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를 싫어한다고, 나 때문에 화났다고 걱정해도 별수 없잖아? 결국 그건 내 상상이고, 정말로 그런지는 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거야. 그냥 ‘타인은 픽션’이라고 생각하면 돼.” 저자는 남들에게 조금의 실수라도 보일까, 전전긍긍하며 눈치를 살피느라 진이 빠질 지경이었다.
인간관계가 힘들어 직장 생활을 포기한 저자는, 자타공인 ‘아싸’지만 밤이면 연락처를 뒤적이고 심지어 친구 사귀는 법을 인터넷에 검색해보는 별난 취미를 가졌다. 사람들 속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가도, 집에 돌아와 기진맥진한 자신을 보며,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 한탄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자신의 상처를 내보이는 연약한 마음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걸 차마 할머니에게 말하지 못하는 가족들의 배려심에, 아빠의 깊은 우울증을 답답해하다가도 연민이 비치는 엄마의 모습에, 진정한 행복과 삶의 본질이 숨어 있다는 걸 알아간다. 신세 지는 걸 끔찍이도 싫어하지만, 인간은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걸. 서로에게 조금씩 폐를 끼치며, 마음의 무게를 나누며, 그렇게 서로에게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게 인생이라는 것을, 아주 예민하고 민감한 HSP 인간은 그렇게 삶을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
■ 저자 나오냥
이바라키현에서 태어났다. 홋카이도대학교 문학부를 졸업하고 출판사에 취직했다. 그림책 편집자로 일했으나 직장 생활이 맞지 않아 우울증 진단을 받고 휴직했다. 직장을 그만둔 후에는 프리랜서 그림책 작가로 살고 있다. 2020년 X(구 트위터)에 우울한 마음과 고민을 담은 일러스트를 올리면서 좋은 반응을 얻기 시작했고 지금은 24만 팔로워(2024년 5월 기준)가 찾는 인기 계정이 되었다. 지은 책으로는 《100년 뒤엔 모두 죽고 없으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우울에서 벗어나기 ~우울증에 걸려 온 힘을 다해 도망쳐본 이야기~》 《마음의 불안이 개운하게 가시는 우울 청소기 일러스트 수첩》이 있다.
twitter.com/naonyan_naonyan
■ 역자 백운숙
수능 공부가 싫어서 외국 소설책에 한눈을 팔았는데, 번역가가 세상에서 제일 멋져 보였다. 경희대학교에서 한국어학과 일본어학을 전공하면서 잠시 도쿄에서 지냈고, 한국으로 돌아와 일본계 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했다. 지금은 바른번역에서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며 좋은 책을 소개하는 데 힘쓰고 있다. 독자에게 기쁨을 줄 책이 탄생하는 데 손을 보태고 있는 지금이 행복하다. 《그럼에도 왜 사느냐 묻는다면》 《나를 아끼는 정성스러운 생활》 《취향을 담은 라이프스타일 레시피》 《말투 때문에 말투 덕분에》 외 여러 책을 한국어로 옮겼다.
■ 차례
1장
솔직해질 용기
왜 평생 남들 눈치만 보고 살았을까?
신세 지는 걸 너무 미안해하지 않기
맞지 않는 일을 그만둘 용기
가까이 보면 실패, 멀리서 보면 해결
다양한 곳에 다양한 나로 살기
실수는 누구나 해, 받아들이는 게 다를 뿐
꿈이 있어야 한다는 강박
나와 맞지 않는 일을 깨닫는 것도 값진 수확
과도하게 사과하지 않을 것
내 존재감이 공기 같을 때
잘하지 못하는 건 굳이 애쓰지 않아도 돼
우울증이 일깨워준 것
내일 할 수 있는 건 내일 하면 돼
[만화] 나를 부정하는 게 아니야
[칼럼] 자신의 답을 찾는 과정이 중요해요
2장
늘 숙제 같은 타인
사실 나는 상처받는 게 싫었어
남의 말은 한 귀로 흘려듣는 자세
낮은 자존감이 타인에게는 불안감으로
누군가에게는 힘이 되는 말 한마디
미움받는 게 왜 이렇게 두려울까?
겸손하기만 해도 안 돼
외면했던 내 마음에 솔직해지기
때로는 모르는 게 나을 수도 있지
타인의 보잘것없는 말에 상처받지 않기
타인은 픽션
남과 비교하며 우울해지는 나를 마주하는 방법
삶을 리셋하는 것처럼
잘나가는 타인이 불편한 마음
앵글 밖에서도 멋진 사람
남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과 그러고 싶지 않은 마음 사이에서
아싸가 오히려 좋아
[만화] 상처받을 걱정 없이 행동하고 싶어
[칼럼] 내 마음 같지 않은 이유는 결국 알 수 없어요
3장
함께 행복하기
내 두 팔이 닿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고 싶어
부모님 뜻과 달라도 내 삶을 살고 싶어
나의 경험을 넘어서 타인을 이해하기
할아버지와의 이별을 그만 슬퍼하기로 했다
누군가를 위한 배려의 거짓말
나이가 든다는 건 변화를 받아들일 줄 안다는 것
[만화] 내 주변부터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칼럼] 부모님 의견은 참고로만 삼으면 딱 좋아요
4장
담대한 삶의 태도
내 인생을 받아들이는 법에 대해
너무 큰 기대가 삶을 방해할 때
슬픔이 때로는 위로가 돼
상처는 또 다른 상처를 낫게 한다
쫄보가 살아남는다
세월을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과 그렇지 않은 마음
나를 조금씩 변화시키는 아주 작은 성장에 관해
밖에 한 발짝도 안 나가도 행복하고 싶어
존재 그 자체의 소중함에 대하여
공감은 가장 좋은 약
(만화) 마음을 보물로 가득 채우고 싶어
끝마치며
해설 HSP의 밑바탕에는 마음의 병이 숨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오냥의 에세이는 HSP로서 겪은 어려움과 그를 극복하는 과정을 유머와 일러스트로 그려내며, 자기 이해와 수용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일상에서 작은 행복을 찾고 자신의 방식으로 충실히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하고, 정신의학과 전문의의 코멘트가 깊이를 더합니다.
오늘도 밖에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지만
솔직해질 용기
맞지 않는 일을 그만둘 용기
‘고생 끝에 낙이 온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란 말이 있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나는 이런 말이 영 별로다. 일단 시작한 일은 아무리 힘들어도 참고 진득하게 하는 게 좋다는 고정관념이 우리 사회에 깊이 자리 잡은 것 같다. 하지만 나와 맞지 않는 일은 그만두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나는 입사 1년 차에 우울증으로 고생하다 휴직했다. 마음 한편으로 한계를 느꼈지만, 이런 괴로운 환경마저 견뎌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복직한 뒤에도 역시나 안 맞는 환경은 안 맞았고, 인간관계는 벅찼다. 결국은 마음의 병이 심해져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와는 안 맞는다는 사실을 조금 더 빨리 받아들였다면 두 번이나 휴직하여 마음 고생할 일도 없었을 거라고, 이제 와서야 생각해본다.
‘나랑 안 맞아 ‘그만두고 싶어라는 마음의 소리를 못 들은 척 무시하면 결국 언젠가 한계가 오기 마련이다. 간혹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다 스스로 세상을 등진 이의 뉴스를 볼 때면 남 일 같지 않아 마음이 아리다.
직장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물론 한곳에서 오래 근무하는 건 멋진 일이지만, 나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면 망설임 없이 홀가분하게 발을 뗄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실수는 누구나 해, 받아들이는 게 다를 뿐
예전에 다녔던 회사에서 크게 사고 친 선배가 있었다. 중요한 회사 내부 정보를 거래처에 팩스로 보내는 바람에 거래처가 노발대발했던, 돌이켜봐도 어마어마한 사고였다.
사내에서는 긴급 임원 회의가 열렸고, 선배는 호되게 한 소리 들었다. 늘 밝고 책임감이 강한 선배가 이번 일로 크게 자책해 당장 내일부터 회사에 안 나오는 건 아닐지 우려스러웠다.
다음 날, 선배는 예상을 깨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했다. 심지어 늘 그랬듯 담담하게 일을 하는 게 아닌가. 부장님은 아직도 언짢은 기색이 역력한데 말이다. 뉘우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다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선배는 대형 사고를 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강한 멘탈의 소유자로 도리어 동료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었다. ‘저 멘탈 본받고 싶네 하고 부러워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다니, 놀랍기까지 했다.
실수를 하면 싫은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의연하게 지내려고 노력해보자.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진득하게 기다리면 시간이 내 편이 되어주기도 한다.
과도하게 사과하지 않을 것
실수라도 하면 남이 날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스러워 좌불안석이 되고는 했다. 화가 나진 않았을지, 나 때문에 난처해진 건 아닐지 부정적인 생각이 뻗어나가다가 상대의 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과하게 사과하기도 했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까지 고개 숙이지 않아도 되고, 불필요하게 사과하지 않아도 의외로 잘 풀릴 수 있다.
‘죄송합니다 대신 ‘고맙습니다
이 얘기는 몇 년 전 여름, 아는 작가님과 그림책 회의 겸 해서 만났을 때의 일이다. 이날은 8월. 밖에 잠깐 서 있기만 해도 땀이 나고 현기증이 일 만큼 무더운 날이었다. 회의는 작가님의 제안이었고, 회의 당일 일정 역시 작가님이 맡기로 했다. 작가님은 40세 정도 되는 남성분으로 전에 몇 번 얼굴을 본 적이 있었는데, 볼 때마다 늘 환하게 웃고 계셔서 막연히 좋은 분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날 역시 별다른 걱정 없이 약속 장소인 역으로 향했다.
그런데 역에서 만나자마자 작가님이 대뜸 이렇게 말했다.
"그럼, 이제 회의실 대여할게요."
앗? 예약해두지 않았다니. 당일에, 심지어 바로 쓸 수 있는 회의실이 있을까 싶어 불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빈 곳이 없었다. 결국 인터넷을 검색해 간신히 두 정거장 떨어진 곳에 회의실을 찾았다. 솔직히 덥고 귀찮았지만 이제 와서 안 가기도 죄송스러워 지하철에 올랐다. 마침내 회의실 앞에 이르러 이제 좀 시원한 바람을 쐬겠구나 했는데, 작가님이 "어? 열쇠 어딨지..."라는 게 아닌가. 회의실 열쇠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미리 확인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렇게 덤벙거릴 수가···라는 생각도 들고 날도 더워 내심 조바심이 일었다. 내가 작가님 처지였으면 죄송스러운 마음에 몇 번이고 머리를 숙여 사과했을 거다. 반면 작가님은 "아임 쏘리 !"라고 말하며 방긋 웃었다. 세상에···. 나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열쇠를 찾아서 회의를 마친 뒤에는 "오늘 의견을 나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감사해요~!" 하고 해맑은 인사를 건네고 돌아갔다. 정말이지 독특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집에 오는 길에 해맑게 손 흔들던 작가님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어쩌면 저런 태도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수하면 사과하는 건 당연하다. 그렇지만 지나치게 사과하면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말이란 건 신기하다. 누군가가 아, 덥다 하고 말하면 지금껏 의식하지 않았어도 점점 덥게 느껴지듯이,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일도 과하게 사과하면 그렇게 큰 문제였나? 하고 곱씹어보게 된다. 지금껏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얼룩이, 사과라는 이름의 안경을 쓰면 또렷이 보일 수도 있다.
물론 실수하면 당연히 사과하는 게 맞다. 하지만 실수했다는 사실에 지나친 죄책감을 느낀 나머지 과도한 사과로 상대방을 부담스럽게 하기보다는 함께 해결해주셔서 감사해요! 덕분에 잘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같은 긍정적인 표현으로 산뜻하게 받아넘기면 상대방의 기분도 개운할 것 같다.
특히 나처럼 HSP 기질이 있는 사람은 안절부절못하고 집요하게 사과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때로는 과하게 사과하지 않는 태도도 필요한 것 같다.
늘 숙제 같은 타인
남의 말은 한 귀로 흘려듣는 자세
어릴 적부터 나는 남의 말에 잘 귀 기울이는 아이였다. 부모님과 선생님에게 남의 말을 귀담아들어야 한다고 배웠고, 쓰라린 실패를 맛본 연예인이 뉴스나 방송에 출연해 그때, 주변 사람들 말에 귀 기울였더라면... 하고 후회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역시 남이 해주는 말은 새겨들어야 한다며 반면교사로 삼았다.
평소에 남의 말을 귀담아듣다 보면 사람 좋고 말도 잘 통한다며 주위에서 좋게 봐주기도 한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윗사람의 조언을 귀담아들어서 나쁠 것도 없다.
그런데 요즘 들어 깨달은 점아 있다. 남의 말에 너무 귀 기울이다가, 일이 꼬여버리거나 안 좋게 끝나는 경우도 제법 많다는 거다.
나는 나오냥이라는 트위터 계정을 만들고서 주변에 알리지 않았다. 당시 내 주변엔 SNS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없었던 데다, 사소한 일을 신경 쓰며 전전긍긍하는 나에게 공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도 알 수 없었다. 주로 그림책 일을 할 때여서 그림책을 그리는 어른이 울적한 이야기를 올렸다가 아이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고, 그림책 판매량이 떨어지진 않을까 염려도 되어 더욱 드러내지 못했다.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세가 심상치 않아 긴급사태가 선언되었을 때 앞으로 어떻게 될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불안 속에서 우울감과 고민을 털어낼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처음엔 남몰래 비밀 계정으로 SNS를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한 계정이 나와 성격이 비슷한 분들,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분들과 이어지는 든든한 연결 고리가 되어주었다.
가뭄에 콩 나듯이 들어오던 그림 작업 의뢰도 점차 늘었으니, 그때 조용히 SNS를 시작한 건 정말이지 잘한 일이었다.
주변의 말보다 내 직감을 소중히
가까운 이들에게 조언을 구했다면, 안 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하는 말에 SNS를 시작조차 안 했을지도 모른다. 자신감이 없고 팔랑귀인 내 성격을 감안하면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고 보니 그림책 스토리를 쓰면서 주변에서 하는 말에 귀 기울이다가 그만 이야기가 산으로 가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적도 있다. 의견 하나하나는 고맙지만, 모든 의견을 진지하게 듣다 보니 처음에 그리려던 이야기에서 점점 멀어졌다. 내 생각에 확신이 없어서 남의 의견에 기댔다가 맛본 씁쓸한 경험이었다.
HSP 성향이 있는 사람은 공감 능력이 뛰어나 주위의 말을 쉽게 수용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A라고 생각하지만 주변에서 B라고 하니 덩달아 B를 택한다. 내 모습과 속마음을 못 본 척하며 선택을 얼버무린다. 그러다 보면 나조차도 진짜 내 마음이 헷갈린다.
그런데 이런 HSP는 직감 역시 뛰어나다. 상상력이 풍부해 기발한 아이디어를 잘 떠올린다. 그러니 때로는 주변에서 하는 말은 한 귀로 흘려듣고, 설령 듣더라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말자. 나의 직감과 기분을 우선으로 여겨야 나다운 성과를 낼 수 있으니까.
누군가에게는 힘이 되는 말 한마디
남이 무심코 해준 한마디가 큰 힘이 된 경험,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있을 거다.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들어간 출판사에서 우울증과 적응 장애를 앓다가 끝내 퇴사했다. 퇴사하는 날 말을 걸어주는 동료
하나 없었다. 동료들의 시선을 피해서 혼자 숨죽이며 책상 위의 짐을 종이상자에 담을 때는 정말이지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동안 감사했다는 인사도 건네지 못한 채 황급히 회사를 빠져나왔다. 예의 있는 행동은 아니었지만, 그날은 그게 최선이었다.
내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던 때도 있었다. 그런 지난날이 머릿속을 스치자 난 대체 뭘 한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받쳐 오르는 눈물을 꾹 참으며 터벅터벅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도착해 문득 휴대전화를 보니 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다. 같이 입사한 남자 동기였다. 고생 많았어 ! 라는 딱 한 문장. 메시지를 보자마자 꾹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마음이 놓였다. 그래도 날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구나. 지난날을 보상받은 것 같았고, 나라는 존재가 헛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사소한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큰 힘이 되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기도 한다. 나 역시 그런 말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때로는 모르는 게 나을 수도 있지
얼마 전 인터넷에서 본 글에 따르면, SNS를 하는 젊은 세대의 마음이 병드는 가장 큰 이유는 친구들이 올린 글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주눅이 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너무나 공감된다.
그렇게 힘들면 안 하면 되는 거 아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SNS를 하는 게 너무나 당연한 시대고, 주변에서 다 하는데 나 혼자 안 하는 건 유행에 민감한 젊은 세대에게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SNS에서 마음 건강을 지키려면 무엇보다 내가 보고 싶은 것과 보고 싶지 않은 것의 경계를 명확히 나눠야 한다. 내가 어떤 정보를 접할 때 상처받는지 평소에 유심히 살피면 꽤 도움이 된다.
내 경우엔 내가 쓴 책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들으면 기분이 울적해진다는 걸 경험으로 잘 알기에 나에 대한 검색은 거의 하지 않는다. 책의 저자라면 독자들의 피드백을 열심히 들어야 하지만 득보다는 마음의 상처가 훨씬 크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무엇이 나를 힘겹게 하는지 알면 나를 지킬 수 있다. 보고 싶지 않으면 안 봐도 된다. 알고 싶지 않으면 몰라도 상관없다. 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데에 무척 중요한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은 픽션
타인의 사소한 반응에 지레 겁을 먹는다. 조금 그늘진 표정을 짓기만 해도 나 때문에 화난 건 아닌지 걱정하고, 이메일 답장이 조금만 늦어도 미운털 박힌 건 아닐지 근심스럽다. 한때 이런 일이 반복되자 너무 힘겨워서 같은 대학교 철학과를 나온 지인에게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지인은 이야기를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누가 나를 싫어한다고, 나 때문에 화났다고 걱정해도 별수 없잖아? 결국 그건 내 상상이고, 정말로 그런지는 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거야. 그냥 타인은 픽션이라고 생각하면 돼."
표정이 좋지 않은 사람은 그저 잠을 설쳤을 뿐이고, 버럭 화내는 사람은 오늘 무슨 일이 있었을 수도 있다. 이렇게 저마다 사정이 있는 경우가 꽤 많다. 일일이 나를 끼워 넣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 감정은 당사자만이 알 수 있다. 철학 한 스푼 섞어서 말하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저 사람의 진짜 모습을 나는 알 수 없다. 그의 감정도 마찬가지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실체에 닿을 수 없다. 타인이 픽션이라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어쩔 수 없이 남이 신경 쓰여서 위축될 때는 의식적으로 이렇게 외쳐보자. 타인은 픽션!
함께 행복하기
나이가 든다는 건 변화를 받아들일 줄 안다는 것
요즘 들어 본가에 가면 조금 울적하다. 본가는 지금 사는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데, 그 럼에도 갈 때마다 왠지 모르게 쓸쓸하다. 역에 내리면 낯선 상업 시설과 호텔이 우뚝 솟아 있고, 어릴적 친구들과 용돈을 모아 펜이며 스티커를 샀던 문방구는 자취를 감췄다. 동네에서 제일 컸던 서점은 건물이 통째로 헐렸다. 내가 좋아하는 할머니 할아버지 댁도 지금은 비어 있다.
본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부모님이 언제나 웃는 얼굴로 반겨주신다. 다만 몸도 가냘파지고 키도 줄어든 것 같다. 어 릴 적부터 함께했던 고양이는 몇 년 전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동네는 바뀌고, 사람도 변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때론 눈물이 핑 돌 만큼 쓸쓸하다. 예전 내 방에서 뒹굴며 빛바랜 벽지를 바라보고 있으면 나 혼자만 어릴 적 모습 그대로 덩그러니 남겨진 것만 같다. 변화는 늘 힘겹다. 가능하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모든 걸 내려놓고 변화를 받아들이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변화는 이따금 쓸쓸함과 쓰라림을 동반하지만, 그런 아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강인한 마음이 아직 내겐 더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담대한 삶의 태도
밖에 한 발짝도 안 나가도 행복하고 싶어
가장 좋아하는 말이 뭐예요? 하고 누군가가 물으면 무위도식이라고 답할 정도로 누워 있는 게 좋다. 하루를 끝마치고 깊은 잠에 빠지는 것도 좋고, 점심 먹고 고양이와 함께 꾸벅꾸벅 조는 시간도 달콤하다. 틈만 나면 눕기 일쑤고, 어떤 날은 고양이보다 더 많이 자기도 하니 모르긴 몰라도 남들보다는 훨씬 많이 잘 거다. 이런 내 모습이 싫지는 않다.
하지만 나도 가끔은 일말의 죄책감을 느낀다. 특히 인생은짧다라는 말을 들을 때 그렇다. 매일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뜻에서 한평생을 시간으로 환산해 예로 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90세까지 산다고 쳤을 때 사람의 일생은 대략 3만 3000일이고, 시간으로 따지면 78만 8400시간이다. 요컨대 하루하루를 헛되이 보내지 말고 매일을 귀하게 여기며 살자는 뜻이다. 심심치 않게 듣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거 하나 없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생각에 너무 얽매이면 죄책감이 든다. 인생은 이렇게나 짧은데, 왜 난 오늘도 이불 속에 파묻혀 있나 하는 자괴감 비슷한 기분 때문이다.
특히 화창한 날은 죄책감이 한층 심해진다. 맑게 갠 날 집에만 있으면 날씨가 아깝다고들 하니, 이렇게 좋은 날엔 밖에 나가 사람들을 만나며 알찬 하루를 보내야 맞는 건가 싶어 불안해진다.
잠도 삶의 낙인데 죄책감을 느끼면 너무 속상하잖아
때때로 밀려드는 우울감 때문에 깨어 있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잠을 청해야 할 때가 있는데, 하필 이럴 때 인생은 짧다라는 말이 떠오르면 절망스럽다. 쉬기는 해야 하는데 마음 편히 쉬지 못하고, 자는 게 못 할 짓이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근면 성실을 미덕으로 여기는 문화여서 이런 경향이 더욱 도드라지는 것 같다.
예전에 휴직하고 베트남 여행을 갔다가, 마치 짜기라도 한듯 평일 대낮에 해먹과 오토바이 위에서 늘어져라 자는 현지인들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라서 현지 가이드분께 "낮부터 왜 이렇게들 자는 거예요?" 하고 물으니 "졸리니까요~"라고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웃으며 대답하기에 더욱 놀랐다.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겠지만, 잠과 휴식이 당연한 일과로 일상에 스며들어 있는 분위기였다. 어쩐지 마음이 놓이고 편안했다.
알찬 하루란 어떤 하루인가. 여러 곳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며 누가 봐도 하루를 꽉꽉 채워 보낸 사람이 있다고 치자.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난 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싶은 공허함이 나날이 쌓인다는 경험담을 들은 적 있다. 이유가 뭘까? 어쩌면 알찬 하루란, 하루를 얼마나 바쁘게 보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만족스럽게 보냈는지에 달렸기 때문 아닐까?
인생이란 곧 내가 쓸 수 있는 시간이다. 시간은 물리적이고 객관적이지만, 행복하다고 느끼는 마음은 오직 나만이 알 수 있는 주관적인 영역이다. 설령 삶의 낙이 ‘잠이라 해도 오늘도 마음껏 자서 행복하다고, 온종일 뒹굴뒹굴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느꼈다면 알찬 하루였던 거다. 그렇다면 누가 뭐라 하든 오늘도 행복하고 의미 있는 하루를 보냈다며 미소 지을 수 있지 않을까?
아무리 날이 화창해도, 밖에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집에서 느긋한 하루를 보낸 내가 행복했으면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 언제까지고 단잠에 빠지는 여유를 즐기는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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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