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겨울 사라질 너에게
 
지은이 : 이누준 (지은이), 김진환 (옮긴이)
출판사 : 리드리드출판
출판일 : 2025년 01월




  • 일과 가정에서의 압박 속에서 점점 무기력해져 가고, 우울한 일기만을 써가며 삶의 의미를 잃어가던 사회 초년생 나쓰미가 운명적인 남자와 만난 후 삶이 바뀌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겨울이라는 배경을 통해, 죽음과 삶, 사랑과 상실을 탐구하며, 그 안에서 사람의 내면적 성장과 진정한 사랑을 그려냅니다.


    이 겨울 사라질 너에게


    24살 / 오늘 밤, 내가 사라진다

    B5 사이즈의 노트를 일기장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다.


    그때 이후로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일기를 적었고 사회인이 된 뒤로는 제대로 된 일기장을 사용했다. 전부 20권 정도가 된 내 역사의 기록이다.


    올해 들어 적은 일기를 대충 넘겨 보았다.


    5월 24일 금요일

    또 미카 팀장에게 혼났다.

    회의실을 잡아두라고는 했는데 제1회의실이란 말은 못 들었다.

    애초에 제2회의실만 예약이 가능했다.

    그런데도 다짜고짜 화를 냈다. 슬프다.


    8월 19일 월요일

    감기가 나아서 오늘부터 출근했다.

    하지만 미카 팀장은 “아주 푹 쉬다 와서 좋겠네?”라며 비아냥거렸다.

    여름휴가가 끝나자마자 앓아누운 나에게도 잘못은 있지만, 꼭 그렇게 못된 말을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11월 20일 수요일

    리카가 나를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왠지 날 깔보는 듯한 기분이 들지만 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아아, 오늘도 위장이 아프다.

    다들 빛 속에서 살고 있는데 나만 그 그림자 속에 있는 것 같다.

    어두운 곳에 머무는 나 같은 건 아무도 바라봐주지 않는다.

    그 빛이 너무 눈부셔 난 그곳을 바라볼 수도 없다.


    전부 어두운 내용뿐이다.


    이런 식이면 자식들에게 못 읽어줄 것 같다. 밝은 주제를 써보려고 해도, 좋은 내용은 내 일상에서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시계를 보니 9시가 넘었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는 내 주위에만 조명이 켜져 있어 마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 같다.


    100엔샵용 대량 생산 연필 발주서를 작성하느라 하루를 다 보냈다. 게다가 원가 계산이나 업자 선정, 납기일을 확정하는 업무라 최대한 가격을 낮춘 상품에 내 아이디어가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었다.


    그보다도 지금은 빨리 돌아가서 잠이나 자야지. 그런 생각으로 의자에서 일어난 순간이었다.


    무언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사무실이 크게 흔들렸다. 이어서 유리 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유리창 너머로 잿빛 연기가 피어올랐다. 누군가 밖에서 소리치는 목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더 짙어진 연기가 스멀스멀 일렁거리며 자욱하게 퍼졌다.


    손으로 주변을 더듬어가며 비상계단 문을 열었다. 그 순간 시커먼 연기가 쏟아져 들어오며 나를 집어삼켰다. 숨이 안 쉬어지며 주저앉으려는 몸을 다리에 힘을 주고 간신히 버텼다.


    층계참까지 올라온 나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머리가 멍하고 몸에 힘이 빠졌다. 이제 글렀어. 난 여기서 죽는 거야.


    그때였다. 흐린 시야 너머에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서 있다는 걸 알아챈 것은....


    희미하게 눈을 뜨자 먼 하늘에서 두 개의 별이 반짝였다. 얼굴을 오른쪽으로 돌리자 건물 옥상에 있는지 대각선 건너편으로 보이는 빌딩이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윗옷은 여기저기가 시커멓게 그을리고 왼쪽 팔이 엄청나게 따가웠다. 내려다보니 소매는 거의 타 버리고 그 안으로 드러난 살갗에 커다란 물집이 잡혀 있었다.


    “아파?”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눈앞에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큰 키에 밤을 등지고 서 있는 까닭에 길게 기른 흑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매가 살짝 날카로웠다. 나이는 나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인상이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왠지 모르게 그리운 느낌이 드는 건 나를 저세상으로 데려갈 사람이라서 그런 걸까?


    “네가 구해 준 거야? 저승사자가 왜?”

    “굳이 따지자면 수호신 같은 거야. 뭐, 사소한 설정은 신경 쓸 것 없고.”

    “그런데... 저 빌딩에서 여기까지 날 어떻게 옮긴 거야? 그리고 불길이 엄청나지 않았어?”

    “쓸데없는 걸 다 신경 쓰는 성격인가 보네. 평소에도 그런 식으로 온갖 고민을 끌어안고 사는 거지? 직장에선 말할 것도 없고.”


    지나치게 정확한 지적에 나는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그는 얇은 윗입술로 곡선을 그리며 웃었다.


    “너, 넌 누구야.”


    발끈하는 내게 그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손가락으로 조작했다. 처음 보는 기종이고 조금만 힘을 줘도 부러질 것처럼 얇았다.


    그가 손을 내밀어 보여 준 화면에는 아미세 아츠키라고 적혀 있었다.


    “네 인생은 일단 끝났어.”

    “응?”

    “상사한테 혼나기만 하는 일상, 동료가 위로해 주긴 해도 남자한테만 빠져 있고, 신입한테도 무시당하는 기분을 느껴왔잖아? 학생 시절의 절친은 불륜 중인 것 같고, 엄마는 잔소리만 해. 확실히 죽고 싶긴 하겠지.”


    아츠키는 내 마음을 안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오늘부터 새로 태어나는 거야.”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넌 올겨울에 죽을 운명이었어. 그걸 피했으니까 새로운 인생이 기다리고 있겠지.”


    하얗게 반짝이는 달은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다. 환상적인 광경 속에서 아츠키는 스읍, 숨을 들이마셨다.


    “이번 죽음을 피했다고 해도 그건 집행유예 같은 거야.”

    “집행유예?”

    “6년 뒤인 12월 15일이 기한이야. 그때까지 운명은 수도 없이 네게 죽음을 부여할 거야. 그걸 네 힘으로 극복해 내면 넌 어엿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어.”

    “그렇게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마주한다고? 저, 저기... 그게 언제부터인데?”

    “언제 찾아올지... 지금으로선 말할 수 없어. 네가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하루하루를 착실히 살아가면 알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이제부턴 명확한 자기 주관을 갖고 살아야 해.”

    “전혀 이해가 안 돼.”


    고개를 젓는 나를 보는 아츠키의 눈동자가 왠지 모르게 슬퍼 보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넌 올겨울에 죽을 운명이었어. 겨우 살아남더라도 얼굴에 화상을 입어 다시는 웃을 수 없게 됐을 거야.”


    비현실적인 대화를 어떻게든 따라가려 했지만 내 머릿속엔 계속 의문부호가 꼬리를 물었다.


    “내가 널 구하면서 운명은 바뀌었어. 왼팔에 가벼운 화상만으로 끝난 것도 그 덕분이고.”


    아츠키의 말에 왼팔을 보니 그동안 잊고 있던 통증이 다시 돌아왔다. 아츠키가 내 팔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화상은 금세 나을 테지만 흉터는 남을 거야. 하지만 원래 짊어져야 했던 운명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지. 자, 봐. 나도....”


    아츠키는 오른손등을 보여 주었다. 그곳에는 나와 마찬가지로 화상으로 생긴 물집이 여러 개 나 있었다. 나 때문에 아츠키까지 다치다니.


    “미안해.”

    “괜찮아. 그 대신 약속해 줘. 오늘 밤부터 새로 태어나기로 맹세하는 거야.”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며 아츠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네 인생은 지금 막 시작된 거야. 12월에 또 만나러 올게.”


    그렇게 말한 아츠키는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눈 깜빡할 사이에 마치 공기 속에 녹아 버리듯이.



    * *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