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의미를 잃기 전에
 
지은이 : 윤영호 (지은이)
출판사 : 안타레스
출판일 : 2025년 04월




  •  ‘좋은 삶’과 ‘좋은 죽음’을 잇는 통찰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성찰합니다. 사랑, 성장, 건강, 죽음 등 삶의 본질적인 주제를 철학적이고 실천적으로 다루며, 후회 없는 삶의 방향을 제시해줍니다.


    삶이 의미를 잃기 전에


    사람으로 산다는 것

    운명을 바꾸는 유일한 존재

    철학자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의 말처럼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을까? 아니다. 우리 사회는 태생적으로 불평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각자 유일한 존재로서 자유를 존중받아야 하고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 사회와 국가는 이런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나는 부끄러운 삶을 살았고 많은 죄를 지었다. 그러나 속죄하는 마음으로 자유와 평등 실현에 도움이 되는 일을 위해 노력해왔다. 나는 스스로 드러내기보다는 조용히 돕는 자로 살길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힘들고 비난받을지라도 신념을 실천하는 삶을 선택해야만 했다.


    인간의 부족함은 외적인 불완전성과 내적인 탐욕(동물적 욕망)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인간은 위대하다. 지위, 빈부, 건강 등의 사소한 차이로는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다만 자기 스스로나 타인에 의해 과소평가하거나 잊고 살아갈 뿐이다. 인간의 삶은 부족함으로부터 위대함을 추구해가는 과정이다.


    나는 인간이 위대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위대함은 성공이나 권력을 말하는 게 아니다. 고통 속에서도 의미와 가치를 찾고, 성장과 독립을 추구하며,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고자 노력하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위대함이다. 신체적·생리적·정신적·유전적 한계를 변화시키는 과정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우리의 운명을 바꿀 이 변화는 단순히 생각만으로, 일회적인 행동으로 이끌어내지 못한다. 변화는 생각, 행동, 습관, 성격을 거쳐 운명에 이르는 지속적이고 의식적인 노력의 과정을 통해서라야 비로소 가능하다. 이를 의사이자 정치사상가 새뮤얼 스마일스가 《자조론(Self-Help)》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잘 표현했다.


    "생각을 바꾸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을 바꾸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을 바꾸면 성격이 바뀌고, 성격을 바꾸면 운명이 바뀐다."


    변화된 생각은 행동의 변화를 이끌고, 행동을 반복하면 습관이 된다. 이 습관은 궁극적으로 욕망에 적합한 성격의 변화를 불러오게 되며, 성격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욕망을 실현할 능력도 함께 갖추게 된다. 결국 이 모든 과정은 운명의 변화를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다만 성격을 바꿀 만큼 강렬한 욕망과 그 욕망을 실현할 능력을 갖췄는지가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우리가 현재 위치에서 자신의 성격, 능력, 욕망의 방향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앞으로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으며, 나아가 자신의 운명도 일정 부분 가늠할 수 있다. 동물적인 생존의 욕구에서 출발해 공동체 속에서 전인적 성장을 이루며 완전한 인간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동물적 욕구에 머물지 않고 지혜와 완성의 충만함을 향한 욕망과 인류에 대한 사랑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우리 주변의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돼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 영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지, 부정적으로 받아들일지는 우리 자신에게 달렸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와 다르다. 어제의 나는 이미 사라진 존재이며, 오늘의 나는 내일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구분하지 못하지만,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들은 이미 다 변해 있고, 정신을 구성하는 내 기억과 감정과 생각 또한 모두 달라져 있다. 세포 속에 있는 유전자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해도 그 유전자를 구성하는 성분은 계속 변한다. 단지 유전자인 신호와 서열만 변하지 않을 뿐이다.


    이처럼 우리는 매일 새롭게 태어난다. 그러므로 과거에 연연하기보다 현재의 삶에 충실해야 한다. 현재의 우리와 나와 연결된 존재들, 그리고 소중한 인연과 가치를 발견하며 살아가는 그것이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



    삶의 가치를 생각할 시간

    불확실한 세상을 헤쳐 나가는 일

    우리는 매일 불확실성 속에서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일상적인 상황에서조차도 불확실성은 존재한다. 운전할 때 어떤 길로 가야 막히지 않을지 고민하는 것에서부터, 허리케인 같은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 생존하기 위한 결정을 내리는 것까지, 우리는 정보 부족, 예측 오류, 돌발 변수 등으로 선택에 어려움을 겪는다. 내비게이션이 발달해 얼마든지 실시간 교통정보를 받을 수 있지만, 희한하게 그쪽으로 방향을 틀면 막힐 때가 있다. 정보가 틀렸다기보다는 똑같은 정보를 얻은 다른 운전자들도 그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불확실성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세 가지 시나리오를 준비해 움직여야 한다.


    첫째는 ‘최상의’ 시나리오다. 가장 낙관적인 결과를 상정하고 준비한다.

    둘째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말 그대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대응책을 마련한다.

    셋째는 ‘가능한’ 시나리오다.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대안을 중심으로 전략을 세운다.


    코로나19 팬데믹 때 보건 당국의 대응처럼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체계적 접근은 개인의 안전과 사회적 가치를 모두 고려한 합리적 의사결정을 이끌어낸다. 불확실성과 역경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다.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인간적 배려와 연대가 우리를 성장하게 해준다. 완벽한 예측이나 결정은 불가능할지라도, 서로를 이해하고 도움을 주는 과정에서 공동체는 더욱 단단해질 수 있다.


    불확실성을 극복하는 힘은 우리가 내리는 선택의 결과보다 선택을 통해 얻는 교훈과 그 과정에서 발현되는 인간성에서 나온다. 피할 수 없는 불확실성 속에서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서로를 배려하고, 실수를 용납하며, 함께 성장하는 기회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나아가 세상이 불확실하다면 우리 스스로 주인이 돼 삶을 개척해야 한다. 내가 길을 만들고 주인처럼 살아야 한다.


    《논어(論語》 ‘옹야(雍也)’에서 공자(孔子)는 이렇게 말했다.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


    안다는 것은 그런 진리가 있음을 그저 알 뿐이다. 좋아한다는 것은 진리를 얻긴 했으나 완전히 얻지는 못한 상태다. 즐긴다는 것은 진리를 완전히 얻어서 그야말로 만끽하는 경지다.


    나도 함께 일하는 연구원들에게 자주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이왕 해야 할 일이라면 주인의식을 갖고 해보세요. 월급도 주고 사업비도 제공하면서 일해보자고 하는데, 마치 내 일처럼 해 본다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 않겠어요?”

    “조직은 늘 역동적입니다. 정지된 상태로 있지 않아요.”

    “부품처럼 일하지 마세요. 시키는 대로만 하면 기계 부품일 뿐 입니다.”


    주어진 일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성장의 기회로 삼을 수 있지만, 소극적으로 남이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은 그 일을 압도할 수 없고 자기 삶의 진정한 주인도 될 수 없다.


    책을 읽을 때도 그렇다. 글자를 읽는 것과 글을 이해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단순히 글자만 읽고 다 읽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글의 내용을 이해하는 사람도 있으며, 저자의 의도까지 헤아리는 사람도 있다. 때로는 저자가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사람도 있다. 일도 똑같다. 시키는 한에서만 과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있고, 그 일 자체의 의미를 이해하고 창의적으로 접근하는 사람이 있다. 당연히 평가도 달라진다. 여러분이라면 어느 쪽을 선호하겠는가? 심지어 나는 연구원들에게 이렇게 묻기도 한다.


    “연구가 꿈에 나타난 적이 있습니까?”


    진행하고 있는 연구에 관해 항상 진지하게 고민하고 주인의식을 가졌다면 꿈에서도 나타난다. 바둑을 즐기는 사람은 길을 걷다 마주치는 사람들이 바둑알로 보이고, 축구를 즐기는 사람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수비수로 보이기도 한다. 이런 몰입은 일을 잘 해내는 것을 넘어 자신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스스로 주인으로서 일한다면 그 사람은 훗날 리더로 성장했을 때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그 역할을 해낼 것이다.


    아무래도 내가 연구를 하는 사람이라 연구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의학 연구는 단순한 일이 아닌 몰입과 열정과 끊임없는 고뇌를 요구하는 과정이다.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연구의 세계는 단순히 데이터를 분석하고 결과를 논문으로 정리하는 과정이 아니고 호기심과 성실함 그리고 열정을 바탕으로 환자를 위한 해결책을 찾는 여정이다. 이 같은 과정에서 연구원들이 참된 연구자로 거듭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내게 큰 보람이자 기쁨이다. 연구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무엇인가?"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고자 연구자는 기존 연구를 검토한 뒤 새로운 연구 방법을 설계해 자료를 수집하고 해석한다. 이 과정에서 연구자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스스로에게 의미 있는 목표를 부여하면서 계속 ‘나는 왜 이 연구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과 씨름한다. 연구는 단순한 업무가 아니라 몰입과 열정이 필요한 작업이다.


    원하지 않는 삶을 노예처럼 소극적으로 살아갈 것인가, 주인의식을 갖고 적극적으로 개척할 것인가?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태도를 바꿔 상황 자체를 오롯이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삶을 긍정하고 배우려는 자세를 가지면 세상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고생은 형벌이 아니다. 힘들지 않은 일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어떤 일을 열심히 추진하다가 벽에 부딪혀 괴로워하고 있노라면 누군가 이렇게 말하곤 했다.


    “고생하는 것 잘 알지.”


    나는 그 말이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내가 열정을 다해 일하는 까닭은 다른 사람이 내 고생을 알아주길 바라거나 어떤 성취가 내 덕에 이뤄졌다고 칭찬받고 싶어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내게는 내가 판단할 때 지금 하는 일이 의미와 가치가 있는지만 중요하다. 나는 늘 그렇게 살았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다. 세상의 인정보다 나 스스로 의미를 찾을 수만 있으면 된다. 내가 하는 일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거나,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지 못하더라도 후회하지 않는다. 옳다고 믿는 일을 지치지 않고 실행할 뿐이다. 걸림돌을 극복하면서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


    남의 삶이 아닌 내 삶이다. 그리고 여러분의 삶이다. 삶의 가치 또한 우리 자신이 만든다. 세상의 인정이나 칭찬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이 믿는 바대로 묵묵히 걸어가는 과정이 우리 삶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성장의 조건

    함께 날아오를 용기

    내가 건강하고 성장해야만 다른 존재들도 긍정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도울 수 있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건강과 성장과도 연결된다. 내가 건강해야 환자를 돌보는 일도 건강하고 효과적으로 해낼 수 있다.


    인간은 원시 시대의 생활에 적응하도록 진화했지만, 현대 생활의 요구에 맞게 유전적으로 변화하지는 못했다.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생존하고 요구되는 소임을 수행하면서 삶을 온전히 살아가기 위해서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 특히 인간으로서 인정받고 자아실현을 달성해 인간과 세상에 이바지하는 꿈을 이루려면 건강과 성장이 필수적이다.


    인간은 조상으로부터 이어진 유전과 신체적·정신적 역량 그리고 가정, 교육, 사회, 제도 등 태어나고 자란 환경 속에서 형성된 습관과 성격에 따라 각기 다른 능력을 갖추고 있다. 모든 인간은 고유한 특성이 있고, 그 능력 또한 저마다 다르다. 인간이기에 부족한 부분도 있어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낼 수는 없다. 시대와 운에 따라 능력 발휘 정도가 달라질 수도 있다. 물론 노력으로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지만, 개인적인 노력조차 유전적 특성, 신체조건, 환경 등에 의해 형성된 성격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만들어낸 것들로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하고 서로를 위로하며 살아갈 수 있다. 혼자는 어려울지라도 함께라면 가능하다. 아무리 힘든 세상이라도 멋지게 살아보자. 세상이 너무나 빠르게 변해 인간의 진화가 따라잡지 못하는 듯 보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배우고 감당하고 판단하면서 결정해야 할 책임을 짊어진 존재들이다.


    이 모든 것이 남의 탓도 내 탓도 아니다. 자연의 탓이고, 인류의 탓이며, 진화와 우주의 탓일 수도 있다. 심지어 신의 탓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위로해야 한다. 함께 판단하고 결정하고 책임을 나누면서 살아가야 한다. 개인을 넘어 공동체로서 성장하는 꿈을 가져야 한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위기가 찾아왔을 때 서로에게 희망이 될 든든한 등대가 되자. 거친 비바람 속 바다에서 한 줄기 빛을 비추는 등대처럼, 우리도 서로에게 그런 존재가 돼야 한다. 우리는 경쟁 상대가 아니다. 이기고 지는 승부를 겨루는 관계가 아니라,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위해 각자의 역할을 하며 살아가야 할 협력자다. 함께 인생의 위기를 극복하고 나아갈 동료로, 공동체의 운명을 함께 짊어진 존재로, 서로를 지지하며 살아가자.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함께하는 이유다.


    삶이 어려운 까닭은 인간에게 다양한 역할이 요구되는 동시에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유전적으로 주어진 능력을 넘어서는 더 큰 역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잠재력은 개인마다 다르다. 유전적 특성과 환경적 요인에 따라 출발점은 다를 수 있지만, 삶 속에서 역량을 어떻게 개발하고 어떤 역할을 하면서 살아가는지에 따라 성격과 운명이 결정된다.


    현대인의 건강은 유전적 요인이 약 5%, 의료가 10%, 습관이 30%, 사회 환경이 55% 정도의 영향을 미친다. 새뮤얼 스마일스는 인간의 성격과 운명은 생각, 행동, 습관에 의해 결정된다고 봤다. 우리는 동물적인 존재로 시작해 사회적 인간으로 성장하며, 합리적 이성을 갖추고 명상과 기도 그리고 나눔의 습관을 통해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간다. 이처럼 인간의 삶은 건강과 마찬가지로 습관과 성격에 의해 큰 영향을 받는다.


    공동체적 관점에서 인간은 우주의 일부로서 세상을 창조한 신의 동반자이기에 맡겨진 소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초월해 영적 존재로 살아가기 위한 여정 역시 건강과 성장을 필요로 한다. 인생은 때로 우리에게 감당하기 벅찬 것들을 요구한다. 유전적 진화는 현실을 따라잡기엔 너무 느리고, 우리 는 많은 것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며 동반자로서 함께 어려움을 이겨내고 성장해야 한다.


    우리의 연대 의식은 후손들에게 더 나은 환경을 물려줄 힘이 될 것이다. 고귀하고 소중한 삶의 기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는 다시 일어서고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는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식과 판단은 어떨까? 이는 건강과 성장을 이루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지만, 인간의 인식과 판단은 본질적으로 완벽할 수 없다. 인간의 인식과 판단은 항상 옳을 수 없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제한적일 뿐만 아니라 왜곡될 가능성이 있고, 자기 경험과 지식이라는 틀에 갇혀 있으며, 감정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2015년의 일인데, 스코틀랜드의 케이틀린 맥네일(Caitlin McNeil)이라는 가수가 소셜 미디어에 옷(드레스) 사진을 올리자 인터넷상에서 논란이 일었다. ‘파란색 바탕에 검은 줄무늬(파검)’로 보인다는 주장과 ‘흰색 바탕에 금색 줄무늬(흰금)’로 보인다는 주장이 충돌했다. 똑같은 사진을 두고 사람마다 색을 인식하는 데 극명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 큰 화제가 됐다. 어느 쪽이 옳은 걸까?


    사실 양쪽 다 맞다. 색깔은 적색, 녹색, 청색에 반응하는 우리 눈의 원추세포가 어떤 빛에 더 많이 활성화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인식된다. 색맹이 아니더라도 사람마다 원추세포 활성화 정도가 달라서 모두가 똑같이 객관적으로 색을 인식하지는 않는다. 각자의 경험에 따라 뇌에서 색을 보정한 결과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진의 색을 '파검으로 본 사람은 '밝은 빛을 비춘 파란색 바탕에 검은 줄무늬 드레스'라고 뇌에서 색을 보정한 것이고, '흰금'으로 본 사람은 '역광으로 그늘이 진 흰색 바탕에 금색 줄무늬 드레스'라고 보정한 셈이다. 결국 어느 쪽 판단이 옳거나 그른지 따질 수 없는 문제였다. 단순히 색을 보는 문제에서도 이렇게 다를 수 있다면, 더 많고 복잡한 정보를 토대로 해야 하는 판단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조선 시대 황희(黃喜) 정승의 일화 가운데 그가 각기 다른 주장을 펼친 하인들에게 “너도 옳고, 네 말도 옳다"고 한 것은 그들 각자의 관점에 거짓이 없음을 헤아렸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직한 이성조차 때로는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이해해야 타인의 생각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해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윈-윈(win-win)'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바다처럼 별처럼

    삶의 품격을 지키는 길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때 순수했던 사람들이 지혜를 빙자한 영악함으로 가득 찬 모습을 볼 때가 있다. 전에 알던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세상에 찌든 태도를 보이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아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다 안다는 듯한 냉소적인 미소와 말투와 제스처를 보면 무엇이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인간에 대한 신뢰보다는 의심의 눈빛으로, 조심스럽고 계산적으로 사람을 대하며, 그래야 손해 보지 않고 산다는 듯한 태도는 마치 세상의 진리를 터득한 양 비웃음을 짓는다. 그런 모습을 마주할 때면 가슴 깊은 곳에서 저며 오는 슬픔을 참기가 힘들다.


    혹시 나도 그렇게 변해버린 건 아닌지 스스로 돌아본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내 안에서도 발견된다면 그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상대방을 인간으로서 존중하며 "되는 방향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라는 말 한마디를 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걸까? 원칙대로 살아가는 것이 "무슨 소용 있느냐"는 표정으로 비칠 때 느껴지는 서글픔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세상에 대한 긍정과 숨겨진 가능성을 발휘하기보다는, 세상에 적응하며 인간에 대한 미움과 불신을 키워가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하는 무력감은 참으로 견디기 어렵다.


    혹시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모습으로 비치거나 그들을 이렇게 만든 데 나도 일조한 것은 아닐까 반성하게 된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점이 있다. 세상이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세상은 단지 그 사람 안에 있던 면을 끌어내는 동기를 제공했을 뿐이다. 그 경험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활용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몫이다. 세상과 다른 사람을 탓하기 전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이 말했듯 인간은 성 프란치스코(St. Francisco)가 될 수도 있고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울러 나는 '끼'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여자든 남자든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저돌적으로 자신의 길을 향해 달려드는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실수하거나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스스로 좌절할 때도 있다. 하지만 절망 속에서 울부짖는 모습조차도 아름답다. 그런 과정을 통해 끼는 다듬어지고 성숙해지며, 언젠가 찬란히 빛을 발할 날이 올 것이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미술이나 음악 같은 창작의 세계에서 자주 본다. 그러니 그들을 이해하고 기다려 주자. 그들의 끼가 빛날 수 있도록.


    그들은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세상을 진실하게 대하는 사람이다. 그들에게는 주변 사람들까지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다. 이 마력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들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끼를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 끼는 창조적이며, 우리 사회를 더욱 풍요롭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각자 숨겨진 끼를 하나씩은 갖고 있다. 자신을 유일한 존재로 만드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끼 말이다. 다만 두려움 속에 감춰져 있거나 주위 환경 때문에 억눌려 있을 수도 있다. 세상에 대한 냉소와 분노를 털어내고 자기 자신 안에 숨어 있는 끼를 드러내보자.


    세상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싶다. 그들의 숨은 끼를 찾아주고 그들이 도전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그들의 실수를 너그럽게 덮어주고 두려움을 감싸주자. 미래에 대한 긍정과 상상력을 통해 인간과 삶에 대한 애정과 희망을 키우며 우리 세상을 더 밝고 따뜻하게 빛나게 만들자.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니 난자와 정자가 만나는 순간부터, 그 이전에 난자와 정자가 만들어지는 순간부터 이미 철저히 불공정한 조건 아래 놓여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불공정한 상황과 조건을 극복하고 공정한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다. 세상의 불공정과 인간의 부조리를 알기에 이를 바로잡고자 하는 의지를 갖는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신의 뜻을 실현하고자 하는 구도자라 할 수 있다.


    일찍이 공자는 중용(中庸)》에서 이렇게 말했다.


    "천하와 국가도 잘 다스릴 수도 있고, 벼슬과 봉록을 사양할 수도 있으며, 서슬이 번쩍이는 칼조차 밟을 수 있지만, 중용을 지키기가 참으로 어렵구나.”


    중용이란 올바른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는 아무런 방향성도 없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태도와는 다르다. 예컨대 어떤 부자(父子)가 당나귀를 타고 가며 사람들의 말에 따라 행동을 바꾼 이야기처럼, 남의 말에 흔들리는 것은 결코 중용이 아니다. 중용은 무지한 사람이 보기에 아무런 색깔도 없고 가치관이나 줏대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진리와 정의, 사랑이라는 기준을 바탕으로 흔들림 없이 나아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편적 기준이라는 것도 진정한 진리와 정의와 사랑을 담보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울대학교 입시제도를 논할 때 그것은 한 개인의 욕심이나 현재의 인기와 평판에 휘둘릴 일이 아니다. 백년지계를 내다보는 안목으로, 중용을 실현하려는 의지를 바탕으로 해결해야 한다.


    때로는 주관적인 것이 오히려 진정한 가치를 담을 수도 있다. 과거의 가치관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현상들이 항상 나타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발전적인 관점에서 더 진보적디고 포괄적인 세계관이 새로 등장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세계관은 이해받지 못하거나 비난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또한 각오해야 한다. 당시에는 인정받지 못했던 철학, 사상 그리고 예술작품들이 먼 훗날 가치를 인정받는 경우가 많듯이, 새로운 시도는 시간이 지나야 빛을 발할 때도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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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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