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랑을 모른다
 
지은이 : 스즈키 쇼 (지은이), 이지현 (옮긴이)
출판사 : 알토북스
출판일 : 2024년 07월




  • 105세의 저자 김형석 교수는 사랑과 행복의 관계를 탐구하며, 인생의 본질이 사랑의 나무와 숲을 키우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괴테의 사상을 통해 인간다움을 찾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에 있다고 강조하며, 자신의 경험과 역사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의 의미를 전달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모른다


    사랑도 기술이다

    사랑의 기술은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은 1956년 미국에서 출판되었다.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로 등극, 이후 70여 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제목만 보고 연애 방법을 알려주는 실용서로 착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고, 출간 당시 미국에서도 섹스 기술을 알려주는 책으로 오해한 사람이 꽤 있었다고 한다. 이를 우려한 에리히 프롬은 머리말에서 이렇게 책을 소개하고 있다.


    사랑의 기술에 대한 안이한 지침을 기대하고 이 책을 읽는 사람은 분명 실망할 것이다. 이런 기대와 달리 이 책은, 사랑이란 그 사람의 성숙도와는 관계없이 누구나 쉽게 탐닉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첫 문장은 이해하기 쉽다. “연애 방법이나 기술에 관해 쓴 책이 아니다.”라는 명시이다. 그러나 다음 문장은 꽤 충격적이다. “사랑이란 […] 누구나 쉽게 탐닉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라니. 대체 무슨 말인가? 사랑은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감정으로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에 빠지는 것 아닌가. 태생적 능력으로 누구나 사랑할 수 있고, 어렵게 배우지 않아도 되는 감정의 움직임이다. 그런데 에리히 프롬은 이것이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사랑은 ‘성숙한 성인만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을 체험하려면 ‘사랑이 무엇인지를 깊이 배워야 하고 사랑하기 위한 이론을 익히고 연습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사랑은 학교나 책을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체득하는 것으로 안다. 그런데 왜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배워야 한다라고 했을까? 거기에는 역사적 배경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가 《사랑의 기술》을 집필했을 당시의 미국은 자본주의 사상이 팽배해져 인간은 경제를 움직이는 단순한 부속품, 하나의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런 사회에서 인간은 ‘사랑의 본질을 상실하고 잘못된 사랑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착각하게 된다고 본 것이다.


    ‘사랑의 본질이 퇴색되어가는 사회는 미국이나 선진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현재 대다수 국가에서 이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사랑하지 않는(못 하는) 사람, ‘다른 사람을 제대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늘고 있다. 연애하고 싶지만 선뜻 시작하지 못하거나 단발적인 연애만 되풀이하는 경우이다. 서로 사랑해서 동거를 시작했지만 상대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헤어진 후에도 집착한다. 반대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칩거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을 보면 현대 사회에서 점차 진정한 ‘사랑이 사라지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긴다.


    프롬은 이러한 문제의 원인이 ‘사랑에 대한 오해에 있다고 보았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프롬이 말하는 ‘사랑에 대한 오해가 무엇인지, 현대인의 행동을 통해 살펴보자.


    사랑받기보다 사랑하기 위해 사랑을 배워야한다

    자, 이제 《사랑의 기술》의 1장으로 들어가 보자.


    현대 사회에서 사랑이 왜곡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사랑에 대해 배울 필요가 없다. 사랑은 누구나 가지고 태어나는 감정이라고 착각한다. 왜 이런 착각에 빠지게 되었을까? 프롬은 1장에서 이 착각의 배경이자 전제로 세 가지 오해를 지적한다.


    첫 번째 오해는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는 것으로 안다.


    사람은 대개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문제, 즉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받는 문제로 오해한다.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는 인간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연애 관련 서적을 읽어보면 ‘이성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옷을 입으면 사랑받을 수 있는지에 관해 언급한다. 독자의 최대 관심사도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사랑스러운 인간이 될 수 있는지다. 그를 위한 방법으로 남성은 돈과 권력, 여성은 이성을 매혹시키는 매력을 갖추는 것이다(여성의 매력은 시대에 따라서 달라졌다).


    한편 무슨 이유에서인지 ‘상대방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에 관한 책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프롬이 생각했던 사랑의 전제는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사랑하는 관계가 설정되면 ‘사랑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사회는 ‘여자의 행복은 사랑받으며 사는 것이다라는 정서가 만연하다. 부모가 딸에게 그렇게 가르치기도 한다.


    다음 상황을 떠올려 보자. 당신은 A를 사랑한다. 그런데 A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없다. 호감은 있는 것 같은데 ‘좋아한다라거나 ‘사랑한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한편 B는 당신에게 열정적으로 구애를 펼친다.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면 당신을 누굴 택할 것인가? 자신이 사랑하는 A인가? 아니면 당신을 사랑하는 B인가?


    당연히 A를 선택하는 사람도 있고 B를 선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배우자를 선택하는 경우라면 다르다. A는 가난하고 B는 부자라면 더 많은 사람이 B를 선택할 것이다. 이런 선택의 근간에 ‘행복은 사랑받으며 사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만일 이에 수긍한다면 당신은 미성숙하고 미성숙한 사랑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사랑에 담긴 힘

    본능은 사랑이라 부를 수 없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의 2장 ‘사랑의 이론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사랑에 관한 어떤 이론도 인간론, 즉 인간 실존론부터 시작해야 한다. 동물에게서도 사랑—이라기보다 사랑에 상응하는 것—이 발견되기는 하나 동물의 애정은 본능이다. 이런 본능은 인간에게도 남아있다. 그러나 인간이 동물과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본능의 세계에서 벗어나 자연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라는 해석이다. 모든 동물은 본능을 따른다. 태어날 때부터 유전자에 깃든 생활방식대로 살아간다. 흔히 “벌집은 기하학적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역할 분담이 정해져 있는 개미 사회는 놀랍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벌과 개미는 아무 생각 없이 오로지 본능에 따라서 행동할 뿐이다. 벌과 개미가 만든 사회는 인간이 만든 사회와 다르다. 의식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또한 어미가 새끼를 예뻐하는 모습을 보고 “역시 어떤 동물이든 어미는 자식을 사랑하는 법이다.”라고 말하며 ‘모성애를 언급한다. 하지만 이 또한 엄밀히 말하자면 동물은 본능에 따라 종족 번식을 위해 새끼를 낳고 키울 뿐이다. 곤충이나 새의 구애 행동도 인간과 닮았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인간이 동물의 행동에 인간의 사랑과 애정을 투영했을 뿐이다.


    이에 대해 “아니다. 우리 집에서 키우는 개나 고양이는 내가 주는 사랑에 반응하고 나를 사랑한다.”라고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는 애완동물이나 가축이 ‘인간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들도 자연에서 분리된 것이다.


    애완동물이나 가축 외 모든 동물은 자연과 합일을 이룬다. 자연과 밀착되어 있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에서 분리되고 말았다. 그로 인해 본능이 망가졌다.


    창조적인 일에서 신선한 사랑이 싹튼다

    프롬은 인간이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창조적 활동을 들었다. 목공이 책상을 만들거나 농부가 농사를 짓거나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등 인간이 외부 세계를 창조하며 소재와 합일(결합)을 이루는 것은 고독에서 벗어나려는 행위라는 것이다. 실제로 일(노동)하는 순간은 타인과 관계를 맺지 않더라도 고독을 잊어버린다. 또한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는 고독감을 낮추고 기쁨과 성취감에 이르게 해준다.


    다만 프롬은 모든 일(노동)이 고독에서 벗어나는 데 유효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음과 같은 조건을 붙였다.


    다만 이것은 생산적인 일, 즉 ‘내가 계획하고 생산하고 자기 눈으로 일의 결과를 볼 수 있는 일에만 해당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 노동자가 올라타고 있는 것과 같은 현대 사회의 노동 시스템에서 이런 노동 대상과 합일(결합)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노동자는 기계나 사회 조직의 부속물과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노동자는 본래의 자신이 아니다. 따라서 동조 이상의 합일(결합)은 결코 얻을 수 없다.


    과거 우리는 농작물이든 생필품이든 직접 만들어 내다 팔며 그것을 산 사람이 만족해하는 모습에서 노동의 참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합리화와 분업화가 진행된 채 상품의 일부 부속품을 만드는 작업만 맡는다. 하나의 제품을 만들어냈다는 성취감도 없다. 그저 조직의 일부만 담당할 뿐이다. 그로 인해 노동은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런 노동은 인간의 고독을 치유하지 못한다고 프롬은 단언한다.


    인간이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프롬은 ‘진탕 마시고 떠드는 상태, ‘집단에 대한 동조, ‘창조적 활동 이렇게 세 가지를 들었다. 하지만 고독에서 벗어날 근본적인 해결책은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인간은 어떻게 고독의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프롬의 대답을 들어보자.


    생산적 활동에서 얻을 수 있는 합일은 인간끼리의 합일이 아니다. 진탕 마시고 떠드는 융합에서 얻을 수 있는 합일은 일시적이다. 집단에 대한 동조에서 얻을 수 있는 합일은 거짓된 합일에 지나지 않는다. 완전한 해답은 인간끼리의 합일, 다른 사람과의 융합 즉 사랑에서 찾을 수 있다.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과 융합하고 싶은 욕망은 인간의 가장 강력한 욕망이다. 그것은 가장 근원적인 열정이고 이 욕망이야말로 일류를, 집단을, 가족을, 사회를 결합하는 힘이다. 융합을 달성하지 못하면 인간은 발광하거나 파멸하고 만다. 스스로 파멸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파멸시키기도 한다. 이 세상에 사랑이 없다면 인류는 단 하루도 존재할 수 없다.


    고독에서 벗어나고 싶다, 다른 사람과 융합하고 싶다는 욕망을 어떻게 만족시킬 것인가? 이 물음의 답은 바로 ‘사랑에 있다.



    사랑을 위한 조건

    사랑을 위한 처방전을 받아들자

    《사랑의 기술》의 마지막 4장은 ‘사랑의 수련이다. 멋스럽게 ‘수련이라고 번역했는데 원문은 ‘practice다. 프롬의 의도에 근접한 표현에서 보면 ‘연습에 해당한다.


    재차 말하지만 《사랑의 기술》은 구체적인 연애 기술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프롬은 4장 서두에서 처방전을 기대하는 독자가 “실망하게 될까 두렵다.”라며 다음과 같이 썼다.


    사랑은 개인적인 경험이며, 직접 경험하는 것 외에 그것을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


    사랑의 연습에서 무엇이 가능한가 하면 사랑의 기술의 전제 조건, 즉 사랑의 기술에 대한 접근 그리고 사랑의 전제 조건과 접근의 실용에 관해 논하는 것뿐이다. 이러한 목표로 향하는 계단은 오로지 자기 발로만 오를 수 있다. 결정적인 한 발을 내디딤으로써 논의는 끝난다.


    이는 ‘사랑의 수련 이전 단계를 서술하겠다는 의미이다. 일단 그것을 배워야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프롬이 4장에서 언급한 사랑의 기술 전제를 순서대로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사랑의 기술을 습득하려면 전제 조건으로 세 가지가 필요하다. ‘규율, ‘집중, ‘인내다. 이 세 가지는 사랑의 기술 습득은 물론 무언가를 배울 때도 항상 기본이 된다. 즉 당연히 갖추어야 하는 마음가짐이다. 사랑과 반드시 관련이 있는 사항은 아니므로 한시라도 빨리 사랑을 알고 싶은 사람은 그냥 넘어가도 좋다. 하지만 보편성을 가지고 일상에서 무언가를 배울 때 도움이 되므로 읽어서 손해 볼 일은 없다. 선택은 당신 몫이다.


    스스로 규율을 정하고 익숙해지자

    먼저 ‘규율을 짚어보자. 자신이 무언가를 연습하고 싶고 습득하고 싶다면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이렇게 하겠다, ‘저렇게 하겠다라고 하며 자신에게 스스로 규율을 부여한다. 이는 운동, 악기, 공예처럼 모든 분야에 해당한다. 물론 공부까지도.


    ‘너무 당연한 것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프롬은 현대인에게 의외로 어려운 일이라고 짚었다. 예를 들어 회사에 출근하는 사람은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매일 엄격하게 규격화된 업무를 처리하는데 이런 규율은 회사에서 강요한 것이기에 가능하다. 자신이 받는 월급과 연결되기에 여기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잠시 잠깐 일에서 멀어지면 현대인은 그에 대한 반동으로 게으름을 피우고 빈둥거리고 싶어 한다. 좋게 표현하면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면서 ‘긴장을 풀고 싶어 한다. 이럴 때 자신에게 스스로 규율을 부여하지 못한다. 오히려 규율로부터 해방감을 느끼고자 할 뿐이다.


    현대인은 권위주의에 맞서 자유를 쟁취했기에 모든 규율을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만든 규율조차 의심하게 된다. 프롬은 ‘이게 최선인가?, ‘이렇게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가?라고 생각하며 자기 검열에 주의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할아버지 세대는 현대인보다 편하게 규율을 익힐 수 있었다며 예로 들었다. 할아버지 세대는 일찍 일어나 열심히 일하고 불필요한 사치를 즐기지 않는 삶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근검절약과 소박함을 삶의 원칙으로 삼으며 금욕적으로 살았다. 원래 규율은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여겼고 ‘고통스러운 것이니 좋다, ‘참고 견디면서 하는 것이니 좋다, ‘스스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이런 삶을 현대인은 흉내조차 낼 수 없다. 아니, 흉내 내거나 따라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기 제압과 통제를 견디지 못할 뿐 아니라 그 방법은 지속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외부로부터 부여된 규율처럼 연습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규율이 자기 자신의 의지 표현으로 즐겁게 느껴지고 어떤 종류의 행동에 조금씩 익숙해져 결국 그것을 그만두었을 때 부족하다고 스스로 느껴야 한다.


    운동을 예로 들면 과거에는 ‘지옥 훈련이 최고였다면 지금은 즐기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물론 모든 연습이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다. 고통이 따른다. 하지만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고통의 양상은 전혀 달라진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 들린다

    다음은 ‘집중이다. 집중은 사랑의 기술을 습득하는 데 반드시 필요조건이다. 그런데 현대인은 집중하기를 간과한다는 게 프롬의 견해이다. 실제로 지하철 안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과반수가 스마트폰 화면만 쳐다보고 있다. 무미건조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때로는 섬뜩하기도 하다. 그나마 웹툰이나 소설 등을 읽거나 게임을 한다면 나은 편이다. 대개는 소셜 네트워크나 유튜브 등 인터넷 세상에 빠져 허우적댄다.


    사람들은 오롯이 무언가에 집중하거나 혼자 가만히 있는 것을 힘들어한다. 지하철에 앉아 곰곰이 생각에 잠기거나 창밖을 보며 생각을 정리하기보다 스마트폰이라도 보며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간을 낭비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한편 일부러 절에 찾아가 좌선하는 사람도 있다. 이 역시 현대인의 문제점을 대변해 주는 것 아닐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점점 더 명상이나 사색에서 멀어질 테니 말이다.


    프롬은 ‘혼자 있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혼자 있을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필수 조건 중 하나다. 만일 자기 다리로 설 수 없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 매달린다면 그 상대는 생명의 은인이 될 수는 있으나 두 사람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는 아니다. 역설적이지만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사랑하는 능력의 전제 조건이다.


    ‘누군가와 떨어져 있는 것을 견딜 수 없다, ‘늘 함께이고 싶다라고 바라는 것은 미성숙한 사랑이다. 다만 둘이 있을 때는 친밀하게 옆에 있어 줘야 한다.


    서로 사랑하는 자들은 반드시 집중력을 몸에 익혀야 한다. 보통 두 사람은 다양한 방법으로 서로에게서 도망치려고 하는데 그러지 말고 친밀하게 옆에 있어 주는 것을 배워야 한다.


    명상이든 혼자 있는 것이든 집중력이 없으면 할 수 없다. 집중력을 기르려면 자기 자신에게 민감해져야 한다. 대부분 신체적 건강 상태는 자신이 제일 잘 안다. 그러나 정신이나 심리, 마음의 상태는 훨씬 알기 어렵다. 따라서 깊이 집중하여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내면의 소리는 왜 우리가 불안한지, 우울한지, 안절부절못하는지 그 이유를 곧바로 알려준다.


    자신의 정신 상태를 알기 어려운 이유는 판단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바람직한 정신 활동을 하는 사람을 곁에 두면 좋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그런 정신력과 가치관을 갖춘 인물이 드물다. 대부분 T에 등장하는 연예인이나 아이돌을 동경한다. 이들이 보여주는 표면적 활동이나 이미지만 보게 된다. 대화하거나 직접 소통하지 않으면 진정한 내면은 알 수 없다. 그 방법 외에 바람직한 정신 활동을 하는 인물을 만나고 싶다면 책의 세계로 깊숙이 빠져야 한다.


    참고 견디고 기다리자

    세 번째는 ‘인내다. 현대인은 참고 견디는 데 서툴다. ‘시간은 금이라는 인식이 생각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비즈니스 세계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그래서 업무 볼 때는 물론 일상에서도 ‘급히, ‘바삐, ‘빨리 움직인다.


    혹시 “그렇게 서둘러 어딜 가요?”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1973년 일본에서는 ‘그렇게 서둘러 어딜 가나라는 교통안전 표어가 나왔다. 1970년 만국박람회 개최 이후 자가용 시대가 열리면서 교통사고가 급격하게 늘어난 까닭이다. 최근에는 서두르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 이런 물음 자체가 자취를 감췄다. 그만큼 현대인은 ‘참고 견디며 느긋하게 기다리는 데 무척 서툴다.


    사랑의 경험으로 사람은 성장한다

    여기까지가 프롬이 《사랑의 기술》의 4장 ‘사랑의 수련에서 사랑의 전제 조건으로 제시한 내용이다. ‘사랑의 수련이라는 말에 기대를 품었던 독자에게는 다소 미흡한 내용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장의 서두에 인용했던 프롬의 말을 빌리면 사랑은 ‘누구든지 자기 혼자 몸소 겪어야 하는 개인의 경험이다.


    “성숙한 어른이어야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라는 프롬의 말을 되새기면 사랑을 배우고 충분히 성숙한 어른이 된 후에 사랑을 구해야 하는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인간은 사랑을 경험하면서 성장하고 성숙해진다. 성숙한 인간과 성숙한 사랑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문제와 같다. 사랑을 경험하며 인간은 성숙해진다. 이를 통해 한 차원 높은 사랑에 다가갈 수 있다. 또한 사랑은 인생에 딱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교제하다 헤어지는 등 실패로 끝날지라도 이를 통해 사랑을 배우고 다음을 향해 나갈 수 있다.


    사랑하는 행위 자체를 ‘성가시고 귀찮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사랑의 위대함을 알 수 없다. 실제로 경험해 봐야 비로소 사랑의 위대함과 심오함을 이해할 수 있다.


    심리학 측면에서도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행위는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이다. 사랑하면 자신의 깊은 내면까지 자극되고 그 내부 이야기 구조에 변화가 인다. 자신이 만든 이야기에만 머물면 성장은 없다. 다른 사람이 등장해야 이야기에 변화가 생기고 지금까지 몰랐던 것이 새롭게 보인다.


    * *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