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 향하는 길
 
지은이 : 김슬기 (지은이)
출판사 : 책구름
출판일 : 2023년 11월




  • 김슬기 작가가 엄마 이력 10년을 맞이하여 1년 동안 한 달에 한 번 책방 여행을 다녀온 기록입니다. 책방 여행을 해보고 싶었던 이들, 삶의 변화가 간절한 이들에게 다정하고 실현가능한 ‘책방 여행 처방전’을 전해드립니다.


    나로 향하는 길


    첫 번째 여행 춘천 〈실레책방〉

    반전의 반전, 나 홀로 첫 여행

    첫 번째 밤은 이상한 밤, 반전의 밤

    나 혼자 떠날 예정이었던 여행의 시작을 가족들과 함께하게 된 건 지난 주말, 갑자기 터져 나온 아이의 말 때문이었다. D-7. 그러니까 이 여행을 떠나오기 일주일 전, 아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엄마 혼자 여행을 간다고? 우리는 같이 안 가고? 왜 우리랑 같이 안 가고 엄마만 혼자 여행을 가?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가는 거야? 나도 여행 가고 싶은데, 우리 같이 가면 안 돼? 우리 같이 가자!”


    예상치 못한 아이의 반응에 일~월 나의 여행 하루 전, 토~일에 주말 가족 여행이 추가되었다. ‘진짜 홀로 여행 전에 ‘연습 여행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셋이 온 춘천은 눈의 왕국이었다. 혹한의 영하 14도. 주차장에 차를 대고 닭갈비집에 들어가는 30걸음도 종종거리게 되는 날이었지만, 펑펑 쏟아지는 눈을 보자 지독하게 느껴졌던 추위가 단번에 사라졌다. <자유빵집> 근처에서 한 번, 에서 또 한 번, 우리는 신나게 눈놀이했다. 반짝이는 결정체가 그대로 보일 만큼 커다랗게 떨어지는 눈송이를 잡았다. 자동차와 테라스 위에 소복이 쌓인 눈을 불고 던졌다.


    “어쩜 우리가 딱 여기에 온 날 눈이 이렇게 많이 올까? 오늘은 정말 최고의 하루야!” 아이는 눈부시게 웃으며 소리쳤다. 내 마음도 들떠 일렁였다. 새하얀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아서, 특별한 검색도 없이 그저 가까워서 선택한 식당의 저녁도 훌륭했다. 3일 전에야 급하게 예약한 숙소도 깨끗하고 깔끔했다. 다음 날 먹은 맛깔스러운 조식까지 모두가 믿을 수 없는 선물이었다. 최소 한 달 전에는 계획을 세워야 안심이 되는 나에게 ‘계획에 없던 여행이 선사해 준 행복이었다.


    그렇게 셋이었다가 혼자가 되었던 아침의 낯설었던 감정들이 늦은 저녁이 되자 다시 떠올랐다. 역 주변에서 사 온 김밥을 먹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등받이 쿠션에 기대 앉았다. 발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애초의 계획은 숲속의 서재에서 가지고 온 책도 읽고, 무겁게 이고온 노트북 앞에 앉아 글도 쓰는 것이었건만… 평소에는 5분도 하기가 힘들었던 멍때리기 모드가 제대로 기어를 넣었다. 나 혼자만의 첫날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멈춤의 시간이었다.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듯 아무도 없는 방에서 그저 고요하게 3시간이 흘러갔다. 뭐 하나라도 더 하기 위해 쉴새 없이 종종거리기 바빴던 내가 없는 이상한 밤이었다.


    실레책방 엄마 선배 가라사대

    20~30대 청년들이 운영하는 동네 책방을 많이 봐왔던 탓이었을까? 책방에 오기 전 보았던 후기의 대부분이 20대 젊은 친구들의 글이었던 탓이었을까? 근거 없이 생긴 내 머릿속 책방지기의 이미지와 달리 <실레책방>을 만들고 운영하는 분은 초등학교 교사로 정년 은퇴를 하신 엄마 선배였다. 할머니 집에 놀러 온 듯한 시골집 구조에 오래된 자개 장식장이 예스러운 느낌을 주면서도 아기자기 귀여운 장식품과 일러스트 엽서가 사랑스럽게 어우러져 있었다. 마치 70대 할머니와 10대 손녀가 함께하는 공간 같은 느낌이었다. 월요일 아침 일찍 혼자 들어 온 나에게 책방지기님이 따뜻한 매실차 한 잔을 내어주셨다.


    “나도 아이들이 어릴 때 혼자만의 여행을 가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나는 좋은 것보다 아이들이 보고 싶고 허전한 마음이 더 크더라고요. 혼자 하는 여행은 나랑 잘 맞지 않나 보다 하고 더 챙겨 가지는못했지요. 아이들이 어릴 때는 가족들 아무도 모르는 나 혼자 가출을 한 적도 있었는데...”


    이제 11살이 될 아이를 두고 혼자 온 여행이라는 내 말에 책방지기님은 오래전 혼자 했던 여행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좋은 것보다 그리움과 허전함이 더 컸다는 이야기에 사르르 마음이 녹았다. 어제 종일 밀려오는 외로움에 어쩔 줄 몰랐던 내 마음이 토닥토닥 위로받았다. 가족들은 모르는 엄마만의 가출 이야기,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내 일과 나를 위한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해왔던 노력과 노하우도 들려주셨다. 한 번에 하나씩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딱 하나씩만이라도 꾸준히 지속하다 보면, 긴 시간이 지난 후 나에게 많은 것이 남아있더라는 이야기가 깊이 박혔다.


    한 번에 하나씩, 한 달에 한 걸음씩. 그래, 딱 한 번씩만 해보는 거야. 간직하고 싶은 말을 가슴에 품었다.


    들어갈 때 건물 한가운데 높이 떠 있던 해가 어느새 서쪽으로 기울었다. 잔뜩 흐린 구름 사이로 살굿빛을 뽐내는 하늘을 한참 바라보다 비로소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럴 수가··· <김유정 생가>와 <김유정이야기집>은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설날, 추석 당일 휴관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카페와 식당을 검색할 때마다 잊지 않고 확인하는 쉬는 날을 어째서 문학관을 알아볼 때는 지나친 것인지 이제 와 알 수는 없는 노릇이고··· 경춘선을 타기 전 김유정 문학촌을 돌아보겠다는 계획은 그렇게 사라졌다.


    상봉행 열차가 알려준 진실

    폐역이 된 김유정역의 산책로를 걸었다. 군데군데 등장하는 포토존을 지나 새로 지은 김유정역 앞에 다다르자, 산등성이로 넘어가기 직전의 낙조가 쏟아졌다. 혼자 하는 여행 내내 곁을 지켜 주었던 해가 마지막까지 함께 했다고 생각하니 따뜻했다. 완전히 사라진 해를 뒤로하고 역으로 들어갔다. 5분 뒤 바로 도착한다는 상봉행 열차를 기다렸다. 벌써 끝이라는 아쉬움보다는 이제 다시 집에 간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반갑게 맞이한 열차에 훌쩍 올라탔다. 텅 빈 객차의 빈자리에 앉았다. 집을 향해 달려가는 차창을 바라봤다. 그런데, 창밖으로 빠르게 사라지는 풍경을 보자 ‘아아하는 탄식이 터져나왔다. 마음이 뒤집히고 있었다.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열차를 돌려 거꾸로 가야 할 것만 같았다. 휴대전화를 꺼내 다음 여행 날짜를 확인했다. 얼른 또 가고 싶다는 열망만이 솟구쳤다. 혼자 있고 싶지만 정작 혼자일 땐 가족들이 보고 싶고, 가족들과 함께 있고 싶지만 정작 집에 갈 땐 다시 혼자만의 여행을 가고 싶어지는 마음이라니… 혼자만의 첫날밤 가득했던 것은 남편과 아이를 향한 사랑과 그리움이었다. 그 절절한 마음에 내가 계속 혼자 여행을 다닐 수 있을지 마구 걱정을 했다. 하지만 집으로 가는 열차를 타는 것만으로 그 걱정을 말끔히 해결했다. 다시 돌아왔다. 한없이 보고 싶었던 사람들의 곁으로, 다음 여행을 기다리게 만드는 나의 일상으로.



    네 번째 여행 경주 〈소소밀밀〉, 〈어서어서〉

    돌아가는 길에 피어난 것

    한 달에 한 번 나 혼자 하는 여행이라는 안 하던 짓(!)을 하고 있기 때문인가. 여행을 대하는 나의 자세가 이상하게 허술했다. 평소의 나는 1년 열두 달을 줄 세워 적어 놓고 달마다 좋을 장소를 모색해 1순위는 물론 2순위까지 정리해 두었을 텐데. 철저하리만큼 계획적이었던 나는 사라졌다. 나태하고 게으르고 느슨했다. 이 여정의 목적이 무언가를 완벽하게 달성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동안 애쓴 나를 돌아보며 쉬어 가는 것이었으므로. 그저 느낌이 가는 대로, 즉흥적인 떠남과 멈춤을 즐겨 보자 싶었다.


    일단 날짜만 정해놓고 남편에게 일러둔 뒤 일상에 파묻혀 살다가, 코앞으로 다가와서야 다녀올 행선지를 서둘러 찾고 예약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석 달이 지나 고대하던 새봄이 찾아오자 조금 더 일 찍 봄을 만나고 싶었다. 봄 하면 벚꽃, 벚꽃 하면 경주가 떠올랐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수학여행을 다녀온 후 25년이 지나도록 다시 가본 적이 없는 경주. 3월의 여행은 마지막 주 일~월, 벚꽃이 찬란하게 핀다는 경주에서 봄 마중으로 정했다.


    벚꽃 마중을 계획 했습니다만

    경주의 벚꽃 하면 보문단지가 가장 유명하지만, 경주는 도시 전체가 벚꽃 길이라는 말에 이동 거리가 가장 짧은 황리단길의 숙소를 예약했다. 전통 한옥 스타일의 카페나 식당, 사진관 등이 밀집해 있어 서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황남동의 경리단길로 불린단다. KTX를 타고 2시간을 달려 신경주역에 내린 뒤, 시내버스로 열다섯 개 정류장만 이동하면 도착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자동차보다도 빠르고 편리한데다가 첨성대와 대릉원 같은 관광지를 걸어서 둘러볼 수 있고, <어서어서>라는 이름부터 아기자기한 독립서점에 그림 책방까지 있는 곳.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예쁘고 특색 있는 숙소가 너무 많아 선택이 어려웠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는데, 여행 날짜와 장소만 정해 놓고 숙소 예약은 계속 미뤄둔 게으름 덕분에 이 과정도 수월하게 통과했다. 마음을 잡고 노트북 앞에 앉았을 때는 이미 많은 숙소가 만실이어서 가능한 선택지 자체가 한정적이었다. 그런데 예정일이 다가올수록 불길한 예감이 몰려왔다. 여행 일정과 장소를 정하며 ‘벚꽃 개화 시기를 검색했을 당시, 분명 남부지방의 벚꽃이 피기 시작한다고 했던 날짜가 거의 임박했음에도 벚꽃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제주에서조차 조용했다.


    이제 와 변경할 수도 없는 예약일을 손에 들고 불안해진 내가 다시 ‘22년 벚꽃 개화를 검색하기 시작하자, 믿고 싶지 않은 결과들이 쏟아졌다. 올해 벚꽃은 예년보다 늦게 필 것으로 예측되며, 작년 벚꽃은 평년보다 2~9일 정도 빠르게 개화했던 것이라나?! (아니 왜 이런 정보는 이제야 보이는 것인가!) 벚꽃 여행은커녕 서울에 있는 벚꽃 명소에도 못 가본 내가 벚꽃을 보기 ‘딱 좋은 시기를 예측해 떠나는 여행은 당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을까?


    두 달 만에 두 번째 방문이라고 한결 익숙해진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역방향 아닌 순방향에서 여유롭게 창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2시간 10분이 금방 흘렀다. 벚꽃보다 먼저 피어 있는 목련의 인사를 받으며 신경주역에서 70번 버스에 몸을 실었다. 열려 있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3월의 바람을 맞으며 20분쯤을 달렸다. ‘고속버스 시외버스터미널 정류장에서 내려 황리단길로 걸어갔다. 정류장에서 황리단길로 걸어가는 골목은 벌써 청춘남녀로 북적이고 있었다.


    내향인의 책방 탐험은 조용히 비밀스럽게

    뱃속은 물론 마음마저 꽉 채워진 에너지로 <소소밀밀> 그림책 서점을 찾았다. 식당을 찾기 위해 이 골목 저 골목을 돌아다니면서도 그림책 서점을 발견하지 못했던 나는 스마트폰의 지도 앱을 따라 걸

    었다. 그런데 이럴 수가! <소소밀밀> 그림책 서점은 황리단길이 시작하는 입구, 대릉원 돌담길 앞에 있었다.


    <소소밀밀>은 ‘성긴 곳은 더욱 성기게 빽빽한 곳은 더욱 빽빽하게라는 말로, 느긋한 글작가 소소 아줌마와 꼼꼼한 그림작가 밀밀 아저씨가 운영하는 그림책 서점이다. 나는 소소밀밀이라는 말의 뜻은 물론 이 공간을 운영하는 서점지기님들의 이야기를 출입문 바로 앞 벽면에 적혀있는 안내문을 읽으면서야 알게 되었다(이번 여행의 컨셉은 계획형 김슬기와의 이별이 확실하다). <소소밀밀>의 의미를 듣자, 내가 들어선 공간이 더 애틋하게 느껴졌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너는 그 이름만으로도 특별해지지만 그 이름 속에 담긴 의미와 그 아름다운 그림책만큼 나를 사로잡은 건 소소 아줌마와 밀밀 아저씨의 비하인드 스토리였다. 경주에 연고가 전혀 없던 두 사람이 어쩌다 서울에서 경주로 이주해 서점을 차리게 되었는지, 소소밀밀 이야기실에는 두 서점지기가 걸어온 발자국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나는 저기 카운터에서 푸근하고 인자하게 이 공간의 따스함을 채워주는 밀밀 아저씨에게 말을 거는 대신, <소소밀밀>의 역사가 담긴 글과 사진, 그림을 천천히 음미했다. 비밀스럽게 들여다보았다. ‘소소밀밀이라는 그림책 세계에 들어와 돌이 되는 마법에 걸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조용히 탐구했다.


    소소밀밀에서 만난 벚꽃을 품고

    오늘 데려가고 싶은 그림책을 손에 들었다. 그림책을 펼쳐 볼 수 있는 소장본이 있지만 소장본도 책의 몇 장만 공개할 뿐 나머지 뒷부분은 내용을 볼 수 없게 비닐로 씌워 둔 <소소밀밀>만의 시그니처 ‘그림책 미리 보기 시스템 덕분에 오늘의 그림책을 고르는 데 아주 긴 시간을 들였다. 반면 밀밀 아저씨의 드로잉 엽서 앞에서 오늘을 추억할 그림을 고르는 데에는 3초도 걸리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바로 너야! 할 수밖에 없는 그림을 만난 것이다. 마치 운명처럼 딱 한 장만 남아있던 경주의 벚꽃. 오늘 볼 수 없어 낙담했던 벚꽃이 이 거기에 피어 있었다. 떨어지지 않는 풍성함으로 흐드러지게 왠지 울컥 애잔해지는 빛을 품고서.


    그림책과 벚꽃을 품에 안고 나왔다. 바깥은 여전히 소란했다. 동화 속 세상 같은 소소밀밀에서 벚꽃을 품고 나왔기 때문일까? 예약해 둔 숙소를 찾아가는 내 가슴에 살포시 봄이 날아왔다.



    아홉 번째 여행 연천 〈굼벵책방〉, 〈책방내일〉

    길 위에서 버리고 달라지는 나는 변했네

    버리지 못했던 것들을 버려요

    처서가 지난 8월의 바람은 시원했다. 모든 감각을 열어두고 눈앞의 풍경에만 집중하는 길, 신나는 댄스 음악 대신 풀벌레 소리가 가득한 길이었다. 이 길을 더 편하게 즐기고 싶어 무게를 줄였다. 아니 줄이는 법을 배웠다. 일정과 일정 사이 들뜨는 30분도 버릴 수 없어 매일 백팩을 메던 나였다. 10분 먼저 도착한 약속 장소에서도 글을 쓰겠다며 노트북을 넣고 다녔다. 하지만 책방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책방이라는 목적지 자체보다 책방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기차도, 지하철도, 버스도, 택시도 아닌 내 두 발로, 나에게 가장 안락한 이동 수단을 마음껏 이용하기 위해서는 버려야만 했다.


    내 시간을 조금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나태라는 생각, 가능한 더 많은 것을 더 높은 효율로 해내야 한다는 생각. 내가 버려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그런 생각들이 내 숨통을 조여온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버리지 못하고 있던 나에게 하룻밤 여행은 알려주었다. 자동차를 운전해서 가면 금방 도착할 곳을 3시간이나 걸려 갈 때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는 것. 나도 3시간쯤을 침대에 누워 멍만 때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매일 반복하는 일상에서 벗어나자 다른 일이 벌어졌다. 처음 가본 장소에서의 시계는 느리게 갔다. 째깍째깍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할 일을 재촉하던 초침이 침묵했다. 분침은 물론, 시침의 위치조차 중요하지 않았다. 능률이나 성과 같은 결과는 사라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순간의 과정만이 전부인 시간. 한 달에 한 번, 나는 그런 세상으로 들어갔다. 그 세상 안에서 버릴 수 있게 됐다. 덕분에 노트북 없는 가벼운 가방, 가벼운 몸으로 50분을 걸어 책방 앞에 도착했다.


    빠름과 느림의 신기한 조합

    <굼벵책방>은 올해 문을 연 그림책방으로 ‘느림이 허락되는 곳이라 했다. 아이 둘을 키우며 그림책에 빠진 책방지기는 어릴 때부터 행동이 굼뜨고 느려서 지었다는 자신의 닉네임 ‘굼벵을 책방의 이름이자 정체성으로 선택했다. 책방은 ‘빠르게를 강조하는 세상 속에서 한껏 늘어져 있는 방법으로 느리게 보는 그림책을 제안한다. 아이러니하면서도 재미있었던 건 바로 책방의 위치. ‘느림을 강조하는 책방이 ‘빠름하면 빠질 수 없는 경주마들이 있는 연천승마공원과 딱 붙어 있었다. <굼벵책방>에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연천승마공원을 지나야 하는 구조인데, 그래서 나는 7만여 제곱미터에 달하는 승마공원의 초지에서 풀을 뜯고 있는 말들과 먼저 인사를 나누었다.


    하얀 말, 까만 말, 갈색 말, 커다란 말과 작은 말. 뭉게구름이 가득한 하늘 아래 한가로이 풀을 뜯는 말들을 보니 내가 마치 그림책 속에 들어와 있는 듯했다. 느림과 빠름, 굼벵과 경주마, 그림 책방과 승마공원. 접점은커녕 정반대에 있을 듯한 조합인데, 그렇기에 더 통하는 걸까? 심지어 둘은 같은 색, 같은 방식으로 지어진 건물로 묘한 유사성이 있었다. 그 안에 숨겨진 비밀은 둘을 연결하는 또 다른 키워드로 드러났다. <굼벵책방>과 연천승마공원은 ‘과거와 현재, 결합과 성장, 아버지와 딸로 연결됐다. 사연인즉 연천승마공원은 굼벵책방지기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곳으로, <굼벵책방>은 아버지가 직 접 짓고 가족 모두가 함께 살던 건물의 한 층을 리모델링해서 만든 공간이다. 책방지기 굼벵님은 결혼을 하며 떠났던 나고 자란 곳에 다시 돌아와 책방을 만들었다.


    늦여름의 녹음이 우거진 산세를 배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눈부신 공간. <굼벵책방>은 광합성이 허락되는 곳이자 비타민 충전소였다. 뜨거운 태양 아래 40여 분을 걸어오느라 땀이 난 나는 보기만 해도 속이 뻥 뚫리는 통창 앞에 앉아 숨을 골랐다. 연천역에서부터 여기까지 어떻게 걸어왔냐 놀라워하는 책방지기님께 노트북을 두고 와서 괜찮았다고 말하며 하룻밤 옷가지만 최소한으로 챙긴 여 행 가방의 가벼움을 자랑했다. 그 말을 들은 굼벵님은 깜짝 놀라 동그렇게 뜬 눈으로 물었다. “슬기쌤이 노트북을 두고 왔다고요? 내가 아는 슬기쌤 맞아요? 슬기쌤이 노트북을 두고 다닐 수도 있어요?!”


    우리 사이는 2018년 10월 4일 시작됐다. 2017년 10월 시작한 그림책 모임이 만 1년 지났을 때, 나는 세 명의 새 멤버를 모집하는 글을 올렸다. 미래의 책방지기 굼벵님은 그 글에 두 번째로 댓글을 남겼다. 10월 15일 처음 만난 우리는 매주 월요일 오전을 그림책으로 채웠다. 2019년 12월, 아이들의 겨울방학이 끝나면 다시 모이자 인사하며 우리 모임도 방학을 시작할 때는 누구도 몰랐다. 그 방학이 코로나 바이러스를 만나 1년, 2년 넘게 이어질 거라고, 그 멤버 중 한 사람이 그림책방을 차리게 될 거라고. 코로나 팬데믹으로 모든 모임이 멈춰버린 사이 굼벵님은 꿈틀꿈틀 움직여 자신의 꿈을 이뤄냈다.


    달라진 우리, 요즘 나는요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를 만남 앞에서 서로에게 감탄했다. 달라진 상대의 모습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엿한 책방지기가 된 그녀의 모든 것이 대견했다. 마냥 흐뭇하고 자랑스러웠다. 내가 노트북을 두고 왔다는 사실에 놀란 그녀는 내가 훨씬 편안하고 여유로워 보인다고 했다.


    국어사전이 정의하는 ‘편안하다와 ‘여유롭다는 오랜 시간 나에게 허락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산더미 같은 걱정을 생산하며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조급한 마음으로 언제나 서둘렀다. 누구보다 빠르게 더 많은 일을 처리하면서도 결과는 늘 완벽해야만 했다. 용납할 수 없는 실수가 벌어지지 않도록 긴장하며 나를 채찍질 했다. 출산 후 만 9년이 지났던 작년 11월, 내 손가락은 성한 곳이 없었다. 피가 나도록 물어뜯은 손톱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코로나 기간, 건물 입구에서 손소독을 할 때마다 손끝 상처에 닿은 알코올의 쓰라림에 몸서리를 쳤다. 그 아픔의 강도가 유난히 심했던 어느 날, 등줄기를 타고 머리끝까지 쩌릿해지는 통증 속에 생각했다. 이젠 달라져야 한다고,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다고.


    ‘익숙하게 반복해왔던 삶의 패턴을 정말 바꿀 수 있을까?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오래도록 고민했지만 찾을 수 없었던 답을 더는 찾지 않기로 했다. 대신, 보이지 않는 답은 보이지 않는 채로 일단 덮어놓고 새로운 보자기를 들춰 보기로. ‘지금까지 전혀 해보지 않았던 걸 해보자는 생각, 내가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짓을 해보자는 결심은 그렇게 왔다. 여행을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 한 달에 한 번, 그것도 나 혼자 여행을 가겠다고 나선 이유는 그게 지금까지의 나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시키거나 돈을 줘도 할 생각이 없었던 일, 관심조차 가져본 적이 없던 일.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의외의 선택을 했다. 한 달에 한 번 나 혼자 여행을 가고, 4주에 한 번 네일숍에서 젤네일을 받았다. 여행과 네일은 나를 엉뚱한 곳에 데려다 놓는 행위이자 특별한 의식이었다. 이전과 다른 10년을 살고자 하는 나만의 통과의례가 이어지는 중이었다.


    12월부터 8월까지, 여덟 번의 여행을 다녀오는 동안 열한 번의 네일을 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멀쩡할 틈이 없었던 손톱을 강제 봉인했다. 3~4주에 한 번씩 네일숍의 의자에 앉아 내 손톱을 지켜봤다. 단단한 젤 네일의 보호 아래 손톱이 자라나고 있었다. 나날이 변했다. 보고 또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내 손톱에 감탄하며, 잔뜩 긴장해서 손톱을 뜯는 상황을 줄여갔다. 주말도 없이 매일 7시간씩 내리 앉아 원고를 쓰던 작업 방식을 지속하지 않기로 했다. 직업으로서의 글쓰기, 책을 위한 글쓰기는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딱 오전 한 타임만, 하루에 A4 1페이지를 채우는 것을 목표로 평일 중 3-4일만 썼다.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오로지 즐거움을 위한 글을 썼다. 틈틈이 피아노를 치고, 자주 책을 읽었다. 주말은 일을 하지 않고 쉬었다. 열두 번째 네일을 하고 노트북을 가지고 나가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잠을 더 오래 잤다. 한 달에 한 번, 새로운 곳에 갔다. 그리고 연천에 오기 일주일 전, 열두 번째 네일을 받았다. 이번에 선택한 네일은 그 어떤 색도 바르지 않는 것이었다. 갑옷처럼 두툼하게 올려두었던 열한 번째 네일을 벗겨내고 맨 손톱으로 돌아왔다. 내가 과연 손톱을 다시 뜯지 않을 수 있을까? 30년 넘게 고치지 못했던 습관이 이제 사라졌을 거란 확신 같은 건 들지 않았다. 다만 내 느낌을 따라가 보고 싶었다. 지금쯤 시도해 보면 좋겠다고, 바로 지금이라고. 내 안의 내가 속삭이는 목소리에 그 무엇도 올리지 않은 맨 손톱을 선택했다. 그리고 오늘 여기 <굼벵책방>에서 상처 없는 손으로 얼음이 가득 담긴 유리잔을 잡았다.


    이제 고작 일주일이지만 내 손톱은 (아직) 무사하고, ‘편안하고 여유로워 보인다는 말을 들었다. 그 무렵 만난 지인들에게 공통적으로 들었던 말이었다. 남들이 하는 말을 넘어 나도 느끼는 중이었다. 아무 걱정이 없어 마냥 편하고 좋은 상태는 아니지만, 내 마음이 넉넉하여 남음이 있는 상태임은 분명했다. 그 여백을 즐기며 원화전을 감상했다. 인쇄 과정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는, 질감이 살아있는 원화는 강렬했다. 전시 중인 다시마 세이조의 다양한 작품 중에서도 전시실에 놓인 염소 시즈카와 진하게 만났다. 내가 사랑하는 초록 풀 속에 앉아있는 시즈카, 누워 있는 시즈카, 고개를 숙인 시즈카, 잠을 자는 시즈카. 시즈카의 그림에는 많고 많은 초록이 파랑과 함께 펼쳐져 있었다.


    * *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