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햄블리는 세계 최고의 매체에서 오랜 기간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면서 쌓은 전문지식과 열정으로 색채의 향연을 차려놓고 독자들을 초대한다. 2017년 개설한 그의 블로그 ‘Colour Studies’는 세계의 톱 디자이너들이 참조하는 가장 인기 있는 사이트다. 유럽과 북미의 디자인 문화를 선도하는 인기 있는 잡지 《Uppercase Magazine》에서 특집으로 다루기도 했다.
색은 세상을 이루는 기본적인 요소다. 우리 기분을 좌우하고 매혹하기도 한다. 예술가나 디자이너부터 감수성이 풍부한 일반인들을 포함한 모두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진기한 색에 얽힌 이야기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 것이다. 저자는 따스하면서도 예리한 유머와 통찰력으로 세상사에 스며든 색채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
■ 저자 밥 햄블리(Bob Hambly)
1990년 토론토에 본사를 둔 그래픽 디자인 회사 햄블리앤드울리(Hambly & Woolley)를 창업했다. 그 이전부터 오랜 기간 〈뉴욕타임스〉, 〈타임〉, 〈선데이 매거진〉 등 여러 매체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해왔다. 또한 북미 전역에서 수많은 수강생에게 디자인과 관련된 강의를 하면서 초빙 대상 1순위의 실력 있는 강사로 인정받았다.
현재 ‘컬러 스터디(https://www.colourstudies.com/)’라는 웹사이트를 운영하며 사진, 미술, 저술 등의 분야에도 집중하고 있다. 색은 그의 모든 활동에서 필수적인 부분이다.
■ 역자 최진선
영어를 전공하고 호주 맥콰리대학교Macquarie University에서 공부하였다. 국제행사에서 통역, International Student Fellowship 국제학생회에서 외국인 유학생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며, 영어와 한국어 두 언어를 잘 표현하는 일에 관심이 깊어졌다. 평소 경제, 금융, 심리학 분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영어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던 중 번역을 시작했다.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번역한 책으로 《금융의 미래》, 《반란의 경제》 등이 있다.
인스타그램: igloo_0123
■ 차례
PROLOGUE
이야기를 품은 색이 빛을 낸다
올해의 색은 어떻게 선정될까
이발소 회전간판의 비밀
생명을 보호하는 보라색
케첩 머스터드 이론
색에 상상력을 더하다
컨테이너마다 색깔이 다른 의미
미라에서 색을 구했다고?
하버드에는 색깔 도서관이 있다
빨강_색을 향한 열정
백악관 이름의 유래
공포의 드라마를 쓴 에이전트 오렌지
보라색이 국기에 쓰이지 않는 이유
위조를 막은 녹색 잉크
우리가 잘 모르는 색깔별 안전모
무지개 나무가 보여주는 오묘함
최고를 상징하는 파란 리본
색의 자극을 피하라
자연 속 살아 있는 보석을 찾아라
색의 어원 1
녹색 표지판, 친절한 안내를 담당하다
노랑_10년을 정의하다
희귀한 돌연변이 푸른 바닷가재
색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자
예술을 창조하는 새
검은색이 반칙을 부르는가
인간은 몇 가지 색을 구분할 수 있을까
디자인만 바꿨을 뿐인데
파랑_영감의 원천
하얀색의 양면성
색이 보여주는 경고 신호
여권, 나라 이미지가 달라지고 있다
테니스 코트를 사수하라
기발한 자동차 이름은 색에서 나왔다
경마 기수복, 디자인과 색을 응원하다
색의 어원 2
블랙박스가 검정이 아니라고?
푸른발을 가진 부비새
소화전 색에 담긴 의미
주황_같은 색깔 다른 세계
빨간 머리는 왜 공공의 적이 되었는가
바닷속 오묘한 색의 향연 버튼산호
난민에게 국가를 허하라
빨간 글자에는 특별함이 있다
양철 나무꾼
페인트는 유일한 자기만의 이름을 가진다
먹이 때문에 몸의 색깔이 변했다고?
하얀색 웨딩드레스는 누가 최초로 입었을까
이색적인 해변을 찾아서
시각적 효과를 노린 의자의 색
보라색_숭고한 대의
세계인을 사로잡은 천연색 곡물
풋볼팀 로고가 없는 클리블랜드 브라운스
청소 새우와 물고기의 공생
색의 어원 3
마음에 새겨진 잉크
미술관에 전시된 무지개 깃발
카푸친 수도사들이 남긴 색
혁명의 빨강색 중국을 대표하다
색마다 다른 우아함이 깃든 튤립
분홍이 폭력을 잠재운다고?
풍자를 실어 보내는 보라색 글
녹색_불편한 진실
세상에서 가장 불쾌한 색
빨간눈청개구리, 화려함으로 약점을 가리다
색에 정보를 담으면
새로운 검정이 나타났다
네 가지 색의 향연을 즐겨라
성분에 따라 물의 색깔이 바뀐다고?
블루, 신뢰를 말하다
노란색 전화번호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다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타탄 무늬
티파니 블루, 색으로 연상되는 회사가 있다
범죄 예방 효과를 노린 푸른빛
노란 저지, 우승자에게 색을 입히다
〈뉴욕타임스〉와 〈타임〉지 등 여러 매체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해 온 저자는 일상에서 흔히 만나는 안전모, 컨테이너, 웨딩드레스, 케첩 등을 놓치지 않고 ‘색’이라는 프리즘으로 들여다보고 얽힌 이야기를 찾아내 들려준다.
컬러애 물들다
올해의 색은 어떻게 선정될까
올해의 색이 발표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부터이다. 한 가지 색이 그해에 가장 유행을 선도한다는 의미로 채택되는데 지금까지 레디언트 오키드(Radiant Orchid), 리빙 코랄(Living Coral), 탠저린 탱고(Tangerine Tango) 등이 올해의 색으로 선정되었다. 모두 매력적인 이름만큼 아름다운 색깔이다. 그렇다면 올해의 색은 누가 선정하는가? 어떻게 수많은 색을 제치고 하나의 특정 색이 유행을 선도한다고 예견하는가?
공식적으로 올해의 색은 팬톤(Pantone)이라는 색채 연구 기업이 매년 12월에 다음 해의 색을 선정하고 발표한다. 팬톤이 개발한 색상 표준 체계는 PMS(The Pantone Matching System, 팬톤 컬러매칭 시스템)으로 디자이너가 색상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관리한다. 그로 인해 그래픽 디자인, 산업 디자인, 자동차 디자인, 패션, 홈 퍼니싱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색상 체계의 기준으로 활용되고 있다. 전 세계 모든 디자인 업체와 디자이너가 탈부착이 가능하고 수많은 색표가 깔끔하게 정리된 팬톤의 컬러북을 한 권 이상 소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해의 색을 선정하는 과정은 굉장히 까다롭다. 먼저 올해의 색 선정위원회 컨설턴트는 런던과 파리, 밀라노 등 세계적 패션 중심지에서 열린 패션쇼를 관람하고 새로운 색상 동향을 파악한다. 떠오르는 트렌드가 무엇인지 분석하기 위해 영화계와 예술계뿐 아니라, 과학 분야와 새로운 기술 산업도 면밀히 조사한다. 심지어 동식물을 보며 새롭고 독특한 색의 조합을 떠올리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 각종 기록과 사진, 인터뷰까지 오랜 시간 동안 분석한다. 그만큼 철저한 조사를 거치고 수많은 관문을 뛰어넘어 올해의 색이 세상에 발표된다.
물론 선정된 색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와닿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해의 디자인이나 산업에서 주목할 만한 색임은 틀림없다.
하버드에는 색깔 도서관이 있다
하버드의 슈트라우스 센터(the Straus Center for Conservation and Technical Studies)는 색깔 도서관이다.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Cambridge, Massachusetts)에 위치한 하버드대학 내에 있으며, 선반에는 다양한 색상의 안료 샘플이 넘쳐난다. 이 센터가 설립될 수 있었던 것은 에드워드 월도 포브스(Edward Waldo Forbes)의 순수 미술에 대한 열정 덕분이었다. 랠프 월도 포브스의 손자이자 하버드 졸업생인 그는 유럽 고전 작품의 진위를 증명하기 위해 페인팅 기술과 안료, 예술 작품 보존을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포브스 안료 컬렉션(Forbes Pigment Collection)’에는 포브스가 전세계를 다니면서 모은 2,500여 개의 안료 표본이 전시되어 있다. 방대한 안료가 연구자들과 일반인 모두에게 공개되어 그림의 재료를 정밀하게 분석하는 데 이용된다. 실제로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의 작품이라고 알려진 그림에 사용된 안료가 폴록의 사후에 제조된 물감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내면서 작품이 위작임을 증명했다.
컬렉션에 소장된 안료의 재료는 그야말로 굉장히 다양하다. 어떤 안료는 식물과 광물에서 채취한 재료로 추측된다. 곤충이나 소의 오줌으로 만들어진 안료도 있다. 컬렉션 선반을 찬찬히 감상하다 보면 안료의 이름과 더불어 흥미로운 이야기도 알게 된다. 유명한 예술가만을 위해서 특별 제작된 물감, 작품을 그리기에는 너무 위험한 독성 물질이 사용되었다는 사실 등 예술가가 작품을 위해 목숨을 건 위험을 감수했다는 일화도 알게 된다.
하버드 색깔 도서관을 방문하면, 무수히 많은 색이 가진 각각의 사연을 알게 된다. 무궁무진한 인간의 호기심만큼 다채롭게 펼쳐지는 색의 세계에 빠질 수 있다.
빨강_색을 향한 열정
엘리자베스 1세는 당시 바다의 절대 강자였던 스페인 무적함대와 맞서기 위해 ‘씨독’이라는 함대를 조직했다. 스페인 해군은 16세기 후반부터 18세기 무렵까지 범선 갤리언(Galleon)에 보물을 꽉꽉 채워 본국으로 돌아갈 만큼 멕시코로부터 엄청난 양의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씨독의 임무는 막강한 스페인 함대를 무력화시키고 값나가는 화물을 빼앗아 오는 것이었다. 즉, 씨독은 여왕이 직접 임명한 해적이나 다름없었다.
해군에 입대한 대원들은 대부분이 이 특수부대의 차출되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여왕은 성능 좋은 함선을 지원했고, 어느 때보다도 음식을 풍족하게 제공했으며 결정적으로 대원에게 포상금을 나눠주기로 약속까지 했다. 적과 싸워 이기면 금과 은, 희귀한 보석은 물론 이국적인 향신료까지 획득할 수 있었다.
운이 좋을 때는 적군의 배에서 잔뜩 죽어 있는 연지벌레를 발견하기도 했다. 연지벌레는 인체에 무해한 작은 곤충으로 연지벌레가 만들어내는 강렬한 붉은색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색감으로 인기가 높았다. 그러니 선내에서 말라비틀어진 연지벌레 사체를 발견했다는 건 금괴를 발견한 것과 다름없었다. 공해상에서 벌어진 대규모 약탈 중 하나는 연지벌레 27톤을 실고 가던 스페인 함선 3척을 씨독이 나포한 사건이다.
스페인인들은 무려 3백 년 넘게 이 붉은 염료의 비밀을 숨겨왔다. 나중에 이를 안 유럽인들은 성냥개비 머리만한 연지벌레의 가치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깨닫고 연지벌레를 찾는데 혈안이 되었다. 염료 생산이 활발하게 이뤄진 18세기 후반에는 연간 투입된 연지벌레가 무려 천억 마리에 달했다고 하니 가히 그 붉은 색의 황홀함이 짐작된다.
빨강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문화와 제국을 빛내준 색이다. 이집트, 중국, 마야, 아즈텍 사람들의 옷과 도자기, 그리고 몸을 돋보이게 해주었다. 또 빨강은 인생, 사랑, 열정뿐만 아니라 분노, 공격, 승리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단어를 상징한다.
연지벌레로부터 추출한 코치닐(cochineal) 색소의 우수한 착색력은 르네상스 동안 붉은색의 명성을 한층 더 높였다. 본래 부와 명예를 가진 사람만이 이 매혹적인 염료를 살 수 있었기에 선명한 빨간색 옷은 높은 귀족이나 왕족 계층, 성직자가 주로 입었다. 그런데 코치닐 색소를 구하기 쉬워지면서 특별한 사람만 입던 붉은색 옷을 너도나도 입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1860년대에 합성염료가 개발되면서 코치닐 색소는 점차 그 명성을 잃어갔다. 화학 기술의 발달로 연지벌레를 이용해 염료를 생산하는 일이 줄었고 코치닐은 세계적인 직물 시장에서 존재감을 잃었다. 그렇지만 각종 식품, 음료, 화장품, 제약, 페인트 등 다양한 제품의 원료로 오늘날까지 많이 사용되고 있는 편이다. 어떤 제품 성분에 ‘카민, 카민산, 식용색소 적색 제40호’가 표기되어 있다면 코치닐 색소가 함유되었다는 의미이다.
색소를 만들기 위해 엄청난 수고와 비용을 감수해야 했던 시대, 작은 벌레는 색을 제조하는 방식에 큰 변혁을 일으켰다. 코치닐 색소가 널리 퍼지면서 아주 아름다운 산뜻한 붉은빛이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동시에 색을 보는 우리의 눈도 높여 놓았다. 역시 작은 고추가 매운 것 같다.
노랑_10년을 정의하다
한 가족이 식사하고 대화를 나누는 공간인 주방은 집안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다. 이곳을 흰색 가전제품으로 주방을 꾸미자니 너무 평범하고, 스테인리스 스틸로 하자니 너무 전문 식당 느낌이 들기도 한다. 고민 끝에 노란 카나리아 색으로 주방을 가득 채웠다고 상상해보자. 아침 햇살이 반겨주는 것처럼 무척 화사하고 에너지와 생기가 흘러넘친다. 이제 더 이상 주방에서 냉장고, 난로, 식기세척기, 빵 저장 용기, 싱크대는 조연이 아니다. 주방을 빛내는 주역이 되었다. 실제로 1960년대에는 어디에서나 밝은 계열의 색을 볼 수 있었다. 이런 시대의 흐름을 타고 노랑의 시대가 왔다.
오랜 기간 노란색은 파스텔 계열로 치부되어 꽃무늬 천이나 주방 벽에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설움을 딛고 당당히 대중문화를 선도하는 색으로 거듭났다. 비틀즈를 캐릭터화한 ‘노란 잠수함(Yellow Submarine)’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개봉되었고, 도노반의 ‘멜로 옐로(Mellow Yellow)’라는 곡이 발표되었다. ‘아주 작고 노란 물방울무늬 비키니(Itsy Bitsy Teenie Weenie Yellow Polka Dot Bikini)’라는 곡은 여름마다 울려 퍼진다.
색을 점으로 분할해 찍어내는 팝아트는 예술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Andy Warhol)은 <마릴린 먼로 초상>에서,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은 만화의 한 장면을 확대하여 그린 작품에 노란색을 사용했다. 예술가의 사랑을 받으며 노란색은 이제 주류 색이 되었다.
상업적으로도 노란색이 많이 활용된다. 브래니프 항공사(Braniff Airways)는 노란색 비행기를 도입했고, 소속 승무원들은 이탈리아 유명 패션 디자이너 에밀리오 푸치(Emilio Pucci)가 디자인한 화려한 패턴의 노란색 유니폼을 입었다.
60년대에는 감각적인 디자인의 세 가지 스포츠 쿠페형 자동차가 출시되었는데 모두 노란색이었다. 쉐보레 카마로(Chevrolet Camaro), 포드 머스탱(Ford Mustang), 플리머스 바라쿠다(Plymouth Barracuda)가 그 주인공들이다. 1967년에 뉴욕시는 모든 택시를 노란색으로, 더 정확히 말하자면, 듀퐁사Dupont(미국의 화학 회사-옮긴이)가 개발한 M6284 노란색으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지금도 뉴욕을 떠올리면 여러 상징적인 건물과 더불어 노란 택시가 연상되지 않는가.
노란색을 두드러지게 상징화한 것은 스마일 버튼이다. 1963년에 출시되자마자 그 시대 행복의 상징이 되었다. 더불어 노랑은 미소와 흐뭇함을 전달하는 색이 되었다.
1960년대는 의식의 전환이 일어나는 시기였다. 문화와 정치, 전쟁, 인종, 성, 환경 등 다양한 주제로 대립하며 저항과 논쟁이 빈번하게 유발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갔다. 우주 탐험 시대를 열며 새로운 도약을 시도했다. 과학 발전에도 힘을 쏟았으며 경제 성장의 동력을 마련했다. 그만큼 사회 곳곳에서 다양한 변화가 나타났다. 하지만 더 나은 사회를 향한 갈망은 결코 사그라들지 않았다. 존 레논(John Lennon)은 이와 관련하여 “60년대 동안 우리는 가능성을 보았고 책임 의식을 깊이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완전한 해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우리는 가능성을 살짝 경험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산업이 발달하며 1960년대에는 색의 사용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의식의 전환을 경험한 새로운 세대는 색을 이용하여 자신을 표현할 줄 알았다. 젊은이들은 필사적으로 세상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존재를 드러내길 원했다. 이들은 자제하거나 조용히 지내는 것과는 거리가 먼 세대였다. 따라서 희망과 깨달음의 상징인 노란색은 60년대에 가장 빛을 발한 색으로 60년대를 규정하는 색이 되었다.
보라_숭고한 대의
지금으로부터 110여 년 전, 영국 런던에서도 에멀라인 랭크허스트(Emmeline Pankhurst)와 동료들이 여성 참정권 운동을 전개했다. 여성들이 투표권을 쟁취하고자 했던 열기는 수년간 뜨겁게 지속되었다. 하지만 때때로 조직 내 불협화음과 결집력 부족으로 그 여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1908년 〈여성에게 투표권을(Vote for women)〉이라는 주간지 편집자 에멀라인 페틱 로렌스(Emmeline Pethick-Lawrence)는 참정권 운동을 확대하기 위해 색깔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녀는 각각의 색을 정한 이유를 대중에게 설명했다.
“모두가 알다시피 보라색은 왕실을 상징하는 색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라색은 모든 참정권 운동가들 속에 흐르는 고귀한 피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자유와 존엄을 향한 본능을 나타냅니다. 흰색은 사생활에서든 사회에서든 결백한 삶을 살겠다는 의미이며, 봄의 상징인 초록색은 희망을 의미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집회가 열리는 날, 3만 명 이상의 여성이 하이드 파크(Hyde Park)에 집결했고 공원 전체를 보라색, 초록색, 흰색으로 물들였다. 거리에는 세 가지 색으로 만든 플래카드, 리본, 스카프, 휘장이 넘쳐났다. 효과는 상당했다. 이후 보라, 초록, 흰색은 공식적으로 여성 참정권 운동을 상징하게 되었다.
1915년 같은 이유로 8천 명의 여성이 워싱턴 D.C.에서 행진을 벌였다. 플래카드에는 ‘헌법 개정을 통해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 집회에 참여한 운동가들은 보라색과 금색 띠를 둘렀다. 영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보라색과 계몽을 상징하는 금색이었다. 색으로 참정권을 향한 미국 여성들의 열정을 드러낸 것이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보라색은 수 세기 동안 황제, 사제, 치안판사, 전사와 같은 권력자가 독점한 색상이었다. 색의 의미도 야망, 품위, 독립을 뜻했다. 기독교에서는 보라색이 긍지를 나타낸다. 미국에서는 용기 있고 용감한 군인에게 ‘퍼플 하트(Purple Heart)’ 훈장을 수여한다. 중국에서는 보라색이 불멸을 상징한다. 이처럼 보라색이 매우 고귀한 가치를 상징하기에 여성 운동가들이 대의명분을 이루기 위해 보라색을 사용한 것은 상당히 현명한 선택이었다.
1960년대 전미여성기구(NOW)와 같은 열정적인 조직이 생겨나자 미국에 두 번째 페미니즘 물결이 일었다. 1978년에는 10만 명의 여성이 워싱턴 D.C.에서 행진했다. 다시 한번 거리가 보라색, 금색, 흰색으로 물든 것이다. 현재 전미여성기구와 세계 여성의 날을 상징하는 로고에는 보라색이 들어가 있다.
보라색이 여성의 권익을 지지하는 운동의 대명사가 되기까지는 시위 현장의 역할이 컸다. 대신 어떤 로고나 휘장도 사용하지 않으며 흔한 구호조차 외치지 않는다. 오직 색깔 하나로 위대한 과업을 이루어냈다.
녹색_불편한 진실
동물의 경우는 어떨까? 개구리의 밝은 피부색과 스컹크의 선명한 줄무늬 색은 자신이 위험한 존재라는 것을 다른 포식자에게 경고하는 기능을 한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에게 위험을 알려주는 도구였던 색깔이 오히려 우리를 위험에 빠뜨린 적은 없는가?
1820년부터 1870년까지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유례가 없을 만큼 자연에 심취해 있었다. 린 바버(Lynn Barber)는 자신의 저서 《박물학의 황금시대(The Heyday of Natural History)》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19세기 중반까지 중산층 거실에는 수조, 양치식물 수집함, 나비 박제 보관함, 해조류 모음집, 조개 수집함 등 박물학과 관련된 흔적이 가득했다.”
당시 사람들은 자기 소장품을 늘리기 위해 시골과 해안가를 뒤지고 다녔다. 실내 장식가들은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디자인을 시장에 내놓았다. 고리버들 의자나 주철로 된 테이블 다리에 자연 문양을 새겨넣기도 하고 흩날리는 꽃잎과 초목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무늬를 이루는 가구 덮개와 카펫을 제작했다. 벽지에도 온갖 종류의 꽃무늬 패턴이 등장해 인기를 끌었다.
벽지에는 자연의 느낌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초록색 계통이 주로 사용되었다. 마치 새로 자란 이끼나 공작고사리, 벼과에 속한 여러해살이풀 마시그라스(marsh grass)를 보는 듯했다. 그야말로 집 안에 자연을 들인 형국이었다.
자연의 색상을 구현해내는 제조업자들은 여러 가지 염료와 재료를 사용해 실험을 거듭했다. 좀 더 새롭고 매혹적인 초록색을 만들어 경쟁에서 지지 않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했다. 사람들이 가장 탐내는 초록색은 ‘셀레 그린(Scheele's Green)’이었다. 산뜻한 느낌을 주는 이 호화로운 색은 거실, 주방, 심지어 욕실까지 생명을 불어넣었다.
셀레 그린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부유층에 특이한 일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아프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그 원인을 알 수 없었지만 한 내과의가 강한 의지로 끈질기게 조사한 결과, 원인이 벽지에 있음이 밝혀졌다. 특히 초록색 솜털무늬벽지(flock wallpaper)가 문제였다. 벨벳 질감을 내기 위해 폐기된 모직물로 만든 분말을 붙인 것이다.
이후, 셀레 그린에 비소의 함량이 엄청났다는 것도 밝혀졌다. 공기 중 색소 분말과 유독 가스에 노출되어 사람들 생명을 위태롭게 한 것이다. 노인층과 아이들은 독성에 특히 취약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영국 제조업자들이 비소의 위험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는 사실이다. 셀레 그린이 최고 유행 상품이 되면서 제조업자가 벌어들이는 돈 때문이었다. 희생자가 속출하고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면서 결국, 벽지회사는 벨벳 벽지의 독성으로 사람들이 사망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비소의 위험성이 알려지자 여러 상품에서 비소를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 치명적인 성분은 벽지 외에도 녹색 유리잔, 녹색 페인트, 심지어 녹색 드레스에서도 발견되었다.
빅토리아 시대는 과학 분야에서 수많은 발견을 통해 점성학, 물리학, 의학의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위대한 동식물학자 찰스 다윈이 과학적으로 진화 이론의 초석을 만든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대 사람들은 자연을 탐구하면서 더 넓은 세계를 이해하고 이론을 정립하는 데 진심을 다했다. 그러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줄 것이라 기대하고 좀 더 자연을 닮은 색을 추구한 인간의 욕심으로 아름다운 킬러가 되었다. 이는 누구 탓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