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임승원은 스스로를 기억력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가 기록을 하기 시작한 건 이 때문이기도 하다. 자꾸 까먹는 걸 까먹고 싶지 않아서, 살아가며 지키고 싶은 소중한 것들을 잊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자주 끄적였고, 독백했고, 비디오를 찍었다. 일상 속 기분 좋은 발견, 머릿속의 아이디어, 마음속을 가득 채우는 그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수많은 감각, 전하고 싶은 모든 이야기는 기록하지 않으면 금방 휘발되어서 사라지고 만다. 저자는 “인생은 세이브 기능이 없는 게임과도 같아서 우리는 기록해야만 한다. 기록하지 않으면 결국 다시 쌓아야 한다.”라고 전하며 영감의 원천이 되어 준 것도, 힘듦을 견디게 해 준 것도 모두 기록 덕분이었음을 강조했다.
인생의 세이브 포인트와도 같은 저자의 기록은 영상에서 시작해 이 책으로 이어졌다. “살아가며 내가 지키고 싶은 원리를 잊지 않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이 책은 내게 리마인더와 같다.”고 밝힌 저자 임승원은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 기록이 자신의 뒤를 환하게 밝혀주는 횃불이 되어 준 것처럼, 이 책을 읽은 독자들 역시 자기만의 독백을 이어가길, 즉 기록하기를 바란다는 진심을 전했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기억하려고 애쓰고, 또 많은 것을 잊어버리게 되겠지. 그러나 단 한 가지, 자꾸 까먹는 걸 까먹지 않고 싶다. 모든 게 언젠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 죽는다는 사실을.”
■ 저자 임승원
크리에이터. 유튜브 [원의독백] 채널 운영.
이것저것 다양하게 즐기는 것을 좋아함.
그래서 뷔페를 좋아해.
■ 차례
인트로 intro
가이드 guide
발견 discovery
my last day at school | 미니멀리즘 | 케이시 나이스탯처럼 살기 실패 | 항아리 게임
배달 음식에 관하여 | 루틴에 관하여 | 10,000일 | 영어에 관하여 | 내가 크리스마스에 원하는 것
무신사가 준 선물 | 모르는 당신과 아찔한 어깨빵 | 밥 먹고 하자 | 만 나이 | 장마에 관하여
서울 최고의 가게 | 에어팟 맥스를 샀는데요 | 이미 늦었습니다 |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주지는 않더라고
발렌시아가를 신으면 인생이 조금 달라질까 | 모태솔로 | 비를 맞자 | 여름이었다
좋은 밤 좋은 꿈 | 나를 찾아 줘
영감 inspiration
stealing casey neistat’s lifestyle | 자유에 관하여 | TO YOU FROM HOME | 애플에 관하여
싫어요 | 취향 찾기 | 프라이탁 | 관종에 관하여 | 자연 발화 | 비디오를 요리하는 방법 | 망했다
연비 주행 | 아이폰으로 찍다 | 시험 | 젊은 우리 나이테는 보이지 않고 | 완전하지 않은 완벽주의자
명품남 | 마라도 짜장면 | 생일 | 안티프리즈
원의독백 monologue
이문동재개발지구 | you f**kin b**ch | it is my birthday | track 8 | 100 subscribers
여백의 미 | 서류 탈락에 관하여 | 독립에 관하여 | 프리랜서 | 자전거에 관하여
좋아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으면 | 돈 벌자 화이팅 | 트래비스 스캇 | 유튜브 촬영 현장
짱이 되는 법 | 날 보러 와요 | 안녕 | 출발선 | 우리에게 | 향수 | 쇼츠 | 일 | 끌어당김
500/65 | 신제품
코멘터리 commentary
WLDO | 금종각 | 김규림 | 김상현 | 류덕환 | 봉현 | 아프로 | 유규선
유병재 | 이승희 | 임재형 | 장지수 | 제임스 안 | 조매력
유튜브 채널 "원의독백"의 창작자가 첫 번째로 출간한 에세이로, 창작의 여정과 깊이 있는 서사를 담고 있습니다. 예술적 영상미와 철학적 메시지로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준 이야기를 공유하며, 독자들에게 자신의 독백을 기록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발견, 영감 그리고 원의 독백
발견 discovery
my last day at school
학교에 처음 간 날의 설렘을 기억한다. 2013년, 갓 성인이 된 그때 나는 광주에서 막 서울로 온 어리바리한 왕자님이었다.
당시 나는 남도학숙이라는 곳에서 살았다. 전라도 학생들을 위해 교육청에서 제공한 기숙사였는데, 학교에 가려면 1호선 전철을 한 시간 넘게 타야 했다.
그럼에도 그 당시에는 그게 너무 즐거웠다. 교통카드를 사서 충전하고 대방역 개찰구에서 교통카드를 찍고 플랫폼으로 올라가는 그 일련의 과정이 나에겐 다 모험이었다.
플랫폼에 올라 미세먼지 가득한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매캐하고 혼탁한 먼지 냄새가 어찌나 고소하던지. 거기에는 화려하고 투명한 나의 미래도 담겨있는 것만 같았다.
학교로 가는 길, 나는 늘 사람들을 착실하게 구경하곤 했다. 노량진에서 젊은이들이 우르르 탔고, 종각에서는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동묘앞역에서는 가끔 악당이 등장하기도 했는데, 마구 소리를 지르며 싸우던 아저씨들이 기억난다. 누구의 승리인지, 합의를 이끌지 못하고 한 분이 내렸다. 마치 대사를 끝내고 사라지는 배우처럼 극적인 퇴장이었다.
그 뒤로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전철을 타는 게 너무나 고된 일이 되었다. 힘들고 지루한 과정이 되어버린 이 이동 시간을 어떻게든 보내기 위해 나는 스마트폰을 보기 시작했다.
경쟁이 치열한 한국 서버의 게이머인 나에게 전철 이동은 맵과 맵 사이의 로딩 페이지일 뿐이다.
캠퍼스에서 남은 한 학기의 시간을 대부분 혼자 지냈다. 집에서도, 전철에서도, 쉬는 시간에도, 밥을 먹을 때도. 설렘 대신 권태에 잠겨버린 대학 생활은 어느덧 얼른 지나 보내고 싶은 로딩 화면이 되어버렸다.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몇 년 사이 스마트폰의 화면은 더욱 커졌고 화질은 선명해졌다.
대신 현실은 보잘것없어지고 감각은 흐릿해졌다.
미니멀리즘
우리는 정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빛보다 빠른 것은 생각이라고 하거나, 마음은 무한하달지. 근데 가만 생각해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 정신은 우리의 작은 뇌에서 일어나는 전기적, 화학적 신호이기 때문에 정신 또한 물리 법칙을 따른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뇌는 대략 2,500 테라바이트의 용량을 가진다고 하는데, 그 말을 들었을 때 생각보다 작구나 싶었다. 뇌가 그렇게 작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나니 조금 조급해진다. 머릿속에 들어오는 정보를 좀 더 엄선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능하면 좋은 걸 보고, 내 기준에서 좋아하는 것들을 넣기로 한다. 지저분한 인스타그램 댓글이나 뉴스 댓글로 소중한 뇌 공간을 낭비할 여력은 없다.
개발자들이 격언처럼 여기는 말이 있다. "GARBAGE IN, GARBAGE OUT." 말 그대로 쓰레기가 들어오면 쓰레기가 나온다는 뜻인데, 질이 낮은 정보가 들어가면 출력되는 결과물도 부정확함을 의미한다. 너무도 당연한 이치다. 머릿속 구조도 비슷한 것 같다. 우리의 뇌는 말하자면 믹서기같은 존재다. 넣은 것은 틀림없이 갈려 나온다. 생각으로든, 말로든, 글로든, 음악으로든, 비디오로든. 그러니까 되도록 좋은 걸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적어도,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만은.
항아리 게임
항아리 게임이란 게 있다. 캐릭터를 움직여서 산 정상으로 옮겨놓으면 되는 게임인데, 재미의 여부를 떠나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했다. 결국 수많은 사람이 흥미를 잃고 도전을 포기했는데, 그 이유가 이 게임에는 세이빙 포인트가 없기 때문이다. 즉 단계별 저장 기능이 없어서 중간에 실패하면 곧바로 밑바닥으로 떨어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한 번의 실수로 지금까지 쌓은 모든 공이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인생 역시 똑같다. 세이브 기능이 없는 게임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록해야만 한다. 기록하지 않는 인생은 항아리 게임과 같다. 성공한 기억, 실패한 기억, 당시 나의 선택과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 머릿속의 아이디어, 모든 성과와 교훈은 기록하지 않으면 금방 휘발되어서 사라지고 만다. 아무리 가슴 아픈 교훈일지라도, 기록하지 않으면 결국 다시 쌓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유튜브는 내게 마치 세이브 포인트와 같다. 모든 성공과 실패가, 즐거움과 슬픔이, 경험과 교훈이 휘발되지 않도록 기록하고 남겨두는 게임의 세이브 기능처럼.
낯선 사막에서 길을 잃어 헤맨다고 가정했을 때, 긴 시간 걷고 걸으며 길을 찾는 일은 꽤 힘든 과정이 될 것이다. 심지어 돌고 돌아 지나왔던 지점에 다시 돌아올 수도 있을테고, 보이지 않는 목적지에 지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나가는 길목의 포인트를 횃불로 표시하면 어떨까? 어디로 걸어야 할지 모르는 건 똑같지만, 내가 표시한 횃불을 토대로, 어느 곳으로 가야 왔던 길을 돌아가지 않을 수 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개척한 길의 그 끝이 어디로 향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어디론가 갈 수는 있을 것이다. 시작했던 지점에서 먼 곳으로. 그리고 어쩌면 그건 발전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10,000일
대한민국 국민의 평균 수명은 83년이라고 한다. 그걸 날짜로 바꾸면 30,300일쯤 될 것이다.
나는 오늘로 10,000일을 살았다. 인생이 3부작이라면 나는 오늘로써 1부의 끝을 맺는다. "보람찬 삶이었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던 거 같다. 경험보다는 이론을 중시하며 대부분을 책상에서 보냈다. 참 부질없는 시간이라 생각했다.
어른이 되고 싶었다. 재미없는 공부를 안 해도 되는,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운전도 할 줄 아는 그런 어른이 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진짜 어른이 되고 나니까, 어른은 공부 안 하고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운전하는 그 이상의 것이 존재했다. 월세를 내고, 세금을 내고, 책임을 지는 것. 삶을 혼자서 지탱하는 것.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책상에서 보낸 시간을 비로소 납득한다. 그건 배우는 과정이었던 거다. 그런 재미 없는 과정이 없었다면, 오늘의 난 더 형편없이 깨졌을지도 모르겠다.
비를 맞자
비가 오면 세상이 느려진다. 마음속으로 늦게 온 만원 버스를 질책한다. 평소에 30분이면 도착하는 귀갓길이 한 시간을 넘긴다. 빗물이 고인 웅덩이에, 옆자리 승객의 우산에, 아직 가시지 않은 더위 때문에, 온몸이 땀에 젖어서 빨리 집에 도착하기만을 바란다. 사람들의 젖은 신발이 버스 바닥을 스칠 때마다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나는 비 오는 날을 좋아했다. 모든 것이 느려져서 더 좋다고 했다. 선명해진 도시의 풍경과 냄새를 사랑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그저 팔자 좋은 무직자의 쓸모없는 낭만에 불과했던가. 당장의 불편에 또 하나 좋아하는 것이 사라진다.
나는 못 참고 만원 버스에서 내려서 집 방향으로 걷는다. 두근거리는 가슴이 조금씩 진정되고,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빨리 도착하고 싶다는 마음을 내려놓고, 풍경에 집중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거기 그대로 있다. 선명한 나뭇잎 색깔, 젖은 도로에 반사된 도시 불빛, 우산에 닿는 빗소리. 집에 가는 길은 이내 두 시간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마음은 편안하다.
확실한 사실 덕분이다. 결국에는 도착한다는 것.
나를 찾아 줘
불과 몇 년 전인데, 벌써 한 세월이 지난 것만 같다.
한정판 신발이 인기 있었던 때가 있었다. 신제품이 나오면 전 국민이 사돈의 팔촌 아이디까지 빌려서 응모하곤 했다. 줄을 서서 신발을 사고, 또 자랑스레 신었던 그때. 웃돈까지 주고선 비싼 신발을 사서 신었는데, 전철에서 같은 신발을 신은 사람을 수도 없이 마주치기도 했던 씁쓸한 추억도 함께 생각난다.
우리는 특별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 특별함에는 정답이 있는 것 같다. 좋은 신발, 좋은 옷, 좋은 차. 그 외의 것들에는 좀처럼 눈길을 주지 않는다. 마치 1월 1일의 해돋이만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다른 날들의 해돋이는 주목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것처럼.
1월 1일은 특별한 하루지만, 진짜 재밌는 일들은 나머지 날들에서 더 많이 일어난다는 것을 잊지 말기.
영감 inspiration
취향 찾기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취향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나 자신을 즐겁게 할 수 있고, 즐겁게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또 사람들과의 소통과 교류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한데, 그 이유는 내가 한 명의 큐레이터이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소비해서 뇌에 쌓고, 그것을 나만의 시선과 생각을 통해 엄선하고 가공해서 세상에 내보내는 것이 창작이니까.
나의 취향이 뚜렷하고 흥미롭고 매력적일수록, 사람들은 내가 만들어 내는 것에 집중할 것이다. 고로 나만의 취향은 나의 무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취향을 발견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너무나 많은 곳에서 콘텐츠를 제안하고 있으니까. 유튜브가, 인스타그램이, 스포티파이가, 넷플릭스가 나를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알고리즘을 통해 플랫폼에서 추천해주는 콘텐츠는 물론 재밌고 유익하기도 하지만, 가끔은 내가 수많은 사람들과 같은 것에 열광하고 같은 것에 빠져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조금은 경계가 필요하지 않을까,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것을 보면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고, 비슷한 생각들만 있다면 사회가 발전하기 힘들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모두가 비슷한 생각에 비슷한 창작물만 만들어 낸다면, 재미없으니까!
그렇기에 나는 의식적으로라도 알고리즘 바깥으로 나가려고 한다. 유행하는 것은 일부러 안 보고, 남들이 잘 안 보는 것들에게 더 기회를 주려고 애쓰기도 한다.
가령 이런 거다. 멜론 TOP100도 좋지만, 피치포크에서 다루는 음악도 들어보거나, 박스오피스 1위 영화도 즐기지만, A24에서 만든 영화도 좀 챙겨보거나 하는.
관종에 관하여
가끔씩 내리는 비를 기다리는 농부처럼, 나는 관심과 기회가 내리기를 바라고 있다.
학창시절에는 어쩌다 한 번씩 친구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선생님이, "야, 누구 노래 하나 불러 봐라."하고 말씀하시면, 친구들이 "임승원! 임승원!" 하고 연호해주었다. 나는 괜히 점잔 빼면서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은 마음 반, 친구들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 마음 반, 그러면서도 칭찬받는 걸 즐기는 마음 반으로, 교실 앞으로 나섰다. 그러고 Queen의 We Will Rock You를 불렀다.
어쩌면 나는 락스타가 되는 그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나는 자발적으로 나서지는 않지만 누가 시키면 하는, 그런 수동적인 관종이다.
관심은 비와 같아서, 내리다가도 금방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긴다. 비가 그치면, 어디에 담아두지 않은 빗물은 흘러가서 말라버린다. 그러니까 갑자기 쏟아진 비에 얼떨떨해하다가 가뭄을 대비할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자.
내리는 관심을 버킷에 잘 담아두자.
똑똑한 관종이 되는 것이다.
자연 발화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은, 살아가면서 깨닫게 되는 중요한 교훈 중 하나다.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더 건강한 마음으로 삶을 대할 수 있다.
먼저, 모든 사람의 기대와 욕구는 다르기 때문에, 한 사람의 행동이나 선택이 모두에게 만족감을 줄 수 없다.
예를 들어, 한 사람에게는 맛있는 음식일지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의 선택이나 행동으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는 노력은 헛된 시도일 뿐이다.
또한, 모두를 만족시키려는 노력은 마치 전단지를 돌리면서 관심을 억지로 유도하는 것과 같다. 이런 방식으로 얻어진 관심은 잠시의 것일 뿐, 지속적이지 않다.
반면, 진정한 가치와 품질을 갖춘 것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 예를 들면, 호객행위를 하지 않아도 좋은 향기를 풍기는 빵집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처럼.
아이폰으로 찍다
원의독백 채널을 꾸려가면서 단 하나 후회한 점이 있다면 더 일찍 시작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기다렸다. 좋은 카메라가 마련될 때까지. 시간이 더 많아질 때까지. 할 만한 이야기가 생길 때까지.
언젠가는 완벽하게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는 때가 올 거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많이 달라져 있을 거다. 지금 할 수 있는 생각이 있고, 지금만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니까, 비싼 카메라가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지 말자. 당장 손 내밀면 잡히는 주머니 속의 아이폰으로 찍자.
무언가를 시작하는 데 있어 의지와 열정 외에 더 중요한 건 없다.
시험
시험에 모든 게 달렸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다. 시험밖에 길이 없다고. 시험 말고는 나를 증명할 수 있는 길이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열심히 공부했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서 학교에 갔다. 9시간 동안 내리 수업을 받고, 점심 저녁을 학교에서 먹었다. 야간 자율학습을 했다. 저녁 열 시까지 학교에 있었다. 엄마는 꼬박꼬박 나를 데리러 왔다.
간식 도시락을 손에 들고 독서실에 갔다. 2시간 더 공부했다. 새벽 한 시가 되어서야 집에 왔다. 그걸 3년 동안 반복했다. 모두가 그랬다. 모두가 그러고 있었다.
시험은 마치 꽉 막힌 고속도로 같다. 모두가 같은 시간에 집에서 나와 모두가 비슷한 곳을 향한다. 또, 모두가 비슷한 시간에 퇴근해서 모두가 비슷한 도로에 오른다. 차례를 얌전히 기다리는 사람들로 도로는 꽉 막힌다. 빠져나가는 길이 가끔 나온다. 그러나 아무도 나가려는 차가 없다.
국도로 가면 느리다. 직선이었던 도로가 굽이굽이 멀리멀리 돌아간다. 제한 속도 50을 지킨다. 느린 속도로 가니, 거리의 풍경을 볼 수 있다. 고속도로와 다르게, 가끔 멈출 수도 있다. 가끔씩 멈춰서 허리를 펴는 호사를 누린다. 그렇다고 집에 갈 수 없는 게 아니다. 집에는 어쨌든 착실하게 도착한다. 길은 모두 이어져 있으니까.
그러니까 시험에 낙방했다는 건 실패가 아니다. 그저 국도로 빠져 나와 다른 길을 찾아 나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다.
빠르게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내려와 국도로 천천히 달리는 삶. 남들 출퇴근할 때 좀 더 쉬고, 다들 각자 목적지를 찾아 들어갔을 때 텅 빈 도로를 누리는 삶. 비수기에 간 여행지에서 덜 기다리고 저렴하고 여유롭게 휴가를 즐기는 삶.
그냥 그렇게 살고 싶다는 것뿐.
원의독백 monologue
it is my birthday
까시에로 델 디아블로 한 병을 골라서 계산대로 향한다. 편의점 점원이 바코드를 삑 찍었다. 긴장되는 순간! 카드를 긁자, 잠시 후 기계에서 음성이 흘러나온다. "영수증 필요하세요?" 결제가 되었다! "잠시만요." 내친김에 치즈도 한번 도전해 보기로 한다. 얼른 진열대로 향한다.
"다른 카드는 없으세요?" 이번에는 좌절. 다행히 그러나 간신히, 와인을 살 만큼 통장 잔액이 남아있었던 거다. 못내 아쉬운 마음에 망설이다가 핸드폰 소액 결제로 치즈를 사기로 한다.
저녁밥은 2,500원짜리 탄수화물 폭탄 학식 식단으로 때울지언정, 혼자 마실 와인에 2만 원을 기꺼이 지출한 이유는 오늘이 내 생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매해 생일에 와인을 한 병 사서 혼자 마신다.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 한 번도 거르지 않았던 그 전통을 올해도 이었다.
별 이유는 없다. 영화 주인공들을 따라 하고 싶었나 보다. 나는 그런 걸 참 좋아한다. 프렌즈 주인공들은 뭔가를 기념할 때 와인잔을 기울였다. 어른이 되면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처음 맛본 위스키에서 매실차 맛이 나지 않아서 몹시 놀랐던 것처럼, 처음 마신 와인에서는 포도 주스 맛이 나지 않아서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7년, 해마다 그 미숙한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지금 와인 맛을 더 잘 알게 된 건 아니지만(나는 사실 아직도 포도 주스를 더 좋아한다), 그러나 왜들 그리 사치에 맛을 들이는지는 점점 알 것 같다. 사치는 낭만이다. 생존에는 전혀 상관없는 것에 비싼 돈과 시간을 들이며, 스쳐 지나가는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거다. 내가 일 년 중 다른 날과 다르지 않은 날을, 생일이라는 이유로 와인 칠을 하는 것처럼.
와인잔을 손에 드는 순간, 나의 삶은 프렌즈의 한 장면이 된다. 나는 치열하게 살면서 내가 원하는 일을 찾아 헤매는 대도시의 젊은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일과 사랑이 운명처럼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확신한다. 프렌즈 주인공들이 각자 사랑하는 사람을 찾은 것처럼, 나도 언젠가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일과 사람을 찾을 거라고. 나는 지금 그 과정을 착실히 그리고 극적으로 걷고 있는 거다. 허름한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소중하다.
알바비가 언제 들어올지 전전긍긍하고, 알바 때문에 학교 수업을 빠지고, 핸드폰 소액 결제로 식비를 충당하는 신세. 그러나 내가 출연하는 드라마에서 이건 없어서는 안 될 순간이 될 거다. 클라이막스를 더 극적으로 표현되도록 돕는 가련한 주인공의 화려한 역경이 될 거다. 그 순간이 전 재산을 털어서 산 와인으로 촉촉히 적셔지고 있다.
"아, 얼마나 가련하고 기특한가. 그는 그의 인생에 곧 다가올 부귀영화를 눈치조차 채지 못한 채 궁상을 떨어 재꼈다."
머릿속에서는 제멋대로 나레이션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오늘 와인에 취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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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