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모과나무를 맨 처음 심은 이는 누구였을까
 
지은이 : 오경아 (지은이)
출판사 : 몽스북
출판일 : 2024년 04월




  • 작가 오경아가 식물들과의 공존과 그들의 치열한 생명력에 대한 깊은 존중을 담은 에세이입니다. 작가는 정원에서의 시간과 식물들의 오랜 생명에 대해 성찰하며, 그들과의 인연을 이야기합니다. 10년간의 정원 생활을 통해 소박한 이야기와 생태 환경에 대한 고민을 담아냈습니다.


    커다란 모과나무를 맨 처음 심은 이는 누구였을까


    찬란하고 아름답고 아픈 정원

    난 매일, 정원에서 안부를 묻는다

    정원의 시간은 빠르고 거침없다. 엊그제까지도 보라색의 꽃을 피워주던 청아쑥부쟁이가 한 차례 서리에 풀이 죽더니, 결국 지난밤 몰아친 영하의 추위 속에 수명을 다해 버렸다. 가을을 지나 겨울로 접어드는 정원의 풍경은 하루가 다르게 초록을 잃어간다. 메마르고 푸석거리고 앙상하다. 하지만 그게 꼭 싫은 것은 아니다. 겨울이 다가와 식물이 동면에 접어드는 쓸쓸함도 계절이 주는 정원의 맛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해가 좀 나서 오후의 기온이 따뜻해지면 미뤄 두었던 튤립, 수선화, 알리움의 알뿌리를 심어볼 참이다. 정원 일은 단순하다. 대부분 쪼그려 앉아 뭘 심고, 뽑고, 자른다. 이 단순한 일 속에 내가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누군가에게 안부를 묻는 일이다. 안부를 사전에서 찾으면 "어떤 사람이 편안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 그렇지 아니한지에 대한 소식 또는 인사로 그것을 전하거나 묻는 일"이 라고 적혀 있다. 딱 맞는 말이다. 정원의 화단 속에서 나는 서울에서 혼자 자취를 하는 큰딸에게, 멀리 해외에 떨어져 지내고 있는 작은딸에게, 늘 위험한 작업과 힘겨운 일을 하는 남편에게, 이미 돌아가셨지만 어딘가에서 우릴 지켜볼 것만 같은 부모님께도 안부를 묻는다.


    오늘도 별일 없이 잘 지내기를, 그들을 위해 마음을 다해 기원하고 그러다 결국은 이 안부가 식물에게도, 그 식물과 더불어 살아가는 동물들에게도 전해진다. 이미 꽃을 다 피우고 죽은 듯 말라버린 쑥부쟁이의 뿌리는 편안하게 올겨울을 보내고 내년을 기약해 줄 수 있을지, 이제 심으려고 하는 튤립의 알뿌리는 이번 추위를 잘 견뎌줄지, 정원 여기저기에 망을 치던 그 많은 거미들은 어디에서 이 겨울을 나는 것인지, 어쩌다 식구가 돼버린 길고양이도 하루 종일 보이지 않으면 안부가 궁금해진다. 사실 정원을 만든다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식물을 심는 일로 끝나지 않는다. 내가 심은 식물이 불러들이는 수많은 생명체와 더불어 살아가는 새로운 우주가 생겨난다. 벌, 나비, 새, 작은 다람쥐, 돌확 물에서 살고 있는 물두꺼비, 어미가 버린 새끼 고양이들, 그리고 내 눈으로는 짐작할 수 없는 수많은 작은 동물이 함께 살아가기 때문이다.


    정원에서 살아가는 이 많은 생명체와 우린 일종의 동거 생활을 하는 셈이다. 그러니 동거 생명체의 안부를 궁금해하고, 우리 서로 건강하게 잘 살아가자고 기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얼 바켄(Earl. E. Bakken, 1924~2018)은 혁신적인 의료 기기를 발명하고 만들어낸 미국의 기업가다. 그의 이름을 딴 미국 미네소타 대학의 바켄 센터는 인간의 질병과 그 치유법을 연구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그곳에서 발표한 자연과 정원이 우리에게 미치는 효과에 대한 연구와 논문은 매우 흥미롭다. 우리가 그간 막연하게 산에 가면 왠지 기분이 좋아지고, 정원 일을 하고 나면 마음이 안정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게, 실은 매우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것이었음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이 센터의 연구자인 마르쿠스(Marcus)와 바른(Barnes)에 따르면 사람들의 3분의 2는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으로 자연을 찾는다고 한다. 그리고 95%의 사람들은 자연 속에 있을 때 기분이 좋아짐을 느끼기도 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스웨덴 챌머스 대학의 건축가 교수인 로저 얼리치(Roger Ulrich) 박사는 순수 자연이 아닌 정원에서도 우리가 똑같은 이득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정원에서 우리는 좀 더 건강해지고, 생존력이 강화되고, 정신적으로 자연과 교감하는 능력이 증폭되었다고 한다. 또 스트레스를 받은 후에는 단순히 자연이나 아름다운 정원 사진만 보아도 혈압이 낮아지고, 두뇌 활동이 활발해지고, 호르몬 분비가 촉진되었다고 하는데, 이걸 의학적인 효과로 보면 스트레스를 감소시키고, 웰빙의 감각을 회복 시키고, 혈압을 낮춰주고, 걱정·근심 ·슬픔을 완화시키고, 부정적인 생각을 전환시킨다는 것이다. 정원 일을 할 때 우리 몸에서 생성되는 호르몬이 생기와 활동을 촉진시키기 때문이라는데, 이 논문만으로 보면 정원 일이 마치 만병통치약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내 경험에 의하면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이 역시도 함정이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정원 일조차도 우리가 즐길 수 있을 만큼, 마음을 비웠을 때 이런 효과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정원이 조금 흐트러지고, 덜 예쁘고, 앙상하고, 황폐하면 또 어떤가. 계절의 흐름에 자연 역시 늘 아름답지 않고, 때론 혼돈과 미움이 존재함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의 정원도 흐트러지고, 어수선하고, 예쁘지 않아도 괜찮다고 위로하길 바란다. 그냥 그 안에서 우리 모두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다 같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지 않을까. 세상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지구에 사는 동안 우리가 갖게 될 평온함임을. 그 어려운 숙제를 정원에서 누군가에게, 다른 생명체에게 안부를 물으며 되새겨 본다.


    오래된 모과나무를 심다

    “아버님, 이번 생은 끝났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네요. 저도 이제 그만할랍니다. 아버님 원하는 대로 사는 거 이제 그만하고, 나도 내 맘대로 살래요.” 칠순을 넘긴 장남이 풀이 무성한 부모님의 무덤가를 벌초하며 이런 말을 읊조렸다고 한다. 조상에게 받은 땅을 터전으로 50년 넘게 나무도 심고 가꾸어 남부러울 정도의 부를 축적한 분이다. 하지만 이 많은 재산 탓에 아내, 자식들과 싸움이 나고 결국은 아픈 몸으로 황혼에 혼자가 되었다는 고백을 들었다. 20년 가까이 알고 지내온 분의 허탈한 삶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하루 종일 가슴이 먹먹하고, 왠지 모를 슬픔에 가라앉기만 했다. 집수리를 하는 중이라 마당에 놓을 나무 한 그루 사기 위해 찾아갔던 길이었는데 그만 마음이 너무 무거워지고 말았다.


    커다란 모과나무를 맨 처음 심은 이는 누구였을까 요즘 나는 속초에서 집과 정원을 수리 중이다. 영국 유학에서 돌아와 2013년, 속초에 터전을 잡았으니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워낙 바람이 많은 지역이라 큰바람 치는 날이면 집 전체가 흔들리기도 한다. 그래도 지은 지 170년도 넘은 이 오래된 한옥의 대들보며 서까래의 목재가 아직도 잘 견디어 주니 고마울 뿐이다. 서까래 사이 페인트칠도 다시 하고, 바닥에 마루도 다시 놓고, 그리고 이제 나이 들어갈 일을 생각해 되도록이면 정원도 관리하기 수월하도록 바꾸고 있다.


    그간 정원 디자인 일을 하면서 지켜온 큰 원칙 중에 하나가 큰 나무를 옮겨 심지 않았다는 것이다. 큰 나무가 들어서면 더할 나위 없이 멋질 터이지만 집을 오히려 압도할 가능성이 높고, 또 식물의 자생력을 생각해 봐도 힘겨울 게 뻔하기 때문이다. 대신 디자인적으로는 작은 나무를 심어 나무가 크는 세월만큼 우리도 함께 성장하는 걸 권장한다. 하지만 속초 집 정원을 리노베이션하는 과정에서는 맘을 바꿔 정말 크고 오래 묵은 모과나무를 한 그루 들였다. 이 오래된 집에 어울리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 정도는 있어도 좋지 않으냐는 남편의 권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무를 결정하고, 막상 옮기려고 보니 무게만 무려 3톤, 뿌리 지름이 1.5미터가 넘었다. 운반도 어려웠지만, 도착 후에도 크레인과 지게차를 이용해 깊숙한 앞마당 정원까지 들여오는 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모과나무는 심은 직후부터 한 잎 두 잎 노랗게 단풍이 들어 지금은 추적추적 오는 빗속에서 가을 분위기를 홈씬 일으키는 중이다. 원칙에 벗어난 일이긴 했지만 큰 나무, 오래된 나무를 옮겨 와 심어보니 참 다르다. 굵은 가지를 만지다 보면 이 나무를 맨 처음 심었던 이는 누구였을까, 그는 어떤 마음으로 이 나무를 어디에 심었을까, 그리고 주인은 몇 번이나 바뀌었을까, 이 모과나무는 지금의 주인이 된 나와 우리 가족을 사랑해 줄까······ 많은 생각이 든다. 그냥 나무 한 그루를 심은 것이 아니라 백 년도 넘게 살아온 생명체의 시간을 함께 들여놓은 느낌이다. 사실 오래된 한옥을 구입할 때도 비슷한 마음이었다. 이 집을 처음으로 지었던 이의 마음, 이 집을 거쳐 간 주인들의 마음이 이 집에 남아 있다는 느낌들. 사실 이 지구의 땅을 우리는 경계를 치고, 서류를 만들어 주인이 누구인지를 가르고, 매년 재산세를 내며 이곳이 내 땅이라고 말뚝을 박는다. 하지만 진정 우리가 이 땅의 주인이 맞을까? 결국 이 지구의 모든 것은 우리가 잠시 빌려 쓰고 돌려주는 일임을 어쩔 수 없이 깨달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소유를 해서 무엇하랴, 다 버리고 살자는 종교적 무욕에는 나는 도저히 미치지 못할 듯싶다. 하지만 이런 마음은 늘 들곤 한다. 영어에 ‘steward라는 단어가 있다. 우리말로 해석하면 ‘관리자가 될 텐데, 땅의 주인보다는 어쩌면 ‘땅의 관리자라는 표현이 더 적절한 게 아닌지. 모과나무의 학명은 Pseudocydonia sinensis다. 중국이 자생지이지만 우리나라에 들어와 산 지도 아주 오래 되어 이제는 토착 식물로도 여겨진다. 모과는 유난히 노랗고 향기가 나는 열매를 맺는데,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보다 따고 난 후에 향이 더 진해져서 집 안에 두어 방향제로도 활용한다. 떫고 쓴 맛이 있기는 하지만 설탕과 함께 조려서 잼을 만들기도 하고, 서양에서는 젤리를 만들거나, 타르나 파이를 만들기도 한다. 앞으로 나는 이 사연 많은 모과나무에 새싹이 돋고 낙엽이 지는 것을 지켜보며 나의 가족 그리고 나를 아는 모든 이의 안녕을 열심히 빌어볼 참이다. 그중에서도 이 모과나무의 전 주인을 위한 기도도 빼놓지 않을 참이다. ‘부디 그의 삶이 조금 더 평온해지기를!



    식물에도 MBTI가 있다

    식물에도 MBTI가 있다

    어느 날 가족 단체 채팅방에 첫째 딸이 한번 해보라며 설문지 사이트의 링크를 보냈다. 수많은 질문에 이래저래 답을 하고 나니, 나의 성향이 ENTJ라고 한다. 요새 유행하는 MBTI 테스트였다. 둘째 딸이 불쑥 이런 문자를 남겼다. “아, 내가 왜 그간 엄마한테 상처를 받았는지 이제야 알겠다.” 이 문자의 사연은 MBTI 테스트 몇 달 전으로 거슬러 간다. 해외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둘째 딸이 친구와 싸웠는데, 둘이 함께했던 추억의 물건을 친구가 자신도 소속돼 있는 단체방에 팔겠다고 올려서 너무 속상하다고 하소연을 했다. 그때 나는 내 의식의 흐름대로 물었던 것 같다. “그래? 어떤 물건인데?” 그러자 둘째 딸은 너무 황당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에잉? 그게 왜 궁금한데? 여기서 핵심은 내가 속상하다는 거야, 엄마.” “아니, 어떤 물건인지에 따라서 그게 정말 슬퍼할 정도로 힘든지, 아닌지 판단을 하지.” “헐~” 둘째 딸의 성향은 나와 한 자리가 다른 ENFJ라고 했다.


    MBTI 테스트가 맞느냐 안 맞느냐, 어떤 근거로 그런 분석을 하느냐는 중요치 않다. 그날 이후 나는 같은 질문에도 사람에 따라 다른 답이 나오고, 내가 상당히 고민하여 준 답이 상대에게 전혀 위로도 해결도 안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실은 식물에도 일종의 서로 다른 MBTI 성향이 있다.

    E와 I를 각각 외향적, 내성적이라고 분류한다면 식물에겐 햇볕을 좋아하는 E와 반그늘 상태를 좋아하는 I 식물이 있다. I 성향의 식물은 지나치게 햇볕을 받으면 오히려 잎이 타들어 간다. 보통은 큰 잎을 지닌, 열대 우림 기후에서 사는 식물들 중에 이런 성향이 많다. N과 S의 차이는 이런 비교가 가능할 듯하다. 상록 침엽수처럼 골고루 햇볕을 받기 위해 원뿔 모양의 매우 기하학적인 형태를 지닌 식물군이 있는가 하면, 가지를 마음껏 수평으로 뻗어가며 멋대로 자라는 활엽수가 있다.


    그런가 하면 F와 T의 차이는 습도, 온도, 바람, 햇빛에 유난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식물군과 탈없이 무던한 식물군으로 구별할 수 있을 것 같다. 식물을 키우면서도 태생지를 따져 빛을 좋아하는지, 어떤 온도를 좋아하는지 등의 조건을 가려줘야 한다. 하물며 사람과 함께 지내는 일에 너는 틀렸고, 나는 옳다 가 있을 수 있나. 부디 살면서 깨달은 것을 원점으로 돌리는 그런 실수만이라도 하지 않으며 살아가기를 나에게 당부할 뿐이다.



    야단법석, 나의 정원생활

    요란한 비바람 속 나의 정원은

    한동안 클래식 프로그램의 방송 작가로 일을 했다. 그때 클래식의 세계를 공부도 했고, 그러다 보니 점점 그 음악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장르는 단독 악기 버전보다는 모든 악기가 조화를 맞추는 오케스트라 연주곡이다. 그중 익히 잘 알려진 곡이지만 끝까지 들어본 사람은 많지 않은 곡이 있다. 바로 비발디의 사계다. 사계는 원래 비발디가 붙인 제목이 아니다. 1720년 비발디는 12개의 바이올린 콘체르토를 작곡했고 그 안의 네 곡이 유난히 인기를 끌었는데, 평론가들에 의해서 마치 네 곡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연상시킨다는 평을 받았다. 그게 오늘날 사계라는 이름의 바이올린 콘체르토 가 되었으니 비발디는 자신의 곡이 이렇게 불리고 있다는 걸 모를 것이다.


    그중 나는 덜 인기가 있는 여름을 최근에 부쩍 많이 듣는다. 10분가량의 곡은 봄, 가을, 겨울에 비해서 다소 지루하고, 느슨한 구간을 통과해야 드디어 절정에 치닫는다. 어느 곡보다 변화가 드라마틱한데, 이게 정말 여름 날씨를 똑 닮았다. 7월의 여름, 속초 앞 바다는 사흘 내내 짙은 안개가 피어올라 설악산까지 휘감았다. 설악산까지 해무로 잠기면 말로는 형용하기 힘든 무드가 생긴다. 우뚝 솟은 빌딩도, 논과 밭도 마치 구름 속에서 시간이 멈춘 듯 느려진다. 그러다 해무가 걷히니 구름 한 점이 없는 하늘에서 눈이 부신 푸른색이 쏟아졌다. 맑은 하늘을 받아낸 바다엔 잔물결이 수천, 수만 개의 윤슬을 만들어냈다. 쏟아진 햇살은 바다와 땅의 온도를 급격히 올려, 새벽에 섭씨 18도에서 시작된 기온이 섭씨 30도까지 무섭게 치솟았다.


    바다가 뜨거워지니 밤에도 뜨거운 바람이 불었다. 다음 날 아침부터 어둑어둑 동해 바다엔 먹구름이 몰려왔다. 널어놓은 빨래가 걱정되어 집으로 재촉하는 내 발걸음보다 더 빠르게 빗방울이 떨어졌다. 우리 집 양철 지붕에 떨어지는 요란한 빗소리와 번쩍이는 번개의 섬광, 하늘을 쪼개는 천둥소리가 세상을 삼켰다. 그러다 쏟을 만큼 쏟아낸 먹구름은 격정의 연주를 끝낸 듯 뚝 끊어져 사라지고, 하늘엔 참 멀쩡한 햇살이 다시 등장했다. 이 모든 날씨의 변화가 한여름, 고작 사흘간에 벌어진 일이다. 비발디가 여름을 생각하고 작곡을 했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정말 이 여름을 꼭 닮은 곡임에는 틀림없다. 어느 계절도 쉽고 다정하지 않다. 그중에서도 여름은 모든 식물이 걷잡을 수 없이 나의 통제를 벗어나는 힘겨움의 시절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식물이든, 저절로 자리를 잡은 식물이든 가리지 않고 최고의 성장을 이루는 계절 또한 여름이다. 비발디의 여름처럼 때론 참을 수 없게 사람을 늘어지게 하고, 그러다 폭풍우처럼 휘몰아치고, 통제를 벗어난 식물들은 하루에도 몇 센티미터의 키를 키워 나를 무섭게도 하지만, 여름의 매력도 많다.


    어느 계절이 여름만큼 활기찰 수 있을까. 이때만큼은 시장을 가지 않아도 텃밭에서 키운 작물들로 배를 불릴 수 있다. 정원도 맘먹기에 따라선 손을 댈 필요가 없어진다. 그들의 생태계에 맡겨두면 식물들의 질서로 자라주고, 너무 힘에 부쳐오면 가을이 찾아와 소멸을 시작하니 큰 걱정도 할 일이 아니다. 그저 이 계절의 즐거움을 최대한 즐기려는 마음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우리들의 협업

    도시를 떠나올 때 먹어야 할 마음

    강원도에 살면서 정원 생활을 하는 다섯 가구의 모임이 있다. 각각 평창, 양양, 인제, 속초에 골고루 분포되어 산다. 거의 한 달에 한 번씩 번갈아 자신의 집에 초대해 가볍게 저녁을 먹고 수다를 떨다 헤어지는 아주 단순한 친목 모임이다. 이 모임에서는 대화의 주제가 딱 하나다. 사업가, 변호사, 학원 경영 등 각자 일하는 분야는 다르지만 우리끼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리 다른 주제로 대화를 시작해도 결론은 늘 정원 생활 이야기로 회귀한다. 누군가 정원에 뱀이 많은데 어떻게 처리를 하냐고 물으면 경험자가 신속하게 대답한다. 각종 민간요법에, 듣도 보지도 못한 뱀 잡는 연장과 도구, 그리고 잡는 방법까지 매우 상세하고 거침이 없다. 여기에 닭 키우는 이야기, 키우는 개가 도망가서 산을 두 개나 넘어 잡으러 다녀온 이야기 등도 빠지지 않는다. 이제 막 싹이 오른 채소와 나무순을 죄다 뜯어 먹는 고라니의 습격은 다 함께 주먹을 쥐고 공감하는 천인공노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멧돼지도 만만치 않은데,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멧돼지는 새끼랑 같이 있는 멧돼지"라는 명언도 쏟아진다.


    이 다섯 가구의 친밀함은 모두 도시 생활을 떠나와 시골살이, 정원을 가꾸며 살아간다는 공통점이 있어서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도시 생활의 장점을 잘 안다. 오히려 시골에서 살다 보면 도시가 가진 반짝임이 더욱 그립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 다시 그 반짝이는 도시로 돌아가겠느냐"는 질문에는 모두가 망설임 없이 "에이, 그건 못하죠. 이제"라고 답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도시는 자연의 이 모든 위험으로부터 도망친 인간에겐 가장 안전한 곳이다. 그러니 우리가 살아가는 데 더할 나위 없이 편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이상향에 가까운 도시가 나는 어느 순간부터 점점 무서워졌다. 텁텁한 공기는 폐를 시커멓게 그을리게 하는 듯하고, 밤이 되어도 잠들지 않는 도시는 만성 불면증을 일으키고, 밀집된 공간 속에서 압사할 듯 조여오는 부대낌에 그냥 얼굴만 봐도 짜증과 불편함이 몰려왔다. 그래서 나는 이 도시의 어둠과 무서움이 싫어서 비교적 빨리 도시를 떠나온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골이, 자연이 결코 만만한 건 아니다. 사실 자연 친화적 삶이라는 말에는 양면성이 있다. 자연 속으로 다가간다는 것은 우리에게 곁을 주지 않았던 생명체를 가까이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식물도 알고 보면 동물만큼이나 사납고, 사람에게 위협적일 때가 많다. 빽빽한 풀숲에 잘못 접어들면 모기들의 엄청난 공격을 받게 된다. 흡혈인 모기는 알고 보면 식물이 키우고 있는 정찰병 내지는 공격조라고도 볼 수 있다. 식물에 가까이 다가서는 것 자체를 이들이 막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꽃가루나 수액도 식물들의 방어 수단 중 하나다. 그래서 꽃가루가 인간에게는 천식과 같은 폐 질환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고, 또 식물의 줄기를 자르면 수액이 흐르는데 이 수액을 만지면 피부 질환도 생긴다. “식물은 정말 좋은데, 벌레 끼는 건 너무 싫어요”라는 말은 애초에 성립이 되지 않는다. 식물이 꽃을 피우는 것은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곤충을 수분자로 부르기 위해서다. 그러니 인간은 원치 않겠지만 식물은 벌레들과 공생할 수밖에 없다.


    모든 일에 일장일단, 양면성이 있듯이 자연 친화적 삶도 그렇다. 불편하고, 무섭고, 때론 귀찮을 때도 있다. 그래서 도시를 떠나올 때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 시골이 늘 말갛고, 시리도록 푸르고, 고요하지만은 않다는 것. 이 양면성까지도 모두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 친화를 선택한다면 이건 분명히 말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이유 없이 기분을 좋게 하는 맑은 하늘과 근심을 잠시 잊게 하는 장엄한 파도와 괜찮다고 든든하게 위로해 주는 웅장한 산이 나에게 때때로 불쑥 다가와 준다는 것. 그게 참 묘하게 그 어떤 것보다 위로가 된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고 말이다.

    창문을 열자 소리 없던 자연이 나에게 들어온다

    대설주의보 알람이 요란하게 울린다. 영동 지방의 폭설 예보다. 설악산 인근에 내리는 눈은 절대 낭만적이지 않다. 눈을 치우는 속도가 눈 내리는 속도에 따라잡히면 큰일이다. 눈이 종아리를 웃돌 정도만 쌓여도 여닫이문은 압력 탓에 그 어떤 힘으로도 열리지 않는다. 다행히 한옥 집은 미닫이문이 많아, 집 안에서 탈출은 가능하지만 문제는 대문이다. 대문까지 10미터 남짓한 길을 내는 데도 몇 시간이 걸리고, 대문이 열리게 하려면 그 반경을 다 치워야 한다. 그것도 쌓인 눈이 얼기 전에. 그렇지 않으면 세상 부드러워 보이는 눈이 곡갱이로 내리쳐도 깨지지 않는 차갑고 쌀쌀맞은 얼음덩어리임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눈이 다 고약한 건 아니다. 치운 눈을 화단에 쌓아두면 봄에 눈이 녹으며 식물들에게 물을 공급해 줄 수 있다. 생각해 보면 내 삶은 정원 생활을 하기 전과 후로 나뉘는 듯하다. 경기 일산과 서울 여의도를 매일 오가며 방송 작가로 살았던 도시에서의 삶 속에 자연은 늘 창밖에 있었다.


    묵음 처리된 화면처럼, 창밖에서 자연은 소리 없는 바람을 불어댔고, 눈을 내렸다. 소리를 없애면 세상 무서운 호러 영화도 우스운 분장 효과로만 보이듯, 창 하나를 두고 그렇게 자연은 그리 두려울 것도 다정할 것도 없는 현상일 뿐이었다. 지금의 나는 늘 날씨에 노심초사다. 오늘 아침 폭설 경보에 남편은 헐레벌떡 옷을 입고 뛰어나갔다. 왜 키우는지 모르겠다고, 나를 원망하면서도 폭설에 닭이랑 고양이가 굶을까 싶어 사료를 챙기고, 눈을 치우러 나간다. 눈뿐만이 아니다.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은 각종 물품을 동여매느라 정신없고, 폭우엔 하천의 범람을 걱정한다. 교통 정보보다 날씨 예보가 우리 삶에서 훨씬 중요한 일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하지만 이 자연과의 몸살이 나와 남편의 몸에 변화를 준 것도 사실이다. 추운 날, 더운 날 할 것 없이 자연에 노출이 되다 보니 늘 달고 다녔던 두통과 코막힘 증상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 과학적인 분석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몸이 자연에 부대끼며 생겨난 일종의 탄력임을 넌지시 깨닫는다.


    묵음 처리된 창밖의 자연은 우리 몸에 경고를 보내지 못한다. 창문을 열면 묵음 처리된 화면에서 벗어나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그게 어떤 소리든, 자연이 내는 소리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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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