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권학봉이 동남아에서 자동차로 무계획 여행을 하며 겪은 이야기로, 예기치 않은 사건들과 도전 속에서도 현지인들과의 소통과 자연을 통해 진정한 여행의 의미를 깨닫게 해줍니다.
동남아의 길 위에서
동남아 무계획 여행 1주 차
여행이란 무엇인가
사실 여행이라는 건 관광과는 다르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하면 언짢을 사람이 많아서 토를 달자면 최소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두자. 이 2가지를 구분하기 위해 우선 관광부터 말해보자. 관광이란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장소 혹은 일반적인 다수가 좋아하는 장소를 둘러보는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에 수반되는 먹고 자고 등의 문제는 각자의 취향이나 개성에 따라서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는 그런 둘러보기가 관광의 핵심 정의가 아닐까 한다. 단어 그대로 볼 관(觀)에 빛 광(光)자를 쓰니 말이다.
그렇다면 여행이란 무엇인가. 여행이란 앞서 말한 관광을 뺀 나머지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목적지에서 무엇을 볼 것인지에 방점을 두면 관광이고, 집을 떠나 멀리서 휴식이나 여가를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현지의 문화나 풍습, 혹은 문물 따위를 경험하는 것이 여행이다.
여행을 떠나기로 했으므로 우리는 볼거리에 초점을 두지 않고,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거쳐 한 바퀴 돌아보는 식으로만 계획을 짰다. 나머지는 그때그때 마음 내키는 대로 둘러보면 되니까. 대신 현지의 문화를 체험하기 위해 40대 아저씨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했다.
술집에 앉아 현지의 술을 홀짝거리면서 쓸데없는 농담이나 주고받는 그런 시간 말이다. 사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값진 경험은 느긋하게 한잔하면서 동남아를 둘러보았다는 것이다. 훌륭한 인테리어로 꾸민 럭셔리한 곳부터 간판도 없는 허름한 곳까지. 사실 술을 마시면 크게 다르지 않다. 어디에도 그 나름의 분위기가 있었다.
야시장
태국도 다른 동남아 국가들처럼 야시장이 발달했다. 낮에는 일해야 한다는 것도 이유지만, 40도가 넘는 날씨 탓이 크다. 특히 지자체가 발 벗고 나서서 만든 것이 관광객을 위한 야시장이다. 처음에는 외국인을 위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여행을 좋아하는 태국인도 상당히 많이 온다. 태국에 놀러 와서 이 광경을 본다면 상당히 신나는 나라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살아보면 태국만큼 할 게 없는 나라도 없다. 낚시나 자전거, 등산 같은 혼자서 놀 수 있는 취미라면 몰라도 축구, 탁구, 족구처럼 -여기에선 세팍타크로라고 불리지만- 함께 하는 여가 활동은 드물다.
날씨도 덥고 비도 자주 오기 때문에, 태국인의 삶은 놀랍도록 단순한 일과의 반복이다. 가장 널리 퍼진 취미생활이 정원 가꾸기다. 해당 분야 잡지도 많이 발행되고, TV에서도 굉장히 비중 있게 다루는 인기 프로그램이다. 뒤뜰이나 앞마당을 예쁘게 꾸미는 것이, 어쩌면 태국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취미활동인지도 모르겠다.
사계절도 없어서 눈보라를 뚫고 출근한다거나, 발목까지 잠기는 물바다를 건너 집에 돌아오는 스펙터클한 장면도 없다. 물론 홍수가 자주 발생하는 지역은 있지만, 매년 비슷한 시기에 찾아오는 철새처럼 일상적인 일이라 예외로 친다. 때가 되면 해가 뜨고, 때가 되면 비가 오고, 때가 되면 개미떼가 하늘을 덮는다.
인터넷을 이용한 스마트 시계처럼 정확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괘종시계 정도는 된다. 가끔 시계태엽을 감아 놓지 않을 때도 있지만 금세 알아차리고 일상의 루틴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그런지 모든 도시의 관광용 야시장은 똑같은 음식, 똑같은 공연, 똑같은 맥주를 판다. 20년 전에도 그랬고, 10년 전에도 그랬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다만 공연 레퍼토리에 한복을 입고, 부채춤을 추는 코너가 추가되었다. 이럴 때면 한국인으로서 묘한 느낌을 받는다. 물론 공연하는 출연자 모두가 여장남자 즉 꺼터이라는 사실은 알 만한 사람은 모두 다 알 것이다. 한국 같으면 뉴스가 되고 100분 토론이 열려도 이상할 게 없지만, 태국은 모든 게 일상처럼 당연하고 순조롭게 흘러간다.
축제의 현장
무앙씽은 주변 소수민족들이 사는 마을의 중심지다. 그렇다고 대단한 뭔가가 있는 건 아니지만 여관도 있고, 가게들도 많다. 아무튼 이 지역에서 가장 인구수가 많은 소수민족, 즉 여기에서는 다수인 아카 족이 있다. 태국부터 해서 라오스, 베트남, 중국 남부에 걸쳐 많이 살고 있는데, 보통 해발 1,000m 이상에서 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선 고산족이라고 부른다. 중국에서는 하니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작은 동네에 우리가 도착했을 때 좀 저렴한 숙소는 이미 만실이었고, 비싼 중국식 여관에만 방이 있었다. 우리가 몰랐던 축제가 있었던 것이다. 동네 공터에 천막을 둘러 벽을 치고 입장료를 받는 공연이었다. 이 동네에서 돈을 주고 공연을 본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대단한 일이라서 반경 20km 내 모든 주민이 다 모인 듯했다. 미리 초대권을 받아서 들어가는 사람들도 많았고, 느긋하게 주전부리를 먹으면서 기다리거나 이미 거하게 비어라오 한 박스 정도는 비운 이들도 많았다. 동네 경제사정을 고려한다면 그리 만만한 금액은 아니었기에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면서 천막을 들춰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뜨내기인 우린 웬 떡인가 하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지만, 사실 그리 대단한 공연은 아니었다. 이미 BTS와 뉴진스처럼 잘 기획된 세계 시장의 리더를 보아온 국민이라 그럴지도 모른다. 공연이라고 해도 동네를 대표하는 아카족 소녀들이 전통복장을 하고 전통춤을 선보이는 정도니까 말이다. 하지만 소박하고 글로벌하지 않아서 더 특별했다.
아카족은 언제쯤 빌보드를 점령할 수 있을까? 세계정복은 힘들어 보여도 무앙씽은 충분히 정복한 듯했다. 온갖 도박꾼들부터 잡상인과 노점상들이 적어도 백여 미터는 늘어서 있었고, 무엇보다 온몸을 던져서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풍선 터뜨리기에 실패해서 그런지 멋쩍은 웃음을 짓는 젊은 남편 옆에 진심으로 빡친 새댁의 "내가 그럴 줄 알았어"라는 말이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들리는 것 같았다. 이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는 젊은 남자들은 오리 잡기에 열을 올린다. 링을 던져서 오리목에 걸면 그 오리를 상품으로 가져가는 아주 단순한 게임이다. 하지만 살아있는 오리가 순순히 링을 목에 걸어줄 리 없다. 특히 조류는 동체시력이 엄청나서 웬만해서는 차에도 치이지 않는다. 소나 염소 혹은 개나 고양이도 차에 많이 치이는 것을 생각하면 뛰어난 능력이 아닐 수 없다.
동남아 무계획 여행 2주 차
동남아 요리
야시장은 태국이나 라오스나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하다. 중앙의 무대를 중심으로 나열된 테이블과 주변을 둘러싼 가판대가 있다. 익숙한 풍경이지만 다른 점은 그 도시가 얼마나 관광지인가에 따라 외국인의 비율이 다르다. 루앙프라방은 언제나 멋진 관광도시지만 시즌도 아닌 3월 중순에 이렇게 외국인이 많은 건 편리해진 고속철도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열대 기운이 샘솟는 동남아시아 음식을 맛보는 건 참 큰 즐거움이다. 나도 그랬고 씀땀(라오스 말로는 땀마꿍)이나 쌀국수, 똠얌꿍 같은 것들이 유명하다. 중국에는 없고 한국에만 있는 짜장면처럼 프랑 스의 영향을 받아 변형된 라오스 요리들도 있다. 그러나 살아보면 역시 한국 음식만 한 게 없다. 일단 물리지 않는다. 쌀국수를 정말 좋아해서 거의 세 달을 연속으로 먹은 적이 있는데, 평생 먹을 쌀국수를 다 먹은 것 같다. 이제 다시는 내 의지로 쌀국수를 먹지 않는다. 다른 음식들도 하나씩 물리면서 이제 남은 게 없다.
특히 코로나 때 타격이 컸다. 못해도 일 년에 두세 번 정도는 한국에서 전시도 해야 하고, 책도 나오고 해서 들어가기 때문에 한식에 대한 향수는 별로 없었다. 그랬는데 코로나 때 비행기 타는 것도 고생이고 호텔에서 2주 격리 후 한국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국으로 돌아와서도 2주를 격리해야 하는 일정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대략 2년 좀 넘게 태국 음식만 먹었더니 평생 먹을 동남아 음식은 다 먹은 듯하다.
그렇다고 보통 한국 사람들이 고생하는 팍치를 못 먹는 그런 건 아니고, 막상 한 끼 때운다면 어떤 것도 마다하지는 않는다. 다만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누가 뭐래도 한식이 우선이다. 사람은 누구나 어릴 적부터 먹어오던 음식에 대한 향수가 있고, 20살이 넘어가면 바뀌지 않는다.
마치 음악적 취향과 같다. 15살에서 25살 사이에 들었던 음악이 평생 가는 것처럼 말이다. 보통 25살이 넘어가면 새로운 음악을 들어도 깊이 매료되지는 않는다. 한국에서는 노래방과 최신곡이라는 압박에 떠밀려 가는 건 좀 있지만. 그것처럼 음식의 종류에 상관없이 어릴 때부터 20대가 될 때까지 먹었던 음식은 그 사람의 평생을 지배하는 것 같다. 루앙프라방은 한식당이 많다. 멋진 도시다.
길가에서 만나는 사람들
라오스의 자연은 대단하다. 뒷산이 설악산 같고, 앞산이 마이산 같은 그런 동네다. 구석구석 눈부시게 아름다운 자연을 품고 있지만 실제로 가보면 비포장도로에 날리는 먼지 때문에 그런 낭만적인 생각은 쏙 들어가고 없다.
큰 고개 하나를 넘는데 꼭대기에 휴게소가 차려져 있고, 제대로 된 커피숍도 있었다. 예전엔 집에 가려면 문경새재를 넘어야 했는데, 버스가 항상 꼭대기에 있는 휴게소에서 정차했던 기억이 소환되는 곳이다. 미니버스를 개조한 캠핑카에 북경 근처 넘버를 달고 있는 중국인 가족들은 분주하게 뭔가를 볶고 튀기고 삶아대고 있었다.
서양 아저씨들로 구성된 팀은 BMW의 R1250 GS를 타고 무리 지어 올라왔다. 아마 방콕이나 비엔티안에서 출발해 오토바이 투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모델의 오토바이만 보면 나는 이완 맥그리거의 다큐멘터리 롱 웨이 다운이 생각나는데, 이렇게 떼로 라오스 산골에서 보니 묘한 기분이다.
사실 오토바이를 타고 먼 길을 다니면 생각보다 정말 많이 힘들다. 굉장히 불편하고 내릴 때 엉덩이 근육에 쥐가 나서 바닥을 구르기도 한다. 인도에서 로얄 엔필드를 빌려 며칠 타고 다녔는데 시작은 늘 상쾌하고 자유롭다. 하지만 마지막은 언제나 곡소리를 내면서 취침한다. 가끔 인도 꼬마들이 달리는 나를 항해 돌을 던지며 괴롭히기도 했다.
우리는 토요타 포추너를 타고 다녔는데 GS를 탄 팀을 보니 왠지 샌님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디 가나 졸라 부러운 놈들은 있기 마련이다. 아마 못해도 두 놈은 모랫길에서 자빠질 것이다. 그렇게 길을 지나오는데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다. 이건 동네잔치다. 해가 떨어지고도 운전하기는 싫었지만 그래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않나. 마을 공터에 천막을 치고 무슨 노래자랑인지 행사가 한창이었고, 원두막에 올라서 비어라오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어르신들도 있었다. 사진을 촬영해 달라고 따라다니는 꼬꼬마 숙녀들도 있었는데, 프로페셔널 모델인 게 분명하다. 일은 가능한 한 짧고 쉽게 끝내려고 하고, 출연료 챙기기는 빼먹지 않으니까 말이다.
마지막으로 라오스를 방문했을 때는 중국 고속철도 공사가 한창이던 도로였다. 이번에 다시 와보니 고속철도는 완공되어 중국 쿤밍에서 비엔티안까지 연결되었다고 한다. 동남아시아, 아니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빈국인 라오스에서는 중국의 욕심이야 둘째치고라도 이런 달콤한 제안을 쉽게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다.
비엔티안에서 태국 방콕까지는 차로 약 9, 10시간 거리니까 고속철이면 4, 5시간쯤인 듯한데, 태국은 아직도 애매모호한 태도로 공사를 시작하지도 않았다. 예전 중국계 경찰 출신이었던 탁신이 정권을 잡았을 때 라오스와 마찬가지로 강력하게 추진했었다. 쿠데타로 드러난 지나친 가족 및 인맥 중심 통치와 탈세 혐의가 확정되어 세계를 떠돌다 얼마 전에야 태국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중국의 꿈이었던 싱가포르까지 연결된 고속 철도망은 태국에서 사라진 것이다. 태국이야 크게 아쉬울 게 없겠지만 라오스는 바다도 없고, 경제적으로는 중국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에 실리를 따져보면 고속철을 깔지 않을 수 없었을 거다. 라오스가 멍청해서 중국의 속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불나방처럼 덤빈 건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래서 그런지 중국인에 대한 애증의 시선이 느껴졌다. 문화는 태국, 경제는 중국인데 둘 사이에서 외줄 타기 하는 모습이 어쩐지 낮설지 않다.
동남아 무계획 여행 3주 차
천국행 저금통장
태국 하면 불교고, 94%에 달하는 불자들이 사는 나라다. 우리와는 다르게 소승불교다. 소승불교는 원래 테라바다라고 하는 상좌부 불교인데, 족보를 따지면 대승불교보다 선배이자 정통파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현재의 태국 불교가 정통적인 색깔을 잘 유지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원래 북부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아소카 대왕 시절 완전한 전성기를 누렸다. 이때가 대략 기원전 230년 정도인데 태국에 전파된 시절은 8세기경이었으니까 시간적 차이는 엄청나다. 더불어 최초로 들어온 것은 대승이었으나 이후 미얀마와의 전쟁 패배 등의 영향으로 11세기에는 완전한 상좌부로 갈아탄 것이 지금까지 내려온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나는 도올 김용옥의 EBS 불교 강의를 본 후 큰 충격에 빠졌다. 불교 하면 원래 고리타분하고 식상한, 뭔가 무속과 종교의 중간쯤 되는 그런 느낌이었는데, 도올의 강의로 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원래 철학에 가까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2500년 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통찰을 통한 혁명적인 깨달음이었다.
그 후로 불교 이론을 다루는 책을 많이 읽으며 한동안 푹 빠졌었다. 그중 독보적으로 훌륭한 한 권을 뽑자면 이화여대 한자경 교수가 쓴 《불교철학과 현대 윤리의 만남》이라는 책이다. 많지 않은 분량으로 거의 완벽하게 불교 이론을 분석해 놓았다. 이대 앞 술집은 많이 가봤지만, 심지어 근처에 꽤 오래 살기도 했지만 학교에는 들어가 보지 않았다. 한자경 교수의 사인이라도 꼭 받고 싶다.
대승경전보다는 훨씬 더 원시불교에 가까운 태국의 상좌부 불교에 많이 기대한 것도 사실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망을 금치 못했다. 물론 대중 종교로서 어느 정도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도그마를 가져야 하는 것 정도는 이해하지만, 현대의 태국 불교는 생각보다 많이 망가져 있다. 한국 불교계 문제를 볼 때마다 썩어도 이렇게 썩을 수가 있나 싶어 한탄이 나오는데, 태국도 만만치가 않다.
태국 불교에서도 기복 신앙의 단순명쾌한 논리, 그리고 태국의 무속신앙과 결합한 여러 가지 독특한 논리 전개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중에서 현대의 태국 불교를 한마디로 관통하는 말은 탐분이라는 단어다. 직역하면 덕을 쌓는다는 말이다.
내가 절에 가서 얼마를 부조하면 내 탐분 통장에 그만큼 저금이 된다는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90% 정확하게 이해한 거다. 그래서 좋은 일을 할 때도 탐분이라 생각하고, 거지에게 동냥할 때도, 일시적으로 출가해 시간과 돈을 바칠 때도 모두 차곡차곡 통장에 쌓인다는 말이다. 태국인들은 이 탐분에 병적으로 집착한다.
태국의 전통 무속신앙과 결합해 다양한 사업을 벌이기도 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프라라고 하는 몸에 지니고 다니는 부적이다. 기도빨이 잘 먹히는 스님이 만든 부적이라면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까지도 호가한다. 총알을 막아주는 방탄 기능부터 어떤 교통사고에서도 살아남는 부적, 애인이 바람을 피우지 않는 부적, 돈 많은 늙은 영감이 일찍 죽는 부적까지 각종 신통함으로 무장되어 있다. 아무튼 고가의 제품을 카피한 짝퉁이 판치고, 그것을 감정하는 감정사와 각종 사기꾼까지 불교에서 말하는 아비규환이 따로 없다.
그런 전쟁 같은 상황 속에서 여러 가지 분파로 또 나뉘는데, 일부 분파는 전 재산을 탐분하고 절에서 합숙하는 등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빠툼타니에 있는 탐마까이라는 종파가 그런데, 경찰이 몇 번 털기도 하고 사회적인 압박도 있지만 아직도 여전히 성업 중이다.
탐마까이의 부자가 되는 기도가 특히 효험 있다고 알려져 많은 사업가나 재력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는 소문이다. 이런 태국 불교의 문제점을 재미있게 잘 파고든 작품이 넷플릭스에 있다. 제목
이 싸투인데, 한국말로는 우리는 믿습니다로 번역되었다. 싸투는 기도 끝에 붙이는 아멘 같은 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젊은 코인 개발자들이 망해서 빚을 지는데, 이를 갚을 생각으로 사찰을 경영해서 돈을 버는 이야기이다. 많은 에피소드가 현재 태국 불교의 문제점을 유쾌하게 때로는 잔혹하게 묘사하고 있다. 보려면 1편은 대충 빨리 넘기는 편이 좋다. 코인 개발하다 망한 이야기를 쓸데없이 장황하게 끌고 간다.
그래도 여전히 진흙밭에서도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 같은 스님들도 있어 태국 불교는 삐거덕 대면서도 잘 굴러가고 있다.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사람이 여럿 모이면 나쁜 놈도 있고, 좋은 놈도 있으며, 가끔 천재가 튀어나오기도 한다. 싯다르타가 깨달은 해탈의 핵심적인 이론은 나라고 하는 자아, 즉 자의식이 근거 없는 허상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여러 가지 유혹과 게으름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지속적인 깨달음 상태를 유지하는 수행에 방점을 둔 종교가 불교다. 불교에서는 초현실적인 존재 즉 천국이나 지옥, 천사나 악마 같은 것들은 다루지 않는다. 대중적인 불교로 변모하면서 싯다르타 사후에 추가된 여러 판타지가 섞여 있을 뿐이다. 오해할까 봐 말하지만 나는 불교 신자는 아니다. 나는 종교가 없다.
동남아 무계획 여행 4주 차
마지막 세금
수코타이에서 람빵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고속도로에서 과속딱지를 받았다. 과속한 건 사실이지만 여러 가지 미스터리한 포인트가 있다. 운전해 본 사람이라면 다들 알다시피 운전 중 가장 주의해서 확인하는 게 바로 단속 카메라인데, 본 적이 없다.
태국은 속도 단속 카메라가 있는 지점이 있고, 앞으로 몇십 킬로미터 더 가서 카메라에 촬영된 번호를 보고 돈을 내는 방식이다. 즉, 속도위반한 곳에선 사진만 촬영하고, 한참 더 가면 난데없이 검문하는 장소가 나타난다. 여기서 사진 정보를 받은 경찰이 넘버를 확인한 후 옆으로 차를 빼는 식으로 단속한다.
또 하나 신기한 건 잡혀있던 사람들이 다 한국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다들 태국 운전면허증을 가지고 있는 걸로 봐서 교민이거나 오래 거주한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다. 한국 사람들은 도로를 보면 달리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민족이거나 아니면 한국 사람들만 모르는 표시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태국 사람들은 다 아는데, 한국 사람만 모르는 카메라 위치 같은 사인을 만들어 둔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교통량이 이렇게 적은 북부의 한적한 고속도로에서 한국인만 줄줄이 굴비처럼 낚여 올라오는 건 이해하기 힘든 일이니까 말이다.
물론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그때 딱 그런 현상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경찰들도 서로 보면서 이상하게 오늘은 한국인들만 잡히는 희한한 날이라고 술안주 삼을 만한 그런 사건일 수도 있다. 태국에서는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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