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에즈리 도서관의 와루츠 씨
 
지은이 : 코교쿠 이즈키 (지은이), 김진환 (옮긴이)
출판사 : 알토북스
출판일 : 2024년 05월




  •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도서관을 찾아온 사람들, 이들은 와루츠 씨에게 어떤 이야기를 털어놓을까? 종이책이 귀중한 문화재가 되어버린 근미래. 책을 무료로 빌려주는 사립도서관을 배경으로 따뜻한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사에즈리 도서관의 와루츠 씨


    사에즈리 도서관의 고토 씨

    교사가 된 뒤로 10년 넘게 입어 온 낡은 팥죽색 체육복 차림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를 뒤로 묶고 뿔테 안경을 걸쳤다.


    딸과 보내기로 한 약속과 휴일을 내팽개치면서까지 오늘 중에 끝내야만 하는 업무가 있는데, 도무지 진척이 없다. 하지만 그 사실은 일단 덮어두고 카페인 향 섞인 숨을 토해내며 책상 위에 놓인 액자를 바라보았다. 순간 아무래도 딸에게 같이 쇼핑가자고 전화를 하는 게 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그럴 수 없었다.


    시계를 보니 마침 도서관 개관 시간이었다. 자신은 엄마 자격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코토는 자전거에 올라탔다. 녹이 슨 페달을 밟자 끼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사에즈리 도서관까지는 코토가 사는 집에서 자전거로 15분 정도 걸렸다. 지금 일하는 학교에 발령받아 왔을 때 동네를 둘러보다 가장 놀랐던 시설이었다. 도서관이라는 구시대적인 건물이 있을 줄이야. 그것도 구시대의 형태를 그대로 간직한 채로.


    코토의 집에도 몇 권의 책이 있기는 하다. 할아버지의 윗세대부터 물려내려 온 유산이자 직접 돈을 벌게 된 뒤로 악착같이 돈을 모아 수집한 귀중품이다. 그녀가 근무하는 학교에서도 도서실은 열쇠 하나까지 매우 엄중히 관리되었다.


    코토는 책이 좋았다. 할아버지는 커다란 백과사전 한 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 책이 너무너무 좋았다. 코토는 다다미 바닥에 엎드린 채 마음에 드는 항목을 공책에 옮겨 적는, 무척 내향적인 놀이를 즐기는 아이였다. 그 백과사전은 지금도 코토의 책상 위 잘 보이는 곳에 놓여 있다. 그 책을 보물에 비유한다면, 사에즈리 도서관은 정말이지 보물 창고였다.


    보물 창고 관리인의 이름은 와루츠 씨였다. 그녀가 자신보다 겨우 몇 살 아래라는 걸 알았을 때 코토는 기절초풍할 뻔했다. 게다가 밝고 친절하고 부지런해서 교육자이면서도 허점투성이인 코토에겐 무척 대단해 보였다.


    일요일의 도서관은 아침부터 성황이었다. 여기저기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코토는 조용한 도서관도 좋아하지만 사에즈리 도서관에 오는 사람들도 좋았다. 사람들에게 읽히는 책은 사료관에 전시된 책들과는 달리 살아 있는 느낌이 든다.


    늘 창가 소파에서 역사소설을 읽는 노인과 조금 덜렁거리는 회사원에게 인사를 한 뒤, 서가 사이를 걸어가는데 안쪽에서 갑자기 어린아이의 그림자가 툭 튀어나왔다.


    걸음을 멈추며 한걸음 물러나 부딪치기 직전에 아이의 어깨를 잡았다. 순간 코토는 깜짝 놀랐다. 아이의 피부색과 머리카락 색 때문이다. 어깨 길이로 다듬어진 머리카락은 금발이었는데, 같은 금발이라 해도 아까 본 오토바이 젊은이와는 전혀 다른 색조였다. 타고난 금발이었다. 머릿속 피부만 아니라 목덜미도 새하얬다. 아이는 열 살 정도 되어 보였다.


    “이브!”


    그때 등 뒤에서 변성기가 오지 않은, 남자아이 특유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머리카락과 피부 색깔이 같은, 비슷한 키의 남자아이가 뛰어왔다. 남자아이는 코토 앞에서 얼어 있는 여자아이의 팔을 꾹 잡아당기더니 자신의 등 뒤로 숨겨주었다. 코토는 그 모습을 기특하게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도서관에선 조용히 해야지.”


    두 아이는 경계하듯 입을 다문 채 코토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남자아이는 과학책을 소중히 끌어안고 있었다. 큼지막한 것이 무슨 입문서 같았는데, 아이한테는 조금 어렵겠다고 코토는 생각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 그러자 남자아이가 한 손엔 책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엔 자신과 닮은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도망치듯 서가 사이로 달려가 버렸다. 높은 서가 사이에 섞여들자 두 아이는 금세 보이지 않았다.


    사에즈리 도서관에는 이용자를 위해 소파 외에도 여기저기에 커다란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다. 코토는 그중 한 곳에 자리 잡고 앉았다.


    “이번엔 무슨 책을 찾으시나요?”


    와루츠 씨가 작지만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물었다.


    “모차르트.”

    “모차르트요?”


    와루츠 씨가 복창했다.


    “모차르트가 쓴 곡? 아니면 모차르트 음악의 역사적 의의? 아니면 모차르트 개인에 대해서요?”

    “전반적으로, 개요부터.”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종종걸음으로 테이블에서 멀어져간 와루츠 씨가 열 권 정도의 책을 끌어안고 돌아왔다. 걸린 시간은 불과 3분 정도였다.


    코토는 서고에서 꺼내온 책을 그대로 빌려 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일단 내용을 보고, 비슷한 내용의 책들을 좀 더 본 다음 빌려 갈 책을 정했다.


    코토가 사에즈리 도서관을 이용하는 이유는 순수하게 독서를 즐겨서만은 아니었다. 종이 페이지를 넘기며 단어를 머리에 집어넣고, 상상하고, 주변 글자도 함께 섞어 하나의 지식으로 소화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정확히 한 시간 뒤, 와루츠 씨는 이마의 땀을 닦는 시늉을 하며 푸념하듯 말했다.


    “데이터베이스도 한번 활용해 보세요.”


    와루츠 씨의 말이 지당했다. 데이터베이스에 검색어를 입력하면 알고 싶어 하는 답은 금세 나올 것이다. 지식의 집합체인 데이터베이스에서는 ‘누군가가 알고 있는 사실이라면 뭐든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아름답지 않다.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고 코토는 생각했다.


    “그야 그렇지만...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하면 딱 내가 검색한 내용만 알 수 있잖아요. 저는요, 와루츠 씨...”


    코토가 말했다.


    “내가 아는 것, 찾는 것, 내게 당장 필요한 것 말고 다른 것들도 알고 싶어요.”


    와루츠 씨는 놀란 듯 손을 멈췄다. 코토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었다.


    “이 시대의 교육은 전부 커리큘럼화되어 있잖아요. 불필요한 지식을 채워 넣을 공간이 없는 거죠. 하지만 교육에도 군살은 필요해요. 그렇지 않나요?”


    그 말에 와루츠 씨가 따뜻하게 웃었다.


    “코토는 정말 좋은 선생님일 것 같아요.”


    코토는 부모로서도, 선생님으로서도 자신이 어정쩡하다고 생각했다. 겸손이나 자기비하가 아니라 솔직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와루츠 씨는 또다시 웃으며 일축해버렸다.


    “이렇게 열심히 책 읽는 선생님은 좀처럼 찾기 어려울 거예요.”

    “그건 책이 좀처럼 없어서 그렇지 않을까요?”


    코토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쑥스러워서 얼버무리듯 덧붙였다.


    “확실히 학교에서 책을 읽고 있으면 학생들이 존경하는 눈빛으로 보긴 해요. 평소엔 얄밉게만 구는 녀석들인데. 그건 좀 좋아요.”

    “어머, 그럼 다음엔 학생들도 데려오세요.”


    와루츠 씨가 눈을 빛내며 말하자 코토가 말했다.


    “아이들에겐 아직 이른 것 같아요.”

    그렇다. 예를 들면 알코올이나 니코틴처럼 책도 적합한 나이가 있을 것이다. 책은 보물이니까 철저히 자물쇠를 채워 합당한 나이까지 기다리게 해야 한다. 코토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에요!”


    얼마나 빠르고 강렬한 반박인지 코토는 순간 멈칫했다. 도서관 안에서 삼가야 할 큰 목소리에 놀란 건 와루츠 씨 본인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죄송합니다.”


    와루츠 씨는 겸연쩍게 사과하더니 평소처럼 온화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 인생에서 책이 이른 때는 없어요.”


    그러고는 꺼내온 책을 정리해주며 코토에게 부드러운 미소로 인사했다.


    “그럼 좋은 독서 되시길.”


    모차르트의 교향곡이 들렸다. 코토는 번쩍 눈을 떴다. 시곗바늘은 어느새 정오를 가리키고 있었다. 일요일이라 새벽까지 일하다 책상에서 잠들어버린 모양이다.


    코토의 노화 억제 계획은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이번 일만 끝나면 밖에 많이 돌아다녀야 할 테니 반드시 돈을 들여 예뻐질 거라는 생각을 하며, 안경 자국이 남은 눈가를 비비고 오디오를 끈 뒤 근처에 놓아둔 휴대용 단말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먼 곳에 사는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딸은 일요일 내내 집순이 신세일 거라는 생각 때문인지 약속을 또 어긴 것에 대해 집요하게 따져댔다. 코토는 연신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딸의 태도가 누그러질 즈음 코토는 본론을 꺼냈다.


    “너 이제 중학교에 올라가지?”

    “응.”

    “책 사줄까?”

    “응?”


    딸이 단말기 너머에서 놀라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응, 책 말이야. 데이터 말고.”


    코토가 확인해주었다.


    “입학 선물로 책을 주고 싶어서. 어떤 책이 좋아?”

    입학 선물로 책이라니. 책은 최신 간행물이라 해도 상당히 고가라 중학생이 되는 아이 선물로는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다. 차라리 옷이나 단말기를 사주는 게 훨씬 싸고 유용할 것이다. 그런데도 코토는 책을 주고 싶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딸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책이 좋아.”

    “응?”


    이번엔 코토가 놀라며 되물었고, 딸이 다시 한번 확인해주었다.


    “엄마가 쓴 책이면 좋겠어.”


    코토가 눈을 깜빡거리며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자신의 백과사전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랬다. 이 책과 만난 덕분에 자신은 지금 여기에 있다. 일이 무엇보다 소중해서 엄마 노릇은 잘 못 하지만, 그래도 이게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그런 엄마가 딸에게 줄 수 있는 선물 중에 이보다 더 좋은 건 없겠다고 코토도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오늘도 사에즈리 도서관 대표이자 특별 보호 사서관인 와루츠 씨의 아침은 일찍 시작된다. 도서관 내의 설비를 점검하고 문제없이 전원이 들어오는지 확인한 다음 단말기를 켜서 야간 네트워크상의 대출 연장 신청을 승인한다. 단말기가 승인 작업을 하는 동안 책상에 앉아 무카페인 커피를 마시는 것이 와루츠 씨의 습관이다. 특히 와루츠 씨는 오늘 같은 일요일을 좋아했다. 도서 신문이 간행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여러 출판 소식을 모은 이 신문을 읽는 것이 와루츠 씨에겐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와루츠 씨는 커피잔을 입을 대며 도서 신문을 열었다. 올컬러로 되어 있는 건 전자 신문이라 가능한 일이다. 도서 신문 1면을 장식한 것은 어떤 작가의 최신작이 전자책뿐 아니라 종이책으로도 간행된다는 소식이었다.


    와루츠 씨는 전자 단말기 앞에서 감탄사를 내뱉었다. 전문서가 아닌 일반 서적, 그것도 대중에 널리 읽힐 목적으로 내놓는 신작 소설이 종이책의 형태로, 그것도 단순한 기념품이 아닌 상품으로 발매까지 되는 경우는 정말 흔치 않았다. 최근에 중요한 문학상을 받은 작가가 수상 이후 내놓는 첫 작품이라고 했다. 기사에는 책을 들고 있는 작가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굵은 웨이브가 들어간, 긴 머리의 기품 있고 아름다운 코토 씨였다.


    신작은 18세기 유럽을 무대로 한 음악 소설이며, 궁정 음악가들의 재능과 좌절, 그리고 삶을 그려낸 픽션이지만 정밀한 시대 고증에 기반한 스토리와 인간애가 매력이라고 적혀 있었다. 인터뷰에서 코토는 특수한 간행 형태에 대해서 이렇게 언급했다.


    “중학교에 진학하는 딸을 위해 실체가 남는 형태로 만들고 싶어서 이런 간행 방식을 택했어요. 제가 꼭 그렇게 하고 싶다고 출판사에 부탁했어요. 아직 딸아이에겐 이를지도 모르지만, 물리적인 형태가 있는 책을 손에 건네줄 수 있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와루츠 씨는 인터뷰를 여러 번 반복해서 읽으며, 기사에 실린 모습과 체육복을 입은 코토의 모습을 겹쳐 보았다.


    “세상에.”


    와루츠 씨가 중얼거리며 커피잔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출납용 단말기를 켰다.


    “우리 도서관에도 한 권 들여놔야겠네.”


    연간 도서관 예산과 구입 예정 목록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사에즈리 도서관 대표이자 특별 보호 사서관인 와루츠 씨의 아침은 일찍 시작된다.

    느긋하게 있을 시간은 없다.

    도서관에는 매일 누군가가 찾아오니까.

    혼이 담긴, 살아 있는 책을 찾아서.


    * *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