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이면 책방에 모여 글을 쓰기로 한 여자들이 있다. 평소 주부, 워킹맘, 엄마, 아내, 며느리로 살던 이들은 글쓰기를 통해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되기를 꿈꾼다. 생생한 삶의 순간을 잘 찍은 스냅 사진처럼 포착한 이들의 글들에는 자신과 제대로 대면해 본 자만이 품을 수 있는 품위 있는 진실함이 담겨 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진솔한 이야기와 그것을 풀어내는 필자들의 9인(人) 9색(色)의 매력은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이다.
결혼생활의 어려움, 육아라는 전쟁, 성범죄를 당하는 공포와 분노, 여성의 노동 등등 책에는 여성의 삶에 관한 이야기도 많다. 여성의 삶에 관한 용기 있는 고백들은 고통스러운 사실조차 이렇게 차분하게 말할 수 있는 여성의 힘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그 절박한 순간을 되돌아보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여유로움은 끝내 자기 삶을 사랑하려는 자의 그것이어서 감동적이다. 가족을 돌보고, 집안을 살피고, 임금노동을 하는 고단한 삶에서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 이들에게 저절로 박수를 보내게 된다.
평범한 아홉 명의 여성은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을까? 그 출발점은 ‘글요일’이라는 글쓰기 모임이다. 책에는 필자들이 글쓰기 모임을 함께한 과정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글요일을 통해 본격적으로 글을 쓰면서 마주친 실패와 좌절, 그리고 이를 극복한 이야기들이다. 책의 뒷부분에는 필자들이 글요일을 하며 깨달은 글쓰기와 글쓰기 모임 운영에 관한 팁을 담았다. 글쓰기나 글쓰기 모임을 시작하려는 분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될 것이다.
■ 저자 정지연
집안일, 독서, 글쓰기로 자꾸만 굽어 가는 몸을 펼치려 달리기와 운동을 한다. 발도르프 유치원과 정신분석센터에서 치유동화 만들기와 꿈 집단분석을 이끌고 있다.
■ 차례
추천사
글요일에 들어가며
정지연
벽돌을 부수며|천사야, 사람이 되자|설망|활개|성냥팔이는 왜
시윤정
사랑하기 좋은 장소|은하계 너머|피가 섞이진 않았어도
한진희
대신 만나러 갑니다|비키니 자신감|유서 찾기|아무도 모르게 자란|좋아했나 봐
최다올
단지, 구름|족 같은 삶|내 편 찾기 프로젝트
노분희
공손한 목격자|흉터라는 자리|소리 산책자|마지막 이사
이영실
우리의 봄날|구석의 검은 비닐봉지|매일 해는 뜬다
임정명
사라진 1년|낙원의 밤|술장 앞에서|언덕 위 버스 정거장|나의 리모델링
곽민주
그렇게 집이 내게로 왔다|판식의 사진첩|불편한 나의 이웃
윤주연
작지만 소중한|소비와 낭비의 경계선|새로운 놀이|36년
글요일을 나오며
글요일이 걸어온 길
글요일에서 우리가 배운 것들-글쓰기와 글쓰기 모임 팁
평소 주부, 워킹맘, 엄마, 아내, 며느리로 살던 아홉 명의 여성들이 ‘글요일’이라는 글쓰기 모임에 참여해 서로의 경험을 나누며 글을 썼습니다. 이들은 각자 결혼생활, 육아, 성범죄, 여성의 노동 등 다양한 삶의 주제들을 진솔하게 풀어내며,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자 합니다.
책방에 모여 글쓰기를 시작했다
정지연
벽돌을 부수며
초조한 걸음으로 내 뒤를 밟는 듯 좁혀 오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한 번씩 따라오는 남자가 있었기에 신경이 쓰였다. 사람을 잘 못 봤다며 돌아서기도 했고, 연락처를 묻거나 남자친구가 있냐고 묻기도 했다. 조금 성가신 마음이 들다가, 착각하지 말자며 나를 다독였다. 그저 나처럼 춥고 피곤해서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에 발길이 급해진 사람이겠지.
검은색 투피스 정장에 긴 회색 모직 코트를 걸치고 구두를 신었다. 머리는 하나로 단정하게 묶었다. 대학교 4학년 말, 취직하고 회사원이 되자 옷차림이 달라졌다. 도시사회학 전공을 살려 리서치 전문 회사에 연구원으로 들어갔다. 매일 설문지를 만들고 분석 프로그램을 돌려 보고서를 썼다. 강남 뱅뱅사거리에서 신촌 방향 버스를 타고 연희동에서 내리니 밤 10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는 길목에는 파출소가 있었다. 그 앞을 지나 내가 다니던 중학교를 거쳐 차 두 대는 나란히 지날 수 있는, 그다지 폭이 좁지 않은 길로 들어섰다. 이 길을 2분쯤 걷다가 골목으로 접어들어 계단을 50걸음 정도만 올라가면 우리 집이 나왔다. 여섯 살 때부터 20년 가까이 살아온 집이다. 버스 정류장에서 집까지는 눈 감고도 갈 수 있을 만큼 익숙했다. 집 앞에 거의 다 왔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어져 뒤따르는 발걸음 소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골목으로 꺾어 들어 계단에 오르는 순간 누군가가 나를 뒤에서 붙잡았다. 그는 내 등에 붙어 왼팔로 내 어깨와 목 사이를 감싸고 오른손으로는 칼을 들이댔다. 목 오른편 맨살에 닿은 칼날이 선뜩했다. 내 귓속으로 생경한 욕설이 퍼부어졌다. 처음 들어 보는 말들이었다. 상스러운 말들로, 대체로 죽이겠다는 위협이었다. 아무 원한이 없는 사람에게 이토록 원색적인 증오를 퍼부을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나는 본능적으로 계단을 오르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걸음을 멈추는 순간 삶이 끝날 것 같았다. 이 길 끝까지만 가면 우리 집이 나온다. 담이 낮은 주택이었다. 열두 살에 처음 담을 넘게 된 이후로 쭉, 나는 담을 넘어 다니는 걸 좋아했다. 대문은 자물쇠가 헐거워져 안쪽에서 주의 깊게 잠그지 않으면 미는 대로 열렸다. 잠겨 봤자 담으로 다녔기에 대문을 잠그는 의미도 없었다.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았고 현관 문단속도 했기에 대문은 항상 열려 있었다. 나는 그를 길 끝까지 유인한 후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갈 작정이었다.
그가 팔로 내 얼굴과 목 사이를 억세게 틀어쥐는 바람에 자꾸 안경이 벗겨지려고 했다. 나는 흘러내리는 안경을 추켜올리려고 계속 손을 댔다. “손 올리지 마!” 신경질적인 목소리였다. “앞이 안 보여요.” 대답하다 보니 오히려 차분해졌다. 굳은 입을 움직여서인지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 웃음이 나오려고까지 했다. 그때 알았다. 나는 겁먹으면 웃는 사람이었다.
욕설은 항상 의문이었다. 좋게 말할 수 있는데 굳이 왜 욕을 할까. 아마도 나약하기에, 강한 모습으로 위장하려고 센 척하는 행위라고 생각해 왔다. 스스로 욕을 하면서 제 입을 더럽히고, 듣는 사람과 말하는 자신까지 불쾌하게 하는 일을 경멸했다. 날것의 감정을 쏟아 내다니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행위가 아닌가. 욕설을 지껄이는 것을 보니 나를 붙잡은 사람을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기선을 제압하려고 하는 걸 보아하니 애송이다. 이미 나보다 더 흥분한 것 같았다. ‘이 새끼, 사람 잘못 봤다. 욕한다고 기가 죽을까 보냐. 욕이 뭐길래, 속으로 욕을 하니 나도 투지가 올라왔다. 더 이상 겁도 나지 않았다.
내가 조용해지자 순순히 따른다고 생각한 걸까. 그는 나를 구슬리기 시작했다. 같이 갈 데가 있다고 했다. 어딘가로 나를 데려가려는 것 같았다. 실랑이하는 와중에 마침내 대문 앞에 도달했다. ‘지금이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몸을 홱 돌렸다. 그와 나는 순식간에 마주 보고 대치하는 상태가 되었다. 순간 체육 시간에 배웠던 공수도가 떠올랐다.
중학교 때 “강한 여자가 아름답다.”라는 모토로 여학생들을 거칠게 훈련하던 체육 선생님이 있었다. 그 열정에 물들어 체육 시간마다 열심히 했더니 기량이 올라 체력 1급을 받았다. 공수도의 한 기술인 낭심차기를 반복해서 배웠다. 앞차기의 한 종류로, 무릎의 반동과 발목의 스냅을 이용해 상대를 무력화하는 기술이다. 낭심차기 훈련 자세처럼 대치하게 되자 그때 배운 기억이 떠올랐다. 드디어 실전에서 써 볼 기회가 왔다.
하지만 선빵도 날려 본 놈이 때린다고, 순간 나를 가로막은 것은 망설임이었다. 이렇게 찼다가 고환이 깨지면 어떡하지. 평생 불구가 될지도 모르지 않는가. 나를 납치하려는 놈에게까지 동정심을 품는 나 자신에게 질렸다. 평소에 육탄전을 해 봤어야 했다. 낭심차기는 포기하고 대문으로 뛰어들었다. 녀석이 내 코트를 얼마나 세게 붙잡았는지 앞 단추가 세 개나 뜯어졌다. “쨍그랑!” 하며 바닥에 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으로 뛰어 들어가며 외쳤다. “아빠, 저놈 잡아!” 군대 간 남동생이 집에 있었으면 바로 뛰어나왔을까. 전속력으로 달려 도망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았다. 못 잡으면 미칠 것 같았다. 잠옷 차림으로 안방에서 나오신 부모님께 자초지종을 간단히 설명했다. 지금 빨리 나가서 신고해야 잡을 수 있지 않겠냐고 먼저 파출소에 간다고 달려 나왔다. 운동화로 갈아 신고 앞이 뜯어진 코트 대신 패딩 점퍼를 입었다.
파출소로 달려가 신고했다. 경찰들의 태도는 한가롭기 짝이 없었다. 법원, 경찰서, 학교에 갈 때는 옷차림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말을 그제야 떠올렸다. ‘범죄와 일탈 수업 때 외부 강사로 왔던 형사정책연구원 팀장님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정장 차림 그대로 왔어야 했다. 패딩 점퍼에 운동화를 신고, 앳된 얼굴에 흥분이 가득해서였을까. 아니면 범죄가 미수에 그쳤기 때문일까. 당장 붙잡고 싶어 안달하는 나와는 달리 경찰관의 태도는 심드렁했다.
범인은 검은 야구 모자를 쓰고 얼굴을 검은 복면으로 가렸다. 키는 중간이었다. 짙은 색 옷을 입고 있어 차림새를 자세히 못 보았지만, 계속 고개를 숙이라 했기에 신발만은 똑바로 봤다. 조서에 운동화 무늬를 그려 넣으며 꼭 잡아 달라고 부탁했다. 브랜드 없는 제품이라 특징을 기억하려 더 애썼던 터였다. 경찰이 출동할 때까지 내가 앉은 자리에서 계속 버틸 기색이 보였는지 그러면 경찰차를 타고 한 바퀴 둘러보자고 했다. 연희동 발바리라고 동네에 출몰하는 성폭행범이 있긴 하다고, 수법이 비슷하다고 했다.
골목골목을 드라이브하며 비슷한 사람을 찾아봤지만, 어디로 숨었는지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긴장이 풀어지며 허탈감이 밀려왔다. 원래 유명한 놈이라면 왜 아직도 못 잡았을까. 이렇게 미적지근한, 의지나 의욕이라곤 조금도 엿볼 수 없는 수사 태도 때문이었을까. 경찰은 성범죄에 가장 미온한 태도를 보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이 어쩌면 사실이었을까. 이런 식이면 앞차기에 성공했더라도 도리어 내가 폭행범으로 둔갑할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칼이 겨누어지고 목숨까지 위협당한 잊지 못할 사건이 이렇게 해프닝으로 막을 내리는 듯했다.
그로부터 몇 달이나 지났을까. 얼마 후, 같은 동네에 사는 친한 친구의 동생이 그를 만났다. 똑같은 수법이었다. 어두운 밤, 귀갓길에 동생을 칼로 위협해 자신의 아지트까지 끌고 갔다. 그곳은 공사가 중단된 폐건물 같았다고 한다. 화려한 공주풍 드레스를 몇 벌 꺼내어 놓고 그중 하나로 갈아입으라고 했다고. 동생은 겁에 질려 그놈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렇게 일을 당하고 울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친구 어머니는 밤늦게 돌아다닌 그 애의 탓이라며 도리어 동생을 혼냈다. 누구에게 입도 뻥긋하지 말라며, 없던 일로 하라고 다그쳤다. 동생은 며칠을 혼자 가슴앓이하다 억울한 마음을 제 언니에게 털어놓은 것이었다.
황당한 것은 잡혀갈 때 목에 겨눈 것이 알고 보니 돈가스 칼이라는 말이었다. 잡혀가고 보니 그랬단다. 손잡이까지 철로 되어 있어 쨍그랑 소리가 났던 걸까. 그러고 보니 시야 각도가 맞지 않아 촉감만 느끼고 칼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돈가스 칼인 줄도 모르고 무서움에 떨었다는 사실에 더 화가 나 눈물까지 나려 했다. 내 예상대로 그놈은 그다지 위협이 되지 않는 잔챙이였지 않은가. 그때 잡지 못한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부채감이 뼛속까지 밀려들었다. 친구에게 그 말을 듣고 가슴이 답답해 밖으로 뛰쳐 나갔다. 그놈을 찾아 패고 싶었다. 야비한 놈에게 우리들은 언제까지 꿀려야 하나.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게 발길 가는 대로 달렸다. 길가에서 반으로 쪼개진 벽돌을 주웠다. 돌을 꽉 쥐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놈의 아지트까지 알 수 있게 되었는데도 잡을 방법이 없었다. 이번 사건에서 나는 제삼자가 아닌가. 피해자의 가족이 원치 않아 신고도 할 수 없다. 온몸에 열이 올랐다.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자책만 차올랐다.
‘지금 잡는다 해도 너에게 일어난 일을 돌이킬 수 없다. 내가 잡지 못해 지켜주지도 못했다.
막다른 곳까지 정신없이 달리다 손에 쥔 벽돌을 바닥에 내리쳤다. 벽돌은 내리칠 때마다 귀퉁이가 조금씩 떨어져 나갈 뿐 좀처럼 부서지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산산조각이 날까. 벽돌 반 쪼가리마저 나는 부술 수가 없었다.
최다올
족 같은 삶
초등학교 4학년 초, 급성 충수염으로 입원했었다. 도에서 운영하는 다소 병원비가 저렴한 병원이었다. 수술실임에도 유리문 밖으로 뒷마당이 보였다. 누군가 정성스레 가꾸는 정원이 아닌 잡초들이 드문드문 키를 견주는 흔한 뒤뜰이었다. 봄 햇살 때문이었을까? 그 풍경은 참 따뜻했다. 수술대는 차가웠고 분주한 간호사들이 날카로운 금속 부딪히는 소리를 냈지만, 나는 뜰 안의 작은 마당에 흠뻑 취해 있었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풀들을 따라 눈의 초점이 사라지려 하는 그 몽롱한 순간.
“어머 너 평발이구나!”
적막을 깨는 간호사 언니의 말에 나는 큰 비밀을 들켜 버린 사람처럼 얼굴이 빨개졌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던 내 신체의 비밀을 맨발의 수술실에서 고스란히 들켜 버렸다. 발가벗겨진 것 같았다. 지금까지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은 없었는데. 학교에서조차 아치의 형태가 무너지지 않게 신경을 쓰며 걸었다. 집에 돌아와 양말을 벗으며 발바닥을 매일 확인했다. 아치 부분이 선명한 흰색으로 남아 있으면 뿌듯함을 넘어 짜릿한 희열까지 느꼈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그만 방심하고 말았다.
그 무렵 매일 밤 9시 뉴스는 “오늘 ○○○대통령 각하께서는….”으로 시작되었다. 그래서 그랬던 걸까? 온통 하얀색인 80년대 초등학교 건물은 위압적이었다. 거기에 검고 딱딱한 글씨체의 ‘바른 어린이는 군대같이 준엄했다. 그런 분위기 때문인지 밤이면 학교 안에 있는 이순신 동상의 칼이 움직이고 책 읽는 소녀 조각상이 소리 내어 책을 읽는다느니 하는 괴담이 돌았는지도 모른다.
월요일 아침마다 조회가 끝나면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제자리걸음을 걸으며 나비 모양의 대형을 만들었다. 그 모습은 털실로 짠 나비 날개의 올이 한 올씩 풀리듯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어린아이들이었음에도 잘 훈련받은 군인들 같았다. 학교 현관에 들어오면 재빨리 신발을 벗어 손에 들고는 각자의 반으로 들어갔다. 신발은 교실 옆면 신발장에 두어야 했다. 바닥과 계단은 반질반질하고 딱딱한 점박이 돌무늬였다. 늘 그렇듯 나는 앞서 올라가는 친구들의 발바닥 모양을 유심히 관찰했다. 복도가 미끄러웠기에 계단을 잇는 나무대를 짚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약속이나 한 듯 모두 흰색 양말을 신었다. 나도 흰색 양말이었지만 발 가운데가 움푹하게 팬 친구들과 달리 내 발은 전체가 바닥에 닿아 있었다. 나와 똑같은 발은 찾지 못했다.
“엄마, 나 평발이라 시집 못 가면 어쩌지?”
어린 나에게 평발은 ‘주홍 글씨 같았다. 나쁜 마법에라도 걸린 것같았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셨는데 어쩔 땐 엄마의 웃음도 속상했다. ‘엄마는 평발이 아니라 몰라.
엄마를 제외한 우리 가족 네 명은 모두 평발이다. 평발의 족보를 따져 보면 우리는 아빠의 발을, 아빠는 할머니의 발을 닮았다. 8남매 중에 유일하게 아빠만 할머니의 발을 닮았다. 작은아버지들과 내 사촌 중에 평발은 없다. 큰오빠는 이것을 ‘할머니의 저주라 불렀다. 우리는 평발이 가진 유전자의 힘에 감탄하며 서로에게 소리 없는 위로를 건넸다.
얼마 전에 강아지를 산책시키다가 보더콜리라는 견종을 만났다. 이런저런 이야기 중에 그녀는 자신의 보더콜리는 평발이라 오래 걸으면 힘들어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강아지도 평발이 있다고? 보더콜리는 산책을 매우 좋아하는 견종 중 하나이다. 멀리 던진 공도 덥석 물어와 다시 주인을 향해 쉼 없이 달리는 보더콜리는 제멋대로인 양들을 우리 안으로 몰아넣는 일을 하던 개다. 그만큼 활동성 많은 강아지가 평발이라니.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본 우리 집 강아지의 발은 사뿐사뿐 가벼웠다. 초등학교 시절 늘 내 시선이 머물던 친구들의 흰 양말처럼 하얗고 날씬했다.
어쩌다 뾰족한 구두를 신으면 여기저기에 물집이 생긴 발가락들이 아우성을 쳤다. 너무 아파서 잠깐 구두를 벗으면 찌그러진 발가락들이 구두 앞코 모양으로 붙은 채 기절해 있었다. 굽이 높은 구두는 각선미를 드러낼 수 있지만 무게가 앞으로 쏠려 더 힘들었다.
그뿐일까. 체중을 분산시키지 못하는 발은 쉬이 피로해져 종아리 부종을 달고 살았다. 어린 시절, 신데렐라 이야기에서 내가 제일 부러웠던 것은 왕자님이 아니라 뾰족한 유리구두였다. 아니 그 구두를 신을 수 있는 신데렐라의 발이었다. 아무리 신중하게 골라도 구두는 내게 늘 불안한 반쪽짜리였다. 시중에 파는 구두는 한 입 깨물어 먹은 사과의 형태처럼 발바닥 가운데가 비어 있는데 그 안에서 내 발은 쉽게 균형을 잃고 허둥댔다. 걸핏하면 발목을 삐었다.
살다 보니 나처럼 평발이 아닌데도 발에 불편함을 호소하는 사람을 많이 보게 된다. 발가락 관절 안쪽이 돌출된 ‘무지외반증을 가진 사람, 발뒤꿈치가 아픈 ‘족저근막염으로 고생하는 사람, 발등이 높아 신발이 불편한 사람, 내성 발톱 문제까지. 평발이 아닌 사람들도 의외로 발에 불편함을 많이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 족(足) 같은 문제는 누구나 가지고 있었다. 평발인 사람과 평발이 아닌 사람. 나는 지금껏 세상을 이렇게 이분법적인 사고로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족, ‘자족, ‘충족이라는 한자어에는 모두 ‘발 족 자가 들어간다. 왜 하필 ‘발 족 자일까? 해석은 다양하다. 나는 그중에서도 발까지 가득 찬 넉넉하고 편안한 상태를 뜻한다는 해석이 가장 마음에 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득 찬 편안한 삶이란 쉽지 않다. 현대인에게 ‘만족이란 어색하고 서툰 단어다. 가진 것보다 내게 없는 ‘아치에 집착하며 불평불만을 쏟아 냈던 내 모습처럼.
이제 나는 족(足)같이 살아 보기로 했다. 엄살 부리지 않고 ‘만족이라는 지향점을 향해, 인생의 크고 작은 고비를 아주 잘 걸어가 볼 생각이다.
주문해 둔 쿠션 좋은 기능성 신발이 오늘 도착한다는 알림이 울렸다.
이영실
우리의 봄날
부르덜덜덜.
자동차 계기판의 빛이 흔들린다. 시동이 켜졌어야 했는데 기침하는 것처럼 콜록거리더니 이내 조용해진다. 흐릿한 불빛이 불안하다.
2009년에 만난 나의 첫차는 이제 15살이 되었다. 집 앞으로 탁송되어 온 내 차. 한 달을 기다려 그렇게 만났다. 차를 살 땐 평범한 것을 사야 한다고, 검은색은 밤에 잘 안 보여서 위험하고, 흰색은 먼
지가 잘 보여 관리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쥐색, 즉 어두운 회색을 골랐다. 연비가 좋다는 준중형차 포르테를 샀다.
내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28살에 이 차를 샀다. 장롱면허를 8년이나 갖고 있었지만 바로 수원에서 서울로 출퇴근했다. 동대문 앞을 지날 때면 물건을 운반하는 오토바이 떼에 바짝 긴장했고, 차선을 바꿀 땐 차 머리를 먼저 들이밀고 깜빡이를 켜면서 끼어들어야 양보가 된다는 것을 배웠다. 그렇게 초보운전 딱지를 뗐다. 그 무섭다는 서울 길을 익히면서 출근했다. 주변 친구들은 아직도 서울은 복잡해서 운전하기를 꺼리는데, 겁 없던 그때부터 난 서울을 오가기 좋아했다. 그랬던 나의 싱글 삶은 결혼과 함께 화성 끝에 있는 시골길로 들어갔다.
시골 마당의 여름 햇볕은 너무 뜨거웠다. 자동차 시트도 뜨거워 쉽게 차를 탈 수 없었다. 겨울에는 앞 유리에 눈이 얼어붙어 뜨거운 물을 붓고 예열을 해 얼음을 녹여야 했다. 한참 시동을 켜놔야 꽁꽁 얼어붙은 차를 타고 외출할 수 있었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추위와 더위를 모르고 지내던 나의 포르테는 지붕 없는 주차장에서 오롯이 계절의 시련을 다 겪었다. 그럼에도 그 시골에서 어디든 나를 데려다줬다. 1년 사이에 3만 킬로를 넘게 탔다. 흔히 택시가 1년에 그만큼 달린다고 하니 나도 참 많이 돌아다녔다. 그렇게 잘 나갔다. 나도, 내 차도.
차 안은 온전한 나만의 공간이었다. 안락했다. 커다란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의 사계절은 따뜻했다. 추울 땐 따뜻한 시트와 온풍이, 더울 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나만의 맞춤형 공간에서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주변 산들이 푸릇한 연둣빛과 핑크빛을 보일 때면 ‘봄이 왔구나. 했고, 은행나무잎이 노랗게 변하고 낙엽이 되는 것을 보며 가을을 느꼈다. 벚꽃 구경도 단풍 구경도 늘 내 차와 함께했다.
삶의 무게에 지쳐 훌쩍 떠나고 싶을 때도 내가 가장 먼저 찾는 곳이 자동차였다. 유일하게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줬고, 나를 데려다줬다. 딱히 갈 곳 없이 방황했을 때도 함께였다. 아이가 태어나고 일하러 갈 때도 내 짐을 덜어 주고, 아이가 둘이 되어 같이 출퇴근하며 유치원 등·하원시킬 때도 누구보다 함께했던 것은 내 자동차였다.
15년이 지난 지금 21만 킬로를 탔다. 이제는 15분 남짓 되는 출퇴근길과 동네 마트만 오가고 있다. 차를 잘 관리한다고 했지만 15년이란 세월은 기계에도 수명을 닳게 만드는 것 같다. 어딘지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울리는 미세한 진동과 엔진 소리는 더 이상 고요하지 않다. 앞 범퍼는 주행 중에 맞은 작은 돌멩이에 여기저기 흉터가 나서 도색에 홈이 파이고, 접촉 사고로 수리했던 곳은 안쪽부터 녹슬어 페인트가 부풀어 올랐다. 이제는 써금써금하다. 핸들의 무늬는 닳아서 매끈해졌고, 좌석 시트는 낡아 갈라진 것을 방석으로 가려 놨다. 차 안에도 세월의 흔적이 쌓였다. 잘 나갔던 그때처럼 먼길 가는 것이 때론 걱정스럽기도 하다. 자동차의 15년이면 어느 정도 나이가 된 걸까.
〈로봇 K-456〉은 백남준이 1964년에 만든 로봇 작품이다. 사람처럼 말하는 것을 표현하려고 라디오 스피커가 장착된 입에서는 존 F. 케네디의 연설이 나왔고, 걸으면서는 마치 사람이 배설하는 것을 표현하듯 콩을 배출하면서 거리를 다녔다고 한다. 백남준과 함께 공연했던 〈로봇 K-456〉은 1982년 뉴욕 휘트니 미술관 앞 사거리에서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사망한다. 백남준은 이 사망 사건을 “21세기 최초의 참사”라고 했다. 로봇이 사망이라니. 백남준과 〈로봇 K-456〉은 18년 동안 공연을 함께했다. 그 세월을 보면 〈로봇 K-456〉을 하나의 기계로 보기보다 함께 공연한 동료로 봤을 것 같기도 하다. 15년간 함께한 나의 포르테처럼 말이다.
시동이 안 걸리면 어쩌지? 다시 한번 자동차 열쇠를 돌려 본다. 잔잔한 기침을 하며 다행히 시동이 걸린다. 덜덜덜. 다행이다. 아직은 나갈 수 있다.
영어권에서는 자동차를 ‘여자를 지칭하는 ‘She로 표현한다. 엄마처럼 포근하고 친구처럼 함께했던 그녀. 그녀가 지나가는 길마다 불빛이 켜진다. 요즘 지하 주차장은 차량이 지나갈 때 센서 등이 켜진다. 좋다. 인제 그녀는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고 눈이 쌓이는 마당 대신 길을 밝히는 불빛까지 비춰주는 평온한 실내 주차장에 산다. 이렇게 나와 그녀가 함께한 15년. 우리는 지금 도심의 아파트에 살고 있다. 켜지는 불빛을 따라 올라간다. 띠롱띠롱 출차를 나타내는 벨 소리가 들린다. 계기판과 앞 유리를 통해 바깥세상이 보인다. 날이 좋다. 길 건너 어느 집 앞 오래된 목련 나무에 하얀 꽃송이가 만개했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가벼워졌다. 봄이구나. 그녀와 이렇게 봄날을 구경하며 오늘도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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