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리틀 포레스트에 산다
 
지은이 : 이혜림 (지은이)
출판사 : 라곰
출판일 : 2024년 04월




  • ‘버리지 않는 건강한 미니멀리즘’으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이혜림 작가가 이번에는 ‘적게 소유하고, 직접 지어 먹으며, 풍만한 일상을 만들어가는 삶’에 대한 에세이를 전합니다!


    나만의 리틀 포레스트에 산다


    울적한 날엔, 나만의 작은 숲으로

    이름은 리틀 포레스트

    시작은 리틀 포레스트였다. 김태리 배우가 시골에서 농사짓고, 막걸리 빚어 먹고, 아카시아꽃을 튀겨 먹는 자급자족 귀농 생활을 예쁘게 담은 영화, 한국판 리틀 포레스트.어릴 적부터 사랑스러운 앞치마를 입고 빵을 굽고, 챙모자를 챙겨 쓰고 농사를 짓고, 손수 밥과 술, 간식을 만들어 먹는 생활을 남몰래 흠모해왔다. 도심 한복판에 살면서도 손수 옷을 지어 입고, 자잘하게 고장 난 물건은 직접 고치고, 넓지 않은 베란다 한편에서 방울토마토와 고추 화분을 키웠던 엄마를 보며 생긴 마음일 수도 있고, 그저 영화와 책 속에서 만난 이미지에 반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매일 몸을 움직이며 스스로 대부분의 것을 만들고 해낼 수 있는, 건강해서 예쁜 시골 생활을 동경한다(누군가는 그것을 환상이라 부른다 해도). 그리고 언젠가 그 동경하는 모습을 내 생활의 중심으로 끌어오는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지인들을 만날 때마다 입이 닳도록 말했다.


    “언젠가 시골에 내려가서 작은 집을 짓고 살 거야. 음식을 손수 만들고, 옷은 직접 지어 입고, 또 누군가 지금의 나처럼 그런 생활을 남몰래 흠모하고 있다면 우리 집에 초대해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작은 민박을 운영하고 싶어.” 이미 몇 번이나 돌려 봐서 대사까지 다 외울 지경인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다시 한 번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해볼까? 당장 시골에 내려가 살 수는 없지만 도시에서도 충분히 숲속에 사는 것처럼 살아볼 수 있지 않을까?


    마침 그 당시 머물던 동네가 풀과 나무를 보기 힘들고 흙을 밟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건물이 빼곡한 빌딩숲이라 한참 지쳐 있던 시기였다. 영화 속 김태리처럼 나도 손수 나의 텃밭을 가꿔보고 싶어졌다. 딱딱하고 차가운 시멘트 바닥 대신 따뜻한 땅을 밟고 부드러운 흙을 만지며 살 수 있다면 조금 더 행복해질 것 같았다.


    시골살이는 벌레도 많고 관리할 게 많아 힘들다던데. 게다가 텃밭을 가꾸는 건 아름다운 로망보다는 혹독한 현실 쪽이라 귀찮고 고된 일투성이라던데. 이참에 텃밭 생활이 나와 맞는지 미리 연습해보면 어떨까?? 매일 작은 노동으로 몸을 쓰고 먹을거리를 건강한 방식으로 키워 먹으며, 그렇게 조금 더 자연스럽고 건강한 삶을 만들어보자. 오랫동안 마음 한편에 조용히 꿈꿔온 자급자족을 실현해보자.


    이곳에서 다양한 시행착오를 거친 뒤에 들어간 숲속의 생활은 더 달콤할지도 모른다. 아님 아예 내려가지 않기로 마음을 바꿀 수도 있고. 그렇게 결심했다. 지금 당장 텃밭을 가꿔보기로!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도시에서 텃밭을 가꿀 수 있는 방법은 생각보다 많았다. 지자체에서 관리하는 공공 텃밭이나 개인이 운영하는 주말 농장도 있고, 요즘은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운영하는 텃밭도 있다. 집에서 소소하게 베란다 텃밭을 가꾸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우리 집 근처에는 자전거 타고 15분 거리에 개인이 운영하는 주말 농장들이 꽤 많았다. 여러 번의 전화 문의 끝에 빈자리가 남은 농장 하나를 겨우 찾았다.

    다음 날 남편과 주말 농장을 보러 갔다. 하얗고 작은 나무 푯말들이 수없이 꽂힌 너른 땅을 처음 마주한 그 순간, ‘여기다! 싶었다. 그날 바로 사장님을 만나 텃밭 분양 계약을 마쳤다. 봄부터 가을까지, 1년간 5평의 작은 땅을 내 마음대로 경작할 수 있는 대가로 지불한 비용은 15만 원.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텃밭 이름을 정해 오면 푯말에 써주겠다는 농장 사장님 말씀에 나는 더 고민할 것도 없이 우리의 작고 귀여운 텃밭 이름을 지었다.


    리틀 포레스트.


    남편도 좋아했다.


    “나 배고파서 왔어”

    책은 두고두고 재독해도 영화는 이상하게 같은 영화를 한 번 이상 안 보게 된다. 그럼에도 이따금 생각이 나서 반복해서 보는 영화가 딱 한 편 있는데, 바로 리틀 포레스트다. 일본 원작도 좋아하고, 리메이크작인 한국판도 좋아한다.


    활짝 열어둔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유난히 따스해서 곧 봄이 오는구나 싶어 설레던 어느 3월의 주말. 오랜만에 리틀 포레스트를 틀었다. 이미 몇 번이고 돌려 본 영화지만, 볼 때마다 새롭고 볼 때마다 아름답고 볼 때마다 짧고 담백한 대사들이 내 마음속에 콕 박힌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나도 극 중 김태리(혜원 역)처럼 일상을 더 잘 살아내고 싶어진다. 만물이 소생하며 생동감 넘치는 기운이 필요한 봄과 꼭 어울리는 영화다.


    “잘 왔어”


    오랜만에 고향 시골집에 온 혜원에게 오래된 친구는 잘 왔다고 말한다. 진심이 담긴 한 마디. 나까지 코끝이 찡해진다.


    “나 배고파서 왔어.”


    잘 왔다는 친구의 말에 혜원은 배가 고파서 왔다고 답한다. 처음에는 그 말뜻이 와닿지 않았는데 이제는 배고프다는 말의 의미를 알 것도 같다. 온기라고는 없는 도시의 시린 밥상만 마주하며 살다보면 아무리 먹고 또 먹어도 마음은 허하다는 걸 어느새 나도 경험했기 때문이다.


    얇은 지갑만 있으면 언제든 사 먹을 수 있는 3분 컷 컵라면과 삼각 김밥은 아무리 먹어도 허기가 진다. 외식과 배달 음식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다보면 그 맛이 다 그 맛처럼 느껴지곤 한다.


    그즈음 나는 텃밭을 시작했다. 텃밭에서는 농작물들이 계속해서 자라니 시들기 전에 처리하려면(?) 계속해서 음식을 만들어 먹는 수밖에 없다. 쉴 새 없이 계속해서 내 손으로 요리하게 되니 깨달았다. 집에서 직접 조리해 먹는 음식은 아무리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도 속을 꽉 채우는구나.


    “온기가 있는 생명은 다 의지가 되는 법이야.”

    “도시에 살다보니 보이더라고. 농사가 얼마나 괜찮은 직업인지······.”


    내가 가꾸는 건 작은 텃밭에 불과하지만, 농사를 직접 지어 먹어보기 전까지는 환상만 품고 있었을 뿐 이해하지 못했던 대사들을 이제는 모두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오늘의 리틀 포레스트는 점점 더 내 손으로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으려는 마음. 그리고 그것을 시간의 가치와 저울질하려는 이상한 마음을 모두 내 속에서 밀어버리고 소박한 한 끼라도 정성을 들여 만들어 먹자고 다짐했다. 요리는, 집밥은,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비춰주는 거울이니까.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여름은 힘이 세다

    누가 뭐라 해도 텃밭의 하이라이트는 여름이다, 여름! 이 뜨거운 여름을 위해서 이른 봄부터 부지런히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모종을 심고, 잡초를 뽑고, 물 주고, 때 되면 거름 주면서 그렇게 몇 개월을 보냈나보다.


    주 1회 정도 방문하면 족했던 텃밭은 여름이 오면서 일주일에 몇 번이고 가야 하는 곳이 되었다. 물을 좋아하는 여름작물들은 비가 너무 안 오면 금세 시들고 열매는 맛이 써지기 때문에 여름이야말로 농부가 부지런해져야 할 때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일기예보를 확인한다. 비가 잘 내리지 않는 시기에는 이틀에 한 번꼴로 방문해서 물을 줘야 하고, 비가 온 다음 날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풀을 뽑기 위해 가야 한다. 결국 비가 와도 가고, 비가 오지 않아도 가야 하는 곳. 부지런하지 않으면 절대 가꿀 수 없는 게 텃밭임을, 첫해 여름을 경험해보고 나서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럼에도 나는 여름의 텃밭이 제일 좋다. 봄의 텃밭은 푸성귀 말고는 수확할 게 없어 다소 심심한 감이 있고, 가을의 텃밭은 무나 배추, 쪽파처럼 몇 개월 공들여 키워서 한꺼번에 수확하는 작물들이 대부분이라 수확 전까지는 보상 없이 일만 하는 느낌이라 귀갓길이 헛헛하다. 그런데 여름은 다르다. 여름의 나는 텃밭 덕분에 날마다 부자가 된 것만 같다.


    여름의 텃밭은 자고 일어나면 키가 훌쩍 커 있는 성장기의 아이처럼 돌아서면 또 커 있고, 돌아서면 또 열매를 맺는다. 텃밭에 다녀오는 자전거 앞 바구니에는 그날의 수확물이 무겁도록 쌓이고, 둘이서 먹기에도 늘 벅차서 주변 이들과도 기꺼이 나누는 기쁨을 덤으로 얻는다.


    마트에서 장을 보지 않아도 우리 집 식탁이 풍성해지는 여름을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밭에서 일하다가 발갛게 익은 토마토나 튼실한 오이를 똑 따서 그 자리에서 대충 쓱쓱 닦아 한입 베어 먹는 호사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다.


    여름엔 오전 일곱 시만 돼도 너무 더워 밭일을 할 수가 없어서 동트기 전부터 부지런히 텃밭에 가는 수고로움을 감수해야 하지만, 아침형 인간인 나로서는 오히려 좋다. 한낮의 더위를 피해 새벽부터 운동하려고 나온 사람들을 마주하며 함께 아침의 시작을 열었다며 도취하고, 하루를 씩씩하게 살아낼 활력을 얻는다.


    7월 말이 되면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텃밭들이 모여 농장은 여름 숲을 이룬다. 우리의 텃밭도 날이면 날마다 더 울창해지고 있다. 밭 사이사이의 넉넉한 간격이었던 고랑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좁아졌고, 무릎에도 채 닿지 않던 작은 모종들은 어느덧 내 키를 훌쩍 넘어섰다.


    3월에 심었던 상추 모종은 꽃을 피워서 장마 지나고 진즉에 다 뽑았고, 씨앗으로 뿌린 쌈 채소를 요즘 잘 뜯어 먹고 있다. 물을 너무 많이 주는 바람에 비실비실하지만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주는 기특한 대파도 갈 때마다 툭툭 잘라 온다. 마트 매대에서 한 단에 몇천 원이면 모양이 예쁘고 크기가 고른 대파를 살 수 있지만, 나는 조금 쭈글쭈글하고 빈약해 보여도 우리 집의 대파를 마지막까지 책임지며 열심히 먹고 싶다.


    발갛게 익어가는 대추 방울토마토는 나의 최애 여름작물인데, 모종을 여섯 개나 심은 까닭에 토마토로 매 끼니 배를 채울 수 있을 만큼 아주 넉넉하게 열리고 있다. 마트에서 파는 것과는 감히 견줄 수 없을 만큼 향이 진한 부추는 남편의 최애 작물이다. 뜯고 또 뜯어도 풍성하게 자라주어서 이틀에 한 번꼴로 달큰한 부추전을 만들어 먹고 있다.


    모든 사람이 봄에 텃밭을 계약하던 때의 초심을 꾸준히 이어가는 건 아니다. 더운 여름이 오면 어느 순간 주인의 손길이 닿지 않는 밭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런 밭은 장마가 한차례 지나가고 나면 뭐를 심었는지 더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잡초가 무성한 숲이 되어버린다. 무성해진 숲은 점점 타인의 밭을 침범하기 시작하고, 그 피해를 우리 텃밭도 고스란히 받고 있다. 손으로는 뽑을 수 없을 만큼 막강해진 풀의 힘에 삽이나 낫을 대동해야 하는 순간도 온다.


    직접 텃밭을 가꿔 농작물을 키워 먹기 시작하며 계절 변화에 민감해졌다. 그리고 날씨의 변화를 반가워한다. 비가 오면 ‘우리 텃밭 오늘 물 흠뻑 먹겠네, 좋다! 싶고, 해가 쨍쨍하면 ‘우리 텃밭 오늘 햇살 받고 무럭무럭 자라겠다 싶어서 신이 난다. 그렇게 성가셨던 여름도, 아무 것도 못할 만큼 더워서 싫어했던 여름도 감사하고 당연히 거쳐야 하는 계절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텃밭 덕분이다.


    이제는 텃밭 라이프에 여름이 빠지면 너무 섭섭할 것 같다. 여름은 단연코 사계절 중 가장 강단 있고 꽃 같은 계절. 요즘 나의 생활은 웃거름을 주어야 하는 2주일 단위로 한 달을 세고, 지나는 여름을 아쉬워하면서도 가을 농사 계획을 차츰차츰 세우며 대비하고 있다. 귀찮을 법한 일들이 신나고 재밌게만 느껴진다.


    오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편에게 이제 매년 이렇게 텃밭을 가꿀 거냐고 물었다. 남편은 뭘 그렇게 당연한 걸 묻느냐는 제스처를 취한다. 역시 그렇지?


    이제는 텃밭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다. 물론 완전히 농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건 또 다른 문제인지라,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만. 우리가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싶은 만큼 건강한 방법으로 키워서 먹을 수 있는 텃밭은 오래도록 지속하고 싶은 취미임이 분명 하다. 내년에는 조금 더 크게 농사를 지어야지 싶다. 이 신나고 재밌는 것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으니까.



    서툴러도 스스로 서고 싶어

    몇 번 더 실패하면 어때

    게으름을 부리다가 일주일 훌쩍 넘어 텃밭에 갔다. 한참 물도 자주 줘야 하고 해야 할 밭일이 많아서 사나흘에 한 번은 가줘야 하는데, 너무 더워서 두 눈 질끈 감고 안 갔다. 한참을 돌보지 못한 텃밭은 확실히 주인이 늦장을 부린 티가 났다. 상추는 웃자라며 꽃을 피운 바람에 뽑아버렸다. 자주 갔더라면 몇 번은 더 거뜬히 수확해 먹을 수 있었을 텐데 아까웠다. 깻잎도 너무 많이 자랐고, 부추도 수확 시기를 놓쳐 억세져버렸다. 파프리카는 지난번에 열 개 정도 달린 걸 봤는데 물을 안 준 탓에 모두 말라 죽어버렸다. 고작 일주일이라고 생각하며 늦장 부린 결과는 예상보다 더 처참했다.


    ‘다른 건 몰라도 밭일만큼은 분명한 시기가 있는데 내 사정을 들이밀면서 미뤄서는 안 되는 거구나. 그러면 그 해 농사를 다 망쳐버리는 거구나.


    진작 알았어야 하는 농부의 기본자세를 이제야 뼈저린 경험으로 배웠다. 농사를 짓기 전 인터넷으로 검색하고 책으로 들춰본 지식은 말 그대로 지식일 뿐이다. 실전에서, 경험으로, 내 손으로 직접 겪어봐야지만 진짜 내 것이 되며 비로소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산지식이 된다.


    방울토마토의 줄기는 아무리 잘라내도 다음에 가면 미친 듯이 또 자라나 있곤 했는데, 그제서야 곁순이 무엇인지, 그걸 어떻게 제거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한 번 큰 실수를 한 덕분에 양배추와 케일 모종이 어떤 건지 정확하게 배운 것 역시 나의 지식이 됐다.


    가지치기한다고 잎을 모조리 떼어내는 바람에 광합성을 못해 팍 죽어버린 단호박 넝쿨과, 수분 공급이 부족해서 말라 죽은 고추와 파프리카도, 실전에서 직접 몸으로 겪은 배움이다. 이는 이다음 농사를 더 잘 지을 수 있도록 해줄 질 좋은 자양분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해도 되나?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이렇게 하는 건가?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걸까? 이런 과정을 수회, 수십 회를 거친다. 그 과정에서 실패도 하고 작물을 참혹하게 죽이기도 하고, 반성하고 공부하면서 그다음 번 농사를 좀 더 수월하게 해낼 수 있는 농사꾼이 되어가는 것 아닐까.


    나는 텃밭 농사를 통해서 실패해도 괜찮다는 것을 거듭 배우고 있다. 아니, 처음에는 실패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망설이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봐도 괜찮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내년에는 양배추와 케일을 안 심을 거고, 오이고추보다는 청양고추와 꽈리고추를 심을 거고, 여름 과일 한 종은 무조건 심을 거다. 넝쿨은 넝쿨끼리 쌈 채소는 쌈 채소끼리 구획을 철저히 나눠 심을 거고, 방울토마토와 호박 넝쿨은 아주 크게 올려줄 거다.


    나의 이런 계획은 올해의 실패와 성공을 통해 만들어졌다. 올해 그냥 해보고 싶은 것들을 마구 해보면서 경험을 쌓았다. 그러면서 우리 식구의 식성을 파악했고, 가꾸기 쉬운 것과 가꿀 때 내 기분이 좋아지는 것 등을 조합하여 우리 부부 120퍼센트 맞춤 농장을 만드는 데에 한 걸음 나아갔다.


    내년에는 올해보다 조금 더, 그다음 해에는 내년보다 조금 더 나다운, 우리다운 텃밭으로 성장하게 될 테지. 그 과정에서 몇 번이나 더 실패할 거고, 텃밭 따위 지겨워져서 아예 그만두어버릴수도 있겠고, 조금 더 자급자족에 가까이 가고 싶은 맘에 땅을 사거나 홀연히 시골로 내려갈지도 모른다. 그게 뭐든, 어떤 선택을 하든, 모두 첫 농사의 작은 실패에서 기인한 것일 테다. 그러니 오늘의 실패가 더는 두렵지 않다.



    소소한 기쁨을 찾는 나날

    봄여름가을 그리고 메리 크리스마스

    텃밭을 가꾸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정말이지, 계절을 ‘와락 느끼며 산다. 1년은 사계절이 아니라 24절기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을 텃밭을 가꾸며 몸소 느끼고 있다. 놀기 위한 계절감이 아니라 노동을 위한 계절감이 내 생활에 스며들었다. 절기마다 해야 하는 밭일을 중심으로 생활 패턴이 만들어지고, 제철 채소를 가꾸고, 계절을 누리기 위해 놀러 다니다보면 1년이 훌쩍 지나가버린다. 마치 2.4절기처럼 느껴질 만큼 순식간에.


    봄여름까지는 텃밭을 가꾸느라 바쁘다. 밭일이 생활의 중심이 되어 산다. 새 땅에서 새로 경작을 시작하는 만큼,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할 것도 많고, 의욕도 열정도 넘쳐서 다른 일 모두 제쳐두고 밭일부터 할 정도로 열심이다. 먹는 속도보다 성장하는 속도가 빠른 농작물들을 싱싱할 때 지인들에게 나눠 주려면 틈틈이 만나야 하고, 냉장고에서 시들어가는 꼴은 못 보니 손에 물 마를 새 없이 주방에 열심히 선다. 같은 반찬만 계속 먹기에는 물려서 창의력을 발휘해 같은 식재료로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보는 실험도 한다.


    가을이 되면 밭에 벌레도 많이 없고 여름만큼 잡초 성장도 빠르지 않아서 봄여름에 비해 텃밭에 덜 가게 된다. 여름만큼 물을 자주 안 줘도 되니 더 그렇다. 작물에 지지대를 세워주거나, 그물로 유인해주거나 순치기(순지르기. 작물의 메인 원 줄기와 가지를 제외한 곁가지와 줄기 등을 제거하는 일. 줄기와 잎이 너무 크게 무성해지는 것을 막고 그 에너지를 모두 열매로 향하게 해 수확물의 양과 질을 높이는 방법이다.)를 해줄 필요도 없이 그저 땅의 기운을 받아 가을 무가 무럭무럭 크고 김장 배추의 속이 가득 차길 기다리는 시간이다.


    가을은 대롱대롱 매달린 작물을 따 먹는 여름과 다르게, 한 계절 뜸을 들이듯 소중하게 키워서 한 방 크게 수확하는 재미가 있다. 많은 양을 만드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배추와 무로 김장 김치를 담가야 하기 때문에 은근히 긴장하며 보내는 계절이기도 하다(망칠까봐).


    배추 겉잎으로 시래기를 만들고, 대파와 쪽파는 송송 썰어 냉동실에 보관해두면서 소소하게 겨울을 대비하기 시작할 때쯤 가을 텃밭 갈무리도 끝나고 약속이나 한 듯 겨울이 찾아온다.


    겨울은 주어진 시간이 어색하게 느껴질 만큼 시간이 아주 많아지는 계절. 내가 그동안 텃밭에 이렇게 많은 시간을 썼던 건가? 싶을 만큼 하루의 공백이 커져서 잠시 방황할 만큼, 시간이 아주 많아진다. 밤도 길고.


    이럴 때 크리스마스가 있어서 다행이다. 이 글을 쓰다보니 깨달았다. 그래서 내가 크리스마스를 좋아하는구나. 밭일도 못 하고 캠핑도 떠나지 못하는 겨울, 그 겨울 나의 유일한 이벤트라서. 11월부터 캐럴을 틀고, 12월엔 크리스마스트리를 꺼내며 연말 분위기를 누구보다 느긋하게 꽉꽉 채워서 즐긴다.


    매일 돌아다니며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밭일하느라 분주하게 밖을 향했던 나의 시선을 안으로 돌려서 차분하게 집안 살림을 돌보고, 내 안을 들여다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긴 겨울에 적응하고 나면 겨울만의 매력이 쏟아진다. 길고 깊은 밤엔 다음 날 아침에 먹을 발효빵 반죽을 하고, 두꺼운 벽돌 책을 읽어나가고, 가을 내내 다람쥐처럼 냉동실에 저장해놓은 농작물들을 보물인 양 하나씩 꺼내어 야금야금 먹는다. 봄여름가을 그리고 겨울. 이토록 긴 겨울도 그런대로 충만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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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