의 세레나데
멧비둘기의 달콤한 사랑
야생에는 허투루 보내는 시간이 없다
다큐멘터리를 준비하는 시간
02 적응 | 처음은 낯설어도 이 또한 익숙해진다
모든 생명은 적응을 위해 투쟁한다
적응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높은 산에서도, 깊은 바다에서도
낯선 곳에서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게
03 기다림 | 서두른다고 꽃이 피지 않는다
야생은 정해진 시간표를 착실히 따른다
날개를 펼치는 황홀한 시간을 위하여
결정적 찰나를 위해 에너지를 응축하고
기다림으로 만남과 성장이 이루어진다
04 끈기 | 포기하지 않으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열세 번이라도 다시 도전해서
일곱 번의 보름달이 뜨고 지는 동안
내리는 비에 모든 것이 휩쓸려가도
05 신뢰 | 믿음은 관계의 시작이다
나의 짝이 되어주세요
기다림은 믿음이다
신뢰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괭이갈매기의 ‘Don’t forget me!’
06 기적 | 땀 흘리지 않는 한 기적은 없다
절망의 끝자락에서 만난 뿔논병아리의 기적
쇠제비갈매기는 살아 있었다
07 선택 | 생명은 선택하는 존재다
선택이 인생을 만든다
제너럴리스트? 스페셜리스트?
자연 다큐멘터리 제작자의 선택
08 관계 | 생명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생명은 연결되어 있다
야생은 갈등하고 싸우며 균형을 찾아간다
인간과 야생의 관계 맺기
09 관심 | 마음을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너는 꽃이다
알고 보면 가까이에 있는 야생
자전거 타고 출퇴근하는 이유
참나를 만나는 시간
10 시선 |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야생동물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
수리부엉이가 알려주는 지혜
평생 서로만을 바라보는 수리부엉이처럼
11 포용 |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존재 이유가 있다
다투지 않고 함께 살아갈 방법
무료로 두 달 살이 하세요
흔하다는 것에 대한 반론
외래종에게 배운 것
12 잠시 멈춤 | 멈춰야 더 자세히 볼 수 있다
자연에 안긴 사람들
새처럼 모든 것을 비우고 가볍게
차 한잔 하시지요
길을 걷다 멈춰 서서
에필로그 | 야생의 철학자로 산다는 것
28년간 자연을 관찰한 다큐멘터리 PD이자 동물생태학 박사가 야생에서 깨달은 생존과 공존의 철학을 이야기합니다. 자연 속 동식물의 삶에서 얻은 12가지 인생의 진리를 통해 인내, 변화, 사랑, 공생 등의 지혜를 만날 수 있습니다.
야생의 철학자들
준비 - 동물은 여름부터 겨울을 준비한다
야생에는 허투루 보내는 시간이 없다
미래에 대한 준비를 철저하게 한다고 해서 만사가 다 잘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준비는 모든 일의 출발이다. 우리 삶이 그렇고 야생의 세계가 그렇다. 유비무환이라는 고사성어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해 차곡차곡 준비해두면 위기 극복의 가능성이 커진다. 우리 삶이든 야생이든 '1+1=2' 식의 직선적 결과는 존재하기 어렵다. 하지만 노력이라는 에너지 투입 없이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만은 쉽게 어긋나지 않는 진실이다.
찬바람이 도는 늦가을 우리는 겨울나기를 준비한다. 예전에는 장작이나 연탄을 쌓아 뒀다. 김장은 여전한 겨울 준비의 풍경이다. 갑작스러운 추위와 폭설에 당황하지 않도록 자동차를 정비하기도 한다. 동물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추위를 대비한다. 털을 풍성하게 하고 지방을 축적한다. 그런데 이러한 준비를 푹푹 찌는 여름이 채 끝나기도 전부터 시작한다. 새는 이 시기가 되면 깃갈이를 한다. 좋은 짝을 만나기 위해 특별 제작했던 화려한 깃은 제 임무를 마친 터라 색이 바래고 빠져서 볼품이 없다. 그 대표적인 새가 원앙이다.
원앙 수컷은 교미철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 화려한 장식깃으로 무장하고 한껏 뽐내지만, 이제 그때 그 원앙이 맞나 싶을 정도로 영 딴판이다. 새로운 장식깃을 장만하기 위해, 임무를 다한 깃털은 하나둘 버린다. 채움은 버림에서부터 시작된다.
원앙만 초라한 행색으로 돌아다니는 건 아니다. 숲의 수다쟁이 직박구리도 볼품없기는 마찬가지다. 목의 깃털이 듬성듬성 빠져 언뜻 보면 병에 걸린 게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이러한 경향은 그해에 태어난 새끼들에게서 특히 두드러진다. 어린 티를 벗고 어른 새의 깃털로 갈아입을 채비를 하는 것이다. 마치 성인식 잔칫날 애송이 티를 팍팍 풍기는 청년 같다고나 할까. 이러한 변신의 과정을 거쳐서 완전한 어른 새로 자라난다.
어릴 때 대머리 까치를 본 적이 있다. 칠월칠석 무렵이면 까치들은 어김없이 대머리로 변했다. 항상 왜 그럴까 궁금했다. 하지만 뚜렷한 이유는 찾지 못했다. 견우와 직녀 설화에 의하면,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견우와 직녀가 만날 수 있도록 오작교를 놓아주기 위해 머리를 맞대느라 까치와 까마귀의 머리가 다 벗겨졌다고 한다. 칠월 칠석(음력 7월 7일)은 양력으로 치면 보통 8월쯤이다. 직박구리나 원앙의 깃이 빠지는 시기와 비숫하다. 까치의 머리 깃털이 빠진다는 설화에는 한반도의 생태적인 변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8월 어느 날, 밤하늘 은하수에 오작교가 펼쳐지면 견우와 직녀만 운우지정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까치들도 새로운 사랑을 찾는 여정을 서서히 시작한다. 긴 여정은 몸의 작은 변화에서부터 시작된다. 기존의 머리털이 빠지고 새 깃털이 돋아난다. 아직 참매미의 기세가 꺾이지 않은 8월 한여름의 일이다.
이제 새들에게 필요한 것은 혹한의 한겨울을 대비하는 것이다. 풍성한 깃털로 재무장해서 추위를 견딜 수 있는 몸 상태로 바꿀 준비를 한다. 제 역할을 다한 번식깃과 미래의 보온용 겨울 깃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원하는 것 한 가지를 얻으려면 다른 한 가지는 버려야 한다. 그게 세상의 이치다. 새 깃이 돋도록 도와주는 호르몬이 분비되면서 새의 깃털은 시나브로 풍성한 모습으로 탈바꿈한다.
11월쯤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야생 새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있다. 초라한 몰골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빵빵한 깃털로 무장해 있다. 살이 포동포동 오른 것처럼 보이지만(일부 지방층은 증가했겠지만) 사실은 추위를 이기기 위해 깃털의 양을 늘려 풍성하게 만든 측면이 더 크다. 작은 쇠박새는 동글동글 공 같다. 온몸 구석구석에 깃털을 채워 넣었다. 이렇게 이중삼중으로 찬 공기의 유입을 막아내기에 영하의 추위에서도 견딜 수 있다. 새들만이 아니다. 우리나라 고유종인 고라니와 같은 사슴과 동물도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이면 이미 조밀한 털로 무장하고 있다. 겨울의 추위를 이겨내는 데 털만한 방한 재료가 없다. 진화 과정에서 털을 벗어버린 인간이 계절 변화에 맞춰 옷을 갈아입는 것과 같다.
머리털이 빠진 까치
야생의 세계에서 한겨울에는 생존이 최우선 화두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여기에 모든 생체리듬을 맞춘다. 그리고 겨울이 되면 또 하나의 준비, 생존의 지상 과제인 번식도 준비한다.
DMZ 인근의 철원평야는 두루미의 천국이다. 인적이 드물고 주변에 먹고 쉴 수 있는 논과 강이 자리 잡고 있어 두루미들이 겨울을 나기에 적격이다. 게다가 야생 최대의 낙원 DMZ를 마음대로 들락거릴 수 있는 서식지이니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을까. 이들 두루미 무리를 관찰할 때 가장 인상적인 것은 구애춤이다. 두루미는 암수와 어린 새가 함께 무리 생활을 하는데, 틈만 나면 고개를 쳐들고 꾸룩~ 꾸룩~ 울며 구애춤을 춘다. 짝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분주하다.
두루미는 한번 맺은 부부관계를 평생 유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짝이 있는 두루미는 구애춤으로 부부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한다. 아직 짝이 없는 두루미는 구애춤을 통해 새로운 짝을 만나려고 한다. 미리 짝을 정해놔야 다가오는 3월에 북상해서 제때 번식할 수 있다. 월동하며 한곳에 모여 있을 때가 짝을 만날 최적기다. 번식지인 시베리아의 허허벌판에서 짝을 만나려고 애쓰는 것보다 월동지에서 미리 짝을 구해두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다.
특정 계절에 맞춰 그때 일어나는 생태 변화를 얘기해서 그렇지, 사실 '다음을 위한 준비'는 사계절 내내 계속된다. 지구상 모든 생명은 계절에 맞춰 생활하기 때문이다. 겨울에는 봄을 준비하고 봄에는 겨울을 준비한다. 정교한 생체 시계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여기에 이상이 생기면 야생에서 도태되고 만다. 아무 생각 없어 보이지만 야생의 생명체는 그렇게 한 계절, 두 계절을 앞서서 준비하며 살아간다.
나의 하루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시작된다. 아침 해가 뜨기 전 아직 어둑어둑한데도 창밖은 새들의 지저귐으로 요란하다. 번식기인 봄에는 짝을 유혹하는 노랫소리가 가득하다.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는 한겨울 날에도 창문을 꽉 닫아두었음에도 성에 낀 틈새를 비집고 직박구리의 울음소리가 들어온다.
텃새인 직박구리는 밤새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일찍 깨어나 먹이활동을 준비한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좋은 먹이를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이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겨울에도 봄을 맞을 준비가 이어지는 것처럼, 직박구리는 하루의 에너지를 얻기 위해 새벽부터 일과를 시작한다. 다른 새들도 직박구리와 다르지 않다. 얼리버드(early bird)가 되어야만 야생을 살아갈 수 있다.
물론 아무리 일찍 깨어나 움직인다 한들 생태계의 먹이사슬을 벗어날 수 있는 열쇠를 쥔 건 아니다. 작은 새를 먹이로 살아가는 맹금류도 이러한 움직임에 맞춰 미리 활동하기 때문이다. 텃새인 황조롱이는 주로 등줄쥐 같은 작은 쥐를 노리지만 참새나 뱁새, 멧비둘기 등 조류도 자주 사냥한다.
황조롱이 같은 맹금류의 치열한 사냥 준비는 감탄을 자아낸다. 쥐가 들락거린 흔적을 발견하면 쥐구멍이 보이는 공중에서 정지비행(호버링)을 하면서 쥐가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그러다가 쥐의 움직임이 포착되면 비행 높이를 낮춰가며 정확히 겨냥한 다음, 하강 공격에 나선다.
초원의 지존 사자나 표범도 사냥할 때 함부로 덤비지 않는다. 결정적인 순간을 위해서 철저하게 준비한다. 아무리 약한 존재라고 해도 상대를 완전히 파악한 다음, 결정적인 시기를 노린다. 얼마 전에 세렝게티에서 토끼를 사냥하는 표범의 모습을 TV에서 봤는데, 그 신중함과 진지함에 다시 한번 탄복했다. 표범은 나무 사이에 은신한 토끼를 발견했다. 며칠을 굶은 탓에 당장 덮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표범은 자세를 최대한 낮추었다. 포복하듯 엎드려서는 조심스레 이동한다. 표범의 표정만 보아도 이 사냥에 얼마나 진지하게 임하는지가 느껴진다. 관목 사이로 서서히 접근하는 표범의 발걸음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진지하고 조심스러워할 이유가 있을까? 역지사지 하면 답이 금방 나온다.
집토끼(rabbit)와 달리 야생토끼(hare)의 털은 주변 환경에 따라 색깔이 변하는 위장 능력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포식자에게 잡히면 쉽게 뽑히도록 설계돼 있다. 다시 말해 포식자가 야생 토끼의 몸 전체를 잡지 않고 털만 잡았다가는 빠져나갈 확률이 높다. 피식자도 살아가야 하니 사냥을 피할 방법을 발달시킨 것이다. 최상위 포식자 표범도 이러한 상황을 모를 리 없다. 한번 실패하면 또 긴 시간을 먹잇감을 기다리는 데 투자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다 에너지다. 그렇다 보니 상대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고려해서 위치를 선정하고 그다음 행동을 결정한다. 상대가 허점을 보이지 않으면 절대 공격하지 않는다. 상대를 제압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행동에 나선다. 이건 야생동물이 지켜야 할 생존의 제1법칙이다.
삶을 향해 쉼 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야생의 생명체를 바라보며 오늘도 나를 돌아본다.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신중하게 준비했던가 하고, 인생을 잘 살아내는 데도 사전 준비는 필수다.
기다림 - 서두른다고 꽃이 피지 않는다
야생은 정해진 시간표를 착실히 따른다
잘 익은 열매를 따고자 한다면 그 전에 적절한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열매를 따기까지의 과정에 충실하지 않고 열매 자체에만 집착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 경우, 대개는 잘 익은 열매를 따는 데 실패한다.
자연 다큐멘터리 제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촬영 항목은 새와 포유류의 교미와 부화, 식물의 개화 그리고 곤충의 날개펴기이다. 이는 해당 생물의 생태를 보여주는 전부는 아닐지라도 핵심적인 장면이다. 처음 자연 다큐 제작에 임하는 PD들은 이러한 결정적인 장면을 촬영하는 과정에서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 생물의 생태적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들 비슷해 보이지만 종마다 고유의 생태 사이클이 있다. 같은 종이라도 사이클은 개체마다 조금씩 다르다. 이 때문에 경험이 없거나 준비가 부족한 PD는 시행착오를 무수히 겪는다.
"이거 뭡니까? 오늘도 안 피네요. 뭔가 문제가 있는 거 아닐까요?"
현장에서 흔히 보이는 장면이다. 기다림에 지친 촬영감독과 결과를 얻어야 하는 PD는 팽팽한 줄다리기를 한다. 이 순간, PD는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든다. 그만 포기하고 싶은 생각과 촬영하지 못했을 경우 이야기 구성에 미칠 파장에 대한 두려움이 교차한다. 이러고 싶기도 하고 저러고 싶기도 하다. 내가 왜 PD가 돼서 이 고생을 하는지...그래도 결론은 하나다.
"조금만 더 기다려봅시다."
알다시피 매화는 한겨울에도 꽃망울을 터트린다. 그래서 '설중화'라는 별칭을 얻었고 고고한 삶의 표상으로 여겨진다. 2023년 1월 초에 이원규 시인이 사는 광양에 갔다. 이곳은 매화로 유명한 지역이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매화꽃이 피어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동박새들이 모여들어 매화의 꿀을 빠느라 바쁘다. 매화는 다른 꽃과 달리 추위에 강하다. 따스한 기운이 계속되면 꽃을 피우고 추워지면 잠시 쉬었다가 다시 피곤 한다. 이처럼 매화는 다른 나무에 비해 먼저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방식으로 진화했 다.
2월의 폭설에 눈을 뚫고 노란 고개를 내미는 녀석도 있다. 여러해살이풀인 복수초다. 이처럼 빨리 피는 꽃은 사진 애호가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 매력적인 자태는 방송과 신문에도 자주 모습을 비춘다. 다른 꽃과 다르기 때문이다. 노란색 복수초꽃이 하얀 눈에 둘러싸여 피어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야생의 아름다움을 물씬 뽐낸다. 눈이 쌓였다가 녹으면서 노란 복수초꽃이 모습을 드러내는 미속촬영 영상은 봄을 알리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관심 - 마음을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너는 꽃이다
유년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고 자연 다큐 제작을 위해 30년 가까이 야생을 휘젓고 다녔다. 그런데도 식물의 이름과 곤충의 이름은 잘 모른다. 워낙 종류도 많고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헷갈리기 일쑤다. 게다가 제작한 아이템이 주로 새와 포유류이다 보니 다른 종에 대해서는 관심이 덜했던 연유도 한몫했다. 그런데 최근엔 나이가 든 탓인지 꽃에 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 길 가다가도 꽃이 보이면 핸드폰 카메라로 촬영한다. 모르는 꽃은 인터넷 포털 기능을 이용해 반드시 검색해본다. 물론 검색해서 꽃 이름을 알게 되어도 돌아서면 까먹고 만다. 낯선 종이 너무 많아서 기억하기가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김춘수의 시 꽃은 본의 아니게 고등학교 시절부터 외우다시피 했다. 이렇게 된 데엔 앞서 언급했던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의 영향이 컸다.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틈만 나면 꽃을 읊곤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김춘수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한 시인이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꽃은 대중에 많이 알려진 시 중 하나이다. 하지만 나는 당시에는 이 시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냥 선생님의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세월이 흐르고서야 시의 진정한 의미를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예쁜 꽃이라 해도 관심이 없으면 이름도 모르고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관심을 가지면 이름을 알게 되고 그 꽃의 향기와 빛깔이 느껴진다.
복수초는 이른 봄에 무겁게 내린 눈을 이불 삼아 꽃대를 내밀어 노란 꽃을 피운다. 하지만 관심이 없으면 그냥 들풀, 잡풀에 지나지 않는다. 그 꽃의 이름을 불러줄 때야 비로소 경이로운 복수초와 눈을 맞추고 경의를 표하게 된다. 비슷한 시기에 노루귀가 낙엽을 뚫고 올라와 흰색, 분홍색 꽃망울을 터트려도 관심이 없는 사람에겐 보이지도 않는다. 그 존재를 알아보는 순간, 사방에 널린 노루귀가 수줍은 듯이 인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수줍은 노루귀에 한마디를 건넨다.
'네가 노루의 귀를 닮아서 노루귀구나! 추위를 견디느라 고생 많았다. 마음을 주지 않으면 야생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남들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나와는 상관없는 풀일 뿐이다. 그런데 마음을 주면 그동안 몰랐던 새로운 것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3월이 되면 가슴이 설렌다. 복수초, 노루귀뿐만 아니라 겨우 내 움츠러들었던 꽃들이 기지개를 펴기 때문이다. 손톱만 한 큰개불알꽃(봄까치꽃)은 보라색 자태가 너무 꼽다. 성냥개비 대가리만 한 꽃마리는 꽃이 피었다고 해도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관심을 갖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뿐더러 무심코 밟을 수도 있다. 작은 생명에 조금이나마 마음을 주면 봄이 다가오는 길목에서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그게 그들과 세상을 함께 사는 사람의 예의다. 꽃의 이름을 불러주기 시작하면 그 꽃은 관찰자의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고 의미를 얻는다. 관심의 마법이다.
잠시 멈춤 - 멈춰야 더 자세히 볼 수 있다
자연에 안긴 사람들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사는 삶이 잘 사는 것일까? 이는 철학적 물음이자 모든 사람의 고민이다. 나는 유년 시절을 시골에서 보내다가 도시로 나왔다. 산업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농촌 사람들은 하나둘 도시로 나갔다. 도시는 논도 밭도 없는 가난한 사람이 먹고살 수 있는 탈출구나 다름없었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절망감이 엄습해 왔다. 소유한 농경지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아직 열네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도 앞이 캄캄하게 느껴졌다. 집 팔고 소 팔아서 마련한 돈 50만 원을 들고 대구로 나갔다. 그게 1978년이었다. 도시로 나가 공부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게 내게는 유일한 선택지였다. 당시만 해도 노력하면 개천에서 용 나는 게 가능한 시대였다. 어머니와 누나의 희생을 발판 삼아 오직 공부에만 매달렸다. 그 후 자연, 농촌, 시골 등과 같은 단어는 멀리해야 할 것이었다.
어떤 삶을 살든 자신이 태어난 곳은 바꿀 수도 바뀌지도 않는다. 좋든 나쁘든 그 영향을 받으며 산다. 그러던 1996년 어느 날,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끌려 거리를 두고 싶던 자연과 손을 잡았다. 회사 내에서 자연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일을 맡게 된 것이다.
이게 계기가 돼 이 순간까지도 자연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자연 다큐를 만들고 동물 생태를 연구한다. 그러고 보면, 나는 아무래도 흙과 바람과 물과 어떤 친화력이 있음이 틀림없는 듯하다.
끌어당김은 또 다른 끌어당김을 만드는 것 같다. 최근 내추럴 휴먼 다큐-자연의 철학자들(이하 자연의 철학자들)이라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제작하게 된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닐지 싶다. 나처럼 먹고살기 위해 시골을 떠나왔던 사람이 다시 자연으로 들어가 자신만의 삶을 사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것도 단순히 자연 속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기존의 도시적 삶에 대해 반성하고 자연과 더불어 성찰적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프로그램을 시작할 무렵 우리 사회는 코로나19의 대유행으로 개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닫힌 세상에서 살았다. 이러한 전대미문의 상황은 태초에 자연 속에 살던 인간의 본성을 자극했다. 자연의 철학자들은 사람들의 허전한 마음을 파고들었다. 시청자들은 내가 가지 못하는 자연 속에서 자신만의 삶을 살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며 대리만족했다.
'이 코로나가 끝나면 나도 자연으로 돌아가리라!'
자연의 철학자들에 자신의 삶을 공개한 사람들은 순정한 삶을 산다. 모든 욕망을 버리고 오직 자연이 주는 사계절의 멋과 맛을 온몸으로 느끼며 산다. 은퇴 후 자연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분들도 있지만 자신의 선택으로 일찌감치 그곳으로 들어간 사람도 많다.
그들의 삶은 빨리빨리 흐르는 도시적 삶과 달리 느릿느릿하다. '느림의 미학'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그럼에도 누구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행복을 느낀다. 이 행복한 삶을 찾은 곳이 바로 자연이다. '유유자적' '지금 이 순간', 구름처럼 바람처럼 등의 부제처럼 다들 자연 합일적 삶을 살려는 분들이다. 평생 자연 다큐를 제작한 PD가 만든 자연의 철학자들은 그렇게 시청자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다큐멘터리의 시청률이 예전만 못하다 못해 몰락해가는 시대에 최고 시청률 9퍼센트를 넘기기도 했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자연 속 삶을 갈구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런데 자연 다큐 제작 이력 때문에 내가 이 프로그램을 잘 만들지 강한 의구심을 표현하는 이도 있었다. "동물 꽁무니만 따라다니던 사람이 휴먼(사람을 소재로 다루는 다큐멘터리)을 어떻게 알아?"
사실 자연과 휴먼 다큐는 서로 다른 영역이다. 기다림을 무기로 만드는 야생동물 다큐와 출연자와의 친화력으로 풀어내는 휴먼 다큐는 다루는 소재와 방식이 서로 다르다. 하지만 자연의 철학자들은 '내추럴 휴먼 다큐'라는 수식어에서도 알 수 있듯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얘기다. 그래서 그 진정성을 읽어내려는 노력으로 출연자들이 시청자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담아낼 수 있었다. 2년여 동안 자연에 안겨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제작자로서가 아니라 이 시대의 한 시민으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해 볼 수 있었다.
그중에서 내게 새로운 영감을 준 분들을 반추해보고자 한다. 예전부터 알고 있거나 간접적으로 알던 분들로, 살아가는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자연에 관한 관심과 애정만큼은 두둑했다. 그들이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행복을 느낀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본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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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