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무녀 봄 : 청동방울편
 
지은이 : 레이먼드 조 (지은이), 김준호 (그림)
출판사 : 안타레스
출판일 : 2022년 08월




  • 귀신 잡는 사회성 제로 여중생 무녀, 귀신 보는 고독 끝판왕 강력계 형사, 똘기 충만 왕따 또라이 아싸 탐정단. 의문투성이인 실험실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이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데...


    소녀무녀 봄: 청동방울편


    눈 뜬 밤

    산청학원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소희와 예하는 단짝 친구가 으레 그렇듯 학교에서도 함께였고 방과 후에도 같은 학원에 붙어 다녔다. 둘은 고입선발고사 준비반 강의실 뒤편에서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예하가 말했다.


    “전학생 얘기 들었습니까?”

    “4반에 한복 입고 왔다는 애?”


    소희도 소문은 들었다. 김봄이라고 했던가. 예하를 능가할 또라이의 등장이었다. 한복도 모자라 학교에 라이터와 채찍을 가져오다니. 소지품 검사를 하던 영어 투도 채찍을 발견한 순간 충격에 빠져 압수도 못 했단다.


    “살인사건 직후에 전학 온 미지의 소녀. 뭔가 연관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까?”


    학교에서 벌어진 연속적인 사건에 예하는 들떠 보이기까지 했다. 사실 살인사건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소희 역시 드디어 탐정에게 어울리는 일이 생겼다고 설렜었다. 더욱이 고전 추리소설의 단골 소재인 밀실 살인이었다. 뉴스에서 미궁에 빠진 종문중학교 실험실 살인사건이 보도될 때였다.


    “그나저나 경찰이 빨리 잡아야 할 텐데. 범인을 밝히지 못하면 죽은 채영이가 너무 불쌍하잖아.”


    그 이름을 듣자 소희는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기분이 들었다. 송채영. 겨울비가 내리던 예비소집일 교실에서 봤던 머리 긴 아이. 송채영은 다른 반 아이였다. 소희는 기억을 되새겼다.


    ‘혹시 그날 내가 착각하고 반을 잘못 찾아갔나? 아냐, 분명 그 교실에는 내가 놓고 온 책가방이 있었어. 그리고 그 아이는 마치....


    소희 자신을 기다리는 듯했다. 그날 채영은 소희에게 말했다. 주문을 알려주면 소희가 미워하는 사람을 죽여주겠다고.


    이제는 영원히 알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 뒤에 송채영은 학교 실험실에서 독살당했다.


    같은 시각. 이형사가 종문중학교 교문으로 들어섰다. 경비실에 앉아서 책을 읽던 보안관이 인사한 뒤 교문을 열었다.


    이형사는 보안관에게 받은 열쇠로 실험실 문을 열었다. 손전등을 비추자 비닐을 뒤집어쓴 인체모형이 으스스하게 방문자를 맞이했다. 그 뒤로 비커와 현미경 같은 실험 도구와 병에 담긴 파충류 표본 등이 선반 위에 전시되어 있었다. 손전등 불빛이 두 번째 실험대 쪽으로 이동했다. 저곳에서 송채영 학생이 살해당했다.


    그리고 다시 손전등 불빛을 복도 여기저기에 비추었다. 그때였다.


    “말해!”


    앞쪽 교실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이형사는 발소리를 죽이고 그 교실로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미닫이문을 밀었다. 그런데 끼익 소리만 날 뿐 문은 밀리지 않았다. 어떤 물체가 문을 가로막는 게 아니라, 불가사의한 힘이 문에 저항하는 느낌이었다.


    이형사는 있는 힘을 다해 힘껏 문을 밀었다. 마침내 큰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이윽고 싸늘하게 식은 교실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손전등 불빛이 서서히 교실 뒤편으로 이동했다. 점점 길어지는 그림자가 보였다. 교실 뒤편엔 두 명의 소녀가 서 있었다. 검은색 교복을 입은 아이가 궁지에 몰려 울먹거렸고, 한복을 입은 아이는 채찍을 휘둘렀다.


    “어디서 거짓부렁이야! 어딨어? 말해!”


    채찍이 공기를 가르며 검은색 교복을 입은 소녀를 매섭게 때렸다. 이형사가 한숨을 내뱉자 한복을 입은 소녀가 뒤를 돌아봤다. 소녀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이형사와 눈이 마주친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시 울먹이는 검정 교복 소녀를 채찍질했다. 이형사는 모질게 채찍질 당하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종문중학교 교복은 갈색이었다. 그런데 구석에 몰린 소녀의 교복은 검은색이었다. 그리고 누가 봐도 시대에 뒤처지는 디자인이었다.


    손전등이 검은색 교복을 입은 소녀를 여러 방향으로 비쳤다. 그 소녀는 그림자가 없었다.



    타오르는 일기

    종문 자매 여러분, 새로운 시대 어떻게 보내셨나요. 모두 무사해서 참 다행이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면 마음 밑바닥부터 벅찬 감동이 차오릅니다. 수고했어, 올해도.


    21세기 첫해의 마지막 달, 저는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다름 아닌 우리 종문여중 괴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981년. 종문여중에 한 선배가 있었습니다. 이름 최승희. 이 선배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일화가 있습니다. 특히 석암중학교 남학생과의 드라마 같은 로맨스는 오랫동안 전해지고 있습니다. 참고로 당시 선배는 3학년이었고 남학생은 2학년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연상연하 커플이 흔하지만, 최승희 선배는 여러모로 시대를 앞서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비극의 씨앗은 집안의 반대로 싹트게 됩니다. 남학생 집에서 교제를 반대했던 이유는 둘의 어린 나이도 나이였지만, 무엇보다 여학생 쪽 집안 내력 때문이었습니다. 최승희 선배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만 계셨는데, 무속인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당시 세상은 무속인을 정상적인 생활에서 탈락한 인간들로 바라보았습니다. 어쩌면 고양이에 대한 인식과 비슷했을지도 모릅니다. 화를 입을까 봐 두려워 괴롭히지는 못하지만 불쾌하고, 되도록 멀리 떨어지고 싶은 존재. 아, 고양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꿀밤을 때려서라도 사람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얼마 뒤,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던 어린 연인들은 결심합니다. 네. 바로 로미오와 줄리엣 사건입니다. 두 사람은 종문여중 음악실에서 동반자살을 감행했습니다. 사실 정말로 죽으려 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비극으로 끝을 맺게 되었습니다.


    음악실에서 둘은 서로의 손목에 붉은 실을 묶어 연결한 다음 수면제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남학생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최승희 선배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습니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두 사람은 수면제를 각자 다섯 알밖에 먹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로는 사람이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동반자살 시도는 세상을 향한 경고이자 자신들의 사랑을 인정해달라는 투쟁이었던 셈입니다. 최승희 선배의 죽음은 특이 체질에 의한 약물 알레르기라는 이상한 결론으로 그 사인이 밝혀졌지만, 어쨌든 안타깝게도 두 사람의 연극은 소녀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죽은 최승희 선배의 저주 때문인지 몰라도, 남학생의 힘 있고 부유했던 집안은 급격히 몰락했습니다. 갖가지 사고와 병치레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용하다는 무당을 불러 굿을 해도 아무 소용없었습니다. 오히려 무당이 살을 맞아 피를 토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힐 즈음 종문여중에서 저주의 일기장이 발견되었습니다.


    낡은 일기장엔 지금까지 소개한 최승희 선배의 드라마 같은 사연이 담겨 있었습니다.


    저주의 일기장은 뜬소문처럼 사라졌다가 잊힐 때쯤 다시 발견됩니다. 일기장이 발견될 때마다 종문여중에서 사건이 벌어집니다.


    9년 전 저주의 일기장을 다시 발견한 어떤 선배가 마지막 장을 찢어냈다고 합니다. 아무도 저주를 걸 수 없게 말입니다. 그렇지만 좀 더 용기를 냈다면 어땠을까요. 차라리 그때 일기장을 불태워버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저주의 주문이 쓰인 페이지는 사라졌지만, 사실 그 주문은 구전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종문 자매 중에서 그 주문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형사가 마지막 문장을 읽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메일로 보내드린 글 다 읽으셨죠?”


    이형사가 핸드폰을 귀에 대자 여자아이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목소리만 들어도 안다. 선녀집에서 만난 권소희 학생.


    “만약 저주가 진짜라면, 채영이가 미워한 사람이 범인일까요?”


    이형사는 아스피린이 용해된 물을 마셨다.


    “아니면 반대로, 채영이를 미워한 사람이 범인일까요?”

    “혹시 10년마다 한 명씩 죽었다는 사실을 다른 학생들도 알고 있니?”

    “네? 뭐라고요?”


    소희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그 순간 이형사는 엄청난 두통을 느꼈다. 천장이 보일 정도로 최대한 뒤로 고개를 젖혔다. 괜한 이야기를 했다. 선녀집에서 탐정단이라는 아이들이 만든 학생 데이터베이스를 봤을 때 아이들을 너무 과소평가했다고 자책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반대로 과대평가한 게 후회됐다. 쓸데없는 말을 하고 말았다. 중문중학교 10년 주기 사망 사건은 아직 상부에도 보고하지 않았다.



    파국의 장</P>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어느새 시끄러운 폭우로 바뀌었다. 굵은 빗방울이 쉴 새 없이 교실 창문을 때렸다. 어둑한 학교 복도를 걷던 소희와 예하가 번쩍 번개가 치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 팔짱을 꼈다.


    오늘 봄은 탐정단을 긴급 소집했다. 혹시 실험실 살인사건의 단서를 찾아낸 걸까? 잠시 그런 기대도 해봤지만 소희는 고개를 저었다. 봄은 한 번도 사건 해결에 집중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방과 후 학교 교실에서 화투나 치자고 부른 건 아닐 테고, 예측 불가능한 또라이의 마음을 누가 알까?


    소희는 자기 반인 3학년 2반 교실로 향했다. 천둥이 울리자 복도 창문이 흔들렸다.


    히히.


    위에서 나는 소리였다.


    소희는 애써 진정하려고 했지만, 다리는 제멋대로 후들거렸다. 또 추워졌다. 느낌이 아니었다. 숨을 쉴 때마다 허연 입김이 새어나왔다. 게다가 자신의 의지와 반대로 고개가 천천히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마치 낚싯줄로 물고기를 끌어 올리듯, 어떤 힘이 소희의 턱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얼굴이 사색이 된 소희의 눈에 신발이 보였다. 허연 입김이 더 커졌다. 고개가 더 올라갔다. 두 다리가 보였고, 그 위에 하얀 치마를 입은 몸이 보였다. 소희의 고개가 획 목이 아플 정도로 끝까지 제쳐졌다. 눈을 감고 싶어도 소용없었다. 결국 보았다. 사물함 위에 한 소녀가 무릎 위로 양손을 모은 채 걸터앉아 있었다.


    소녀의 머리가 울면서 애원했다. 어어어어엉! 울음소리가 고막을 찢을 것 같았다. 어어어어어어엉! 소희는 춥고, 귀가 아프고, 눈앞이 어지러워 숨이 막히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비틀거리던 소희가 있는 힘을 다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비명을 들은 봄과 예하가 헐레벌떡 2반으로 달려왔다. 아이들이 오자 바닥에 주저앉은 소희가 힘없는 손가락으로 사물함을 가리켰다. 예하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봄은 사물함 위에 걸터앉아 있은 소녀의 목 잘린 몸통과 그 밑에서 울고 있는 머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사물함에 다가가 바닥에 떨어진 노트를 들어 올렸다.

    “저주의 일기장....”


    공포에 질린 소희가 봄을 향해 말했다. 그 순간 왜 그렇게 단정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화살이 날아와 머릿속에 박히듯 그것이 저주의 일기장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다른 차원의 감각이었다.


    봄이 일기장을 빠르게 넘기며 훑어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연애운이 승한 날이라 오늘을 택했더니, 사람의 길일이 아니라 그것들 길일이었구나. 사달이 나는 날이었어.”


    빗소리로 요란한 불 꺼진 복도에 한 줄기 빛이 위태롭게 앞을 밝히며 나아갔다. 겁에 질린 소희와 예하가 핸드폰 플래시를 비추며 조심스레 복도를 걸었다. 밤이라서 이런가? 소희는 복도가 아니라 물방울이 떨어지는 동굴 속을 야간탐험하는 기분이 들었다. 학교를 빠져나가기 위해 계단으로 걸어가던 두 사람이 멈칫했다. 계단 아래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인 구둣발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소희의 핸드폰 플래시가 계단을 비췄다. 대답 대신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만 선명하게 들렸다. 또각. 또각. 또각. 핏기가 가신 얼굴로 계단 아래를 바라보던 탐정단은 구둣발 소리의 주인공이 나타나자 동시에 입을 벌렸다.


    “유진아!”


    플래시 불빛이 유진의 얼굴을 비췄다. 유진이 불빛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무표정한 얼굴이 낯설고 섬뜩했다. 탐정단이 천천히 유진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였다.


    또 다른 발소리가 들렸다. 유진이 혼자가 아니었나?


    유진의 등 뒤에 검은 실루엣이 나타났다. 그리고 무언가가 번쩍였다. 번개는 아니었다. 유진 뒤에 선 남자가 칼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칼 버려!”


    깜짝 놀란 소희가 뒤를 돌아봤다. 뒤편 계단으로 올라온 이형사가 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제야 유진이 상황을 파악했는지 등 뒤를 확인했다. 칼을 본 유진이 비명을 질렀다. 유진이 탐정단을 지나 이형사에게 달려갔다. 칼을 든 남자는 총이 무섭지 않은지 기계적인 걸음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겁에 질린 유진이 이형사 뒤에 숨었다.


    소희는 예하의 손을 잡고 뒷걸음치며 플래시 불빛을 올렸다. 칼은 든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늘 선하기만 하던 보안관의 눈매가 풀려 있었다.


    “권소희! 주예하! 빨리 내 뒤로 와!”


    얼굴이 눈물범벅이 된 소희가 울먹이며 말했다. 예하도 마찬가지였다. 극도로 긴장한 상태에서 몸이 경직될 수 있다지만, 두 아이가 저렇게 꼼짝하지 못하고 얼음처럼 서 있는 모습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때 이형사의 옷깃을 잡고 있던 유진의 손이 풀렸다.


    ‘그런데 이 아이는 어떻게 이리도 침착하지?


    그런 의문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이었다.


    푹!


    빗소리를 꿰뚫는 기분 나쁜 소리가 이형사의 귀에 또렷이 들렸다. 그 소리와 함께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옆구리가 너무 뜨거웠다.


    유진이 칼을 쥔 손으로 입가를 닦았다. 입 주위가 피에로처럼 빨갛게 칠해졌다.


    보안관의 발소리가 소희를 지나쳤다. 마치 너희들은 보이지 않는다는 듯. 마치 조종당하는 로봇처럼.


    자석의 음극과 양극처럼, 유진과 보안관이 서로 끌리듯 권총이 떨어진 자리를 중심으로 가까워지다가 마침내 만났다. 유진의 작은 손이 보안관의 큰 손에 묵직한 권총을 올려놓았다.


    “뭐해, 민철아. 끝내.”


    보안관이 무표정하게 이형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유진이 교복 상의 주머니에서 노란 부적을 꺼냈다. 유진이 부적을 벽에 붙이자 우우우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커튼이 쳐지듯 신비스러운 붉은 빛을 내는 장막이 복도에 쳐졌다.


    유진이 쳐놓은 사악한 결계 안에서 맥박이 뛰는 존재는 귀에 짓눌린 소희와 예하 그리고 자유자재로 귀를 부리고 있는 유진, 셋 뿐이었다.


    힘겹게 호흡하면서도 소희가 말을 이어갔다.


    “일기장의 저주는... 미워하는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었어... 영... 영혼을 바꾸는 거였어. 그래서... 그래서....”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며 소희가 외쳤다.


    “두 사람이 필요했던 거야!”


    유진이 무릎을 굽히고 소희의 입에 귀를 가까이 댔다. 어항에서 뜰채로 들어 올린 금붕어처럼 소희가 입을 뻐끔거렸다.


    “음악실에서... 동반자살 소동 벌였을 때... 갈아탔지...?”


    유진이 호기심 어린 눈빛을 짓더니 소희의 상체를 일으켜 세워 벽에 기댔다.


    “음악실에서... 넌... 수면제를 먹지 않았어. 그 남학생과... 수면제를 나눠 먹었지만... 넌... 약을 삼키지 않았어...”


    벽에 기대서인지 한결 숨쉬기가 편해졌다. 소희가 추리를 이어갔다.


    “음악실에서 남학생이 잠든 걸 확인한 넌... 학교 어딘가로 갔어. 아마 동아리실이나 교실이었겠지. 그곳에... 네가 불러낸 한 여학생이 있었을 거야. 마음에 상처를 입은 아이를... 미리 현혹했겠지. 상처 준 사람을... 주술로 죽일 수 있다고 했겠지. 그 여학생은 음악실 상황은... 몰랐고....”

    “오, 흥미로운걸?”

    “넌 여학생과 마주 앉아 의식을 진행했어. 세 번의 주문을 모두 외우고 나자 여학생과 너의 영혼이 바뀌었지. 네 몸으로 들어간 여학생이 어리둥절한 사이... 넌 미리 준비해둔 베개 같은 걸 이용해서 네 예전 몸인 최승희의 입을 틀어막아 죽였어. 그렇게 여학생을 죽인 거지.”


    초현실적인 현상을 믿는 순간 탐정은 더 이상 탐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토록 부인했던 것들을 인정한 순간 소희는 진짜 탐정이 되었다. 소희가 온몸으로 겪고 있는 이 상황은 명백한 현실이었다. 합리적 사유를 가로막던 벽이 사라지자 추리력이 팽창했다. 초현실적 세계를 기꺼이 받아들이자 오히려 소희의 이성은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카프카의 도끼처럼 날카로워졌다.


    “넌 질식해 죽은 여학생, 그러니까 네 예전 몸을 업고 음악실로 돌아갔어. 네가 빼앗은 여학생의 몸이 흔적을 남기면 안 되니까, 그건 신발을 바꿔 신든 알아서 했겠지. 음악실에 도착한 너는 너의 빈껍데기일 뿐인 최승희의 몸을 남학생 옆에 눕힌 뒤 붉은 실로 남학생의 손목과 최승희의 손목을 묶었어. 다음 날 사고 현장을 발견한 사람들은 붉은 실에 주목했지. 최승희가 무녀의 딸인 걸 알고 있는 사람들은 붉은 실에 여러 의미를 부여했어. 사랑의 연결이라든지 다음 생에서는 행복해지자는 바람이라든지. 결국 그 일은 로미오와 줄리엣 사건으로 포장되었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비극. 애틋한 순애보. 대중이 좋아하는 소재지. 또 당시엔 과학수사가 발달하지 않았으니 자연스럽게 최승희의 사인을 약물 알레르기라고 결론 내렸어. 그렇지만 붉은 실은 그런 감성적인 장치가 아니었어. 무속적인 의미도 아니었고. 그냥 속임수일 뿐이었지. 네가 이동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우우우우웅 소리 내던 결계에서 갑자기 부욱 하고 북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견고했던 장막이 균열을 일으키며 표면에 세로로 선이 그어지자, 찢어진 커튼처럼 흐물흐물 바람에 흔들리며 붉은빛을 깜박였다. 펄럭이는 장막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고장 난 네온사인처럼 결계가 깜박이며 제멋대로 붉은빛을 내다 말았다 하며 복도에 어지러운 빛을 드리웠다. 번개가 치자 한복을 입은 봄의 그림자가 여러 방향으로 갈라졌다. 천둥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당황해하던 유진이 이형사를 찔렀던 칼을 꺼내 들고 곧장 봄을 향해 달려들었다.


    촥!


    무시무시한 채찍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칼을 들고 멈춰선 유진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자기 얼굴을 만졌다. 채찍을 맞은 뺨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봄이 휘두르는 채찍이 습기로 가득 찬 복도 허공에 어지러운 곡선을 그릴 때마다 유진 몸에서 피 안개가 퍼졌다. 매서운 채찍이 교복을 찢어내며 생채기를 냈지만, 유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했다. 봄은 이번에는 유진의 얼굴을 향해 풋 비웃음을 날리고는 채찍을 내던졌다. 그리고 한복 옆에 매달아둔 복주머니에서 청동방울을 꺼냈다.


    따랑따랑. 따라라라랑.


    그 순간 인간이 지를 수 없는 기괴한 비명이 유진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복도 창문이 양쪽으로 술렁이며 왜곡된 사물을 비추더니, 수십 개의 유리창에 쩍 갈라졌다.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간 금이 처장과 벽으로 퍼져나갔다.


    정신은 사나웠지만 따라라라랑 따라라라랑 봄의 방울이 흔들릴수록 소희는 몸이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점차 근육에 힘이 붙고 팔다리가 자유로웠다. 예하를 향해 기어가던 소희는 어느새 일어서서 손을 맞잡고 친구를 일으켜 세웠다. 전교 왕따였던 두 소녀가 서로 어깨동무를 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커다란 붓으로 쓴 사람 인자 모양이 되어 복도에 드리워졌다.


    * *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