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바람 작가는 깊어가는 우울증과 공황 증세로 대학가를 떠나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홉 살에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지만, 그 일을 하게 된 건 30대 후반에 이르러서다.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기 쉽지 않았지만 막상 일을 그만두니 왜 진작 그만두지 않았는지 못내 아쉬웠다. 등단 시기가 이른 작가의 시집을 보면 힘이 빠졌고 동년배 작가의 것에는 일말의 희망과 조바심이 동시에 생겼다. 점차 그런 자신을 “지질하게 느꼈다.” 그러면서 “삶의 속도를 남들과 견주는 게 과연 맞는 일일까. 내가 늦지 않았다는 증거를 꼭 바깥에서 찾아야 할까” 반문했다.
결국 “나대로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 자신에게 맞는 속도로, 다가오는 경험을 맞닥뜨리며 살아가는 것.” 그것은 누구에게나 최선의 일일 것이다. “자전거는 나아가면서 균형을 잡듯”, 스스로 중심을 잡고 페달을 밟는다면 주위의 풍경은 지나가는 것일 뿐. 나를 둘러싼 것들에 휘둘리지 않고 온전히 자신이 되는 기술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 저자 민바람
편의점 알바생과 자유기고가 사이를 오가며 글을 쓰고 있다.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대학원에서 국어학과 한국어교육학ㆍ한국학을 전공하고 10여 년간 외국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말들을 찾아 헤맸다. 성인 ADHD와 우울증, 사회불안장애 등을 겪으며 사람의 마음에 대해 배웠다. 날마다 흔들리지만 ‘꼭 단단해지지 않아도 좋다는 단단함’을 되새기며 나아간다. ‘나차’라는 필명으로 EBS라디오×카카오브런치 당선작품집 《너의 목소리를 그릴 수 있다면》에 참여했고, 성인 ADHD 심리 에세이 《우아한 또라이로 살겠습니다》를 썼다.
■ 사진 신혜림
‘빛’을 카메라에 담는 사진작가. 몽환적인 분위기와 아날로그 감성으로 보는 이들에게 짙은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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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
여는 글
마음의 틈을 사춤 치는 산말의 맛
1부. 지친 마음을 쓰다듬는 낱말
전성기를 지난 내가 초라한 순간
판단에 지치는 순간
우는 법이 떠오르지 않는 순간
건강을 잃었다고 느끼는 순간
적절한 사람이 되고 싶은 순간
마음이 나약하게 느껴지는 순간
행복이 실감 나지 않는 순간
흐트러짐이 필요한 순간
하룻밤이 영원 같은 순간
2부. 나아갈 길을 열어주는 낱말
일머리가 아쉬운 순간
진로 고민을 다시 마주한 순간
생활에 가벼움이 필요한 순간
작은 선택이 망설여지는 순간
생각의 틀을 바꾸고 싶은 순간
자극적인 즐거움에 목마른 순간
되풀이되는 일상이 지루한 순간
나를 용서하기 어려운 순간
내 힘으로 어쩔 도리가 없는 순간
3부. 관계를 돌아보게 하는 낱말
가까운 사람을 견디기 어려운 순간
관계의 거리를 깨닫는 순간
흐려지는 추억이 아쉬운 순간
가짜 관심을 직시하는 순간
사회적 가면이 무거운 순간
대화가 숙제 같은 순간
미움을 버리고 싶은 순간
세상이 차갑게 느껴지는 순간
자기 사랑이 어려운 순간
부록 낱말 모음
불안장애와 공황 증세에 시달리며 고통이 찾아올 때마다 우리 낱말을 주머니 속에 조약돌처럼 품고 낱말의 순간을 오롯이 감각하고자 했던, 어느 낱말 수집가의 안온한 일상이 위로와 용기를 전합니다.
낱말의 장면들
지친 마음을 쓰다듬는 낱말
전성기를 지난 내가 초라한 순간
가을은 모든 날, 모든 시간이 가을답다. 쌀랑한 아침 바람도, 추적추적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성긴 비도, 어느새 이렇게 낮이 짧아졌나 당황케 하는 저물녘과, 기분이 산뜻한 건지 쓸쓸한 건지 헷갈리게 하는 저녁 공기도. 마치 잊을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쉼 없이 일러준다. 너는 서른아홉의 가을날을 지나고 있다고. 착실히 늙고 있다고.
철 지나 쓸모없어진 물건을 ‘가을부채(능력을 인정받던 존재를 철이 지나 불필요해진 물건에 빗대어 이르는 말)라 한다. 여름내 손에 붙어 있던 부채는 더 이상 덥지 날씨에 언제 그랬냐는 듯 잊힌다. ‘겨울부채라 하지 않고 ‘가을부채라고 하는 건 ‘한발 늦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늘 뒤돌아보며 한발 늦었다는 아쉬움 속에 사는 게 인생이란 걸 생각하면 가을과 부채의 만남이 두 낱말 이상의 무게로 다가온다.
몇 년 전까지도 ‘더 늦기 전에라고 되뇌며 살았다.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누리지 않으면 기회가 다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진짜 하고 싶은 일보다 지금 해야 할 것 같은 일을 했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만으로 벅차던 10분의 출근길에 영단어를 외웠다. 빠듯한 강의 준비 틈틈이 토익과 한국사와 한자 능력 시험을 준비했다. 이미 오랫동안 한국어를 가르쳐왔으면서도 밀려나기 전에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배우는 건 좋은 일이지만 내 활동 과잉의 핵심에 있는 것은 조바심이었다. 미래의 눈으로 현재의 나를 검열하며 사는 동안 완전히 마음을 놓아본 일이 없다. 어려서부터 따라다니던 우울감이 걷잡을 수 없게 된 건 20대 후반이었다. 당시에는 동남아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업무량에 파묻혀 능력 이상의 일들을 맡았다. 낮은 자존감을 숨기며 살아온 내게는 학생들의 별것 아닌 반응 하나하나도 칼날 같았다. 열대의 기후 속에서 끼니를 대충 해결하며 자책과 뒹굴다 보니 어느새 얼굴과 몸에 염증이 복작거렸다.
2년 2개월이 지나 귀국했을 때 만조한(얼굴이나 모습이 초라하고 잔망하다) 내 얼굴을 본 지인들은 질문을 아꼈다. 열정이 서려 있던 눈빛은 흐물흐물했고, 친한 사람들의 대화에도 끼어들 용기가 없었다. 곧잘 예전의 나를 떠올리면서 자기연민에 빠졌다. 건강과 좋은 피부를 잃어버린 것보다 좋아하던 내 모습을 잃어버린 게 더 아쉬웠다. 대학 시절에는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만 골라 하니 뭐든 노력 이상의 결과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한 발 밖으로 내디디니 몇 배를 노력해도 남들 같은 성과를 낼 수 없는 분야가 많았고, 생각에 거품이 끼어있던 만큼 현실이 가혹하게 느껴졌다. 늘 과거를 그리워하는 나는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 같았다. 마음이 늙어 있었다.
사실은 전성기가 지난 게 아니었다.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상황과 사람들을 만나는 게 사회의 속성이었고, 잘 맞지 않는 직종에 있으면서 자신감을 잃은 것뿐이었다. 맞지 않는 환경에 있다면 그걸 근거로 내게 맞는 길을 다시 찾으면 되는데, 그때는 모든 걸 망쳐버린 것만 같았다. 번뇌라는 나무에 정성스레 물을 주면서 주렁주렁 열리는 겁과 미련, 후회를 보고 생각했다. 이런 게 왜 생기는 거지. 하지만 이렇게도 표현해보고 싶다. ‘모든 순간을 화양연화처럼 느꼈다. 모든 순간 만족스럽고 눈부셨다는 뜻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조바심을 바꾸어 말하면 절박함이기도 하다. 그 마음 덕분에 항상 치열하게 살 수 있었다.
우리는 “~에는 다 때가 있다”라는 말을 몇 번이고 들으며 자란다. 그러다 보니 적당한 때를 놓치면 그게 남은 삶의 족쇄가 될 것 같은 불안이 자리 잡는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미래도 현재도 아닌 그 경계에 까치발을 딛고 선 자신을 발견한다. 다 때가 있다는 말은 다른 의미로 쓰였어야 했다. 미래를 상상하며 정신 차리라는 뜻이 아니라, 과거나 미래에 시선을 뺏기지 말고 현재 속에 흠뻑 젖어 있으라는 뜻으로.
잃어보아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건강을 잃고서야 몸 다루는 법을 깨닫고, 인정 못 받는 시절을 지나봐야 삶에 진정 필요한 건 자신의 인정임을 배운다. 선택에는 기회비용이 있지만 기회비용을 통해 알게 되는 것들이 삶을 풍요롭고 깊이 있게 만든다. 그러니 득과 실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계산하는 일은 별로 의미가 없다. 당장은 잃은 것 같아도 멀리 보면 얻은 것일 수도 있고, 얻었다고 여길 때 더 중요한 것을 잊고 있기도 하다.
여름에는 가을날이 오지 않을 것처럼 뜨겁게 살고, 가을에는 또 그 가을만이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산다면, 내가 가을부채가 아니라 겨울부채라도 뭐 어떨까. 겉모습이 아무리 만조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이 마음에서 빛나고 있다면 지금이 나의 전성기다.
나아갈 길을 열어주는 낱말
일머리가 아쉬운 순간
다양한 일터를 거치며 절절히 느낀바, 나는 일머리가 별로 없다. 특히 ‘어떻게 하면 이 일을 효율적으로 할 것인가 하는 고민에는 영 소질이 없다. 보이는 일을, 내키는 방법으로, 하고 싶은 만큼 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사무직을 하면 작은 일 하나하나에 시간을 들이는 바람에 야근과 주말 근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서비스직도 여러 사람과 같이 일하며 눈치껏 행동해야 하는 일은 잘하지 못했다.
그런데 편의점에서 일할 때는 이런 특징이 오히려 도움이 된다. 눈에 띄는 자잘한 일을 바로바로 해치우면 성실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틀어진 크래커 상자의 열을 맞추고, 앞줄이 빈 삼각김밥을 당겨놓고, 많이 팔린 튀김을 새로 튀기고, 바닥에 진 얼룩을 닦고. 나는 좀 기다렸다가 한 번에 해도 되는 일을 휘뚜루마뚜루(이것저것 가리지 아니하고 닥치는 대로 마구 해치우는 모양) 눈길 손길 닿는 대로 하면서 잔재미를 느낀다. 편의점 일에도 우선순위는 있지만 늘 비슷한 양상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쉽게 익힐 수 있었다. 영 재주가 없는 것 같아도 자신에게 맞는 분야가 하나쯤은 있는 법. ‘자질구레한 일을 아주 잘하는 손재주를 ‘잔재비라고 하는데, ‘자질구레한 일에 초점을 맞추면 내가 잔재비는 좀 있다고 하겠다.
이번 점포는 편의점 아르바이트 중 네 번째로 일하는 곳이다. 그런데 일을 시작하면서는 걱정이 됐다. 평소 손님이 많아 보였고 취급하는 서비스 품목도 다른 점포보다 많았다. 과연, 첫날은 물 마실 틈도 없이 밀려드는 손님에, 손에 안 익은 버튼 조작에, 계산을 하며 계속 어묵과 찐빵과 튀김을 종류별로 채워야 해서 혼이 쏙 빠질 지경이었다.
그렇게 일한 지 9개월이 넘은 지금은 손님의 행렬을 줄여나가며 이런 생각을 한다.
어서 오세요~.
‘이번 주에 치과에 갈까 말까.
봉투 필요하신가요?
‘침낭이 필요해. 나 홀로 캠핑에 도전해야겠어.
늘 이렇게 영혼 없이 일한다는 건 아니고, 그만큼 난든집(손에 익어서 생긴 재주. ‘난든집이 생겨서 손에 익숙하게 된 것을 ‘난든집나다라고 한다)이 난 것이다. 여유롭고도 빠른 손놀림으로 착착착. 웃음 띤 얼굴과 목소리로 계산을 하다 보면, 점포 안을 반 바퀴 두른 대기 줄은 금세 사라져 있다. 지켜보고 있던 사장님은 감탄을 한다.
진짜 잘하네.
어떤 일이든 하면 하는 만큼 정직하게 익숙해진다는 것. 불공평한 이 세상에도 괜찮은 점이 있다면 그것이다. 분야마다 사람마다 차이가 크긴 해도 몸에 밴다는 것 자체는 믿고 나아갈 수 있다.
이렇게 바쁜 곳에서 난든집이 빨리 난 데는 사장님의 역할이 컸다. 여러 번 배운 일에도 실수를 거듭하는 내게 사장님은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상당히 걸립니다. 나도 한참 걸렸어요. 지금도 안 하던 거 어쩌다 한 번씩 하게 되면 그게 뭐더라, 해요. 성과와 관계없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는 건 삶을 건강하게 만들어주었다. 이곳에서 일한 후로 사람들 앞에서 미리 움츠러드는 일도, 긴장 때문에 쉽게 해결할 일을 망치는 일도 많이 줄었다. 내가 나한테 저렇게 말해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 나를 안심시키는 목소리가 내 안에 있다면, 어딜 가든 함께라면 얼마나 든든할까.
이제는 글을 쓰면서도, 마음을 치유하면서도 조바심이 날 때면 생각한다. 내가 나를 기다려주자고. 늘지 않는 것 같아도 언젠가는 길이 든다고. 익숙해지고도 실수를 하듯이 간간이 슬럼프에 빠지면서 사는 것도 당연하다고.
사실 주변 사람들이 호의적이지 않을 때는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사람에게 환경의 영향이란 의지로 쉽게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빨리 더 나은 성과를 보이라고 요구하는 분위기에서 내가 나를 꿋꿋이 기다려주기란 어려웠다. 누구보다 먼저 일머리 없는 자신을 책망하기 바빴다.
하지만 그 시간 덕분에 미립(경험을 통하여 얻은 묘한 이치나 요령. 경험에 의하여 묘한 이치를 깨닫는 것을 ‘미립이 트다/나다/생기다 ‘미립을 얻다라고 한다)이 튼 것도 있다.
비난받는 게 괴로울 때는 비난받는 만큼 내 안에 능력치가 쌓인다고 여기는 것이다. 누군가의 인정을 바라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내면에 저장되고 있다고 상상한다.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심지를 세우고 뿌리를 내리는 느낌으로. 적어도 내 경우 그건 진실이었다. 누군가를 실망시켰다는 건 나에 대한 그의 기대치가 줄어들었다는 것이고, 그만큼 내가 압박감에서 자유로워진다는 뜻도 된다. 자책감이 들 때 나는 이렇게 주문을 건다. 가벼워짐에 주목하자. 미움받는 쾌감을 즐기는 변태가 되자.
남보다 못하다고 느낄 때는 인류애도 활용해본다. 내가 낮아짐으로써 누군가 더 빛난다면? 그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타인의 행복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자. 보잘것없으나 이게 내가 사십여 군데의 일터를 겪으며 얻은 미립이다. 일을 잘하는 요령만큼 일을 잘 못할 때 자존감까지 깎아내리지 않는 요령도 중요하다. 각박한 세상에서 잊고 살기 쉽지만, 일에서의 성과가 삶에서의 성과는 아니다. 일을 잘해도 못해도 삶에 대한 미립은 남는다.
관계를 돌아보게 하는 낱말
대화가 숙제 같은 순간
강사로 일하던 때, 한동안 겸업으로 공항에서 보안 인터뷰를 했었다. 출국 전에 줄을 선 승객들에게 “어디 가세요?” “가방에는 뭐가 들었어요?” 같은 질문을 하고 수상한 점이 없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기초 회화 수준의 외국어 실력이었지만 여러 나라 말로 이것저것 질문하는 게 은근히 뿌듯했다.
그러나 쉽기만 한 일은 없는 법이다. 가장 어려운 건 팀으로 일한다는 점이었다. 나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어떤 잡담을 해야 할지 몰라 고장 난 태엽 장난감처럼 뚝딱거렸다. 다들 나와는 너무 다른 사람 같았다. 승객들에게 하듯 할 말이 정해져 있으면 좋으련만. 삼삼오오 모이는 쉬는 시간이면 사람들 틈에 머슬머슬하게(탐탁스럽게 잘 어울리지 못하여 어색하다) 앉아 있다 슬쩍 빠져나가 혼자 시간을 보냈다.
팀 배정이 날마다 달라지니 더 가시방석이었다. 결국 서너 달 만에 일을 그만두고 대학 후배에게 넋두리를 했다.
사람들하고 있을 때 무슨 얘기를 해야 될지 모르겠어.
날씨 얘기를 해봐!
날씨 얘기라. 갑자기 세계 명작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의 대화만큼 멀게 느껴졌다. 같은 날씨 아래서 만나고 있는 사람한테 굳이 날씨 얘기를 해야 하나? 한편 다들 뻔한 얘기를 하면서 뻔하게 살아가는데 나는 왜 유독 그런 것들을 뻔하게 여길까 싶기도 했다.
사실 예전에는 나름대로 너울가지(남과 잘 사귀는 솜씨. 붙임성이나 포용성 따위를 이른다)가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었다. 처음 보는 사람과도 유들유들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웬만해선 적을 만들지 않았다. 그런데 마음은 달랐다. 그 순간을 넘기기 위해 아무 말이나 하며 분위기를 맞추는 일이 피곤했고 만남조차 의미 없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남들이 하는 대로 대화하면서 속으로는 그게 수박의 겉만 핥는 일이라고 여겼다. 진실된 것, 삶의 의미,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자신의 본질 같은 것들을 얘기하고 또 듣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대화는 거의 찾아오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소소한 일상을 나누고픈 마음을 나도 똑같이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다만 일상적인 얘기 속에서 즐거움과 소속감을 느끼는 경험이 남보다 부족할 뿐이었다. 어릴 적 집 안에서는 부정적인 말들이 주로 오갔고, 학교와 사회에서는 남들과 다른 세계관과 욕구를 숨기는 게 공허해서 혼자가 편했다. 잠자리에 누워 언어 없이 영혼의 빛으로 소통하는 세상을 꿈꿨다. 오해와 상처가 없는 완벽한 세상.
이런 내가 10년 넘게 강사로 살았으니 고장이 난 것도 이상하지 않다. 내 경우 많은 사람 앞에서 쉼 없이 말을 거는 일은 쉼 없이 오해받는 일이었다. 경험이 쌓이면 마음이 단단해질 줄 알았는데 다른 의미로 마음이 돌처럼 굳어갔다. 점차 내가 사람 속에 섞일 수 없는 사람이라고 믿게 됐다. 일을 그만둔 후로도 몇 년간 대화가 두려웠다. 두 명 이상이 내게 집중하면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고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 말을 망쳤다. 매번 실수를 한 건 아닌지, 성공적인 대화였는지 아닌지 판단하다 보니 순간순간의 가치를 느끼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조금씩 치유될 수 있었던 것 역시 대화를 통해서였다.
글을 쓰면서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났다. 내가 속에만 담아둔 얘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는 사람들이었다. 종종 용기를 내서 대면 만남을 시도했다. 여전히 아슬아슬한 느낌은 있었지만 마음이 통하는 만남이 뭔지 알 수 있었다. 잘 맞는 상담사 선생님을 만나면서 그간 억누른 생각과 느낌을 인정받는 경험도 쌓아갔다. 사람들과 연락하지 않고 있을 때도 내게 힘이 된 대화를 떠올리면 마음 한구석이 든든했다. 연결감이란 게 이런 거구나. 처음으로 생각했다.
삶을 지탱하는 건 사소한 것들이었다. 말하지 못한 것까지 읽어내려 애쓰는 눈빛, 방금 들은 말을 곱씹어볼 때의 편안한 침묵, 실없는 농담으로 같이 웃어젖힐 때 갑자기 포근해지는 공기, 어딘가 이상한 표현에도 한결같이 고개를 끄덕여주는 관대함. 하루하루가 버거울 때는 그런 것들이 순간을 붙들어주었다. 바깥에 찬 바람이 몰아치지만 너는 안전하다고. 안전하지 않은 곳을 건너갈 힘이 너에게도 있다고 말해주었다.
마음을 채워주는 대화를 경험하면서 소통하는 일에 믿음이 생기니 그제야 와닿았다. 날씨 얘기로도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이유. 감정을 나누는 방식은 직접적이지 않아도 좋았다. 깊이 터놓고 얘기하지 않아도 사소한 주제로 맞장구치며 불안하고 외로운 마음을 다독일 수 있는 게 사람들의 귀여운 면이니까.
상처가 많으면 상처받기 쉽고, 자신을 인정하기 어려우면 오해에 민감해진다. 하지만 사람과 이어지는 일은 상처와 오해를 동반하면서도 삶을 어느 쪽으로든 나아가게 하고, 그래서 결국은 다친 곳을 낫게 하는 길도 보여준다. 전하려던 의미가 미끄러지면 아프지만, 서로에 대해 모르던 부분을 알게 되기도 한다.
지금은 ‘진짜 하고 싶은 말에 대한 집착을 놓았다. 그리고 어눌하면 어눌한 대로, 힘이 없으면 없는 대로, 웃음이 어색하면 어색한 대로 둔다. 달변이 아니어도 좋고 너울가지가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렇게라도 참여하는 일이 상대에게는 충분히 의미 있을 수 있다. 엄밀히 말해 의사소통은 오해와 같은 말이다. 우리는 각자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고, 타인이 전하려는 의미와 내가 받아들이는 의미가 완벽히 같을 수 없다.
자기 사랑이 어려운 순간
내 가치를 남의 평가에 맡겨두고 산 시간이 길다.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주면 나도 내가 좋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으면 내가 싫어졌다. 잘한다는 평가를 받으면 내가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았지만 단점만 계속 드러나는 것 같으면 쓸모가 있는 사람인지 의심했다. 사람들에게 구더운(굳건하고 확실하여 아주 미덥다)존재로 여겨지고 싶었다.
어떤 일터에 가든 무리해서 일했던 것도 인정에 목말라서였다. 하지만 스스로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으니 내가 채우려는 항아리는 밑 빠진 독이었다. 여러 해 동안 심리에 대해 공부하고 상담을 받으며 알게 되었다. 자라오며 나에겐 세상이 안전하다는 느낌이, 그리고 나의 고유한 판단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는 경험이 부족했다.
내 결핍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게 되자 앞으로 무엇을 채워야 할지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원인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맞지 않는 환경과 거리를 두고 결핍을 채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하지만 내가 불편을 느끼는 모든 요소를 원인과 연결 짓고 싶어 하는 마음이 굳어져갈 때, 그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느꼈다. 원인을 자주 생각할수록 결핍된 아이의 이미지에 갇혔고 다른 현재를 만들어낼 힘이 있다는 것도 잘 실감 나지 않았다. 인생을 어렵게 만든 요소들은 많고 그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과거의 사실이다. 사람은 거기에서 한 발씩 나아갈 힘이 있다.
기억이 곧 ‘나는 아니다. 내 감정도 감각도 내가 아니다. 나라는 경계를 지워버리고 내가 규정한 ‘나가 사실은 허상이라는 걸 생각할 때는 마음이 잠시나마 자유롭다. 갑자기 크게 달라질 수는 없어도 스스로 만든 자기에 대한 이미지에 조금씩 거리를 둘 수 있다. 솔직히 말해 아직까지 의심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다. 과연 내가 괜찮은 사람일까. 누군가 계속 곁에 두고 싶어 하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일까.
물론 상황을 더 낫게 만들려는 노력을 포기한 적은 없다. 그런 면에서 나는 빛접다(떳떳하고 번듯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다). 하지만 이 생각 역시 자기 사랑은 아닌 것 같다. 내 쓸모를 어떤 근거로 평가하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아끼는 마음에는 근거가 필요하지 않다. 따지고 보면 나에 대한 타인의 마음은 그 사람의 자유다. 내 딴에는 노력과 진심을 다한다 해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줘야 하는 의무는 없다. 세상 가장 귀한 대우를 받아 내가 그럴만한 사람이구나 싶으면, 같은 이에게서 세상 가장 차가운 대우를 받는 날도 오는 것이다.
통제할 수 없는 타인의 마음에 내 가치를 걸고 살아가는 일은 부서진 뗏목에서 다시 부서진 뗏목으로 옮겨 타며 바다를 건너는 일처럼 힘겹다. 그러니 나는 나에게 의지할 수 있어야 한다. 눈 감는 순간까지 흔들림 없이 나와 함께 있어줄 사람은 나 자신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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