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세상과 사랑에 빠지기
 
지은이 : 헤르만 헤세 (지은이), 박종대 (옮긴이)
출판사 : 열림원
출판일 : 2024년 07월




  • 헤르만 헤세는 세상의 폭력과 야만을 견디며 성장의 기회를 발견하는 힘을 문학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힘과 세계관이 잘 표현되어 있는 글들을 통해 삶의 현장에서 길어 올린 사유의 정수가 담긴 명문장들을 만나봅시다.


    미친 세상과 사랑에 빠지기


    가지치기를 한 떡갈나무

    나무여, 이렇게 잘려 나간 모습이라니,

    이렇게 기이하고 낯설게 서 있는 모습이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네 속에 반항과 의지밖에 남지 않을 때까지!

    나는 너와 같다. 고통스럽게 베어지는

    삶을 끝내지 못했고

    날마다 야만의 고통을 견뎌 내며

    또다시 저 빛 속으로 얼굴을 내민다.

    내 안의 연약하고 부드러웠던 것을

    세상은 죽도록 조롱했지만,

    내 본질은 파괴될 수 없는 것.

    나는 만족하고 화해하며,

    가지를 수백 번 찢어 참을성 있게

    새로운 잎을 틔워 내고,

    그 모든 아픔에도 나는 여전히

    이 미친 세상과 사랑에 빠져 있다.

    -1919년 7월



    인생은 무의미하고 잔혹하고 어리석습니다. 그럼에도 찬란하지요. 인생은 지혜롭기에 인간을 비웃지 않지만(정신도 인생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지렁이만큼이나 인간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오직 인간만이 자연의 변덕이자 잔인한 유희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너무 과신해서 꾸며 낸 실수입니다.


    우리는 일단 인간이 새와 개미보다 결코 더 중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가볍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삶의 잔혹함과 죽음의 불가피성을 원망스럽게 받아들일 게 아니라 그 절망을 충분히 음미하면서 수긍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연의 그 소름 끼치는 무의미함을 온전히 인정할 때에야 그 거친 무의미함에 맞설 수 있고, 거기서 하나의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이자 유일한 일입니다. 나머지는 다른 동물이 더 잘합니다.


    슬픔을 견디고 절망을 음미하되 이해할 수 없음과 고통, 무의미함을 인간이기에 가치 있는 모든 일에 대한 전제 조건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우십시오.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나중에 당신이 당신의 신앙을 어떻게 표현할지는 모두 똑같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신들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들 외에 다른 정부나 법률, 도덕도 없습니다. 민족들은 대규모로 그렇게 하고, 개인은 소규모로 하는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개인은 의미 없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혼돈에 맞서 자신의 예감과 의미에 대한 욕구를 내세우고, 마치 신이 존재하는 것처럼, 이 모든 것에 하나의 의미가 있는 것처럼 사는 법을 배웁니다.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더 이상 없습니다.


    젊은이를 포함해 대부분의 사람이 이런 질문조차 던지지 않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삶의 무의미함이 지렁이에게 결코 고통이 아니듯 대다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고통에 사로잡혀 의미를 찾기 시작하는 소수의 사람만이 인간이라는 의미에 부합합니다.

    -1931년의 한 편지에서



    인생은 계산도 수학 도식도 아닌 기적이다. 내 평생이 그랬다. 모든 것이 되돌아왔다. 똑같은 곤경, 똑같은 욕망과 즐거움, 똑같은 유혹이 나는 계속 같은 모서리에 머리를 찧었고, 같은 연들과 싸웠고, 같은 나비를 쫓았다. 항상 같은 상황과 상태가 반복되었다. 하지만 그건 영원히 새로운 놀이였고, 항상 아름답고 항상 위험하고 항상 흥분되었다. 나는 수천 번도 넘게 신이 나서 들떠 있었고, 수천 번도 넘게 죽도록 피곤했으며, 수천 번도 넘게 유치했고, 수천 번도 넘게 늙고 차가웠다. 다만 어떤 것도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모든 게 항상 되돌아왔지만, 한 번도 예전과 똑같지는 않았다.


    내가 다양성 다음으로 좋아하는 통일성은 지루하거나 칙칙하거나 정신적이거나 이론적인 통일성이 아니다. 그건 삶 그 자체다. 놀이로 가득 차고, 고통으로 가득차고, 웃음으로 가득 찬.

    -「요양객』(1923) 중에서



    타자의 삶이 아닌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면 험난하더라도 자신의 고유한 인격체와 고유한 삶으로 나아가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만일 당신이 그런 운명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혹은 당신에게 그럴 힘이 충분치 않다면 당신은 조만간 분명 그 길을 포기할 것이고, 세속의 일반적인 도덕과 취향, 풍습에 따르게 될 것입니다.


    이는 힘의 문제입니다. 아니, 오히려 믿음의 문제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무척 강한데도 쉽게 좌절하는 사람이 많고, 무척 연약한데도 질병과 약점을 극복하고 삶과 멋지게 담판을 벌여 삶으로부터 끈질기게 자신의 고유한 인장을 받아 내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한 믿음은 말로 표현하기 쉽지 않지만 이렇게 한번 말해 보겠습니다. 나는 너무나 뚜렷한 삶의 부조리함에도 인생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고 믿습니다. 나는 삶의 이 궁극적인 의미를 오성으로는 포착할 수 없다고 확신하지만, 그 의미를 따를 준비는 늘 되어 있습니다. 나는 내 안에서, 그러니까 내가 진정으로 살아 있고 깨어 있는 순간에 그 의미가 소곤대는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런 순간이면 나는 삶이 내게 요구하는 것을 실현하려는 강한 욕구를 느낍니다. 설령 그게 세속의 관습과 법에 어긋나더라도 말입니다.


    이런 믿음은 명령이나 강요로는 결코 얻어지지 않고, 오직 체험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하늘의 ‘은총을 강요나 사취, 혹은 노동으로 얻을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무튼 앞서 내가 말한 그런 믿음을 체험으로 얻지 못한 사람은 종교나 과학, 애국심, 사회주의, 혹은 이미 완결된 도덕이나 프로그램, 처방책이 존재하는 곳 어디에선가 그것을 구합니다.


    나는 누군가가 자신의 삶과 의미로 향하는 험하고 아름다운 길을 걸어갈 능력이 있는지, 혹은 그런 소명을 받았는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건 그 사람을 직접 만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부름은 불과 수천 명에게만 내려지고, 그중 많은 사람이 그 길을 조금 걷다가 맙니다. 게다가 청춘을 넘어서도 그 길을 계속 걷는 사람은 무척 드물고, 그 길의 끝까지 완벽하게 이른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1930년의 한 편지에서



    당신의 고유한 천성과 삶에 대한 적격성 문제로 불안과 걱정이 있다면 나는 용기와 믿음을 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세상에는 사는 게 한결 더 수월해 보이는 사람들, 겉으로건 실제로건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문제도 알지 못하는, 개성이 강하지 않은 사람들이죠. 그런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자신의 삶이란 무언가 자기만의 새롭고 독특한 것, 언제나 고되면서도 아름다운 것을 의미합니다. 삶의 표준은 없습니다. 삶은 우리 각자에게 고유한 임무를 맡길 뿐입니다. 그렇기에 태어날 때부터 삶에 맞는 본성이나 적합한 특성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약하고 가난한 사람도 고귀하고 진실된 삶을 살고, 남들에게 대단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삶의 자리와 특별한 임무를 받아들이고 실현하고자 노력함으로써 말입니다. 그게 바로 진정한 인간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항상 무언가 고결하고 사람을 치유하는 힘이 담겨 있습니다. 비록 그런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이 남들의 눈에는 그와 자리를 바꾸고 싶지 않은 불쌍한 인간으로 비친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자기 비하와 자격지심에 빠지지 마십시오. 물론 후회를 부를 수 있는 자신의 개별 행동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비판하고 탓할 수 있습니다. 그건 옳은 태도입니다. 다만 남들이야 어떻게 보든, 자기 자신을 그렇게 하찮거나 쓸모없게 보지는 마십시오. 대신 신에게 받은 재능과 약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그것을 긍정하고, 그것으로 최선의 것을 만들어 나가도록 하십시오. 신은 우리 각자에게 무언가 의미를 부여했고, 우리와 함께 무언가를 시도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실현하려고 애쓰지 않는다면, 그건 신에게 맞서는 일입니다.

    -1941년의 한 편지에서



    언어

    해는 빛으로 우리에게 말하고,

    꽃은 향기와 색으로 말하고,

    공기는 구름과 눈, 비로 말한다.

    세계의 성소에는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산다.

    사물들의 침묵을 깨뜨리고,

    말과 몸짓, 색깔, 소리로

    존재의 비밀을 표현하려는 갈망이.

    여기서 예술의 환한 샘이 흐르고,

    말과 계시, 정신으로

    세계를 포착하고, 환하게

    인간의 입술로 영원의 체험을 알린다.

    모든 생명은 언어를 갈구하고,

    우리의 둔감한 추구를

    말과 수, 색, 선, 소리로 불러내고,

    점점 고결한 의미의 왕좌를 만들어 나간다.

    빨강 파랑 꽃 한 송이로,

    시인의 말로

    창조 작업은 내면으로 향하고,

    시작과 끝이 쉼 없이 반복된다.

    말과 소리가 만날 때,

    노래가 울리고 예술이 펼쳐질 때,

    매번 세상과 온 존재의

    의미가 새로 형성되고,

    모든 노래와 모든 책,

    모든 그림은 하나의 폭로가 되고,

    삶의 통일성을 완수하려는

    천 번째 새로운 시도가 된다.

    문학이, 음악이 너희를

    이 통일성으로 들어오라고 유혹하고,

    창조의 다양성을 이해하는 데엔

    거울만 한 번 보아도 충분하다.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던 것들이

    시 속에서 단순명료해진다.

    꽃은 웃고, 구름은 비를 뿌리고,

    세계는 의미를 갖고, 침묵하던 것들은 말을 한다.

    -1928년 2월 3일



    인생을 전체적으로 고통과 괴로움으로 느끼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 더러 있다. 그것도 문학적, 미학적 염세주의나 관념의 차원이 아닌 육체적이고 실제적인 고통으로서 말이다. 불행히도 나 역시 그중 한 사람인데, 이것도 재능이라면 이들은 즐거움보다 고통을 느끼는 재능이 더 탁월하다. 그런 사람에겐 숨 쉬고, 잠자고, 먹고, 소화하는 것, 이 모든 단순한 동물적 행위가 즐겁다기보다 오히려 고통과 수고가 된다. 그럼에도 이들은 자연의 뜻에 따라 삶을 긍정하고, 고통도 좋게 여기면서 삶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충동을 내면에서 느끼기에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기쁨을 주고 조금이라도 자신을 명랑하고 행복하고 따뜻하게 해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유별나게 집착하고, 마음에 드는 모든 것에 평범하고 건강하고 성실한 보통 사람들은 모르는 가치를 부여한다.


    자연은 이런 과정에서, 거의 모든 사람이 존경심을 보이는 지극히 아름답고도 복잡한 무언가를 만들어 냈다. 바로 유머다. 삶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 너무 여리고 너무 영리하지 못하고 병적으로 쾌락을 추구하고 위로에 집착하는 그런 사람들에게서 종종 유머라고 부르는 것이 생겨난다. 지속적인 깊은 고통 속에서만 자라는 이 보석은 어쩌면 인류가 만들어 낸 꽤 괜찮은 생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고통받는 사람이 힘든 삶을 견디고, 심지어 그것을 넘어 삶을 예찬할 수 있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 유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유머가 고통을 모르는 건강한 이들에게 정반대 작용, 그러니까 삶의 기쁨과 유쾌함을 마음껏 분출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이런 유머를 들으면 배를 잡고 넘어가거나 박장대소를 한다.


    그러다 가끔 무척 인기 있는 성공한 코미디언 X가 우울증으로 물에 빠져 자살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으면 늘 어이없어하고, 약간 속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뉘른베르크 여행』(1925) 중에서



    우리에게 망각이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우리에게 기억이라는 선물이 있다는 것 또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우리는 모두 기억에 보존되어 있는 것을 잘 알고 잘 간직한다. 하지만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잊고 있던 것들로 인해 일어나는 엄청난 혼돈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 가끔 수년 수십 년이 지난 뒤, 마치 남에게 줘 버린 보물이나 농부의 쟁기에 파헤쳐진 불발탄처럼, 잊고 있었던 것, 미처 소화되지 않아 쓸데없는 것으로 밀쳐져 있던 것들이 덩어리째 다시 밀려들 때가 있다. 그런 순간에는······ 우리의 기억을 구성하고 있던 많은 소중하고 멋진 것들이 갑자기 작은 먼지 더미처럼 보인다. 우리 시인들과 지식인들은 기억을 매우 귀히 여긴다. 기억은 우리의 자산이고, 우리는 그것으로 먹고산다. 하지만 잊어버렸고 내버렸다고 생각한 것들이 지하 세계에서 불쑥 기어 올라와 기습적으로 우리에게 닥치면, 그 발견은 반가운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항상, 우리가 신중하게 가꾸어 온 기억에는 없는 힘과 무게로 다가온다. 나는 때로 그게 방랑과 세계 정복을 향한 충동이자, 판타지를 아직 잃지 않은 사람이라면 청춘 시절에 익숙했던, 새로운 것과 아직 보지 못한 것, 여행과 이국적인 것에 대한 갈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나 추측을 하곤 한다.


    또한 그게 우리를 음울하게 짓누르는 것이라면, 그건 망각에 대한 갈망이자, 과거의 일을 밀어내려는 갈망이자, 최대한 많은 새로운 이미지로 과거의 이미지를 덮으려는 갈망일지도 모른다.

    -『엥가딘의 체험』(1953) 중에서



    아름다운 것들

    세상엔 아름다운 것이 많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게 생기가 돌고,

    늘 너에게 충직하고,

    늘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다.

    알프스 산마루에서 바라보는 풍경,

    푸른 바다 옆의 한적한 오솔길,

    바위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어둠 속에서 노래하는 새,

    꿈속에서 웃음 짓는 아이,

    겨울밤의 별빛,

    고산 목초지와 만년설로 둘러싸인

    맑은 호수의 저녁노을,

    거리 울타리 너머에서 들려오는 노래,

    나그네와 나누는 인사,

    어린 시절의 생각,

    늘 깨어 있는 아릿한 슬픔,

    몇 날 밤을 부드러운 아픔으로

    좁아진 너의 마음을 넓혀 주고,

    별들 위로 아름답고 창백하게

    머나먼 고향의 그리움을 일깨우는 슬픔까지.

    -1901년경



    내게는 인생의 의미에 대한 한 가지 믿음이 있습니다. 본능이 되어 버린 앎이나 예감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유구한 세계사를 보면, 나는 인간이 선하고 고결하고 평화를 사랑하고 이타적인 존재라는 결론을 도저히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에게 주어진 가능성들 가운데 선과 평화,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정말 고결하고 귀한 가능성이 있고, 운 좋은 경우에는 그것이 활짝 꽃피울 수도 있다고 믿습니다. 아니, 확신합니다. 이 믿음에 확증이 필요하다면 나는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세계사엔 악명 높은 정복자와 독재자, 전쟁 영웅, 폭탄 제작자들 외에 부처와 소크라테스, 예수 같은 걸출한 인물이 있었고, 인도인과 유대인, 중국인들의 성스러운 경전이 있었으며, 평화를 사랑하는 인간 정신의 경이로운 예술 작품들도 있었다고 말이지요. 대성당 입구에 전시된 수많은 인물상들 가운데 한 예언가, 몬테베르디나 바흐, 베토벤의 몇몇 음악, 로히어르, 과르디. 르누아르의 회화 몇 점만 떠올려 보더라도 세계사 에서 일어난 잔혹한 권력 투쟁이나 전쟁과 반대되는 세계가 존재했고, 자기 안에서 충만하고 행복한 다른 세계가 있었음을 믿기에 충분해 보입니다. 게다가 예술 작품은 인간의 폭력 행위보다 훨씬 더 오래 지속되고 확실하게 살아남습니다. 심지어 개중에는 수천 년 넘게 살아남은 것도 있지요.


    폭력을 믿지 않고 폭력의 요구를 최대한 물리치려고 하는 우리지만, 그럼에도 인류 역사에서 진보란 없었고, 세상은 여전히 야심가와 권력에 굶주린 자와 폭력적인 자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아름다운 말을 사랑하는 우리로선 그것을 비극적이라 부를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지금도 권력과 폭력 기구들에 둘러싸여 살고, 그것들에 자주 이를 갈며 분개하면서도 결국엔 하염없이 절망합니다(이건 당신도 스탈린그라드에서 겪어 보았을 겁니다).


    또한 우리는 영혼의 비상을 위해 평화와 아름다움,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원자폭탄 제작자들이 하루빨리 그 악마적인 도구를 발명 해주기를 소망하고, 그러면서도 그런 분노와 소망이 번성하도록 허용하지 않으며,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고 느낍니다. 우리의 분노와 그 나쁜 소망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인간 세상은 선과 악으로 명쾌하게 나눌 수 없고, 악은 야심가와 폭력적인 인간들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사랑하고 선의를 갖고 있다고 스스로 믿는 우리 속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분노가 ‘올바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건 정의입니다. 하지만 권력을 경멸하는 우리로 하여금 이 악행을 말끔하게 청소하기 위해 잠시나마 권력을 갈망하게 만드는 것도 바로 이 정의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충동을 부끄럽게 여기지만, 그것의 귀환을 영원히 막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악에 동참하고, 전쟁도 함께합니다. 우리가 그런 동참을 경험적으로 깨닫고 부끄러워할 때마다 세상의 통치자는 악마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지고, 그들이 악의에서 악을 행하거나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맹목과 무지에서 그렇게 한다는 사실도 명백해집니다.


    이 모순은 이지적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악은 세상에 있고, 우리 안에 있고, 우리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로 엮여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연의 밝고 아름다운 면이, 인류 역사의 밝고 아름다운 면이 분명히 우리에게 말을 걸고, 우리에게 행복과 위로를 주고, 우리를 훈계하고 감동시키고, 그리고 절망적일 때가 너무 많아 보이는 우리 존재에 희망을 불어넣습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 역시 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깨달음과 사랑이 깨어날 가능성이 있으리라는 데 희망을 품어 봅니다.

    -1955년 2월의 한 편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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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