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묻고 미생물이 답하다
 
지은이 : 고관수 (지은이)
출판사 : 지상의책(갈매나무)
출판일 : 2024년 09월




  • 미생물과 인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역사와 미래를 탐구하며, 미세한 존재들이 어떻게 인간 사회와 역사를 바꿔왔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를 이야기합니다. 고관수는 미생물이 특정 역사적 맥락에서 어떻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탐구하며, 팬데믹 시대를 지나면서 인간과 미생물의 공진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합니다.


    역사가 묻고 미생물이 답하다


    인류의 진화에는 미생물이 있었다? : 술과 효모

    ‘술 취한 원숭이 가설’, 인간의 탐닉을 추적하다

    성경에서는 태초에 “빛이 있으라”라고 했지만, 지구의 태초에는 미생물이 있었다. 그러니 지구 생물 중에서도 아주 최근에야 등장한 인류는 애초에 미생물과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 인류가 등장하기 전부터 지구는 수십억 년 동안 미생물로 덮여 있었다. 인간 이전의 모든 생물은 미생물을 이용하면서, 협력하거나 극복하면서 살아야만 했고, 지금도 그 사정은 마찬가지다.


    인간이라고 다를 바 없다. 특히 생명을 이어가는 데 절대적인 ‘먹을 것’에 관해서는 미생물에 의존해왔다. 술도, 빵도 모두 미생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인간의 역사는 시작부터 미생물에 의존해왔고, 미생물은 오래도록 인간을 변화시켜 왔다. 인간 역사에 숨은 미생물을 찾는 작업에서, 인간이 생존할 수 있도록 돕고 즐거움을 준 미생물을 맨 먼저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작가인 아이스킬로스는 “청동이 겉모습을 비추는 거울이라면, 포도주는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술’은 단언컨대 포도주를 의미할 터이다. 그리스인부터 로마인까지 고대 서구세계 주역들은 포도주를 즐겨 마셨다. 포도주 대신 맥주를 마시는 북쪽 민족은 바르바르인, 그러니까 야만인이라 불렀다.


    스스로 문명인이라 칭했던 이들이 마셨던 포도주나, 그들이 야만인들이나 퍼마시는 음료라고 비아냥댔던 맥주나 모두 미생물의 작품이다. 바로 효모라고 하는 미생물이다.


    인류를 매혹한 묘한 액체의 기원

    알코올은 당이 발효되어 만들어진다. 자연계에서 효모 등의 작용으로 과일이 잘 익으면 과일 껍질에 존재하는 효모에 의해 알코올 발효가 일어난다. 그런 알코올을 많은 생물이 탐닉한다. 초파리, 원숭이, 그리고 인간까지.


    인류가 어떻게 술을 마시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론 중에 ‘술 취한 원숭이’ 가설이 있다. 자연적으로 잘 익은 과일에서는 알코올 발효가 일어나는데, 이런 자연이 만들어낸 음료에 잘 적응해야 과일을 확보하는 데 유리했으리라는 것이다. 또한 적당히 취해 기분이 좋아지면 더욱 열심히 먹이를 수집했을 터이므로, 다른 개체와의 경쟁에서도 유리했을 것이다. 시골 마을에서 새참에 함께 온 막걸리를 마시고 더욱 힘내서 어려운 농사일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인 셈이다.


    자연 발효로 생긴 알코올을 처음 접한 인간은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아마 썩어가는 과일에서 특이한 향내는 내는 액체를 맛보기가 꺼려졌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용감한 이가 그 맛을 본 순간 인류에게 알코올 세계의 문이 열렸다!


    인류가 의도적으로 발효를 통제하기 시작한 시기가 언제쯤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래도 역사 초기부터 미생물의 작품인 술을 마셔왔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최초의 민주주의를 세균이 무너뜨렸다고? : 아테네 역병과 살모넬라

    2,400년 만에 드러난 고대 그리스 몰락의 복병

    모든 역사는, 적어도 서양의 역사는 그곳, 아테네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철학과 민주주의를 꽃피우던 아테네는 전혀 다른 문화와 사회구조를 가진 스파르타와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전쟁에서 패배하는 데 한두 가지 원인만 있지는 않다. 하지만 아테네 성벽 안에 모여든 사람들을 쓰러뜨린 작은 생물체가 분명한 패배 요인 중 하나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역사가들은 이 미생물이 일으킨 질병을 ‘아테네 역병’이라고 부른다. 아테네와 아테네 민주주의의 몰락, 더 나아가 인간성에 관해 제기된 심각한 문제에까지, 이 미생물이 답의 실마리를 쥐고 있다.


    1994년 아테네에서 지하철 연장 공사를 하며 지하에 터널을 뚫던 공사장 인부들이 우연히 아주 오래된 집단 매장지를 발견했다. 연구자들이 조사한 결과 기원전 5세기경의 유적으로 밝혀졌다. 집단 매장지에서는 240구의 유해가 발굴되었는데, 그중 최소 10명은 어린이였다. 한 여자아이의 유해는 두개골을 비롯해서 거의 손상되지 않은 채였다. 고고학자들은 이 소녀에게 ‘미르티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테네 대학의 연구진은 미르티스의 온전한 유해를 이용해서 역사에 기록된 오래된 의문점을 풀기로 했다. 그들은 치아 유골에서 DNA를 추출하는 데 성공했고, 이를 가지고 PCR 기술을 이용하여 여러 후보 병원체를 조사했다. 그 결과 단 하나의 병원체에만 양성 반응이 나왔다. 바로 장티푸스의 원인균인 살모넬라였다. 작디작은 세균이 아테네라는 고대 최고의 도시를 휩쓸고 간 지 2,000여년이 지나서야 그 정체가 드디어 밝혀진 것이다.


    아비규환의 성실한 기록자, 투키디데스

    전쟁이 벌어지고 다음 해(기원전 430년) 아테네의 위성 항구 피레우스에서 환자가 생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테네 시내에서도 환자들이 속속 나오더니 사람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아테네에는 평소보다 몇 배나 많은 인구가 모여들었던 탓에 위생 상태도 좋지 않았다.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병인지라 병원체에 대한 면역성도 없었다.


    이 역병에 대해 유일하게, 또 아주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긴 이가 투키디데스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질병의 전파와 관련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그는 이 책에서 역병이 에티오피아에서 비롯되어 이집트와 리비아로 퍼져나갔다고 썼다. 이집트에서 환자를 실은 배가 피레우스 항으로 들어오면서 아테네의 비극이 시작되었다고 본 것이다.


    치료법도 없었다. 어떤 사람에게 효과가 있는 방법이 다른 사람에게는 오히려 해가 되기도 했다. 건강했던 사람이라고 딱히 병을 이겨낼 확률이 높지도 않았다. 살아남은 사람도 손가락, 발가락을 잃고, 생식기능이 파괴되기도 했다. 이 병으로 7만 5,000명에서 10만 명가량이 사망했다고 알려졌는데, 이는 아테네 인구의 3분의1에 이르렀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역병으로 초토화된 아테네의 국력은 스파르타보다 빨리 소모되었다. 아테네는 두 번 다시 전쟁 초기의 병력을 회복하지 못했고, 끝내는 시칠리아 원정이라는 큰 실책을 저지르고 결정적인 패배를 맞이했다.


    아테네 역병이 고대 그리스 문명이 몰락하는 데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아테네 역병이 가져온 여파가 아테네 국력의 쇠퇴로 이어져 전쟁의 향방을 갈랐고, 결국 고대 그리스 문명의 운명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사람마다 시대마다, 결핵은 왜 잠복기가 다를까? : 산업혁명과 결핵균

    결핵은 어떻게 ‘자본의 필수 조건’이 되었나?

    역사는 길었으나, 대규모 발생은 없었다

    과거 유럽에서는 결핵을 ‘White Death’, 즉 백사병이라 불렀다. 14세기 흑사병에 빗댄 말이다. ‘하얀 페스트’, 그게 결핵의 별명이었다. 그만큼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고, 그 정도로 무섭게 여겼다. 19세기 유럽 사망자 7분의 1이 결핵 때문에 죽었다는 통계도 있다.


    결핵은 결핵균으로 알려진 미코박테리움 투베르쿨로시스에 의한 감염질환이다. 신석기시대 유골에서 결핵의 증거가 거듭 발견되면서 오래전에 동물에서 인간으로 옮겨온 질병이라는 게 확실해지고 있다.


    5,000년 전 이집트 미라에서 결핵에 걸렸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골격 기형이 관찰되었고, 초기 이집트 미술에 결핵에 걸린 것으로 보이는 모습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 3,300년 전 인도와 2,300년 전

    중국의 기록에서도 결핵으로 추정되는 질병이 발견되었으며, 일본에서 발굴된 약 2,000년 전 유골에서도 결핵의 흔적이 확인된다. 고대부터 중세를 거쳐 근대, 그리고 지금까지 결핵은 오랫동안 인류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결핵은 수천 년 동안 인간 역사에 등장했지만 대규모 발생을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대체로 소규모로 발생했고, 한꺼번에 널리 퍼져가는 양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다가 18~19세기에 들어 인간사회에 결핵이 폭증했는데, 이는 산업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자본의 필수 조건”이 된 하얀 페스트

    산업이 호황을 누리며 공업과 상업의 중심지로 도시가 빠르게 성장했다. 아무런 생산 기반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공장의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부족함 없이 공급되는 인력으로 노동력 착취 기반이 마련되었고, 노동자들은 가혹한 노동 환경에 시달려야 했다.


    공장 시설은 열악했다. 노동자들은 환기도 되지 않는 빡빡한 공간에서 고된 노동에 내몰렸다. 주거 시설도 형편없었다. 다닥다닥 붙은 공동주택에서 살아가는 노동자들과 도시 빈민들은 개인위생에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불결하고 비좁은 환경에서의 장시간 노동과 영양부족으로 이어진 빈곤은 질병에 저항성을 떨어뜨렸다


    많은 질병이 창궐하며 도시 노동자들을 위협했지만, 그중에서도 폐질환을 일으키는 결핵이 두드러졌다. 좁고 꽉 막힌 공간에서 생기는 먼지와 분진에 섞여 비말로 떠돌아다니는 결핵균은 쉬지도 못하고 면역력도 떨어진 노동자들의 폐를 인정사정없이 공격했다.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는 1851년부터 1910년까지 약 400만 명이 결핵으로 죽었으니 ‘하얀 페스트’라는 별명이 납득간다.



    전쟁보다 사람을 많이 죽인 바이러스는? : 제1차 세계대전과 인플루엔자

    전쟁 막바지를 습격한 팬데믹의 물결

    20세기 들어 인류는 두 차례의 커다란 전쟁을 치렀다. 19세기까지 전쟁이 국지적인 규모로 벌어졌다면, 20세기에 벌어진 두 차례의 파괴적인 전쟁은 여러 대륙에 걸쳐 전투가 벌어졌고, 군인들만의 전쟁이 아니라 국가 총력전의 양상을 띠었다.


    전쟁은 참혹했고, 쉽게 끝나지 않았다. 201차 세계대전을 상징하는 세 가지를 꼽으라면 흔히 기관총, 참호, 철조망을 이야기한다. 참호를 파고 철조망을 펼쳐 놓은 전선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고, 기관총은 한꺼번에 많은 인명을 살상했다. 끔찍하게 비위생적인 참호는 병원균들이 배양되기에 안성맞춤인 환경이 되어 기관총 세례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의 팔다리를 썩게 했고, 목숨을 앗아갔다.


    전쟁은 4년을 넘겨 1918년 11월이 되어서야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협상국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 추를 협상국 쪽으로 돌린 데는 미국의 참전이 결정적이었다.


    신병훈련소, 바이러스의 배양기가 되다

    미국은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을 초기에는 강 건너 불 보듯 했다. 영국 중심의 협상국과 독일 주축의 동맹국 모두 미국을 자신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결국 미국은 협상국의 편에 서서 참전하는데, 이른바 ‘치머만 전보’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미국의 참전 결정 이후 1917년 가을부터 전국에서 주로 시골 출신의 청년들이 군사 훈련을 받으러 군 캠프에 모여들었다. 캔자스주의 펀스턴 캠프도 그중 하나였다. 독감의 첫 공식 환자는 1918년 3월 4일 펀스턴 캠프에서 발생했다.


    3월 4일 아침, 식사 당번이던 앨버트 기첼은 목구멍 통증과 열, 두통으로 의무실을 찾았다. 이후 신병훈련소의 의무실은 그날 오전에만 기첼과 비슷한 환자가 100명도 넘게 드나들었다. 전 세계를 감염시킬 독감의 시작을 알린 신호였다.


    미국 캔자스주의 신병훈련소에서 시작된 독감은 4월이 되자 배를 타고 미국 동부 해안과 프랑스 항구도시로 퍼졌다. 4월 중순 무렵에는 서부 전선의 참호에 이르렀고, 이후 프랑스 전역,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으로 번져갔다. 5월 말에는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가 쓰러졌다.


    그즈음에는 폴란드와 독일은 물론 러시아의 항구도시 오데사까지 환자가 속출했다. 북아프리카에도 환자가 출연했고, 5월이 다 지나기도 전에 독감은 인도까지 진출했다. 중국과 일본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반도에서 독감이 보도되기 시작한 것은 10월이 되어서였지만, 사실상 그 이전에 이미 상륙했을 것으로 보인다. 독감은 7월에 호주까지 도착했다. 여기까지가 독감 팬데믹 1차 물결이었다.


    스페인 독감은 1차 유행으로도 적지 않은 피해를 남겼지만, 그렇다고 전 세계를 공황에 빠뜨릴 만큼은 아니었다. 독감은 봄이 지나면서 잦아드는 것 같았다. 그런데 8월 말 두 번째 물결이 퍼져나갔다. 독감은 1차 유행보다 더 신속하게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치명률도 더 높았다. 10월 한 달 동안 미국에서만 19만 5,000명이 독감으로 사망했다.


    스페인 독감은 왜 젊은 사람에게 유독 치명적일까?

    스페인 독감은 일반적인 계절성 독감과는 다른 독특한 특징을 보였다. 스물다섯에서 서른다섯 사이의 젊은 사람들의 사망률이 매우 높았던 것이다. 환자들은 고열, 코피, 폐렴 등에 시달리다가, 폐가 체액으로 가득 찬 채로 죽었다. 말하자면 익사했다. 과학자들은 수십 년이 지난 후에야 그 현상을 설명할 수 있었다. 바로 ‘사이토카인 폭풍’이라고 하는 현상이었다.


    인체가 병원체에 공격을 받으면 면역체계는 사이토카인이라는 물질을 만들어 염증 반응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침입자를 물리친다. 그런데 사이토카인을 너무 많이 만들어내면 건강했던 사람에게도 위험한 면역 과민 반응이 일어난다. 사이토카인으로 과부하가 걸린 신체에는 심각한 염증이 생기는 것은 물론, 폐에 치명적인 체액이 쌓인다. 스페인 독감을 초래한 바이러스가 일으키는 현상이다. 이 때문에 면역체계가 활발히 작용하는 젊은 층이 더 크게 피해를 입는 것이다.



    포스트 항생제 시대, 미생물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 페니실린과 푸른곰팡이

    푸른곰팡이가 만들어낸 페니실린이, 이후 과학자들이 발견하고 개발한 항생제가 살려낸 목숨을 셀 수 없다. 미생물이 다른 미생물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항생제는 한 개인의 미래, 나아가 인간의 미래를 바꿨다.


    곰팡이 속 미생물이 치료제가 되기까지의 여정

    먼저 앨버트 알렉산더라는 경찰 이야기다. 그는 페니실린을 가장 먼저 처방받은 사람이다. 페니실린을 발견하고 논물을 발표한 플레밍이 다리가 다친 후 감염된 한 여성 환자와 폐렴균에 감염된 실험 조수를 푸른곰팡이 여과액으로 치료하려고 시도했다고 하지만, 그는 단지 페니실린을 포함할 것으로 여겨지는 곰팡이 여과액을 이용했을 뿐이었다.


    알렉산더는 옥스퍼드 대학이 위치한 옥스퍼드 카운티의 경찰이었다. 그는 포도상구균과 연쇄상구균에 동시에 감염되었고, 여러 차례의 치료에도 불구하고 감염이 심해져 얼굴 전체가 농양으로 뒤덮였다. 결국 한쪽 눈을 제거해야 했고, 폐에도 패혈증이 생겼다.


    1941년 2월 12일 연구진은 알렉산더의 정맥에 페니실린 200단위에 해당하는 160밀리그램을 주사했다. 페니실린 치료 후 24시간도 안 되어 체온이 떨어졌고, 식욕도 회복되었으며, 감염도 차도를 보였다. 그런데 약이 모자랐다. 효과가 분명함에도 페니실린이 더는 그들 손에 없었고, 알렉산더는 3월 15일 사망하고 말았다. 알렉산더는 죽었지만 플로리를 비롯한 옥스퍼드 대학 연구진은 페니실린의 효능을 더욱 확신했다.


    플로리와 히틀러는 페니실린을 대량 생산할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갔다. 당시 영국은 모든 국력을 독일과의 전쟁에 집중하던 터라 그들의 연구를 뒷받침할 여력이 있는 기관이 없었다. 그들은 미국에서 정부 연구기관과 민간 연구재단, 제약회사 등과 협력하여 페니실린 생산력이 더 좋은 곰팡이를 찾아냈고, 추출 방법도 개선하여 페니실린을 실용적인 약으로 만들어냈다.


    세균에게 공격받고, 세균으로 치료하다

    페니실린은 이름 자체가 강력하게 알려주듯이 푸른곰팡이, 페니실륨이 만들어내는 물질이다. 페니실륨이라는 이름은 ‘화가의 붓’을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비롯되었는데, 분생포자가 연결된 모양이 마치 빗자루처럼 생긴 데서 유래한다. 핵과 함께 세포내 소기관을 갖는 진핵생물로 세균이나 바이러스와는 구분되지만, 흔히 진핵미생물로 분류한다.


    우연한 발견을 발명으로 만든다는 것

    플레밍의 연구실 바로 아래층에서 일하던 라트슈는 실내 공기와 특히 거미줄에서 분리한 곰팡이를 이용해서 알레르기 백신을 만드는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는 런던과 셰필드의 가난한 지역에서 수백 개의 균주를 분리했는데, 그중 상당수가 페니실륨 크리소게눔과 페니실륨 루벤스였다. 이 두 종은 실내 공기에 가장 흔하게 존재하는 푸른곰팡이로, 최근 연구는 이 곰팡이가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도 밝히고 있다.


    플로리와 히틀리는 페니실린 생산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갈 때 페니실륨 곰팡이를 가지고 갔지만, 상업적으로 대량 생산이 가능하려면 기존 것보다도 효율적으로 페니실린을 만들어낼 균주가 필요했다. 그런 곰팡이를 찾아내기 위해 전 세계에서 푸른 곰팡이를 구해다 테스트했지만 한참 동안 소득이 없었는데, 의외로 해결책은 가까이 있었다. 연구소가 위치하던 미국 일리노이주 피오리아의 과일시장에서 캔털루프라는 과일 껍데기에 핀 곰팡이가 기존 균주보다 여섯 배나 많은 페니실린을 만들어내는 현상을 발견한 것이다. 그 곰팡이는 의심할 나위 없이 페니실륨 크리소게눔이었다.


    항생제는 원래 곰팡이나 세균이 다른 세균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만들어내는 물질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동토 깊숙이 존재하는 세균에서도 항생제를 만들어내는 유전자를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은 곰팡이와 세균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만들어내는 소량의 물질을 찾아내 인위적으로 분리해내고 대량으로 생산하면서, 세균과의 싸움에 이용하는 것이다.


    페니실린은 인류가 최초로 갖게 된 감염질환을 극복하는 무기였다. 인간은 미생물이 경쟁을 위해 조금씩 만들어내던 물질을 미생물에 의한 감염질환을 이겨내는 도구로 전환해냈다. 이로써 인류는 미래를 바꿀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 미래가 바뀔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다가오고 있다. 항생제 내성으로 기존의 항생제가 쓸모없어지는(이미 쓸모없어진 경우도 없지 않다) 상황이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메커니즘을 갖는 항생제 개발의 어려움, 비용과 수익성의 문제, 임상시험의 복잡성, 내성 문제 등으로 많은 제약회사가 항생제 개발에서 발을 빼는 실정이다.


    어쩌면 우리는 흔한 세균 감염에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포스트 항생제 시대’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다시 우리의 미래를 세균에 저당 잡힐 수도 있는 것이다. 어쩌면 벌써 아슬아슬한 벼랑 끝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앞으로 우리가 어떤 미래를 맞이할지는 바로 이런 미생물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 어떤 대책을 갖추었는지, 또는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지에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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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