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오늘날 철학자들 가운데 가장 많이 읽히고 인기 있는 철학자다. 대부분 ‘니체’ 하면 “신은 죽었다”라는 말이나 ‘초인(Ubermensch)’, ‘아모르 파티(Amor Fati)’를 떠올린다. 그러면서 자신도 니체 같은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과연 ‘니체 같은’ 생각이란 무엇일까? 또 니체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일까? 《니체와 함께 지적 대화를》은 이러한 질문에서 비롯되었다.
사실 니체 철학은 어렵다. 지금까지 수많은 니체 철학책이 나왔고,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졌지만, 니체 특유의 문체와 비유로 인해 그 내용의 진의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이렇듯 ‘읽기 어려운’ 독자들을 위해 오랫동안 니체를 비롯한 철학을 깊이 탐구해 온 양원근 작가가 니체 철학을 삶에 녹여낸 철학책을 펼쳐냈다. 이 책은 니체 철학의 원문을 바탕으로 니체가 전하려던 핵심 메시지를 쉽게 이해하고, 자기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작가가 직접 경험한 사례와 깨달음을 담아냈다. 니체를 잘 모르는 독자들은 물론, 이미 니체 철학을 접한 독자들 역시 이 책을 통해 니체 철학에 대한 이해의 폭이 더 넓어져 관계와 일, 감정과 태도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
“철학은 느리다. 하지만 빨리 가는 것보다 ‘내가 왜 그 길을 가는지’ 아는 일이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니체를 통해 더 많은 답을 얻기보다 더 ‘깊은 질문’을 품게 되기를 바란다. 그 질문 끝에서 자기 삶을 조금 더 용기 있게, 조금 더 정직하게, 조금 더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바란다.”
양원근 작가의 말이다. 사실 우리는 남들 눈치를 보느라, 착하게 보이기 위해, 또는 실패가 두려워서 자신을 희생하거나 괴롭히는 일이 많다. 그의 말처럼 ‘깊은 질문’을 품는다면 스스로 가장 ‘깊은 답’을 찾을 수 있다.
이 책은 그저 단순히 ‘읽고 끝나는’ 철학책이 아니라, 자기 삶을 재구성하게 만드는 ‘실천하는 철학’의 안내서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진짜 나’를 발견하여 타인의 기준이 아닌 ‘내 삶의 주인’으로서 자아를 실현하고, 삶의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게 될 것이다. 지금 삶의 고통과 괴로움에 지쳐있다면, 인생을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을 몰라 혼란스럽다면, 내 인생을 ‘나답게’ 살고 싶다면 바로 니체와의 지적 대화가 필요한 순간이다. 《니체와 함께 지적 대화를》이 해결책이 되어줄 것이다.
■ 저자 양원근
현 ㈜엔터스코리아 대표. 20년 이상 출판기획자로 활동하며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탄생시켰고, 수많은 신인 작가들의 등단과 성장을 이끌어왔다. 또한 작가로서 《쓸수록 돈이 된다》, 《부의 품격》, 《나는 죽을 때까지 지적이고 싶다》 등을 집필하며 많은 독자들에게 ‘읽는 삶’에서 ‘생각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계기를 전해왔다. 그는 오랫동안 니체를 비롯한 철학을 깊이 탐구해왔으며, 지난 4년간 수많은 사람들에게 무료 철학 강의를 이어오고 있다. 그의 철학 수업은 단순한 지식 전달에 머물지 않는다. 삶의 방향을 잃었던 사람들이 다시 자신을 발견하고, 관계와 일, 감정과 태도에서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며 “인생이 바뀌었다”라는 고백을 이어가고 있다. 《니체와 함께 지적 대화를》은 저자가 오랜 시간 니체를 공부하며 삶 속에서 직접 부딪히고 사유한 흔적을 담아낸 책이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니체 철학을 어렵고 멀게 느끼는 대신, 현실의 고민과 연결된 살아있는 사유로 만나게 된다. 이 책은 단순히 읽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보고 삶을 다시 구성하게 만드는 ‘실천하는 철학’의 안내서가 되어줄 것이다.
인스타그램: @wongeun.yang
■ 차례
프롤로그. 왜 지금, 다시 니체인가
1부. 우리는 왜 이렇게 스스로를 괴롭힐까
:니체가 바라본 도덕과 죄책감의 기원
짐을 지는 사람, 자유를 얻는 사람
책임을 선택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
시장의 파리에게 물리지 않는 법
죄책감은 정말 나의 것일까
우리 안의 가장 잔인한 재판관, ‘나쁜 양심’
찌질한 자책의 시간이 아닌 위대한 경멸의 시간을 가져라
잘못하지 않아도 미안해지는 마음
‘착한 사람 되기’를 포기하겠다!
내 티끌은 왜 들보가 되는가
내 안에 들어온 CCTV
2부. 왜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할까
:니체가 해부한 원한과 비교의 감정
강물 같은 말들, 바다 같은 마음
우리는 왜 그토록 인정받고 싶을까
난 약한 게 아니야, 선한 거지
비교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무시당했다는 감정은 왜 오래 남을까
잘 되어도 내 탓, 안 되어도 내 탓
나는 누구의 눈으로 나를 보고 있을까
내 지각에는 사정이 있고, 남의 지각은 인성 탓이다
금으로 장식된 감옥에서 탈출하기
정의로운 분노란 존재하는가
3부. 고통은 정말 피해야 할 것일까
:니체의 영원회귀와 삶의 긍정
운명애, 내 삶을 내치지 않는 태도
이 삶을 다시 살아야 한다면
이유 없이 존재할 수 있는 연습
삶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것
정말 두 번 다시 사랑하지 않을 것인가
고통을 사색하라, 그 시간이 너를 살게 할지니
고통은 사람을 바꾸지 않는다, 반복이 바꾼다
누가 당신의 성공을 정의하는가
삶을 긍정한다는 것
세상에 영원한 어둠의 터널은 없다
4부. 나는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을까
:니체가 말한 힘, 선택, 자기 삶
진짜 자유로운 사람은 왜 계속 배우는가
더 강해진다는 말의 의미
취향은 취향일 뿐
고독한 철학자의 길을 따르며
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다 보면
내가 하는 말이 내 삶이다
왜 니체를 공부하는가
실패보다 더 두려운 것
나는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고 있는가
안전한 삶이 정말 나를 지켜줄까
5부. 우리는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
:니체가 말한 거리, 우정, 사랑
나를 성장시키는 사람, 나를 소모시키는 사람
인간은 점일 수 없다
루소처럼 걷고, 소로처럼 보며, 쇼펜하우어처럼 듣기
진정한 호의란 무엇인가
좋은 의도라는 날카로운 칼
나이 들수록 왜 관계는 더 중요해지는가
서로를 생기 있게 만드는 관계란
친구는 왜 나를 불편하게도 해야 하는가
친절은 기술이고 습관이다
관심이 머무는 곳에 관계가 자란다
에필로그. 지금 내 삶을 사랑하라
니체 철학은 어렵다. 지금까지 수많은 니체 철학책이 나왔고,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졌지만, 니체 특유의 문체와 비유로 인해 그 내용의 진의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이렇듯 ‘읽기 어려운’ 독자들을 위해 오랫동안 니체를 비롯한 철학을 깊이 탐구해 온 양원근 작가가 니체 철학을 삶에 녹여낸 철학책을 펼쳐냈다.
니체와 함께 지적 대화를
우리는 왜 이렇게 스스로를 괴롭힐까 :니체가 바라본 도덕과 죄책감의 기원
짐을 지는 사람, 자유를 얻는 사람
누구나 살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 삶은 왜 이렇게 쉽게 풀리지 않을까, 왜 나에게만 이렇게 힘든 일이 일어날까….""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들은 스스로 질문하게 만든다. ""왜 나는 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지 않았을까, 왜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모든 면에서 부족할까…."" 이런 질문을 반복하다 보면 마음 한편에서 세상을 원망하는 감정이 생기기도 한다. 이런 복잡다단한 인간의 마음(감정)을 간파한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통해 인간이 정체성을 찾고 자아를 형성하는 과정을 ""낙타, 사자, 어린아이"" 세 가지 단계로 설명했다.
첫 번째 단계는 ""낙타""다. 낙타를 떠올리면 대부분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묵묵히 뜨거운 사막을 건너는 모습을 연상한다. 니체는 이런 낙타의 모습을 인간 정신의 첫 단계에 비유했다. 인간의 삶은 마치 사막처럼 삭막하고 메마른 상태의 길이 끝없이 이어지며, 낙타가 짊어진 무거운 짐은 인간 삶의 무게처럼 버겁다.
그래서 니체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짊어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에 대해 ""낙타""의 정신은 "나는 나의 짐을 피하지 않겠다"라고 답한다. 이것은 삶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길""을 걷겠다는 태도다. 즉 고통과 책임을 피하기보다 그것을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인 것이다. 니체는 이 단계에서 인간이 자기 삶을 향해 첫발을 내디딘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인간의 실제 모습은 어떠한가? 대부분의 사람이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가능한 한 짐을 피하려 하고, 어려운 선택을 미루려 한다. 다시 말해 힘든 길(삶)이 아닌 조금 더 편한 길(삶)을 찾으려 한다. 물론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니체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지적한다. ”삶의 짐"을 짊어지지 않는 사람은 결국 삶을 원망하게 된다.“
자신이 감당하지 않은 삶의 무게는 곧 다른 형태로 돌아온다. 가령 불만이 되기도 하고, 세상에 대한 원망이 되기도 한다. 이렇듯 삶을 감당하는 것이 아닌, 삶을 탓하는 태도에 니체는 ""노예 정신""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필요한 첫 번째 단계(정신)는 ""낙타""다. 삶의 짐을 기꺼이 짊어지고 사막으로 들어가는 존재가 되길 바란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사자""다. 사막 깊숙이 들어간 낙타는 ""사자""로 변한다. 사자는 사막 한가운데에서 거대한 용(龍)과 마주치는데, 이 용의 온몸은 금빛 비늘로 덮여 있고, 그 비늘 하나하나에는 ""너는 해야 한다""라는 말이 적혀 있다. 이 용은 사회가 만들어 놓은 온갖 규범과 명령을 상징한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일을 "해야 한다"라는 말을 들으며 살아간다.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런 선택을 해야 한다, 이런 길을 가야 한다….’
이런 말들은 부모의 명령이기도 하고, 사회의 기준이기도 하며,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사자는 거대한 용에게 "나는 원한다"라고 외친다. 이것은 ""해야 한다""는 말에 대한 반항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겠다는 선언이다. 즉 다른 사람이 정해준 기준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삶을 선택하겠다는 결정이다. 사실 똑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의무에 따르는 것""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은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해서 읽는 것과 내가 스스로 선택해서 읽는 것은 겉보기에는 똑같아도 전혀 다른 행위이다. 하나는 복종이고, 다른 하나는 선택이니까. 니체가 말한 ""사자의 정신""은 바로 이 선택의 순간을 의미한다.
세 번째 단계는 ""어린아이""다. 사자가 ""해야 한다""라는 낡은 규칙을 부수었다면, 어린아이는 새로운 시작(가치)을 의미한다. 니체에게 어린아이는 순수함과 놀이, 그리고 창조를 상징한다. 즉 어린아이가 싸우기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닌 삶을 창조하는 존재이듯, 우리도 타인의 기준에 맞춰 살아 가거나 끊임없이 저항하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삶""을 만들어 가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니체가 말한 ""인간 정신""의 세 가지 변화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 앞에 서게 된다. "나는 지금 어떤 단계에 서 있는가? 삶의 짐을 피하는 사람일까? 아니면 낙타처럼 자신의 짐을 짊어지고 사막으로 들어가고 있는 사람일까? 혹은 사자가 되어 ""나는 원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일까?" 어쩌면 중요한 것은 ""지금 어느 단계에 서 있는지""가 아닐지도 모른다. 삶은 한 번의 단계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날에는 낙타처럼 묵묵히 짐을 짊어지고, 또 어떤 순간에는 사자처럼 ""나는 원한다""라고 말하며 오래된 기준과 싸운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 모든 싸움이 지나간 뒤에야 어린아이처럼 가볍게 삶을 시작하는 순간을 맞이하기도 한다.
""낙타, 사자, 어린아이"" 세 가지 단계는 인간을 평가하기 위한 기준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하나의 방향에 가깝다. 짐을 피하려 할 때 우리는 세상을 원망하게 되지만, 그 짐을 스스로 짊어질 때 비로소 삶을 선택하는 사람이 된다. 그렇게 한 번, 또 한 번 자신에게서 자유를 얻어 가는 과정에서 인간의 정신은 조금씩 변해가는 것이다.
니체가 말한 세 가지 변화 이야기는 우리에게 한 가지 사실을 조용히 일깨운다. 삶의 짐을 짊어질 때 인간은 무거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금씩 자유로워진다는 사실을. 진정한 ""자유""는 아무 짐도 없는 곳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짐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순간, 인간은 비로소 삶을 스스로 선택하는 존재가 된다.
지금도 니체는 당신의 삶에 대해 묻는다.
"당신은 삶의 무게를 기꺼이 짊어질 것인가? 아니면 원망하며 피할 것인가?“
왜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할까 : 니체가 해부한 원한과 비교의 감정
난 약한 게 아니야, 선한 거지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에는 맹금(猛禽)과 어린양의 비유가 나온다. 맹금은 어린양을 잡아먹는다. 그러나 어린양은 그 힘을 막을 수 없고, 정면으로 맞서 이길 수도 없다. 그러자 어린양은 "맹금은 악하고, 맹금처럼 살지 않는 자신들은 선하다"라고 말한다. 맹금과 어린양의 비유는 힘이 없는 쪽이 자기 처지를 견디기 어려울 때, 어떻게 선과 악의 말을 만들어내는지 보여준다.
살다 보면 우리는 나보다 훨씬 잘나가고 앞서가는 사람을 볼 때가 있다. 나는 몇 번이나 고민했던 걸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도 있고, 내가 망설이는 동안 자리를 잡고 결과까지 만들어내는 사람도 있다. 내가 놓친 기회를 그 사람은 붙잡고, 나는 선뜻 못 했던 선택을 그 사람은 해낸다. 그럴 때 마음이 편할 리 없다. 부럽기도 하고, 속이 쓰리기도 하고, 내가 작아진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마음을 그대로 인정하지 못할 때가 많다. "나는 저 사람이 부럽다.", "나는 저렇게 하지 못했다.", "나는 지금 속이 상한다." 이렇게 말하면 내 부족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아서다. 그래서 다른 말이 나온다. "저건 너무 과하다.", "저 방식은 별로다.", "오래 못 갈 거다.", "나는 애초에 저런 건 원하지 않는다."
말은 상대를 향하지만, 실은 내 안의 불편함을 견디기 위해 꺼내는 말일 때가 많다.
니체는 이런 인간의 마음을 ""원한(Ressentiment, 르상티망)""이라고 불렀다. 흔히 원한이라고 하면 누군가를 오래 미워하고 복수심을 품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니체가 말한 원한은 그보다 더 넓은 의미다. 바로 갚아 줄 힘은 없고, 같은 자리에서 겨룰 수도 없고, 솔직하게 내 상처를 인정하기도 어려울 때 생겨나는 마음이다. 하고 싶은 말을 곧바로 하지 못하고, 내가 밀렸다는 사실도 받아들이기 싫고, 상대를 부러워하는 내 마음도 보고 싶지 않을 때, 나는 내 생각을 바꾸고, 내 말을 바꾸고, 나중에는 내가 무엇을 좋다고 하고 무엇을 나쁘다고 하는지까지 바꿔버린다. 니체가 말한 원한은 바로 그런 것이다. 상처 입은 마음이 자기 아픔을 그대로 말하지 못한 채, 다른 말로 돌아 나오는 방식 말이다.
그래서 원한에 붙들리면 사람은 “나는 저 사람이 부러워”, “나는 저 사람을 따라가지 못해 마음이 쓰려” 대신 “저런 성공은 값이 싸다”, “나는 저렇게까지 하면서 얻고 싶지 않다”라고 말한다. 내가 해내지 못한 성취를 깎아내리고, 내가 갖지 못한 것을 하찮게 만들고, 내가 따라가지 못한 길을 처음부터 바람직하지 않은 길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이 조금 버틸 만해진다. 내가 뒤처진 사람이 아니라, 더 바른 기준을 가진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면 이제 그 감정은 판단으로 굳어진다. 가령 어느 한 사람이 마음에 걸리는 데서 끝나지 않고, 비슷한 사람들 전체가 못마땅해진다. 앞에 나서는 사람은 가벼워 보이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은 거만해 보이고,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은 나대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다 보면 처음에 느꼈던 부러움이나 열패감은 점점 뒤로 밀려난다. 대신 “저런 사람들은 원래 그렇다”라는 식의 단정만 남는다. 내 마음에서 시작된 일이 어느새 상대의 본모습을 알아본 판단처럼 자리를 잡는 것이다. 그게 누군가를 향한 나의 기준으로 굳어버린다면, 과연 나는 올바른 판단과 관계를 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어린양이 “맹금은 악하고, 난 선해”라고 말한 건 무슨 수를 써도 자신은 맹금을 없앨 수 없기 때문이다. 힘으로 겨룰 수 없고 두려움을 없앨 수도 없어서다. 그러니 내 입에서 나오는 판단의 말을 가만히 볼 필요가 있다. 누군가를 두고 자꾸 비슷한 흠을 찾아내고 있다면, 그 사람이 정말 그런 사람인지 한 번 더 봐야 한다. 동시에 왜 내가 그 사람 앞에서 그렇게 예민해지는지도 같이 봐야 한다. 왜 저 사람의 방식이 유난히 거슬리는지, 왜 저 결과를 보고는 축하보다 설명이 먼저 나오는지, 왜 저 성공에는 쉽게 값을 깎아 매기고 싶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 자리에 남보다 뒤처졌다는 느낌이 있을 수도 있고, 놓쳐 버린 기회에 대한 아쉬움이 있을 수도 있고, 나도 저렇게 해보고 싶었지만 끝내 그러지 못했다는 속상함이 있을 수도 있다.
니체가 ‘원한’이라는 말을 한 것은 사람의 잘못을 꼬집고 몰아붙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 마음을 얼마나 교묘하게 감춘 채 살아가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사실 우리는 진실을 모르는 게 아니다. 오히려 때로는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악함을 선함으로 바꿔버린다. 부러우면 부럽다고 알고, 속상하면 속상하다고 알고, 내가 왜 이 사람 앞에서 마음이 좁아지는지를 먼저 보는 것. 그걸 볼 수 있으면 남을 깎아내리는 말은 줄고, 내 삶을 돌아보는 시간은 조금씩 늘어날 것이다.
고통은 정말 피해야 할 것일까 :니체의 영원회귀와 삶의 긍정
삶을 긍정한다는 것
죽음이라는 것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그 누구도 죽음을 먼저 경험할 수는 없다. 그래서인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대부분 금세 표정을 바꾼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지”, “괜히 생각하면 우울해져” 하면서. 삶을 사랑하려면 죽음은 멀리 두는 편이 낫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철학은 오래전부터 그 반대편에서 말을 걸어왔다.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바꾼다고 본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Epicurus)는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죽음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라고 말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풀어냈다. 에피쿠로스의 논리에 따르면,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죽음은 아직 오지 않았고, 죽음이 왔을 때는 이미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죽음은 살아 있는 나를 괴롭힐 수 없다. 죽음이 두려운 까닭은 ‘죽음’ 그 자체보다 살아 있는 동안 내가 그것을 미리 상상하며 공포를 키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아직 오지 않은 일을 미리 겁내느라 현재의 삶까지 망치지 말라고 말하는 듯하다.
에피쿠로스가 지키고 싶었던 것은 ‘아타락시아(Ataraxia)’, 곧 마음의 평정이었다. 그래서 죽음의 공포를 줄여야 비로소 지금의 삶이 덜 흔들리며 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의 말을 ‘죽음을 가볍게 여기라’는 뜻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죽음 때문에 현재를 희생하지 말라는 의미로 새겨야 옳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죽음보다 죽음에 대한 상상 때문에 더 괴로워한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병을 미리 두려워하고, 아직 닥치지 않은 이별을 예감하며 오늘의 관계까지 망친다. 에피쿠로스는 그 불필요한 공포를 걷어내고 싶어 했다.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Michel de Montaigne)는 《수상록》에서 키케로(Cicero)의 말을 첫머리에 가져온다. “철학하는 것은 죽음을 준비하는 일이다.”
몽테뉴는 죽음을 누구에게나 오는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세상의 지혜가 결국 우리를 죽음의 공포에서 조금씩 자유롭게 만드는 데 쓰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죽음을 나중의 사건으로 미루지 않는다. 죽음은 이미 삶 안에 있다고 본다.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느낌, 병, 상실, 관계의 끝, 이유 없이 찾아오는 허무, 이런 것들은 모두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지금, 여기서 알게 하는 경험이다.
몽테뉴에게 죽음은 추상적인 공포가 아니라 일상에서 조금씩 배우게 되는 현실이었다. 언젠가 끝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오늘은 달라진다. 지금 해야 할 말을 더 미루기 어렵고, 오래 방치한 관계를 그대로 둘 수 없고, 지금 살고 있는 삶이 정말 내 삶인지 묻게 된다. 죽음을 자주 생각하면 우울해질 것 같지만, 몽테뉴는 오히려 반대로 본다. 죽음을 외면할수록 삶은 흐려지고, 죽음을 삶 가까이에 둘수록 오늘의 선택은 또렷해진다는 것이다.
니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삶을 긍정한다는 말을 밝은 기분이나 낙관적인 태도로 이해하지 않았다. 고통과 상실, 실패와 끝을 삶 바깥으로 밀어낸 채 “그래도 삶은 아름답다”라고 말하는 식의 긍정을 믿지 않았다. 보기 좋은 부분만 사랑하고, 보기 싫은 부분은 지워버리는 긍정은 값이 싸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니체가 말한 삶의 긍정은 훨씬 투박하다. 죽음이 있다는 사실, 상실이 있다는 사실, 내가 끝까지 붙잡고 싶은 것조차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뺀 채로는 삶 전체를 긍정할 수 없다고 본다.
삶을 긍정한다는 것은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태도’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어두운 생각을 멀리하고, 상실을 외면하고, 유한성을 의식하지 않는 쪽이 더 건강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삶을 사랑하는 일이 아니라 삶의 일부를 삭제하는 일에 가깝다. 죽음은 고통스럽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워진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를 상상하는 일도 괴롭고, 언젠가 내 몸이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도 불편하다. 그런데 그 불편을 밀어낸 채 살면 삶이 편해지는 것 같아도 정작 중요한 것들은 자꾸 뒤로 밀린다. 시간이 끝없이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말은 다음으로 미루고, 정리해야 할 관계도 미뤄두고, 지금 바꿔야 할 삶도 나중 일처럼 넘기게 된다. 끝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사람은 오늘을 함부로 쓰지 않게 된다.
에피쿠로스의 말처럼 죽음은 살아 있는 나를 괴롭힐 수 없다. 그러나 몽테뉴의 말처럼 죽음은 이미 우리 삶 안에 있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채 오늘을 긍정해야 한다. 니체가 말했듯 삶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모든 상실을 받아들인 채 삶을 긍정할 수 있다면, 더는 오래 미뤄둔 말을 더 미루지 않고, 언젠가 사라질 관계를 지금 함부로 대하지 않으며, 끝이 있다는 이유로 삶을 가볍게 소비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 :니체가 말한 거리, 우정, 사랑
나이 들수록 왜 관계는 더 중요해지는가
니체에게 ""사랑과 우정""은 사람을 더 강하게 살아가게 만드는 관계의 형식이다. 그는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를 소유해선 안 된다. 상대를 위하는 말 속에 ‘내 기준’에 맞추라는 요구를 섞어서도 안 된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친구란 나를 더 나은 존재가 되도록 자극하는 사람으로 그린다. ""좋은 친구""는 내가 피하고 있는 문제를 같이 덮어주지 않는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있을 때, 계속 같은 핑계로 제자리에 머물 때,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며 책임을 피해 가려 할 때 그 자리에서 벗어나도록 자극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상대를 내 일부처럼 여긴다는 것은 그 사람의 선택을 내 기분에 맞추려 하고, 그 사람의 시간을 내 불안에 맞춰 쓰게 만들고, 그 사람의 변화를 내 허락 안에서만 받아들이려는 태도다. ""좋은 사랑""은 상대가 자기 일을 감당하고, 자기 판단을 믿고, 자기 삶의 방향을 잃지 않도록 돕는다. 그럴 때 관계는 각자가 더 제대로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 된다. 그래서 니체에게 좋은 사랑과 우정은 소유보다 높은 관계의 방식이었다.
이 말은 나이가 들수록 말은 좀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젊을 때 관계는 함께 시간을 보내는 즐거움으로 충분해 보일 때가 많다. 같이 밥을 먹고, 여행을 가고,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관계는 제 몫을 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관계의 무게가 달라진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향해간다. 그러면서 가진 것들을 조금씩 잃어간다. 체력도 줄고, 정신적으로도 약해지고, 사회적 역할이 줄고, 불러주는 자리도 줄어든다. 예전에는 나를 설명해주던 일과 성취와 바쁜 일정이 있었지만, 어느 순간 사람은 그런 것들 없이도 자신을 견뎌야 하는 시간 앞에 선다. 그때 곁에 남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노년의 풍경은 크게 달라진다.
누군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 삶을 더 잘 견딜 수 있고, 더 잘 바라볼 수 있고,
다시 써 내려갈 수 있다면 그건 얼마나 좋은 관계인가.
각자의 삶을 지닌 두 사람이 서로의 존재를 통해 더 잘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관계는 성숙하고도 아름다운 관계다.
철학을 공부하며 내게 가장 많은 변화가 일어난 부분 중 하나가 바로 ""관계""였다. 지난 시간 동안 내가 꾸려온 관계의 모습들을 되돌아보며 참 많이 부끄럽기도 했고, 또 스스로를 칭찬하기도 했다.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좋은 관계""에 대한 정의가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내게 그 정의가 무엇일까, 철학을 공부하며 기존의 것을 수정하고 재정립하고 또다시 다듬어 나가는 중이다. 무조건 내 편이 되어주는 관계도 나이가 들수록 그리 달갑지 않고, 나를 대신해 무엇이든 척척 해주는 사람 역시 좋은 친구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시간이 흐르며 내 직함이 사라지고, 내가 가진 것이 노쇠해질 때, 그때 내 곁에 좋은 사람들이 남기를 바라본다. 서로를 설명하지 않아도 이심전심으로 아는 사람, 내 과거를 함께 기억해주는 사람, 내가 약해졌을 때 나를 부끄럽게 만들지 않는 사람, 다시 내 삶을 살아가도록 조용히 곁을 지키는 사람 말이다. 사람은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지만, 혼자서는 자기 삶의 전부를 기억하기 어렵다.
내 삶의 어느 시절은 늘 누군가의 기억 속에 함께 있다. 이 글을 쓰며 잠시 두 손을 모아 기도해본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오랜 벗이 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