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들아, 안녕
 
지은이 : 한순자 (지은이)
출판사 : 태인문화사
출판일 : 2024년 04월




  • 70대 할머니가 20년 동안 자신의 반려견들과 함께했던 순간들을 회상하며, 사랑과 상실 그리고 인생의 귀중한 교훈을 나누는 이야기입니다. 한 인생이 어떻게 다른 존재와의 깊은 유대를 통해 영감을 받고, 변화하며, 결국 성장하는지에 대한 감동을 전합니다.


    별들아, 안녕


    삼순아, 그동안 고마웠어. 그리고 미안해

    삼순이 진통 시간이 길어졌어요

    삼순이가 럭키와 또다시 짝짓기한 시점을 기준으로 날짜를 계산해 보았다. 예정일이 6월 셋째 주쯤 될 것 같았다. 드디어 6월 셋째 주가 되었다. 삼순이가 언제 새끼를 낳을지 모르니 큰딸과 상의해 집을 비우지 않도록 맞추었다. 아마 그 주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새끼를 낳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던 목요일날 저녁이 되자 삼순이의 진통이 슬슬 시작되었다. 밤새 내 옆에 누워 핵핵거리고 있어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지난번 새끼를 낳을 때는 잠결에 ‘짹짹!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새끼도 금방 낳았다. 그런데 이번엔 싹싹대는 소리가 아니라 헉헉대고 있으니 잠을 도저히 잘 수가 없었다. 날이 새도록 그런 상태였다. 아침이면 새끼를 낳겠지 했는데 아침 8시가 되고, 9시가 되어도 핵핵거리며 가쁜 숨만 쉬고 있었다.


    삼순이도 불안한지 새끼를 낳을 수 있도록 마련해 준 자리에 가서 박박 긁었다. 그러고 나서 딸아이 방으로 들어가 자리를 찾는 듯했다. 삼순이의 얼굴에는 불안한 빛이 역력했다. 삼순이 내심으로는 지난번에 큰딸이 새끼를 받아 주었으니 딸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 간절한지 큰딸 방을 엿보는 듯했다.


    하지만 양수 비치는 기미가 없었다. 몹시 불안한 모양이다. 새끼를 낳기 전에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까지 찍어 예정일과 새끼가 6마리라는 것까지 알고 있었기에 어느 만큼은 안심했었다. 그럼에도 진통으로 보이는 신음소리가 너무 길게, 오래 하고 있어 조금은 불안하기도 했다.


    나는 아침 8시쯤 일어나서 밥 준비를 대충 해 놓고 TV를 보고 있었다. 그사이 삼순이가 새끼를 1마리 낳았다. 삼순이가 새끼를 1마리 낳아 놓고 힘이 들었는지 내가 누워 있는 사이 다시 또 1마리를 낳았다.


    삼순이는 새끼가 나오자마자 강아지 새끼처럼 보일 때까지 알뜰하게 핥아 주었다. 큰딸은 이번에도 옆에 앉아 새끼를 받아 주었다. 삼순이가 핥아 주고도 배꼽에서 다 끊어지지 않은 탯줄을 가위로 잘라 주고, 탈지면으로 배꼽에 묻어 있는 피까지 닦아 주었다.


    지난번에 새끼 낳을 때는 4~50분 간격으로 낳더니 이번에는 금방금방 낳는다고 큰딸이 말하기에, 내가 첫딸을 낳을 때 진통하던 시간과 둘째 진통하는 시간이 다르다고 하면서 삼순이도 그런 모양이라며 지켜보고 앉아 있었다.


    이번엔 새끼를 4마리 낳았다. 지난번처럼 비실대는 새끼도 없고 젖꼭지도 모자르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삼순아, 애썼어. 정말 애썼어.”


    모성애를 외면할 수가 없다네요

    삼순이가 체력이 많이 달리는지 요즘 들어 부쩍 핵핵거린다. 그동안은 볼일이 급할 때에만 그런 증세를 보였는데 두 번째 새끼를 낳고부터는 힘이 부치는지 그런 증세를 자주 보인다. 동물병원에서 의사가 체력이 떨어져 힘이 없으면 핵핵거린다고 말해 주어 그 증세의 원인을 확실하게 알게 됐다. 지난번엔 그런 증세가 심하지 않았는데 이번엔 옆에서 내가 잠을 설칠 정도로 심하다. 작년 10월에 새끼 7마리를 낳고, 올 6월에 새끼 4마리를 더 낳았으니 힘이 없는 게 당연했다.


    삼순이가 두 번째 새끼들을 낳고부터는 꾀가 나는지 지난번보다도 더 자주 새끼들 곁을 비운다. 삼순이가 새끼들의 곁을 비울 때는 대소변이 보고 싶을 때였는데 대소변이 보고 싶어도 새끼들이 젖을 물고 있으니 참다못해 핵핵거리는 게 아닌가 싶어 은근히 걱정이 앞섰다.


    한 번은 내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핵핵거리고 있어 오줌이 마려워서 그런가 싶어 급하게 일어나 데리고 내려가 베란다 문을 열어 주었다. 삼순이는 열어 주자마자 재빠르게 나가더니 볼일을 보는 거였다. 어떨 때는 밖으로 나가지 않고 안에서 볼일을 보기도 한다. 이젠 볼일을 봤으니 잠을 자면 나도 편하게 자련만, 잠시 후 다시 핵핵거리니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왜 그러는가 싶어 더 자주 살펴보았다.


    어느 날이었다. 잠을 자는데 삼순이가 또 핵핵거리고 있었다. 오줌이 마려운가 싶어 데리고 나가려고 보니 새끼 4마리가 젖을 놓지 않았다. 나는 그래서 핵핵거리고 있었는가 싶어 새끼를 1마리씩 떼어 놓고 삼순이보고 나오라고 했다. 하지만 삼순이는 찍찍대는 새끼들 곁을 떠나지를 못하고 다시 들어가서 눕는 거였다.


    이젠 삼순이도 나이를 먹었나 보다. 지난번보다 힘에 겨워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오줌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는지 핵핵거리는 소리가 더 심하다. 어미를 찾느라, 젖을 찾느라 찍찍대는 새끼들을 보면서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른다. 그래도 어미라고 새끼들 곁을 떠나다가도 찍찍대는 소리를 들으면 다시 또 새끼들에게로 달려가는 것을 보며, 사람 못된 것은 동물만도 못하다는 얘기가 실감난다.


    요즘 드라마를 보면 남녀가 사귀다가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미 애를 하나둘 낳고 그 사실을 숨긴 채 재혼을 하면서 과거 때문에 겪는 아픈 현실, 아이들에 얽힌 문제로 고민, 갈등하는 모습을 그린 내용이 대부분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자식을 버렸거나, 과거를 은닉하거나, 과거사가 들통 날까봐 연연하는 사람들이 새끼들을 어쩌지 못해 좌불안석하는 삼순이 같았다면 그들의 삶의 모습은 달라졌겠지 싶은 생각이 든다.


    고별의 순간

    삼순이가 어젯밤에 명을 다하려나 조심스럽게 지켜봤다. 밤새 숨을 ‘끄윽 끄윽, ‘숙숙 몰아쉬길래 마음의 준비를 해야지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침이 되니 기력이 조금 되살아나는 것 같아 혹시 소변이라도 보려나 베란다로 내어놓았다. 이내 피식 쓰러지고 말았다. 나는 삼순이를 안고 제 침대에 놓아 주었다. 그랬더니 ‘숙숙 몰아쉬는 숨소리가 온 집안에 처연하게 울려 퍼졌다. 그동안 식구들과의 이별, 고별하려는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려나 싶게 끊어질 듯 소리는 작아졌어도 계속되었다.


    나는 삼순이의 떠남의 순간을 조금이나마 외면하고 싶어 방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가니 귀를 기울여야 들릴 만큼 소리는 작아졌다. 그래도 화장실을 갈 때면 삼순이의 애달픈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어 빨리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삼순이의 생명이 애처롭기까지 했다.


    낮에 개 3마리를 데리고 산책하러 나갈 때까지도 삼순이의 쇳소리는 이어졌다. 돌아와서도 숨은 쉬고 있었다. 오후 5시가 되어 숨을 쉬고 있는 삼순이를 편안히 뉘어 주고 난 집을 나왔다. 가게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5시간 동안 살아 있으려나, 그 사이 우리 식구와의 영원한 이별을 하려나 착잡하고도 아릿한 마음이었다.


    내가 가게에 나와서 남편과 두 번 통화를 할 때까지도 삼순이는 그대로 있다고 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두려운 마음으로 삼순이를 살펴봤다. ‘끄윽 끄윽 그때까지 숨을 쉬고 있었다.


    밤 10시 반에 저녁을 차리고 “삼순아, 우리 밥이나 좀 편하게 먹자.”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30분 정도가 지났을까 밥을 먹고 내려와 보니 삼순이의 숨소리는 이미 들을 수가 없었다. 어머나!, 우리가 저녁밥도 먹기 전에 숨을 거두었다면, 우린 사체부터 처리하고 밥을 먹었을 것이다. 그런데 고맙게도 저녁밥을 다 먹고 내려오니 숨을 거둔 것이었다. 게다가 내가 집에 들어오기 전에 숨을 거두었다면 난 얼마나 허전하고 안쓰러웠을까.


    얼마 전까지도 살아 있던 생명체, 우리와 그 많은 세월 동안 함께 밥을 먹고 숨을 쉬었건만 죽으면 다 저렇게 되는 건가 싶다.


    다음 날이 일요일이어서 삼순이는 우리 집에 하루를 더 재워야 했다. 남편이 아침에 가게를 나가며 오늘 하루는 삼순이를 애도하는 마음에서 검정 옷을 입었다고 하기에,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는데, 삼순이가 왜 이렇게 불쌍한 거냐”고 말했다. 남편은 그러기에 “반려견이라고 하지 않느냐”라고 답했다.


    우린 순하디 순한 삼순이와 함께 살았던 16년이란 세월을 접고, 그렇게 보내야 했다. 돌이켜보니 그동안의 삶이 주마등처럼 다가온다.


    ‘삼순아, 그동안 고마웠어. 그리고 미안해. 마지막 네가 가기 전날 방바닥을 힘겹게 허우적거릴 때 도와주지 못해 정말 미안해. 나와 남편은 그 순간 삼순이가 그렇게 힘겹게 삶과의 마지막 몸부림을 하는 것이라고 숨죽이며 있다가, 난 늦게서야 너의 몸을 네 자리에 뉘어 주었지. 진작 그랬더라면 삼순이가 좀 더 편히 있다가 세상을 떠날 수 있었을 텐데. 그것이 정말 미안하고 가슴이 아팠다.


    삼순아, 잘 가!


    다음 세상에서는 인간으로 태어나든지, 아니면 좀 더 살뜰히 보살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으면 한다.


    삼순아, 안녕!



    세월 앞에 장사(壯士) 없네

    럭키야, 울지마

    개들을 데리고 아롱이 할머니와 같이 산책 다니는 지도 어느덧 2년이 넘었다. 혼자 다닐 때는 개 4마리를 데리고 나가기도 하고, 때로는 2마리 3마리를 데리고 다녔다. 그럴 때마다 개들이 서로 나가겠다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보다 못한 딸들이 1마리나 2마리만 데리고 나가라고 언성을 높인다. 그런 꼴을 누구인가 보고서 관리사무실에 민원을 넣으면 집을 비우라는 경고를 받거나, 아예 이 집에서 쫓겨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난들 그 사실을 어찌 모르겠는가. 개들을 데리고 나갈 때마다 그 고초는 내가 다 겪어 내야 하고 힘이 들어도 내가 더할 터인데, 그런 딸들의 잔소리가 나를 더더욱 피곤하게 만든다. 어떨 때는 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지치기도, 그냥 쉬고 싶다는 마음이 클 때가 많다.


    날씨가 좋은 날은 개들보다도 내가 더 나가고 싶어 개들을 끌고 나간다. 하지만 그 좋은 날조차 산책을 즐길 수가 없다. 럭키, 금비, 이쁜이가 다른 개들을 보면 짖어 대거나 쫓아가는 바람에 혼자 개들을 돌봐야 한다는 게 힘에 부친다. 스트레스가 되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산책길에서 아롱이 할머니와 할머니의 딸 정인 씨를 만났다. 그 후 어느 날부터인가 같이 산책을 하게 되었다. 아롱이 할머니는 개를 키우지 않지만 개 4마리를 데리고 나가는데도 무리 없이 아주 재미있게 데리고 나가신다. 모녀가 개를 워낙 좋아해서 개를 키우고 싶은데도 아들이 개를 좋아하지 않아 키우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우리 견공들 산책길에 기꺼이 동행하면서 같이 즐기는 상황이 되었다.


    아롱이 할머니는 어려서부터 동네 개들 밥까지 챙겨 주셨다고 한다. 개 사랑이 어느 정도쯤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런 아롱이 할머니가 이젠 산책길에 우리 집 개들의 간식과 물을 챙겨서 나오신다.


    처음 얼마 동안은 내가 개 4마리를 끌고 나가서 같이 만났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개를 데리고 집에서부터 나가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님을 알고는 집으로 데리러 오신다. 어떤 날은 정인 씨까지 합류하니 개 4마리를 데리고 나간다고 해도 산책이 한결 수월해졌다. 아니 재미있는 일상이 되었다. 봄여름이면 호숫가로 나가기도, 가을이면 단풍이 예쁜 공원까지 나가 풀어놓으면 개들이 좋아서 마냥 뛰어논다.


    하지만 겨울로 접어들면서 밖으로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겨울의 어느 날부터인가 아롱이 할머니는 일주일에 한 번 1마리씩 데리고 가신다. 때로는 내가 가게를 나가면서 할머니 집에 데려다 놓고 퇴근하는 시간에 가서 데리고 온다. 그러던 어느 날 부득이 럭키가 할머니 집에서 자게 되었다. 다음 날 데리고 와 밤에 잠을 자는데 잠결에 ‘흑흑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나는 “밤에 누가 우는 거야.” 하며 귀를 기울였다. 럭키가 우는 소리였다.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가만히 들어보니 럭키가 자면서 우는 소리였다. 난 벌떡 일어나 럭키를 안으며 “럭키야, 울지마, 너를 아롱이 할머니한테 보내려는 게 아니었어. 이젠 안심하고 자.” 하며 토닥여 주었다. 여태까지는 럭키가 아롱이 할머니네로 가긴 해도 밤에 엄마가 데리러 온다는 것을 알고 편한 마음으로 놀았는데, 그날은 밤이 지나도 엄마가 데리러 오질 않으니 혹시나 ‘버려지는 게 아닐까? 놀라고 걱정스러웠던 모양이었다.


    요즈음은 아롱이 할머니와 정인 씨가 우리 집에 오면 반갑다고 반기기도 하고, 무릎에 올라가 가슴에 안기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내가 방으로 들어가면 세 놈이 쪼르르 다 따라서 올라온다. 역시 본래 주인인 내가 더 좋은 모양이다.


    며칠 전 TV에서 동물농장을 봤다. 그날 소개된 얘기 가운데 주인을 잃어버린 개가 한 자리에서 10년 동안 주인을 기다린다는 얘기가 소개되었다. 이미 그 개는 백내장까지 있어 앞도 잘 보지 못했다. 주변 아파트 주민들이 개의 보금자리까지 말끔하게 정리를 해 주었건만, 늘 그곳에 나와 앉아 있는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과연 그 개는 주인을 잃어버린 것인지, 유기견인지? 열세네 살쯤 되는 개가 10년 이상을 기다렸다면 그 개가 버려졌을 때는 서너 살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얼마나 식구들이 가슴 깊이 차지를 했기에 한결같이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지, 혹시라도 개 주인이 기억하고 찾아주기나 하려나 내내 눈에 삼삼했다. 하지만 이미 10년이 넘었다면 주인이 버린 것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싶어 그 개가 더 오래도록 가슴에 잠긴다.


    자식을 낳아봐야 부모 마음을 안다고 했다. 개를 여러 마리 키우다 보니 해를 거듭할수록 어쩌면 그렇게 자식, 사람과 같은가 싶어질 때가 많다. 그래서 차마 그 마음을 외면할 수 없어 남에게 주지도 못한다.


    럭키는 아주 어릴 적부터 주인이 몇 번 바뀌었다. 나는 럭키가 오줌을 아무 데나 싼다고 해서 전 주인들에게 매 맞은 것을 안다. 그 경험이 트라우마가 되었는지 자주 만나고, 그렇게 귀여워해 주시는 아롱이 할머니 집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어릴적의 기억이 되살아났는가 보다.


    다시 또 누구에겐가 보내질까 봐 겁이 났던지 꿈결에도 흐느끼는 럭키를 보며, “럭키야 울지마, 다시는 남에게 보내지는 않을 거야.” 하며 쓰다듬으면 마치 말귀를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 애잔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딸네 집 강아지들은 애완견이요, 우리 집 강아지들은 그냥 강아지네

    딸네 집의 애견들과 우리 집의 강아지들

    개 3마리에 강아지 4마리가 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큰딸과 같이 자는 벼락이, 금동이, 짱아는 딸네 집의 애견이구나 싶다. 그런가 하면 그 셋을 뺀 나머지 견공들, 삼순이와 럭키, 이쁜이와 금비는 우리 식구, 바로 나의 강아지들인 것처럼 그런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잠을 잘 때도, 또 밖으로 대소변을 보이러 나갈 때도 둘로 나뉘기 십상이다. 잠자리에 들 때면 벼락이와 금동이, 짱아는 큰아이 방으로 간다. 그런 강아지들이 큰딸이 집에 없으면 저희끼리 잠자리에 들기도 허전한지 내 방으로 온다. 물론 나와 같이 자는 우리 강아지들은 으레 내 방으로 오지만 말이다.


    잠자리는 그렇다 해도 겨울철로 접어들면서 볼일을 볼 때도 우리 집 강아지들은 베란다로, 딸네 집 애견들은 밖으로 나간다. 날씨가 추워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침잠 좀 더 자고 싶기도 하고, 때로는 춥다는 핑계로 일어나자마자 베란다 문부터 열어준다. 그러면 강아지들 역시 그곳에서 볼일을 다 봤지 싶으니 밖으로 나갈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런 나에 비해 큰딸아이는 매일 개들을 데리고 밖에 나간다. 어떤 날은 하루 두 번도 나간다. 벼락이는 베란다에서 소변을 보기는 해도 대변은 꼭 밖으로 나가야만 본다. 그런 벼락이 때문에도 밖으로 데리고 나가야 하기에 금동이와 짱아를 같이 데리고 나간다.


    밤늦게 밖으로 나가는 날에는 벼락이와 금동이와 짱아는 예쁘고 따뜻한 옷까지 입고 나들이를 한다. 우리 집 강아지들은 딸네 집의 애완견들을 물끄러미 보며 또 나를 쳐다본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무언의 말이다.


    우리 집 강아지들만 집에 남겨진 채 밖으로 나갔던 애견들이 들어오면 속이 상해 못 견디겠다는 듯 럭키는 그들을 물기라도 할 기세로 대든다. 밖으로 옷까지 입고 나갔다 들어온 금동이와 짱아를 보며, 새삼 딸네 집의 개들은 애완견이요, 우리집의 강아지들은 그냥 강아지들처럼 보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지난 몇 달 동안 우리 집 강아지들은 밖으로 나가 보지도 못했다. 옷가지도 걸쳐 보지도 않았다. 옷이 확실한 임자가 있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 입어도 상관없는데 밖으로 나가지 않으니 옷을 입힐 일이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견물들을 살펴보니 딸네 집의 강아지들과 우리 집의 강아지들이 다르게 보인다. 벼락이는 다른 종자이기도 하고 털이 길어 예외로 치더라도, 딸네 집 금동이와 짱아는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 같은 느낌이 드는 반면, 우리 집의 강아지들은 가난한 집의 아이들처럼 보인다. 그것은 다 같은 종자임에도 딸네 집 짱아와 금동이는 딸아이의 솜씨, 바리캉으로 밀어준 견물이요, 우리 집 강아지들은 솜씨 없는 내 손으로, 그것도 가위로 숭덩숭덩 잘라 준 털이 길어져 눈까지 덮고 있으니 가난한 집의 아이들처럼 보임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같은 환경에서 살고 있는 견공들임에도 운동을 하느냐(밖으로 나감), 안 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털도 도시 여인들처럼 가꾸고 다듬은 모습과, 농촌에서 살며 치장 한 번 제대로 해 보지 않은 모습처럼 보이니 딸네 집의 강아지들은 말 그대로 애완견이요, 우리 집 강아지들은 그냥 강아지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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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