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 사이(Blu)》의 작가 츠지 히토나리, ‘코로나 이후’ 첫 에세이. 화려한 뮤지션이자 영화감독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작가지만, 현실에서는 낯선 파리에서 홀로 아들을 키우는 싱글 파파이기도 하다.
이 책은 싱글 파파가 된 작가가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아들의 청소년 시절을 함께하며 가족과 삶에 대해서 생각한 내용을 담은 ‘성장 일기’이다. 처음에 절망에 빠졌던 작가는, 때로는 일상 속의 요리와 가끔은 일상을 벗어난 여행을 통해 조금씩 아들과 함께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 간다. 특히 두 ‘현실 부자’는 음악과 친구, 미래를 재료로 진지함과 유머라는 양념을 뿌려 맛깔나는 일상의 음식을 하루하루 차려 낸다.
팬데믹은 지나가고, 일상은 다시 돌아왔다. 그 시절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은 무엇일까?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한 가족의 모습 속에 자연스럽게 우리의 모습이 겹친다.
■ 저자 츠지 히토나리
일본의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영화감독, 뮤지션(가수, 영화인으로 활동할 때는 ‘츠지 진세이’라는 이름을 쓴다.
1959년에 도쿄에서 태어났다. 1981년 록밴드 에코즈(ECHOES)를 결성하여 뮤지션으로 활약하다가 1989년 소설 《피아니시모》가 제13회 스바루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작가로 데뷔하였다. 1997년 《해협의 빛》으로 제116회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였으며, 1999년에는 《백불(白佛)》 프랑스어판으로 프랑스의 대표적 문학상인 페미나상(Prix Femina, 외국소설 부문)을 일본인 최초로 수상했다. 현재 프랑스 파리에서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국내에서는 에쿠니 가오리와 함께한 《냉정과 열정 사이 (Blu)》(같은 제목 영화의 원작 소설), 공지영 작가와 공동 집필한 소설 《사랑 후에 오는 것들》 등으로 수많은 독자와 만났다.
ㆍ웹진_Design Stories
ㆍTwitter_@TsujiHitonari
■ 역자 김선숙
대학에서 일문학을,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후 출판사에서 오랫동안 편집자로 일했다. 지금은 일본어 출판기획 및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수수께끼가 있는 아침 식사》, 《싸우는 식물》, 《손정의 비록》, 《나는 소중해》, 《인권이 뭐예요?》, 《뇌-잠 못들 정도로 재미있는 이야기》, 《대화의 심리학》, 《어릴 때부터 철학자》, 《시간 낭비를 확 줄여주는 초효율 공부법》, 《자신을 컨트롤하는 초집중력》 등이 있다.
■ 차례
프롤로그
2018|아들 나이 열네 살
2019|아들 나이 열다섯 살
2020|아들 나이 열여섯 살
2021|아들 나이 열일곱 살
2022|아들 나이 열여덟 살
에필로그
‘냉정과 열정 사이(Blu)’의 작가 츠지 히토나리의 ‘코로나 이후’ 첫 에세이입니다. 두 ‘현실 부자’가 음악과 친구, 미래를 재료로 진지함과 유머라는 양념을 뿌려 맛깔나는 일상의 음식을 하루하루 차려 냅니다.
파리의 하늘 아래, 아들과 함께 3000일
프롤로그
아직도 싱글 파파가 된 그날의 절망감을 잊을 수가 없다. 그날부터 아들은 마음을 닫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아들이 예전의 미소를 되찾을 수 있을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밤, 아들 방에 가봤더니 아들이 늘 껴안고 자는 아기 곰 인형이 젖어 있었다. 그것도 축축하게. 응? 깜짝 놀라서 아들의 눈가를 만져 보니 눈물기로 젖어 있었다. 내 앞에서는 절대 울지 않던 아들이 혼자서 몰래 눈물을 흘리다니…….
그때 아들에게 정말 안쓰런 마음과 함께 가슴이 아팠다. 그 순간 나는 엄마 노릇도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아들과 나는 잘 먹지도 못했다. 휑하고 냉랭한 집에 살던 우리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고, 그 뒤에는 둘이 바싹 붙어 지내게 되었다.
내 방과 아들의 방은 얇은 벽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부스럭부스럭 뒤척이는 아들의 소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곤 했다……. 위궤양 진단을 받은 나는 날마다 약을 먹어야만 했다. 그 탓인지 몸무게가 50킬로그램을 겨우 넘길 정도로 빠져 버렸다. 뭐든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맛있는 밥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매일 아침 나는 하얀 쌀밥을 도시락에 담았다. 그러고는 ‘아침 도시락 습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점심에는 아들이 학교에서 주는 급식을 먹기 때문에 저녁만큼은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맛 좋은 음식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 마음으로 만든 음식 중 아들이 잘 먹어준 것이 바로 토마토와 참치 파스타였다.
아빠인 내가 엄마를 모두 대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요리였다. 그래도 요리를 잘한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요리도 할 줄 몰랐다면 더 힘들었을지 모른다. 요리를 시작하게 되면서 집안에 온기가 돌았으니까. 그리고 주방은 우리를 구해 주는 피난처이기도 했다.
먹어야 산다고 자신을 다독이며 그날그날을 버텼다. 축 처져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내가 여기서 힘을 내지 않으면 가정이 무너져 버린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래서 온종일 주방의 불을 끄지 않았다. 작은 테이블을 사서 주방 옆에 두고는 그 위에 컴퓨터를 놓고 작업을 하면서 조림이나 찜처럼 시간이 오래 걸리는 요리를 했다. 말하자면 온기가 사라지지 않게 안간힘을 쓴 것이다.
요리를 좋아하는 한 친구가 토마토 안에는 필요한 영양소가 듬뿍 들어 있으니 아들이 토마토를 좋아하면 일단 토마토를 먹이라고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나날이었지만 토마토 덕에 살아났다. 아들은 토마토와 마늘 파스타를 아주 맛있게 먹었다. 그래서 거기에 참치를 넣는 등 이리저리 궁리해서 음식을 만들었다.
“맛있어?” 하고 물었더니 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응, 맛있어.”라고 대답했다.
별거 아닌 말이지만 그건 가족을 살리는 첫마디였다.
날마다 그 말만 주고받았지만, 내 몸무게가 조금씩 늘어나고, 아들 얼굴에도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물론 원래 가족 형태로 돌아가지는 못하지만 새로운 가족의 모습을 갖춰 가고 있었다.
먹는다는 것은 삶을 지탱하는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아무리 바빠도 정성을 들여 제대로 음식을 만들고, 요리하는 데 오롯이 그 시간을 쏟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을 회복하는 첫걸음이 되었다. 온기 있는 맛있는 음식을 먹기 시작하자 이윽고 아들의 말과 목소리와 미소가 돌아왔다. 얼굴이 밝아지고 그 나름의 행복도 돌아왔다.
아들 나이 열네 살
오늘도 여느 때와 같은 시간에 아들을 학교에 보냈다. 늘 똑같은 아침이지만 파리의 겨울은 어둡고 추워 잠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정말 싫다. 오전 7시 정각이 되면 아들 방과 내 침실에서 알람 시계가 거의 동시에 울린다. 나는 주방에 가서 아들을 위한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아들은 내가 만들어 준 아침밥을 먹고 7시 40분쯤에 집을 나선다. 어두운 계단으로 뛰어나가는 씩씩한 내 아들. 나는 계단의 불을 켜고 나선형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며 “잘 다녀와.”라고 일본어로 외친다. 대답은 없다. 대답을 했는지도 모르지만 들리진 않는다.
단둘이 보낸 크리스마스
올해는 아들과 단둘이 크리스마스를 맞았다. 쓰던 소설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요즘 집필하는 데 집중하느라 크리스마스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프랑스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일본의 오쇼가츠(일본의 연중행사 중 가장 크고 중요한 설 행사)나 다름없어 다들 가족과 함께 보낸다.
그래선지 우리 아파트 건물은 아이 울음소리 하나, 발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다들 부모님 집이나 시골집에서 가족끼리 지내는 게 틀림없었다. 어젯밤에도 거리가 한산하고 캄캄했다. 프랑스에는 친척 한 명 없어 아들이 따분해하는 것 같았다. 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차, 크리스마스 선물!
프낙(Fnac, 프랑스 최대 문화 상품 매장)에 가서 좋아하는 걸 사자고 했더니 아들이 대뜸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종이에는 ‘FL studio 20과 Shaper Box(플로리다 스튜디오 20과 셰이퍼 박스)라고 적혀 있었다. 아무래도 음악 편집 소프트웨어와 이펙터인 듯했다.
“아빠가 엊그제 내 곡 더 듣고 싶다고 했잖아. 필요 없는 건 받고 싶지 않고, 내가 기뻐해야 분명 아빠도 기쁠 것 같아서 리스트를 만들어 놨지.”라고 말하는 아들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아빠와 아들은 아들 방 침대 위에서 스팅의 ‘잉글리시맨 인 뉴욕을 연주했다.
아들 방 창문 밖으로 옆 건물 창문이 보인다. 자그마한 식물 같은 게 장식되어 있다. 어슴푸레한 크리스마스의 빛이 그곳에 쏟아지고 있었다.
행복이란 욕심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살포시 다가오는 이런 부드러운 빛과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열네 살 먹은 아들과 함께 음악을 연주하는 것보다 더 행복한 것은 없다.
여행지에서나 할 수 있는 이야기
여행지에서나 할 수 있는 얘기가 있다. 대화할 기회가 없는 것도 아닌데 왜 집에서는 대화가 잘 되지 않는 걸까.
우리는 벽 쪽 테이블 자리에 마주 보고 앉아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들이 뜻밖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직 만나 본 적 없는 친구가 두 명 있어.”
인터넷에서 알게 된 동년배 남자애와 여자애인 듯했다. 한 번도 만나 본 적은 없으나 대화를 하지 않는 날은 없다고 아들이 말했다. 벌써 1, 2년 인터넷상에서 친하게 지내고 있는 애들이란다. 그러니까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알고 서로 힘이 되기도 하는 사이라는 것이다.
아, 맞다. 이 얘기가 나오기 전에 다음 달 열다섯 살 생일 파티는 어떻게 할 것인지 아들과 잠깐 얘기하긴 했다. 아들 생일 파티는 집에서 하기도 하고 카페에서 하기도 했다. 매년 내가 나서서 준비했다.
그런데 내년에는 학교 친구를 부르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는 말을 아들이 꺼냈다. 그들이 다가 아니다, 세상에는 더 많은 친구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같은 반 친구 30명 중에서 초대할 친구를 고르는 건 뭔가 좁다고 느끼는 듯했다. 아들은 좀 더 다양한 사람을 만나 자신의 세계를 넓혀가고 싶다는 등등의 말을 신중하게 단어를 골라가며 했다. 넌즈시 그런 의사 표시를 하려는 듯했다. 그 얘기로부터 만난 적이 없는 두 친구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어디 살아?”
“파리 교외. 한 애는 파리에서 40분 정도 걸리려나.”
남자애는 기타리스트이고 록을 좋아해. 여자애는 페미니스트이고 자기주장이 분명해. 듣는 음악은 랩이고. 아들은 이런 식으로 그 친구들 얘기를 많이 했다. 아주 드문 일이다.
노래와 연주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아들은 소곤소곤 말했다.
“아빠, 어떻게 생각해?”
즉, 아빠의 의견을 구한 것이다.
“일단 만나봤으면 좋겠는데? 가상 친구 말고 얼굴을 한번 보는 게 낫지 않을까?”
이쯤에서 우리 둘은 어디서 어떻게 만나는 것이 좋을지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았다. 나는 그 점에 좀 감동했다. 분명 그건 여행지가 아니면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런 순간에 아들은 성장하고 있었고, 나름대로 그의 인격이 드러나는 기회이기도 했다.
우리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줄곧 ‘어떻게 만나는 게 좋을까?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것은 뜻밖에 유익하고 멋진 시간이기도 했다. 너무 나서는 듯한 말을 해서도 안 되지만, 전혀 나서지 않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아들과 이야기를 계속했다. 약간은 들뜬 마음으로…….
돌아오는 길의 경치가 달라 보였다. 2018년 12월의 풍경이 아니라 거기엔 2019년부터 펼쳐질 미래의 빛이 깜박이고 있었다.
나는 아들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꼭 껴안았다.
“친구란 참 좋은 거야. 가장 큰 재산이니까 소중히 해.”라고만 했다.
신기하게도 평소 반항기 있던 아들이 “응” 하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울고 싶으면 울어
드디어 아들의 고등학교 생활이 시작되었다. 일본에서 태어났으면 4월부터 고등학생이 되었겠지만 프랑스에서 태어났으므로 9월부터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프랑스 고등학교는 개학식 같은 게 없어서 어느 날 갑자기 고등학교 생활이 시작되는 느낌이다.
파리 배구 클럽에 들어가 있어 월·수·금요일에는 밤 9시가 되어야 아들이 귀가한다. 평상시에도 대체로 오후 6시는 돼야 집에 온다. 이제 난 아침밥은 안 한다. 이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날마다 아침 도시락을 쌌는데 그때가 그립다. 지금은 아들이 직접 콘플레이크 같은 걸 뱃속에 쑤셔 넣듯이 하고 뛰쳐나간다. 아들도 더 이상은 어리광을 부리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런 룰을 지키고 있다. 오늘은 밥이 좀 남아서 아들한테 “내일 아침에 주먹밥 만들어 줄까?” 했더니 “어, 좋아.”라며 걸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들의 키도 174센티미터 가까이 되지만, 친구들 가운데는 190센티미터가 넘는 거인이 여럿 있다. 그런 친구들이 종종 우리 집에 놀러 오는데, 그때마다 키 작은 나는 왠지 대하기가 힘들다. 그래도 다 착하다. 아들 방에 얼굴을 내밀었더니 엄청나게 큰 녀석이 의자에 턱 버티고 앉아 CEO 같은 자세로 쉬고 있었다.
발밑에는 아기곰 인형 차차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손을 뻗어 그 인형을 집어 들었다. 이제 젖어 있지는 않았다. 아들이 어렸을 때는 이게 없으면 잠을 자지 못했다.
프랑스 아이들은 인형과 함께 자란다. 어른들이 인형을 통해 아이에게 세상을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 아들에게는 이 차차가 파트너였다. 아들은 어딜 가나 차차를 갖고 다녔다. 인형에게 인간의 인격을 부여하고 아이에게 사회와 마주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들은 결코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부모가 이혼해서 슬펐을 텐데도 아이답게 운 적이 없었다. 그런 점이 걱정되어 매일 밤 아들 방을 들여다보았다. 아들이 껴안고 있던 차차를 세탁하려고 만졌더니 흠뻑 젖어 있던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 감촉을 잊을 수가 없다. 아들은 내가 보지 않는 곳에서 울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나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아들은 우리 부부가 이혼하기 전에는 말을 잘하는 밝은 아이였다. 하지만 그날을 기점으로 말이 없는 과묵한 아이가 되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불안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달리 해줄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 젖은 차차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하지만 부모가 울 수는 없었다. 힘든 아들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당시, 나는 트위터에 곧잘 ‘아들 방 이상 없음.이라고 올려놓았다. 이상 없다는 것은 오늘은 울지 않았다고 나 자신을 향해 외친 기록이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가족이 앞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글이었고, 도시락 사진은 자신을 다독이기 위한 메시지였다.
트위터에 ‘좋아요가 백 개 정도 달리면 ‘그것 봐. 하며, 그 수만큼 나를 칭찬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초등학생이던 그 애가 고등학생이 된 것이다. 그리 놀랄 일도, 자랑할 일도 아니다. 그저 그날그날을 살아온 덕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게 아니다. ‘차차, 네 덕분이었어. 고마워. 그러고 보니 너도 고등학생이 되었구나. 아들과 같은 해에 태어났으니까. 잊고 있었어. 네가 아들을 지켜봐 준 덕분에 드디어 아들이 고등학생이 된 거야. 정말, 정말 고마워. 아들이 이 집을 떠난 후에도 나는 너를 소중하게 간직하며 살게.
그건 약속이었다. 우리는 한 가족이니까.
아들과 나눈 소중한 이야기
아들과 단둘이 저녁을 먹는 시간은 서로가 생각하는 걸 인식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돌이켜 보자면 아들이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고등학생인 현재까지 우리는 이렇게 둘이서 식사를 해왔다. 그런데 남자 둘이 사는 삶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실패한 인생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억지 부리는 말이 아니다. 저녁을 먹으면서 아들의 입에서 예전 이야기가 나오는 일은 거의 없다. 아들은 기억력이 좋아 10년 전에 딱 한 번 만난 사람까지 잘 기억한다. 그래서 과거를 지워버렸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들 입에서 어린 시절의 일이나 이른바 옛 가족 이야기가 화제에 오르지는 않는다. 그런 아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소중한 시간이 바로 이 저녁밥을 먹을 때이다.
아들이 날마다 뭘 생각하며 사는지 아빠로서는 가능한 한 파악해 두고 싶다. 억지로 대화를 나누진 않지만 말하고 싶어할 때는 귀찮아 하지 않고 최대한 진지하게 들어 준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다. 오늘은 다음 달로 다가온 자신의 생일에 대한 아들의 부탁으로 얘기가 시작되었다.
“다음 달이 내 생일이잖아? 친구들을 여기로 불러서 파자마 파티잠옷 차림으로 아침까지 떠들며 노는 파티를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
프랑스 애들은 다 커 성인이 될 무렵이 되면 파자마 파티를 하는 경우가 많다. 알렉스의 생일날에도 초등학교 동창 등 친구 6명이 모여 파자마 파티를 열었다.
“그럼 괜찮지. 누구나 한 번쯤 통과하는 길인걸. 아빠가 밥 해줄게. 근데 누굴 부를 건데?”
“알렉스와 일리아나를 부를까 해. 엘레나도 오고 싶다니까 모두 네 명.”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알렉스는 소꿉친구라서 좋지만, 일리애나와 엘레나는 여자애다. 더구나 엘레나는 멀리서 오게 된다.
“전에도 말했듯이 이제 너희들은 곧 성인이야. 미안하지만 우리 집에서 여자애들이 잠을 자게 할 수는 없어. 게다가 엘레나는 먼 곳에서 오는 거잖아. 이야기가 더 복잡해지겠어.”
아들은 잠시 생각하다가 “알았어. 그럼 안 하는 걸로 할게.”라고 말했다.
‘엘레나와는 좋은 친구가 되었다.고 했지만, 근본적인 것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역시 아직 근본적으로는 어린애인 것이다. 물론 아들의 생각이 기본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부모로서 어떤 부분은 바로잡아 주는 게 바람직한 역할이 아닐까. 이런저런 일들을 다 허락할 수는 없다. 내가 혼자 애들을 다 지켜볼 자신도 없다. 밥이나 간식은 얼마든지 해줄 수 있지만 말이다.
“아빠, 미안해요. 무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지금의 나에게 가장 소중한 친구는 알렉스, 일리아나, 그리고 엘레나야. 남자 친구를 여기 네 명 골라 모아도 난 기쁘지 않을 것 같아. 남자와 여자라는 것은 이해하지만 정말 소중한 친구와 열여섯 살이 되는, 단 한 번밖에 없는 생일날 함께 밤을 새워 가며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이야. 하지만 아빠의 입장도 이해하니까 이 일은 잊어버려.”
걱정하지 말고 아빠만의 시간을 즐겨
아들이 안나의 가족과 여름휴가를 떠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날마다 “잘 지내지?”라고 문자를 보냈는데도 “응.”라는 대답밖에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기를 며칠 계속하다가 정말이지 이런 식으로 물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 마침내 아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날마다 뭐하니? 어떻게 지내고 있어?”
“응, 즐거워. 괜찮아.”
“저기, 괜찮다고만 하지 말고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줄래? 일단 남의 집에 아들을 맡긴 부모 입장에서는 걱정되잖아? 잘 도와주고 있지?”
“응, 밥 먹으면 나도 설거지해. 순서대로 치워야 하거든.”
“응? 설거지도 한다고? 거기가 대체 어떤 곳인데?”
“아주 시골집이야. 주위엔 아무것도 없어. 밭과 초원만 있고 그 중간에 낡은 집이 덩그러니 있는 곳이야. 정말 작은 마을 한구석인 거지. 호화롭지는 않지만 아주 아늑한 곳이야. 마당이 있는데 해먹이 나무와 나무 사이에 매달려 있어. 거기서 낮잠을 자기도 하고 마당에서 밥을 먹기도 해. 파리와는 전혀 달라. 별이 예쁜데, 그곳에서 애들이랑 얘기도 많이 하고 놀아.”
“뭐 먹어, 맨날?”
“아빠가 만들어 주는 요리처럼 정성 들여 만든 건 아니야. 놀라울 정도로 간단한 것들뿐인데, 그게 너무 신선해. 그러니까 그냥 가정집 맛이지. 다 같이 큰 접시에 담긴 파스타나 치킨 같은 것에 손을 뻗어 먹어. 대가족 속에 있으니까 설렐 때가 많아. 날마다 ‘가족은 참 좋은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안나한테는 여동생이 둘 있는데, 그 애들이랑, 그 애들의 친구들이랑도 이야기를 많이 하고 놀아. 다 같이 바다에 가기도 하고, 근처 동네까지 산책도 하고 그래. 저녁밥 하는 걸 도와주기도 하고.”
아들의 들뜬 기분이 전해져 온다. 2개월이나 봉쇄령이 계속되어 거의 집에서 나가지 못한 열여섯 살짜리 온순한 아들 목소리가 통통 튀었다. 컴퓨터 안에서만 살아가는 날들과는 달리 리얼한 것들이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2층에 방이 3개 있는데, 세 그룹으로 나뉘어서 자는 거야. 나는 안나와 안나의 친구 마에와 릴리와 같은 방을 써. 방에 침대가 4개 있는데 이불 같은 게 다 있는 게 아니어서 거기에 침낭을 놓고 자. 안나의 사촌오빠들도 중간부터 합류해서 꽤 시끌벅적해. 날마다 밤늦게까지 다 같이 이야기하고. 가족의 일원인 것 같아서 화기애애해. 안나 엄마는 나를 자기 아들처럼 대해 줘서 나도 많이 도와줬어. 쓰레기를 버리기도 하고, 장 보러 갈 때 같이 가기도 하고. 욕실 청소를 하기도 하고.
아빠, 집에 가면 내가 아침마다 조식 세트를 만들 거야. 대가족은 식탁 위에 엄마가 날마다 아침 빵, 요구르트, 오렌지 주스, 잼, 버터, 햄, 삶은 달걀, 같은 걸 올려놔. 요리 같은 건 아닌데, 그게 너무 좋아. 일어난 순서대로 먹는데 애들 중에서는 내가 항상 제일 먼저 일어나니까 안나 아빠, 엄마 이렇게 셋이서 식사하는 경우가 많아. 있잖아, ‘이런 행복도 있구나. 하고 깨달을 때가 많아. 경험도 되고. 대가족은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어. 나도 어른이 되면 누군가와 결혼을 하고 가족을 만들고 싶어. 시골에서 보내면서 애들과 함께 밥도 먹고 싶고. 고급 요리가 아니라도 행복해, 밤낮으로 간단한 피자나 파스타를 먹지만 모두 행복해 하는 것 같아.”
“안나 아빠랑 함께 벽에 페인트를 칠하기도 하고, 가구 고치는 걸 돕기도 했어. 오래된 집을 샀기 때문에 아직 훌륭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조금씩 손으로, 가족의 마음을 담아, 자신들의 아늑한 공간으로 바꾸고 있거든. 거기에 함께할 수 있어서 기뻤어. 피를 나눈 형제가 아니고, 혼자만 일본인이지만, 그래도 모두 정말 상냥하게 대해 주고 있어. 그게 보통 있는 일인지도 모르지. 상냥한 것이 당연할 수도 있으니까.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고 착한 척도 안 해. 누구도 특별한 취급을 안 해. 그게 말이야, 도와준다는 게 너무 재미있어.
거기에 참여할 수 있는 것, 누군가에게 인정받는다는 것, 신뢰받는다는 것, 어른으로서 대우받는다는 것, 모든 게 아주 훌륭해. 나는 집에서는 아무것도 안 하지만 그래도 좀 달라졌을 수도 있어. 이거 해, 저거 해, 하지 않아도 해야 되니까 몸이 저절로 움직여. 자신이 직접 일을 찾아 한다고나 할까, 고치기도 하고 정리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무슨 말을 듣기 전에 스스로 나서서 생각하고 그 안에서 역할을 해내고 있거든. 날마다 그런 자신에게 놀라고 있어. 그런 가족 안에 있을 수 있어서 지금은 너무 행복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문자로는 이런 말 못쓰잖아. 아빠는 프랑스어를 읽지 못하고, 나는 일본어를 못 쓰니까. 그래서 늘 ‘응이라고 대답했지만, 그래도 그 ‘잘 지내지?와 ‘응 사이에 이렇게 중요한 일이 많았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아빠는 아빠만의 시간을 즐겨.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건 집에 가서 할게.”
열여덟 살 생일을 맞은 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
아침 일찍 일어나 아들이 방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 침대에 걸터앉아 아들을 기다리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지나온 세월을 생각했다. 온갖 일들이 있었지만 참 신기하게도 싫었던 일은 기억이 안 나고, 좋았던 일만 기억에 남아 있다. 아들과 함께 살아온 날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특히 근처 광장에서 함께 배구 연습을 했을 때가 생각난다. 아들과 열심히 서브와 리시브 연습을 했던 일은 좋은 추억이 되었다.
지금은 반항기 후반에 들어간 그 녀석과 비교하면 당시는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애였다.
둘이서 살게 되었을 때, 그 애는 정신적으로 참 힘들었을 텐데도 오히려 나를 도와주려고 곧잘 신경을 썼다. 그러면서 잘 버텨 주었다. 어릴 때부터 여러모로 자기주장을 잘 펴는 똑똑한 아이지만, 초등학생 때와 중학교 1, 2학년 때는 내가 그린 그림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순수한 소년이었다.
그런데 나에게 엄마 얘기를 한 적이 없다. ‘왜 그랬을까? 생각하지만 오늘까지 그랬으니 어쩔 수 없다. 이혼 직후에 아들에게 그에 관한 얘기를 꺼냈더니 “나도 힘드니까 그 얘긴 하지 마.” 하며 말을 가로막은 적이 있었다. 그 후 지금까지 잘한 건지 아닌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걸 화제로 삼은 적이 없다.
아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아빠인 나도 잘 모른다.
그냥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나는 이제 대학 입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않는다. 아마도 지금이 아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시기일 것이다. 어제도 아들은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는 눈치다. 이제 곧 지망 대학이 결정되는데, 아들은 일단 제1지망 대학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제1지망 대학은 꽤 대단한 곳이기 때문에 어려울 수도 있으나, 제10지망 대학에는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다.
어디가 되든 아들이 향하는 세계가 내게는 보이기 시작했다.
아들은 18년을 사는 동안 거의 프로 수준의 음악과 영상 기술을 다졌기 때문에 컴퓨터와 영상기기를 활용해 일할 수 있는 분야로 나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재작년까지 떠들어대던 정치나 법조 계통으로 나가는 것은 아예 포기한 것일까? 하긴 아직 그 가능성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나는 그래도 괜찮을 것 같다.
아들이 이 나라에서 가능하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게 최고다. 모두가 가고 싶은 세계이므로 좁은 문이기는 하지만 여름까지는 돌파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무료할 때마다 내키는 대로 이렇게 일기를 써왔지만, 아침에 침대에 앉아 나는 이런 식으로 오늘까지의 일을 멍하니 생각하고 있었다. 백팩을 어깨에 메고 현관으로 나온 아들에게 나는 “축하한다.”며 말을 걸었다.
아들이 열린 침실 문을 돌아보다가 침대에 앉아 기다리던 아빠를 발견하고는 무척 큰 소리로 “고맙다.”고 대답을 하고 등교했다.
나는 닫힌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내내 자녀를 학교에 바래다주는 것은 부모의 의무였다. 나는 아들의 손을 잡고 학교까지 바래다주었다. 아들은 잘 다녀오라는 나에게 “응.” 하고 대답하고는 몸을 날려 학교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아들은 한 번도 나를 돌아본 적이 없었다.
거기에는 이 나라에서 살아가겠다는 강한 결의가 있었다.
그 애가 오늘 열여덟 살이 되었다.
그의 결의는 지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주토야, 생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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