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지 않을 용기
 
지은이 : 천하이센 (지은이), 박영란 (옮긴이)
출판사 : 더페이지
출판일 : 2026년 02월




  • 행복을 미루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불안과 자기 의심을 다룬 심리 에세이다. 실제 상담 사례와 심리학 이론을 바탕으로 자기 수용과 현재의 삶에 집중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완벽하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메시지를 차분히 전한다.


    행복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꿈보다 소중한 지금 이 순간
    당신에게 반드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위해 평생 끈질기게 노력하며 수많은 고통과 희생을 감내했다고 해보자. 그런데 목표가 이루어지기 바로 전날 갑자기 당신이 죽게 된다면, 당신은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평가할까? 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애니메이션 영화 소울Soul은 바로 그런 이야기를 다룬다. 주인공 조는 성공하지 못한 재즈 피아니스트로, 영화는 그의 인생을 음악에 대한 꿈과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치러야 했던 대가라는 상반된 두 측면에서 보여준다.

    그에게는 연로한 어머니 외에 가족도 없고, 재즈를 제외한 다른 일에는 관심도 없기에 되는대로 무심히 살아간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중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긴 하지만 역시 이 또한 즐겁지 않다.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학생들과 보내는 시간은 그저 세월을 낭비하는 일로 느껴질 뿐이다. 점점 그에게 음악은 삶의 실패를 체감하는 하나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유명한 재즈 스타와 같은 무대에서 공연할 기회를 얻었다. 운명의 장난인지 마침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려는 순간, 그는 기쁨에 도취해 맨홀에 빠져 죽고 만다.

    이제 정말 진짜 인생이 시작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끝나버리다니,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 생전 세계인 ‘태어나기 전 세상’에 도착하게 되고, 태어나고 싶은 의지가 전혀 없는 고집 센 영혼 ‘22’를 만나게 된다. 그의 멘토가 된 조는 함께 지구로 돌아갈 방법을 모색하며 모험을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꿈에 집착하느라 미처 보지 못한 세상을 다시 보며 새로운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물론 이 영화는 ‘현재를 살아가는 삶’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꿈이 지닌 잔인함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잔인함은 단순히 세속적인 의미의 꿈을 이루는 기회가 얼마나 희박한지를 상기시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더 나아가 꿈을 추구하는 과정을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만들어가는지를 이야기한다.

    꿈의 이중성
    꿈의 장점은 우리 삶에 목표를 부여하고, 삶을 재구성함으로써 무엇이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지, 무엇이 가치 있고 무가치한지, 무엇을 해야 하고 하면 안 되는지 등을 확립하도록 도와준다는 점이다. 그뿐만 아니라 분명한 목표가 있으면 우리는 인생에 더욱 집중할 수 있다.

    하지만 너무 지나치게 꿈에 집착한다면 꿈을 이루려고 준비하는 삶과 꿈을 이룬 삶이라는 두 부분으로 인생을 나누어 생각하게 된다. 꿈을 이룬 삶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진정한 인생이 시작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되면 꿈을 이루지 못한 시기의 우리 삶은 영원히 시작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꿈에만 집착하다 보면 목표를 협소화하는 심리적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경마장에서 눈가리개로 경주마의 눈을 가리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렇게 하면 말이 경주 중에 다른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릴 수 있다. 사실 꿈이란 우리가 자신에게 씌운 눈가리개와도 같다. 차이가 있다면 경주를 마치면 기수는 경주마의 눈가리개를 벗겨주지만, 우리는 가끔 꿈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그것을 계속 착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인생의 꿈을 가진 사람들은 이렇게 많은데, 그중 오직 소수만이 그 꿈을 이룬다. 그렇다면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들은 어떻게 실망에서 벗어나 다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만약 열심히 쫓았던 꿈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가끔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런데 영화 속 인기 있는 이발사가 해답을 주었다. 그의 어린 시절 꿈은 수의사였다. 그가 이발사가 된 이유는 수의사가 되는 데 드는 비용이 이발사가 되는 비용보다 훨씬 비쌌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누군가 그를 동정하려고 하자, 그가 말했다. “그렇게 보지 않아도 돼요. 난 지금도 좋아요.” 그는 이발 솜씨가 뛰어난데다가 손님들에게 친절하며 지금 하는 일을 좋아한다. 무엇보다 많은 사람이 그를 좋아한다.

    이것이야말로 대부분 사람의 현실이 아닐까?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은 현실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는다. 이 의미는 어쩌면 꿈만큼 거창하지도 않고 언급할 가치가 없을 수도 있지만 삶을 향한, 삶에 대한 열정을 품고 있다. 무언가에 몰입하고, 흥미를 느낀다는 것 자체가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방증이지 않은가.


    먼 곳을 향한 동경
    삶의 가능성에 대한 끝없는 갈망
    사람은 언제나 먼 곳을 동경한다. 그것은 현실의 삶과는 다른 가능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동안 방송 프로그램의 심리 상담사로 참가한 적이 있다. 이 프로그램은 참가자가 세상과 단절된 채 경치 좋은 자연에서 1년 동안 생활하며 그들의 일상을 24시간 온라인으로 생중계하는 형식이었다. 

    프로그램이 사전에 비공개로 진행되고 폐쇄적인 성향이 강한 만큼 참가자가 심리적인 문제를 겪지 않도록 제작진은 방송 시작 전에 참가자의 상담을 진행했다. 프로그램의 이색적인 콘셉트 덕분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동기를 이해하는 일이 무척 흥미로웠다. 아프리카 섬나라에서 자란 미녀 모델부터 퇴사 후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평범한 직장인, 재산이 수십억에 달하는 회사 대표 그리고 여기저기 떠도는 여행자와 수공예가에 이르기까지 프로그램에 참가한 사람들은 각양각색이었다. 

    이처럼 다양한 신분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프로그램에 참가한 이유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유명세’와는 전혀 달랐다. 사실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도 대중의 인기를 끌지 못했고, 영향력도 전혀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이 이 프로그램에 참가한 이유는 순전히 ‘다른 곳의 삶’과 먼 곳이라는 데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먼 곳이라는 말은 매혹적이고 신비로운 단어다. 이탈로 칼비노는 먼 곳에 대한 그리움과 공허함, 기대는 영원히 지속할 수 있으며, 인생보다 더 오래갈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그리움의 본질은 삶의 가능성에 대한 동경이다. 삶의 소소한 일들에 갇혀 지루하고 지치고 심심함을 느낄 때 먼 곳은 과거의 실패와 좌절, 후회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모두 수용할 가능성을 환상 속에서 만들어낸다.

    하지만 먼 곳에 도착한 후에는 어떨까? 만약 우리가 변하지 않는다면 타향은 결국 고향이 되고, 피로와 권태는 다시 마음속에 스며들 것이다. 우리는 적응하거나 다시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리고 이 과정은 반복된다.

    끊임없이 먼 곳을 찾아 떠돌다
    먼 곳은 정말 환상일까? 출연자 중 리장에서 가죽 공예를 하며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해바라기를 심는 청년이 있었다. 이 청년은 젊었을 때 베이징의 한 대형 호텔에서 웨이터로 일하면서 인생의 탈출구를 찾기 위해 고된 삶을 살았다. 어느 날 인터넷에서 한 남자(이 남자도 프로그램에 참가했다)가 무인도를 탐험하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문득 깨달았다. ‘저게 진짜 삶이지!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 그는 용기를 내어 사직서를 제출하고 몇 달 치 월급을 들고 먼 곳으로 떠났다. 

    첫 번째 도착지는 선양이었다. 며칠을 떠도는 사이 주머니에 있던 돈은 다 떨어졌고, 생활비를 마련할 방법은 찾지 못했다. 결국 그는 베이징으로 다시 돌아와 웨이터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돈이 좀 모이자 그는 다시 사직서를 제출했고, 이번에는 다리에 도착했다. 

    돈이 거의 다 떨어져 갈 때, 그는 어떤 사람이 관광지에 작은 가게를 열고 가죽 제품을 만들어 파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매일 그 가게 앞에 가서 ‘잠복’하며 그들이 사업을 어떻게 운영하는지 자세히 관찰했다. 한 달 뒤, 그도 길거리에서 가죽 제품을 팔며 생계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먼 곳의 삶도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가죽 제품을 팔고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해바라기를 심는 이러한 서정적인 일들도 결국 사업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러나 베이징에서 웨이터로 일했을 때와는 조금 달라졌다. 한동안 그는 다리에 있는 것이 지겨워서 가게 문을 닫고 짐을 싸서 티베트로 떠났다. 그곳에서 다시 가게를 열고 다양한 돌과 밀랍을 팔았다. 그에게는 삶이 너무 지루하고 단조로울 때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이 생겼다. 이러한 용기와 자신감은 그가 먼 곳에서 어려움에 적응하면서 체득한 것이다. 

    그렇다면 먼 곳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는 마음속에 품은 의문의 답을 찾고자 먼 곳으로 떠나려고 한다. 그러나 답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상상 속의 먼 곳은 분명 우리가 출발할 수 있는 최초의 동기를 제공하고 현실 속의 먼 곳은 우리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을 키워준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눈앞의 현실에서 먼 곳의 들판을 바라보며 찬양하게 된다. 우리가 찬양하는 것은 평범함에 대한 불만과 삶에 대한 동경 그리고 변화를 향한 용기이다. 비록 먼 곳이 때로는 환상일 뿐이라는 것을 이미 알았더라도 말이다.


    부모와 새로 관계를 맺는 중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도 거리가 필요하다
    경계를 넘지 않아야 관계가 이어진다
    심리 상담 분야에서 ‘경계’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는 서로의 독립성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내 삶을 책임지고, 너는 네 삶을 책임진다’라는 관점에서 서로의 경계를 쉽게 넘지 말아야 한다. 이는 두 개의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을 수는 있지만, 각자 껍질이 있어서 다른 달걀과 아무리 가까워지고 싶어도 결코 한 알이 될 수는 없다는 의미이다. 달걀이든 관계든 너무 가까우면 쉽게 깨지기 마련이다.

    독립은 사실 꽤 외로운 일이다. 이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보호할 수도, 보호받을 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존재 그 자체와 마주해야 한다. 이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서 더 친밀한 관계를 만들고, 의도적으로 이러한 경계를 무너뜨리려고 한다.

    얼마 전 우울증을 상담하러 온 친구가 있었다. 그녀에게는 오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최근 이혼 후 감정적으로 매우 힘들어했다. 병원에서 이미 우울증 진단을 받았고 밤늦게 전화를 걸어 전 남편에 대한 울분을 토하며 한두 시간씩 통화를 이어가곤 했다. 그녀는 친구가 걱정된 나머지 혹시 어떻게든 도와줄 방법이 있을지 물어보러 온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내 친구가’로 시작하는 질문의 경우 “내 친구가 불안이나 우울증, 강박증이 도울 방법이 있을까?”라는 질문과 혹은 “내 친구가 실연을 당했는데, 바람이 났는데” 같은 질문은 항상 조심스럽다. 그들이 다른 사람의 삶에 너무 깊이 개입하지 않을까 늘 걱정된다. 이건 아마도 상담가의 직업적 본능이 아닐까 싶다.

    나는 속으로 ‘경계를 지켜야 해’라고 계속해서 되새겼다. 그래서 우울증에 관한 몇 가지 정보를 제공하는 것 외에 그녀에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구할 수 없으니 구원자가 되려고 하지 말고, 그것은 신의 영역이니 신에게 맡기라고 특별히 당부했다.

    얼마 후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그 친구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다행히 잘 해내고 있고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녀가 어떤 방법을 선택했는지 궁금해졌다. 처음에는 친구에게 전화가 오면 몇 시간이고 잘 들어줬는데, 너무 반복되다 보니 그녀도 지쳐서 건성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해” “기운 내”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같은 말만 되풀이하다가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그러나 친구의 상태는 점점 나빠졌고, 한밤중에 두 번이나 전화해서 죽고 싶다며 울면서 그녀에게 와 달라고 부탁했다. 세 번째 전화가 왔을 때 그녀는 친구 집으로 달려갔다. 친구는 침대에 누워서 울고 있었다. “저도 같이 울었어요. 그리고 친구가 조금 진정됐을 때, 선생님이 저에게 해주신 말을 해줬어요.” “어떤 말요?” “경계와 규칙에 대해서요. 이 상태가 계속되면 우리는 진짜 멀어질지도 모르고, 언젠가 제가 그녀를 떠나게 될 수도 있다고요. 그러니 제가 그녀를 떠나지 않게 해 달라고요. 그러기 위해서는 관계에 약간의 제한이 필요하다고요.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만 전화하고, 통화 시간은 30분을 넘기지 말자고 했어요.” “그 친구가 동의했나요?” “친구가 한 번 정도는 더 늘릴 수 있냐고 묻더라고요. 뭐, 부담스럽긴 했지만 친구를 위해서 그 정도 대가는 치르기로 했어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녀가 정말 용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비판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관계의 한계를 인정하는 과정은 꼭 필요하다.

    단단히 묶여버린 부모와 자녀의 삶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전에 먼저 나쁜 사람이 될 필요가 있다'라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지속적인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먼저 독립적으로 분리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어느 정도 의존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편을 택한다. 즉 경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경계는 우리를 독립적인 존재로 나누어 놓는다. 때로는 이런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계를 넘어 다른 사람과 더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더 많은 삶의 내용을 공유하려고 하지만, 결국 경계는 객관적인 한계로 존재하고 그것을 존중하지 않으면 오히려 상처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술 마시고 카드 놀이할 친구는 많아지지만, 마음 터놓고 대화할 친구는 점점 줄어든다고 하나 보다.

    친밀한 관계일수록 경계를 인식하고 지키기가 더 어렵다. 가족 관계는 친구보다 더 가깝고 경계가 더 모호하기에 많은 사람이 의존적인 친밀한 관계에서도 경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실제로 많은 부부가 경계를 지키지 못해서 관계 안에서 답답함을 느끼다가 결국 멀어지는 경우가 많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더욱 그렇다. 자녀의 인생 초반 몇 년은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다가 자녀가 성장하면서 점점 경계가 생기기 시작한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우리는 자녀의 일은 부모의 일이고, 부모의 일은 당연히 자녀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자녀가 어릴 때는 부모에게 모든 책임이 있듯이 성인이 된 후에 부모가 순탄치 못한 삶을 살지 못하면 자녀가 그들의 삶을 돕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다. 다희는 바쁜 일상을 보내면서도 늘 고향에 있는 부모와의 관계가 마음에 걸렸다. "부모님과 싸운 지 벌써 10년 넘었어요. 관계가 나아지면 저도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을 텐데 아쉬울 뿐이죠."

    영이는 더 넓은 곳으로 가서 꿈을 펼치고 싶지만 혼자 있는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다. "사회에서 치열하게 일하면서 제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보고 싶어요. 계속해서 공부도 하고 싶고요. 그런데 아버지에게 제가 필요한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채민은 대도시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고 있었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서 집을 마련하고 우울증에 걸린 엄마를 돌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게 제 운명인가 봐요,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요."

    이들 가운데 그런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지 않다. 하지만 자기 일은 자기 일이고, 부모의 일은 부모의 일이라고 경계를 인정하는 사람 역시 거의 없다. 그들이 자라면서 가족들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계속해서 그들의 삶에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누군가 부모에게 자녀의 독립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면, 부모들은 콧방귀를 낄 것이다. "애들이 뭘 알겠어요? 다 얘네 잘되라고 하는 거죠." 그렇게 부모와 자녀의 삶은 아주 단단히 묶여버렸다. 사랑과 이기심, 자기 필요와 가족의 필요가 뒤섞인 채 가족의 경계는 자연스럽게 흐려졌다. 어느 날, 자녀가 성장해서 새로운 경계를 설정하려 할 때는 이미 경계선을 그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그들은 '운명'이라고 말한다. 이 한마디로 그들이 얼마나 큰 무력감을 느끼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무력감의 한편에서는 산업화 사회에서의 인구 이동이 이루어졌다. 젊은이들은 여기저기 이주하며 자신의 삶을 찾아 헤맨다. 그리고 무력감의 다른 한편에는 수천 년 동안 이어진 가족 중심의 의식과 효를 중시하는 전통문화가 자리 잡았다. 그래서 이들은 한 발짝 물러서면 자신을 희생해야 하고,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면 죄책감에 시달린다. 결국 진퇴양난에 빠져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는 것이다.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법
    관계 회복을 위한 첫걸음, 분리와 독립
    어떻게 하면 원가정과 더 나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우리는 먼저 집을 떠나 자신만의 세상을 찾은 다음 집으로 돌아가, 성숙한 성인의 신분으로 서로를 지지하는 동시에 경계를 존중하는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그럼 어떻게 집을 떠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분리와 독립을 통해 각자의 경계를 설정해야 한다. 그러나 일단 분리되면 외로움을 견뎌야 하고, 우리가 떠남으로써 상대방이 힘들어지는 것도 참아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오랫동안 지켜온 충성심과 어긋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아주 고지식한 집안에서 태어난 여성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녀는 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는데 가정의 구속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집안의 결정에 따라 전혀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했다. 결혼 후 그녀는 아들을 낳았고, 모든 관심을 아들에게 쏟았다. 시간이 흘러 아들이 자라 집을 떠날 때, 아들이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제가 떠나면 외로우시겠어요. 제가 떠나고 없으면 누가 엄마를 위로해 드리죠?” 엄마가 대답했다. “네가 떠나면 나는 외롭고 쓸쓸하겠지. 위로해 줄 사람도 없을 거야. 하지만 내 어려움을 네가 떠나지 못할 이유로 삼고 싶지 않구나.”

    ‘나는 내 어려움을 네가 떠나지 못할 이유로 삼지 않겠다’는 다짐은 부모로서 자식을 위해 해야 할 가장 어려운 책무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충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우리가 떠나는 것이 인생의 필연적인 과정임을 인정하고, 우리의 성장이 집을 떠나야 이루어진다면, ‘떠남’을 부추기는 행동 역시 일종의 사랑이 아닐까? 이는 우리의 충성을 배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어려운 충성을 이뤄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끝내고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변화에 잘못된 길이란 없다
    자기 변화의 길을 가라
    변화는 매우 어렵다. 변화는 혼란과 반복, 갈등으로 가득 차있다. 단호하게 떠나지 않으면 쉽게 벗어나기 어렵다. 만약 그런 이야기가 당신이 변화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 이야기를 하면 된다. 당신을 무력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아닌 당신에게 유리한 이야기를 하자.

    내가 예전에 했던 이야기를 돌아보면서 더 명확하게 보게 된 부분이 있다. 비록 많은 허점이 있었지만, 나는 그것이 하나의 전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당시 나의 용기가 놀랍고, 인생의 신비로움이 감탄스럽다. 

    나는 변화를 돕는 훈련 캠프를 만들어 사람들이 건강한 변화를 이루도록 도왔다. 가까운 미래에는 변화에 관한 책도 쓸 예정이다. 내가 아는 변화에 관한 지식과 이야기를 함께 나눌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도 여전히 변화의 어려움에 관한 두려움이 남아있다. 학생들이 기존 직업과 관계를 떠나 새로운 자아를 찾으려 한다고 말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하곤 한다. 특히 나에게 영향을 받아 이런 선택을 한다고 말할 때 더욱 그렇다. 그 길의 어려움을 잘 알기에 나는 더 신중해진다. 나는 그들에게 ‘변화가 정말로 갈만한 길일까? 다른 길은 없을까? 정말로 변화가 필요한 시점인가?’라고 묻는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묻는다. 내가 변화의 법칙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때, 내가 걸어온 길은 보편적인 법칙을 증명하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내가 운이 좋아서 중요한 기회를 얻었기 때문일까? 만약 내가 성공하지 못했다면 그때의 결정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 질문을 자신에게 던졌을 때, 답을 알았다. 그리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단지 운 때문이 아니라고 말이다. 내가 요약한 길은 보편적인 법칙이다. 나 자신의 성장, 학생들의 피드백 그리고 많은 사람의 성장 과정을 통해 그 법칙이 계속해서 드러났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어쩌면 가장 중요하지 않은 것은, 나중에 내가 새집을 샀다는 것이다. 이전 집보다 더 크고 더 좋으며, 우연히도 학교 근처에 있다. 이것은 의도한 보상이 아니었다. 단 이러한 우연은 현실에서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지만, 은유적으로는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나에게 당신이 잃어버린 것은 다른 곳에서 다시 얻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당신이 잃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을 것임을 알려준다. 이것이 자기 변화의 길을 걸을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다.

    또한 이야기도 중요하다. 지금 나는 또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이야기는 새로운 전개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새로운 시작이 펼쳐질 것이다. 당신도 자신만의 인생 이야기를 찾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