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게 올라가는 SNS 화면과 숏폼 영상 사이에서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허망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면, 어느새 빈곤해진 어휘를 깨닫고 당황한 적이 있다면, 생각 없이 사람들에게 휩쓸리다가도 슬며시 경각심이 든다면, 지금이 바로 라틴어 문장을 만나야 할 순간이다.
왜 라틴어 문장이 살아가는 데 힘을 주는 걸까? 유적이나 유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고요한 파문이 일 듯, 오래된 문장에는 그 시간을 이기고 살아남은 깊은 사유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언어가 필요한 순간』은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의 마음에 울림을 주고, 거듭 인용되어온 보석 같은 문장들을 모아 정리한 책이다.
■ 저자 니콜라 가르디니(Nicola Gardini)
옥스퍼드대학교의 이탈리아문학 및 비교문학 교수다. 소설가, 시인, 비평가, 번역가, 화가로서 수많은 책을 저술했다. 소설 『아멜리아 린드의 잃어버린 말(Le parole perdute di Amelia Lynd)』은 비아레조상과 체릴리마리모/로마상(Zerilli-Marimo/City of Rome Prize for Italian Fiction)을 받았다. 『인생의 언어가 필요한 순간』은 출간 즉시 이탈리아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 역자 전경훈
서울대학교에서 불문학을 전공했다. 젊은 시절 가톨릭교회의 수사로 살면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지금은 다양한 책들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을 하며 산다. 옮긴 책으로는 『농경의 배신』 『20세기 이데올로기』 『페미사이드』 『가톨리시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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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
서문: 쓸모없는 언어에 바치는 찬가
Ⅰ 라틴어로 지은 집
Ⅱ 라틴어는 어떤 언어인가?
Ⅲ 어느 라틴어인가?
Ⅳ 라틴어의 시작과 신성한 알파벳
Ⅴ 참새와 첫사랑의 시-카툴루스
Ⅵ 별들이 빛나는 하늘-키케로
Ⅶ 기억과 연결-엔니우스
Ⅷ 현실의 척도-카이사르
Ⅸ 명확성의 힘-루크레티우스
Ⅹ 저속함과 고결함-다시 카툴루스
? 영원한 사랑과 감동-베르길리우스
? 라틴어의 정수를 만나다-타키투스와 살루스티우스
ⅩIII 거부할 수 없는 가벼움-오비디우스
ⅩⅣ 에피소드의 예술가-리비우스
ⅩⅤ 유토피아가 시작된 곳-다시 베르길리우스
ⅩⅥ 행복을 가르쳐줄 수 있다면-세네카
ⅩⅦ 라틴어 소설의 열정과 상상력-아풀레이우스와 페트로니우스
ⅩⅧ 새 잔에는 새 포도주를-아우구스티누스
ⅩⅨ 어떻게 살 것인가-유베날리스
ⅩⅩ 사랑의 외로움-프로페르티우스
Ⅹ? 다시 행복에 관하여-호라티우스
Ⅹ? 사랑을 전하며-라틴어 만세!
옮긴이의 말
주
찾아보기
인생에 꼭 한 번은 읽어야 할 라틴어 거장 17인의 작품과 대표 문장을 담았습니다. 서양 문명의 원천이 된 수많은 라틴어 문장 중에서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금언을 담았습니다.
인생의 언어가 필요한 순간
별들이 빛나는 하늘-키케로
수많은 저자가 다양한 장르에서 다양하게 라틴어를 사용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문학적 라틴어는 이러한 특징들을 수천 년 동안 유지했다. 그렇게 해서 문학적 라틴어는 중세의 스콜라 라틴어와 뚜렷하게 대비될 뿐 아니라 ‘에스페란토 라틴어와도 분명히 구분된다. 페트라르카가 단테의 라틴어(중세 라틴어)에 분노했을 때, 그리고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뒤 로렌초 발라가 고전의 우아함을 되살리고자 애를 썼을 때, 그들이 기준으로 삼은 것은 문학적 라틴어였다. 이 라틴어는 중세에 완전히 멸종된 것은 아니었지만, 상당히 잊히고 축소된 상태였다.
이들이 살리려고 했던 라틴어를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키케로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키케로가 곧 라틴어라고 배웠다. 키케로가 죽고 1400년이 지난 뒤 페트라르카는 감사 서한에서 키케로를 언급하며, 그를 “로마 언어의 최고이자 아버지”이며, 자신이 거둔 모든 성공의 근원이라고 했다.(『서한집』 XXIV.4) 지금까지 전해오는 키케로의 작품들을 보면, 그가 수사학·철학·언어학에 뛰어났음은 물론, 사법 연설과 개인적 서한도 잘 썼음을 알 수 있다. 키케로는 적절한 용법과 문체적 장치와 연설의 모범으로 여겨졌다.
키케로의 라틴어는 분석적이며 철저하고 합리적인 사고의 결실이다. 키케로는 라틴어를 사용해 자기를 성찰하고 존재 방식을 체계화했다. 퀸틸리아누스는 연설에 관한 논문인 『웅변술 교육(Institutio oratoria)』에서 키케로를 최고의 대가로 인정한다. 성 히에로니무스도 그리스도교인으로서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키케로를 숭배한다고 고백한다. 이 대목이야말로 키케로의 위상을 가장 잘 드러낸다.
키케로를 라틴어의 대가로 이름을 날리게 한 통사론은 그의 부산스러운 사회 활동을 반영한다. 그의 통사론은 가능한 모든 반대 의견을 사전에 차단하여 상대를 침묵시키는 통사론이다. 그 결과 그의 문장은 명료하고 질서 정연하다. 그의 문장은 복합적이지만 복잡하지 않았다. 그의 문장은 모든 요소가 유효하고, 한 구절은 다음 구절을 정당화하며, 의심스럽거나 모호한 데가 전혀 없다. 키케로의 우아함은 충만한 지적 역량, 주제에 관해 한계까지 생각을 펼쳐내는 치밀함에 있다. 그의 냉정하고 침착한 성찰에는 전사(戰士)의 비장함 같은 것이 있으며, 즉흥적인 문장에서도 사전에 계산된 무언가가 느껴진다.
라틴어를 잘 구사하려면 관용적 어법(consuentudo)만 따라서는 안 된다. 체계적 질서(ratio)와 명백한 원칙 역시 중요하다. 그렇지만 키케로는 규칙에 매여 자신의 문법 체계가 무너지게 두지는 않았다. 문체에 관한 이상이 늘 중심에 있었고, 이 이상은 예술의 관례, 언어의 역사, 용법, 규칙성을 결합한다. 다시 말해, 상황과 환경에 맞게 적응하면서도 늘 문법적 탁월성과 형식적 우아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키케로는 “oratio … lumen adhibere rebus debet”, 즉 “말은 사물에 빛을 비추어야 한다”(『웅변가에 관하여』 III.50)라는 말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명징성을 중시했다. 언어는 일관성이 있으며 격식에 맞아야 하고, 모호해서는 안 되며 과도한 비유는 피해야 한다. 또한 제멋대로 늘어지거나 중단되어서는 안 되고, 예스러운 표현과 상스러운 표현, 곧 벽지(僻地)의 조악함(rusticas)을 금해야 한다는 것이다. 키케로는 이러한 방식으로 시민의 특권인 urbanitas 도시의 품격을 고양했다. 제국의 수도(Urbs)는 언어가 형태를 갖추는 무대이기도 했다.
키케로의 핵심은 뛰어난 어휘 구사력이다. 어휘력을 갖추려면 어린 시절부터 많은 글을 읽고 연습해야 한다. 주제와 상황에 가장 잘 맞는 단어를 고르되, 학자와 대중 모두 알아들을 수 있는 어휘를 선택해야 한다. 선별한 단어는 문장에서 효과적으로 기능해야 하며, 읽었을 때 좋은 리듬도 선사해야 한다. 로마 문학에서 음악성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였다. 모든 문장은 마치 시처럼 귀를 즐겁게 해야 했다. 그리고 문장 마지막은 반드시 세심하게 계획한 소리로 끝나야 했다. 독자가 가장 주의를 기울이는 부분이 바로 한 구절이 끝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단어들은 노랫가락처럼 흐르되, 과하게 웃기거나 인위적으로 보여서는 안 된다. 자유로우면서도 질서가 있어야 한다.
키케로는 각 단어가 어떤 의미이며, 어떤 심리적 효과를 내는지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 언어를 잘 사용한다는 것은 단순히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생각을 잘 전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중에게 말할 때는 효율성이 매우 중요하다. 알맞은 내용을 알맞은 방식으로 알맞은 시간에 말해야 한다. 그들의 관심을 끌고 집중시켜야 감동시키고 설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키케로에게 웅변술이란 감정의 과학, 수용의 미학, 언어적 쾌락에 관한 이론이기도 하다. 이 모든 언어적 곡예의 최종 목적은 담화 자체가 아니고, 파르나소스산 위에서 번쩍이는 예술가의 영광도 아니며, 다른 사람의 주의를 끄는 것이다.
키케로의 방법론은 유럽 문화사에서 가장 혁명적이고 성공적인 시도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이론과 실제 모두에서 산문을 재정의했다. 언어 예술은 여러 세기에 걸쳐 다양한 방향으로 발전하고, 때로는 키케로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전개되기도 했으나(이러한 경향은 로마 제정 시대에 시작되었다. 또한 폴리치아노나 에라스뮈스의 반(反)키케로주의나 19세기 조리카를 위스망스(Joris-Karl Huysmans) 같은 소설가처럼 훨씬 후대에도 이어졌다) 키케로는 고대가 끝나고도 오랫동안 대체 불가능한 기준으로 굳건했다. 형태에 대한 주의, 정확한 의미, 어휘와 주제의 상응, 독자의 경악이나 반감을 자극하는 용어의 회피, 문법 준수 등은 모두 직·간접적으로 키케로에게 물려받은 것이다.
그러나 키케로의 라틴어는 언어적 기교 그 이상이었다. 그는 라틴어를 수단으로 사용하여 완성도 높은 가치 체계를 만들고(바로 이것이 그의 라틴어 문장이 그렇게 위대한 이유다) 인간 존재를 성찰했다. 이는 너무나도 효과적이어서 여러 세기에 걸쳐 영향을 미쳤다. 키케로는 미덕, 악덕, 의무를 정의했는데, 정신적 탁월함은 언어적 탁월함으로 표현되며 윤리적 우월성은 완벽한 언어를 통해서만 확립될 수 있다.
말을 잘하는 것은 그 자체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관습, 법률, 정부 조직 등을 만들어낼 수 있기에 중요하다. 말은 곧 철학이다. 잘 말하는 것은 정의의 실천이며 행복의 창조다. 말을 잘한다는 것(혹은 글을 잘 쓴다는 것)은 마음이 선하다는 증거다. 그것은 우리가 공유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키는 것이며, 자유 그 자체다.
키케로는 자신의 능변을 폭정에 위협받는 시민들을 위해 봉사하는 데 씀으로써 능변의 가치를 몸소 보여주었다. 키케로의 성찰과 행동으로 라틴어는 그 탁월함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었다. 키케로는 모든 압제의 철천지원수이며 원로원의 영웅적 대변자였다.
영원한 사랑과 감동-베르길리우스
재난이 일어나 세상이 멸망하게 되었는데, 책을 한 권만 구할 수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아이네이스』를 선택할 것이다. 『아이네이스』는 수많은 작품의 모범일 뿐 아니라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축약이기도 하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에서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해 비교로 삼은 작품이 바로 『아이네이스』였다. 『아이네이스』는 로마 문명의 백미이자 복음서와 같은 책이기 때문이다.
『아이네이스』를 읽지 않은 시대는 없다. 루크레티우스와 카툴루스를 비롯한 많은 라틴어 문학이 재발견되었지만, 『아이네이스』는 어느 시대에도 재발견할 필요가 없었다. 많은 고전 문헌을 묻어버린 그리스도교조차 『아이네이스』를 억압하지는 못했다. 이 작품은 단테 알리기에리의 시대까지 안전하게 전해졌고, 그리스도교 시인 단테는 베르길리우스를 자신의 스승으로 삼았다.
내가 학교를 다닐 때도 『아이네이스』는 항상 중요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로사 칼체키 오네스티의 번역본으로 읽었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라틴어 원서로 읽었다. 나는 그 이후로도 일 때문이든, 개인적으로든 늘 이 작품을 읽고 있다. 다른 작품을 읽다가도 『아이네이스』로 돌아가곤 했다.
베르길리우스가 계속 사랑받아온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의 글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시인도, 심지어는 호라티우스조차 베르길리우스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베르길리우스처럼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도 베르길리우스처럼 설득하지 못하고, 누구도 베르길리우스처럼 묘사하지 못한다. 베르길리우스처럼 감동을 주는 사람은 없다.
라틴어 문학의 역사에서 산문은 키케로라면 운문은 베르길리우스다. 베르길리우스는 라틴어의 시어를 재정립했으며 누구도 능가할 수 없는 유산을 남겼다. 그는 자신보다 앞선 작가들(엔니우스, 루크레티우스, 카툴루스)의 어휘와 이미지를 답습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그들을 넘어섰다.
루크레티우스의 위대함이 어휘의 혁신에 있다면, 베르길리우스의 위대함은 통사의 재구성에 있다. 베르길리우스는 iuncturae접합(이를테면 형용사+명사)로, 그리고 문장과 행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에 따라 통사를 재구성한다. 루크레티우스는 실증하고 규정하는 반면, 베르길리우스는 극화(劇化)하고 활기를 불어넣는다. 루크레티우스는 한 문장이 한 행 안에 완벽하게 맞아떨어지게 글을 쓰는 반면, 베르길리우스는 생각의 흐름에 따라 한 문장이 몇 줄씩 이어지기도 한다.
이렇게 한 구문이 여러 행에 걸치는 현상은 베르길리우스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다. 나는 이것이 그의 방대한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가장 심원한 구조라고 생각한다.
『아이네이스』는 기나긴 분리와 이별의 이야기다. 아이네이아스는 아내 크레우사, 아버지 안키세스, 디도 여왕, 친구 팔리누루스, 유모 카이에타와 헤어졌다. 베르길리우스의 첫 목가시도 고통스러운 이별, 사랑했던 전원을 잃는 심정, 망명 등을 다루고 있다.
기억은 『아이네이스』를 구성하는 기본 뼈대다. 아이네이아스와 디도를 포함해 모든 이의 영혼이 과거에 사로잡혀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보다 훨씬 전에 베르길리우스는 우리에게 ‘잃어버린 시간 찾기를 제시하고 있다. 『오디세이아』가 먼저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디세이아』는 귀환의 노래다. 오디세우스는 자기가 기억한 고향에 결국 도달한다. 하지만 아이네이아스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다. 고향 트로이는 이미 폐허가 되었으므로 라티움에 정착할 수밖에 없다. 그러하기에 이 이야기에는 비통함과 되돌릴 수 없는 상실이 깃들어 있다.
행복을 가르쳐줄 수 있다면-세네카</P>
모든 고전 작가 중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장 많이 가르쳐준 사람은 세네카다. 베르길리우스는 나를 감동시키고, 키케로는 생각과 말과 행동 모두에서 완벽을 꿈꾸게 한다. 하지만 세네카는 행복을 가르친다.
행복은 상상하거나 갈망하거나 선망하는 무언가가 아니다. 행복은 바로 여기, 손이 닿는 거리에 있다. 행복은 희망(spes)과는 관계가 없다. 세네카는 공개적으로 희망에 대한 이의를 제기했다.(『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 서한』 5.7~8) 희망하는 것은 행복을 나중으로 미루고 공포, 불확실, 좌절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희망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가장 소중한 자원인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을 명확히 이해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정확히 알며, 본질적인 것과 허황된 것을 구분할 줄 아는 이들, 홀로 남겨졌을 때 자기 자신과 함께하는 법을 아는 이들은 행복하다. 불만족, 불안, 실망, 낭비, 공허, 권태, 구토(영어 단어 nausea는 배(船)를 뜻하는 그리스어 naus에서 비롯되어 본래 뱃멀미를 가리키는데, 키케로가 구토의 뜻으로 썼고, 세네카는 심리학적 함의를 불어넣어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 서한』 편지 24에서 ‘삶에 대한 역겨움이란 뜻으로 썼다)를 피하는 이들은 행복하다. 자신의 역량을 알고 그 이상을 바라지 않으며, 자신의 노력으로 필요한 것을 얻고, 그래서 집과 가정을 빼앗긴다 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이들은 행복하다. 두려움이 없고, 대중의 의견에 휩쓸리지 않으며, 가상의 위험에서 자신을 보호하며, 세상사에 당황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남아 있는 이들은 행복하다. 자신 있게 판단하고, 자기 갈 길을 가며 자신의 지성을 신뢰하는 이들은 행복하다. 스승을 존경하지만 “patet omnibus veritas진리는 모두에게 열려 있다”(『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 서한』 33.11)는 사실을 알아 스승의 노예가 되지 않는 이들은 행복하다. 자신의 시간을 다른 이가 훔쳐 가지 못하게 하고, 내면을 들여다보며 조화를 찾는 이들은 행복하다.
세네카는 스토아학파 철학자였으나, 에피쿠로스를 포함한 다른 학파를 무시하지 않았다. 또한 키케로처럼 정치의 희생양이었으며, 잔혹한 권력의 희생자이기도 했다. 또한 세네카는 공적 참여(negotium)와 사적인 위안(otium) 사이에서 생겨나는 ‘로마적인 갈등의 완벽한 상징이다.
세네카의 라틴어는 자연스러움을 지향하고, 의도적인 세련미를 지양한다. 그는 concinnitas, 즉 키케로의 글에서 볼 수 있는 정제되고 계획적인 우아미를 여성적인 나약함으로 본다.(『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 서한』 115.2) 세네카의 라틴어는 명상적인 사상가의 라틴어다. 이런 이유로 세네카의 라틴어는 키케로의 라틴어에 대비되는 가장 강력한 맞수가 된다. 세네카의 라틴어는 키케로의 라틴어에 대한 음화(陰畫)라고 할 수 있다. 세네카의 라틴어에는 키케로 같은 세련미나 풍부함은 없다. 세네카의 문장은 구조가 간결하며, 종종 접속사를 삭제하고, 논쟁보다 훈계를 선택한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세네카가 키케로에게 편향된 생각이나 선입견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세네카는 키케로의 글이 자신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를 찬양하기도 했다. 키케로의 웅변을 그리스적인 것에 맞서는 로마적인 것의 핵심으로 여기고 옹호한 것인 대표적이다.(『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 서한』 40.11)
어떤 이들은 죽음 앞에서, 특히나 참혹한 죽음 앞에서는 어떤 말도 의미가 없다며, 말은 없는 게 낫다고 한다. 나 역시 말이란 우리의 감정을 표현하는 한 가지 수단일 뿐이라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확신하는 것이 하나 있으니, 우리는 어느 때든, 특히 가장 어려운 순간에 말에 의지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말의 힘을 믿고, 필요한 순간 말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언어가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미리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내 안에서 적절한 말을 찾을 수 없다면 다른 사람에게서 빌려와야 한다. 그 말이 내게 참되게 느껴진다면, 그 말은 나의 말이 된다. 그러므로 나는 세네카의 말을 빌려 말할 수 있었다.
내가 세네카에 대해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가 말을 잘했을 뿐 아니라 말하는 데 두려움이 없었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도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왜 죽음 앞에서 침묵해야 하는가? 왜 울음과 침묵만이 가치 있는 양 가장해야 하는가? 말은 생명이다. 살아 있는 우리는 말을 포함해 어떠한 형식으로든, 생명으로 죽음에 맞서야 한다.
사랑을 전하며-라틴어 만세!
나는 이 책을 통해 라틴어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이 고대 언어가 오늘날 여전히 필수적인 여러 이유(역사, 언어학, 정치, 철학)를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나는 라틴어를 공부하는 게 모두에게 이롭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라틴어를 공부하는 방법이 하나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성향을 따라 마음에 드는 라틴어를 선택하라.
나는 특별히 마음에 와닿는 작가의 작품부터 시작하길 권한다. 카툴루스의 시든, 아풀레이우스의 소설이든, 오비디우스의 신화 이야기든 무엇이든 좋다. 번역본과 라틴어 원문이 나란히 실려 있는 책이면 더 좋다. 두 언어를 비교해보고, 흥미로워 보이는 라틴어 단어에 표시한 다음에 사전에서 뜻을 찾아보라. 그러다 보면 영어를 비롯해 수많은 현대 언어가 이 고대 언어에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라틴어라는 언어를 공부하는 것 자체를 즐기기를 바란다. 라틴어는 단지 어휘를 늘리거나, 사고를 자극하거나, 정신을 확장하는 데만 그치지 않는다. 이제까지 내가 암시적으로만 이야기했던 것을 분명히 말해야겠다. 라틴어를 공부하는 것은 놀라울 만큼 보람 있고, 무엇보다 재미있다.
내가 ‘재미있다고 하는 것은, 웃긴 영상이나 단순한 농담을 즐길 때의 복잡할 것 없고 순간적인 즐거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깊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의미를 향한 여정이며, 소여(所與)로서가 아니라 과정으로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건 하나의 게임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게임에서는 규칙과 보상이 미리 제시되지 않는다. 참가자가 규칙을 알아내야 하며, 보상은 오랜 노력을 기울여야 드러난다. 하지만 그 보상은 더없이 즐거울 것이다.
라틴어를 공부한다는 것은 의미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몰두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모호한 문장 구조와 각 단어의 풍부한 의미에 초점을 맞추고 주의를 기울이며 기민하게 반응해야 한다. 그것은 흥미진진한 선택과 결정의 과정이다. 물론 논리에 따르지만 논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라틴어를 공부할 때는 직관과 상상을 사용해야 하며, 때로는 대범한 시도도 해야 한다.
‘의미란 이미 만들어져 고정된 것이 아니다. 의미는 개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협상을 통해 발생하며, 맥락(사회·문화·심리)에 따라 변화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글을 읽거나 말을 들을 때 쉽게 오류에 빠진다. 너무 많이 추정하기도 하도,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도 한다.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이 얼마나 복잡하고 모호해질 수 있는지를 잊기도 한다.
라틴어는 우리에게 의미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단어는 살아 있는 생물과도 같아서 자신만의 기억과 의도를 지니고 있다. 하나의 문장은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욕구가 수렴되는 공적 공간이다. 라틴어를 공부할 때 우리는 독자이자 학습자로서 이 공적 공간에 들어가게 된다. 여기에서는 강한 책임감이 필요하다. 진리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라틴어를 읽거나 번역한다는 것은 진리를 이해하고 추적하는 것이며, 과거의 진리를 재발견하는 것이다. 해석을 통해 발견과 복원의 기쁨을 느끼게 되며, 이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만족스러운 경험 중 하나다.
라틴어는 매우 문학적인 언어로, 현대 언어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라틴어는 직선성, 직접성, 즉각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암시성과 다중성을 추구한다. 라틴어의 통사는 복잡할 수도 있고 느슨할 수도 있으며, 특이한 방식을 취하기도 한다.
라틴어의 형태론은 변화무쌍하다. 어휘는 다양한 의미와 다채로운 뉘앙스로 가득해 문장의 맥락 안에서만 분명하게 이해될 수 있다. 여기에서도 중요한 것은 맥락이다! 라틴어를 읽을 때는 각 부분 사이의 차이(심지어 충돌하기도 한다)를 고려하면서 각 부분을 서로 연결지어 전체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사회를 작동시키기 위해 우리가 매일 하는 일이 아닌가?
라틴어는 이렇게 우리에게 값진 교훈을 준다. 가장 작거나 흔한 1음절의 차이나, 아주 미세한 철자의 차이까지 포함해 모든 요소를 따져보게 하고, 단어들의 복잡한 관계를 인식하게 한다. 라틴어 문장을 다룰 때는 표면적인 발화만이 아니라 감각, 리듬, 미학적 기량을 모두 결합한 예술적이고 다면적인 언어 수행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라틴어를 공부하면서 이러한 복합성을 경험하며 특별한 만족감을 얻게 된다. 이는 인간 존재가 꿈꿀 수 있는 가장 높은 염원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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