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다 보면 자본주의가 어떻게 이동하며 세계를 바꿔왔는지가 한눈에 보인다. 대항해시대에는 세상 거의 모든 부가 에스파냐로 향했지만, 곧 네덜란드로 이동해 갔고 한 세기가 채 지나기도 전에 변방의 섬나라였던 영국이 새로운 경제 대국으로 부상한다. 하지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 불리며 전 세계에 수많은 식민지를 거느리던 대영제국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그 지위를 미국에 넘겨준다. 한번 종주국이 영원한 종주국은 아닌 셈이다.
이처럼 세계경제의 중심이 어디에서 어디로, 왜 이동했는지 파악함으로써 자연스레 경제 패권의 다음 향방을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역사가 상업자본주의에서 산업자본주의로, 또 수정자본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변신을 거듭해 온 자본주의의 행보와 맞물려 있으며, 외형상으로는 성장을 이어가지만 다중스케일적 불평등을 확대/재생산하는 이 시스템이 결국은 세계 경제와 환경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다중스케일적 속성에 대한 지정학적 이해가 없다면, 이러한 부작용을 극복할 공정한 분배나 도덕적 정의란 공허한 이상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이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경제와 부의 흐름뿐만 아니라, 세계의 지리적 질서를 어떻게 봐야 할지 의미 있는 통찰을 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저자 이동민
저자 이동민은 대구교육대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대학교 대학원 지리교육과에서 교육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진주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이자, SSCI에 등재된 국제적인 학술지 ‘Journal of Geography’의 편집위원이다. 지구사, 문명사, 전쟁사를 지리학의 시각에서 재해석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초한전쟁’(2022 경기도 우수출판물 제작지원 선정), ‘기후로 다시 읽는 세계사’(2023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도서), ‘발밑의 세계사’(2023 하반기 올해의 청소년 교양도서)가 있고, 옮긴 책으로는 ‘지리의 모든 것’(2016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도서), ‘사카모토 료마와 메이지 유신’(공역), ‘세계화와 로컬리티의 경제와 사회’ 등이 있다.
■ 차례
들어가며 자본주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1. 지도와 나침반, 화약에서 시작된 자본주의
1장 에스파냐, 세계 최초로 대서양을 건넌 나라
2장 네덜란드, 먼바다에서 불어온 신용경제의 바람
3장 영국, 재정혁명을 산업혁명으로 이끈 섬나라의 힘
4장 프랑스, 대평원의 대혁명이 퍼뜨린 자본의 자유
2. 반 자본주의 확산으로 분열하는 지구
5장 러시아, 유럽을 반토막 낸 공산주의라는 유령
6장 독일, 파시즘의 불쏘시개가 된 자본주의 후발국의 비극
7장 미국, 대서양부터 태평양까지 아우른 새로운 자본주의 종주국
3. 이상한 나라의 자본주의가 그려낸 새로운 세계지도
8장 중국, 대륙과 대양을 관통하는 ‘일대일로’의 거대한 그림
9장 베트남, 양날의 검이 되어버린 천혜의 지리 자원
10장 대한민국, 토건 위에 세운 한국형 신자유주의의 운명
지정학적 통찰을 통해 과거를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하며, 세계 경제와 지리적 질서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유용한 시각을 제공합니다. 자본주의의 역사를 지리적 관점에서 풀어내며, 세계경제 중심이 이동한 이유와 그 영향력을 조명합니다.
지리로 다시 읽는 자본주의 세계사
지도와 나침반, 화약에서 시작된 자본주의
네덜란드, 먼바다에서 불어온 신용경제의 바람
청어와 폭풍해일이 불러온 부의 재편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농업혁명이라 불리는 농업기술 혁신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생선이 유럽인의 식단을 지배했다. 프랑스 부르봉왕조의 창시자이자 명군인 앙리 4세(Henri 4)가 모든 평민이 일요일마다 닭고기를 먹을 수 있는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겠노라고 공언한 때는 16세기였다. 바꿔 말하면 당대만 하더라도 닭고기와 같은 육류는 서민적 대중적 식자재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리스도교의 권위와 교리가 절대적이었던 중세에는 그리스도교 율법에 따라 육식을 금한 날이 많았다. 그런데 생선은 가축과 달리 목초지도 사료도 필요로 하지 않고, 정성껏 돌보고 기를 필요도 없다. 또한 육류보다 훨씬 저렴하며 단백질과 열량이 풍부하고 적당한 포만감도 준다. 더욱이 그리스도교는 생선 섭취를 장려하기까지 했다. 당연히 전근대 유럽인의 식탁 위에는 생선이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지중해에 연하지 않은 알프스 북쪽 유럽에서는 대륙 서쪽에 펼쳐진 북대서양에서 잡히는 대구와 청어를 즐겨 먹었다.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하고 어획량도 많은 청어는 알프스 이북 유럽인의 주식이었다. 그러니 그곳 사람들에게 청어를 잡고 염장/훈제 하는 일은 막대한 경제적 이윤을 창출하는 알짜배기 산업이었다.
청어는 서식지를 옮겨 다니는 습성이 있다. 그러다 보니 당대에 청어 어장의 위치 변화는 유럽 국가들의 세력 판도를 바꿀 만큼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근해에 청어 어장이 형성된 나라는 큰돈을 벌며 국력을 키울 수 있었고, 청어 어장이 사라지면 경제적으로 큰 손실을 보며 국력이 약해졌다.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있는 해안 저지대의 드넓은 갯벌과 진펄을 간척하면서 오늘날 국토의 밑바탕을 그리던 11~13세기 네덜란드 북해에 거대한 청어 어장이 형성되었다. 수해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저지대인 국토를 풍요롭고 살기 좋은 땅으로 탈바꿈시켜야 할 과제에 직면했던 네덜란드인들에게 이는 마치 대규모 유전을 발견한 것에 비견할 만큼 엄청난 기회였다.
네덜란드인들은 바다의 은광과도 같은 청어잡이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오늘날 국가들이 기간산업을 육성하는 것처럼, 제후들도 청어잡이와 청어 가공을 대대적으로 장려했다. 네덜란드인들은 청어 떼의 이동 경로를 따라 먼바다까지 나가 조업을 했다. 그러면서 효율적으로 청어를 잡고, 나아가 빨리 부패하는 청어를 선상에서 가공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춘 어선을 개발하기 시작한다.
북해 주변에는 네덜란드뿐 아니라 영국, 덴마크, 독일 북부의 항구도시들도 자리했지만, 네덜란드가 가장 적극적/공격적으로 청어잡이와 가공산업에 뛰어들었다. 그 결과 네덜란드의 청어 어획량과 청어 가공품 생산량은 유럽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 그 덕분에 큰돈을 벌게 된 네덜란드는 유럽 변방의 간척지에서 부강한 산업 중심지로 거듭난다. 훗날 해양 대국으로 도약하는 데 밑거름이 되는 조선술과 항해술에 관한 지식 역시 이때 축적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뜻하지 않은 자연재해로 네덜란드 청어 산업은 더욱 발전한다. 네덜란드 중북부에는 알메레(Almere)라고 불리는 커다란 호수가 있었는데, 그 주변은 저지대와 간척지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런데 성녀 루치아 축일이기도 한 1287년 12월 13일, 북해에서 발생한 거대한 폭풍해일이 네덜란드를 덮쳤다. 폭풍해일이 빚어낸 성녀 루치아 홍수(Sint-Luciavloed)로 제방과 저지대는 초토화되었고,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이때 호수 주변의 제방이 무너지고 저지대가 침수되면서 호수 알메레는 북해를 향해 개방된 커다란 만처럼 생긴 바다 자위데르해(Zuiderzee)로 변모했다. 자위데르해는 1932년 방조제인 아프슬라위트데이크(Afsluitdijk)의 완공으로 담수호인 에이설호(IJsselmeer)가 되었다.
막대한 피해를 가져온 성녀 루치아 홍수였지만, 그 결과로 생겨난 자위데르해는 일종의 거대한 천연 항구처럼 기능하며 네덜란드 어업과 해상무역을 크게 발전시켰다. 특히 자위데르해 남서쪽에 있는 암스테르담은 이 홍수로 양항을 낀 항구도시가 된다. 그러면서 북해 청어 가공과 유통의 중심지로 탈바꿈하며 유럽 유수의 대도시로 거듭났다. 그 덕분에 네덜란드는 북해 무역로를 따라 당대 유럽인의 주식이었던 훈제/염장 청어를 공급하면서 유럽에서도 손꼽힐 만큼 부유한 국가로 성장한다.
영국, 재정혁명을 산업혁명으로 이끈 섬나라의 힘
잉글랜드왕국, 그리고 영국은 바다라는 천연 요새를 가졌다. 그레이트브리튼은 유럽대륙과 도버해협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어, 고대부터 외세의 대대적인 침략을 매우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다. 영국은 대대로, 맹위를 떨치던 에스파냐 펠리페 2세, 프랑스 루이 14세(Louis 14)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Bonaparte Napoleon), 그리고 나치독일 등에 국토를 짓밟히지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결국에는 그들과의 경쟁에서 승리까지 거머쥐었다.
영국은 섬나라여서 유럽대륙의 다른 나라들과 달리 막대한 비용을 들여 대규모 육군을 유지할 필요가 없었다. 상대적으로 소규모의 상비군을 운영해도 되었으므로 과도한 군비경쟁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고, 오히려 많은 인구가 노동과 생산 활동에 종사하며 세금을 내니 세수 확보에도 유리했다. 그런 영국이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한층 내실 있는 경제성장과 국력 신장을 이루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다고 해서 영국이 유럽대륙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어 있던 것도 아니었다. 도버해협 가장 좁은 곳의 폭은 34킬로미터 정도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영국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동시에 유럽의 다른 지역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무역을 이어갈 수 있는 땅으로 만들어 주었다. 대개 지리적으로 방어하기에 유리한 곳은 교통이 불편하고, 교통이 편리하면 그만큼 방어하는 데 불리한 경우가 많은데, 그런 점에서 영국은 천혜의 자연환경을 부여받은 셈이다.
산업혁명의 트라이앵글, 면직물과 철광석 그리고 석탄
18세기 중후반에 영국은 세계 해상무역 네트워크의 실질적 지배자로 자리매김하며 나아가 산업혁명의 막을 열면서 인류사의 대전환까지 주도하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산업혁명은 어째서 영국에서 시작되었을까? 18세기 후반의 영국이 명실상부한 유럽 최강국이었던 것은 맞다. 사회 분위기도 자유로운 편인데다 활발한 원양항해와 탐험으로 과학 기술도 빠르게 발전했으니,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선구적으로 일어날 만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산업혁명을 이끈 중요한 에너지원인 석탄과 철광석이 그레이트브리튼에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는 관점도 있다.
인도산 면직물은 16~17세기부터 유럽에 유입되었지만, 그 양이 제한적이어서 일반인은 쓸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EIC가 세력을 대대적으로 확장하며 분열한 인도에 진출하고 수탈하기 시작한 18세기 중후반부터 이야기가 달라진다. 인도산 면직물, 특히 캘리코가 중산층과 서민층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면서 영국의 전통적인 주력산업이었던 모직물 산업이 치명타를 입었다. 이에 영국 정부가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인도산 면직물을 수입제한하지만, 그 인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 나중에는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산업혁명에 직접적인 불을 지핀 증기기관은 이러한 상황에서 만들어졌다. 면직물 수요가 워낙 커지다 보니 그러한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면직물 생산방식을 혁신해야 했다. 1776년, 제임스 와트(James Watt)가 석탄으로 물을 끓여 발생한 수증기의 힘으로 기계를 구동하는 근대적 증기기관을 발명하는 데 성공한다.
증기기관의 발명과 보급이 영국 면직물의 생산량 급증으로만 이어진 것은 아니다. 증기기관은 기존의 수공업이나 물레방아, 풍차 등을 사용하는 기계, 공장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생산성과 효율성이 뛰어났다. 증기기관으로 작동하는 거대한 기계를 여럿 갖춘 큰 공장들은 면직물 이외의 산업 분야로도 빠른 속도로 파고들며 산업의 중심축으로 자리매김한다.
영국에 증기기관의 연료인 석탄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도 증기기관이 영국 전역으로 확산하는 데에 매우 유리하게 작용했다. 물을 끓이는 일 자체야 나무나 숯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증기기관을 구동할 정도의 화력을 얻으려면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그런데 석탄은 화력이 월등히 강해서 증기기관 구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석탄 매장량이 풍부하다는 사실은 증기기관이 신기한 발명품 정도로 끝나거나 일부 산업 분야에만 쓰이는 것을 넘어 다양한 분야에서 쓰일 수 있음을 의미했다. 석탄이 영국에만 매장되어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인도산 면직물 수요의 폭등으로 촉발된 증기기관의 발명은 영국에 풍부하게 부존된 석탄과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며 산업혁명을 일으킨다.
영국 증기기관은 석탄 못지않게 풍부하게 매장된 철광석과도 결합하며 산업혁명의 차원을 더한층 높였다. 숯을 굽듯 석탄을 밀폐/가열해 만든 코크스는 숯보다 월등하면서도 효율적으로 철광석 원석에서 철을 분리했고, 증기기관은 제철산업의 효율성을 극적으로 끌어올렸다. 그 덕분에 산업혁명 이후 영국은 세계 제일의 면직물 생산국에 이어 세계 최고의 철강 생산국으로 부상한다.
19세기 중후반에 이르러서는 현대적인 강철, 즉 탄소강 제조 기술이 확립되었다. 탄소강은 재래식 공정으로 생산한 철과 비교했을 때 강도가 월등히 강하므로 기존 철제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능과 내구성이 우수한 공구와 기계를 만들 수 있다. 에펠탑이나 금문교 같은 거대한 구조물, 그리고 강력한 기관차와 수천에서 수만 톤이 넘는 대형 선박 제작이 가능한 것도 탄소강 덕분이었다. 탄소강으로 인해 경제/산업 활동의 효율성과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이 때문에 탄소강의 발명을 제2차 산업혁명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석탄과 철강은 철도/증기선/자동차와 같은 교통의 혁신까지 불러오며 전 세계를 산업자본주의, 그리고 제국주의로 통합하기에 이른다. 그레이트브리튼의 지리적 이점과 당대 해상무역 네트워크를 둘러싼 다중스케일은 이렇게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세계의 밑바탕에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반 자본주의 확산으로 분열하는 지구
러시아, 유럽을 반토막 낸 공산주의라는 유령
얼어붙은 바다에 갇힌 반쪽짜리 자본주의
19세기에 나폴레옹전쟁에서 승리하고 중앙아시아를 정복하면서 국력을 크게 신장한 러시아는 서유럽의 산업혁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산업자본주의로의 경제체제 전환에 박차를 가했다. 이미 1820년대 중반부터 근대적 산업화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인 덕분에 국민소득 및 GDP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도 꾸준히 증가했다. 산업화 시기 자체만 놓고 보면 프랑스 같은 서유럽 자본주의 선진국에 비해 늦은 것도 아니었다.
석탄과 철광석이 풍부한 돈바스, 세계적 유전지대인 캅카스 산맥과 카스피해 연안 등지는 세계적 중화학공업 지대로 거듭나며 러시아의 산업자본주의 발전을 견인했다. 러시아 황실은 산업화 과정에서 외국자본과 기업의 투자 유치를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캅카스산맥과 카스피해 연안의 석유를 개발할 때는 미국 자본, 그리고 노벨상의 제창자 알프레트 노벨의 형인 루드비그 노벨(Ludvig Nobel)과 로베르트 노벨(Robert Nobel) 형제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농업 부문에서도 큰 혁신이 일어났다. 그 핵심은 우크라이나 서부 땅에 있었다. 러시아의 거대한 영토 가운데 상당 부분은 척박한 땅이어서 그만큼 인구부양력도 생산성도 낮을 수밖에 없었다. 시베리아 같은 곳은 말할 것도 없고, 유럽 러시아 역시 겨울이 긴 편이고 흑해에 연한 우크라이나 남부는 농사짓기에 적합하지 않은 스텝지대가 넓게 펼쳐져 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스텝지대는 강수량이 적어서 척박했을 뿐, 매우 비옥한 흑토인 체르노좀이 분포하고 있어 농업용수 문제만 해결되면 잠재력이 큰 땅이었다. 19세기에 접어들어 이곳은 농업기술 혁신에 힘입어 러시아 농업의 중심지이자 세계적 곡창지대로 거듭났고, 그 덕에 러시아는 외국에 밀을 비롯한 곡물을 수출하는 나라가 된다.
이처럼 산업자본주의가 발전하며 경제발전을 이어가는 듯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실상 서유럽에서 중세 말기와 근세 초기에 사라진 농노제가 남아 있는 등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후진적 사회구조는 생산성과 효율성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시장경제 성장을 저해하므로 견실하고 내실 있는 자본주의 발전도 그만큼 어렵다. 러시아혁명에 참여한 아나키즘 사상가 빅토르 세르주(Victor Serge)는 러시아의 귀족정치와 농노제가 자본주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며 산업에 종사할 노동력이 부족함에 따라 수공업이 매우 더디게 성장하고 있으므로, 근본적인 개혁을 해야 한다고 피력한 바 있다.
왜 러시아 산업자본주의는 이와 같은 내화 외빈 수준의 구조를 떨쳐내지 못했을까? 이는 시민계급이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채 위로부터의 자본주의 개혁이 이루어진 러시아 특유의 지리적/사회구조적 맥락과 관계가 깊다.
러시아는 서유럽과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는 대륙국가다. 하지만 두 대륙 사이에는 광대한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어 오가기에 편리하다. 그러나 거리 자체가 멀다 보니 러시아가 국가 모습을 갖추며 발전하던 중세에는 서유럽이 아닌 이웃한 동로마제국과 주로 교류했다. 정교회, 키릴문자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러시아 사회와 문화는 봉건국가 서유럽이 아닌 중앙집권국가 동로마 제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며 발전한다.
13~15세기에는 몽골제국의 속국으로 편입되어 몽골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이 과정에서 러시아는 서유럽보다 훨씬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문화가 지배하는 땅으로 변모했다. 그런 러시아에서 시민계급의 성장을 기대하기란 애초부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서유럽에서 재정혁명이 일어나고 있던 17세기에 러시아 귀족들은 몽골풍의 수염을 기르고 몽골제국의 유산인 의복을 입었다. 그러다 보니 러시아는 서유럽은 물론 폴란드, 체코처럼 로마가톨릭을 받아들이며 서유럽 문화에 포섭된 다른 슬라브계 동유럽 국가와 비교해도 이질성이 크다. 그래서인지 러시아를 유럽이 아닌 아시아로 여기는 풍조가 지금껏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처럼 대양으로 진출하면 되지 않았을까? 러시아는 지리적 특성상 대양으로 진출하기에 불리하다. 유빙이 떠다닐 만큼 추운 북극해는 항해할 수 없는 해역이고, 발트해와 흑해는 육지에 둘러싸인 닫힌 바다다. 더욱이 발트해는 17세기까지는 독일 북부의 한자동맹이나 스웨덴이 지배하던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러시아에게 서유럽의 지리상의 발견은 남의 일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표트르 대제는 서유럽에 비해 많이 낙후한 러시아를 강대국 반열에 올리기 위해 개혁을 추진한다. 서유럽의 과학기술과 문물을 대대적으로 받아들이며 서구화를 단행했다. 그 과정에서 귀족들의 몽골풍 수염을 손수 자르는 등 개혁을 저해하는 낡은 관습을 강력하게 철폐하며 기득권의 반발을 무마했다.
또한 대륙국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발트해 동쪽 끝에 자신의 이름을 딴 항구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 뒤 1712년에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선소에서는 러시아의 해양 진출을 책임질 무역선과 군함이 건조되었다. 표트르 대제가 심혈을 기울여 건설한 발트 함대는 17세기에 발트해를 지배하던 스웨덴 해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쾌거까지 올렸다. 비록 오래 유지하지는 못했지만, 19세기에 알래스카를 비롯한 북아메리카 일부 영토를 확보하기도 했다.
이러한 표트르 대제의 개혁은 러시아를 강국으로 발돋움시키지만, 시민계급이 성숙한 나라로 만들지는 못했다. 그가 개혁에 필요한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물린 무거운 인두세는 평민층이 시민 계급으로 성장하는 대신 귀족에 예속된 신세로 전락하는 결과를 빚었다. 또한 그가 강력하게 다진 왕권은 그의 사후에는 귀족들이 무능하거나 범용한, 또는 권력 기반이 약한 황제를 조종하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고 신분 질서를 더한층 강화하는 도구로 변질되었다.
이상한 나라의 자본주의가 그려낸 새로운 세계지도
중국, 대륙과 대양을 관통하는 일대일로의 거대한 그림
중국은 고대부터 세계 유수의 초강대국이자 고도의 문명국이었다. 중국에서 유래한 한자와 유교 등은 국경을 넘어 동아시아로 퍼져나가며 동아시아 문화권을 구축했고, 중국의 4대 발명품이라 불리는 종이/인쇄술/화약/나침반은 세계 전역으로 전파되어 인류 문명을 획기적으로 변화 및 발전시켰다. 시대별로 편차는 있지만, 18세기까지 중국은 세계 최고의 경제대국이었다. 이러한 중국의 경제적/문화적 힘은 어디에서 연유했을까?
흔히 중국을 대륙이라 은유한다. 국토 면적 960만 제곱킬로미터인 세계 4위의 영토 대국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대륙인 호주의 770만 제곱킬로미터 정도보다 넓으니, 중국 대륙이라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고대부터 지중해 무역을 비롯한 해상무역에 의존하며 경제적 부를 창출했던 서구와 달리 중국은 넓은 영토를 효율적으로 연결하기 위해 다양한 교역로를 확보한 뒤 유라시아 내륙의 무역로, 즉 실크로드를 통해 부를 쌓아나갔다. 그러다 보니 고대부터 중국의 안보는 유라시아 스텝지대 기마 유목민과의 관계에 절대적 영향을 받아왔다. 한나라는 북방의 강대한 기마 유목민 제국인 흉노를 몰아내고 실크로드를 개척함으로써 중국 문명이 세계 문명의 중심지로 발돋움할 수 있는 지리적 발판을 마련했다. 당나라는 전성기에 안서도호부를 통해 중앙아시아 대부분을 지배함으로써 세계 제국으로서의 위상을 곳곳에 떨쳤다. 청나라 역시 중앙아시아 방면으로의 대대적인 팽창을 통해 오늘날 중국 영토의 틀을 잡았고, 18세기까지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으로 군림했다.
중국은 단순히 땅덩어리만 큰 대륙이 아니다. 대륙 국가이면서도 바다로 진출할 수 있는 지리적 환경에 놓여 있다. 동부와 남부 해안지대는 태평양/인도양으로 이어지며, 중국과 인도양을 잇는 바닷길은 초원길과 비단길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쓰였을지 모르나 엄연히 바다의 실크로드였다.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횡단했던 것보다 앞선 시대인 15세기 초반 명나라 조정은 대규모 선단을 거느린 정화를 파견해 동남아시아 일대에 수많은 조공국을 확보하고 아프리카 소말리아까지 진출하며 명나라의 위용을 과시했다.
유라시아와 인도양을 잇는 현대판 실크로드
오늘날 세계경제의 지리적 질서는 중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보이진 않는다. 이미 1990년대 중반부터 서방 자본주의국가들은 신자유주의 강령과는 별개로, 자국의 이익을 위한 경제와 무역의 지리적 통합에 나섰다. 유럽은 1940년대 후반부터 전쟁 재발 방지와 부흥을 위한 통합을 구상했고, 그 결실이 1993년 출범한 유럽 연합(European Union, EU)이다. 미국과 캐나다, 멕시코도 1994년 상호 간의 무역장벽을 철폐 또는 최소화함으로써 역내무역을 촉진하는 데 주안점을 둔 북미자유무역협정(North American Free Trade Agreement, NAFTA)을 결성했다. 이 세 나라는 NAFTA를 개정해 2020년 역내 자유무역의 촉진을 위한 미국/멕시코/캐나다협정(United States-Mexico-Canada Agreement, USMCA) 다자간 무역협정을 맺었다. 이 밖에도 세계 각국은 여러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며 배타적인 경제지리적 통합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2012년 집권한 시진핑은 2013년 9월 유라시아 내륙의 산유국 카자흐스탄에서 중국과 중앙아시아, 유럽을 하나의 경제로 연결하는 현대판 실크로드 경제벨트를 제안했다. 그다음 달에는 인도네시아를 방문해 인도양을 중심으로 중국과 동남아시아, 서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을 통합하는 21세기 해상 실크로드의 구상을 내놓았다. 현대판 실크로드 경제벨트가 일대, 21세기 해상 실크로드가 일로이니, 이를 합쳐 일대일로라 부른다.
일대일로 프로젝트는 중국을 중심으로 유라시아 지역을 여섯 개의 경제회랑(economic corridor)으로 구분한다. 이 가운데 새로운 유라시아 대륙교(New Eurasian Land Bridge) 경제회랑은 중국 북서부를 중앙아시아의 산유국이자 영토 대국인 카자흐스탄, 그리고 유럽 러시아와 연결한다. 중국-몽골-러시아 경제회랑은 이 세 나라를 잇는다. 중국-중앙아시아-아시아 경제회랑은 중국 서부에서 우즈베키스탄, 이란과 아라비아반도 북부를 거쳐 튀르키예까지 이어진다. 중국-인도차이나반도 경제회랑은 베트남, 캄보디아 등 인도 차이나반도를 중국과 연결하고, 중국-방글라데시 경제회랑 및 중국-파키스탄 경제회랑은 중국을 각각 방글라데시, 파키스탄과 연결한다.
이 같은 6대 경제회랑을 통해 중국은 광대한 유라시아 스텝과 사막, 고산지대 등의 자연지리적 경계로 분절되면서 다양한 문화권으로 나누어지는 유라시아 경제를 중국 중심으로 통합하고, 이를 인도양의 해양 실크로드와 연결지으려 한다. 이렇게 하면 유라시아와 인도양을 중국 경제의 영향력 아래 두어, 새로운 시장과 에너지자원의 공급처를 확보함은 물론 미국을 견제할 수 있는 지정학적 근거지까지 마련할 수 있다.
2023년 기준 한화로 1,200조 이상의 막대한 자금이 누적 투입된 일대일로는 특히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의 대대적인 참여를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 경제발전에 필수적이면서 막대한 비용과 뛰어난 기술력을 요구하는 인프라 건설을 대대적으로 지원한 덕분이었다.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 이후 세계경제가 위축되자, 일대일로는 그 대안으로 여겨지며 가입국을 더한층 확대해 나갔다. 2024년 12월 기준으로 가맹국은 150개국 정도에 달한다.
세계은행은 2017년에 전 세계 해외직접투자액의 35퍼센트, 수출 규모의 40퍼센트가 일대일로 참여국에서 이루어졌다고 밝혔고, 2019년에는 일대일로가 머지않아 유럽과 한국, 일본까지도 경제적으로 통합하리라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그리고 중국 국무부는 2023년 10월, 일대일로 프로젝트가 글로벌 경제협력의 혁신을 이루고 경제 세계화에 따른 여러 문제점에 대한 대안을 마련함으로써 인류 운명 공동체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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