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은 참치마요
 
지은이 : 권은중 (지은이)
출판사 : 쑬딴스북
출판일 : 2023년 12월




  • 우주만큼 복잡하다는 와인, 그래서 늘 어렵게만 보이던 와인을 이제 편의점에서 파는 음식들과 함께 손쉽게 즐겨보는 건 어떨까? 이탈리아로 요리 유학을 떠났다가 와인의 세상에 눈을 뜬 저자가 펼치는 음식과 와인에 대한 페어링!


    와인은 참치마요


    나를 구원해준 편의점 푸드와 와인

    이처럼 풍요로운 천 원의 마법, 삼각김밥

    이탈리아에도 참치마요가 있다. 우리의 단순한 참치마요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화려한 참치마요다. 이탈리아 북부에서는 이 참치마요로 송아지고기를 싸 먹기 때문이다. 비텔로 톤나토라고 하는데, 우리말로는 송아지 참치라는 뜻이다. 소스인 참치 마요네즈도 그냥 만들지 않는다. 달걀노른자와 케이퍼에 엔초비까지 넣는다. 마요네즈도 수제로 만든다. 콩기름이 아니라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로 만든 다. 이 소스는 거의 천하무적 소스다. 그것을 송아지 고기에 감싸서 먹는다. 송아지 고기도 당근, 양파, 샐러리와 함께 굽는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참치마요를 먹으려고 이런 수고로움을 하다니. 이 음식은 이탈리아 북부의 전통음식 중 하나다. 이탈리아 북부가 1720년 스페인왕위전쟁에 승리한 연합군 측에 참여하면서 전쟁 승리의 전리품으로 스페인으로부터 시칠리아와 샤르데냐 섬을 양도받으며 공작이 다스리는 땅에서 왕이 다스리는 땅으로 격상된다. 왕국으로 성장한 샤르데냐왕국은 이탈리아 서쪽 바다에서 잡히는 샤르데냐 참치를 마음 놓고 먹었다.


    이탈리아 남쪽의 나폴리왕국은 여전히 스페인이 다스리고 있었다. 이 이탈리아식 참치 요리는 그즈음 나왔다. 결국 이탈리아를 통일한 샤르데냐왕국의 자존심 같은 음식 중 하나가 되었다. 우리로 치면 통일 참치 김밥쯤인 것이다. 하지만 이탈리아 레스토랑의 주방에서 일해본 내 경험을 놓고 보면, 당시 주방에서 만든 음식 가운데 손님들이 가장 잔반으로 많이 남기는 것이 비텔로 톤나토였다. 심지어 아예 손을 대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온종일 만들었는데 손님들이 먹지 않는 것을 보면 재료가 아깝다는 생각을 넘어 주방의 노고가 폄하된 것 같아 마음이 아렸다.


    특히 덩어리 송아지 고기를 얇게 썰어 손님상에 내기 위해 바쁜 시간에 손가락이 잘릴 위험을 무릅쓰고 기계식 고기 슬라이서까지 사용하는 것을 감안하면 너무한 일이었다. 레스토랑에 한 50명쯤 되는 손님이 들이닥치면 이 자동 고기 슬라이서에 손가락 한 마디를 잃어버리는 일이 일어날 정도로 주방은 전쟁터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며 지극정성으로 이탈리아식 참치마요를 만들었음에도 잔반으로 주방에 다시 돌아오는 까닭은 이 이탈리아 전통음식이 이탈리아 사람들도 과하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다. 나 같으면 참치마요 삼각김밥을 소고기로 초밥처럼 감싸서 작게 만들어 와사비 간장에 내놓았을 것이다. 많은 이탈리아 사람들은 아직도 초밥이라고 하면 정신줄을 놓는다. 물론 참치초밥과 연어초밥 수준이 지만, 그들에게는 새로운 해산물 메뉴가 필요한 것 같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고기와 튀김이다. 메뉴의 80퍼센트는 고기나 튀김이다. 심지어 고기튀김도 있다. 그래서 비린 것을 잘 먹지 못한다. 그래서 참치회에 커피 원두 가루를 묻혀 먹기도 한다. 참치회에 커피 가루라니. 회 선진국에서 온 우리 눈에는 진짜 맘마미아다.


    그런 사람들에게 참치마요 삼각김밥을 내주면 정말 놀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1유로도 되지 않는 천 원이라니. 송아지 고기에 수제 마요네즈를 만들어 한 접시에 2,3만원 가깝게 먹은 그들의 눈에 천 원짜리 삼각김밥은 마법처럼 보일 것이다.


    참치마요로 나는 춤춘다__소비뇽 블랑·샤르도네·뫼르소

    참치마요와 가장 잘 어울리는 와인은 당연히 소비뇽 블랑이다. 소비뇽 블랑의 풀 향기와 날카로운 산도는 밥알의 전분기와 참치마요의 기름기와 김의 독특한 풍미를 모두 조화롭게 만든다. 샤르도네 역시 잘 어울린다. 오크통에 숙성한 것이나 숙성을 건너뛴 샤르도네와도 잘 어울린다. 편의점에서 반 병짜리로도 파는 호주산 옐로우테일 샤르도네 와도 궁합이 좋다.


    참치마요가 물릴 때 먹는 전주비빔밥에는 고추장에 볶음소고기가 들어간다. 그래서 전주비빔밥 삼각김밥은 참치마요보다 샤르도네와 더 잘 어울린다. 바디감과 알코올 도수가 좀 더 센 샤르도네가 매콤한 전주비빔밥과 잘 어울리는 것이다.


    전주비빔밥은 샤르도네뿐 아니라 샴페인이나 스파클링 와인도 어울린다. 하지만 의외로 어울리는 조합은 레드와인인 스페인 템프라니요다. 템프라니요 품종이 가진 후추맛과 담배 맛이 고추장의 덥덥함을 씻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삼각김밥으로 해보고 싶은 버킷리스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이트 고급 와인인 뫼르소와 참치마요를 먹어보는 것이다.


    귀한 뫼르소에 참치마요라니. 하지만 참치마요도 할 말이 있다. 참치마요는 우리나라에 편의점이 생긴 이후부터 편의점을 대표해왔다. 그리고 학원에 다니는 학생부터 직장인, 자취생까지 아쉬운 끼니를 해결해주는 소울 푸드다. 국가와 사회를 대신해 그들의 배고픔을 해결해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다. 그런 참치마요의 맛과 의미는 뫼르소에 결코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익힌 참치와 마요네즈는 오크터치를 한 뫼르소와 잘 어울리기도 할 것 같았다. 그래서 한번 큰마음을 먹고 골라본 뫼르소는 도멘 드니 까레 레 띠예였다. 이 와인은 오크 숙성을 절반만 해서 밝은 황금색만큼 맛과 향이 산뜻하다. 처음 느끼는 시트러스향은 천 원짜리 참치마요의 풍미를 발랄하게 해준다. 와인이 공기에 노출되면서 구운 아몬드 같은 견과류의 아로마가 느껴져 참치마요의 마요네즈나 참치 살은 물론이고 김이나 전분기와 잘 어울렸다.


    14개월 이상 프렌치 오크통에 숙성했기 때문에 목넘김 뒤에도 우아한 피니시가 느껴진다. 그래서 참치마요의 향이 약간은 맞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때 나는 참치마요를 이탈리아산 파르마산 프로슈토

    를 감싸서 먹기도 한다. 프로슈토 위에 와인 발사믹 글레이즈를 살짝 뿌려준다. 우리 집에 있는 것은 트러플 글레이즈인데, 트러플은 모든 향을 앗아간다. 그래서 트러플 글레이즈보다는 마요네즈에 구운 파프리카 가루를 뿌려서 먹는다.


    후추는 흑후추보다는 적후추가 조금 더 낫다. 그렇게 하면 참치마요 프로슈토 말이가 완성된다. 그냥 평범하게 먹을 수도 있지만, 뫼르소 같은 와인은 나를 집사쯤으로 부리기도 한다. 그러면 어떠랴. 와인의 지시로 참치마요에 유리구두를 신겨 호박 마차를 태워 미식의 성으로 데려가는 일은 생각보다 꽤 즐겁다.


    그렇게 만든 내 식대로 참치마요는 내 입안에서 화려하게 스텝을 밟는다. 가끔은 왈츠를, 가끔은 탭댄스를, 가끔은 힙합을 춘다. 참치마요가 밟는 스텝은 마시는 와인에 따라 경쾌해지기도 중후해지기도 한다. 거기에 따라 나의 한 끼도 달라진다. 와인이 참치마요에 거는 마법이다.


    된장도 품어주는 발랄함__베를린 리슬링

    내 그리 길지 않은 인생에서 가장 많이 마신 와인은 아마도 프랑스나 이탈리아가 아니라 의외로 독일 와인이다. 내 간이 최전성기였던 20대 때 우리나라의 주류 시장에 수입 와인은 드물었다. 당시 시중에서 접할 수 있는 와인은 국산 와인인 마주앙 메도크와 모젤이 거의 전부였고, 아니면 저렴한 와인 쿨러였다.


    레드와인을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주로 리슬링으로 만든 마주앙 모젤을 마셨다. 덕분에 ‘독일 와인은 단술이라고 생각했다. 2000년 초부터 와인 붐으로 수입 와인이 쏟아졌고 그 가운데 독일 와인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독일 리슬링은 거의 찾지 않았다. 오히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리슬링을 호기심으로 더 찾았다.


    이랬던 내가 독일 리슬링을 다시 찾기 시작한 것은 한식과 어울리는 와인을 찾으면서부터였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 홍콩 등 아시아 와인 전문가들은 향이 강한 자국의 음식과 가장 어울리는 와인으로 리슬링을 꼽았기 때문이다.


    와인 책을 보면 강한 향의 중국 요리 전문가들조차 중국 요리에 많이 쓰이는 향신료인 산초나 팔각과 어울리는 와인으로 리슬링을 지목했다. 스파이시하고 감칠맛에 무게 중심을 둔 동양 요리에는 단맛 와인이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리슬링을 단 와인으로만 여겨 왔다.


    다시 마시기 시작한 리슬링은 나의 짧은 경험을 토대로한 일반화의 오류를 깨닫게 해주었다. 리슬링의 최고 장점은 가격과 무관하게 기대 이상의 퍼포먼스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리슬링의 힘은 이 품종의 식생에서 비롯된다. 리슬링은 와인의 북방한계선인 북위 50도 안팎에서 주로 자라는데, 이 지역은 춥고 흐리다. 그래서 포도의 성장이 다른 지역에 견줘 상당히 늦다.


    하지만 큰 기온차와 늦은 성장은 이 포도의 당도와 산도를 증가시켰다. 여기에 중세 독일 수도사들로부터 시작된 장인정신도 한몫했다. 중세 수도사들은 수직에 가까운 라인강변의 절벽에 포도나무를 심어 일조량을 최대한 늘릴 수 있게 했다. 독일 와인의 복잡한 등급이 주로 수확 시기 포도의 당도 때문에 결정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내가 리슬링의 가치를 재평가한 까닭은 당도가 아니라 산도였다. 리슬링을 고르는 나의 첫 번째 기준은 ‘달지 않아야 한다.였다. 지인들은 영어로 드라이라는 뜻의 트로켄이나 카비넷을 권했다. 트로켄이나 카비넷 와인은 리슬링 등급 가운데 가장 낮아 가격이 합리적인데도 맛은 깊었다. 달지도 시지도 않은 절묘한 균형감에 파란 사과, 멜론, 풀꽃향과 꿀맛이 났다. 차게 해서 마시면 얼음을 살짝 띄운 레몬 과즙처럼 쨍한 맛도 났다.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 집의 냉장고를 리슬링에 내어주고 있을 때, 내 눈에 띈 와인이 베를린이었다. 이 와인이 눈길을 끈 것은 2020년 국내에서 열린 와인 앤 치킨 페어링 대회에서 우승했다는 자체 광고 때문이었다. 저렴한 가격도 눈길을 끌었다.


    내가 이 와인과 먹은 것은 양념치킨이 아니라 제철인 숙성 삼치였다. 나는 삼치를 여수식으로 갓김치와 갈치젓을 넣은 된장과 함께 쌈으로 즐긴다. 내가 밀누룩과 귀리누룩을 반반 사용해서 가을철에 담근 14도 청주와 함께 이 와인을 비교 시음해보았다.

    페어링 대회에서 1위를 했다는 것은 결코 허풍이 아니었다. 10도로 도수는 낮은 편이지만 진한 산미와 약간의 탄산 거품이 있어 된장과 젓갈의 진한 향취를 경쾌하게 바꿔 주었다. 14도 청주의 단맛과 높은 알코올기도 역시 삼치회와 잘 어울렸고, 이 리슬링의 발랄함은 삼치와 궁합이 아주 괜찮았다.


    이 와인을 접한 뒤 자주 이 와인을 사서 떡볶이나 불족발 같은 동네 음식과 즐긴다. 우리 집의 냉동실에 상비해 놓고 있는 우리 동네의 명물 가래떡 떡볶이와도 찰떡궁합이기 때문이다. 내 입맛에는 입안의 모든 맛을 정리해주는 스파클링와인보다 더 맞았다. 이 와인은 리슬링에 대한 나의 편견과 한식과 와인의 부조화라는 벽을 보기 좋게 허물었다.


    쌈장과 초장도 품는 ‘화려한 묵직함__뷕시 로제 크레망

    내게는 술잔을 함께 기울일 수 있는 또래 친구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와인을 좋아하는 친구는 드물다. 내가 와인을 좋아한다고 하면 이내 이런저런 질문으로 나를 놀리려 든다. 가령 “와인이 소주로 담근 포도주랑 뭐가 다르냐?”, “얼마나 비싼 걸 마셔봤냐?” 라는 식이다. 하지만 친구들의 결론은 한결같다.


    “술은 소주야!”


    내가 고기를 좋아하지 않아 친구들과 만나면 회나 탕을 먹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와인을 잘 모르는 친구들이라도 고기와 와인의 조합은 가끔 보았지만 회에 와인은 상당히 낯설어한다. 하지만 날이 차가워지는 10월부터는 회를 즐기기 좋은 때다. 내가 사시사철 즐기는 광어도 이 시기부터는 특히 맛있어진다. 그래서 연말 모임은 아무래도 고기보다는 회가 많다.


    나는 친구들과 회를 먹는 자리에 종종 와인을 들고 나간다. 그러면 친구들은 나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특히 고교 동창 모임에는 학창 시절처럼 남성호르몬 범벅인 특유의 빈정거림으로 나를 피곤하게 하는 녀석이 많다. 녀석들은 나이가 들어도 무례하고 거칠고, 그러면 나도 똑같이 대해준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우리나라에서 회를 먹는 방식은 다양하다. 회를 간장과 고추냉이에 찍어 먹는 일반적인 방식과 어울리는 와인은 제법 많다. 소비뇽 블랑, 리슬링, 스파클링 등이 그렇다.


    하지만 초장이나 쌈장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양념의 강렬함에 와인이 밀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고등학교 동창들이 신봉하는 ‘회에는 소주라는 공식이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소주만큼 한국식 회 문화에 어울리는 와인이 있다. 로제 스파클링이다. 이 와인은 로제 와인에 탄산이 들어간 스파클링을 합쳐 놓은 것이다.


    로제 와인은 해산물을 즐겨 먹는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에서 유래했다. 화이트와인에 포도 껍질을 함께 넣어 발효시키거나 포도즙을 넣어 색깔을 낸다. 스파클링 와인 역시 어떤 맛과 향도 경쾌하게 바꿔준다. 하지만 천하의 로제나 스파클링와인도 각각 쌈장에 묵은지까지 곁들이는 우리나라의 회 문화에는 역부족이다.


    그런데 로제와인과 스파클링 두 가지를 섞어 놓은 로제 스파클링은 우리나라의 고추장과 쌈장을 함께 먹는 최강의 풍미를 자랑하는 회 문화와도 잘 어울린다. 원래 로제 스파클링은 그 화려한 색깔과 낭만적인 맛과 향 때문에 아이스크림이나 케이크와 즐기는 디저트 와인이다. 나는 이 화려함을 풍미 강한 한국식 회를 즐기는 데 끌어쓴다. 한옥에서 비단 병풍을 쳐 놓고 와인을 마시는 격이지만, 뜻밖에도 조화롭다.


    그런데 이런 묘미를 내 친구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어쩌면 화장품 같은 얄궂은 핑크빛 와인을 쌈장 올린 회와 먹는다는 것을 쑥스러워하는 듯하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이 구박해도 이 와인을 자주 들고 간다. ‘장밋빛 계란을 ‘50대 남성인 친구들의 통념이라는 바위에 계속 던지고 있는 셈이다. 언젠가 ‘볼 빨간 중년이 된 내 친구들이 내게 애원하듯 이 말을 하기를 기대하면서.


    “그 화장품 같은 와인, 꼭 가져와!”



    일상에서 맛보는 ‘파리의 심판

    순수함을 머금은 엄친아 중의 엄친아__누알라 소비뇽 블랑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은 와인계의 ‘엄친아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 세계 와인 소비자들이 많이 참고하는 와인 커뮤니티 비비노의 평점(5.0 만점)이 대부분 4점대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5만 원대의 고가 와인뿐 아니라 2만원대의 중저가 와인들도 대부분 그렇다.


    물론 비비노 평점은 와인 구매 시 단순한 참고용이다. 내가 목돈이 생기면 사서 쟁여 놓는 10만 원대의 이탈리아 바롤로는 비비노 평점이 대부분 3.8~4.1점 수준이다. 물론 비비노 평점은 로버트 파커 포인트처럼 전문가의 의견 보다는 다수의 사용자들이 매기는 별점을 정량적으로 제공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시스템은 저가의 신대륙 와인일수록 소비자가 많이 마시기 때문에 별점이 높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참고만 할 뿐 절대적인 평가라고 하기 어렵다. 이런 뉴질랜드 와인 중 평점이 가장 높은 것이 누알라 소비뇽 블랑이다.


    물론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을 사시사철 즐기는 내게 비비노 평점은 그렇게 고려의 대상은 아니다. 하지만 4.5점이라니? 이 정도면 엄친아 중에 엄친아 아닌가. 그래서 늘 호기심이 생겼던 와인이다. 비비노 4.5점이 어느 정도냐 하면 프랑스의 부르고뉴나 보르도 레드와인이나 아주 고급 샴페인 정도가 받는 아주 높은 점수다.


    샴페인의 경우에도 일반적인 것은 4.1~4.2점 수준이다. 그러니 누알라에 관심이 갔던 것이다. 5월 날씨가 너무 좋았던 토요일, 후배 부부가 도봉산 정상이 보이는 자신의 집 옥상에서 바비큐 파티를 한다고 나를 초대했다. 이날 함께 초대받은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이 와인을 들고 와 ‘엄친아 가운데 엄친아를 만날 기회를 가졌다. 나는 바비큐라고 해서 으레 고기 중심일 줄 알고 이탈리아 레드와인을 들고 갔다.


    하지만 전직 셰프인 후배의 남편은 수박부터 구웠고, 널찍한 옥상에서 키운 루콜라와 민트, 시소 잎에 올려 샐러드로 내주었다. 루콜라, 민트, 시소 잎은 후배 옥상에서 직접 키운 것이었다.

    도봉산 정기를 머금은 살랑살랑 미풍을 맞으며 구운 수박 샐러드와 함께 마신 누알라는 정말 상큼했다. 누알라는 마오리족 말로 ‘순수라는 뜻인데, 이름 그대로였다. 쨍하면서도 섬세했다. 가냘프고 우아한 백조의 날갯짓과 하얀 레이스의 식탁보에 놓인 열대과일의 정물이 떠올랐다.


    이어서 갑오징어가 그릴에 올려졌다. 갑오징어 바비큐는 갑오징어를 무척이나 즐기는 이탈리아에서도 잘 보지 못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주로 토마토소스와 콩과 함께 졸여 먹는다. 누알라와 갑오징어 바비큐 매칭은 좀더 짜임새가 있었다. 여릿여릿해 보이는 누알라의 반전이었다.


    해가 지자 후배의 집 옥상에는 빨랫줄처럼 걸어 놓은 알전구가 켜졌다. 휴일에 캠핑을 즐긴다는 후배 부부의 젊은 감각에 모두 감탄하고 있을 때, 옥상에 설치해 놓은 블루투스 스피커에서는 선우정아의 <도망가자>가 흘러나왔다.


    도망가자/ 멀리 안 가도 괜찮을 거야/ 너와 함께라면 난 다 좋아


    도봉산을 보면서 설악산쯤에 앉아 있다고 착각이 드는 것은 노래 가사처럼 탁 트인 풍광과 맛있게 구워진 바비큐 음식과 상큼한 누알라 와인 덕분일 것이다. 수억 년을 견디는 암모나이트 껍질처럼 딱딱하고 아름다운 추억을 또 하나 새기는 토요일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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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