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는 파랑
 
지은이 : 김지희 (지은이)
출판사 : 윌북
출판일 : 2023년 10월




  • ‘클래식 음악은 어렵고 돈이 든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피아니스트이자 오페라 코치 김지희가 지금까지 만나온 음악 이야기를 감각적으로 풀어낸 첫 번째 음악 에세이입니다. 그녀가 전하는 특별한 음악 감상법과 만나보세요.


    G는 파랑


    몸으로 기억하기

    아베크 백작 부인 _ 로베르트 슈만, 아베크 변주곡 F장조, Op.1

    로베르트 슈만은 1810년 독일에서 태어난 작곡가입니다. 어릴 때 음악과 문학을 배우고 법을 공부하다가 작곡가로 돌아와 활동을 했습니다. 글에도 조예가 깊어 음악 평론가로도 유명했고, 당시 음악 잡지에 브람스에 대한 소개를 쓰면서 그의 활동을 돕기도 했습니다.


    슈만의 <아베크 변주곡> 악보에는 “폴린 아베크 백작 부인에게 헌정”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인지, 슈만의 친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야기와 인물을 자주 상상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또한 상상 속의 인물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의 재미있는 점은 멜로디의 음 라-시b-미-솔-솔이 아베크의 A-B-E-G-G에서 온 것입니다. 또 두 번째 멜로디는 이 이름을 거꾸로 한 G-G-E-B-A입니다. 이 테마가 곡 안에 숨어서 변주됩니다.


    헌정 대상에 대한 정보는 부족하지만, 슈만은 분명 누군가를 그리며 작곡했을 것입니다. 아베크는 어떤 사람이었길래 이런 음악이 나왔을까, 마음대로 상상해보았습니다.


    아베크 백작 부인은 추위를 잘 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햇빛을 좋아합니다. 부엌 창문을 제외한 창에는 커튼을 달지 않습니다. 밝은 날엔 마당에 앉아서 고양이 쓰다듬기를 좋아합니다. 짙은 초록색 옷을 입고 걷는 것을 즐기며 가끔 멀리 산책을 가서 느지막이 돌아오기도 합니다. 그의 동그란 얼굴과 코에는 주근깨가 조금 있습니다. 곱슬머리는 아침마다 엉킵니다. 책 사는 것을 즐기지만 부지런히 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가득 찬 책꽂이를 보면서 저절로 교양이 쌓이는 듯한 느낌을 즐깁니다. 책갈피를 끼우는 대신 종이 모서리를 접는 습관이 있습니다. 커피보다는 차를 좋아하고, 레몬맛이 나는 과자를 좋아합니다. 새로운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서 소수의 친구들과 시간을 보냅니다.


    아마도 슈만은 인물의 실존 여부와 관계없이 그에게 큰 애정을 쏟았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보아야 이렇게 보석 같은 음악이 나올까, 궁금합니다. 마치 그가 쓰던 피아노는 건반마다 작은 진주알이 박혀 있을 것 같습니다. 아베크 백작 부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마음대로 상상하며 감상하시길 바랍니다. 따뜻한 곳에서 들으면 좋습니다.


    음악 속 첫 문장 _ 로베르트 슈만, 피아노 오중주 Eb장조, Op.44

    저는 처음부터 재미있는 책을 좋아합니다. 첫 장부터 손이 책에 달라붙는 듯한 느낌이 좋아서 흥미로운 첫 문장을 보면 ‘드디어 찾았다! 생각하며 신나게 읽습니다. 음악을 들을 때도 똑같습니다. 도입부에 마음 뺏기는 것을 즐깁니다. 음악을 여는 선율이 책의 첫 문장이라면, 어떤 곡이 그런 매력적인 문장으로 시작할까? 문득 학생 때 좋아하던 슈만의 <피아노 오중주>가 생각났습니다. 친구들이 연습하는 소리가 들리면 문밖에서 훔쳐 듣기도 했던 음악을 오랜만에 읽으니 그토록 찾던 힘찬 문장을 발견한 느낌이었습니다.


    1악장은 샛노랗게 터지는 봄입니다. 봄에 일어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소설의 시작 같은 음악입니다. 두꺼운 겨울옷을 옷장 깊숙한 곳에 넣을지 고민하며 창밖을 바라봅니다. 신호등보다 선명한 개나리가 피어 있습니다. 노란색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꽃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총 네 악장으로 이루어진 이 곡에서는 봄이 네 번에 걸쳐 자랍니다. 알록달록 꽃이 피었다가, 봄바람을 이기지 못한 꽃잎이 떨어지고, 햇빛이 점점 세지다가, 비가 오며 여름으로 넘어갑니다. 끝에는 첫 문장이 돌림노래처럼 다시 등장해 개나리 같은 여름 태양을 살짝 보여줍니다.


    글을 쓰며 간만에 이 곡을 들었는데 동화책을 한 권 읽은 기분입니다. 모든 책에 첫 문장이 있듯이 모든 음악에도 첫 문장이 있습니다. 오늘 듣는 음악에는 어떤 단어가 어떻게 나열되어 있는지, 그대로 더 읽고 싶은지 혹은 아껴두고 나중에 보고 싶은지 생각하면서 감상하시길 바랍니다. 마음을 뺏겼다면 독후감을 써보는 것도 좋습니다.


    G는 파랑 _ 모리스 라벨, 피아노 협주곡 G장조, M.83

    어릴 때 색칠 놀이를 깔끔하게 하는 친구들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림의 테두리를 먼저 사인펜으로 가늘게 덧칠하고, 그 안을 색연필로 풍성하게 채우는 친구들을 시샘했습니다. 저는 그림을 전부 검은색이나 갈색으로 칠하곤 했습니다. 괜히 내 색연필만 못나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중에 가장 좋아하는 색은 파란색이었습니다. 파란색은 내가 칠한 것보다 더 깊은 느낌이 들어서 테두리 바깥으로 조금 삐져나와도 괜찮았습니다. 색이 밖으로 흘러나와도 물이 조금 넘치거나 구름이 개어 하늘이 더 커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에게 G는 파란색입니다. G장조가 중심이 되는 곡에서는 다채로운 파랑이 들립니다. G장조인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에는 세상의 모든 파랑이 있습니다. 1악장은 파도입니다. 어릴 때 본 바다의 파도는 악몽에 나오던 새파란 상어의 입이었습니다. 나를 향해 하얗게 열리던 물을 보면 금방 바다의 입 속으로 물려 들어가 흩어질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자석처럼 나를 끄는 힘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움직이는 물이라 생각하며 발을 담그고, 손으로 만져보고, 머리를 적시며 파도와 점점 가까워졌습니다. 만질수록 밝은 색으로 변하는 파랑입니다.


    2악장은 파랗지 않은 것을 파랗게 기억하는 장면입니다. 엄마가 주먹밥을 싸들고 온 초등학교 운동회는 분명히 날씨가 흐렸는데, 시원한 파랑으로 기억합니다. 아빠에게 보여준 우리 가족 그림에는 배경이 없었는데, 따뜻한 파랑으로 기억합니다. 그 사람과 처음 만났을 때는 흰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파란색 스웨터가 보이고, 같이 간 여행에서는 함께 하늘을 본 적 없는데 파란 하늘만 기억납니다.


    3악장의 파랑은 어릴 때 자주 먹던 페인트 사탕입니다. 먹기 전에 보이는 투명하고 진한 파랑에는 사탕을 사는 설렘과 혹시 선생님에게 들킬까 하는 긴장이 있습니다. 하늘이 가장 파랄 때만 볼 수 있는 폭죽놀이처럼 시작해서 친구들과 파란 입술로 메롱 하는 재미로 이어집니다. 사탕을 다 먹고 나니 손가락에도 달콤한 물이 들었습니다.


    라벨의 작품처럼 많은 악기가 다채롭게 뛰노는 음악을 들을 때면 어릴 때 이루지 못한 예쁜 색칠의 꿈을 대신 이루는 느낌이 듭니다. 이제는 테두리를 조금 삐져나와도, 가장 예쁜 색연필이 아니어도 색칠을 즐길 수 있습니다.


    모든 봄 _ 프란츠 슈베르트, 교향곡 5번 Bb장조, D.485

    예전에 음악 선생님이 슈베르트의 음악은 다음에 어떤 음이 나올지 예상이 가능하다는 게 장점이라며 그의 특징을 설명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왜 그게 좋은 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상이 가능하다는 것은 곧 뻔하고 지루하다는 거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예상이 가능할 때 오는 편안함이 소중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상치 못한 일로 놀랄 일이 없는 게 얼마나 많은 마음의 평화를 가져오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왜 슈베르트가 대중에게 인기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어렸을 때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항상 새로운 것만 경험하며 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가까운 사람들과 게으르게 시간을 보내고, 읽었던 책과 음악을 다시 보고 들으며 매일 비슷하게 사는 것도 행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일이 곧 오늘 같을 거라는 생각이 위안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슈베르트의 음악은 그런 삶을 이야기합니다. 너무 익숙해서, 너무 단순해서, 너무 편해서, 그래서 좋습니다.


    오는 봄이 슈베르트의 음악 같은 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길지 않은 교향곡이니 전곡을 모두 감상하시길 바랍니다.



    마음으로 발견하기

    포근한 날 _ 찰스 스탠포드, 포근한 날

    찰스 스탠포드는 1852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작곡가입니다. 오케스트라와 성악을 위한 작품을 많이

    만들었으며 특히 물, 바다에 관한 음악이 많습니다. 〈포근한 날>은 영국 시인 위니프레드 메리 레츠의 시로 만든 가곡입니다.


    포근한 날, 신에게 감사해!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꿀 향기가 나는 입

    젖어가는 낙엽 냄새

    찔레꽃과 너도밤나무와 라임,

    하얀 엘더플라워와 타임,

    폭 젖은 잔디에서 단내가 나고,

    나의 맨발에 부서지고,

    그 와중 비가 처마에서 방울, 방울, 방울 떨어지네


    포근한 날, 신에게 감사해!

    언덕은 흐르는 은빛 구름에 싸여 있고

    거미줄은 반짝이는 그물,

    젖어가는 숲길,

    내 맨발 밑의 촉촉한 땅에서 달콤한 향기가 나고,

    비가 나뭇잎에서 방울, 방울, 방울 떨어지네


    몇 년 전에 힘든 시간을 같이 보냈던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그의 집은 초록 식물과 샛노란 햇빛으로 가득하고 따뜻했습니다. 밝은 빛이 들어오는 부엌 천창 아래에서 아이스티를 만드는 친구의 모습은 참 편안해 보였습니다. 우리는 시원한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습니다. 못 본 시간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이렇게 잘 지내고 있는지 들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잘 풀릴 거였는데 옛날에는 얼마나 많은 걱정을 했는지도 말하며 웃었습니다. 차를 홀짝이며 "정말 이렇게 평화로운 날이 올 줄 모르고......"라고 나지막이 말하는, "여름휴가는 간단하게 근처 호수에서 수영하면서 보내야지" 하며 웃는 친구의 모습에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포근한 날>을 들으면서 이 친구 생각을 했습니다. 가사처럼 꿀 냄새가 섞인 바람, 싱싱한 잔디 냄새, 길가에 피어 있는 들꽃과 촉촉한 나뭇잎, 구름 사이에 살짝 보이는 거미줄같이 너무나 평범해서 눈에 보이지 않던 일상이 다시 천천히 찾아왔습니다.


    마음이 너무 캄캄해 햇빛마저 어두웠을 때를 살아냈기 때문에 이제는 조용하고 포근한 일상을 즐길 수 있습니다. 오늘 행복한지, 지금 모든 것에 만족하는지 묻는다면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숨소리부터 무겁던 옛날을 생각하면 더할 나위 없이 편한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때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던 포근한 날입니다.


    정화된 밤 _ 아르놀트 쉰베르크, 정화된 밤. Op.4

    모르는 것이 부끄러웠던 대학생 때의 저는 아는 척을 많이 했습니다. 다른 전공 친구들과 말할 때 모르는 주제가 나오면 아는 척 고개를 끄덕였고, 두루뭉술한 말을 던지며 날카로운 시야를 가진 척했습니다.


    하지만 들키지 않기 위해 노력도 했습니다. 모르는 곡이 나오면 고개를 끄덕이며 “그 곡은 참 특별해”라고 말한 후, 화장실에 가서 앞뒤로 30초씩 듣고 나왔습니다. 모르는 음악 이론이 나오면 몰래 검색을 했고, 모르는 작곡가가 나오면 숨어서 그의 주요 작품 제목을 외웠습니다. 그리고 매일 저녁 아는 척했던 것을 진짜로 알기 위해 공부했습니다.


    쉰베르크의 <정화된 밤>은 현악 연주자들이 아주 좋아하는 곡 중 하나이자 제가 아는 척을 했던 곡입니다. 저는 실내악 수업 중 바이올린 교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쉰베르크의 다른 작품과는 달리 친밀하면서도 거친 소리가 공존하는 곡입니다.”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음악을 듣다 보면 다행히 아주 틀린 말은 아니구나 생각합니다. 쉰베르크는 반음계를 차곡차곡 쌓아 큰 선을 만듭니다. 그렇게 이 곡의 멜로디는 Bb에서 A로 반음 내려오며 시작하고, 그것이 벽돌처럼 쌓여 하나의 견고한 집을 만듭니다. 주춧돌은 낮은 음역대의 첼로가 놓고, 그 위로 비올라와 바이올린의 음이 얽히고설켜 그 어떤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단단한 공간을 만듭니다. 실제로 작품이 발전할수록 이 집을 쓰러뜨리려는 듯 눈보라가 치고 태풍이 불지만, 여섯 개의 현악기가 하나로 이어진 채 끝까지 음악을 지탱합니다.


    무엇이든 모르는 것을 솔직히 드러내고 배우며 즐기는 것은 멋진 일입니다. 하지만 가끔은 아는 척을 하며 숨어서 노력하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혹시 이 곡을 처음 듣는다면 고개를 끄덕이며 신나게 아는 척하면서 감상하시길 바랍니다.


    소중해서 어려운 것들 _ 카를로서 구아스타비노, 두 피아노를 위한 로맨스, Op.2

    오랫동안 숨겨두었던 곡입니다. 너무 좋아서 혼자서 간직하고 싶었고,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 그 마음을 이기게 되면 말하고 싶었습니다. 많이 좋아하는 것일수록 주변에 소개하기가 어렵습니다. 마치 이 마음의 양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꽁꽁 아끼게 됩니다. 그리고 좋아하는 마음이 클수록 정연하게 표현하는 능력이 줄어듭니다. “오, 짱이다” 외에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으로 이 곡을 들었을 때는 “우와”라고 밖에 하지 못했지만 드디어 이 곡에 대한 마음을 글로 풀게 됐습니다.


    <두 피아노를 위한 로맨스>는 제가 들었던 모든 음악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작을 가지고 있습니다. 얇은 유리 위에 차가운 바람이 부는 듯한 연약한 소리지만 절대 깨지지 않는 음악입니다. 이 멜로디가 점점 더 강하게 발전하다가 다시 돌아옵니다. 시작처럼 끝나는 곡입니다.


    이 음악을 들으면서 많은 것의 시작과 끝이 비슷하구나, 느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이유가 곧 그를 떠나게 되는 이유가 되듯이 어떤 경험의 마지막으로 갈수록 처음과 닮아 있는 것을 깨닫습니다. 잔잔하지만 설렘 가득히 올라와서 극적인 감정 변화를 겪고 내려갑니다. 두 명의 피아니스트가 하나가 된 것처럼 연주하는 이 곡이 마치 인연이 시작하고 끝나는 과정처럼 들립니다.


    조용한 곳에서 소중하게 감상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오늘 이후로 좋아하는 작곡가가 한 명 더 늘기를 바랍니다.



    음악으로 살아가기

    작별 인사_ 프레데리크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 E단조, OP.11

    이 작품은 할머니 장례식에서 들었던 곡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친척들에게 할머니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또 오랫동안 할머니와 같이 살았습니다. 저는 언제나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할머니를 가장 좋아하는 손주였습니다. 하지만 중학생이 되었을 때 가족의 일로 할머니와 멀리 떨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어느 겨울 아침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정신없이 검은 옷을 챙겨 입고 병원으로 달려가니 할머니는 ‘김외선이라는 이름으로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할머니의 이름을 글자로 보니 점점 실감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장례식장 문을 여니 검은 한복을 입고 있는 친척들, 상주 완장을 차고 계시는 큰아버지, 벽에 기대앉아 소주를 마시던 사람들, 진하게 나는 음식 냄새까지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저를 데리러 오는 고모를 보니 그제야 눈물이 났습니다. 발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 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보면 모든 것을 인정해야 할 것 같아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신발장에 서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고모부가 오셔서 부축을 해주시고 절을 올릴 수 있게 도와주셨습니다. 제가 좋아하던 할머니 사진이 있는 것을 보고 다시 한참을 울었습니다. 절을 올리고 일어나 한 번 더 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새벽 4시쯤, 조문객이 모두 돌아가고 친척들이 휴게실에서 쉬고 있을 때, 할머니의 영정 사진 앞에 앉아서 이 곡의 2악장을 틀었습니다. 할머니께 말을 걸었습니다. 나는 꿈을 이뤄 피아니스트가 되었고, 하고 싶은 공부 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할머니가 오랫동안 아프던 것을 떠올리기 싫어서 생각도 연락도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옛날에 할머니가 산책 가자고 했을 때 컴퓨터만 했던 것도, 피넛버터가 뭔지 물어봤을 때 성의 없이 대답했던 것도 너무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천국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는 듯한 이 음악을 들으며 할머니께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다시 듣지 않았습니다. 이 곡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법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글을 쓰며 다시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혹시 작별 인사를 미처 끝내지 못한 누군가가 있다면 그분을 생각하며 이 곡을 감상하시길 바랍니다. 미안했던 순간보다 함께 보냈던 시간을 위해, 너무 아름다워서 조금은 슬펐던 그 시간을 기억하며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어려운 작별 인사를 조금이라도 도와주는 음악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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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