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림책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 안에 우리가 분명 알고 있었지만 잃어버린, 그래서 되찾아야 할 좋은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좋은 세계를 접한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같을 수 없고, 그것이 그림책이 선사하는 기적이다.
그림책의 이런 특성은 그림책을 그림책으로써 읽고 느낄 때 내 것이 되며, 비로소 우리를 다른 세계로 데려간다. 그림책을 실용적으로만 접근한다면 그 소중한 세계와 만나기 어려워진다.
이 책에 실린 그림책은 모두 국내와 해외 미술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진작가 김경태가 찍었다. 독자들에게는 <2023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에서 특별상을 수상한 사무엘 베케트 선집 표지사진인 돌 컬렉션의 작가로, 2022년 서울국제도서전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기획전 사진으로 친숙하다.
■ 저자
이상희
시인이자 그림책 작가, 번역가입니다. 그림책 일상예술을 공유하는 패랭이꽃그림책버스와 사회적 협동조합 그림책도시를 운영하며, 원주시 그림책센터 일상예술 센터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시집 『잘 가라 내 청춘』을 냈으며, 글을 쓴 그림책으로 『선생님, 바보 의사 선생님』, 『책이 된 선비 이덕무』 등이 있습니다. 『씨앗은 어디로 갔을까?』, 『비밀 파티』, 『마법 침대』 등 여러 그림책을 우리말로 옮겼습니다.
최현미
문화일보 문화부 기자이자 작가입니다. 어린 딸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다 그 세계에 매혹되었고, 오랜 기자 생활의 대부분을 문학ㆍ북리뷰 담당을 하며 그림책에 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사소한 기쁨』, 『우리가 사랑한 소녀들』을 냈으며, 『그림책, 한국의 작가들』, 『이토록 어여쁜 그림책』, 『가장 사적인 마음의 탐색』을 함께 썼습니다. 어린이책 『아이스크림 여행』 등을 우리말로 옮겼습니다.
한미화
어린이책 평론가이자 출판평론가입니다. 교사들 사이에서 책으로 아이와 소통하는 법을 가장 잘 아는 어린이책 전문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른을 위한 독서 교육 강의와 글쓰기 워크숍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아홉 살 독서 수업』, 『쓰면서 자라는 아이들』, 『동네책방 생존 탐구』를 냈으며, 『그림책, 한국의 작가들』, 『이토록 어여쁜 그림책』을 함께 썼습니다.
김지은
아동문학평론가이자 서울예술대학교 문예학부 교수로 일하며 학생들과 함께 그림책과 아동청소년문학을 연구합니다. 좋은 어린이책을 읽고 소개하는 그림책 신간 크리틱 멤버이기도 합니다. 평론집 『거짓말하는 어른』, 『어린이, 세 번째 사람』을 냈으며, 『그림책, 한국의 작가들』, 『이토록 어여쁜 그림책』을 함께 썼습니다. 『당신의 마음에 이름을 붙인다면』, 『할머니의 뜰에서』,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 『괜찮을 거야』, 『삶의 모든 색』 등 여러 그림책을 우리말로 옮겼습니다.
■ 사진 김경태
중앙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스위스 로잔의 ECAL에서 아트디렉션 과정을 졸업했습니다. 크고 작은 사물을 촬영하여 재현의 이미지를 통해 바라보는 경험과 형식에 관해 탐구하고 있습니다.
‘어른의 그림책 읽기’! 어른에게도 맞는 그림책들이 있습니다. 어른들을 처음으로 그림책 세계로 안내한 네 명의 그림책 전문가들이 ‘다정함’을 주제로 30권의 그림책을 소개합니다. 내안에 있는 다정함을 찾아가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이토록 다정한 그림책
나에겐 소중한 기억이 있어
보고 싶다 말해요: 『할머니의 뜰에서』, 김지은
할머니의 다정한 아침밥
문을 열자마자 환하게 웃음 지으며 달려 나와 꼭 안아주는 순간, 쉴 틈도 없이 무언가를 꺼내어 이것저것 먹어보라고 권하는 손길, 다 괜찮다 결국은 다 잘될 거다 다독이던 목소리, 날마다 작아지는 몸집. 할머니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모습들입니다.
맞벌이를 하는 집에서는 종종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아이의 등하교를 도와주십니다. 이 그림책도 할머니의 도움으로 학교에 오가던 손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주인공의 아빠는 아직 캄캄한 이른 시간에 아이를 차에 태우고 할머니의 오두막에 데려다 놓습니다. 학교 갈 시간은 좀 남았고, 출근길은 멀거든요.
아침나절 부엌은 벌써 맛있는 냄새로 가득합니다. 수증기를 뿜어내는 냄비 앞에서 할머니는 춤추듯 요리를 만듭니다. 잠이 덜 깬 채 차에 타고 온 아이를 생각해 먹기 편한 아침밥을 차려주지요. 아이가 숟가락으로 음식을 뜨다가 식탁에 떨어뜨리면 할머니는 음식을 주워서 살짝 입을 맞추고 다시 밥그릇에 넣어줍니다. 마치 방금 기도했으니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나오면 할머니가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집에 걸어오는 길에도 별 말이 없어요. 왜 그럴까요. 할머니는 폴란드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겪고 캐나다로 건너간 이주자였습니다. 아직 영어가 서툴러서 영어로만 말하는 손자와 이야기를 나누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할머니의 방에는 폴란드 쳉스토호바에 있는 ‘검은 성모상이 걸려 있습니다. 폴란드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은 기도하러 찾아간다는 유명한 그림입니다. 어려서 고향을 떠나올 때 이 그림을 품에 안고 온 할머니의 간절함을 읽을 수 있는 장면입니다.
할머니가 내게 남겨준 것이 있어요
이 책에 나오는 ‘바바는 할머니를 일컫는 폴란드 말입니다. 할머니는 아이를 텃밭에 데려가 토마토와 사과를 기르는 방법을 보여주고, 비가 오는 날이면 진흙이 담긴 병을 가지고 나와 아스팔트에 올라앉은 지렁이를 구조해서 흙으로 돌려보내기도 합니다. 아이는 그런 할머니를 보면서 자연을 대하는 태도를 배웁니다. 세월이 지나 어느덧 할머니는 더 이상 혼자 지낼 수 없을 만큼 약해집니다.
여기서부터 그림책의 반전이 일어납니다. 할머니의 돌봄을 받으며 자란 손자가 똑같은 모습으로 할머니의 아침밥을 차려드립니다. 할머니가 힘없는 손으로 떨어뜨린 음식에 입맞춤 기도를 합니다. 할머니의 사랑은 손자의 사랑이 됩니다. 이 책은 고요하면서도 아름다운 장면으로 끝납니다. 할머니가 했던 그대로 세상을 만나고 자연을 귀하게 여기는 손자의 모습이 펼쳐집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한 세대가 다음 세대를 가없는 정성을 담아 기르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물이 순환하고 지렁이로 인해 땅속의 흙이 순환하듯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순환하는 자연의 섭리를 느끼게 됩니다.
조던 스콧은 ‘작가의 말에서 이 그림책 속 할머니가 자신의 실제 할머니임을 고백합니다. 전쟁을 겪었고 굶주림에 지친 어린 날을 보냈으며 영어에 서투른 이주자였지만 누구보다 손자를 사랑했던 할머니, 그분의 말없는 사랑이 자신을 키웠다고 이야기합니다. 스콧은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의 작가이기도 합니다. 강물처럼 말하는 사람이 된 스콧의 삶의 배경에는 언제나 변함없이 든든한 사랑을 주었던 할머니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은 꼭 소리가 나지 않아도 좋다는 걸, 이 책에서 배웁니다.
내 곁에 다정함이 살고 있어요
아무것도 하기 싫고 귀찮은가요?: 『야호! 비다』, 최현미
책을 펼치니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왼쪽 페이지에는 비가 오는 것이 너무너무 싫고 귀찮은 할아버지가, 오른쪽 페이지에는 비가 와서 너무너무 신나는 주인공 소년이 등장합니다. 매우 대비되는 두 사람입니다. 둘은 동시에 말합니다.
“비가 오네!”
그런데 비를 받아들이는 두 사람의 마음은 아주 다릅니다. 할아버지는 “불편한” 장화를 신고, “끔찍한” 비옷을 입고 “귀찮은” 모자를 쓰고 나갑니다. “어르신! 좋은 아침입니다”라는 인사에 “이런, 물 웅덩이잖아!”라며 짜증을 냅니다. 죄다 불편하고 끔찍하니 할아버지에게는 “온통 나쁜 소식뿐”입니다.
하지만 두 손을 번쩍 들고 비에 환호하는 아이는 “좋아하는” 개구리 모양의 비옷을 입고 “개굴개굴” 소리 내며 신이 나서 “폴짝폴짝” 뛰어나갑니다. 할아버지가 있는 건물은 칙칙한 회녹색, 아이가 있는 곳은 예쁜 노란색입니다. 주변 사람들 표정도 완전히 다릅니다. 할아버지와 아이의 마음이 다르기 때문이지만, 기분 좋은 아이와 기분 나쁜 할아버지 때문에 주변 분위기가 바뀐 탓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마음은 공기를 타고 퍼져나가니까요.
그렇게 같은 시간, 같은 장소, 하지만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사는 두 사람이 동네 카페에 함께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할아버지는 “커피, 설탕 빼고” 하고 주문하는 반면, 아이는 “달콤한 코코아랑 쿠키”를 달라고 합니다.
그러다 이 둘이 딱 부딪힙니다. 할아버지는 당연히 화를 냅니다. 하지만 천진한 아이는 바닥에 떨어진 할아버지의 모자를 주워 장난을 칩니다. 할아버지의 모자를 쓰고 할아버지의 심술궂은 표정을 흉내 냅니다. 순간 아주 재미있는 일이 일어납니다. 예상과 다르게 할아버지도 꼬마 아이의 개구리 모자를 씁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아이를 따라 “개굴개굴” 하며 웃습니다.
이 심술궂은 할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이 천진한 아이가 할아버지에게도 유쾌함을 선물한 걸까요. 어쩌면 할아버지도 누군가와 그런 장난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분명 아이의 천진한 기쁨이 할아버지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아이는 할아버지에게 자신이 먹던 쿠키를 내밉니다.
다정한 기대를 당신에게
물론 세상은 그림책처럼 간단하지 않습니다. 비 오는 날, 아이처럼 마냥 즐거울 수는 없습니다. 같은 세상도 다른 눈으로 보면 달라진다지만 그게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다들 긍정적으로 마음먹으라고, 모든 일이 마음에 달렸다고 쉽게 말하지만 세상 일들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심술궂은 할아버지가 갑자기 귀여운 할아버지로 바뀌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놀라운 마법이 일어나는 게 또 우리네 삶입니다.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려 있진 않지만,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문제의 실마리를 찾아내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몫이니까요.
백 번 양보해, 최소한 우리 인생에 심술궂을 필요는 없습니다. 나쁜 쪽보다는 좋은 쪽을 보기로 마음먹는 것이, ‘아무것도 하기 싫어 ‘못 하겠어 ‘못 해먹겠어라고 불평하는 것보다, 그래도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보려고 마음먹는 것이, 결국 더 나은 선택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때로 쓰디쓴 비가 내립니다. 그럴 때 ‘나는 다 알아 ‘볼장 다 봤어라며 속수무책으로 쓰디쓴 비에 휩쓸려가선 안 됩니다. 우산을 펴고 일단 비를 피하세요. 그리고 주머니 속에 깊숙이 넣어둔 달콤한 쿠키를 꺼내 한 조각 베어 물고 자기를 달래며 자신에게 다정해져야 합니다.
나를 믿고 뭐든 해봐요.
헤엄치기: 『물속에서』, 이상희
할머니와 수영장
박희진이 처음으로 쓰고 그린 그림책 『물속에서』는 ‘수영장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입니다. 몸이 으슬으슬 춥고, 다리며 허리도 욱신욱신 쑤신다며 담요로 몸을 감싼 채 소파와 한몸이 된 할머니가 주인공인데 어린 손녀가 찾아와 수영장에 가자고 졸라댑니다. 싫다고 도리질하던 할머니는 마침내 투덜투덜 무거운 몸을 일으켜 손녀를 따라 나서지요.
작가는 처음부터 이 ‘싫다 할머니를 곱게 그려줄 생각은 없었던 듯합니다. 보세요, 샤워장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할머니는 축 늘어진 자루 같고 몸을 끼워 넣어야 할 수영복은 검정 비닐봉투 같습니다. 그런 할머니와 대조를 이루는 탱글탱글 자두알 같은 손녀가 어느새 빨간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수영 모자까지 챙겨 쓴 채고 어서 물에 들어가자는데, 싫다 할머니는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질질 끌며 거듭 중얼거립니다. “싫다!”
그러나 ‘싫다 할머니는 점점 물에 마음이 기울어져요. 손녀처럼 거침없이 풍덩 뛰어들지는 못하겠으되 물끄러미 수영장을 들여다보니 물빛이 참 좋다고 여깁니다. 많이 차갑겠지 싶어 망설이던 끝에 한 발 넣고 두 발 넣고 허리까지 쑥 넣고 보니 기분도 좋아지고요. 마침내 쑥, 물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 할머니가 싱긋 웃습니다. 가볍네! 몸이 가벼워지네. 여태 축 늘어졌던 눈꼬리며 입꼬리가 올라간 얼굴로, 여태 바윗덩이인 양 웅크렸던 팔다리를 활짝 펴고서요.
저 역시 물속에서 쑥 떠오른 다음 무아지경으로 누워 있었던 경험을 한 곳이 바다 아닌 이런 실내 수영장이어서 이 장면이 더없이 각별하게 여겨집니다. 단짝 친구와 둘이서 버스를 타고 찾아간 유료 수영장 풀의 첫 인상은 대형 횟집의 수조 비슷하다 싶었고, 푸른 타일이 깔린 풀 바닥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떠밀리듯 들어갔던 물은 바닷물과 다른 질감이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클로르칼크(소석회에 염소를 섞은 살균 소독제) 냄새를 들이키면서는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갈 일은 없겠다 안심했던 것도요.
지구라는 행성 표면의 71퍼센트를 덮고 있는 물 대부분이 바닷물이고 최초의 생명 또한 이 바다에서 탄생했다는 과학 상식을 떠올리자면 이 그림책 서사는 단순한 수영장 이야기 이상의 무엇으로 다가옵니다. 미니어처 바다 중에서도 가장 작은 미니어처인 실내 수영장 풀이 ‘싫다 할머니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모태(母胎)로 겹쳐지는 겁니다.
다정함을 만나러 가요.
다정한 장소: 『마음의 지도』, 한미화
그곳을 좋아하는 이유
『마음의 지도』를 처음 본 날, 저는 탄성을 질렀습니다. ‘대체 로피즈는 이런 심심한 글을 받아 들고 어떻게 멋진 그림책을 만들 수 있었을까, 궁금했습니다. 그림책 장르는 글과 그림 작업을 함께 하는 작가들에게 유리하지요. 존 버닝햄, 모리스샌닥, 앤서니 브라운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대가들이 그런 사실을 증명해줍니다. 글과 그림이 밀고 당기며 작용 반작용을 일으켜야 하는데 그러자면 한 사람이 글과 그림을 손에 넣고 쥐락펴락하는 편이 나으니까요. 종종 예외가 있습니다. 『엄마 마중』의 김동성이나 『물이 되는 꿈』의 이수지 작가는 텍스트를 받아 들고 독자적인 그림 세계를 펼쳐냅니다. 비올레타 로피즈는 단언컨대 이 장르에서 최고입니다. 엘리즈 퐁트나유, 기아 리사리, 안나마리아 고치, 아나 크리스티나 에레로스의 글을 받아 들었지만 언제나 비올레타 로피즈는 특유의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우선 비올레타 로피즈는 리스본의 어딘가에 ‘내가 사는 동네를 만들었습니다. 그림책의 면지에 해당 지도가 있습니다. 펠트펜으로 나와 친구들이 사는 도시의 이런저런 건물들을 그려냈어요. 평소대로라면 거기에는 나를 기다리는 친구들이 있어야 해요. 글 속에서 나는 계속해서 친구들 이야기를 하지만, 그림을 보면 나는 친구 없이 홀로 거리에, 어떤 장소에 있습니다. 심지어 친구들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해요. 그곳에 가면 당연히 친구를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약속이나 한 듯이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아요. 오로지 개 한 마리가 홀로 된 나를 따라다닐 뿐입니다. 겨우 28쪽밖에 안 되지만 이 짧은 그림책은 보는 내내 대단한 긴장을 자아냅니다. ‘윌리를 찾아서는 아니지만 그림책을 보며 혹시 그림 속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 모를 친구들을 강박적으로 찾게 됩니다(여러분도 찾아보세요). 나만 버려두고 대체 친구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 걸까, 서운한 마음에 눈물이 날 즈음 진실이 밝혀집니다.
한국어판에서는 ‘마음의 지도라는 시적인 제목을 붙였지만 그림책의 원제는 Amigos do Peito, ‘진짜 친구들이란 뜻입니다. 한국어판 제목과 원제 사이 어딘가에 이 그림책의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머무는 장소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고 한탄을 할 만큼 익숙합니다. 종종 넌더리가 날 정도로 지겨운 곳이기도 하지요. 영원히 함께 살아야 하는 지루한 사람들도 같이 있지요.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이 갑자기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거예요. 바로 『마음의 지도』가 우리에게 보여준 풍경입니다. 익숙했던 장소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낯설고 기이하게 변하겠지요. 모두 함께 있을 거라고 여긴 곳에 나 혼자 남겨졌을 때, 언제나 둘이 가던 중국집에서 홀로 짬뽕 한 그릇을 시킬 때, 그가 훌쩍 떠나버린 후 방에 나 홀로 있을 때, 익숙하고 친근한 장소가 오히려 몸서리가 쳐질 만큼 생경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제야 비로소 깨닫겠지요. 이 장소가 지겨울 만큼 친근했던 이유는 여기 있던 사람들 때문이라는 걸 말입니다. 우리가 어딘가를 좋아했다면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이 사라지면 장소의 익숙함과 정겨움도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는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을 때만 존재를 깨닫는 법이니까요.
다정한 기다림: 『눈아이』, 최현미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기다리는 것은 믿는 것입니다. 추운 겨울 몸을 움츠리면서도 봄을 기다릴 수 있는 건 봄이 온다는 걸 믿기 때문입니다. 오랜 시간 견디며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려면 그 사람이 돌아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믿어야 기다릴 수 있습니다. 부모들이 아린 걱정 속에서도 아이를 지켜보고 기다리려면 아이들이 제 길을 찾아가리라 믿어야 합니다.
기다림은 괴롭지만 달콤하고 우리 속을 들볶지만 또 설레게 합니다. 믿기 때문에 기다리고, 또 누군가 기다린다고 믿기에 애써 그곳에 도착하려 합니다. 나를 믿고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좀 더 안도하고, 자신 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다림은 따뜻하고 다정합니다.
포근한 상상력을 펼쳐내는 작가 안녕달의 그림책 『눈아이』는 다정한 기다림의 이야기입니다. 눈이 내린 어느 겨울날, 한 아이가 학교 가는 길에 뽀득뽀득 소리를 내는 눈사람을 만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 눈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저 둥글게 굴린 두 개의 눈 덩어리가 붙어 눈사람 모양을 하고 있을 뿐이니까요. 아이는 수업 내내 생각합니다. 뽀득거리며 움직이는 그것이 진짜 눈사람이었을까 하고요.
수업이 끝나고 아이는 드디어 눈사람을 만납니다. 그리고 진짜 눈사람으로 만들어줍니다. 눈을 둥글게 굴려 손을 만들어주고, 발을 만들어주고, 눈과 귀와 입을 그려 넣어줍니다. 이제 말을 할 수 있게 된 눈사람은 자신도 놀랐다는 듯이 “우아우아우아우―” 하고 감탄사를 끝도 없이 쏟아냅니다. 우아우아라는 감탄사가 그림책 페이지에 가득 찹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를 만나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완성된 존재가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추운 겨울 한복판에서 사람아이와 눈아이의 따뜻한 우정과 사랑이 본격적으로 펼쳐집니다. 아이는 배고픈 눈아이에게 눈빵을 만들어주고 눈아이도 아이에게 눈빵을 선물합니다. 하지만 눈아이에게 맛있는 눈빵이 아이에게는 차갑습니다. 아이가 넘어진 눈아이를 일으켜 아픈 곳을 “호” 하고 불어주면 눈이 녹아 눈물처럼 흘러내리고, 아이가 손을 잡으면 아이의 따뜻한 온기에 눈아이는 또 녹아내립니다. 어쩔 수 없이 둘은 서로 다른 존재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아프지 말라고 호하고 불어줬는데 왜 우냐고 묻자, 눈아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따뜻해서.”
‘사람과 ‘눈사람, 전혀 다른 두 존재가 둘 사이에서 놓여 있는 간극, 그 넓고 넓은 틈을 훌쩍 넘어서는 순간입니다. 자신이 녹아내리는데도 친구의 입김이 좋으니 말입니다. 이제 둘은 빨간 장갑을 한 짝씩 나눠 끼고 신나게 놉니다. 겨울 토끼를 쫓아다니고, 눈썰매를 타고 한겨울 내내 행복한 시간을 보냅니다. 하지만 겨울이 가고 날은 따뜻해집니다. 눈아이는 조금씩 녹아내리고 흙이 묻어 더러운 몰골이 됩니다. 그때 눈아이가 묻습니다.
“내가 더러운 물이 되어도 우리는 친구야?”
눈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아마 이건 눈이 녹은 물이 아니라, 진짜 눈물일 거예요.
“응...”
아이는 눈물 흘리는 눈아이를 가만히 바라보며 어떤 말도, 어떤 설명도 덧붙이지 않고 “응”이라고 합니다. 이 한마디엔 말로 할 수 없는 애틋한 마음 그리고 아주 아주 긴 말들이 담겨 있습니다. “응, 당연히 친구지, 당연히 좋아해. 네가 아무리 녹아서 더럽고 더러운 물이 되어도” 있는 그대로 때론 흉한 모습까지 온 마음으로 꼭 껴안을 수 있다는 말이겠지요.
하지만 이들에게 이별의 시간이 다가옵니다. 눈아이가 녹아 사라지는 봄이 오고 있으니까요. 둘은 함께 있는 시간을 조금 더 연장하기 위해 응달을 찾아다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눈의 계절 끝에 다다르고 있었다”는 문장처럼 이들이 함께하는 시간도 끝이 납니다.
날이 점점 따뜻해지는 어느 날 아이와 눈아이는 서로 헤어질 시간임을 직감하고 숨바꼭질 놀이를 합니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그리고 하나, 둘, 셋… 열.
아이가 눈을 뜨자 눈아이는 사라졌고, 세상은 파릇한 봄이 되어 있습니다.
이야기의 끝에서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
눈아이가 사라진 봄, 아이는 눈아이와의 만남을 어느 겨울의 아름다운 과거, 한낱 기억으로 묻어두지 않습니다. 그 봄에서 출발해 여름, 가을 계절을 통과하며 눈아이를 기다립니다. 드디어 겨울이 오고 눈이 내립니다. 둘은 이제 다시 겨울 한복판에서 만납니다. 누군가를 만나 특별한 존재가 되고, 믿음을 주고받고, 이 믿음으로 기다리고, 그렇게 관계를, 우정을, 사랑을 지켜나갑니다.
우정, 사랑에 대한 많은 정의가 있지만 그림책 『눈아이』는 이렇게 풀어냅니다. 서로 관계를 맺고 이를 소중히 여기는 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아껴주는 일, 기다리고 기다려주는 일, 기대하고 기대를 받는 일. 그것이 바로 우정이고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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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