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새워 책 읽는 재미, 책에 몰입한 사람만이 아는 즐거움을 나누고 싶어서 편성준 작가가 자신의 독서 노트를 공개했다. 자타공인 책 덕후이자 ‘놀듯이’ 책을 읽고 또 기록하는 작가의 독서 노트 속 수많은 책들 중 ‘읽는 기쁨’에 취하게 만든 책들을 고르고 고른 것이다. ‘작가다움’을 과시하기 위해, 구색을 갖추기 위해 어렵고 무겁고 우아한 책을 일부러 골라 넣는 수고는 하지 않았다. 책의 방향은 순전히 ‘읽는 즐거움’을 향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몰입의 즐거움을 줄 수 있을, 진심으로 빠져들었던 책들 위주로 고르고 보니 죄다 소설, 시, 에세이, 그림책 등 ‘거짓말을 통해 진실을 얘기하는’ 스토리텔링을 깔고 있는 책들이다.
‘살짝 웃기는데 눈물도 나는’, ‘밤새워 읽은 책이 뭐였어’, ‘몇 번 읽어도 좋은 얇은 책’, ‘제목보다 내용이 좋은 소설’ 등 위트 있는 제목으로 17개의 카테고리를 만들고 각 카테고리 별로 3권의 책을 골라주었다. 토마 귄지스의 「암소」, 조지수의 『나스타샤』 같은 ‘숨은 명작’은 물론 다시 읽어도 재밌는 노벨 문학상 작품들, ‘필독서’ 라는 이름이 오히려 지루하게 느껴지는 너무 재밌는 걸작 등 저자를 사로잡은 독서 목록들은 목차를 읽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책 추천의 이유’를 짤막한 글로 소개해줬는데 이 글만 봐도 편성준식 B급 감성과 특유의 위트, 자신감의 표현이 보인다.
■ 저자 편성준
MBC애드컴, TBWA/Korea 등의 광고회사에서 20년 넘게 카피라이터로 근무했다. 광고 카피보다 ‘재미있는 글’을 쓰고 싶어 퇴사 후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 〈살짝 웃기는 글이 잘 쓴 글입니다〉 등의 책을 출간하고 전업 작가가 되었다. 서울시민대학에서 글쓰기 강연자로 활동하며 한국일보, 국민일보, 출판 매거진 《기획회의》 등에 칼럼을 연재 중이고 ‘소행성 책 쓰기 워크숍’을 운영하고 있다.
■ 차례
프롤로그 당신에게 꼭 소개하고 싶은 책만 골랐습니다 9
1 이 책에 끌린 이유는 따로 있다 14
황정은 『일기』
얀 마텔 『포르투갈의 높은 산』
레이먼드 카버 「별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2 너무 웃기는데 살짝 눈물도 나는 26
정지아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
니노미야 토모코 『음주가무 연구소』
어니스트 헤밍웨이 『깨끗하고 밝은 곳』
3 밤새워 읽은 책이 뭐였어 40
김탁환 『노서아가비』
김언수 『뜨거운 피』
스티븐 킹 『빌리 서머스 1,2』
4 다시 봐도 재밌네, 노벨 문학상 54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염소의 축제』
가즈오 이시구로 『나를 보내지 마』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
5 나는 왜 여성 작가들에 끌리는가 68
김혼비 『다정소감』
유이월 『찬란한 타인들』
이주혜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
6 시를 몰라도 시를 쓰고 싶게 만드는 82
박연준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마야 리 랑그바드 『그 여자는 화가 난다』
신철규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7 남의 리뷰를 너무 믿으면 안 되는 이유 94
무라카미 하루키 「토니 타키타니」
아사다 지로 「수국꽃 정사」
필립 K. 딕 「사기꾼 로봇」
8 우리는 왜 남의 삶이 부러울까 1 06
앨리스 먼로 「코리」
부희령 「구름해석전문가」
배명훈 「안녕! 인공존재」
9 SF도 입심 좋은 작가가 더 좋아 118
존 스칼지 『노인의 전쟁』
켄 리우 『종이동물원』
설재인 『너와 막걸리를 마신다면』
10 내 마음속에서 일등을 했던 소설들 132
권여선 『안녕 주정뱅이』
이화경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한강 『소년이 온다』
11 이런 그림책은 모두를 기쁘게 하지 146
그랜트 스나이더 『책 좀 빌려줄래?』
미야자와 겐지 『비에도 지지 않고』
다비드 칼리 『4998 친구』
12 뒤늦게 내게 온 숨은 걸작 158
조지수 『나스타샤』
김영탁 『곰탕』
토마 귄지그 「암소」
13 필독서라는 이름은 붙이기 싫은 책 174
알베르 카뮈 『이방인』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필립 로스 『미국의 목가 1,2』
14 제목보다 내용이 좋은 소설 188
최은영 「씬짜오, 씬짜오」
앤드루 포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조선희 『세 여자』
15 몇 번 읽어도 좋은 얇은 책 202
이민경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사노 요코 『죽는 게 뭐라고』
진민영 『내향인입니다』
16 영화감독에겐 늘 좋은 스토리가 필요하다 216
스티븐 킹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
마거릿 애트우드 『시녀 이야기』
기욤 뮈소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17 사실은 친절한 글쓰기 선생들 230
이성복 『무한화서』
로버트 맥기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로저 로젠블랫 『하버드대 까칠교수님의 글쓰기 수업』
에필로그 지금 읽고 싶은 책을 먼저 읽으십시오 244
편성준 작가의 특유의 위트가 가미된 유쾌한 독서 노트를 소개합니다. 범위가 편파적이더라도 작가가 진심으로 좋았던, 그래서 버릴 수 없었던, ‘읽는 기쁨’에 취하게 만든 책들과 만나보세요.
읽는 기쁨
이 책에 끌린 이유는 따로 있다
이 책에 끌린 이유는 따로 있었다
황정은 『일기』(창비, 2021)
작가들이 뽑은 ‘그 해에 가장 잘 쓴 소설에 연거푸 선정될 정도로 소설을 잘 쓰는 황정은의 작품을 꼽으며 기껏 에세이라니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리고 나는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라는 소설을 무척 좋아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내 마음을 가장 크게 움직인 황정은의 책은 『일기』였으니까. 작가 자신도 에세이집을 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하니 그에게 에세이를 써보라고 제안한 사람이 고마워진다.
『일기』는 황 작가가 경기 파주로 이사한 뒤 코로나19 팬데믹을 맞은 상황에서 시작된다. 코로나19 확진자들의 동선이 밝혀지는 뉴스를 보고 들으며 집에서만 머물던 황정은은 자신이 선이 아니라 점처럼 존재했다고 자조하면서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의 노력에 감동한다. 누군가의 애쓰는 삶이 멀리 떨어진 누군가를 구한다는 것이다. 2020년 4월 코로나19 상황을 보내는 그가 경의중앙선의 새벽 다섯 시 이십팔 분에 누군가를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나의 무사함은 누군가의 분투를 대가로 치르고 받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라고 그는 쓴다.
하지만 내가 이 책에 끌린 것은 친부모와 더 이상 가깝게 지내지 않는다는 황정은에게 “그래도 가족인데”라고 던진 누군가의 말을 듣고 침착하게 “그래요. 그게 무슨 말인지 나도 압니다”라고 대답한 구절 때문이었다. 의절을 당한 작가의 부모는 지금도 자식들이 자신들의 분노와 불행에 휩쓸리기를 바라고 있지만 황정은과 그 자매들은 온몸으로 그걸 거부하고 있다. 여기서 “그래도 부모이고 가족인데”라는 말은 아무런 입장이 될 수 없고, 그것은 의견도 생각도 마음도 아니라고 여긴다는 황정은의 태도는 중요하고도 의미심장하다. 누군가를 죽음으로 등 떠밀 수도 있는 그런 말은 상투적이라 해롭다는 것이다.
아울러 황정은은 자신이 과거에 일하던 일터에서 부모의 폭력을 피하느라 주민등록이 말소된 상태에서 지내야 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주민센터만 방문해도 자식이 사는 곳을 간단히 알아낼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인데, 그런 약점을 이용해 월급을 적게 주고 퇴직금도 챙겨주지 않는 고용주들의 행태는 더 치사하고 잔인하다. 물론 작가가 일곱 살 때 나이 많은 사촌에게 당했던 성폭력 경험은 더 기가 막히고 화가 난다.
이 책에 그렇게 심각한 얘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양쪽 맞추기로 글을 쓰다가 왼쪽 맞추기로 쓰는 방법을 바꾸어본 이야기라든지, 책을 너무 아껴서 마음에 드는 문장이 실린 페이지를 표시하려 포스트잇 플래그를 사용하던 황정은이 지금은 페이지마다 연필로 줄을 박박 그으면서 ‘나는 전에 이걸 참을 수 없었지라고 생각하는 귀여운 장면도 수두룩하다. 이런 건 소설에서는 좀처럼 읽을 수 없는 작가의 세세한 면 아닌가. 그러니 어서 이 책을 사서 읽으시기 바란다. 이 에세이집을 읽고 나면 그가 쓴 「百의 그림자』나 『연년세세」 같은 소설이 읽고 싶어질 것이다. 무엇보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고 다독여 주는 황정은 작가의 목소리가 들릴 것이다. 나는 그 목소리에 많은 위로를 받았는데 아마 당신도 그럴 것이다. 우리에겐 늘 위로가 필요하니까.
밤새워 읽은 책이 뭐였어
밤에 읽기 시작하면 큰일 난다
스티븐 킹 『빌리 서머스 1,2』(황금가지, 2022)
영화 평론가 오동진이 지하철에서 이 책을 읽다가 눈물을 홀렸다고 어딘가에 쓴 글을 읽고 얼른 서점으로 달려가 『빌리 서머스 1, 2』 두 권을 한꺼번에 샀다. 스티븐 킹의 신작이라면 빼 놓지 않고 읽는 편이니 이 소설이 궁금한 건 당연했다. 그는 전 세계에서 소설을 가장 많이 판매한 작가 중 한 사람이고 또 그가 쓴 소설은 거의 다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있으니 나중을 위해서라도 ‘원작 소설을 먼저 영접하는 게 열성 팬으로서의 자세라 생각했다.
정말 나쁜 놈들만 골라서 죽이는 특급 저격수 빌리 서머스의 마지막 임무에 얽힌 이야기를 다룬 이 소설은 시종일관 흥미진진했다. 범죄자를 다룬 모든 소설과 영화가 그러하듯 ‘이번 일만 마치면 이 바닥을 뜬다는 주인공의 바람이 언제나 물거품이 된다는 것을 스티븐 킹은 주인공의 입을 통해 언급한다. 이 법칙엔 예외가 없는 듯 소설가인 척하며 동네 사람들 삶에 천천히 스며들던 빌리의 마지막 암살 임무도 처음엔 단순한 것 같았지만 날이 갈수록 일이 꼬이고 계획이 자꾸 수정된다.
그런데 엄혹한 킬러의 이야기이면서도 폭력적이거나 잔인하기는커녕 뒤로 갈수록 소설의 흐름이 정의롭고 따뜻해지는 건 이 소설만의 장점이다. 더구나 빌리는 에밀 졸라 등 유명한 소설가들의 작품을 암송할 정도로 지적인 인물이지만 청부 살인을 위해 시종일관 멍청한 표정으로 일관하는 영악한 인물이 라는 것도 흥미로운 캐릭터 설정이다. 집에 혼자 있을 때 빌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써보면서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고민한다. 그런데 그 과정이 그대로 스티븐 킹의 글쓰기 강연이 된다. 소설가의 창작 과정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게 이 소설의 보너스 같은 부분이다.
특히 2부에서 앨리스의 복수를 위해 세 명의 청년을 위협하는 장면은 너무나 아이디어가 치밀하고 통쾌하기조차 하다(직접 읽을 당신을 위해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겠다). 이미 엄청난 부를 축적한데다가 ‘이야기의 제왕이라는 명예까지 얻은 스티븐 킹은 왜 아직도 힘들게 소설을 쓰고 있는 걸까. 나는 작년에 우리 동네에 있는 아리랑도서관에서 그의 소설 『스탠드 바이 미』와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을 뒤늦게 빌려 읽고는 깜짝 놀랐다. 영화로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였는데도 소설이 두 배 이상 재밌었기 때문이다. 그는 잠깐 등장하는 인물 하나도 허투루 지나가는 법이 없었다. 정말 그 사람을 오랫동안 보고 쓴 것처럼 집안 이야기나 과거사, 성격상의 특징 등을 작품 속에 세세하게 박아 넣었다. 잘 쓰기도 하지만 소설 쓰기를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놀라운 건 수십 년간 공포와 판타지 소설의 대가였던 그가 ‘빌 호지스 시리즈를 통해 돌연 탐정 소설가로 변신했다는 사실이다. 그 사이에 케네디 암살을 다룬 타임 루프 소설 『11/22/63』을 쓰기도 했다. 인기 절정의 소설가일 때 치명적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했던 스티븐 킹은 70대 중반인 지금도 계속해서 새로운 장르의 아이디어를 내고 이야기 쓰는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번 소설 역시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흥미진진하면서도 따뜻한 스토리텔링을 원한다면 스티븐 킹의 『빌리 서머스』를 읽으시라. 다만 잠들기 전에 책을 펴드는 것만은 권하지 않겠다. 틀림없이 밤을 새게 될 테니까.
나는 왜 여성 작가들에 끌리는가
잠이 안 올 때 한 편씩 꺼내 읽는 짧은 이야기들
유이월 『찬란한 타인들』
너무 피곤해서 누웠는데 잠은 안 오고 눈이 더 말똥말똥해지는 경우가 있다. 어쩌다가 의뢰 받은 광고나 마케팅 관련 프로젝트에서 카피가 잘 안 풀리거나 광고주가 엉뚱한 걸 요구할 때가 특히 그렇다. 어느 날은 한참을 뒤척이다가 일어나 시계를 보니 새벽 네 시였다. 잔 것도 아니고 안 잔 것도 아닌 것 같은 시간을 세 시간이나 보낸 것이다. 그때 마루로 나가 책장 앞을 서성이다가 적당한 책을 한 권 찾아냈다. 유이월의 『찬란한 타인들』이라는 짧은 소설집이다.
유이월 작가는 문학을 전공하고 글과 관련된 여러 가지 직업을 거치다가 결혼 후 미국에서 10년을 살았고 지금은 한국에 돌아와 작은 사업체를 꾸리고 있는 재주꾼이다. 미국에서 살다 와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그런 스타일을 좋아해서 그런지 몰라도 그의 소설은 미국 사람이 썼다고 해도 당장 고개를 끄덕일 만큼 장소도 이국적이고(켄드릭 스트리트, 데스틴 해변이 도대체 다 어디야) 등장인물의 이름도 모두 진한 미국식이다.
수록된 소설들은 어찌나 짧은지 어떤 건 한 페이지를 겨우 넘기는 경우도 있다. 나는 이름도 모르는 여자와 자고 일어나 이상한 대화를 나누다 느닷없이 끝나는 「유의미한 타인들」의 마지막 문장들이 좋았고, 전직 정보 보안 전문가가 어떤 귀부인의 의뢰를 받고 찾아간 해변의 술집에서 ‘열어보면 안 되는 USB를 돌려받기 위해 바텐더를 카운터 안쪽 비상구로 불러 내 권총을 목에 들이대고는 “요샌 총 없이는 일이 잘 안 풀린다”라며 다시 그 바에 앉아 유유히 술을 마시는 이야기 「비밀을 지키는 법」이 특히 좋았다. 한 편씩 짤막하게 펼쳐지는 이야기들은 마치 이디스 워튼이나 길리언 플린의 글처럼 나른하면서도 얄미운 반전을 숨기고 있어 사랑스럽다. 만난 사람은 언젠가 헤어지기 마련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헤어질 날을 계산하다가(837일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호텔에 불이 나 19일만에 헤어지게 되는 연인의 바보 같은 사연이 담긴 「찬란한 날들」엔 비릿한 유머가 숨어 있고, 「물귀신 매트릭스」는 사람이 아닌 물귀신의 억울한 사연을 짧게 소개해서 책을 읽던 새벽부터 사람을 허무하게 웃겼다.
유이월이 바라보는 인간은 대개 비이성적이고 살짝 이상하면서도 서글프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이야기는 아내 몰래 아내의 친구와 출장을 가 호텔에서 섹스를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별것 아닌 이유로 그 여자가 싫어져 다시 아내에게 전화를 거는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이다. 아니나 다를까, 책 맨 뒤에 붙어 있는 ‘작가의 말을 읽어보니 “내 글은 아이러니에 대한 각종 예찬들이다”라는 선언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미워하거나 어떤 일이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또 바라지 않는 마음도 있는데 그걸 논리적으로 설명할 도리가 없다. 이해할 수 없는 타인에 관한 이야기이니 ‘찬란한 타인들이라는 제목은 너무나 잘 지은 것이다. 아, 한국 소설인데 왜 미국식 이름과 지명이 많이 나오느냐는 질문에 “똑같은 사건도 다른 외투를 입히면 전혀 다르게 보이는 효과를 노렸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는데, 나는 전적으로 찬성한다. 이 책의 야한 긴장감은 바로 이런 요소들이 합해져서 나온다.
시를 몰라도 시를 쓰고 싶게 만드는
버스 안에서 읽고 눈물 흘렸던 시집
신철규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문학동네, 2017)
시에 대한 정의로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맨 앞에 신철규 시인이 쓴 “절벽 끝에 서 있는 사람을 잠깐 뒤돌아보게 하는 것, 다만 반걸음이라도 뒤로 물러서게 하는 것, 그것이 시일 것이라고 오래 생각했다”라는 글처럼 적절한 표현은 없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절벽 끝에 서 있는 것 같은 비참한 기분을 느끼며 살아갈 때가 있다. 자칫 그대로 몸을 던지고 싶은 충동에서 우리를 구해 내는 것은 무엇일까. “나도 뾰족한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같이 한번 의논해 보자”라는 친구의 말 한마디일 수도 있고, “나도 그랬어. 그래서 지금의 네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아”라는 선배의 공감 어린 다독임일지도 모른다. 그런 공감 능력이 있으니 시인은 “오늘도 누군가는 사랑의 기억으로 옛 애인의 집 유리창에 돌을 던지고 그녀는 유리 파편을 씹으며 사랑의 기억을 지운다” 같은 구절을 쓸 수 있는 것 아닐까.
호주의 젊은 시인 에린 핸슨(1995년생)이 “가장 환한 미소를 짓는 사람이 눈물 젖은 베개를 가지고 있다”라는 구절을 썼다는 것을 장석주 시인의 페이스북 담벼락을 보고 알았는데, 신철규 시인의 첫 시집을 읽으며 똑같은 감정을 느꼈다. 우리나라는 유난히 봄에 슬픈 일이 많았다. 그래서 4월이나 5월에 “어떤 눈물은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밖에 없었다”라는 구절을 읽으면 저마다의 슬픔은 물론이고 사회적으로도 너무나 불행했던 우리 현대사를 생각하며 눈시울이 붉어질 수도 있겠다. 나는 이런 게 시인의 일이라 생각한다. 신철규 시인이 주는 슬픔은 맑고 깨끗해서 그의 시를 한 편 읽고 나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고 싶어진다.
위기에 몰린 사람의 그 ‘반걸음을 위해 시를 쓰는 사람. 그래서 그의 시는 착하고 어질다. 나는 이 시집을 산 날 버스 안에서 시인의 할머니가 들려주었다는 ‘고디(다슬기의 경상도 사투리) 얘기인 「울 엄마 시집간다」를 읽고 눈물이 나서 아주 혼이 났다. 궁금한 사람들은 다른 책은 안 사도 좋으니 이 시집 하나 정도는 사서 읽는 게 정신 건강에 매우 좋을 것이라고 이 연사, 불을 토하는 바이다.
남의 리뷰를 너무 믿으면 안 되는 이유
직적 읽어보지 않고 함부로 논하지 말라
무라카미 하루키 「토니 타키타니」(『렉싱턴의 유령』문학사상, 2006)
사실 「토니 타키타니」에 대한 이야기는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기 전에 너무 많이 들었다(아니, 사실은 읽었다). 인터넷과 SNS를 통해 본 많은 댓글들을 통해서다. 아름다운 아내가 옷을 사는 걸 멈출 수 없어서 벌어지는 이야기라거나 그 아내가 죽은 후 똑같은 체형의 여자를 비서로 채용해 매일 그 옷들을 입혀보는 남자의 이야기라는 댓글이 반복 재생산되었고 나는 틈나는 대로 그 댓글들을 읽고 기억했다. 그러다 보니 이미 소설을 읽은 것 같은 이상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러다 어느 날 도서관에서 이 소설과 마주하게 되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뭐든 소개하는 방법을 결정해야 한다. 소년의 이야기로 시작할 수도 있고 미술 학원의 수업 시간이 출발점일 수도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토니 타키타니의 아버지 이야기로 시작한다. “토니 타키타니의 진짜 이름은, 정말 토니 타키타니였다”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타키타니 쇼 자부로라는 이름의 아버지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재즈 트롬본 연주자였던 그는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기 약 4년 전에 ‘여자가 얽힌 성가신 일이 생겨 일본을 떠났다. 이렇게 소설 앞부분엔 토니의 아버지가 중국 상하이로 떠났다가 1947년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재즈를 좋아하는 이탈리아계 미국인 소좌와 친구가 되었고, 그 친구가 자기 이름을 붙이면 어떻겠냐고 하는 바람에 아들 이름을 ‘토니라 짓게 된 배경이 설명된다. 나는 나중에 미야자와 리에가 주연했던 동명의 영화(70분 정도의 소품인데 아름답다)에서도 강조되었던 뒷부분의 이 이야기보다 토니의 쿨한 아버지 이야기를 다룬 앞부분이 더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그동안 내가 읽었던 수많은 리뷰에는 이런 걸 언급한 글이 하나도 없었다. 정말 단 하나도!
동네에 있는 아리랑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무라카미 T』라는 책을 잠깐 들춰 보았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지고 있던 티셔츠들을 사진 찍고 그 티셔츠들에 대해 쓴 작은 산문집이었다. 그런데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느 날 ‘좋아, 이제부터 티셔츠 수집을 하자 하고 결심한 뒤 모은 게 아니라 오래 살다 보니 모인 거”라고 하면서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를 밝히고 있다.
“그러고 보니 티셔츠 수집 같은 것도 하고 있어요”라고 무심코 말했더니, 편집자가 “무라카미 씨, 그걸로 연재 하나 해보시겠습니까” 하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놀라운 건 이 책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장 아끼는 티셔츠가 ‘TONY TAKITANI 티셔츠라고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 「토니 타키타니」와의 또 다른 인연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는 마우이섬 시골 마을의 자선 매장에서 이 티셔츠를 발견 해 1달러에 구입하고는 ‘토니 타키타니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생각하다 마음대로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를 주인공으로 한 단편 소설을 썼고,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자랑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토니 타키타니」라는 소설엔 이런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길이와 상관없이 많은 곁가지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미 읽으신 분이 많겠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을 좋아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우연히 구입한 티셔츠 한 장을 밑천으로 탄생해 세계적으로 알려진 단편 소설이 궁금한 사람이라면 이 작품은 꼭 읽어야 한다.
SF도 입심 좋은 작가가 더 좋아
놀라운 아이디어와 필력으로 무장한
존 스칼지의 『노인의 전쟁』(샘터, 2009)
‘스포츠카의 비애라는 게 있다. 젊어서는 경제적 능력이 안돼서 못 타고 나이가 들면 체력과 스타일이 안 돼 못 타는 게 스포츠카라는 얘기인데, 이건 인생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체력과 순발력의 정점인 20대엔 지혜와 경험이 모자라고 나이가 들어 지혜가 생기면 몸이 말을 안 듣기 시작한다. 그런데 70대 노인의 정신에 20대의 육체를 결합시킬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상상력을 바탕으로 태어난 SF 소설이 있으니 바로 존 스칼지의 『노인의 전쟁』 시리즈다. 내가 굳이 시리즈라고 일컫는 것은 이 소설의 빅 히트 덕분에 『유령여단』, 『마지막 행성』 그리고 외전 격인 『조이 이야기』까지 확장된 설정과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다. “75세 생일엔 나는 두 가지 일을 했다. 아내의 무덤에 들렀고, 군에 입대했다.” 75세에 입대라니 어이가 없다. 하지만 이 소설은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재미가 생긴다. 식민지를 보호하기 위한 군사 조직인 식민지 연합군(CDF)은 75세 이상의 지원자들을 모집해 우주 개척 전쟁을 벌이러 나간다. 새로운 몸을 받은 군인들은 DNA를 상당히 변화시킨 덕분에 젊음은 물론이고 초능력까지 갖추게 된다. 무술 영화나 히어로물에서 주인공이 처음 초능력을 가지게 되었을 때의 놀라움과 희열이 가장 벅찬 장면이었던 것처럼, 여기서도 노인들이 다시 젊은이의 몸을 가지게 되었을 때 일어나는 일들이 가장 신난다. 그들은 똑똑한 피의 도움으로 1초 만에 지혈을 하고 100미터를 7초에 주파하며 젊은이들처럼 섹스한다. 그들에게 이런 특혜가 주어지는 것은 혹독한 훈련을 마친 뒤 200억의 인류와 다른 지성체 4조가 있는 우주로 나가 전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주에서 만난 기기묘묘한 지성체들을 겉모습만으로 판단했다가는 큰코다친다. 이상하게 생긴 종족 바퉁가는 수학에 뛰어난 선량한 심해인이지만 멀쩡하게 생긴 종족 살롱은 인간이 먹기 좋다는 걸 안 다음부터는 개척지를 공격해서 인간 고기 공장을 세웠다. CDF 군인들의 사망률이 높은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늘 새로운 전투에서 새로운 상대와 싸워야 하기에 직감 하나만으로 좋은 상대, 나쁜 상대를 가려낼 수 없는 것이다.
2002년부터 블로그에 SF 소설을 연재하다 2005년에 책으로 출간하고 2006년엔 휴고상 후보에 오른 괴력의 작가 존스 칼지는 스토리텔링과 과학적 지식이 결합된 이야기를 자유자재로 펼쳐 보인다. 그는 질투, 욕심, 누군가를 지배하려는 마음 등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을 꿰뚫고 있으며 역사와 인문학적 지식도 탁월하다. 게다가 입담이 장난 아니다. 훈련소에서 나오는 밥을 처음 먹어본 주인공이 “아침 식사는 굉장했다. 그 자리에 펼쳐진 것 같은 아침 식사를 만들 수 있는 여자와 결혼했다면 간디라도 단식을 멈췄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식이다. 후속작 『유령여단』 도입부에 장교들이 나이를 가지고 탁구 치듯 던지는 농담들은 스탠딩 개그를 방불케 한다. 그렇다고 가벼운 유머만 있는 것은 아니다. 훈련소 교관이 굳이 노인들을 불러 모아 부대를 만든 이유를 설명할 땐 “자네들 대부분 자식이나 손자를 키워봤고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넘어서는 일을 하는 가치에 대해 이해하고 있다. 타인을 위해서 벌이는 이 싸움의 가치를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개념을 열아홉 살짜리 뇌에 박아 넣는 건 힘든 일이지”라는 공감 가는 설명도 할 줄 안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니 어서 작품을 더 써달라는 말을 듣는 작가만큼 행복한 존재가 또 있을까. 독자들은 『마지막 행성』으로 끝난 이 이야기를 더 이어달라고 채근했고 작가는 존 페리와 제인 세이건 커플의 딸 조이를 일인칭 화자로 등장시킨 『조이 이야기』로 화답했는데, 많은 독자들이 본 시리즈보다 이 외전이 더 사랑스럽고 감동까지 있다고 평했다. 존 스칼지는 10대 소년의 말투를 알기 위해 10대인 여성들에게 초고를 보여주는 성의를 보였다고 한다. 나는 『노인의 전쟁』 주인공 존 페리가 지구에 있을 때 직업이 카피라이터였다는 게 재밌었다. 그는 특수 차량을 위한 타이어를 만드는 너바나 타이어 회사의 마스코트 윌리휠리가 등장하는 광고를 만든 적이 있는데 훈련 교관 루이즈가 그 카피에 감복해 이혼을 감행했다는 것이다. 루이즈가 감탄한 카피는 “그저 박차고 떠나야 할 때가 있다”였고 이 인연으로 존 페리는 교관의 신임을 얻는다.
아, 할 얘기가 너무나 많다. 그러나 다 얘기하자면 수다스러워질 뿐이니 어서 책을 사서 읽으시라. 가까운 구립이나 시립 도서관에만 가도 존 스칼지의 웬만한 책은 다 있다. 당신만 안 읽었지 다른 독자들은 호시탐탐 다 읽고 있다는 증거다. 넷플릭스에서 판권을 샀다고 하니 조만간 영상으로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책으로 읽는 게 제일 재밌다. 어떤 한국 독자는 “출퇴근길에 지하철에서만 읽었는데 열흘 만에 세 권을 읽었다. 대단한 흡입력이다”라는 댓글을 달았다. 엄청 재밌다는 소리다.
* *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읽는 기쁨
이 책에 끌린 이유는 따로 있다
이 책에 끌린 이유는 따로 있었다
황정은 『일기』(창비, 2021)
작가들이 뽑은 ‘그 해에 가장 잘 쓴 소설에 연거푸 선정될 정도로 소설을 잘 쓰는 황정은의 작품을 꼽으며 기껏 에세이라니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리고 나는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라는 소설을 무척 좋아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내 마음을 가장 크게 움직인 황정은의 책은 『일기』였으니까. 작가 자신도 에세이집을 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하니 그에게 에세이를 써보라고 제안한 사람이 고마워진다.
『일기』는 황 작가가 경기 파주로 이사한 뒤 코로나19 팬데믹을 맞은 상황에서 시작된다. 코로나19 확진자들의 동선이 밝혀지는 뉴스를 보고 들으며 집에서만 머물던 황정은은 자신이 선이 아니라 점처럼 존재했다고 자조하면서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의 노력에 감동한다. 누군가의 애쓰는 삶이 멀리 떨어진 누군가를 구한다는 것이다. 2020년 4월 코로나19 상황을 보내는 그가 경의중앙선의 새벽 다섯 시 이십팔 분에 누군가를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나의 무사함은 누군가의 분투를 대가로 치르고 받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라고 그는 쓴다.
하지만 내가 이 책에 끌린 것은 친부모와 더 이상 가깝게 지내지 않는다는 황정은에게 “그래도 가족인데”라고 던진 누군가의 말을 듣고 침착하게 “그래요. 그게 무슨 말인지 나도 압니다”라고 대답한 구절 때문이었다. 의절을 당한 작가의 부모는 지금도 자식들이 자신들의 분노와 불행에 휩쓸리기를 바라고 있지만 황정은과 그 자매들은 온몸으로 그걸 거부하고 있다. 여기서 “그래도 부모이고 가족인데”라는 말은 아무런 입장이 될 수 없고, 그것은 의견도 생각도 마음도 아니라고 여긴다는 황정은의 태도는 중요하고도 의미심장하다. 누군가를 죽음으로 등 떠밀 수도 있는 그런 말은 상투적이라 해롭다는 것이다.
아울러 황정은은 자신이 과거에 일하던 일터에서 부모의 폭력을 피하느라 주민등록이 말소된 상태에서 지내야 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주민센터만 방문해도 자식이 사는 곳을 간단히 알아낼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인데, 그런 약점을 이용해 월급을 적게 주고 퇴직금도 챙겨주지 않는 고용주들의 행태는 더 치사하고 잔인하다. 물론 작가가 일곱 살 때 나이 많은 사촌에게 당했던 성폭력 경험은 더 기가 막히고 화가 난다.
이 책에 그렇게 심각한 얘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양쪽 맞추기로 글을 쓰다가 왼쪽 맞추기로 쓰는 방법을 바꾸어본 이야기라든지, 책을 너무 아껴서 마음에 드는 문장이 실린 페이지를 표시하려 포스트잇 플래그를 사용하던 황정은이 지금은 페이지마다 연필로 줄을 박박 그으면서 ‘나는 전에 이걸 참을 수 없었지라고 생각하는 귀여운 장면도 수두룩하다. 이런 건 소설에서는 좀처럼 읽을 수 없는 작가의 세세한 면 아닌가. 그러니 어서 이 책을 사서 읽으시기 바란다. 이 에세이집을 읽고 나면 그가 쓴 「百의 그림자』나 『연년세세」 같은 소설이 읽고 싶어질 것이다. 무엇보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고 다독여 주는 황정은 작가의 목소리가 들릴 것이다. 나는 그 목소리에 많은 위로를 받았는데 아마 당신도 그럴 것이다. 우리에겐 늘 위로가 필요하니까.
밤새워 읽은 책이 뭐였어
밤에 읽기 시작하면 큰일 난다
스티븐 킹 『빌리 서머스 1,2』(황금가지, 2022)
영화 평론가 오동진이 지하철에서 이 책을 읽다가 눈물을 홀렸다고 어딘가에 쓴 글을 읽고 얼른 서점으로 달려가 『빌리 서머스 1, 2』 두 권을 한꺼번에 샀다. 스티븐 킹의 신작이라면 빼 놓지 않고 읽는 편이니 이 소설이 궁금한 건 당연했다. 그는 전 세계에서 소설을 가장 많이 판매한 작가 중 한 사람이고 또 그가 쓴 소설은 거의 다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있으니 나중을 위해서라도 ‘원작 소설을 먼저 영접하는 게 열성 팬으로서의 자세라 생각했다.
정말 나쁜 놈들만 골라서 죽이는 특급 저격수 빌리 서머스의 마지막 임무에 얽힌 이야기를 다룬 이 소설은 시종일관 흥미진진했다. 범죄자를 다룬 모든 소설과 영화가 그러하듯 ‘이번 일만 마치면 이 바닥을 뜬다는 주인공의 바람이 언제나 물거품이 된다는 것을 스티븐 킹은 주인공의 입을 통해 언급한다. 이 법칙엔 예외가 없는 듯 소설가인 척하며 동네 사람들 삶에 천천히 스며들던 빌리의 마지막 암살 임무도 처음엔 단순한 것 같았지만 날이 갈수록 일이 꼬이고 계획이 자꾸 수정된다.
그런데 엄혹한 킬러의 이야기이면서도 폭력적이거나 잔인하기는커녕 뒤로 갈수록 소설의 흐름이 정의롭고 따뜻해지는 건 이 소설만의 장점이다. 더구나 빌리는 에밀 졸라 등 유명한 소설가들의 작품을 암송할 정도로 지적인 인물이지만 청부 살인을 위해 시종일관 멍청한 표정으로 일관하는 영악한 인물이 라는 것도 흥미로운 캐릭터 설정이다. 집에 혼자 있을 때 빌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써보면서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고민한다. 그런데 그 과정이 그대로 스티븐 킹의 글쓰기 강연이 된다. 소설가의 창작 과정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게 이 소설의 보너스 같은 부분이다.
특히 2부에서 앨리스의 복수를 위해 세 명의 청년을 위협하는 장면은 너무나 아이디어가 치밀하고 통쾌하기조차 하다(직접 읽을 당신을 위해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겠다). 이미 엄청난 부를 축적한데다가 ‘이야기의 제왕이라는 명예까지 얻은 스티븐 킹은 왜 아직도 힘들게 소설을 쓰고 있는 걸까. 나는 작년에 우리 동네에 있는 아리랑도서관에서 그의 소설 『스탠드 바이 미』와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을 뒤늦게 빌려 읽고는 깜짝 놀랐다. 영화로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였는데도 소설이 두 배 이상 재밌었기 때문이다. 그는 잠깐 등장하는 인물 하나도 허투루 지나가는 법이 없었다. 정말 그 사람을 오랫동안 보고 쓴 것처럼 집안 이야기나 과거사, 성격상의 특징 등을 작품 속에 세세하게 박아 넣었다. 잘 쓰기도 하지만 소설 쓰기를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놀라운 건 수십 년간 공포와 판타지 소설의 대가였던 그가 ‘빌 호지스 시리즈를 통해 돌연 탐정 소설가로 변신했다는 사실이다. 그 사이에 케네디 암살을 다룬 타임 루프 소설 『11/22/63』을 쓰기도 했다. 인기 절정의 소설가일 때 치명적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했던 스티븐 킹은 70대 중반인 지금도 계속해서 새로운 장르의 아이디어를 내고 이야기 쓰는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번 소설 역시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흥미진진하면서도 따뜻한 스토리텔링을 원한다면 스티븐 킹의 『빌리 서머스』를 읽으시라. 다만 잠들기 전에 책을 펴드는 것만은 권하지 않겠다. 틀림없이 밤을 새게 될 테니까.
나는 왜 여성 작가들에 끌리는가
잠이 안 올 때 한 편씩 꺼내 읽는 짧은 이야기들
유이월 『찬란한 타인들』
너무 피곤해서 누웠는데 잠은 안 오고 눈이 더 말똥말똥해지는 경우가 있다. 어쩌다가 의뢰 받은 광고나 마케팅 관련 프로젝트에서 카피가 잘 안 풀리거나 광고주가 엉뚱한 걸 요구할 때가 특히 그렇다. 어느 날은 한참을 뒤척이다가 일어나 시계를 보니 새벽 네 시였다. 잔 것도 아니고 안 잔 것도 아닌 것 같은 시간을 세 시간이나 보낸 것이다. 그때 마루로 나가 책장 앞을 서성이다가 적당한 책을 한 권 찾아냈다. 유이월의 『찬란한 타인들』이라는 짧은 소설집이다.
유이월 작가는 문학을 전공하고 글과 관련된 여러 가지 직업을 거치다가 결혼 후 미국에서 10년을 살았고 지금은 한국에 돌아와 작은 사업체를 꾸리고 있는 재주꾼이다. 미국에서 살다 와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그런 스타일을 좋아해서 그런지 몰라도 그의 소설은 미국 사람이 썼다고 해도 당장 고개를 끄덕일 만큼 장소도 이국적이고(켄드릭 스트리트, 데스틴 해변이 도대체 다 어디야) 등장인물의 이름도 모두 진한 미국식이다.
수록된 소설들은 어찌나 짧은지 어떤 건 한 페이지를 겨우 넘기는 경우도 있다. 나는 이름도 모르는 여자와 자고 일어나 이상한 대화를 나누다 느닷없이 끝나는 「유의미한 타인들」의 마지막 문장들이 좋았고, 전직 정보 보안 전문가가 어떤 귀부인의 의뢰를 받고 찾아간 해변의 술집에서 ‘열어보면 안 되는 USB를 돌려받기 위해 바텐더를 카운터 안쪽 비상구로 불러 내 권총을 목에 들이대고는 “요샌 총 없이는 일이 잘 안 풀린다”라며 다시 그 바에 앉아 유유히 술을 마시는 이야기 「비밀을 지키는 법」이 특히 좋았다. 한 편씩 짤막하게 펼쳐지는 이야기들은 마치 이디스 워튼이나 길리언 플린의 글처럼 나른하면서도 얄미운 반전을 숨기고 있어 사랑스럽다. 만난 사람은 언젠가 헤어지기 마련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헤어질 날을 계산하다가(837일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호텔에 불이 나 19일만에 헤어지게 되는 연인의 바보 같은 사연이 담긴 「찬란한 날들」엔 비릿한 유머가 숨어 있고, 「물귀신 매트릭스」는 사람이 아닌 물귀신의 억울한 사연을 짧게 소개해서 책을 읽던 새벽부터 사람을 허무하게 웃겼다.
유이월이 바라보는 인간은 대개 비이성적이고 살짝 이상하면서도 서글프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이야기는 아내 몰래 아내의 친구와 출장을 가 호텔에서 섹스를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별것 아닌 이유로 그 여자가 싫어져 다시 아내에게 전화를 거는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이다. 아니나 다를까, 책 맨 뒤에 붙어 있는 ‘작가의 말을 읽어보니 “내 글은 아이러니에 대한 각종 예찬들이다”라는 선언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미워하거나 어떤 일이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또 바라지 않는 마음도 있는데 그걸 논리적으로 설명할 도리가 없다. 이해할 수 없는 타인에 관한 이야기이니 ‘찬란한 타인들이라는 제목은 너무나 잘 지은 것이다. 아, 한국 소설인데 왜 미국식 이름과 지명이 많이 나오느냐는 질문에 “똑같은 사건도 다른 외투를 입히면 전혀 다르게 보이는 효과를 노렸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는데, 나는 전적으로 찬성한다. 이 책의 야한 긴장감은 바로 이런 요소들이 합해져서 나온다.
시를 몰라도 시를 쓰고 싶게 만드는
버스 안에서 읽고 눈물 흘렸던 시집
신철규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문학동네, 2017)
시에 대한 정의로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맨 앞에 신철규 시인이 쓴 “절벽 끝에 서 있는 사람을 잠깐 뒤돌아보게 하는 것, 다만 반걸음이라도 뒤로 물러서게 하는 것, 그것이 시일 것이라고 오래 생각했다”라는 글처럼 적절한 표현은 없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절벽 끝에 서 있는 것 같은 비참한 기분을 느끼며 살아갈 때가 있다. 자칫 그대로 몸을 던지고 싶은 충동에서 우리를 구해 내는 것은 무엇일까. “나도 뾰족한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같이 한번 의논해 보자”라는 친구의 말 한마디일 수도 있고, “나도 그랬어. 그래서 지금의 네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아”라는 선배의 공감 어린 다독임일지도 모른다. 그런 공감 능력이 있으니 시인은 “오늘도 누군가는 사랑의 기억으로 옛 애인의 집 유리창에 돌을 던지고 그녀는 유리 파편을 씹으며 사랑의 기억을 지운다” 같은 구절을 쓸 수 있는 것 아닐까.
호주의 젊은 시인 에린 핸슨(1995년생)이 “가장 환한 미소를 짓는 사람이 눈물 젖은 베개를 가지고 있다”라는 구절을 썼다는 것을 장석주 시인의 페이스북 담벼락을 보고 알았는데, 신철규 시인의 첫 시집을 읽으며 똑같은 감정을 느꼈다. 우리나라는 유난히 봄에 슬픈 일이 많았다. 그래서 4월이나 5월에 “어떤 눈물은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밖에 없었다”라는 구절을 읽으면 저마다의 슬픔은 물론이고 사회적으로도 너무나 불행했던 우리 현대사를 생각하며 눈시울이 붉어질 수도 있겠다. 나는 이런 게 시인의 일이라 생각한다. 신철규 시인이 주는 슬픔은 맑고 깨끗해서 그의 시를 한 편 읽고 나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고 싶어진다.
위기에 몰린 사람의 그 ‘반걸음을 위해 시를 쓰는 사람. 그래서 그의 시는 착하고 어질다. 나는 이 시집을 산 날 버스 안에서 시인의 할머니가 들려주었다는 ‘고디(다슬기의 경상도 사투리) 얘기인 「울 엄마 시집간다」를 읽고 눈물이 나서 아주 혼이 났다. 궁금한 사람들은 다른 책은 안 사도 좋으니 이 시집 하나 정도는 사서 읽는 게 정신 건강에 매우 좋을 것이라고 이 연사, 불을 토하는 바이다.
남의 리뷰를 너무 믿으면 안 되는 이유
직적 읽어보지 않고 함부로 논하지 말라
무라카미 하루키 「토니 타키타니」(『렉싱턴의 유령』문학사상, 2006)
사실 「토니 타키타니」에 대한 이야기는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기 전에 너무 많이 들었다(아니, 사실은 읽었다). 인터넷과 SNS를 통해 본 많은 댓글들을 통해서다. 아름다운 아내가 옷을 사는 걸 멈출 수 없어서 벌어지는 이야기라거나 그 아내가 죽은 후 똑같은 체형의 여자를 비서로 채용해 매일 그 옷들을 입혀보는 남자의 이야기라는 댓글이 반복 재생산되었고 나는 틈나는 대로 그 댓글들을 읽고 기억했다. 그러다 보니 이미 소설을 읽은 것 같은 이상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러다 어느 날 도서관에서 이 소설과 마주하게 되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뭐든 소개하는 방법을 결정해야 한다. 소년의 이야기로 시작할 수도 있고 미술 학원의 수업 시간이 출발점일 수도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토니 타키타니의 아버지 이야기로 시작한다. “토니 타키타니의 진짜 이름은, 정말 토니 타키타니였다”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타키타니 쇼 자부로라는 이름의 아버지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재즈 트롬본 연주자였던 그는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기 약 4년 전에 ‘여자가 얽힌 성가신 일이 생겨 일본을 떠났다. 이렇게 소설 앞부분엔 토니의 아버지가 중국 상하이로 떠났다가 1947년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재즈를 좋아하는 이탈리아계 미국인 소좌와 친구가 되었고, 그 친구가 자기 이름을 붙이면 어떻겠냐고 하는 바람에 아들 이름을 ‘토니라 짓게 된 배경이 설명된다. 나는 나중에 미야자와 리에가 주연했던 동명의 영화(70분 정도의 소품인데 아름답다)에서도 강조되었던 뒷부분의 이 이야기보다 토니의 쿨한 아버지 이야기를 다룬 앞부분이 더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그동안 내가 읽었던 수많은 리뷰에는 이런 걸 언급한 글이 하나도 없었다. 정말 단 하나도!
동네에 있는 아리랑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무라카미 T』라는 책을 잠깐 들춰 보았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지고 있던 티셔츠들을 사진 찍고 그 티셔츠들에 대해 쓴 작은 산문집이었다. 그런데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느 날 ‘좋아, 이제부터 티셔츠 수집을 하자 하고 결심한 뒤 모은 게 아니라 오래 살다 보니 모인 거”라고 하면서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를 밝히고 있다.
“그러고 보니 티셔츠 수집 같은 것도 하고 있어요”라고 무심코 말했더니, 편집자가 “무라카미 씨, 그걸로 연재 하나 해보시겠습니까” 하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놀라운 건 이 책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장 아끼는 티셔츠가 ‘TONY TAKITANI 티셔츠라고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 「토니 타키타니」와의 또 다른 인연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는 마우이섬 시골 마을의 자선 매장에서 이 티셔츠를 발견 해 1달러에 구입하고는 ‘토니 타키타니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생각하다 마음대로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를 주인공으로 한 단편 소설을 썼고,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자랑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토니 타키타니」라는 소설엔 이런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길이와 상관없이 많은 곁가지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미 읽으신 분이 많겠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을 좋아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우연히 구입한 티셔츠 한 장을 밑천으로 탄생해 세계적으로 알려진 단편 소설이 궁금한 사람이라면 이 작품은 꼭 읽어야 한다.
SF도 입심 좋은 작가가 더 좋아
놀라운 아이디어와 필력으로 무장한
존 스칼지의 『노인의 전쟁』(샘터, 2009)
‘스포츠카의 비애라는 게 있다. 젊어서는 경제적 능력이 안돼서 못 타고 나이가 들면 체력과 스타일이 안 돼 못 타는 게 스포츠카라는 얘기인데, 이건 인생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체력과 순발력의 정점인 20대엔 지혜와 경험이 모자라고 나이가 들어 지혜가 생기면 몸이 말을 안 듣기 시작한다. 그런데 70대 노인의 정신에 20대의 육체를 결합시킬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상상력을 바탕으로 태어난 SF 소설이 있으니 바로 존 스칼지의 『노인의 전쟁』 시리즈다. 내가 굳이 시리즈라고 일컫는 것은 이 소설의 빅 히트 덕분에 『유령여단』, 『마지막 행성』 그리고 외전 격인 『조이 이야기』까지 확장된 설정과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다. “75세 생일엔 나는 두 가지 일을 했다. 아내의 무덤에 들렀고, 군에 입대했다.” 75세에 입대라니 어이가 없다. 하지만 이 소설은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재미가 생긴다. 식민지를 보호하기 위한 군사 조직인 식민지 연합군(CDF)은 75세 이상의 지원자들을 모집해 우주 개척 전쟁을 벌이러 나간다. 새로운 몸을 받은 군인들은 DNA를 상당히 변화시킨 덕분에 젊음은 물론이고 초능력까지 갖추게 된다. 무술 영화나 히어로물에서 주인공이 처음 초능력을 가지게 되었을 때의 놀라움과 희열이 가장 벅찬 장면이었던 것처럼, 여기서도 노인들이 다시 젊은이의 몸을 가지게 되었을 때 일어나는 일들이 가장 신난다. 그들은 똑똑한 피의 도움으로 1초 만에 지혈을 하고 100미터를 7초에 주파하며 젊은이들처럼 섹스한다. 그들에게 이런 특혜가 주어지는 것은 혹독한 훈련을 마친 뒤 200억의 인류와 다른 지성체 4조가 있는 우주로 나가 전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주에서 만난 기기묘묘한 지성체들을 겉모습만으로 판단했다가는 큰코다친다. 이상하게 생긴 종족 바퉁가는 수학에 뛰어난 선량한 심해인이지만 멀쩡하게 생긴 종족 살롱은 인간이 먹기 좋다는 걸 안 다음부터는 개척지를 공격해서 인간 고기 공장을 세웠다. CDF 군인들의 사망률이 높은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늘 새로운 전투에서 새로운 상대와 싸워야 하기에 직감 하나만으로 좋은 상대, 나쁜 상대를 가려낼 수 없는 것이다.
2002년부터 블로그에 SF 소설을 연재하다 2005년에 책으로 출간하고 2006년엔 휴고상 후보에 오른 괴력의 작가 존스 칼지는 스토리텔링과 과학적 지식이 결합된 이야기를 자유자재로 펼쳐 보인다. 그는 질투, 욕심, 누군가를 지배하려는 마음 등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을 꿰뚫고 있으며 역사와 인문학적 지식도 탁월하다. 게다가 입담이 장난 아니다. 훈련소에서 나오는 밥을 처음 먹어본 주인공이 “아침 식사는 굉장했다. 그 자리에 펼쳐진 것 같은 아침 식사를 만들 수 있는 여자와 결혼했다면 간디라도 단식을 멈췄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식이다. 후속작 『유령여단』 도입부에 장교들이 나이를 가지고 탁구 치듯 던지는 농담들은 스탠딩 개그를 방불케 한다. 그렇다고 가벼운 유머만 있는 것은 아니다. 훈련소 교관이 굳이 노인들을 불러 모아 부대를 만든 이유를 설명할 땐 “자네들 대부분 자식이나 손자를 키워봤고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넘어서는 일을 하는 가치에 대해 이해하고 있다. 타인을 위해서 벌이는 이 싸움의 가치를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개념을 열아홉 살짜리 뇌에 박아 넣는 건 힘든 일이지”라는 공감 가는 설명도 할 줄 안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니 어서 작품을 더 써달라는 말을 듣는 작가만큼 행복한 존재가 또 있을까. 독자들은 『마지막 행성』으로 끝난 이 이야기를 더 이어달라고 채근했고 작가는 존 페리와 제인 세이건 커플의 딸 조이를 일인칭 화자로 등장시킨 『조이 이야기』로 화답했는데, 많은 독자들이 본 시리즈보다 이 외전이 더 사랑스럽고 감동까지 있다고 평했다. 존 스칼지는 10대 소년의 말투를 알기 위해 10대인 여성들에게 초고를 보여주는 성의를 보였다고 한다. 나는 『노인의 전쟁』 주인공 존 페리가 지구에 있을 때 직업이 카피라이터였다는 게 재밌었다. 그는 특수 차량을 위한 타이어를 만드는 너바나 타이어 회사의 마스코트 윌리휠리가 등장하는 광고를 만든 적이 있는데 훈련 교관 루이즈가 그 카피에 감복해 이혼을 감행했다는 것이다. 루이즈가 감탄한 카피는 “그저 박차고 떠나야 할 때가 있다”였고 이 인연으로 존 페리는 교관의 신임을 얻는다.
아, 할 얘기가 너무나 많다. 그러나 다 얘기하자면 수다스러워질 뿐이니 어서 책을 사서 읽으시라. 가까운 구립이나 시립 도서관에만 가도 존 스칼지의 웬만한 책은 다 있다. 당신만 안 읽었지 다른 독자들은 호시탐탐 다 읽고 있다는 증거다. 넷플릭스에서 판권을 샀다고 하니 조만간 영상으로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책으로 읽는 게 제일 재밌다. 어떤 한국 독자는 “출퇴근길에 지하철에서만 읽었는데 열흘 만에 세 권을 읽었다. 대단한 흡입력이다”라는 댓글을 달았다. 엄청 재밌다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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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