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일상에 치이고 복잡한 인간관계에 얽힌 채 살아가는 보통 사람 중 아무런 고민도 불안도 없이 마냥 행복하기만 한 이가 있을까? 그러나 행복과 불행이 뒤엉켜 있는 것이 삶이고 기대가 어긋나거나 좌절하는 일이 다반사임을 알면서도 힘든 상황에 처하면 혼자 힘으로 빠져나오기란 쉽지 않다. 그런 사람들에게 전하는 조언이 근본적이면서도 현실적이어야 하겠다고 정신과 의사 이두형이 느낀 이유다.
폭력이나 학대 같은 트라우마를 남긴 경험은 물론, 타인이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나 부정적인 자기 인식만으로도 우리는 심한 고통을 겪을 수 있다. 저자는 엄연히 존재하는 부정적 감정을 애써 괜찮다고 포장하거나,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를 두고 마냥 잘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기만적인 태도를 경계한다. 감정을 대하는 전제는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그리고 그런 감정이 어떤 과정으로 형성되었고 어떠한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는지를 헤아리고 포용하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의 위험 회피 본능이 의미 있고 소중한 것보다는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것, 두려운 것에 더 몰입하게 해 관계를 어렵게 만들고 부정적인 감정에 휩쓸리기 쉬운 거라고 지적하면서도, 그러한 고통이 ‘나의 오류를 증명하는 증거’나 ‘앞으로의 삶이 불행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증거’는 아니라고 거듭 강조한다. 이미 일어난 일을 담담히 위로하고 다독여 주는 ‘수용’과 부정적인 언어로 삶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융합에서 탈출해 자유로워지는 ‘탈융합’은 과거의 잘못들에 매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데 기초가 되어준다.
■ 저자 이두형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인제대학교 백병원에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를 취득했다. 정신의학을 공부하고 수많은 내담자를 만나는 과정에서 수용전념치료를 알게 된 후, 보다 많은 사람에게 삶의 근간이 될 철학으로 이 개념을 소개하고 싶어 꾸준히 글을 써왔다. 대한 신경정신의학회, 국제 맥락적 행동과학회(ACBS) 정회원이며 〈정신의학신문〉 및 네이버 블로그에 마음 건강에 관한 칼럼을 연재한다. 저서로 《그냥 좀 괜찮아지고 싶을 때》 《내가 나인 게 싫을 때 읽는 책》, 옮긴 책으로 《심리치료에서 자기를 다루는 법》(공역)이 있다.
■ 차례
들어가며 인생이 끝도 없는 터널처럼 느껴진다면
1. 당신이 힘든 건 잘못 살아온 탓이 아니다
1장_ 이미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기의 어려움
첫 번째 축 수용
● 당신이 잘못 살아왔음을 설득해보세요-스스로가 문제투성이라고 생각하는 당신에게
● 그 사람의 생각은 다 맞을까?-상처 준 말을 잊지 못해 힘든 당신에게
●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면 어떻게 하지?’-관계가 어렵고 두려운 당신에게
● 늘 자책하는 내가 나조차 버거울 때-자신에게 친절하지 못한 당신에게
● ‘다 잘될 거야’라는 거짓 위로-억지 긍정에 지친 당신에게
● 남은 이야기 아픔을 다르게 이해하기
2장_ 평가하는 대신 관찰하는 연습 069
두 번째 축 탈융합
● 상처받은 기억이 자꾸 되살아난다면-용서하라는 말에 더 괴로운 당신에게
● ‘힘들지 않기’야말로 가장 힘든 것-행복은 사치라며 버티기만 하는 당신에게
● 수없이 깨져왔을 삶의 그릇이 피워낸 아름다움-인생이 무참히 망가졌다고 생각하는 당신에게
● 험난한 세상 한가운데 스스로를 격려하는 방법-위로받을 자격이 있는지 곱씹는 당신에게
● 남은 이야기 언어의 감옥에서 빠져나오기
2. 괜찮지 않은 우리의 괜찮은 삶
3장_ 지금 이 순간에 몰두할 때 생기는 일들
세 번째 축 현재와의 접촉
● 바닷바람만으로도 다행이라고 느끼는 순간-죽고 싶은 마음이 드는 당신에게
● ‘꼭 필요한 불안만 만나는 시간’ 정하기-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당신에게
● 후회의 맥락을 이해한다는 것-사소한 일인 줄 알면서도 고민하는 당신에게
● 그것은 나의 위기가 아니라 타인의 불안일 뿐-남의 잣대에 맞추느라 애쓰는 당신에게
● 남은 이야기 소중한 순간에서 삶의 실마리 찾기
4장_ ‘나’라는 현상과 진짜 ‘나’ 사이에서
네 번째 축 맥락으로서의 자기
● 본능에 따르지 않으면 위선일까?-여러 가면 사이에서 갈등하는 당신에게
● 믿을 수 없으니 ‘믿음’이라는 단어를 쓴다-스스로에 대한 의심으로 힘겨운 당신에게
● 나에게 다정한 연인이 되어주는 법-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는 당신에게
● 예기치 않은 순간 일어나는 마음의 순환-사소한 진심의 고리를 놓쳐버린 당신에게
● 남은 이야기 과거, 현재, 미래의 나에게 각각 말 걸어보기
3. 이제 나의 불완전함을 새로이 이해한다
5장_ 다가올 모든 순간의 최선을 찾아서
다섯 번째 축 전념
● 불안의 두 얼굴-불안 보상행동의 함정에 빠진 당신에게
● 감정을 이해하는 것 vs. 감정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마음대로 안 되는 마음이 고민인 당신에게
● 정신과 의사가 화를 내는 방법-싸우기도 싫고 참을 수도 없는 당신에게
● 감성이야말로 먹고사는 현실이다-바쁜 일상에 지쳐버린 당신에게
● 불편한 느낌 속 고단한 나의 행복-출근하기 싫어 불행하다고 느끼는 당신에게
● 남은 이야기 충동과 쾌락의 뒷모습 들여다보기
6장_ 나답다고 느끼는 마음에 대한 탐구
여섯 번째 축 가치
● 삶의 형태보다 중요한 것은 의미의 흐름-똑같은 하루하루가 허무한 당신에게
● 느슨하게 붙잡기-잘 해내고 싶은 마음만으론 버거운 당신에게
● 의미를 몰라서 자유로운 우리의 삶-왜 살아야 하는지 되묻는 당신에게
● 노력과 결과가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원치 않은 결과에 좌절한 당신에게
● 악마뿐 아니라 천사도 ‘디테일’에 있다-살아가는 의미와 힘을 잃은 당신에게
● 남은 이야기 뒤엉킨 불행과 행복을 기꺼이 마주하기
나가며 완벽하지 않은 우리의 완벽한 날들을 위하여
정신건강의학에서 다루는 수용전념치료라는 전문적인 개념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일상적인 이야기로 변환해 삶의 철학으로 활용할 수 있게 안내합니다. 누구나 고민하게 마련인 관계, 트라우마, 불안, 삶의 의미 등을 상담 과정에서 만난 다양한 상황을 통해 이야기하며, 막연한 감정을 맥락 속에서 들여다보고 실효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불완전한 삶에 관한, 조금은 다른 이야기
당신이 힘든 건 잘못 살아온 탓이 아니다
이미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기의 어려움-첫 번째 축 수용
늘 자책하는 내가 나조차 버거울 때-자신에게 친절하지 못한 당신에게
입원 병동에 있는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면서 환자들에게 자주 들었던 말 중 하나는, 같이 입원한 환자들이 건넨 위로가 너무도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때로는 주치의와의 면담보다도 다른 환자들의 진심 어린 이해가 힘이 되었다는 이들도 만났다. 그 힘의 근원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여러모로 이야기를 해본 적이 있다. 비슷하거나 더 심한 아픔을 경험한 사람들이기에 같은 마음처럼 깊이 공감하고 이해해줄 수 있다는 점은 충분히 짐작할 만했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부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환자 간의 대화에서는 결코 타인의 아픔이나 버거움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환자들끼리는 자신에게 잘못이 있는지, 고작 그런 일로 힘들어해도 되는지, 나아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신이 얼마나 아팠는지, 그럼에도 얼마나 노력해왔는지를 함께 나눈다. 그렇기에 그들의 대화에는 목적이 없다. 어떻게든 좋아지려 하거나, 상대방을 인위적으로 이끌려는 마음이 없다. 단지 공감하고 또 이해할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묘한 힘을 발휘한다. 우리는 늘 깊고 진솔한 이해에 목말라 있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어째서 좋은지, 사람들과의 만남을 시도하는 것이 삶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집에 가만히 머무르기보다는 운동을 하거나 공부를 하는 것이 왜 더 나은지···우리는 생각보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 좋은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너무도 뻔하고 당연한 그 방법을 실행하기 힘들 때가 있다.
우리는 그럴수록 스스로를 다그쳐야만 할 것 같은 강박을 느낀다. 나의 문제를 분석하고,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반추하고, 끊임없이 나를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내모는 것이 옳고 또 필요한 일이라 굳게 믿는다. 심지어는 그간의 내가 힘들었을 수도 있다는 것, 내 삶에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아픔이 존재했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 자체를 두려워하기도 한다. 마치 ‘나는 힘들만해서 힘들었어’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건네버리면 영원히 그 아픔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안주해버릴 것처럼.
살면서 들었던 가장 따뜻하고 위로가 된 한마디를 떠올려보자. 책에서 읽은 글귀 한마디든, 가족이나 친구나 사랑하는 이의 말 한마디든 누구나 마음을 깊이 이해받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 내용은 어떤 것이었던가. 아마도 그 메시지가 나의 아픔을 더 깊이 파고들거나, 내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설명하거나 다그치는 방향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럴 수 있다, 그럴 만한 아픔이었다며 나의 마음을 깊이 이해해주고 어루만져주는 방향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자신의 삶과 자신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 가족, 친구, 연인, 정신과 주치의를 비롯한 세상 누구도 나보다 나를 잘 알지는 못한다. 그렇기에 스스로를 향하는 비난은 누구의 평가보다도 뼈아프고, 스스로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이해는 어느 타인의 위로보다도 깊이 와닿는다.
나 자신을 격려하고 응원하기만 하면 모든 일이 다 잘 풀리고 인생이 괜찮아질 것이라는 식의 무의미하고 공허한 메시지를 더하려는 것이 아니다. 현실의 어려움을 외면한 채 그저 괜찮다는 주문만을 반복하자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때로 삶이 마음 같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의도하지 않았고 원하지 않은 아픔이 나를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이 나와 내 삶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어찌할 수 없는 삶의 본질임을 이해해주자는 것이다 그러한 삶을 견디고 살아가는 나를 감싸주고 안아주자는 것이며, 그 위로를 힘으로 삼아 원하는 삶을 이어가자는 것이다.
왠지 자책해야 할 것 같아서, 그게 더 맞는 것 같아서, 그래야만 삶이 나아질 것 같아서, 그렇지 않으면 현실에 안주하게 되고 발전이 없을 것 같아서 스스로를 비난하고 있다면 그러지는 않아도 된다. 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위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억지 노력과 다그침보다는 묵묵히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위로와 힘이다. 그러니 조금 더 내게 친절해도 된다. 당신이 너무도 아끼고 소중해 마지않는 누군가가 힘들어 할 때 건네고 싶은 따뜻한 말, 그 말이야말로 지금의 내게 가장 필요한 말이므로.
평가하는 대신 관찰하는 연습-두 번째 축 탈융합
상처받은 기억이 자꾸 되살아난다면-용서하라는 말에 더 괴로운 당신에게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을 공통적으로 힘들게 하는 조언이 있다. 가해자를 용서하라는 이야기다. ‘용서하면 진정한 평화가 온다.’ ‘원망을 내려놓으면 편해진다.’ 정말 그럴까. 심적 고통은 눈에 보이지 않아, 이에 대한 세상의 인내심은 무한하지 않다. 처음에는 가해자와 상황에 대해 함께 분노해주지만 아픔이 한두 달, 심지어 몇 해가 지나도 지속되면 주위에서는 서서히 피해자를 탓하기 시작한다. ‘시간이 이만큼 흘렀으니 잊을 때도 되지 않았느냐’ ‘언제까지 그런 상태로 살 것이냐’ ‘이 정도면 사실 네가 문제였던 것이 아니냐’ 그러한 시선에 시달리다 보면 누구나 조급함을 느끼게 된다. ‘빨리 좋아져야 해, 아직도 이렇게 힘들다는 건 내가 비정상이라는 증거야.’
용서는 어떻게든 좋아져야 한다는 압박이 만들어낸 고육지책의 끝판왕 같다. ‘차라리 상황을 이해해봐라, 그 사람을 용서해봐라.’ 그러나 그런 조언을 들으면 ‘아하, 그렇게 하면 편안해지겠구나’라는 깨달음과 후련함보다는,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어떻게든 편해져야 한다는 부담이 더해진다. 단순한 부담을 넘어, 상처받은 것은 나인데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도 왜 나여야만 하는지, 억울함이 더해져 슬픔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아픔을 안긴 이를 죽이고 싶거나 차라리 내가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의 상처는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아무는 것이 아니고, 그런 상처를 준 사건이 잊히지도 않는다. 잊히지 않는 것, 좋아지지 않는 것이 ‘비정상’이 아니다. 몇 달, 몇 년이 지나도 아픈 것이 당연하다 뒤따르는 불안과 분노는 그러한 아픔을 다시 겪지 않으려는 자연스러운 회피, 방어기제다. 이러한 기전을 애써 외면한 채 일시적으로 힘든 감정을 무마하려고 인위적인 용서를 떠올릴수록 마음은 ‘정말 진심이야’ ‘그렇게 하면 괜찮아지는 거야?’라고 되물어 온다.
상처받은 기억을 없던 것으로 돌릴 수는 없다.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기에는 그때의 내가 너무 가엾다. 애써 외면한다고 해서 외면되는 것이라면 정신과 의사라는 직업은 없어도 된다. 억지로 용서하기로 하면 용서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오랫동안 아파할 이유가 없었다. 비합리적인 수준의 아픔일지라도 그 이유는 비합리적이지 않다. 아픔다운 이야기로 애써 덮으려 할수록 불편한 진실로 인한 아픔은 날카로워진다. 그래서 관념으로만 그럴듯한 이야기를 실제 진료 현장에서 권하기는 어렵다. 나는 무리한 용서대신 ‘그 기억과 철저히 상관없어지는 것’을 이야기한다.
트라우마는 그 자체로 고통을 줄뿐더러, 그동안 소중히 여기던 것들로부터 멀어지게 함으로써 삶을 황폐화하는 기전이 있다. 사람이 붐비는 지하철을 탈 수 없어 귀한 면접 기회를 포기하고, 웃는 얼굴로 담소를 나눌 자신이 없어 보고 싶은 이를 보지 못한다. 아픔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그로 인해 사랑하던 것들로부터 단절된다. 진정한 트라우마는 외상적 경험 이후의 ‘영향력’으로 일어나며, 꾸준히 진행된다.
그래서 심리적 외상을 다룰 때 내가 가장 염두에 두는 것은 과거의 아픔이 현재의 소중하고 사소한 일상을 가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거대하고 압도적인 고통의 기억 앞에서 오늘 날씨의 포근함, 더운 날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 주는 청량함, 기다리던 사람이 먼발치에서 보이기 시작할 때의 설렘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게 여겨진다. 그 ‘그따위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게 여겨지는’ 지점이, 내가 가장 열심히 투쟁하는 지점이다. 나는 당신의 과거를 바꿀 능력은 없지만, 그 과거가 현실의 소중함을 앗아가는 지점에 대해서는 당신과 함께 격렬히 저항하고 싶다. 비현실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용서보다는 차라리 억울함과 분노가 괜찮다. 적극적으로 억울해하고 가장 솔직하게 분노하기를 권한다. 단지 방향은 조금만 틀면 좋겠다. ‘왜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났을까?’라는 분노를 ‘그 일도 억울한데, 왜 내가 그로 인해 오늘의 소중함마저 잃어야 하는가’로.
그러한 일이 당신의 삶에 존재했다는 이유로 오늘 읽는 책의 감동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늘 곁을 지켜주는 강아지와 산책을 이어가기를, 언제나 그 앞에서는 울어도 되는 친구와의 약속을 취소하지 않기를. 그 아픔의 흔적이 감정적으로나 이성적으로 모두 정리되어야지만 비로소 생의 행복을 다시 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힘겨운 마음이 들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당신의 삶이, 그 기억과 무관히 존재하고 또 이어지도록 할 것이다. 어떠한 트라우마가 있든 여전히 당신이 사랑하는 것들과 접촉하며 살아가길 바란다.
보란 듯이 잘 살자는 것이 아니고, 무리해서 애써 용서하자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단지 내일도 당신의 하루가 열릴 테니, 그 하루가 그 아픈 기억과는 철저히 상관없는 일상이기를 기도한다. 그 아픔이 있기 훨씬 오래전부터 일상을 늘 함께해온 당신이 아끼는 것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들 그리고 그들은 당신이 상처를 바라보는 대신 예전처럼 자신을 바라봐주기를 묵묵히 기다리고 있다.
괜찮지 않은 우리의 괜찮은 삶
지금 이 순간에 몰두할 때 생기는 일들-세 번째 축 현재와의 접촉
‘꼭 필요한 불안만 만나는 시간’ 정하기-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당신에게
당연한 이야기를 대단한 진리인 양 늘어놓는 어른들이 있다. ‘취업은 해야지.’ ‘사람 만나는 것도 다 때가 있다.’ 하지만 들어보면 대개 뻔한 말이기도 하다. 일을 하기 싫어 애써 취업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랑을 나 혼자 마음만 먹는다고 할 수 있는 걸까. 그 정도는 다 안다. 당연하지만 어려울 뿐이다.
삶이 어려운 이유는 어떻게 살아갈지를 몰라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갈지는 알겠는데 ‘무조건 잘되는 건 아니라서’라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의 현실에서 어떤 방향이 최선인지는 떠올릴 수 있으나, 그렇게 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잘 풀린다‘라는 확신을 구하기는 어렵다.
삶은 어느 순간에도 미래에 대한 의문에 완벽한 확신을 제공해주지 않는다. 지금 당면한 일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이 불확실성이라는 벽에 부딪혀 왜곡되고 증폭된다. 대책을 세워 안도감을 얻으려 걱정을 거듭할수록, 안도할 수 없게 하는 부정적인 예측이 자꾸만 떠올라 오히려 불안을 키우는 답답하고도 안타까운 굴레에 빠진다. 불확실성을 모두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만 불안하지 않을 수 있다면, 인간은 어쩌면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온전한 평안’에는 도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불안은 위기를 예측하고 대응하는 정서적 반응이다. 오래도록 불안에 시달린 이들은 ‘나는 왜 이렇게 생각을 부정적으로 할까?’하며 스스로의 성향을 탓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당신이 유달리 예민하고 부정적인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위기를 미리 상상하고 대비하도록 진화된 인간의 본능에 충실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할 용기’를 제안한다. 그 용기는 알 수 없는 미래,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걱정하느라 소진되는 귀한 시간과 마음의 여력을 지금 우리의 삶에서 실제로 시도할 수 있는 것, 지금의 최선인 것을 떠올리고 실행하는 데 쓰이도록 해준다.
어떠한 삶의 순간에서도, 불안한 대로 ‘지금 그대로의 최선’이 있다. 완벽한 정답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지금의 최선이기 때문에 시도하는 것이다. ‘완벽하게 미래를 예측하고 확신하여 불안이 소멸되어야 한다’는 부담만 없으면 구체적인 방법, 지금의 최선을 떠올리는 것은 조금은 더 쉬운 일이 된다. 이러한 통찰을 이어가다 문득 떠올린 불안의 법칙이 있다. ‘한 시간의 법칙’이다.
이는 불안을 일으키는 상황에 대응하는 실효적인 최선의 방법을 고민하는 데는 대개 길어도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는 법칙이다. 달리 말해 그 정도 시간을 들여 차분하게 고민해도 마땅히 떠오르는 답이 없다면 온종일, 몇 날 며칠을 붙잡고 고민해도 뾰족한 답을 찾기는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의미도 된다. 그 시간 동안만큼은 마음껏 불안해하고 두려워한다. 단 그 두려움이 ‘어떻게 하면 마음이 편해질지’로 흐르지 않고 ‘지금의 내게 어떤 것이 최선인지’를 고민하는 방향성이 유지될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제한을 건 시간이 지나면 ‘이 정도면 오늘 하루치 불안은 생각할 만큼 했어’하고 툭툭 털 듯 선언한다. 그 뒤로는 하루동안 쌓인 상념을 글로 풀거나, 이불을 싸매고 창가에 누워 몸을 따뜻하게 한 후 밀린 책이며 나중에 보려고 저장해둔 유튜브 영상을 본다. 그 불안에 압도되어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그토록 원했던 온전히 나를 위해 쓰는 시간이다.
오늘은 이만하면, 소중한 삶의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충분히 고민했다고 마음을 다독여본다. 여전히 마음 곁을 서성이는 불안에게 ‘오늘도 이만하면 충분히 같이 있었네, 내일도 우리는 만날 거니까 남은 시간은 홀로 조용히 보내도 될까?’ 하고 나직이 부탁해본다.
당신에게도, ‘한 시간’을 고민했다면 맥주 한 캔, 음악 한 곳, 그리운 이와의 통화 한 통의 여유 정도는 스스로에게 선물해보기를 제안한다. 미래를 모두 예측해 안전하고 괜찮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는 불가능한 강박은 조금만 내려두고서, 불확실성이라는 삶의 본질 때문에 아무리 고민해도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불안을 위로하고 다독여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여유가 다시금 내일 하루만큼의 삶과 고민을 이어갈 힘으로 당신에게 깃들기를 기도한다.
‘나’라는 현상과 진짜 ‘나’사이에서-네 번째 축 맥락으로서의 자기
나에게 다정한 연인이 되어주는 법-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는 당신에게
나를 사랑해야지, 라고 생각하기 전에 ‘내 마음의 입장에서 어떤 방식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 느끼게 될지’를 생각해보면 좋겠다. 내가 자신에게 꼭 만나고픈 연인이 되어주자. 힘들 때는 가벼운 위로와 농담을 건네며 어깨를 주물러주자. 평가나 판단은 잠시 내려두고 누구도 모르는, 나만이 알 수 있는 슬픔을 들어보자. 쉬는 날이면 좋아하는 풍경을 찾고,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좋아하는 음식 레시피를 챙겨 마트에 들러 재료를 사고 서툴게 요리해보자. 사소한 나의 기쁨과 슬픔을 기억해주자.
따뜻한 조언이 필요하더라도 따뜻함을 담아보자. ‘정신차려’ ‘이대로는 안 돼’라는 습관적인 자기 비하나 압박보다는 꼭 필요한 제안에 격려를 함께 담는 것이다. ‘쉽진 않겠지만 한번 해볼까.’ ‘꼭 필요한 선택이라면 조금은 과감해져도 괜찮아.’ ‘어떤 어려운 상황이 다가오더라도 같이 힘을 내줄게.’ ‘누군가에게 꼭 듣고 싶지만 듣기 어려운 말을 스스로에게는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
지금 나의 마음에 어울리는 음악을 잊지 않고 틀어주는 사람, 좋아하는 장소를 기억했다가 그곳이 꼭 필요한 순간에 같이 가자고 제안하는 사람, 지금 이 순간에 필요한 세심한 배려를 보이지 않게 챙겨주는 사람, 주구라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연인 같은 존재. 스스로에게 그러한 존재가 되어주는 것, 나 자신에게 ‘좋아하는 형태의 일상과 삶’을 선사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내가 제안하는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사랑하며 살다 보니 느끼는 게 있다. 처음의 기호와는 별개로 시간이 쌓이면 기준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아내보다 키가 크면 키가 큰 사람, 작으면 작은 사람이 된다. 첫째보다 눈이 작으면 작은 아이로 보인다. 기준에 흡족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기준이 되는 원리다.
나 자신을 사랑하면서 스스로 세운 기준을 적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감동, 좋아하는 바닷가 풍경 속에서 머물 때 나만이 느낄 수 있는 위로, 아무리 번잡한 세상의 기준이 나를 몰아세워도 그 느낌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제 나의 불완전함을 새로이 이해한다
다가올 모든 순간의 최선을 찾아서-다섯 번째 축 전념
불편한 느낌 속 고단한 나의 행복-출근하기 싫어 불행하다고 느끼는 당신에게
과거의 경험을 돌아보면 나는 행복을 ‘기쁜 느낌’이 드는 순간이 많은 것으로 정의했었다. 여가시간이 최대한 많은 것, 공부든 일이든 하기 싫은 일은 최소로 하는 것, 불편한 사람을 만나지 않고 편안한 사람을 마날 수 있는 것을 추구했다. 퇴근하기 위해 출근했고, 주말에 놀기 위해 주중을 버텼다. 휴가를 가기 위해 업무를 버텼고, 노후 준비를 하기 위해 젊은 시절을 투자한다고 생각했다. 싫은 것을 최소화하고 좋은 것을 최대한 늘리는 것, 당연하다면 당연한 그 원칙을 따라 나름대로 열심히 사는데 왠지 모를 공허함이 밀려왔다.
그때의 내게 결여된 것은 의미였다. 견뎌서 먹고 산다, 멋진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혹은 월급을 쌓거나 재테크를 해서 돈을 번다, 같은 식상하고 표면적인 명제들 외에 삶을 지탱하는 것이 없었다. 결여된 의미는 일시적인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은 피하자는 원칙으로 이어졌으나, 영원한 즐거움은 존재하지 않았고 고됨을 완전히 없애는 것도 불가능했다. 조금 덜 힘들거나 많이 힘들거나, 그 굴레의 반복이 허무했다.
단순히 힘든 것이 많으면 불행하고 편안한 것이 많으면 행복하다고 하기에 인생의 원리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작용할 때가 많다. 퇴근의 고됨과 출근의 버거움은 불행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가족의 생계유지든 자아실현이든, 그 피로를 무릅쓰고 추구하고 싶은 그 이상의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증거다.
피로에 절어버린 날 새벽에 두세 번씩 일어나 둘째를 안고 어르며 재울 때면 ‘내가 왜 이 고생을 자초했을까’라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절로 든다. 그러다가도 아이의 눈을 바라보고 있자면 힘든 것쯤은 아무래도 좋을 만큼 벅참이 느껴진다. 같은 고됨을 선사하던 첫아이는 어느새 커서 제 두 발로 뛰어다니고 말도 또박또박 할 수 있게 되었다. 새삼 이런 모습을 보는 삶을 살 수 있어서 다행하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네 삶에는 쉽고 당연한 쾌락보다는 이런 종류의 기쁨과 감동이 더 많지 않을까. 해야 할 것이 있고 바라는 것이 있어 고된 행복이다. 삶에서 지향하는 것, 바라는 것이 하나도 없다면 그렇게 힘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부처가 아닌 한낱 인간이라서 늘 나름의 의미를 소망하고 가치를 추구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생의 소중함을 차근차근 쌓아주는 피곤하고 두려운 것들을 만난다. 그러므로, 궤변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아픔과 두려움, 긴장과 피로는 늘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지향하고 또 충실히 살아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렇게 당신을 위로하고 싶다. 만약 오늘 불안하고 고단했다면, 그것은 당신이 성실히 또 묵묵히 당신의 삶을 잘 살아내는 중이라는 증거이자, 곧 당신의 삶에서 소중한 것을 길어 올리게 되리라는 단서일 거라고.
나답다고 느끼는 마음에 대한 탐구-여섯 번째 축 가치
노력과 결과가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원치 않은 결과에 좌절한 당신에게
‘노력하면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나는 이 명제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부동의 가 노력의 가치를 냉소하거나 폄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초점을 달리할 뿐이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식상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당연히 나 역시 이왕이면 좋은 결과를 기대하지만,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염려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찾았을 뿐이다. 내게 최선이 오늘에 몰입하고 온전히 그 몰입이 주는 의미와 활력을 느끼는 것, 내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자 무엇보다도 큰 행복이다. 그로부터 주어지는 의미와 활력은, 불확실하고 예정되어 있지 않은 결과에 대한 두려움을 견디며 ‘그저 노력하며’ 살아가는 또 다른 힘이 된다.
우리에게 어떤 일은 예상보다 더 좋게 일어나고, 어떤 일은 생각보다 더 형편없이 진행된다. 스스로가 얼마나 최선이었는지, 진심이었는지와는 무관하게 삶은 그렇게 이루어져 있다. 자연스러운 인생의 원칙이 그렇다면 나는, 노력이 나를 어떻게 배신했는지를 되새기면 살지는 않겠다. 지금 하고 있는 노력이 어떻게 나를 배신할지를 예측하며 두려워하는 것은 더욱 원치 않는다.
대신 아침마다 오늘 하루 나아갈 방향을 떠올리고, 하루만큼 허락된 걸음을 내딛는 일을 매일 새로이 한다. 그 작심하루를 평생 반복하고 싶다. 어떠한 결과물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중한 것들을 머릿속에 품고 이를 향해 하루를 온전히 몰입하는 ‘지금 이 순간의 나의 모습이 좋아서’ 그러한 나날을 꾸준히 이어가고 싶다.
우리는,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완벽할 수 없다. 아무리 열심히 했더라도, 최선을 다했더라도 상상했던 결과물이 무조건 주어지지는 않을 수 있다. 당연하지만 한 번도 당연하지 않았던, 아프지만 자연스러운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나는 무한히 자유로워졌다. 그 자유란 바라는 것들이 이루어질지와 무관하게 온전히 나 자신을 위해 하루를 쓸 수 있다는 평온함을 주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내게 허락된 최선의 오늘에 몰입하는 것이 그간의 삶을 통해 나름대로 정의한 진정한 노력의 의미다. 그 자유와 평온, 진정한 노력의 의미를 당신과도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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